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80주년 창간기획 <춘추정병시대> 1회 장르만 청년 1면에 실린 첫번째 청년생존매뉴얼. 웹툰 <저궤도인간>의 조은영 작가가 기자들의 취재일지를 토대로 청년이 세상에 스며들기 위해 지켜야할 지침을 그렸다.
대기업 직장인 신우연(32·가명)은 3년 만난 연인과 서로의 패를 공개했다. 우연의 부모가 지원하기로 한 돈은 3억원. 상대가 마련할 수 있는 돈은 그 반의 반에도 못 미쳤다. “이 결혼을 하면 엄마한테 미안하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둘의 결혼은 끝내 불발됐다. 회계법인에 다니는 이수현도 부모에게 3억원은 받고 싶다. 2년마다 이삿짐을 싸는 삶은 상상하기도 싫다. 그래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던 남자는 최악이었다. 3억원. 수현은 그게 가능한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우연과 수현이 동시에 말한 ‘3억원’이란 수치는 공교롭다. 양가로부터 최소 3억원을 물려받고, 두 사람이 모은 돈에 대출까지 끌어모으면 10억원대 아파트를 살 수 있다. 그러면 서울 강북의 외벽 페인트칠이 헤진 구축 아파트에 겨우 가닿는다. 어떤 청년들에겐 부모에게 받는 3억원이 계산의 출발점이자, 생존 커트라인이다. 이마저 무너지면 서울에서 영영 밀려날지 모른다.
자연스레 계산서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부모다. 김연정(29·가명)이 남자친구와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양가 부친들이 따로 만나기 시작했다. 사업하는 아버지와 연구소 다니는 아버지의 만남은 두세 차례 더 이어졌다. 결론은 빠르게 나왔다.
“집은 시댁, 혼수는 우리 부모님께서.” 연정의 결혼은 그렇게 술술 풀렸다. 결혼은 두 사람의 결합이지만, 두 집안이 뛰어드는 공동 사업이기도 했다. 교육, 입시, 주거 등 생애주기 전반을 부모의 자장 안에 머물러온 청년들에게 결혼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사랑은 필수지만 사랑만으론 부족한 시대. 결혼이 계급을 완성한다. 맞벌이 신혼부부 비율도, 부부 합산 연소득 1억원 이상 신혼부부도 증가세다. 증여·상속을 통한 주택 매수도 꾸준히 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청년에게 허락된 삶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출발선 격차는 이미 아득하다. 지난해 청년 가구 순자산 상위 20%(평균 9억3022만원)와 하위 20%(2301만원)의 격차는 40배에 달했다. 월급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차이. 결혼은 그 격차에 쐐기를 박는다. 최근 정부가 ‘결혼 페널티’를 없애고, 결혼 건수도 늘고 있지만 의미 있는 변화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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