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씨감자 정동영!',,,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의 새 이름

-‘식생원’의 200평 텃밭에 심은 바이오 씨감자 결실을 맺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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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길을 달렸다. 9월 초,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머물고 있는 전북 순창엘 가기 위해서다. 순창은 정 전장관의 고향이다. 고향을 떠나 10세에 전주로 공부하러 떠나기 전까지 나고 자랐다는 순창, 그 길을 달리면서 기자는 많은 생각을 했다.

정동영 그는 왜 지금 순창에 둥지를 틀고 있는가? 정동영 전 장관은 말처럼 10세 때부터 전주로 나가서 초.중.고를 다니기 시작한 이래 대학졸업 후 18년 동안 MBC 문화방송국기자 생활을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해외 특파원을 거쳐서 유명 앵커로서 이름을 떨친다. 이후 전국 최다 득표 국회의원 당선으로 정계입문을 하더니 집권당의 대변인을 거쳐서 열린우리당 시절엔 당의장을 지낸다.

더하여 통일부 장관으로서 개성공단을 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가 하면, 2007년도엔 집권당의 대선후보가 되어 전국을 누비던 그다. 하지만 근자에 들어서서 그의 정치역정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현 새정치민주연합은 힘없고, 빽없고, 기댈 곳 없는 서민과 약자를 대변하는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여당과 정부가 잘못 가고 있을 때 야당은 반대자의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하는데 소신 있는 목소리를 내지도 않고, 대안정당으로서의 믿음도 주지 못한다. 국민들로부터 신뢰마저 잃어버렸잖은가. 가라앉기 일보직전의 난파선과 같다.”며 그동안의 정치기반을 내려놓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지난 4.29 재보선 때는 무소속으로 서울의 관악을 지역에 출마한다. 그가 이 선거에서 낙선한 것은 모두가 아는 바다.

 

씨감자 연구소 ‘식생원’

이로서 정동영 전 장관은 현재 정치적인 입지가 예전 같지 않다. 어쨌든 본 기자가 궁금한 점은 “왜 순창에 칩거하고 있을까?”이다. 혹자는 “고향인 만큼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문제 아닌가?”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과 같이 쉬운 일인가. 시체 말로 이제 와서 금의환향도 아니다. 내년에 총선 출마라도 하려면 공들이고 관리해서 돌아가야 할 선거구는 따로 있지 않겠는가? 그를 잡아 끌만한 대단한 동인(動因)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순창으로 가서 칩거하고 있다.

하긴 정계 은퇴를 선언한 모 정치인 중 한명도 지난번엔 강원도에서 이번엔 전남 강진에서 칩거를 하고 있는 상태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으니 어디에 가서 기거한단들 본인 마음이겠지만 현재 전남 강진에 사는 그 정치인이든 순창에 머물고 있다는 정동영 전 장관이든 때가 때인 만큼 둘 다 세인의 관심 안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비약해보자면, 전남 강진은 다산 정약용이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무려 11년간을 머무른 곳이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을 저술한다. 참으로 많은 문화콘텐츠를 생산했다 할 수 있겠다. 하여 정약용은 실학자이자 저술가로서 후세 사람들에게 이름을 날리고,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그토록 오랜 기간을 유배지에서 보낸 점과 경륜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렸다는 평가와 함께 대단히 많은 동정을 사고 있다. 지금 강진에 머무르고 있는 그 정치인은 정약용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이러한 평가와 이미지를 덧입으려는 포석인지도 모른다.

그래서다. 본 기자의 합리적인 궁금증은 ‘무엇 때문에 정 전(前)장관 역시 순창으로 갔을까?’다. 일단 순창은 정 전 장관이 태어난 고향이니만큼 인위적이고도 부자유스러운 점은 없다 하겠다.

