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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自問해 보십시오'가 아니라..
'국민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조국이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어떤 쓸개 빠진 영감탱이(인사청문회에 나온놈)는
국가가 있고 인권이 있다고 했는데....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국민이 있고 국가가 있는 것입니다. 국민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국가는 더이상 국가가 아니라 한낱 조폭 집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을 '총알받이'로 써먹어도 되나???
아니면.. 총알받이가 되기 싫어 병역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진정 민주주의의 민인가??
그들은 돈벌이에 이득이 안되는건 모조리 잡초라 여긴다 심지어 사람 조차...."잡초갔은 놈"???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것중 필요없는건 없다. 단지 무지한 우리들이 그들의 쓰임새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잡초 활용도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기는커녕 폭력으로서 그들을 제거한다는것은 마치 어느 인종주의자의 인종 청소에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하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누가 그랬던가...암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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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엔 돼지감자가 있었다. 추수가 끝난 빈들의 언덕배기나 밭 울타리 가에 있는 멀대같은 줄기를 걷어내면 땅 속에서 울퉁불퉁 아무렇게나 생긴 돼지감자가 쏟아져 나왔다. 아삭 아삭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에 잠시 흥분했다가 다시 잊고 말았지만 이듬해 11월, 다시 찾은 그곳에선 어김없이 돼지감자가 쏟아져 나왔다. 돼지감자는 특별하게 가꾸지 않고 버려지다시피한 잡초일 뿐인데 늘 반가운 모습으로 아삭하고 달콤한 맛을 안겨주었다.
아주 오래 전에 사람들이 이 돼지감자를 작물로 재배하였다면 지금 우리들은 돼지감자를 잡초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즐기는 만큼 현대인들의 당뇨수치도 낮았으리라. 시금치 대신 민들레를 작물로 재배하였다면 인간의 위는 좀 더 편안하여 위암으로 인한 사망의 기록도 줄었으리라(돼지감자는 당뇨병에 좋다. 최근 얼마 전 천연 인슐린이란 별칭으로 일본 학회에서 그 효능을 입증, 발표했다. 민들레는 위에 좋을 뿐더러 다른 약효로 뿌리부터 꽃까지, 홀씨를 제외한 전체를 약으로 쓴다고 한다). 제발 잡초를 하찮고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말자. 잡초는 생태계의 한 존재로서 뿌리내리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분명 있으며, '쓸모 있음'에 의해 선택받아 재배되고 있는 작물 못지않게 우수한 먹을거리며 아주 유용한 약초다. 또 잡초는 황폐한 토양의 개척자이자 모성식물로서 오늘도 오염된 토양을 묵묵히 바꾸어간다.
잡초를 뽑아내야만 하는 하찮고 버려진 것, 쓸모없는 것으로 알고 성장하던 소년에게 어느 날 솔 벤슨이 들려주는 옥수수 밭의 쇠비름 이야기는 이후 조셉 코케이너가 50년 동안 잡초와 토양연구에 몰두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물보호를 위하여 뽑아내던 쇠비름과 옥수수의 관계를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는 솔 벤슨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확실히 옥수수가 자라는 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쇠비름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벤슨 아저씨,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예요!…하지만 잡초가 가축사료나 야채요리 말고는 쓸모가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아요." "나도 알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옛날사람들을 생각해봐,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이유는 무지하거나 오류에 빠졌기 때문이야." 순간 나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무엇이 있었다. 사람들이 지구의 모양에 대해 무지하거나 오류에 빠졌다면, 잡초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지구가 평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해야만 했다. 쇠비름이 옥수수가 자라는데 도움을 준 자는 사실은 대부분의 현상들을 받아들이는데 기지가 넘쳤던 솔 벤슨의 몫이었다! 우리에게 유익한 콩도 처음에는 잡초였다. 콩을 발견한 탐험대가 넝쿨 무성한 콩 옆을 스쳤다 하더라도 마침 꼬투리 없는 콩이었다면 선택받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들의 돼지감자처럼 잊혀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우리 인간들이 식물에 들이댄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선택은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된다. 잡초에서 작물이 되어 인간에게 유익한 콩의 발견, 그 역사를 보자. 여러 날을 헤매던 어느 날 탐험대는 우연히 끝도 안 보이게 높이 자란 넝쿨 식물을 발견하였다. 그 식물에는 아주 탐스러운 열매로 채워진 꼬투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 고심 끝에 그들은 제비뽑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열매를 먹어 볼 희생자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콩이 발견되었다. - 책 본문 중 요즘에는, 친환경적인 농사를 도모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그들은 봄이면 한해 농사를 앞둔 논에 자운영 같은 사료작물로 인정받은 잡초를 끌어들여 땅을 비옥하게 한다. 옛날에는 시골마을마다 일손이 잠시 쉬는 한여름에 퇴비 만들기 공동작업을 했다. 산과 들에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를 베어서 쌓은 뒤 거름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대량생산과 손쉽게 영양을 공급할 수 있는 비료로 대체되면서 땅은 척박해지고, 자라나는 작물은 면역력이 약해져서 농약사용량이 늘었다. 그래도 비집고 뿌리를 깊숙이 내려 보란 듯이 자라나는 것은 잡초다.
