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예술가 ‘핑크 맨’을 통해서 길거리 예술을 보다

                                  -핑크? 어쩜 그렇게 핑크 맨 다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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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엔 늘 인파가 넘친다. 골목길마다 사람이 가득하고 복잡하기 그지없다. 명동거리에서도 제일 붐비는 곳은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6번 출구로 나오는 길이다. 300m 남짓 되는 길을 걷다가 예술극장 앞에서 멈추면 비로소 숨통이 트이고 비교적 할랑한 공간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서는 심심찮은 길거리 공연이 수시로 펼쳐진다.

먼발치에서 봐도 사람들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서있는 것을 보면 “아, 뭔가 벌어지고 있구나!” 싶다. 참새는 방앗간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 나 참새다.” 걸음을 재촉하며 인파를 헤치고 ‘즉석 방앗간’을 향해서 다가갔다. 기자 본능을 발휘하는 거다.

와우! 펭크 맨? 핑크색 모자에 핑크색 와이셔츠에 핑크색 바지를 입고 서있는 그야말로 핑크 맨이 서있었다. 양말도 목에 두르고 있는 스카츠도 핑크색이다. 얼굴? 얼굴도 역시나 핑크색 천으로 다 가렸다. 이런 사나이가 한 가지 포즈를 취하면 마네킹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다. 이 모습 자체가 신기한 거다. 그러다가 한쪽에서 감탄을 하며 “어머 저거 봐!” 같은 소리가 들리면 동작 한 가지를 만들어서 상대방한테 뚜벅뚜벅 걸어가서 또 멈춰 선다.

행위예술이다. 어떤 콘셉트로 공연을 하던 그것은 공연자 마음이다. 오늘은 보다시피 핑크 맨이다. 핑크? 그래 언뜻 생각나는 사람 하나가 있다. 세계적인 호텔 기업의 상속녀라 불리는 페리스 힐튼이다. 그녀는 때때로 온갖 것을 핑크색으로 뒤집어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옆에서 말하는 것을 듣고 알았다. 저 핑크 맨은 호주 사람이고 나이는 27살, 거리공연으로 돈을 벌어가면서 세계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같은 장소에서 어제도 보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핑크 맨 앞에 있는 돈 통에 5천원짜리가 섞인 1000원짜리 지전이 수북이 쌓여 있다.

 

“핑크 맨, 재밌어요. 덕분에 좋은 구경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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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6 22:48 2014/02/2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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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이정찬 시의원 '희망을 쏘다' 출판기념회

                      -13호 밖에 살지 않는 외딴 섬마을 출신 소년이 던지는 희망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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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찬 시의원(57년생, 양천구 제 2선거구)이 그의 저서 ‘희망을 쏘다’를 가지고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양천문화회관에서 열린 출판기념회는 1층만 550여석인 대형 회관으로서 전 좌석을 가득 메우는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25일) 의정보고회를 겸해서 열린 이정찬 의원의 ‘희망을 쏘다’ 출판기념회는 그동안 양천정보신문과 서울남부신문의 CEO으로서 뿐만 아니라 특유의 친화력과 성실함과 따뜻한 봉사정신이 결합돼 이뤄낸 성과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축하객들의 발걸음을 보아서 그렇고, 스스럼없이 다가와 막역지우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그랬다. 마치 마을 회관으로 모여든 오빠, 누나, 삼촌, 이모, 작은 아버지, 조카들처럼 다함께 어울려서 치르는 마을 잔치마당 같았다.  

이정찬 시의원은, 전남 완도의 아주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났다. 가구수가 13호 밖에 안 되는 곳에서 그것도 10형제 중 막내로. 그의 형과 누나들이 하나 둘 대처로 떠났던 것에 비해서 막둥이였기에 이정찬은 홀로 끝까지 남아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런데 동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과정이 닥치자 이웃에 있는 큰 섬으로 통학하는 처지가 됐다. 통학 길이 장난이 아니었다. 배를 타고 차를 바꿔타면서 가야하는 험로였기 때문이다. 이정찬은 하는 수 없이 잠시 학업을 중단하거 만다. 그러나 이정찬은 이후 검정고시를 거쳐서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한다. 그러고나서 연세대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를 따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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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그의 삶은, 굴곡이 심한 편이었다. 결코 순탄한 인생은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점이 오늘 날의 그를 있게한 밑거름이 되고 자산이 된 셈이다. 남들과 다른 차별화 되는 점이 오히려 그만의 강점으로 작용하여 그를 경쟁력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여기에 성실하고도 따뜻한 마음까지 보태저 그만의 특이한 인생스토리를 지닌 사나이로 다듬어졌다/

