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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인가, 막내 고모가 전화를 하셨다. 잔치 때 케익은 고모가 준비하시겠다고, 그리고 사촌동생들과 축가도 맞추어 올 예정이라고. 그런데, 너희도 아빠에게 드리는 편지를 써서 낭독하면 어떻겠니, 하고...
앗, 이렇게 민망한 일이... 그런 이벤트에 워낙 재능도 관심도 없는 나는 "요새 환갑은 다들 뭐 그리 크게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요"하고 약간 저항해보지만, 고모의 소녀적 감수성과 도덕정 정당성(?)을 이겨낼 힘은 없었다.
소극적으로 계속 고민만 한 채, 바야흐로 잔치 하루 전날. 워크숍이며 오랫만의 하연이와의 만남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자정 넘어 들어와서 동생에게 말을 꺼냈다. 난감해 하기는 진옥이도 마찬가지. 그래도 컴퓨터를 켜놓고 문장을 몇개 만들어 보지만, 진부하기 짝이 없음에 계속 자책하다가 이래저래 고민이 진척된 김에, 아빠의 60평생을 재구성하는 동영상을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고등학교 졸업 사진, 대학 졸업 사진, 회사에 막 입사했을 때 사진, 결혼 사진, 나와 진옥이의 첫 돌 사진... 그리고 최근 가족 여행 사진들 까지. 옛 앨범 사진들은 디카로 다시 찍어내고 디지털 사진은 골라내어 괜찮은 음악을 웹에서 찾아 붙여넣기 작업에 돌입. 정말 평범한 개인이 스스로 기록한 사진 자료들일 뿐이지만, 이것 만으로도 꽤나 방대한 사진 중에 쓸 사진을 선정하는 것도 상당한 작업이었다. 게다가, 집에 있는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은 무비메이커가 유일. 처음으로 이 프로그램으로 뭔가 이어붙이기를 시도해보았다. (결국 트랜지션 따위는 넣지 못했지만) 두 시에 시작한 작업은 새벽 여섯 시가 되어 마무리되어, 성당 부터 다녀오려고 일찍 일어나신 엄마의 얼굴 까지 보고 한두시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급조한 기획으로, 예기치 않게 밤을 새기 까지 했지만, 옛 앨범들을 다시 들춰보며 포토제닉(!)했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했달까. 작업은 어느새, 아빠에게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나의 과거를 회상해보는 일로 변해버리기도 했다.
여하튼, 잠깐 눈을 붙인 뒤 일어나서 센터로 가서 작은 빔프로젝터를 대여, 광화문에서 픽업한 아빠 차로 미사리 한정식집에 도착, 친척들 맞이하기, 상영, 서로 선물 증정 까지... 비교적 싼 한정식집에서의 한끼 식사는 무난하게 끝나갔다.
다만, 이제 힘차게 뛰어다니기 시작한 한돌 반 배기 첫째 조카의 모습에 겹쳐, 돌도 못되어 막 세상을 떠난 다른 조카의 그림자를 인식할 수 밖에 없었던 건, 정말 어쩔 수 없었겠지...
여하튼, 이제 너도 결혼해야지 하는 도돌이표 노래도 차분히 넘겨 가며,
무거운 짐을 어설프게 내려놓은 듯 한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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