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애의 <일요일의 손님>

정준영의 만화 읽기 - <일요일의 손님>

 

이정애의 작품은 당혹스럽다. 동성애를 연상시키는 중성적 분위기의 등장인물들 탓은 결코 아니다. 그림체가 일본 동성애 만화와 다소 비슷하더라도 그 의도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사실 동성애를 그리고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람!). 나를 어지럽히는 것은 지적인 듯 하면서도 매우 감성적이고, 환상과 현실이 어지러이 교차하는 소재와 플롯. <일요일의 손님>에 실린 단편들이 특히 나를 괴롭힌다. 이정애는 도대체 무얼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어지러움증을 느끼면서도 나는 여전히 이정애를 팽개치지 못한다. 다소 고생스러운 반성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순수함에 대한 추구가 자꾸만 나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열왕대전기>가 조금 과도했고 <루이스 씨에게 봄이 왔는가>는 조금 나이브했다면 <일요일의 손님>에서는 순수함에 대한 집착이 균형 있게 응축되어 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바로 사랑. 이정애가 애써 찾아 헤매는 것은 순수한 사랑의 의미인 것이다.

 

너무 진부하고 통속적이라고? 그러나 그 사랑을 성장이랄지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조건과 결부시킨다면 더 이상 성급한 판단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성홍열>이나 <쁘띠 샹카라>가 그리고 있듯이 성장이란 본래 세속화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따뜻하고 충만한 세계를 상실해 버리고 차갑고 외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것 말이다. 이 외로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우리는 다시 나를 채워 줄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블루 타키온>, <살인광 시대>, <익살스러운 사냥>). 그래서 이정애의 주인공들은 즐겨 과거에 고착되어 있다(<일요일의 손님>). 또는 그 과거는 엉뚱한 모습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나를 습격한다(<용왕의 근심>, <블루 타키온>, <익살스러운 사냥>).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것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과의 교감을 성취해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존재의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정애의 중성적 인물들은 사랑의 세속적 의미에 휘말려 들지 않고자 하는 그의 전략이며 세상과 불화하는 인물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용왕의 근심>과 <익살스러운 사냥>에서 이정애는 계급이나 소수집단과 같은 사회학적 요소로까지 그의 관심을 확대시키지만 작품에 미만해 있는 감성 탓에 별로 성공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아홉편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성장의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는 <성홍열>과 <쁘띠 샹카라>이다.

 

386세대인 이정애(그는 1963년생이다)에게 1990년대는 세속의 세계였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그 변화를 성장이라고 얘기하겠지만 그것은 또한 상실의 과정이기도 한 것. 그 득실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실이 훨씬 더 컸다는 것에 주저없이 한 표를 던지고 싶다. 그래서 아마 나는 이정애를 결국 던져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출처 : 한나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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