조셉 코케이너는 50년 동안 생물학과 환경 보존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잡초가 생태와 환경뿐 아니라 농작물에게도 이롭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에 따르면 잡초는 토양의 상태를 알아보는 지표이며, 모성작물로서, 혹은 초지개척자로서 잡초는 유능한 토양의 일꾼이며 작물의 친구다. 이 책을 통하여 만나지는 잡초의 우수성과 이용가치는 놀라울 정도다. 이 책의 목적은 이렇다. 저자는 가정의 식탁에 오르는 시금치나 요리된 야채들에 비하여 흰 명아주가 결코 덜하지 않게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코케이너 교수는 잡초가 농장이나 정원을 무성하게 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선구적 역할은 잡초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 정상적인 생태학이고, 또한 토양을 잘 보존하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농부나 정원사에게 진정한 이익을 증명하는데 있다. - 서문 중 농사와는 무관하게 다만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잡초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으로 이 책을 만나게 되면 수없이 거론되는 잡초들의 쓰임새에 대하여 놀랄 것이다. 우선 무엇보다 먹을거리로써 가치에 놀랄 것이다. 이 책엔 먹을거리와 약재로 쓰이는 잡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최근 몇 년간, 산야에서 자라는 식물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몇 해 전에 많이 읽혀진 <야생초편지> <잡초는 없다> <산야초 이야기> 등이 잡초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이런 책에 관심을 두었던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더 깊은 근본적인 안목을 트여주는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은 후 어제까지 무심하게 자라던 잡초들이 좀 더 근사한 존재로 보일 것이다. 이젠 잡초를 다만 하찮고 쓸모없어서 버려진 존재들로만 생각하지 말자.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훌륭한 존재들이다. 사람이 판단하는 쓸모 있고 없음에 얽매일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우주를 품고 있는 생태계의 한 일원이다. 약간 빗나가는 이야기지만, 아름다운 장미는 지금도 찔레순에서 얻어내며, 달고 맛난 감은 고염에서 얻어진다. 포도 또한 머루에서 얻어진다. 생약성분의 많은 약들은 잡초에서 얻는다. 쓸모없음, 버려진 것들, 하찮은 존재들, 작물의 성장을 막는 방해꾼 등등 잡초에 대한 이런 생각을 이젠 버려야 한다. 그 생각을 버리는 데 이 책은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 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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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석학 캘리니코스의 역작
이 책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An Anti-Capitalist Manifesto, Polity, 2003)을 완역한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현존하는 마르크스주의 분야의 세계 석학이자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의 지도적 인물로서, 그의 주요 저작들이 이미 대부분 번역돼 출판됐으며, 최근 우리 나라에 자주 방문 강연하여 우리 나라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자본주의 운동
1999년 ‘시애틀 전투’에서 시작돼 올해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있었던 반WTO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반세계화 운동은 1989~1991년 소련?동유럽 블록의 붕괴 이후 인류의 숙명으로 간주돼 왔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결코 인류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웅변하고 있다. 또한 체제에 대한 집단적 저항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의 부활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이론적/실천적 의의를 갖는 새로운 사회 운동 흐름이다.
그런데 반세계화 운동은 흔히 “운동들의 운동”(movement of movements)이라고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점을 빼고는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다양한 운동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99년 제3차 WTO 각료회의를 저지하기 위해 시애틀에 집결한 운동은 세계 각지의 노동 운동, 환경 운동, 농민 운동, 각종 NGO, 좌파 조직들이었는데, 이들은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슬로건 아래 하나로 합류했다.
하지만 오늘날 반세계화 운동의 내부에서 몇 가지 쟁점을 둘러싸고 상이한 입장들이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저지하는 것이 자본주의 틀 내에서 성취될 수 있다고 보는지의 여부, 그리고 이 과제를 기존의 국가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지의 여부, 또 이 과제를 수행하는 주체로서 조직 노동 계급의 중심성을 인정하는지의 여부, 2001년 9/11 대미 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 이후 대두되고 있는 반전 운동과의 연대 여부 등이 그 주요한 쟁점들이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쟁점과 과제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은 이와 같은 반세계화 운동의 주요한 이론적/정치적 쟁점들과 향후 과제를 자신이 지지하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정리한 책이다.
캘리니코스는 먼저 반세계화 운동이 세계화의 어떤 특정한 양상이 아니라, 세계화 그 자체에 대해 총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또 국제주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이 운동을 반세계화 운동이 아니라 반자본주의 운동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캘리니코스는 이 책 전반부에서 반자본주의 운동의 배경이 되는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금융 불안정과 과잉생산 위기, 환경 위기가 심화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캘리니코스는 최근의 세계화를 시장 근본주의의 전 세계적 확산, 금융세계화 등 주로 경제적 세계화로 이해하는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수 견해에 반대하면서, 오늘날 세계화는 무엇보다 미국 제국주의의 새로운 얼굴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세계화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정치/군사적 갈등이 격화되고 있으며, 동시에 오늘날 세계화는 '무장한 세계화'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캘리니코스의 핵심 논지다.
