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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의 철학’과 ‘정치적 실천’
조은평_건국대 강사, 철학
1. 기억의 조각 둘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이다.’
이 말을 처음 들은 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저자를 안지 얼마 안 되었던 무렵, 막걸리 집이었던 것 같다. 그 술좌석에서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저자가 내뱉듯이 던진 한마디. 당시로선 막 걸음마 걷듯이 맑스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던 나는, 이 문구가 누구의 말이고 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또 다른 기억 하나. 그 이후 대학원 생활을 함께하면서, 학교 밖에서의 저자의 활동들도 알게 되고 그 덕분에 나도 ‘한노정연’에 회원으로 가입해 철학 세미나에 참가하게 되었던 그 무렵이었을 게다. 철학 세미나 텍스트 문제로 조언을 구하다가, 당시 저자도 전교조 선생님들과 ‘세계철학사’를 함께 보면서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때 난 왜 소비에트에서 나온 책이자 그것도 사람들이 고리타분해 하는 철학사로 세미나를 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더구나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소위 ‘정통’ 맑스주의에 대한 엄청난 비판이 한참 전에 휩쓸고 지나갔고, 당시에 그러한 낡은 교과서 같은 책으로 맑스주의를 공부한다는 것이 왠지 내게는 어리석은 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꽤나 흐른 이제는 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저자가 이번에 내놓은 책은 어떤 의미에선 저자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총정리하고 있고, 그 때문에 저자의 철학적 입장 또한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막연하게 품고 있던 의구심이 해소될 수 있었다.
철학이든 과학이든, 그 어떤 이론도 기본적으로 선택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 그런 의미에서 순수한 자연의 푸른색처럼 순수한 이론은 없고, 또 그러한 순수한 이론을 추구하는 것이 어떤 위험성이 있고,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저자의 맑스 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과 철학의 과제 설정을 접하게 되면서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또 그렇게 낡은 교과서를 통해 저자가 하고자 했던 작업이 무엇이었는지도 분명해졌다. 소위 ‘정통’으로만 치부해, 마치 우물물 버리려다 애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맑스주의 내부에서 화석화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한 철학의 근본문제를 재평가하려는 작업이 아마도 당시 저자의 목적이었을 게다.
만약 이러한 추측이 맞다면, 저자가 이번에 한권의 책으로 완결해낸 작업은 대단히 성공적이다. 그리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부럽다. 하지만 아무리 부럽다 하더라도, 나로서는 근접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저자 스스로 ‘책머리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작업은 그 혼자만의 성과는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그가 대학시절,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접해 왔던 ‘비철학(철학의 외부)’의 역사 없이는 이러한 작업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현재의 내 입장에선 그 경험의 역사를 단번에 뛰어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서평 역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저자의 주요한 입장들을 소개하고 정리해보는 게 전부일 듯싶다.
2. 맑스는 왜 탈현대적 지평을 걸어야 할까?
우선 저자의 문제의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왜 저자는 맑스로 하여금 탈현대적 지평을 걷도록 하고 싶었을까? 탈현대적 지평이 과연 어떠하기에, 죽은 맑스를 부활시켜 걸어가도록 해야 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은 책의 1,2부에 잘 드러나 있다. 먼저 1부에서 맑스주의가 어떻게 ‘정통’으로 화석화되었으며, 탈현대 담론들의 집중포화를 맞으며 마침내 ‘맑스주의의 위기’를 넘어 ‘해체’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는가를 조망한다.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단일한’ 맑스주의 진영의 해체, ‘전지구적 자본주의화’라는 신자유주의 물결로 초래된 현실의 참담한 분열과 파괴가 탈현대의 현실적 지형이라면, 탈현대의 이론적 지형은 한마디로 ‘존재론의 도래’이자 ‘철학의 과잉’이다.
‘정통’ 맑스주의가 지식-권력화 된 것에 대해 맑스주의 내부로부터 맑스를 해체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더구나 모든 근현대성을 해체하려는 탈현대 담론들로부터 맑스는 근대성의 산물이자 ‘노동자 계급’을 주체로 설정하는 헤겔식의 ‘목적론’으로 이해되면서 근본적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지형에서 구성되는 맑스는 ‘새로운 맑스’, ‘맑스를 넘어선 맑스’이며, 이때 맑스는 ‘존재론’과 새로운 ‘철학’에 의해 부활되는 ‘스피노자-니체-들뢰즈의 맑스’이다.