그렇다면 순창으로 간 당위성은 무엇일까? 듣자 하니 ‘통일 씨감자’라고 한다. 이점 또한 그리 어색한 조합은 아니다. ‘통일씨감자재단’을 만들어 세계의 식량문제와 북한의 식량 난 해결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구상은, 다른 부서의 장관직을 마다하고 굳이 ‘통일부장관’ 직을 자원할 정도로 남북문제에 천착한 그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상식에 비추어 일관성 있는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 식물생명공학자인 김재훈 박사가 그곳에 있고, 두 사람은 20년 지기로서 오랜 세월 씨감자라는 공동관심사를 통하여 교류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아서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고 마음뿐이었는데 이번에 큰 결심을 하고 순창에 온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김재훈 박사는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얻고 고향 순창으로 돌아와 터를 잡은 사람이다. 고향의 폐교를 인수해서 ‘씨감자 대량생산에 관한 특허’를 발판삼아 ‘식생원’을 설립하여 지난한 고행을 계속하고 있다. 겸해서 마을 이장 직을 맡아 지역농민들의 우량농작물 개량과 농촌 현대화사업에 헌신하고 있다. 가히 실력과 이론과 실천력을 겸비한 현장 형 농생물학자라 할 수 있다.

12시 직전에 순창에 도착하였다. 전원의 모습을 간직한 순박한 모습이었다. TV도 신문도 없는 곳이라더니 정말인가 싶었다. 집은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의 창시자 김준 선생이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이 집은 정 전 장관은 보증금 30만원에 월 15만원을 내고 세 들어 살고 있다. 여기서 1.3km 전방에는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생가가 있고, 그 좌측으로는 정동영 전 장관이 당의장 시절 유치했다는 대법원의 ‘가인연수원’이 폼 나게 서있다. 이만하면 정 전 장관의 순창 칩거의 명분과 인관관계는 충분하고도 남을 만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참 전에 비가 그쳐 땅이든 풀이든 물기만 살짝 머금고 있었다. 눈을 들어 사방으로 눈을 굴리며 지형과 지기(地氣)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이틈을 가르며 정 장관이 무릎까지 오는 장화에 밀짚모자를 쓰고서 방문객을 맞으러 다가왔다.

 

각국의 수확량 비교

폐교가 된 구 답동초등학교 자리인 식생원에 들어갔다. 언제 그렇게 씨감자 배양의 전 과정을 숙지했는지 막힘없는 브리핑을 시작했다. 배양한 날짜에 따라서 일자 별로 각기 다른 성장속도를 보이고 있는 선반 식 감자 모종판이 방마다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이러한 배양실을 순차적으로 옮겨가며 견학을 시켜줬다. 이제 막 배양을 시작한 토끼 똥만 한 것, 바둑알 만 한 것, 알이 굵은 대추알 만 한 것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마지막 즈음엔 싹이 나서 파릇한 잎이 돋아난 것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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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는 세계 4대 주식 중의 하나이다. 쌀, 밀가루, 옥수수, 감자 이 4대작물의 풍, 흉작에 따라 세계인구가 굶주리고 아니고의 여부가 갈라진다. 감자를 많이 먹는 서구인들을 보면 신체적으로도 건장하고, 굶주림에서 해방되었기에 보다 풍요로운 삶을 구가한다. 그런데 감자를 생산하는 단위면적에서 북한은 덴마크의 1/4 정도의 수확량 밖에 안 되고 우리도 절반가량의 생산량에 그친다. 수치로 보면 평당 감자생산량이 미국은 16kg, 한국은 8kg, 북한은 4kg이라 한다. 이 씨감자 종자를 이용하면 20kg까지 생산할 수 있으니 이왕이면 같은 노력으로 풍성한 수확을 내어 식량 수출국가로 거듭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수확량에 차이를 보이는 원인은 토질과 기후여건 그리고 바이러스의 감염여부 등이다. 하기에 이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고 종자개량은 물론 수확량확대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가는 것이 바이오 씨감자연구다. 정 전 장관은 김재훈 박사가 배양한 바이오 씨감자를 8월 중순 연구동 밖의 노지 200평 밭에 파종을 했다.

 

재래식 방법이 어떻기에?

