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서평] 복지국가 슬로건 뒤에 숨겨져 있는 것들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지금 복지국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읽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복지’, ‘복지국가’, ‘복지정책’ 등의 개념들이 사회적으로 가장 처음 화두가 된 것이 언제인가? 아마도 2012년 대선을 염두에 둔 박근혜가 2년 전, ‘한국형 복지국가’가 필요하다며 보다 더 적극적인 복지정책의 도입을 주장하고 나선 이후부터일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복지정책에 대한 논의는 있었는데, 주로 (지금은 없어진?) 진보정당들이 주축이 되어 무상의료라던가 무상교육 등의 의제를 각종선거에서 주요 공약으로 제기해왔다. 하지만 대중들의 머릿속에 ‘복지’라는 단어가 각인되기 시작한 것에는 무엇보다 박근혜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복지’라는 단어의 대중화에 박근혜가 기여했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어쩌면 자존심이 좀 상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박근혜마저 복지정책을 운운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가장 보수적인 우파 정치인이 ‘복지국가’를 비장의 카드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로 인한 대중의 고통이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대중의 고통을 등에 업은 채 시작된 복지국가 논쟁은 현재 어디까지 진행돼 왔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복지 국가 논쟁은 2011년 10월 ‘무상급식’으로 촉발된 서울시장 선거에서 정점을 찍고 난 이후 4․11 총선을 거치며 ‘경제민주화’이슈로 쟁점이 변화되면서 잠시 소강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경제위기의 암운이 짙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복지’에 대한 열망은 아직까지도 대중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경감시켜줄 수 있는 대안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궁금증은 과연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복지국가가 가능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정치세력은 복지국가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정치세력에 비해 많지 않은 것 같다. 복지국가가 가능하다는 입장의 근거는 복지정책을 실현하는 데 소요될 재정이 충분하진 않더라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중들의 삶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 곳에 쓰이고 있는 이른바 ‘전시성’ 예산들을 복지예산으로 돌리고, 감세 정책을 증세로 전환시키면 복지정책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들을 살펴보면 복지정책을 단순히 국가 재정의 확충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좀 더 무식하게(?) 말하자면, 돈만 많으면 복지정책을 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복지정책은 단순히 국가재정하고만 관련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규모가 가장 큰 미국이 유럽보다 복지정책 측면에서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지국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전제는 무엇인가? 복지국가의 성립과정에 대한 역사적 관찰, 그리고 지금의 현실이다. 그 두 가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와 <지금 복지국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책을 비교해보는 게 유용하다.


비그포르스, 그는 누구인가?

우선, 먼저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이 책의 저자 홍기빈의 설명을 빌자면 비그포르스는 “스웨덴의 재무부 장관이자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최고 이론가로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스웨덴 정치 경제 모델을 설계하고 건설한 인물”이다. ‘비그포르스’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친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얼마 전부터 몇몇 시사주간지 등을 통해 사회민주주의의 창시자 내지는 대표 이론가 격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881년에 태어난 비그포르스는 대학에 들어간 이후, 1903년부터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외곽 청년 조직인 사회주의청년연맹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08년, 사회민주당의 당수였던 브란팅의 부탁을 받고,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이라는 글을 집필하여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 논쟁에 관한 스웨덴 사민당의 이론적 입장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1918년 헌법 개정을 통해 모든 성인 남녀의 참정권이 법적으로 보장된 이후, 1920년 스웨덴 사민당은 집권당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여기서 비그포르스는 ‘산업 민주주의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리고 그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사가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가운데 노동 측이 경영에 참여하는 공동결정”의 형태가 ‘산업 민주주의’라며, 자본 측도 이러한 구상에 적극 협력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현실화되지 못하고, 1926년 사민당은 실각한다. 



사회화 강령 대신 ‘나라 살림의 계획’

저자는 비그포르스에 대해 뛰어난 정치적 지도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보긴 힘들다고 하면서도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이념을 확고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그포르스가 스웨덴 사민주의의 새로운 이념을 확립할 수 있었던 계기란 무엇일까?