그 다음 캘리니코스는 현재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흐름을 ①반동적 반자본주의, ②부르주아 반자본주의, ③지역주의적 반자본주의, ④개량주의적 반자본주의, ⑤자율주의, ⑥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 등 여섯 가지로 분류한 후, 마지막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의 입장에서 앞의 다섯 가지 반자본주의 운동 전략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다소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흐름을 이와 같이 유형화해 비교/분석한 것은 캘리니코스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특히 현재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에서 주류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ATTAC(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과 같은 개량주의적 반자본주의 전략과 최근 일부 좌파들이 지지하고 있는 자율주의에 대한 비판은 매우 날카롭다. 무엇보다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 운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흐름들이 오늘날 세계화의 제국주의적 본질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을 반전 운동과 연계시키지 못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캘리니코스는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전략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지지하는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 노선의 구체적 대안을 정식화한다. 캘리니코스는 팻 데바인(Pat Devine)의 ‘협상 조정’ 모델과 같은 민주적 계획 모델을 시장 경제를 대체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 경제 모델로서 제안한다. 캘리니코스는 나아가 자유/평등/연대와 같은 ‘문명 세계의 가치들’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민주적 계획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 경제 체제를 건설하는 혁명적 변혁의 토대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캘리니코스가 제안한 민주적 계획 모델은 최근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는 마이클 앨버트(Michael Albert)의 ‘참여 경제’(‘파레콘’) 모델과 함께 대안 체제 구상과 관련해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끝으로 캘리니코스는 민주적 계획과 같은 ‘최대 강령’의 실현 이전에 반자본주의 운동이 집중해야 할 ‘이행기 강령’으로 ①제3세계 부채의 즉각적인 탕감, ②토빈세 도입, ③자본 통제의 회복, ④보편적인 기본 소득 도입, ⑤주당 노동시간 단축, ⑥공공 서비스 보호와 재국유화, ⑦누진세, ⑧이민 통제 폐지, ⑨환경 재앙을 막기 위한 프로그램 도입, ⑩군산복합체 해체, ⑪시민적 자유 방어 등을 제시한다. 캘리니코스가 여기에서 열거하고 있는 반자본주의 운동의 ‘이행기 강령’들은 그 동안 반자본주의 운동 과정에서 제출된 각종 투쟁 슬로건과 요구들의 정수를 뽑아 낸 것들로서 향후 반자본주의 운동의 행동 강령으로 유용하게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이다.
21세기의 ≪공산당 선언≫
1999년 시애틀 전투 이후 반자본주의 운동과 관련해 국내외에서 수많은 팸플릿과 논문, 저서들이 출판됐지만, 반자본주의 운동을 그 배경과 주요 쟁점, 과제로 나누어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은 캘리니코스의 이 책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다음달 1월 16일부터 21일까지 인도 뭄바이에서 제4차 세계사회포럼이 열린다. 세계경제포럼에 맞서 열렸던 세계사회포럼이 벌써 4회를 맞이했다. 이번 세계사회포럼에는 한국에서도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할 예정이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기치 아래 모인 전 세계 다양한 진보 세력들의 토론과 협력의 장이 될 세계사회포럼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이 책이 출간된 것은 더욱 뜻깊은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캘리니코스는 ≪공산당 선언≫의 형식을 간헐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이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듯이, 이 책도 많은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
≪공산당 선언≫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치 팸플릿 중 하나로 손꼽힌다. 세계 200여 개 언어로 번역돼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혔다는 평가도 있다.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유명한 말로 끝나는 이 작은 책자가 인류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이 몰락하고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외치는 동안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했던 예언은 빗나간 듯 보였다.
하지만 1999년 시애틀 저항 이후 급성장한 반자본주의 운동은 마르크스를 다시 복귀시키고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생산물을 팔 수 있는 시장을 끊임없이 확장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으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누벼야 한다.……부르주아지는 산업의 발 밑으로부터 산업이 딛고 서 있는 일국적 기반을 빼앗아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현재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아주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었다. 또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쟁적 자본 축적은 현재 경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묘사한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이 세계적 규모로 계속되고 있다. 또한 자본의 세계화가 진행되는 정도에 따라 임금 노동자의 숫자가 전 세계에서 증가했다.
그러하기에 캘리니코스는 현 자본주의 사회의 분석의 틀은 마르크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캘리니코스는 이 책의 2장에서 ≪공산당 선언≫ 3장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문헌”의 형식을 차용해 반자본주의 운동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세력들의 정치 지형을 분석/비판하고 있다. 이 둘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일이다.
물론 ≪공산당 선언≫과 ≪반자본주의 선언≫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잘못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1848년 쓰여진 ≪공산당 선언≫과 2003년에 쓰여진 ≪반자본주의 선언≫은 150여 년이 넘는 시/공간적 거리를 극복해 서로를 보완/발전시키고 있다.
지은이 알렉스 캘리니코스 (Alex Callinicos)
1950년 짐바브웨 출생으로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며 SWP의 계간 저널인 ≪국제 사회주의≫(International Socialism)의 편집위원이다. 현재 영국 요크 대학교 정치학 교수다.
번역된 주요 저서로는 ≪마르크스의 사상≫(북막스), ≪노동자 계급에게 안녕을 말할 때인가≫(책갈피), ≪역사의 복수≫(백의), ≪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풀무질), ≪트로츠키주의의 역사≫(백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성림), ≪역사와 행위≫(교보문고), ≪이론과 서사≫(일신사), ≪현대 철학의 두 가지 전통과 마르크스주의≫(갈무리), ≪마르크시즘에 미래는 있는가≫(열음사), ≪알뛰세의 마르크스주의≫(녹두) 등이 있다.