그럼 기존의 우리나라의 감자 파종방식에 대해 잠깐 알아본다. 감자 한 개를 칼로 여러 토막을 내어 심는 방식이었다. 이는 칼로 자르는 불편 말고도, 파종 과정에서 세균의 감염으로 인한 병균 발생 등으로 파종한 씨감자 중 60%정도의 생장률을 보이면 성공이었다. 이에 비해 바이오 씨감자는 콩알 만 하거나 대추만한 크기의 씨감자 형태로 배양해낸 감자를 심는 농사법이다. 이 방법은 첫째. 1년에 두 번 정도의 생산을 할 수 있고, 둘째, 무균, 무병에 의해 100% 에 가까운 발아율을 보이며 셋째, 단위 생산량이 재래 방식에 비해 2배 정도 더 생산할 수가 있다.

특히 농작물의 종자 준비 율이 쌀은 140알 중 1개요, 감자는 10개 중에 1개를 보관해야 하는데 썩고 짓무르는 감자 대신 약 15도 내외의 저장 공간에 씨감자를 저장하면 아주 적은 양만 있어도 파종 양을 충당할 수 있다. 만약에 각 지역 별로 폐교를 확보하여 감자배양 시설을 갖춰나간다면 사시사철 씨감자생산이 가능하여 차후 5년 안에 남북의 식량문제를 원활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처럼 식생원을 통하여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정 전 장관은 식생원의 연구내용을 발전시키고 북돋아서 실용화와 보급에 힘을 쏟고 싶어 한다. 인류의 먹거리를 생산성 높은 생명공학 산업으로서 발전시키는 것이 정 전관의 관심사다. 해서 정동영 전 장관은 이 씨감자 연구소에 일단은 자기를 던지러 왔다고 말한다.

마침 여건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 같다. 김재훈 이라는 뛰어난 식물생명공학자가 오래 전부터 자릴 잡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순창으로 짐을 싸들고 들어온 이유를 짐작하겠다. 자신을 나아준 생물학적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더불어 대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한 점과 바이오 씨감자를 성공시켜 보겠다는 순수한 열정이 내재해 있었던가 보았다.

 

구체적인 계획

정동영 전 장관은 이의 실현을 위해서 ‘통일씨감자재단’을 설립하려 한다. 이를 통해서 남한의 식량자급과 수출, 북한의 기아문제 해결, 지구촌 인류를 위한 보다 큰 역할을 하기 위해 잰걸음으로 내디딜 것이라고 한다.

정동영은 전 장관은 지난 8월 중순 식생원 텃밭 200평에 파종한 감자를 11월 14일 경에 수확할 예정이다. 그날만은 사람들의 방문을 기꺼이 환영할 것이란다. 바이오 씨감자로 파종한 감자의 수확을 함께 할 예정이다. 굶고는 살수 없는 우리 인간, 우리 모두를 배부르게 해줄 먹거리를 광주리에 담으면서 ‘통일 씨감자재단’의 꿈을 같이 만들어가자는 취지다.

자신의 통일부장관 재직 시의 경험으로 보면, 북한에 기아 해결용 씨감자를 지원하여 남북화해와 협력을 이끌어나가고 북핵문제 해결의 단초 또한 열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면 한반도 평화가 자연스레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전에 들른 함세웅 신부도 이 설명을 듣고 “통일씨감자재단에 흔쾌히 참여하겠다.” 약속했다. “얼마 전 만난 법륜 스님도 통일씨감자 얘기를 듣고 북한 보급에 협력하자고 했다”며 “재단을 만들어 보급 사업을 하고 싶은데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해오고 있어서 힘이 난다.”고 소개했다.

