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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둘째 문장: "reines Auffassen"
"es hat ihn nur zu nehmen, und sich als reines Auffassen zu verhalten; was sich ihm dadurch ergibt, ist das Wahre. Wenn es selbst bei diesem Nehmen etwas täte, würde es durch solches Hinzusetzen oder Weglassen die Wahrheit verändern.”
("[이때] 의식은 대상을 그저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rein=순수하게)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의식에게 안겨지는 것이 참다운 것이다. 의식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뭔가를 [자의적으로] 행한다면, 이런 행위는 [대상에] 뭔가를 더하거나 빼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왜곡할 것이다.")
정신현상학 서론 §1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거기서 이야기된 자연[발생]적인 의식은 이미 감각적 확신이 사념하는 {대상}+{의식}의 직접성(Unmittelbarkeit={의식}과 {대상}이 떨어지지 않고 찰싹 붙어서 하나인 상태=비분리성)이 허구라는 걸 경험한 의식이다. 달리 표현하면, 감각적 확신이 자기 자신이 이미 의식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뭔가를 구별함과 동시에 그것과 관계하는 것”(정신현상학 서론 §10)이란 의식구조가 감각적 확신에서는 즉자적이었던 것이 지각에 와서는 대자적인 것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근데 언뜻 보면 지각하는 의식은 아직 감각적 확신에서 덜 떨어진 것 같다.
지각하는 의식이 아직 덜 떨어졌다는 느낌은 그가 처음 취하는 태도를 볼 때 그렇다. 그는 대상을 단지 취하기만 하면 된다("ihn nur nehmen")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nur'는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제한과 함께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는, 손쉬운 일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인식이란 단지 절대적인 것을 아무런 변화 없이 단지 우리 곁으로 당겨오는 일일 뿐이라는 생각에(정신현상학 서론) 상응하는 태도다. 이런 인식에 아무런 노력(노동?)이 필요 없다는 생각은 감각적 확신과 같지 않나 한다.
지각하는 의식의 ‘취함’(nehmen)은 ‘nur'에 의해서 모든 능동성을 빼앗긴 온통 수동적인 태도다. 뭔가를 담아내는 그릇과("아교“ 정신현상학 서론 §1) 같다. 그래서 ’Auffassen‘을 능동성이 아직 약간 남아있는 ’파악‘으로 번역하지 않고 ’담아내는 그릇‘(Fass=통)으로 번역했다.
이런 태도는 대상과 의식 간의 분리는 전제하지만 그것이 의식과 대상 간의 관계와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점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대상의 이중구조도(정신현상학 서론 §10) 인식하지 못한다. 분리의 이런 절대화는(“schlechthin", 정신현상학 서론 §1) 의식으로 하여금 사이비적인 가상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지각하는 의식은 자기가 필연적으로 이런 사이비적인 가상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알아채는 순간 회의주의에, 즉 대상의 진리는 알아차릴 수 없게 완전히 뚝 떨어져있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나 한다.
감각적 확신과 지각의 공통점은 둘 다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 점은 오성 역시 마찬가지다. 사념, 지각, 오성은 다들 ‘의식의 양식’("Weisen des Bewusstseins“)으로서 사라지게 된다(‚오성’ 장 마지막 부분). 정신현상학은 의식이 정신이 되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라고 볼 때, 사념, 지각, 오성 모두가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모른다는 것, 즉 자기의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중차대한 문제다. 의식의 이 길은 필연적으로 회의주의로 향하는 길이다.
근데 왜 모르지? 감각적 확신이 지각하는 의식이 된 것은 단지 우리/헤겔이 그를 꾹꾹 찔러서 그렇게 되어서 그런가? 지각하는 의식이 대상을 손님맞이하듯이 받아들이지만, 손님과 함께 찾아온 ‘제3자는 불청객’(‘der ungebetene Dritte')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가? ("우리는 노동력을 불렀다. 근데 사람들이 왔다.”/"Wir haben Arbeitskräfte gerufen, und es sind Menschen gekommen." Max Frisch) 아니면, 손님은 손님뿐이어서 거기에 참관할 수 없는(=주체가 될 수 없는) 제3자일뿐이기 때문인가?(“Ich bin hier nur ein Gast.“/”나는 여기 단지 손님일 뿐이다.“=여기 참관할 수 없는 제3자일뿐이다)
불청객으로 찾아온 제3자란? 감각적 확신을 꾹꾹 찔러서 단지 말하게 혹은 지시하게 하지만 않고 채찍질 하여 일하게/노동하게 하는 주인? 그런 관계아래 대상과의 관계가 그저 받아들이는 관계가 아니라 ‘노동하는/실천적인 관계’가 될 때 비로소 자기의식이 발생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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