옮긴이 정성진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연구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역서로는 ≪마르크스의 사상≫(알렉스 캘리니코스, 북막스), ≪소련 국가자본주의≫(토니 클리프, 책갈피), ≪연속혁명 그리고 평가와 전망≫(레온 트로츠키, 책갈피), ≪붐 앤 버블≫(로버트 브레너, 아침이슬), ≪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형성 2≫(로만 로스돌스키, 백의) 등이 있다.
정진상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며 현재 사회과학연구원장이다.
주요 역서로는 ≪마르크스의 사상≫(알렉스 캘리니코스, 북막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한국 사회의 이해≫(지이) 등이 있다.
책소개 |
파이를 키우는 것이 먼저인가, 나누는 것이 먼저인가는 시장경제의 오래된 논쟁거리 중 하나다. 현재 세계 경제모델의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세계화'는 선 성장 후 분배를 말하고 있는데, 저자는 이 주장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60∼80년대 거의 모든 경제지표가 세계화가 주창되기 시작한 80∼2000년대보다 훨씬 나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반세계화, 반자본주의 운동의 배경과 주요 쟁점, 과제를 정리한 의미있는 저작이다.이 책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An Anti-Capitalist Manifesto, Polity, 2003)을 완역한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현존하는 마르크스주의 분야의 세계 석학이자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의 지도적 인물로서, 그의 주요 저작들이 이미 대부분 번역돼 출판됐으며, 최근 우리 나라에 자주 방문 강연하여 우리 나라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자본주의 운동 1999년 ‘시애틀 전투’에서 시작돼 올해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있었던 반WTO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반세계화 운동은 1989~1991년 소련?동유럽 블록의 붕괴 이후 인류의 숙명으로 간주돼 왔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결코 인류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웅변하고 있다. 또한 체제에 대한 집단적 저항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의 부활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이론적?실천적 의의를 갖는 새로운 사회 운동 흐름이다. 그런데 반세계화 운동은 흔히 “운동들의 운동”(movement of movements)이라고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점을 빼고는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다양한 운동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99년 제3차 WTO 각료회의를 저지하기 위해 시애틀에 집결한 운동은 세계 각지의 노동 운동, 환경 운동, 농민 운동, 각종 NGO, 좌파 조직들이었는데, 이들은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슬로건 아래 하나로 합류했다. 하지만 오늘날 반세계화 운동의 내부에서 몇 가지 쟁점을 둘러싸고 상이한 입장들이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저지하는 것이 자본주의 틀 내에서 성취될 수 있다고 보는지의 여부, 그리고 이 과제를 기존의 국가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지의 여부, 또 이 과제를 수행하는 주체로서 조직 노동 계급의 중심성을 인정하는지의 여부, 2001년 9?11 대미 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 이후 대두되고 있는 반전 운동과의 연대 여부 등이 그 주요한 쟁점들이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쟁점과 과제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은 이와 같은 반세계화 운동의 주요한 이론적, 정치적 쟁점들과 향후 과제를 자신이 지지하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정리한 책이다. 캘리니코스는 먼저 반세계화 운동이 세계화의 어떤 특정한 양상이 아니라, 세계화 그 자체에 대해 총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또 국제주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이 운동을 반세계화 운동이 아니라 반자본주의 운동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캘리니코스는 이 책 전반부에서 반자본주의 운동의 배경이 되는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금융 불안정과 과잉생산 위기, 환경 위기가 심화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캘리니코스는 최근의 세계화를 시장 근본주의의 전 세계적 확산, 금융세계화 등 주로 경제적 세계화로 이해하는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수 견해에 반대하면서, 오늘날 세계화는 무엇보다 미국 제국주의의 새로운 얼굴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세계화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정치, 군사적 갈등이 격화되고 있으며, 동시에 오늘날 세계화는 '무장한 세계화'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캘리니코스의 핵심 논지다. 그 다음 캘리니코스는 현재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흐름을 ①반동적 반자본주의, ②부르주아 반자본주의, ③지역주의적 반자본주의, ④개량주의적 반자본주의, ⑤자율주의, ⑥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 등 여섯 가지로 분류한 후, 마지막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의 입장에서 앞의 다섯 가지 반자본주의 운동 전략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다소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흐름을 이와 같이 유형화해 비교?분석한 것은 캘리니코스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특히 현재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에서 주류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ATTAC(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과 같은 개량주의적 반자본주의 전략과 최근 일부 좌파들이 지지하고 있는 자율주의에 대한 비판은 매우 날카롭다. 무엇보다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 운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흐름들이 오늘날 세계화의 제국주의적 본질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을 반전 운동과 연계시키지 못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캘리니코스는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전략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지지하는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 노선의 구체적 대안을 정식화한다. 캘리니코스는 팻 데바인(Pat Devine)의 ‘협상 조정’ 모델과 같은 민주적 계획 모델을 시장 경제를 대체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 경제 모델로서 제안한다. 캘리니코스는 나아가 자유?평등?