오랜 동안 혼자서 묵묵히 씨감자 연구에 몰두해오던 김재훈 박사로서는 강력한 구원 군을 얻은 것 같다. 정동영 전 장관이 힘을 보태니 수소문하여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남북한의 평화와 지구촌의 가아문제 해결을 위해서 참여하겠다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전북 정치인 정동영 전 장관에게 전북문제에 대해서 좀 묻겠다. “당신의 고향 발전은 어떻게 되갑니까?”라는 명제다. 남녘이 고향인 본 기자도 이 문제에 관심이 많다. 정동영 전 장관의 얼굴에선 안타까운 표정이 스친다. “우리 전북 도민들의 절대숙원인 새만금 사업이 한없이 밀려나고 있다.”고 옆에 있던 지인이 말하자 “해도들 너무 한다면서 모두 팔을 걷고 힘을 모을 수밖에 없다.”고 응답한다. 그는 “자꾸만 꽁무니로 처지는 전북의 실정에 자신이 먼저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전북도 기필코 앞서가는 시대를 열어 가는데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가와 국민을, 사욕을 채우기 위한 약탈 대상으로 삼는 지도자는 국가 원수의 자격이 없다. 자고로 무지한 독재자들은 국가 원수가 되고서도 자기의 출신지에만 투자를 몰아준다거나 인재등용 역시 출신지역 사람들로만 한정하는 사람이 많다. 공정한 시장거래 차원에서도 국가의 경제발전 차원에서도 내부거래나 순환출자는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사항이다. 일개 개인 회사들도 이런데 국가 지도자가 이런 편협한 짓을 한다면 무슨 염치로 국가 원수 혹은 대통령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겠는가. 자기 패거리, 자기 계파만 챙기는 정당의 대표 역시 패거리 두목에 그칠 뿐이다.

공정한 나라가 되고, 염치가 바로 서는 나라가 소망이다. 이웃 나라와도 사이좋게 지낼 란 지라 한 핏줄을 타고난 북녘의 동포에 대해 기본적인 예의라도 갖출 줄 아는 나라였으면 한다. 순창을 향해 달리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산하를 바라보면서 생각을 했다.

 

우중(雨中)에 차를 달려 전북 순창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님을 뵙기 위해서입니다.

 

전북 순창은 전남과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전북 최남단 지역으로

아직은 공해 없고, 녹음이 잔잔하게 우거진 고요하고 신선한 고장입니다.

 

혹자는 말할지 모릅니다.

그건 아직 개발이 안 된 곳이라는 증거야!

 

빌딩 없고, 전철 없고, 공해 없고,

광고탑 없고, 요란한 펼침막 없으면 뒤진 곳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겉모습에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사는 것도

공부 많이 하고, 사색 많이 하고 소통 많이 해가며

세상에 대해서 새롭고도 특별한 바라보기를 통하여

 

바른 통찰력과 자긍심을 갖고 사는 것도 귀한 가치입니다.

여기에 미래를 향한 아주 야무진 계획을 반드시 더해야겠지요.

 

박정례/기자,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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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14:16 2015/10/2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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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고향 순창서 씨감자 생산 이유

-김재훈 박사가 특허 얻은 씨감자 생산법으로 씨감자 생산 '북한의 식량 해결'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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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 땅이 선물한 슈퍼푸드는 밀 보리 옥수수 감자를 꼽는다. 감자와 밀 보리는 유럽 쪽에서 단위생산량이 많고, 옥수수는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주식으로 삼을 정도로 중요한 식물이다. 우리나라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데 베트남처럼 삼모작을 할 수 없어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한정돼 있다. 

요즘 시골에 가보면 노령화로 휴경지가 넘쳐나고, 그마저도 경작에 일손이 부족하여 베트남 필리핀 방글라데시 등에서 시집온 부모들이 초청받고 입국하여 일당 5만 원 정도를 받고 대단위 기업농의 일손을 해결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수나 양돈 양계는 일손이 많이 들어가는 편이라 농촌의 노령화됨 노인들이 경영하기엔 불가능하다. 70년대에도 농번기엔 방학을 하고, 향토사단 군병력 등을 이용하며 모내기와 추수를 도왔다.

