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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 '드라큘라', 전쟁의 시대에 어떤 의미일까

오동진

ohdjin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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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파리로 옮겨간 뤽 베송 감독의 신작

드라큘라 캐릭터에서 순애보만을 강조한 작품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결말 등 바꿨는데···

오동진 영화평론가

뤽 베송의 신작 <드라큘라: 러브 테일>은 너무 빨리 만든 작품이다. 일각에서는 너무 늦게 만든 작품이라고 얘기할 테지만 거꾸로다. 너무 빨랐다. 리메이크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는 얘기다. 세기의 문학인 브램 스토커 원작 『드라큘라』를 영화화한 것으로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만든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1992)를 능가할 수 있는 작품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코폴라의 영화는 걸작이었다. 원작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걸작은 적어도 100년은 간다. 그러니까 뤽 베송은 한참 더 있다가 이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코폴라의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만들어진 지 34년밖에 되지 않았다.

 

기득권에 억눌린 사회에서 욕망의 해방을 느끼게 한 원작

그러나 뤽 베송은 전작의 어느 부분을 바꾸고 어느 부분을 재해석할지를 놓고 상당히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설정만큼은 코폴라의 영화를 거의 그대로 따라갔다. 영화 초반부는 일종의 아류 작품을 만든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건 한편의 거대한 오마주 영화가 아닌가 하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주요 부분, 특히 결말을 대폭 손질했다.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완전히 엇갈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브램 스토커의 소설이 발표된 것은 1897년의 일이고,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과학 기술과 의학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부르주아들이 주도하는 신 사고의 시대였다. 그러나 상부구조로는 여전히 빅토리아 시대(1837~1901)였다. 여성들에게 코르셋을 입혀 허리를 바짝 조이게 할 만큼 성적 억압을 사회적으로 규범화하던 때다. 관능, 욕망, 이단, 아웃사이더는 차별받았다. 이때 브램 스토커가 창조한 캐릭터가 바로 뱀파이어 백작 드라큘라이다.

 

그는 루마니아에서 온 인물이다. 외부인이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이민자다. 그런 그가 정통의 영국 귀족사회를 흔들어 놓는다. 상류층 여인들의 목에 이를 박고 피를 빨아 먹는다. 브램 스토커의 흡혈 묘사를 읽으면서 당시 영국 여성들은 마치 남편 아닌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욕망의 해방을 느꼈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공포 소설이 아니라 기득권에 저항하는 새로운 세대의 물결로 받아들여졌다. 이 작품이 120년이 넘도록 불멸의 소설로 남아 있는 것은 그 같은 혁명성 때문이다.

원작의 혁명적 이슈 제거된 뤽 베송판 드라큘라 순애보

그러나 뤽 베송은 그 혁명적 이슈를 삭제했다. 그건 극 후반에서 드라큘라 백작이자 원래는 왈라키아 성의 영주인 블라드 2세(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피범벅이 된 채 자신을 죽이러 온 사제(크리스토프 왈츠)의 가슴에 칼을 겨누는 장면에서 암시된다. 신부는 칼을 겨누고 있는 백작을 약간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너는 신과 싸우는 게 아니야. 너 자신과 싸우고 있는 거지. 너는 신의 이름으로 (전쟁에서) 사람들을 죽인 게 아니야. 너의 욕망 때문에 죽인 거야. 신은 너를 구하라고 나를 보내셨다.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 그러자 드라큘라는 말한다. “언제는 죽을 기회도 주지 않고서는 지금에 와서 나를 구원하겠다? 나에게는 오직 내 아내만이 구원이야.” 신부가 응수한다. “근데 너는 지금 네 아내를 파멸시키고 있는 거야.”

 

뤽 베송은 드라큘라 영화를 드라큘라의 순애보로 바꾸고 싶어 한다.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 1489년부터 1889년까지 400년을 이어 온 사랑. 그는 아내인 엘리자베타가 현세 프랑스 파리에서 미나 머레이(조이 블루 1인 2역)로 환생한 것을 자신의 수하가 된 마리아(마틸다 데 안젤리스)를 통해 알게 된다. 마리아가 알려 주기 전에 드라큘라 본인도 자신을 찾아온 부동산 변호사 조너선 하커(에웬 아비드)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다. 미나는 하커의 약혼녀이다. 마리아는 영국 왕실의 조카인 헨리 스펜서(데이비드 쉴즈)와 결혼식 도중 추기경을 보고 발작을 일으킨 끝에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마리아는 정신이상이 일어나기 전 미나를 만나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고 (주인인 드라큘라의 부인이라는 것)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했던 상태다. 그런 마리아를 의사인 뒤몽(기욤 드 톤쿠에데크)이 치료하다가 (퇴마 전문)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들은 마리아를 통해 미나와 하커, 그리고 악령의 본진인 드라큘라에게 접근한다. 대 혈투가 예고된다.