이정찬에 대해서 좀 더 말해본다. 그의 인생에서의 첫 번째 시련은 장어 잡이를 나갔다가 모진 풍랑을 만나서 12살 때 죽을 번한 일이다. 두 번째 시련은 교통사고, 세 번째는 청산면의 여서도 앞바다에서 맞았다. 또 네 번째는 22.000V의 어마어마한 감전 사고를 겪은 일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4번의 죽을 고비에서 운 좋게 살아났다. 그는 이런 자신의 삻을 은혜로 환원시키기 위해 이웃에 대한 봉사활동에 눈을 뜨게 된다. 목적 있는 삶인 셈이었다. 역경과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전범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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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용모는 시원하고 단정한 느낌을 준다. 숱 많은 머리를 올백으로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과 깔끔한 옷매무세가 한데 어울려서 조화를 이룬 때문이다. 여기에 빠르고 정확한 발음이 더해저 샤프한 도시남의 인상을 형성한다. 더해서 촌철살인의 말솜씨까지 겸비함으로서 이정찬 의원 특유의 실루엣을 완성한다. 한마디로 올백머리 50대 아이돌, 이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무엇이 이정찬 의원을 이토록 깔끔하고도 단정한 사나이로 다듬었는지 모른다. 네 번 죽다가 살아난 그의 특별한 이력에서 조금은 찾을 수 있으려나? 섬마을 출신의 가난한 소년이었기에 동화 속에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에게조차 동병상린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여린 감성의 소유자로 성장할 수 있었으리라. 타향살이를 하면서 눈물 젖은 빵을 먹었기에 때로는 자신이 혹시 미운오리새끼가 아닐까 하는 낭패감도 맛봤지만, 자신의 역경과 시련마저도 독특한 장점으로 승화시켜 스스로 아름다운 백조가 될 수 있었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 앞에 좋은 모습으로 우뚝 선 것이다.

그는 잘 안다. 시의원은 혼자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와 오랜 동안 소통하며 알고 지낸 지역주민들의 후원과 응원 없이 된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그렇다.

부산의 철근공장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면서 철근 일을 했는가 하면, 부천의 고무공장에서는 신발 만드는 일을 했다. 한때는 영업사원을 전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기에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난 선한 일을 하고 가야지!”하는 결심을 늦추지 않았다. 결국 정직과 선한 마음과 한결 같은 용기가 오늘 날의 그를 만들었다.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당선을 위해서 혹은 재선을 위해서 뛸 것이다. 이정찬 의원도 그렇다. 아니 그는 재선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다.

 

6월 지방선거를 목표로 하고 있는 모든 이에게 말한다. 나서라! 외쳐라!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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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6 14:50 2014/02/2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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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무장투쟁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 흉상 제막식

                                     -출생 터인 서울 중구 명동 YWCA 건물 자리인 표지석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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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를 아는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6형제 전원과 그 일가족 50명을 이끌고 만주 땅으로 망명을 결행한 분이다. 목적은 오로지 전 재산을 처분한 군자금으로 항일무장투쟁운동을 하여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우당 선생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어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이 아닌가?”하고 일갈했던 분이다. 신분과 재산과 인생 모두를 조국의 독립 하나만을 위해서 여한 없이 바친 거룩한 삶이었다.

서릿발 같이 매섭고 일송정 푸른 솔처럼 변치 않는 자주독립운동의 기개를 세운 때가 서른 살 청년 때였다. 이회영 선생은 물었다. “한 번의 젊음을 어찌할 것인가”고. 예순 여섯의 나이로 옥사하기까지의 삶으로 선생은 자신의 물음에 답했다. 몇 대가 누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다 바쳐 칼바람 에이는 압록강의 물살을 가르며 국경의 밤을 그렇게 넘었다.

우당선생은 1905년에 울사늑약 체결의 음모를 저지시키고 무효화 하는 운동을 주도하였고,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주장하여 관철시킨 바 있다. 그러나 헤이그밀사 사건은 실패로 돌아가고 기어코 한일합방이라는 이름하에 나라가 망하자 6형제 전원과 일가족 50여 명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망명을 떠난다.

우당 이회영선생은 만주 땅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개소하였고, 1912년에는 ‘합니하’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무관학교 교육을 시작한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할 때까지 독립군 간부 3,500여명을 양성하는 성과를 이루고 독립전쟁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복군을 창설하는 밑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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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더불어 선생이 야심차게 추진한 일은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망명계획을 추진하는 일이었으나 고종황제는 독살되고, 그 여파로 3.1운동이 일어난다. 그러고 상해 임시정부가 구성되어 우당 선생은 의정위원으로 참여한다. 이후 아나키즘 운동과 ‘의열단’ 조직을 지원함과 동시에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여 흑색공포단을 산하에 두고 의혈투쟁에 매진한다.

그러나 선생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서 일경의 추적은 날로 심해진다. 우당선생이 중국의 항일부대와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하도록 현지 지도 차 잠입하던 중이었다. 일제는 대련에서 우당선생을 체포되어 여순 감옥으로 이송한다. 선생은 이곳에서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순국하는데 이때가 선생의 나이 66세인 1932년 11월 17일의 일이었다.

올해는 선생이 돌아가신지 82년 되는 해다. 오늘(24일 오후 4시) 비로소 고인의 흉상제막식을 하게 됐다. 이는 우당기념사업회에서 끈질기게 추진한 결과였다.

아나키즘운동과 무장 항일투쟁을 선도했다 하여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날엔 자주국방이 없는 독립이라는 것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구호요, 거짓되고 망령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시대적 평가가 이루어지고, 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한 상황이 됐다. 이에 홍일식 우당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선생의 흉상제막 건에 대한 예산을 중구청에 요청한다. 오늘 이렇게 우당선생의 흉상 제막이 그 결과다.

참고로 흉상이 세워진 자리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6형제가 태어난 생가 터라고 한다. 명동에 있는 YWCA 건물자리다. 흉상은 건물의 정문 표지석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박유천 광복회장, 이종찬 전 국정원장, 안중현 서울지방보훈청장, 최창식 중구청장, 우당선생의 손자이자 민주당 4선 국회의원인 이종걸 의원과 유족들과 축하객 300여명이 모여와 자리를 빛내줬다.

우당 이회영 선생님, 당신을 기립니다. 머리 숙여 기립니다. 당신은 진정한 항일 독립투사이시며 위대한 선각자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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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5 01:03 2014/02/25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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