일손도 70% 이상 덜고 이모작(하지 동지) 감자를 거둘 수 있게 하기 위해 정동영 전 의원과 김재훈 생명공학 박사가 연일 실험실과 육묘장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순창 복흥면 답동리에서 새까맣게 탄 얼굴로 방문객인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폐교농장과 인근의 비닐하우스 씨감자 생산 포전으로 이루어진 1만여 평 되는 시설로 구성된, 농사용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정동영 전 의장의 차트 브리핑과 시설물 이동 설명이 있었다. 생명공학 권위자인 김재훈 박사의 부가 설명도 있어서 어안이벙벙한 우리 일행은 호기심에서 확신으로 표정들이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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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의 최대복병 고온다습한 우리나라 환경에서 바이러스성 썩는 병을 제압하다

 

김재훈 박사는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얻고 고향 순창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폐교를 인수, ‘씨감자 대량생산에 관한 특허’를 발판삼아 지난한 고행을 하고 있었다. 정동영 전 의원의 브리핑 중에 씨감자 대량생산을 통하여 북한에 연 200만 톤 감자 증산을 이루고, 식량자급율이 30%도 안 되는 대한민국에서 병해충에 강하고 균일한 영양소를 고루 갖춘 감자를 대량생산한다면 식량안보에도 쉽게 기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특히 농작물의 종자 준비율이 쌀은 140알 중 1개요, 감자는 10개 중에 1개를 보관해야 하는데 썩고 짓무르는 감자 대신 약 15도 내외의 저장 공간에 씨감자를 저장하면 아주 적은 양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전국의 폐교를 이용하면 사시사철 씨감자생산이 가능하여 차후 5년 안에 남북의 식량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다.

정부는 대관령에 농진청 산하 연구시설에 200억을 지원하여 씨감자 생산해왔다. 감자 싹 하나씩을 키워 줄기를 잘라 삽목(揷木)하는 방식이라 단위 시간당 생산성이 현저히 약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김재훈 박사는 씨감자 씨앗을 플라스틱 양분배양기에 넣어 동시에 수 십 가닥의 싹을 동시에 키우는데 성공했다. 이 싹을 육모판에 삽목하여 층층의 선반 위에 올려놓고 배양함으로서 단위 기간 당 생산율을 정부의 대관령 육묘장 보다 50~100배로 높였다. 

또한, 평당 감자생산량이 미국은 16kg, 한국은 8kg, 북한은 4kg이라 한다. 이렇게 나라마다 생산량차이가 나는 것은 토질 기후 탓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감자가 바이러스에 약해서 썩고 짓무르는 씨앗에 문제가 있는 것.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재훈 박사가 취득한 특허가 있는데 유전학적으로 조작하여 병해충에 내성을 가지게 하고 균질의 감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연구동 밖의 노지에 감자를 심었다. 정동영 전 의원이 재배해온 2백평의 감자밭에서 씨감자 생산법을 설명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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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산과정과 특허기술로 재배한 세계 초고의 씨감자 시설을 둘러보기 위하여 맥도날드 기술진이 방문, 기술이전이냐 로열티를 받느냐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한다. 정 전 의원은 “감자는 미국산이 크지만 그 씨감자생산 기술은 순창의 김재훈 박사 특허가 세계 제일이라는데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만하다”고 말했다.

콩알만한 씨감자를 배양하면 80~90%가 발아된다. 삽목하고 키워 감자밭에 포전하면 평당 20kg이 생산되니 이는 미국의 평당 16kg 생산량보다 4kg이 더 많다고 한다. 지난 5월, 맥도날드 기술관계자들이 순창 현지에 와서 시설과 생산과정들을 실사하고 돌아갔다. 내년 1월에 맥도날드 관계자들이 다시 방문한다는 전언이다. 이 기술은 미국에 로열티를 받고 파는 것도 좋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전 야당지도자라 등한시 하지 말고 적극 지원해서 남북한 식량난과 식량안보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한다. 

◆정동영 전 의원은 이제 개성공단을 넘어 씨감자로 7천만 겨레의 식량난을 해결하고, 대결이 아닌 화해와 교류의 새장을 열 것이라고 씨감자의 미래를 예견했다 

북한은 인민들의 먹거리를 위해 한해 500만 톤 이상의 식량을 생산해야 한다. 400만 톤이면 인민들이 굶주리고, 300만톤이면 수백만의 아사자가 생긴다. 여기에서 북한의 평당 생산량이 4kg인데 씨감자 기술로 식재하면 평당 거의 20kg이 생산되니 약 5배의 증산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만약에 북한이 연간 50만톤의 감자를 생산한다하면 씨감자 기술로 년간 250만톤이 생산되니 천지개벽할 경사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겨레의 구성원으로서 정부당국은 전북 순창에 있는 “식생원” 씨감자 생산단지를 적극 지원하길 기대한다.

