손문의 신해혁명이 위대한 이유
‘혁명의 나라’ 중국을 분석한다 - ⑥

청나라 왕조가 서류상으로 망한 것은 선통제 푸이가 공식 퇴위를 선언한 1912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2차 아편전쟁에 패한 1860년에 이미 망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정확히 표현해서 청나라는 1860년부터 본격적으로 망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본격적으로 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나 ‘망했다’는 것이나 사실상 오십보백보라고 본다.

이는 조선왕조가 공식적으로 망한 것은 1910년이지만, 본격적으로 망하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부터라고 보는 견해와 유사할 터이다. 아무튼 1860년부터 본격적으로 망하기 시작한 중국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뒤 1949년에 이르러서야 새로운 통일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해 냈다. 결국 중국...은 무려 한 세기에 가까운 90년 동안 망국에서 건국으로 이행하는 대혼란을 겪은 것이다. 나는 이 기간을 정의하여 가히 ‘혁명의 시대’라고 하겠다.

1860년 2차에 걸친 아편전쟁의 패전으로 중국에는 서양자본주의가 내륙 깊숙이 침투하여 민중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거듭된 패전으로 청조는 자주권을 거의 잃었고 민중은 만주족 왕조인 청조에 대한 저항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또한 청조는 전쟁 비용과 과도한 배상금 지불을 일반 세금으로 전가시킴으로써 인민들의 불만을 위험 수위로까지 치닫게 만들었다.

과연 90년이나 되는 ‘혁명의 시대’에 중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일단 ‘혁명의 시대’였으니 말 그대로 ‘혁명들’이 발기했을 것 아닌가. 물론 혁명에는 실패한 혁명과 성공한 혁명이 있는데, 실패한 혁명은 혁명이 전개되는 기간에만 혁명일 따름이지, 훗날에까지 혁명이라고 호칭되는 법은 없다.

우리는 ‘태평천국의 난’, ‘의화단의 난’ 그리고 ‘신해혁명’, ‘홍군혁명’ 등의 용어들을 들어 알고 있다. 공자가 말한 정명(正命), 즉 ‘바른 이름 붙이기’를 여기에 적용할 때, 나는 위 이름들 중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신해혁명 하나밖에 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름을 바르게 붙이는 것은 대상을 바로 이해하는 데 아주 요긴한 항목이다. 그래서 나는 위의 것들을 각각 ‘태평천국농민항쟁’, ‘의화단항쟁’ ‘신해혁명’ 그리고 ‘중국혁명’으로 명명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태평천국농민항쟁(1850~1864)은 수백만 민중이 뜻을 모아 14년 동안 중국의 중요 지역을 장악하며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던 항쟁이었다. 그들은 청을 몰아내고 한족민족주의를 구현하고자 했으며,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수호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이 항쟁은 반봉건적인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려 했다는 점이 큰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근대를 지향한 대표적인 농민항쟁으로서 우리의 동학항쟁과 일면 비슷한 성격을 띤다.

의화단 항쟁(1899~1900)은 종교적 이념을 도구로 하여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한 중국인들의 강력한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다. 불행히도 이 항쟁은 근대무기로 무장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과 청조의 배신으로 좌절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분할해서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아울러 청조의 반민중성과 무능력을 폭로함으로써 이후 본격적으로 청조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손문의 신해혁명(1911년)은 성공한 혁명이다. 손문은 1907년~1908년 어간에만 무려 6차례나 무장봉기를 이끌었다. 신해혁명은 원세개의 반혁명에 의해 좌절되는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신해혁명이 중국 현대사에 미친 긍정적 영향은 막대하다. 손문은 지금도 중국과 대만에서 동시에 국부로 추앙된다. 손문은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중화민국이라는 정식 국호를 채택했으며 '민(民)의 공의를 취하고 중(衆)을 위해 복무한다'는 총통선서를 했다.