물론 저자가 이러한 ‘탈현대 맑스주의’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단지 ‘정통’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또 다른 ‘정통’으로 오해될지 모른다. 하지만 결코 저자는 ‘정통’의 입장에서 ‘탈현대적 담론’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맑스주의의 위기와 해체’ 과정에서 간과되고 있는 그 ‘무엇’을 다시 확인하고, 적극적으로 ‘탈현대 맑스주의’와 토론하면서 맑스를 탈현대적 지형에서 되살리려 한다.
그 ‘무엇’이란 바로 ‘정통’ 맑스주의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화석화시켜 버린 ‘물질과 의식’이라는 철학의 근본문제와 이에 대한 맑스의 유물론적 문제설정이다. ‘정통’ 맑스주의는 물질과 의식에 관한 문제를 ‘의식이 일차적이냐, 물질이 일차적이냐’라는 선차성의 물음으로 제시함으로써 관념과 실재의 일치를 일대일의 대응관계로, 또한 의식을 단순히 물질의 반영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의 선차성’과 ‘반영론’이 결합되면서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은 ‘변증법과 유물론’의 결합이자 ‘과학적 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의 가장 참담한 결과는 ‘스탈린주의’였고, 그 때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을 제공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과학으로 선언되고, 그 과학을 대표하는 ‘이성의 화신으로서의 당’은 어떤 오류도 없는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으로 변질되었다.
따라서 저자가 보기에 탈현대 맑스주의자들처럼 단순히 ‘정통’ 맑스주의를 근대적 이성이 초래한 ‘전체주의’의 화신으로 보고 해체하는 것은 맑스주의의 근본 문제를 간과한 채 현상적 모습만을 비판하는 것에 불과하다. ‘정통’은 해체되어야 하지만, 그처럼 ‘정통’이 변질된 근본적인 이유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책의 2부는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을 재고찰한다. 우선 저자는 물질과 의식에 관한 철학의 근본문제를 ‘물질과 의식’의 일치 혹은 ‘물질이 일차적인가, 의식이 일차적인가’라는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 사이비 물음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철학적 범주로서의 물질과 의식은 서로 근본적으로 갈라져 있을 수밖에 없다. 물질과 의식의 완전한 일치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어떤 의미에서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려는 의지에 불과하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일치가 아니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그 누군가가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그 어떤 철학을 통해 자기 밖의 세계로 초월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바로 그 자신이 우리 밖의 세계를 주어진 전제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물질의 선차성을 인정하는 유물론적 태도이자 선택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물론은 우리가 이러한 물질적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철학적 태도이다. 이제 이러한 유물론적 태도에 기반해서 확인해야 하는 것은 ‘존재 형태가 다른 물질과 의식이 과연 상호 교통될 수 있는가’이다.
바로 이러한 물질-의식의 소통 가능성을 확보해 주는 것은 ‘육체’이다. “육체는 존재형태나 방식에서 물질과 동질적이다. 의식은 이런 육체의 산물이 아닌가? 따라서 육체는 물질과 동질적인 존재이다. (이처럼) 양자가 동일한 존재형태에 속한다면, 물질과 의식 사이의 소통은 가능하다.” 저자는 이미 맑스 이전에 스피노자와 포이에르바하에 의해 준비되고 있던 ‘물질-의식을 소통하게 하는 매개고리(육체)’를 발굴하면서, 맑스의 입장을 재확인한다.
우선 데카르트의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실체와 이러한 이원론으로부터 야기되는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스피노자가 제기한 ‘사유하는 육체’를 물질과 정신의 매개고리로 끌어온다. 아마도 여기에 머문다면, 요즘의 스피노자-맑스주의 노선으로 그대로 이어질 테지만, 저자는 이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저 평가되고 있는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적 전통을 다시 복원하고자 한다. ‘헤겔은 단지 육체 없는 사유(절대정신)의 특권으로 통일성을 완성할 뿐’이라는 포이에르바하의 비판에 주목하면서, ‘육체의 활동으로서의 사유’라는 테제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선이 맑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맑스가 보기에, 인간은 이미 자연의 일부이다. 예를 들어 ‘배고픔이 그것 밖에 존재하는 (자연의) 대상에 대한 내 육체의 욕구’이듯이, ‘인간은 직접적으로 자연존재’이다. 그러나 이때 육체는 그 자체로 자연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이성, 오성과 같은 의식에 속하는 것들을 포함하는 인간 자신의 유기체적 생명력 그 자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유와 존재는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서로 통일되어 있다.”