정치논리로 전 야당지도자가 하는 일이라 정치적 해석으로 지원을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단위생산량이 민간시설 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대관령 씨감자생산 시설에 연 200억의 절반인 100억이라도 순창 복흥(福興) “식생원”에 전략적 식량안보 차원에서 도움은 손길이 있었으면 한다.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은 개성공단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즈런데 지금 민족의 굶주림 해결을 위해 김재훈 박사와 힘을 합하고 있다. 새까맣게 탄 얼굴로 우리 일행을 맞아 열심히 씨감자 관련 설명을 해준다.

 

떠나는 길에 내장사 대우 큰스님이 씨감자생산 시설을 견학하고 나서 시를 낭송해줬다.

 

“<시> 어느 가을날 
-대우 시인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를 물어와서 

버리고 갈 줄 아는  
낙엽을 붙들고 있다 하였더니 

 

낙엽의 그 무게가 
얼마냐 물어와서 

바람에게 물어보라고 
일러 주었네 

 

고요도 몸져누운 뜨락에 
낙엽이 지는 날에는 

바람따라 가고싶으나 
빈손이 부끄러워 

 

산새울어 금이가는  
먼 허공이나 훔쳐보고 있다네“ 

 

노승의 사부대중을 위한 고뇌가 켜켜이 뭉뚱그려진 법어이다. 이제 ‘자네들이 나를 위해 용맹정진하여 이웃과 국가를 위해 힘쓰시게. 자네들이 나를 부처로 만들고 또는 식충이로 살다간 똥집 막대기로도 만들 것이니…….모두 소중하게 맺어진 인연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의 곳간을 들여다 보시게!’ 라는 법어가 가슴을 후벼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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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6 09:55 2015/10/1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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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 내몸의 상처

9월 15일 이후 큰 병이 났다. 몸에 칼 안대고, 병원에 입원 안했으니 무지한 탓에 큰 병이 아니라고 애써 혼자 위안하고 잇었다. 그러나 난 지금 큰 병이 나서 된통 고생하고 있다.

여름 내내 무리를 거듭했다. 글을 쓴답시고 하루에 10시간, 때로는12~14시간을 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냥 이일저일 하면서 서성거린 시간도 있었지만 영감을 벼리기 위해서 온갖 독서를 병행하면서 말이다.

열, 열 두시간 나아가서 열네시간 씩 온전히 빵빵하게 자판을 두드리지 않은 날이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컴을 켜놓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며 시동이 걸릴 때까지 혹은 예열을 하기위해서 보낸 시간까지 여름내내 복더위를 견디면서 무척이나 노심초사했다.

그랬다.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8월 말까지 일단 끝내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교정과 교열을 볼 수 있다는 목표를 두고서 퍽이나 열심히 임했으니까. 마치 기계처럼 일했다.

"난 나이를 먹었으니까 성실해야 돼."

"난 그동안 인생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고 볼 수 있어. 그동안 못했던 걸 보충하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해!"

생각의 기저에는 이런 정신이 깔렸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같은 생각이 아니라도 선택의 여지 없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글을 사용해야 내년에 출마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시일이 촉박한, 그런 목적을 가진 글이었으니까.

내가 기일 안에 결과물을 내놓지 않으면 내년 선거에 차질이 오는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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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드디어 병이 났다. 키보드 두드리고 마우스 움직이는 일을 오른 손이 거의 한다. 거기다 일평생 오른 손 잡이로서 온갖 일을 오른 손으로 하였으니 오른 손은 더 이상은 못살겠다고 신호를 한 두 번 보낸 것이 아니었다.