저자는 대공황이 막 시작되던 1932년 5월, 스웨덴 사민당 당 대회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급진파들의 사회화 강령에 반대하기 위해 들고 나온 비그포르스의 발언이 역사의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1917년 치머발트 회의 참가를 주장하며 사민당에서 떨어져나갔던 세력들은 1926년 다시 사민당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이들은 1932년 5월 당 대회에서 당면한 선거를 앞두고 대공황에 맞서 사회화 강령을 슬로건으로 내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 내 급진파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비그포르스는 지금까지 사회화 강령이 당의 경제 정책 입안에 엄청난 해악을 끼쳐왔다며 당면 선거의 중심 명제는 사회화가 아니라 “나라 살림의 계획”이 되어야 한다고 맞서게 된다. 

비그포르스가 말한 ‘나라 살림의 계획’이란 실업률이 높을 때 국가가 직접 나서서 산업을 조직해야 한다는 기본 논리를 바탕으로 한 주장이다. 저자는 이러한 비그포르스의 생각이 케인스의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 출간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선 것이라며 케인스의 핵심 개념들이 이미 비그포르스의 정책 속에도 포함돼 있다고 강조한다.


스웨덴의 사민주의의 기초

저자의 주장대로 비그포르스의 발언이 스웨덴 사민당의 경제정책 방향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치자.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가 가능했던 이유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몇몇 활동가들의 정치적 입장에만 범위를 국한시켜서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때 당시 스웨덴이 여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늦게 산업화에 뛰어든 후발 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스웨덴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대공황의 늪에서 빨리 탈출하게 되었던 데에 있다. 

스웨덴이 대공황의 늪에서 빨리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스웨덴의 제조업 경제는 이미 1920년대 내내 호황을 누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공황의 여파가 밀려오고 1933년에는 11.9%였던 실업률이 23.3%까지 두 배 이상 치솟게 된다. 그러나 그 다음해가 되면서 다시 실업률이 떨어지고 비교적 빠른 기간 내에 안정을 찾는다. 스웨덴 경제가 이처럼 큰 탈 없이(?) 대공황의 늪을 건널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책에도 언급되어있는 몇 가지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1931년 스웨덴이 금본위제를 탈퇴하면서 급격한 환 가치 하락으로 크로나가 과소평가되었는데, 이로 인해 수출이 급격하게 살아났던 점, 그리고 당시 긴장이 고조되던 유럽의 지정학 정세에서 독일의 군비확장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면서 수출이 활성화된 점 등이 그 원인일 것이다. 

스웨덴 사민주의를 가능하게 한 것은 경제적 상황을 바탕으로 한 물질적 기초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스웨덴에서 복지 정책이 발달하게 된 또 하나의 원인으로 ‘인구문제’를 지적한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출생률이 급격하게 감소했는데, 이 때 당시 스웨덴의 가장 큰 사회 문제 중 하나였던 인구 문제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사회 자체의 복합적인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인구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보편적 복지정책의 도입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1937년 혼인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임산부 개인에게 출산 수당을 지급하는 정책이 제일 처음 도입된 복지정책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근거를 뒷받침한다. 

 

 

 

지금도 유효한가?

 