결국 저자는 스피노자-포이에르바하-맑스로 이어지는 유물론의 전통을 복원하면서, 맑스주의 철학을 다음과 같은 ‘실천적 유물론’으로 정립한다.
1. 철학은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선택하는 초월적 의지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존재론을 함축하며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2. 그러므로 철학의 근본문제 역시 물질-의식의 일치, 물질의 선차성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제기될 수 없다. 물질과 의식의 소통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물질과 의식이 소통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과연 그러한 ‘소통의 매개고리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3. 소통의 매개고리는 물질적이면서도 의식적인 ‘육체’이다. 이처럼 육체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는 인간은 이제 더 이상 특권화된 근대적 이성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육체를 통한 소통은 이성, 감성, 욕망이 상호 관계하고 어우러지는 육체 그 자체의 실천활동이다.
4. 의식은 물질적 형태를 그대로 전유할 수 없다. 즉 물질과 의식의 일대일 대응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식은 물질이 제공하는 기반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물질은 의식의 ‘중심성’이자 ‘한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3. 탈현대적 지평과의 대결 속에서 구성되는 맑스
이제 저자의 문제의식과 탐구의 방향은 명확해진다. 철학의 근본문제를 경유해서 맑스를 탈현대적 지형 위로 끌어 올리는 것. 사실상 이러한 작업에서 저자가 거쳐 갈 수밖에 없는 길은 탈현대적 맑스주의와의 공유지점과 결별지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3,4부에서의 논의는 바로 ‘육체’라는 매개고리를 중심으로 이 작업을 진행한다.
일단 스피노자의 ‘사유하는 육체’와 ‘코나투스적 욕망’이라는 주제는 적극적으로 수용되며, 이점에서 저자와 탈현대 맑스주의는 일치한다. 하지만 저자의 작업에서 의미 있는 부분은 이러한 일치라기보다는 탈현대 맑스주의와 ‘맑스’의 결정적인 차이를 밝혀내는 데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니체-들뢰즈로 이어지는 탈현대적 맑스주의의 노선을 탐구하는 저자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비판적 독해를 전제로 한다.
저자는 일단 ‘사유하는 육체’라는 문제설정을 제기한 스피노자와 포이에르바하에서 출발하면서도, 스피노자와 니체로 이어지는 탈현대 맑스주의의 ‘육체’와 ‘욕망’에 대한 논의에 칼날을 들이댄다. 한마디로 니체를 경유하는 탈현대적 맑스주의의 유물론은 육체를 논하지만, 그때의 육체는 맑스의 ‘실천활동으로서의 육체’라는 의미보다는 존재론적으로 이해된 ‘코나투스적 힘’ 혹은 자연화된 ‘육체의 욕망’으로만 이해된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적 비판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경우 ‘육체’를 일정한 방식으로 강제하는 사회적 장에 대한 논의는 부차적으로 밀려나고, ‘육체’와 ‘욕망’은 존재론적인 입장 내지 자연화된 틀 속에서만 이해된다.
물론 들뢰즈를 통해 재해석되는 스피노자-맑스주의는 이데올로기론의 가능성을 연다는 점, 또 인간 본성으로 ‘코나투스적 욕망’을 부각시킴으로써 근대적 이성에 억압되었던 인간의 자유를 이러한 코나투스에 적합한 삶을 생성하는 ‘힘’으로 이해하고 ‘긍정의 철학’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가 있다. 그러나 맑스의 실천철학과 탈현대 맑스주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 맑스의 실천철학은 실천 그 자체의 힘의 근거를 탈현대 맑스주의처럼 자연적 속성 그 자체에 두지 않고, 오히려 특정한 물질적 구조의 효과, 삶의 존재성이 유발하는 ‘모순의 효과’에 둔다.