연대와 같은 ‘문명 세계의 가치들’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민주적 계획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 경제 체제를 건설하는 혁명적 변혁의 토대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캘리니코스가 제안한 민주적 계획 모델은 최근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는 마이클 앨버트(Michael Albert)의 ‘참여 경제’(‘파레콘’) 모델과 함께 대안 체제 구상과 관련해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끝으로 캘리니코스는 민주적 계획과 같은 ‘최대 강령’의 실현 이전에 반자본주의 운동이 집중해야 할 ‘이행기 강령’으로 ①제3세계 부채의 즉각적인 탕감, ②토빈세 도입, ③자본 통제의 회복, ④보편적인 기본 소득 도입, ⑤주당 노동시간 단축, ⑥공공 서비스 보호와 재국유화, ⑦누진세, ⑧이민 통제 폐지, ⑨환경 재앙을 막기 위한 프로그램 도입, ⑩군산복합체 해체, ⑪시민적 자유 방어 등을 제시한다. 캘리니코스가 여기에서 열거하고 있는 반자본주의 운동의 ‘이행기 강령’들은 그 동안 반자본주의 운동 과정에서 제출된 각종 투쟁 슬로건과 요구들의 정수를 뽑아 낸 것들로서 향후 반자본주의 운동의 행동 강령으로 유용하게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이다. 21세기의 ≪공산당 선언≫ 1999년 시애틀 전투 이후 반자본주의 운동과 관련해 국내외에서 수많은 팸플릿과 논문, 저서들이 출판됐지만, 반자본주의 운동을 그 배경과 주요 쟁점, 과제로 나누어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은 캘리니코스의 이 책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다음달 1월 16일부터 21일까지 인도 뭄바이에서 제4차 세계사회포럼이 열린다. 세계경제포럼에 맞서 열렸던 세계사회포럼이 벌써 4회를 맞이했다. 이번 세계사회포럼에는 한국에서도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할 예정이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기치 아래 모인 전 세계 다양한 진보 세력들의 토론과 협력의 장이 될 세계사회포럼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이 책이 출간된 것은 더욱 뜻깊은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캘리니코스는 ≪공산당 선언≫의 형식을 간헐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이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듯이, 이 책도 많은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한다. |
[예스24 제공] |
지은이 소개 |
알렉스 캘리니코스 저자 - 알렉스 캘리니코스 - 1950년 짐바브웨 출생으로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며 SWP의 계간 저널인 「국제 사회주의」(International Socialism)의 편집위원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자본론의 논리학」이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 현재 영국 요크 대학교 정치학 교수이기도 하다. 영국 반신자유주의 단체인 글러벌 라이즈 레지스턴스(Globalise Resistance)의 활동가이며, 우리 나라에도 여러 차례 방문해 강연한 적이 있다. 지은 책에 <마르크시즘의 미래는 있는가>, <현대철학의 두가지 전통과 마르크스주의>, <역사의 복수>, <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 <이론과 서사>, <알뛰세의 마르크스주의> 등이 있다. 역자 - 정성진 -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연구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역서로는 ≪마르크스의 사상≫(알렉스 캘리니코스, 북막스), ≪소련 국가자본주의≫(토니 클리프, 책갈피), ≪연속혁명 그리고 평가와 전망≫(레온 트로츠키, 책갈피), ≪붐 앤 버블≫(로버트 브레너, 아침이슬), ≪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형성 2≫(로만 로스돌스키, 백의) 등이 있다. 역자 - 정진상 -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며 현재 사회과학연구원장이다. 주요 역서로는 ≪마르크스의 사상≫(알렉스 캘리니코스, 북막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한국 사회의 이해≫(지이) 등이 있다. |
[엘리트2000 제공] |
목차 |
한국어판에 부치는 저자 머리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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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 좌파의 역사 읽기와 만들기 | 정운영 논설위원 | 2004.07.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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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현대 사회에서 '느림'은 개인의 성격에 기인한 현실 부적응의 태도라는 생각이 팽배해져 있던 것이다. 그러나 쌍소는 '느림'이라는 단어에 대한 현대적 의미-게으름, 나태, 현실에 뒤쳐짐, 무능력-를 거부하고 그 정의를 새로이 하고 있다. 즉, '느림'이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며 어느 한 기간을 정해 놓고서 그 안에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우리를 서두르게 만들고 있는 이 사회,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요구에 따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데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쌍소가 주장하는 '느림'이라는 태도는 어느 정도 우리 사회 현실에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지만, 너무 극단적이며 이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삶의 태도를 어느 한 쪽으로 강요하고 있는 듯 한 논조가 조금은 비논리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을 바탕으로 책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그 적실성 및 논리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쌍소는 '느리게 사는 것'은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허둥지둥 바쁘게 움직이는 생활로부터 결연히 벗어나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쌍소는 그 의미에 대한 공통된 합의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생활의 여유를 가지며 주위를 돌아보고 다시금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 인생을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게 사는 것이라는 이상적인 견해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호한 정의를 바탕으로 자신의 논리를 펼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모든 내용들이 모호해지고 단순히 이상적으로 인식되어지고 만다. 또한, 저자는 "지금 정신없이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것을 꿈꾸겠지만, 현실 속 그들은 영원히 뭔가 결핍 된 듯 한 갈증 속에서 끝없이 바쁘게 살아간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느림은 게으름이나 무력감과는 다른 것이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설득력이 없는 이상적인 삶의 제시에 불과하다. 시간에 쫓겨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과연 그들 모두가 뭔가 결핍 된 듯 한 갈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힘들다. 