스웨덴의 사민주의는 1938년, 스웨덴전국노동조합총연맹(LO)과 경영자총연맹(SAF)이 스톡홀름 인근의 휴양지 살트셰바덴에서 노사 대타협 협약을 맺으면서 안착된다. 그리고 곧이어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국가가 직접 경제전반을 관리하는 전시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민주의의 헤게모니가 더욱 강화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지금도 사민주의가 유효할까? <지금 복지국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의 저자 아스비에른 발은 “복지국가가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노르웨이에서 노동조합운동을 해왔던 저자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25년 동안 철도노동자로 일했던 한 여성노동자의 사례를 소개한다. 노르웨이 국립 철도에서 릴레스트렘 역의 검표원으로 일했던 이 여성노동자는 2004년 강직성 척추염의 악화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여성노동자가 자신의 질병을 인정받고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장애연금을 받게 되기까지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르웨이의 사례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간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를 인정받게 되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투여되었던 것과 비교해본다면 감지덕지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비롯한 사민주의 국가들이 지금의 남한 사회보다 더 선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민주의 국가들이 남한 사회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의 사민주의 국가는 예전부터 우리가 알아왔던 그 모습 그대로의 사민주의 국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일부 부르주아 정치세력들, 그리고 진보진영은 하나의 대안으로써 북유럽 사민주의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갖고 있다. 이러한 환상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복지국가의 기반은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아스비에른 발은 일단 역사적으로 볼 때 복지국가가 국민의 전반적인 삶과 근로조건을 크게 개선시켰으며, 인류 역사상 이런 측면에서 따져볼 때 복지국가에 비견될 만한 것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복지국가모델을 일반화시켜 어디에서나 가능한 시스템이라고 말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복지국가가 발달하게 된 특수한 역사적 조건과 배경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스비에른 발은 복지국가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부터 1970년대 들어서까지 특히 북유럽에서 발달했으며, 이것이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복지국가 모델이 등장하기에 앞서 노동운동의 치열한 투쟁과 민주주의의 약진이 두드러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분석한다. 20세기에 일어났던 일들 중에서 노동운동의 집단투쟁보다 개인의 자유에 더 많이 기여한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개발된 이 사회모델을, 그것의 역사적, 사회적 기원과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권력관계와 따로 떼어놓고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복지국가가 사회적 진보의 축적만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주요 세력들, 노동과 자본 사이의 타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국가는 엄연히 노동운동의 이해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의 이해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과 자본 사이에 이뤄진 역사적 타협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가? 노동조합의 관점에서 보면 계급타협은 사실상 자본가들이 생산을 조직하고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또 생산을 관리할 권한을 갖는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한마디로 말해 노동을 관리하고 분배할 권한을 자본가들에게 넘겼다는 뜻이다. 아스비에른 발은 여기에 덧붙여 자본가들이 치른 가장 중요한 희생은 노동조합을 인정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자본가들과 그들의 조직이 노동조합운동을 패배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취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타협은 “투쟁과 대결을 통해 얻은 힘의 결과”였던 것이다.


극적인 후퇴

복지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타협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벌어진 경제 복구와 재건이 종지부를 찍으면서, 케인스주의적 시스템과 함께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자본가들과 정치 엘리트들이 복지국가의 황금기 동안 잃고 있었던 특권을 다시 찾기 위한 공세에 돌입하자 노동조합운동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스비에른 발은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타협이 구체적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 불안정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탈이데올로기화와 탈정치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복지국가의 후퇴는 노동운동의 영역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영역도 마찬가지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복지정책이란 사실상 사회적 안전과 공공서비스를 대표하는 것들이고, 이러한 제도들과 서비스 대부분이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에 대한 일정정도의 규제를 담보로 하여 만들어진 복지정책을 무력화하려면 이것의 근간인 민주주의적 절차에 대해 공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992년, 스웨덴의 자본가들은 앞서 말한 1938년의 살트셰바덴 협약 파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노르웨이 역시 시장 권력과 사법권의 강화로 민주주의가 약화되고 있다고 아스비에른 발은 지적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훼손하려는 시도들이 초국가적 합의와 제도로도 이어지고 있으며, 유럽연합의 경제정책 같은 경우에도 상당부분 탈민주화를 통해 제도화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단체협약에 대한 공격과 노동의 재상품화

아스비에른 발이 복지국가의 후퇴로 인해 노동운동이 약화되었다고 보는 근거 중 대표적인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이 바로 단체협약이다. 그는 사회의 근본적인 권력관계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작업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복지국가의 타협과 제도들의 바탕이 되는 것도 바로 작업의 조직화와 생산 결과의 분배, 작업이 수행되는 조건 등을 놓고 빚어지는 정치적 갈등 및 권력관계인데, 이러한 인과관계들이 바로 ‘단체협약’에 집약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체협약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강제될 수밖에 없었던 비인간적이고도 야만적인 경쟁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해왔던 수단이다. 이처럼 노동조합과 단체협약은 여러 복지제도들과 함께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들이 보다 더 우월한 위치를 점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해왔으며, 이로 하여금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으로써의 노동의 성격을 크게 약화시키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가능케 했다. 아스비에른 발은 에스핑 안데르센(Esping Anderesen)의 용어를 빌리며 북유럽 복지국가모델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러한 “노동의 탈상품화”였다고 꼽는다. 

