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는 1936년 1월 1일자 지면에서 일왕을 떠받들었다. 14년 뒤인 1950년 6월 28일에는 호외를 찍었다. 인민군의 서울 입성을 알리며 "우리 민족의 경외하는 수령인 김일성 장군 만세"를 실었다. 두 지면을 낸 사장은 모두 방응모였다. 권력이 바뀔 때마다 지면도 함께 돌아섰다.
뉴탐사 역사탐사는 8일 '친일파 추적' 연재의 마지막 회를 방응모와 조선일보에 할애했다. 방응모의 친일 행적과 그 뒤를 이은 사주 일가의 가족사를 짚었다. 대법원이 방응모의 친일 행위를 일부만 인정한 판결도 다시 꺼냈다. 친일 행위 세 가지 가운데 법원 문턱을 넘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친일 단체가 세운 신문
조선일보는 1920년 친일 단체 대정실업친목회 주도로 창간했다. 발기인 39명 가운데 32명이 이 단체 소속이었다. 민영기가 회장, 이완용이 고문을 맡은 단체다. 부회장 조진태가 초대 사장에 올랐다.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조만식 등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차례로 사장을 맡았다.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같은 기자들이 들어와 조선총독부와 부딪쳤다. 총독부는 윤전기를 세우고 정간을 거듭했다. 신문사 자금줄은 말라 갔다.
금광 매각 대금으로 사들인 신문사
그 틈에 방응모가 들어왔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그는 서당 훈장과 대서사, 여관업을 거쳤다. 1922년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을 맡았다가 1924년 금광 사업에 뛰어들었다. 1926년 평안북도 삭주 교동광업소에서 금맥을 찾았다. 1932년 이 광산을 일본 중외광업에 135만원을 받고 팔았다.
그 돈으로 1932년 조선일보 인수에 나섰다. 하지만 곧바로 사장 자리에 앉지는 못했다. 김단야 기자 등이 반대해 처음엔 영업국장에 머물렀다. 1933년 3월 경영권을 넘겨받아 부사장이 됐고, 7월에야 사장에 올랐다.
사장이 되자 친일 행보가 곧바로 시작됐다. 1933년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 구입비 1600원을 헌납했다. 이후 조선신궁봉찬회 발기인 겸 고문,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을 맡았다. 1935년에는 잡지 '조광'을 창간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경성방송국에서 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했다.
총독부가 주최한 시국강연에도 나섰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도 지냈다. 조광 11월호 권두언에는 일본 국민으로 충성하라는 글을 실었다.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경성지역 발기인을 맡았다.
대법원이 인정한 건 하나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방응모의 친일 행위로 세 가지를 꼽았다. 조광에 일제에 동조하는 논설을 싣고 징병을 권유한 일이 첫째다. 군수회사 조선항공공업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일이 둘째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활동이 셋째다. 위원회는 세 가지 모두를 친일 행위로 판단했다.
대법원 1부는 2016년 11월 9일 이 가운데 조광 논설만 친일 행위로 인정했다. 주심은 김용덕 대법관이었다. 조선항공공업 감사 활동은 운영에 관여한 증거가 없다며 친일로 보지 않았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활동은 1심에서 친일로 인정됐지만 2심에서 빠졌다.
방응모는 해방 뒤 정치에도 손을 뻗었다. 1950년 5월 제2대 총선에서 경기도 양주군 갑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사회당은 조소앙 선생의 동생 조시원을 이곳에 내세웠다. 조시원은 유세 내내 방응모의 친일 행적을 알렸고, 결과는 조시원 당선이었다. 방응모는 2위로 낙선했다.
방응모는 1950년 7월 6일 북한군에 끌려갔다. 그해 6월 전쟁이 터진 직후였다. 그 뒤 생사는 공식 확인되지 않았고, 사망 시점을 두고 여러 설이 엇갈린다.
독재 정권과도 손잡다
권력에 기대는 지면은 해방 뒤에도 이어졌다. 1980년 8월 23일 조선일보는 '인간 전두환'이라는 특집을 실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를 나흘 앞둔 때였다. 육사 입학 시절 사진까지 곁들여 전두환을 띄웠다. 기사에는 기자 이름이 없었다. 당시는 기사 실명제가 자리 잡기 전이었다.
같은 해 언론통폐합을 기획한 인물도 조선일보 출신이었다. 허문도 전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비서관은 조선일보 기자와 도쿄 특파원, 외신부 차장을 지냈다. 1980년 11월 언론사 사주들은 보안사령부로 불려가 각서에 지장을 찍었다. 통신사는 연합통신 하나만 남았고 지방지도 정리됐다. 조선일보는 이 시기를 지나며 발행 부수 1위로 올라섰다.
양손자 계보와 이미란 사건
지금의 조선일보 사주 일가는 방응모의 직계 혈통이 아니다. 방응모는 아들을 얻지 못하자 친형 방응곤의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들였다. 방재윤의 아들이 방일영, 방우영이다. 방응모가 납북될 무렵 양손자 방일영은 스물일곱, 1944년 얻은 친아들 방재선은 일곱 살이었다. 신문사 경영은 방일영 쪽으로 넘어갔다. 방상훈 조선일보 회장과 방용훈 전 코리아나호텔 사장이 방일영의 아들이다.
방용훈 전 사장의 부인 이미란씨는 2016년 9월 한강에 몸을 던져 숨졌다. 경찰은 자녀들을 공동존속상해 혐의로 검찰에 넘겼다. 검찰은 처벌이 훨씬 가벼운 강요죄로 바꿔 기소했다. 법원은 2019년 1월 두 자녀에게 강요죄 유죄를 선고했다. 이씨는 생전에 이혼 상담도 받았다. 친정 쪽은 한 법무법인이 조선일보와 엮이면 망한다며 상담 기록을 지워 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사건 뒤에도 갈등은 이어졌다. 방 전 사장 부자는 이씨 언니 집 현관문을 돌로 내리치다 CCTV에 찍혔다. 경찰과 검찰은 처음에 사건을 덮었다. 친정 쪽 항고와 재수사 끝에 방 전 사장 부자는 벌금형 약식명령을 받았다. 방 전 사장 쪽이 이씨 형부 김영수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은 혐의없음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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