부족한 시간을 최대한 효율성 있게 활용하며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나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 뭔가 결핍 된 듯 한 갈증 속에서 끝없이 바쁘기 만한 삶이냐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시간을 최대한 효율성 있게 활용하여 최대한의 만족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와 만족감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느림이라는 정의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러한 느낌은 저자가 함께 제시하고 있는 느림을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쌍소는 느림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 우리에게 한결같은 평안함을 보장해 주는 몇 가지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먼저, '한가로이 거닐기'로 나만의 시간을 내서 발걸음이 닿는 대로, 풍경이 부르는 대로 나를 맡겨보는 것을 말한다. 즉, 아무생각 없이 걷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인생이나 나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한가로이 거니는 자세는 현대인에게 부족한 모습인 동시에 필요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한가로이 거닐면서 느림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가져다주는 것이 심적 평안함 이외에 과연 무엇이 더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이러한 심적 평안함은 한가로이 거닐기 이외에도 정신수양을 위한 각종 훈련법 및 체조 등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가로이 거닐기만이 가져다줄 수 있으며 다른 방법과 구별되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다음으로 신뢰하는 이의 말에 완전히 집중하는 '듣기'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잊고 상대방에게 몰입함으로써 오히려 삶은 윤택해진다고 설명한다. 또한, 상대방의 말을 받아 급하게 대화를 몰아가려는 생각을 접어두고 죽은 시간들과 침묵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듣기'의 자세는 단순히 저자가 주장하는 '느림'이라는 큰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지극히 모범적이고 필수적인 자세일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우지 않는 자세의 중요성은 교육과정이나 사회생활을 통해 누구나 터득하고 있는 삶의 진리인데, 그러한 진리를 새삼스레 '느림'이라는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태도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논거의 참신성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사소한 일들을 오히려 소중하게 인정하고 애정을 느끼는 '권태', 우리의 내면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희미하면서도 예민한 의식을 일깨우는 '꿈꾸기', 자유롭고 무한히 넓은 미래의 지평선을 향해 마음을 열어보는 '기다리기', 내 존재 깊은 곳에서 지금은 희미하게 퇴색되어 버린 부분, 우리 안에서 조금씩 진실이 자라날 수 있도록 마음의 소리를 옮겨보는 '글쓰기', 절제라기보다는 아끼는 태도, 그 방식을 따라 보는 '모데라토 칸타빌레'도 훌륭한 느림의 태도로 꼽고 있다. 새삼스레 이러한 느림의 태도에 대해 비판하지 않더라도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삶의 요구 자세라는 것이다. 쌍소는 이와 같이 제시한 느림이라는 태도는 "빠른 박자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지극히 옳고 형이상학적인 말이다. 이러한 말들은 '느림'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를 다양하게 포함할 수 있는 백과사전이나 국어사전에 실려야 할 말들이다. 특정단어에 대해 나름대로 재창조한 정의를 가지고 삶의 태도를 바꾸라고 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또한, 쌍소는 파스칼이 말한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라는 문구를 인용하고 있다. 나는 유명한 이의 격언이나 속담 등을 이용하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단 하나의 문장 등으로 압축력 있게 무언가를 표현하는 아포리즘의 효용은 단순한 압축미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아포리즘은 간단한 단어의 재배열에 의해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불안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쌍소가 인용한 파스칼의 아포리즘 역시 그러하다. 수학의 대우 명제를 사용해 그 문장을 재배열하면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알면 인간의 불행은 단 하나도 없다"라는 말이 된다. 사실이 그러한가? 문구 그 자체로 해석해 봐도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가지이고, 그 것이 휴식할 줄 모르는 데 있다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가? 대우 명제를 통해 보아도 고요한 방에서 휴식할 줄 알면 인간의 불행은 없어지는가? 사실, 나는 프랑스의 유명한 학자인 피에르 쌍소의 유명세와 프랑스 논픽션 부문 1위라는 책표지의 현란한 문구에 유혹 받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유명세와 논픽션 부문 1위에 걸맞은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한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제공받았다. 그와 동시에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를 몸소 체험한 것 또한 하나가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내 시간을 한 없이 느리게 만들어 놓았고, 지나치게 나의 마음에 여유를 두었다는 점. 이 점이 너무도 아쉽다. |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영국 켄트 대학의 사회학 교수 프랭크 퓨레디는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에서 이 시대를 ‘무교양주의’의 시대라 말한다. 무교양주의란 무엇인가? 교양이 부족하고 물질적이고 진부한 것에만 관심을 갖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교양이라는 것이 오늘날에는 없다는 것이다. 대중이 더욱 지적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다고 믿어지는 오늘날 저자의 말은 다소 의아스럽게 여겨진다. 또한 엘리트주의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게 한다. 저자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테다. 그럼에도 저자는 작정한 듯 쓴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오늘날 대중이 누리고 있는 것이, 그리고 믿고 있는 지적이고 교양이라고 하는 것들이 해수욕장의 모래성처럼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먼저 저자는 ‘지식인의 실종’을 이야기한다. 오늘날에도 엄연히 지식인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지식인의 실종을 언급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저자는 과감하게 뉴스프로그램에 나와서 전문분야를 설명하고,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해 대중에게 아부하는 이들은 진정한 지식인이 아니라고 피력한다. 저자에 따르면 지식인은 단순한 전문가가 아니라 광범위한 관심 영역을 토대로 당대의 주요한 사회문제를 고민하고 전망을 제시하는 사람인데 그런 이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지식인이 실종하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자는 특히 ‘지식인의 가치 하락’과 ‘문화상대주의’, 그리고 ‘대중의 바보 만들기’등을 그 이유로 진단하고 있다. 