사실 컴퓨터를 하는데 있어서 자판 두드리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다. 마우스를 움직이는 일이 더 많은 노동을 요하고, 노동이 심했을 경우 어김없이 아픈 팔은 오른 팔이다. 이같이 오른 팔을 쓰기 위해 움직인 근육과 신경에 병이 났다고 말하고 싶다. 오랜 시간 작업하고 나면 어깨근육도 근육이지만 팔꿈치가 저리고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목도 오른 쪽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른 쪽 등줄기, 오른 쪽 팔꿈치에서 내리 손등으로까지 연결되어 온 근육과 온 힘줄이 금방이라도 화석처럼 굳어져서 다시는 원상복구 되지 않을 것처럼 아프고 딱딱한 것이어서 병원 가는 것을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의사가 근육주사를 팍팍 찔렀는데 그 순간 대상포진이 기다리고 있다가 오른 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동원되는 온 신경라인을 타고 준비 상태에 있던 바이러스 균이 급속도로 퍼졌던가 보았다. 난 그것도 모르고 근육을 풀려는 욕심에만 팔려서 근육주사에 더구나 상처부위에 찜질팩을 가했으니 잘 하는 짓이었다.

온몸에 열이 나고, 확산될 모든 준비를 갖추고서 대기하고 있던 바이러스균에 근육을 푼답시고 물리치료 용 찜질팩을 부착했으니, 기름에 불을 부은 격이 되어 상처는 성이 나서 순식간에 포도송이 같은 수포가 맺히기 시작했다. 등판에서 앞가슴까지 띠를 두른 것처럼...

피부과 병원 찾아가는 과정에서 고생과 시행착오도 많았다. 고생을 바가지로 했던 것이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9.18일엔 큰 행사 취재차 한강변에 가서 하는 수 없이 카메라를 들고 나섰고, 이어서 이사를 하느라 무리를 거듭했다.

베니는 내가 아프다고 한날 택시 잡아 타고 원자력병원 응급실로 입원하러 오라고 극 성화였지만 나에게는 일이 너무 겹쳤던 것이다. 이게 재수라면 재수 아닌가벼?

어쩐지 을지병원 의사는 날 볼 때마다 '입원하실래요?"를 거듭해서 묻는 것이었다. "왜 저러시나?"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남들은 이 정도면 다 입원을 했던가 보다. 하긴 1차 초이스 병원에서는 나의 경우 굉장히 심하기 때문에 병실이 있는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소견서 당장 써줄테니 어서 가라 말했다. 대상포진 이놈의 병은 발병 당시의 고통은 그야말로 세발의 피였던가 보다

 

그런데도 입원시기를 놓친거다. 행사와 이사 때문에, 글 다듬는 일 때문에

당하고나서 이제야 알았다. 겪으면서 이제야 실감했다.

올른쪽 젖꼭지에서부터 옷깃이 닿는 모든 곳이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아팠다.

의사는 이게 감각이상증이라고 불렀다. 정말 그런가보다. 아무 것도 닿게 하지마! 가까이 오면 너 죽는다(?) 신경도 상처도 근육도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수십년 간 참았던 거 이제 쏟아놓는 거야. 특히나 십년 이쪽저쪽 혹사한 네 오른 팔, 지금 넌 큰 병났지!

맞어 맞어 앗 뜨거! 컴 앞에 앉으면 상처가 번진 환부와 신경조직이 생난리다. 인간은 고생덩어리. 못말리는 모순덩어리 으헤헤ㅅㅅ

"10동안 무리했던 근육이야! 잠시만 쉬게 해줘." 일제히 아우성을 치면서 아무 것도 상처에 닿게 하지 말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낸다.

좋았던 벗님네들 모두 떠나가고

눈부심만이 내 방에 남아 나를 못살게 하네 못살게 하네!

이성부 시인의 시 한구절이다.

온 신경들이 일어나서 나를 못살게 하네 못살게 하네! 이 고통이 한달 째다

 

거울을 보면 진한 상처가 보인다. 이병은 다 나아도 검게 상처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미 각오하고 있다. 이 진한 상처가 본래의 내 살색 피부를 온전하게 돌려줄 것 같진 않다. 이번 병은 흔적과 흉을 꽤나 깊게 남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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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0 10:50 2015/10/1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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