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의식

분류없음 2016/03/15 01:31

 

비틀즈의 음악을 들어보세요 

 

 

컬리지 친구들과 놀던 도중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생이 된 친구들 몇몇이 존 레논 (John Lennon, 1940-1980) 을 모른다는 것에 멈칫했던 적이 있다. 그럼 너네 비틀즈는 알아? 그게 뭐야? ... 이런 게 세대차이인가. 그들은 트와일라잇 (The Twilight Saga) 혹은 해리포터 (Harry Potter), 또는 저스틴비버 (Justin Bieber) 세대. 그래도 그렇지. 털썩. 집에 놀러온 친구들, 씨디 (CD) 를 듣는 나와 동거인을 보곤 질겁하기도 했다. 아이튠을 통해 음악을 구매해 듣는 그들은 바로 스트리밍 세대.

 

지난 2월 말, 한국에서도 마침내 스트리밍을 통해 비틀즈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이미 작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세상에 풀린 비틀즈. 씨디나 카셋테입이 어떻게 생긴 건지 모르는 친구들아, 비틀즈는 진리랍니다. 한번만 들어보세요. 

 

 

 

아동복지에 관한 단상 

 

 

원영이가 결국 주검으로 발견됐다. 친부와 계모의 지속적인 학대와 폭행에 따른 외상이 사인이라는 부검 소견이 나왔단다. 최근 들어 학대에 시달리다 세상을 등지거나 지옥보다 못한 곳을 간신히 벗어나는 한국 아이들의 사연을 종종 접한다. 아마도 전수 조사 뒤 벌어지는 일련의 여파이지 싶다. 지구상에서 한국인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건 천형인 것 같다. 이젠 생존 그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먼 이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론 암담하고 참담하고 참혹하고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다. 

 

이 나라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당연히 발생한다. 사람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니까, 사람들이 하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든 살인하는 일이든 어느 곳에서나 다 비슷하게 벌어진다. 다만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처벌하는 수위, 사건을 예방하는 시스템, 사람들의 인식이 다를 뿐이다. 일단 아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부모의 학대 혹은 물리적 체벌이 의심스럽다? 교사는 바로 경찰에 신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나중에 교사가 신고하지 않은, 그러니까 의무를 방기한 일이 밝혀지면 그 교사까지 처벌받는다. 신고가 접수되면 경찰이, 그리고 필요하면 아동보호기관이 바로 결합한다. 아동보호기관도 일반 어린이복지를 담당하는 곳 (CAS), 가톨릭 아이들의 복지를 담당하는 곳 (CCAS), 유대인 가정과 아이들의 복지를 담당하는 곳 (Jewish Family & Child) 등으로 나뉘어 있다. 각 아동보호 기관은 연방 기관, 주 기관, 시군구 기관이 있고 각각 독립법인이다. 시민들의 세금 (정부 펀딩) 과 개인/단체의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아동보호기관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의 권한은 상상 이상이다. 간혹 아이 양육권을 빼앗긴 엄마들/아빠들이 아동보호기관 (CAS) 과 워커들을 "악마"로 묘사할 때가 있다. 그들의 입장에선 틀린 말은 아니다. 자기들의 아이를 "빼앗아" 갔으니까. 개인적으로 현재 이 나라의 아동복지에 만족하는 편은 아니지만 시스템만 따진다면 더 나은 것을 상상하는 것이 나로서는 아직 어렵다.

 

서유럽의 영향을 받은 북미대륙에서 아동학대에 관해 견지하는 무관용 (Zero Tolerance, 제로 톨러런스) 원칙은 거의 절대적이다. 아이들은 (아직 성인이 아닌 청소년을 포함해) 정신적, 신체적, 물리적, 정서적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고 주양육자 (main caregivers) 를 비롯한 주변의 어른들은 이들의 권리를 옹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컬리지에서 이 부분을 공부할 때 유럽과 북미대륙은 왜 이렇게 아이들 복지를 시끄러울 정도로 강조하나 그런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다. 보다 깊숙이 공부하지 못해 뭐라 단정할 순 없지만 개인적인 추론으로는 -- 아동노동에 대한 트라우마, 근대를 벗어나고 싶은 몸부림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19세기, 20세기 사실주의, 자연주의 문학에서 묘사하는 사회적 약자들 (노동계급 어린이 그리고 여성들) 의 삶을 들여다보면 끔찍함 그 자체다. 영국에서 아동노동을 제한하는 법률이 제정된 것이 1802년 (The Health and Morals of Apprentices Act 1802) 이다. 그렇다고 아동노동이 사라졌을까. 천만의 말씀. 지금 2016년, 인디아에서, 방글라데시에서, 중국에서, 중남미에서 여전히 많은 수의 어린이들이 양탄자를 만들고, 아이폰을-셀폰을 조립하고, 축구공을 꿰맨다. 하루에 천 원도 안되는 돈으로 어린이들을 철저하게 착취하는 아동노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즉, 유럽의, 북미대륙의 아동복지는 유럽만의, 북미대륙만의 아동복지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인생이 달라진다. 아이고 내 팔자, 인샬라. 

