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칼럼

얼마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대한항공 땅콩회항을 소재로 갑질을 이야기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마지막에 유행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처럼 갑질과 거리가 먼 아름다운 사례를 보여주면서 문제의 원인 또는 해법을 개인의 도덕성에서 찾으며 마무리하였다.  

 

필자는 <그것이 알고 싶다> 애청자로서, 이런 진부한 결론에 대해 애정어린 조언을 하고자 한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런 관점은 사회적으로 해롭다

그것이 해로운 이유는, 그런 관점이 사회악을 한 개인의 인성문제로 축소시키면서

더이상 악의 구조적인 실체를 깊이 파고들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들은 사회진보를 위한 "어떤 필수적인 조건"을 발견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정답이 아닌 것을 정답으로 믿고 있으면

정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기에 영원히 정답을 찾지 못한다

 

사회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도덕에서 찾으려는 태도는 <그것이 알고 싶다>만의 관점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단체·교육기관이 취하는 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기회에 이 관점의 본질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면, 갑중의 갑은 돈이다.

그래서 갑질은 돈질이며 돈을 개혁해야 사라진다.

돈은 갑질의 도구가 아니라 본래의 목적대로 중립적인 교환매개물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늘 잘 나가다가 끝에 가서 사람의 도덕심에 호소한다.

그것은 진부한 이야기이며, 그런 방법으로는 세상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불균형론의 제1명제에서 말했듯이, 모든 현상은 "불균형에 대한 보상"이다.

우리가 보상으로 드러난 결과에 집착하고 그 결과만 바로잡으려고 애쓴다면 문제해결은 멀어질 것이다

불균형이 그대로 남아서 그에 대한 보상압력이 계속 작용하기 때문이다

돈을 개혁해서 수요·공급의 불균형 자체를 바로잡아야만

그에 대상 보상으로 발현된 사회적 증상이 전부 사라진다.

 

여기에 포도 한 송이가 있다고 하자.

시간이 흐르면 썩거나 포도주가 될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썩을 것이고 어떤 곳에서는 포도주가 될 것이다

썩느냐 포도주가 되느냐는 포도가 처한 환경조건에 달려있다

아무도 썩어가는 포도를 바라보면서

"넌 나빠, 왜 포도주가 되지 못하는 거니?"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 미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부패하거나 비리·범죄를 저지를 때

"넌 나빠, 왜 깨끗하게 살지 않는 거니?"라고 비난하는 말이

근본적으로 어리석다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은 참으로 적을 것이다.

(범죄를 합리화하는 이야기가 아님을 주의할 것.)

 

우리는 강자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걸 보면서

"강자는 악이요, 약자는 선"이라는 프레임에 빠지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약자와 강자의 위치를 바꾸더라도 마찬가지다

강해진 사람은 다시 약해진 쪽을 괴롭힐 것이다

갑질은 그 개인의 퍼스낼러티 문제가 아니라 경제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도덕은 이런 경향을 어느 정도까지 상쇄할 수도 있지만 그 효과는 보다시피 미미할 것이다

여기저기 갑질이 튀어나오면 사람들은 서로 손가락질하며 허둥댈 것이다

 

기존경제질서는 돈이 이자를 낳고 땅이 지대를 낳는다

이자와 지대는 불로소득의 원천이며, 불로소득은 일하지 않는 자가 일하는 자를 착취하여 얻는 것이기 때문에 불로소득 자체가 갑질이다

또, 돈은 그 액면가가 유지되기 때문에 쌓아둘 수 있다

때문에 돈은 상품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우위를 차지하고 상품교환을 언제든지 끊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돈소유자가 갑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을 더 많이 소유할수록 더 많은 교환을 끊을 수 있고 그래서 돈이 권력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경제를 마비시킬 수 있는 힘이다

따라서 이런 비정상적인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고 매번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적인 도덕심에 사회진보를 맡긴다면 그 실패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포도주가 향기롭게 익어가는 환경에 두면 포도는 저절로 향기로운 술이 될 것이다

그 포도품종이 우수하든 우수하지 않든 술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돈이 더이상 이자를 낳지 않고 정기적으로 감가상각되며

땅이 지대를 낳지 않고 공동체로 환원되는 환경에서는,

어떤 사람의 경제적 행위이든 대부분 사회적으로 착한 결과를 맺을 것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의 본성이 그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선한 결과를 맺는 것이다

('선한 사람'이 아니라 '선한 결과'임에 주목하자)

돈이 정기적으로 감가된다면 돈을 쌓아두면 손해를 보므로

이익을 좇는 사람의 본성에 의해 돈은 상품·노동과 교환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막힘없는 경제흐름이 이루어진다

땅이 지대를 낳지 않고 공동체로 환원된다면

노동대가를 지대로  빼앗기지 않고 고스란히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차지하게 된다.

땅을 둘러싼 이해가 충돌하지 않으므로

"캐치프레이즈가 아닌 실제로서 세계평화"가 이루어진다

   

그 때 사람들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선의 실체는 "악의 부재"일 뿐이며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

착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악해질 이유가 없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동기·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비합리적인 경제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선악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전복시키려고 한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선한 상호작용, 악한 상호작용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뉴스에 나오는 죄인들을 정죄하려 들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 정도로 악한 상호작용에 관련되지 않았을 뿐 우리 자체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누구라도 어떤 환경에서는 괴물이 될 수 있다

누구라도 어떤 환경에서는 성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악하지 않은 마음'이 아니라 '악해질 필요가 없는 환경'이다.

 

인류역사상 수많은 성인들이 "착하게 살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이야기했건만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는 점을

모든 교육기관과 종교단체는 주목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착했던(?) 그 성인들이 모두 죽고 난 다음에

누가 "착하게 살라"고 말한다면 "너나 잘하세요"라고 우리는 대꾸할 것이다

누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착하게 살라"는 말은 냉소적인 반응만 얻는다

그 말이 얼마나 무력한지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미 알고 있다

따라서 그런 무의미한 시간낭비를 할 시간에,

우리는 사회적으로 악한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람의 본성에 맞게 경제구조를 다시 세팅해야 한다

 

실비오 게젤의 <자연스런 경제질서>는

마이크로이코노미와 매크로이코노미가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즉, 경제영역에서 개인이 자기 이익에 충실할수록 사회도 혜택을 입는다

도덕은 더이상 개인의 욕망과 부딪히지 않는다

실비오 게젤의 표현을 빌리면, "악을 좇으나 선을 이루는 것"이다

그 때 인위적인 도덕 대부분은 소멸할 것이다.

(애초에 ‘도덕’이란 경제질서의 결함으로 인한 부작용을 상쇄하기 위해

대중들에게 요구되고 도입되었던 것이니까.)

새로운 종류의 인류, 새로운 타입의 상호작용이

실비오 게젤의 “자연스러운 경제질서” 아래에서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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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6 20:58 2015/01/16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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