신해혁명은 제국주의에 의존적이었던 청조를 무너뜨렸다. 마침내 인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최초의 근대적 공화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이는 2,0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전제군주제도가 허물어진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이 혁명은 비록 자본주의계급의 혁명이기는 했지만 손문은 결코 서양식 자본주의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문명은 선과(善果)와 악과(惡果)를 동시에 내는데, 선과를 취하고 악과를 피해야 한다. 구미 각국에서는 선과는 부자들이 다 차지하고 빈민은 악과만 먹었다. 소수가 문명의 행복을 차지하였으므로 이처럼 불평등한 세계가 된 것이다. 우리의 혁명은 국민의 국가를 만들어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국가를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가 만드는 국가는 구미가 절대로 따르지 못하는 국가이다.”[손문(孫文), 1906년 <민보> 창간 1주년 연설 중에서]

이는 손문이 강유위·양계초 같은 계몽개혁주의 대지도자들을 제치고 구국의 혁명가로서 우뚝 설 수 있게 한 비결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에는 구한말과 식민지시대를 통틀어 손문 같은 캐릭터를 가진 지도자가 없었다. 이상설은 왕조부흥을 내세운 복벽주의자였다. 김구는 단순한 민족주의 항쟁가였다. 안창호와 이광수는 미·영을 흠모한 계몽주의자들이었다. 여운형에게는 혁명을 위한 구체적 실천이 없었다. 이승만은 친미주의자, 서재필은 종미주의자였을 따름이다.

나는 신해혁명이 있었기에 얼마 후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오쩌둥의 중국혁명이 가능했다고 본다. 혹자는 김일성의 인민혁명을 마오쩌둥의 중국혁명과 비슷한 성격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것은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북지역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논리이다.

나는 김일성의 인민혁명을 과소평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김일성의 혁명은 사회주의 제국주의 국가였던 소련의 힘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고, 그가 추진한 '조국통일전쟁'은 결과적으로 분단을 고착시켰다. 우리에게는 ‘손문 - 마오쩌둥’과 같은 유용하고 강력한 혁명 세트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의 분단 현실과 남측의 비자주성을 야기한 요인 중 하나인 것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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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5 14:58 2014/02/1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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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운동과 3·1운동, 비슷하지도 않았다
                            ‘혁명의 나라’ 중국을 분석한다 - ⑦

“파리강화회담(1919.2)에서 각국은 모두가 자국의 권리를 중시했다. 공리니 영구평화니, 윌슨의 14개조 선언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한 문장도 가치가 없는 빈 얘기가 되었고...세계영구평화니 인류의 진정한 행복이니 하는 것들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전 세계 인민이 모두 일어나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1919.5 <매주평론>)

위 글은 파리강화회의 두 달 후 중국의 시사평론지 <매주평론>에 실린 논평이다. <매주평론>은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이대교, 진독수가 편집을 맡은 주간지였다.

이대교(李大教)는 중국에 사회주의를 처음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북경대학의 도서관 주임으로 있을 때 마오쩌둥에게... 자리를 주어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이대교가 없었더라면 마오쩌둥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진독수(陳獨秀)는 북경대학 문학부장이었고 중국 공산당의 초대 총서기(1919~1929)를 지낸 이력만으로도 그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진독수는 훗날 모호한 처신으로 마오쩌둥의 환멸을 산다.)

아무튼 두 사람은 중국의 거물급 사회주의자였고 중국혁명에 지대한 영양을 미쳤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인물됨이 아니다. 우리가 한 가지 인정해야 할 것은 사회주의자들일수록 제국주의의 ‘똥속’을 일찍부터 간파하는 안목을 가졌다는 점이다.

아직도 파리‘평화’회의라는 이름으로 치장되고 있는 파리강화회의는 사실 1차대전 전승국들의 나눠먹기 담합에 불과한 것이었다. 여기에 빈궁하기 짝이 없었던 한국의 상해임시정부에서 거금을 들여 특사 김규식을 파견한 것은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차대전 참전국이었던 중국도 서구열강에 배신을 당해 전승국의 대우를 전혀 받지 못했는데, 하물며 식민지 한국의 임시정부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중국의 5·4운동은 1919년 5월 4일 북경의 각급학교 학생 3,000여 명이 천안문 앞에서 집회를 가진 후 시위를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들은 “밖으로는 주권을 쟁취하고 안으로는 매국노를 처단하자”는 구호를 내결었다. 이 운동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운동은 노동자들이 대거 가세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신해혁명 당시에는 산업노동자 수가 50만 명에 불과했는데 5·4운동 시기에는 200만 명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하지만 5·4운동이 갖는 더욱 큰 의미는 중국 사회에 사회주의를 전면 부상시켰다는 점이다. 5·4 이전의 신문화운동이 내건 깃발은 자산계급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였다. 이들은 대체로 서양문명을 동경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똥속’을 간파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5·4운동을 거치면서 중국 사회에는 사회주의의 소개, 연구, 선전이 거스를 수 없는 추세로 형성되었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7월 23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는 한 사립학교 기숙사에서 창당되었다. 이때 참가한 사람은 겨우 13명이었다. 그 중에는 마오쩌둥도 있었다. 당시 공산당 활동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소수가 모여 은밀히 회의를 진행했다. 그나마 집회가 경찰에게 들통이 나 그들은 집회 도중 서류를 싸들고 황급하게 도피해야 했다.