 

제 2의 원영이를 막자는 말이 참으로 허무하게 들린다. 원영이가 "계모"와 살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모성이 넘치는 "친모 (생모)"가 원영이 곁에 있었다면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 접근하는 것은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다. 학교가, 이웃이, 사회가 어린이의 권리를 지킬 수 없다면 수퍼파워 엄마가 있어도 그 어린이의 팔자는 풍전등화 (風前燈火) 일 뿐이다.

 

 

 

그람시와 하지원   

 

 

그람시 (A. Gramsci, 1891-1937) 가 태어나고 자란 이탈리아 남부는 곡창지대이자 해산물이 풍부해 언뜻 보면 살기 좋은 곳으로 보인다. 마치 한국의 호남 지방처럼 말이다. 맞다. 살기 좋은 곳이다. 더구나 날씨도 마일드한 전형적인 지중해식 기후. 당연히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의 착취가 극심했고 전쟁이 잦았다. 그러다보니 살기 좋은 그 곳이 민중들에게는 살기 어려운,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되어버렸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만나 고향 얘기를 할 때 그냥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거의 이탈리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이다. 상대적으로 공업이 발달해 돈과 물자가 많았고 산업화가 도드라졌던 북부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밀란 (밀라노), 튀린 (토리노), 제노아 (제노바) 에서 왔다고 도시 이름을 말한다. 마치 뭄바이에서 온 인도 이민자들이 "뭄바이에서 왔어" 라고 말하는 동안 인디아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냥 "인디아에서 왔어" 라고 말하고, 서울에서 온 한국인 이민자들이 "서울에서 왔어" 라고 말하는 동안 비서울에서 온 사람은 "한국에서 왔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대학을 튀린 (토리노)에서 다닌 그람시는 자연스럽게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맑스주의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는 가난한 이들, 노동자들이 자신들과 전혀 다른 이해를 추구하는 집단을 동경하고 심지어 지지하는 (투표하는) 현상을 목도하며 상념에 빠진다. 착취와 전쟁의 폐해 속에서 가난에 시달리던 고향의 이웃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람시의 두뇌를 적어도 이십년 동안 멈추게 해야 한다던 파시스트 정부에 의해 감옥에 갇힌 뒤 그 생각을 진전시켜 정리한다. 그 정리가 그람시 사후 "옥중수고 (The Prison Notebooks) 로 묶여 나왔다. 

 

한국에서는 이명박귾혜,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득세하는 이 엄혹한 현실을 보면서 그람시를 떠올렸다가 문득 예전에 "옥중수고"를 대놓고 보여주던 드라마가 있었는데... 한참을 생각했다가 그게 "발리에서 생긴 일"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드라마를 볼 때에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소지섭이 권한 "옥중수고" 를 읽지 않고 되돌려준 하지원이 어떤 면에서는 명석했다. 그 복잡한 번역도 문제지만 이미 하지원은 삶의 문제와 우선순위가 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물질적 존재로서 "옥중수고" 는 냄비받침 정도라면 모를까 당시 하지원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그람시가 고민하고 소지섭이 고민하던 정신과 가치는 사실상 의미가 없었던 거다. 트럼프 지지자들을 분석한 기사를 읽으며, 그 중에 왜 노동계급 공화당원들이 열정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하는지 그 내용을 보며 소지섭이 권한 "옥중수고"를 얌전히 되돌려주던 하지원 생각을 했다는 그런 얘기.  

 

2016/03/15 01:31 2016/03/15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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