하지만 지난 몇 십년동안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계속되면서 우리가 경험한 것은 바로 이 “노동의 탈상품화”에 대한 역전현상이었으며, 노동의 탈상품화는 반대방향으로, “노동의 재상품화”과정으로 진행되었다. 노동의 재상품화 과정은 노동유연화를 동반하며 노동 그 자체를 이전보다 더욱 더 비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노동조합화가 거의 이루어져있지 않은 서비스 산업 부문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을 크게 증가시켰다. 아스비에른 발은 이른바 ‘워킹 푸어’의 숫자는 미국이 가장 크지만 지금의 북유럽 모델 안에서도 그런 저임금 노동자들의 집단이 형성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며, 이들에 대해 ‘버거 프롤레타리아’(거리의 가게에서 햄버거를 파는 사람들에서 따온 표현)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모든 선진 경제에서 서비스 부문이 3분의 2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이 중 상당 부분이 노동집약적이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이 부문에 대한 노동유연화와 비용절감이 심해질 것이며, 이는 노동운동의 추가 약화와 권력관계에 있어서의 추가 이동을 불러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사회제도와 공공예산, 사회적 혜택의 총합이 대안이 될 순 없다

 

복지국가의 역사적 성립 과정과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면 과연 무엇이 우리의 대안이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복지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홍기빈과 아스비에른 발은 매우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아스비에른 발이 무엇보다 권력투쟁에 대한 분석이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복지국가의 발달 원인을 분석하고 있는 홍기빈의 설명에는 당시 사회의 정치․경제적인 상황에 대한 분석이 부족해 보인다. 

남한의 좌파 학자들이나 진보진영 정치인들이 줄기차게 복지국가가 가능하다고 외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복지국가 모델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는 둘째 문제로 치더라도, 어쨌든 복지국가 모델이 지금의 체제 중에서 가장 우월해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스비에른 발은 ‘복지국가모델을 수출하기 위한 분석들이 비역사적이고 피상적인 이해에 그치고 있다’며 “지금과 같은 권력균형 하에서는 개발도상국에 복지국가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복지국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권력투쟁에 대한 분석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복지국가는 결코 사회제도와 공공예산과 사회적 혜택의 총합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스비에른 발은 지금 현재 가장 중요한 사회 문제가 ‘양극화’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의 실마리를 1999년 가을에 벌어졌던 시애틀 투쟁에서 찾고 있다. WTO 정상회의를 막기 위해 벌어진 이 투쟁을 두고 그는 “역사상 그렇게 많은 조직에서, 또 그렇게 많은 국가와 대륙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 적은 그 때까지 한 번도 없었다”며 이것은 기술혁신의 하나인 인터넷의 활용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놀라움을 표시한다. 

그리고 비록 시애틀 투쟁 이후 성사된 사회포럼운동이 이론적․정치적 명쾌함과 단결력의 부족으로 쇠퇴하긴 했으나 이러한 방식의 활동이 하나의 대안을 향한 실마리가 될 수 있으며, 새로운 방식의 투쟁은 기존의 정당에만 국한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민주주의의 약화가 신자유주의 공세의 기본적인 특징이며, 대의민주주의로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조건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스비에른 발이 이 책을 출간한 시기는 2009년이었다. 그가 2012년 상반기에 일어났던 아랍민주화투쟁이나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SNS를 보고 이 책을 썼다면 또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을까 궁금해진다.) 

노르웨이에 살면서 복지국가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는 아스비에른 발의 분석은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남기고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복지국가는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타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타협이 성사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이전에 치열하게 분출했던 대중들의 투쟁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2012년 지금, 남한의 상황은 어떠한가? 지금의 노동운동세력이 자본가들과 협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만약 복지국가를 요구했을 때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까? 복지국가 슬로건이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은 그저 몇 가지 시혜적인 수준의 정책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만이라도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낫겠지만 ‘복지’라는 말이 화두가 되게 만든 지금의 피폐한 현실에 대한 근본적 처방이 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너도 나도 복지를 외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저 똑같은 말들을 되풀이하며 따라서하기 이전에 왜 지금 이 순간 그 요구가 그토록 중요한 구호로 외쳐지고 있는지, 지금의 이 상황이 몇 가지 정책의 도입으로 해결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사회구조적 차원의 변화가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 이면을 넘어 심연을 들여다보려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