공산당 창당 이후 1922~1923년,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적인 선전활동을 통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활성화시켰다. 그들은 1922년에 처음으로 대외선언을 채택하여 공산당의 존재를 정식으로 대외에 알렸다.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에도 가입하여 국제적인 공산주의 조직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924년 국민당과의 합작(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질 당시에는 공산당이 다져놓은 대중운동의 잠재력이 폭발함으로써 미래의 대혁명을 예고하는 징후를 뚜렷이 드러내었다.

한국의 ‘3·1운동’을 중국의 5·4운동과 대등하게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3·1운동이 5·4운동을 촉발시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은 호사가들의 입담 수준으로 치부한다. 3·1운동의 지도자들에게는 5·4운동의 지도자들이 가진 정교한 이념과 치열한 인식이 부재했다. 3·1운동의 행동강령이었던 ‘공약3장’을 살펴보자.

-.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 生存(생존), 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이니, 오직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히 發表(발표)하라.

-.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여기에는 도덕적 훈시와 비폭력의 당부가 들어 있을 뿐이다. 나는 도덕과 비폭력의 강조에는 지도자를 자처한 33인의 낮은 정세 인식수준과 보신주의가 얼크러져 있다고 본다. 그들이 강조한 비폭력은 8.000명에 달하는 인민을 무모한 죽음으로 내몰았을 뿐이다. 도덕과 비폭력을 강조한 한국의 지도자들은 물론 중국의 지도자들 역시 예외 없이 실패했다. 이홍장,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이 그런 부류였다.

중국은 여전히 제국주의와 군벌주의의 틈바구니에서 낙후한 반식민지 상태였지만 5·4운동을 거치고 난 후 현저히 일신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5·4운동은 자산계급이 영도하는 민주주의혁명 대신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새로운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중국 근·현대사의 자주적인 장(章)이 열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펌]  김갑수 선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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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5 14:48 2014/02/1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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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소통의 달인은 겸손하게 소박한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었다.

 

착각은 자유다. 그런데 착각은 때로 무례할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대하고 사귀다 보면 ‘저건 좀 아니다.’ 싶은 행동이 있다. 물론 어떤 것은 잘 몰라서 저지르는 일도 있고, 학습이 덜 돼서 그리 되는 점도 있다. 하지만 좋은 결과를 유발한 것이라면 왜 굳이 ‘무지’라는 표현을 쓸 것인가.

 

나의 절친 중에서는 밤에 TV를 보다가 ‘혼자 보기 아깝다’ 싶은 프로가 있으면 ‘빨리 채널 00!’하는 식으로 문자를 넣어준다. 바쁜 세상에 많기도 많은 채널을 동시에 다 볼 수는 없는 일이라서 절친이 권해주는 프로그램은 때때로 양질의 정보를 취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그제는 퇴직교사 출신의 한 여성이 네팔여행을 하고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요즘 맛 기행이나 여행프로그램은 하도 흔해빠진 것이라서 ‘여행, 그것도 네팔?’하고 지레 예단부터 했다가 “사람들은 저더러 사교성이 좋다고 하는데, 내가 먼저 다가가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절로 되는 게 있나요?”하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아차’ 싶었다.

