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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진실_2

은유적 표현을 좋아한다.
실생활에서는 직설화법을 더 구사하는 편이지만...쩝...

해체주의자들은 기의에서 기표로 이행한다.
데리다는 기표를 찾는 가정이 무한하다고 했다. 기표는 기의로 치환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의 역시 기표로 치환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미는 쉽사리 하나로 고정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자신자신과 동일할 수 없다. 기호는 다른 맥락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동일할 수 없고 의미는 각 맥락마다 다르다. 즉 기의는 그것이 얽혀있는 다양한 기표의 연쇄에 의해서 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게 아닐까?
 


요게 몰까?


다덜 아시겠지만 요거죠^^

그런데..?

 


요거래는데요? 하~ d^^b

-->인터넷 어딘가에서 퍼옴

 

어린왕자의 보아뱀을 보면 아래의 모자가 실재로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재미있는 그림도 발견했다. 보아뱀안에는 실재로 이런게 들어있는거라고…

 

의미는 흩어진다. 그리고 은유는 이러한 의미가 흩어지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은유는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규정지어주며 은유를 통해서 다른 세계에 도달하는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얼까?
고민의 지점은 다시 돌아온다.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누가봐도 파이프인데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는거..말장난하는거겠지라고 소홀히 넘길수도 있겠지만 마크리트의 이론적 토대가 그닥 녹록지 않음을 푸코는 설명하고 있다.
푸코는 마크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그림을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텍스트와 형상을 가까이 배치하는 것, 즉 그림이 <재현하는>것을 텍스트로 하여금 <말하게>하는 것.

그것은 기존의 담론체계를 무너뜨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림은 확언이 아니다. 언어기호와 조형요소 사이의 분리, 유사와 확언의 동등성. 이 두원칙이 고전회화의 긴장을 구성했었다. 후자는 언어 요소가 조심스럽게 배제된 회화 담론을(말이 있는 곳에 확언이 있다) 재도입했다. 거기에서 고전회화가 언어외부에서 자신을 구성하면서도 말을 한다는 사태가 비롯되었으며, 거기에서 회화가 조용히 담론적 공간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 생겨났고, 거기에서 회화가 자신 아래에 이미지와 기호의 관계를 되살릴수 있는 일종의 공통의 자리를 갖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구상화이지만 어떤 추상화보다도 짜릿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마크리트의 그림들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주는 그러므로 이미지의 은유적 표현만이 다양한 기의를 드러낸다는 건 또 아니다라는 거다.


흐흠..점점..어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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