먼저 지식인의 가치 하락은 지식인이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받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실 요즘 엘리트라는 단어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쓰이는데 ‘학벌’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참뜻은 사회에 꼭 필요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급진좌파들의 비판과 함께 지식인들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거센 비판의 대상이 된다. 더군다나 ‘네 의견도 옳고, 내 의견도 옳다’는 일종의 상대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지지는 것도 이런 현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상대주의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토론’과 ‘논쟁’에서 더 좋은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 합의점을 찾아야 할 때 상대주의만이 능사가 아닌데 현대로 오면서 상대주의는 그 영역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지식인이 어느 것에 대하여 솔직한 주장을 꺼냈다고 해보자. 그럼 첫 번째로 직면하는 문제는 엘리트적인 생각이라는 비판이다. 이런 경우 대중은 지식인이 무엇을 이야기했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엘리트라고 공격받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더군다나 상대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지식인의 주장도 맞지만 반대 의견도 맞다는 논리가 나오고 지식인이 그것을 비판한다. 그러면 지식인은 그 태도로 인해 근현대적인 엘리트주의자라고 다시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옳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모습들은 자주 등장했고 결국 이런 문화들은 복합적으로 지식인의 실종을 야기했고 소위 요즘의 지식인들은 전문 분야에서 대중이 알아들기 쉽게 설명해주는 역할에 만족하게 된 것이다. 지식인의 실종과 무교양의 시대가 오게 된 데는 대학의 질적 하락도 한 몫 했다. 저자의 이 주장은 최근에 논쟁을 일으켰던 다치바나 다카시의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와 비슷하다. 예전의 대학생과 오늘의 대학생에 대한 의미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나듯이 요즘은 대학은 더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질적 수준을 대폭 낮추었다. 저자는 그것을 강하게 비판하는데 특히 대학이 대학 고유의 특성을 버리고 기업들을 위한 취업양성소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어 오늘날의 문화를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대중이 지적인 문화를 누리고 있다고 믿게 하는 것도 실상은 대중을 ‘우민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마치 대중을 어린아이 다루듯 하여 무조건 참가하게 하고 무조건 관심 갖게 하여 자신이 진정으로 참가하고 있다고 믿게 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오히려 저자는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지 않은 채, 교육 및 문호활동과 제도에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만을 유도하는 것이 진정으로 대중을 위한 것이냐고 반문하며 그것은 ‘사기극’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것은 도서관이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하여, 편안한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고 각종 오락 시설들을 들여놓아 사람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것이 진정으로 도서관의 문화를 누리는 것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여 책을 보는 이들이 늘었으면 모를까, 오히려 책을 읽는 이들은 줄어들었을 때 그것은 도서관의 본질적인 역할은 명백히 추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요즘은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의 숫자만을 중요시하여 도서관의 본질적인 역할을 아예 외면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저자의 말들은 교육의 기회가 확장되고 문화가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시대에 분명히 역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오늘날이 무교양의 시대라고 한다. 그렇기에 ‘문화전쟁’을 벌이자고 한다. 대중들이 진정으로 ‘황금시대’를 누리기 위해서는 문화전쟁으로 지적이고 문화적인 삶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주장은 과격하다. 오늘날 대중이 믿고 있던 이 세계의 기본적인 틀을 파괴하고 새롭게 건설하자고 하는 그것은 분명 과격한 것이다. 그러나 과격하다하여 피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것이 진실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더 대중의 교양과 문화를 위한 것이라면 더 반겨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렇게까지 쓴 소리를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누가 있었던가? 그래서 저자의 주장이 반갑다. 그래서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의 물음이 반갑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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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한도에서만 그들은 '비정규직'을ㄹㄹㄹ 사랑한다.
2004년. 우리가 '체 게바라'에 열광할 수 없는 이유 | |||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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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체 게바라'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의 꿈은 하늘에서 내려온다.'라던가 '불가능한 것을 꿈꾸라'처럼 사람들이 간혹 인용하는 격언도 썩 내키지 않는다. 빨간 표지의 체게바라 평전을 읽지 않은 것도, 서점에서 일할 때 총무 형이 당시 유행하던 체게바라 포스터를 주겠다고 했을 때도 한참을 고민하다 머쓱하게 거절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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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교정·미용관련 제품 중 효능·효과를 과장한 광고 많아 -
(2005.05.25)
최근 외모 중시 풍조가 확산되면서 착용하기만 하면 가슴이 커진다거나 영구적인 주름제거가 진행된다는 등의 건강보조기구 광고가 범람하고 있다. 그러나 광고에서 주장한 효능·효과가 없고, 심지어 부작용이 발생했다는 소비자불만 및 피해가 적지 않아, 소비자들의 주의가 요망된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이 2005년 1월 한 달동안 7개 일간지와 5개 여성지에 게재된의 신체교정 및 미용 관련 건강보조기구 31개 제품(의료기기 11개, 의료기기 아닌 제품 20개) 광고를 분석한 결과, 10개 중 7개의 광고가 객관적 근거없이 효능·효과를 과장하는 등의 허위·과장광고인 것으로 나타나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광고에 의료기기 표시가 명확하게 되어있지 않아 의료기기와 의료기기 아닌 제품의 구별이 어려워 소비자가 오인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조사됐다.