 

그 순간 생각 한 가닥이 퍼뜩 떠올랐다. 화면의 주인공은 어디서든 자신이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는’ 실천으로 인해서 낯선 여행지에서조차 사교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그럼 나는 어디에 속할까. 중요한 것을 자주 간과해버리거나, 알면서도 가볍게 흘려버리는 일이 어느 새 나쁜 습관으로 굳어져 타성에 젖은 사람이 아닌지 노파심이 든다. 좋지 않은 습관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면 결국 반듯한 사람은 못 되니까.

 

그러고 보니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럽게 바쁜 모 금융그룹에 몸담고 있는 J씨는 그 와중에도 도전한국인본부를 꾸리고 있고, 영등포에서 요양보호사교육원을 운영하며 40년 넘은 봉사단체에 교육팀장까지 겸하고 있는 P씨, 늘 상대방에게 먼저 인사를 하며 작은 일에도 지체 없이 대해주는 N씨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전화든 문자든 성심을 다해 응대해주는 점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본 받겠습니다.” 한 적도 있고, “참 좋은 성격이네요.”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를 건넨 적도 있다. 그들은 상대방이 누구든 보내온 문자 하나에도 사람을 오래 기다리도록 하지 않는다. 빠르게 응답을 해주는 것이어서 남의 신경을 껄끄럽게 날 세우지 않는다.

 

스마트폰은 내 손안에서 모든 것을 조작하는 편리한 기기다. 통화는 물론 카카오톡, 트윗, 페북 그리고 문자도 본다. 그런데 서로 명함을 주고받고 통성명을 한 처지로서 일이 있어 보낸 문자가 있었다 치자. 상대방은 그것을 읽고도 ‘봤습니다.’하는 의례적인 인사 한마디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섬김과 사귐이랄지 나눔’ 같은 친교는 커녕 기본에 속하는 인간미조차도 기대하기 힘들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긴 받기만 하는 사람으로 착각을 하는 거다. 여기에 안성맞춤인 예인지는 모르지만, 거대하고도 헛된 로망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인들 중에는 쌔고 쌘 것 같다. 한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로 대단히 유명한 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딸 하나를 뒀다는데 어느 날 딸이 찾아왔던가 보다. 아버지가, 핏줄이 그리워서 인륜과 천륜에 끌려서 찾아갔다. 그런데 결과는 문전박대였다. 출가한 사람들의 18번 “나는 이미 속세를 떠난 몸! 어찌 사사롭게 혈육을 밝히리오.”하며 일언지하에 고개를 돌렸다는 것이다.

 

이게 수도승의 도리인가. 씨를 뿌리지 않았다면 태어나지도 않았을 한 점 혈육이 찾아왔는데도 만나주지 않는 것이 무슨 도리요 고결한 경지라고 한때는 그 사람을 우러르는 표징으로 회자된 적이 있다.

 

자신의 출가와 수도행위만 중요하고 인륜과 천륜을 찾아서 아버지의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찾아온 착한 효심은 짓밟아서 패대기친 행위가 위대하고도 정당한가. 이 같은 일이 수행의 높은 경지로 호도된다면, 착각도 유분수다. 잘못이라 생각한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아이돌 가수에 미쳐서 그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광 펜들에게도 이유는 있는 법이다. 하물며 자식이 아버지의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찾아왔으면 그 효심을 봐서라도 아름다운 해후를 이뤘어야 한다고 본다.

 

이같이 잘못된 가르침이나, 전도된 가치관 하나가 유감스럽게도 크고 작은 일에 영향을 미친다. 생판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서로 통성명을 하여 알게 된 처지로서 안부 글을 보냈다 치면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하는 인사 한 마디쯤은 할 줄 아는 게 기본이련만, 우리 사회는 이런 염치가 너무나 메말랐다. 나홀로 고고한 척 하는 것이 무슨 고매한 인격라도 되는 양 착각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무지는 이래서 소통의 싹을 꺾는 불통의 다른 이름이고, 무례함과는 같은 맥락으로 치부할 수 있나보다.

 

작지만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를 구원한다. 모두 목에서 힘을 빼자. 작은 문자 하나라도 봤으면 ‘잘 봤다.’ 즉석에서 답장을 보내면 서로 좋은 일이다. 보낸 사람은 홀가분하고 받는 사람은 “왜 아무 말 없어?”하고 괜한 신경 안 써서 좋은 거다. 그렇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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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8 23:05 2014/02/08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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