드라큘라에게 목덜미 바치려 애쓰는 귀부인과 수녀들

액션을 좋아하고 장면마다 이런저런 액세사리를 끼워 넣는 취향의 뤽 베송은 이번 영화에도 자기만의 낙관을 여지없이 집어넣었다. 드라큘라가 아내를 찾는 데 지쳐, 뱀파이어 네트워크를 만들 요량으로 뭇 여인들의 목을 빨아서 그녀들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만드는 장면 같은 것이다. 이때 그는 여인들을 유혹하기 위해 인도의 카나시에서 구해 왔다는 향수를 쓴다. (이 장면은 명백히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드라큘라는 궁중 무도회를 휘젓고 다니며 귀족 여인들의 목에 이빨을 박는다. 뤽 베송은 이 장면을 마치 그가 여인들과 왈츠를 추는 것 같은 느낌으로 찍었다.

 

그렇게 이곳저곳의 콘텐츠에서 가져온 듯한 씬이 적지 않은데, 드라큘라가 정신병동이 있는 수녀원에 침입할 때 수녀들이 집단으로 그에게 유혹되는 장면 같은 것도 그렇다. 수녀들은 그의 몸에 자기 몸을 밀착시키고 겹겹이 인간탑을 쌓으면서 그의 얼굴을 만지고 그에게 목덜미를 바치려고 애를 쓴다. 원래는 상당히 에로틱한 장면이 될 수 있고 난교처럼 보이게 찍을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2006년에 만들어진 톰 티크베어 감독의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의 마지막은 광장에서의 난교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뤽 베송은 이를 마치 피나 바우쉬의 현대무용처럼 찍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관능미의 대표 격 배우 모니카 벨루치를 내세워 고딕풍 에로티시즘을 표현하려 애썼던 반면 뤽 베송은 드라큘라의 순애보를 강조할 생각이 강했던 탓인지 수위가 높을 법한 장면은 꽤 자제한 것으로 보인다.

드라큘라가 회개하고 자신의 여인 위해 희생한다고?

원작은 런던이 배경이지만 프랑스 감독인 만큼 배경을 파리로 옮겼다. 대사는 영어로 진행된다. 후반부에 드라큘라 성을 공격할 때 프랑스 군부대가 동원되고 병사들이 성안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이 장면도 뤽 베송답다. 그의 액션 취향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드라큘라가 회개하는 데다 자기 여인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대목은 원작이 가진 드라큘라적 ‘스피릿’을 훼손해도 이만저만 훼손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드라큘라는 지성이 아니라 야성이며, 규율이 아니라 반칙이고,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 혹은 반주류이며 종교적 복종이 아니라 거기에서 일탈하는 존재이다.

 

뤽 베송은 이런 드라큘라를 순화시켰다. 일종의 앙시앵 레짐 느낌을 준다. 그건 마치 2008년에 나왔던 <트와일라잇>이란 영화를 연상시키는데 주인공인 뱀파이어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는 애인인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너무나 사랑해 그녀의 피를 마시지 않는다. 그는 피의 갈증을 참는다. <트와일라잇>은 흡혈귀 영화 중에서 가장 팬시한 작품으로 기록됐다. 당시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이었다. 드라큘라 영화의 정치적 지형은 시대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오간다. 뤽 베송은 순수한 흡혈귀 영화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이 캐릭터에 깃들어 마땅한 돌발성, 저돌성을 탈색시켰다. 뤽 베송이 보수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 그랬거나.

전쟁과 전염병의 시대, 새 드라큘라는 어떤 성과를 거둘까

코폴라의 영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오래 기억되는 것은 드라큘라 역의 게리 올드만 때문이기도 했다. 악마의 카리스마를 그만큼 명징하게 연기해 낼 수 있는 배우도 많지 않다. 게리 올드만은 심지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이번 뤽 베송 영화 속 드라큘라 역의 케일럽 랜드리 존스는 게리 올드만과 비교된다. 어쩔 수가 없다.

전쟁과 전염병의 시대에 뤽 베송은 왜 드라큘라 영화를 재현하려 했을까. 다행스러운 일은 뤽 베송의 의도와는 달리 시대와 세상을 바꾸는 데 있어 드라큘라 같은 존재, 드라큘라 같은 정치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화는 종종 의도치 않았던 방향의 길목에서 뜻밖의 성과를 거두곤 한다. <드라큘라: 러브 테일>은 지난 8월 26일 개봉했다.

오동진 ohdjin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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