■ 의료기기가 아닌데도 질병치료 효과를 암시하기도 해
의료기기가 아닌 20개 제품광고를 분석한 결과, 70.0%(14종)가 허위·과장성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행『의료기기법』에서는 의료기기가 아닌 것은 의료기기와 유사한 효능·효과가 있는 것으로 오인될 우려가 있는 광고를 금지하고 있으나, 15.0%(3종)가 '시력 회복', '질병 개선' 등 질병 치료효과가 있는 것처럼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땀과 지방을 빨아들여 허리 군살 확실하게 조여 줍니다', '영구적인 주름제거가 진행된 상황' 등 객관적 근거없이 효능·효과를 과장한 광고가 65.0% (13종)나 되었고, '일본에서 인정받은' 등 객관적 근거없이 수상·인증 표현을 하거나 자사의 인기도를 과장한 광고가 35.0%(7종)로 밝혀졌는데, 이들 역시 『표시·광고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상 부당한 광고로 볼 수 있다.
< 광고 표현 예시 >
유형 |
비율 |
광고내용 |
질병치료 효과가 |
15.0% |
▲시력 회복 |
객관적 근거없이 |
65.0% |
▲땀과 지방을 빨아들여 허리 군살 확실하게 조여 줍니다. |
객관적 근거없이 수상·인증 |
35.0% |
▲이미 일본, 대만 등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
■ 허가받은 효능은 근육통 완화인데도 디스크에 효과있는 것처럼 광고
의료기기 허가를 받은 11종 광고제품 중에서도 63.6%(7종)가 허위·과장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36.4%(4종)는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허가받은 효과가 근육통 완화에 불과한데도 디스크에 효과가 있는 것처럼 암시하는 등 허가받은 치료효과 이외의 효과를 주장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성능이나 효능 및 효과 또는 그 원리에 관한 허위·과대광고를 하거나(7.7%, 1종), 전문가 또는 의료기관의 추천·사용으로 오인할 수 있는 광고도 있었는데(27.3%, 3종) 이들 모두 『의료기기법』상 광고 금지 행위에 해당될 수 있다.
한편, 11종 광고 모두 해당 제품이 의료기기임을 명확하게 표시하기보다는 식품의약품안전청 제품허가 표시방식 등을 각각 다르게 기재하고 있어, 소비자들의 혼란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지적됐다.
< 광고 표현 예시 >
유형 |
비율 |
광고내용 |
허가받은 치료효과 이외의 |
36.4% |
▲디스크란? 본래 한번 걸리면… |
성능·효능·효과 또는 |
7.7% |
▲가슴사이즈를 영구적으로 확대시키고 올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
전문가·의료기관의 |
27.3% |
▲황○○박사가 제품을 들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게재 |
■ 조사대상 광고 대부분이 기본정보 표시 미흡해
『전자상거래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통신판매는 통신판매업자 상호·주소·통신판매업 신고번호 등의 기본정보를 표시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건강보조기구 관련 광고에는 대부분 주문전화와 대금입금계좌번호가 기재되어 있어 통신판매로 볼 수 있는데도 대부분의 업체가 기본정보를 제대로 표시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보면, ▲판매업체 주소 미기재 93.5%(29개) ▲판매업체 상호 미기재 16.1%(5개) ▲통신판매업 신고번호 미기재 67.7%(21개) 등이었다.
■ 주문한 제품이 광고와 다르거나 효과가 없다는 소비자불만이 가장 많아
2004년에 의료기기와 이·미용기구 관련 소비자상담·피해사례 중 광고와 관련된 건은 185건이었다. 유형별로는, '제품이 광고와 다르거나 효과없다'는 불만이 44.9%(83건)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광고를 보고 문의하자 제품이 일방적으로 배송되는 등 계약관련 불만' 33.5%(62건), '품질 및 A/S 불만'이 9.2%(17건), '부작용 발생' 8.1%(15건) 등으로 나타났다.
【사례 1】부작용 발생 |
■ 의료기기 광고기준 강화와 자율심의 제도 등의 도입 필요
건강보조기구는 인위적으로 신체를 변형시키거나 신체에 직·간접으로 작용하는 기구로, 특히 의료기기는 소비자가 효과와 안전성을 판단하기 어려우므로 일반 공산품과는 구별되는, 적절한 정보제공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한국소비자보호원은 해당제품이 의료기기임을 광고상에 반드시 표시하고 허가된 효능·효과, 부작용 등 필수 기재사항에 대한 관련 기준을 강화하는 내용을 『의료기기법』에 반영해 줄 것과 의료기기 광고 사전심의제도, 유사 의료기기 광고의 상시 모니터링 제도 등의 도입을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청 등에 건의할 예정이다.
아울러, 관계기관(식품의약품안전청, 공정거래위원회)에 허위·과장광고 업체에 대한 단속 강화도 요청할 계획이다.
【첨부】『건강보조기구 광고 실태 조사 - 신체교정 및 미용관련 기구를 중심으로 -』결과(요약)
보충취재 |
정책연구실 거래개선연구팀 팀장 장 수태 (☎3460-3311) |
차장 최 윤선 (☎3460-3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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