둘째, 탈현대 맑스주의에서 철학은 코나투스적 역능성을 가두는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데 그 실천적 역할이 주어져 있기에, 이들의 관심사는 우리의 이데올로기를 생성하는 물질적 삶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물질과 실재는 확장되며, 우리의 관념들을 생성하는 모든 것들이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으로 이해된다. 이 결과, 철학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물질성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실천으로만 나아간다. 이에 비해 맑스의 실천철학은 철학의 내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외부, 즉 계급투쟁의 장이자 생산의 내적 모순을 그대로 담지하고 있는 수행자들이 상호 충돌하는 장을 철학의 기본적 생성 장소로 설정한다. 그리고 이때 육체는 자연적 속성이 전개되는 양태가 아니라 사회-역사적 관계 안에서 형성되고 만들어지는 육체이다.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확인한 이후, 저자는 4부에서 탈현대 맑스주의의 입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비판해 들어간다.
저자는 탈현대 맑스주의의 존재론을 ‘차이의 철학’으로 규정하고 ‘모순과 특수의 존재론/모순의 변증법’과 대비시킨다. 우선 ‘차이의 철학’은 차이들을 단순한 구별들로 환원하고 구별과 대립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 결과 차이들을 강제하는 질서가 지닌 위계를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차이는 오히려 적대의 질서를 따라 절합되고 구획된다. 차이가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대해 적대(모순)가 선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또한 ‘차이의 철학’은 차이 그 자체로 모든 운동을 ‘생성’으로 일반화하지만, 대립을 통해 모순을 포착하는 ‘모순의 철학’은 운동이 하나의 강제적인 힘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제시한다. 들뢰즈의 잠재성은 모든 존재의 운동, 특이성의 운동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이긴 하지만, 그 때 그 가능성은 강제되는 가능성이 아니라 우연한 마주침의 산물일 뿐이다. 운동의 중심성은 사라진다. 하지만 맑스는 모든 운동을 생성으로 보지 않으며, 불가피하게 강제되지 않는 가능성을 진정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차이의 철학이 가진 실천적 한계를 확인한다. ‘차이의 철학’은 과학을 해체하는 이데올로기 비판과 철학적 실천에만 머물 뿐, 적극적으로 과학을 기획할 수 없다. 또 전체주의 비판과 윤리학으로만 실천의 과제를 제시할 뿐, 현실을 강제하는 중심성에 기반을 둔 ‘조직운동으로서의 정치’를 고려하지 못한다는 것이 주된 비판이다.
결국 저자가 구성하는 맑스 철학의 출발점은 철학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 철학이 마주쳐야 하는 그 외부를 분명히 하는 데 있다. ‘철학의 실천’이 아니라 ‘실천의 철학’으로의 역전. 철학의 생산은 철학 내부로부터 주어질 수 없고 비철학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인식과 사유의 매개고리는 사회적 노동을 수행하는 육체적 활동 그 자체에 있다. 이렇게 되면 철학은 이론이 직접적으로 ‘육체화’하고 그 ‘육체적 활동으로부터 이론화’를 수행하는 실천에서 그 생명력을 얻어야 하며, 철학의 과제 역시 이러한 실천의 중심에서 획득하는 특정한 문제들일 수밖에 없다.
들뢰즈로 대표되는 탈현대 철학 역시 실천적이긴 하다. 그러나 들뢰즈의 철학은 실천의 역동성을 니체의 권력의지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에서 찾아냄으로써 욕망, 충동, 힘들과 같은 자연적 생명력의 실천에 머문다. 더구나 이런 실천들은 그 존재를 규정하는 물질적 조건들을 도외시함으로써 물질적 조건들에 직접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지평 안에서 실천을 관념적으로 재생산하는 사유 내의 실천 양식에 머물기 쉽다.
결국 이러한 철학의 새로운 실천은 언제나 다시 이데올로기로 회귀한다. 세계를 향한 도약을 통해서 월권을 수행한다는 면에서, 또 철학이 실현되는 정치의 장에서 ‘시멘트’로서 이데올로기와 직접적인 연계를 가진다는 측면에서. 따라서 철학은 이데올로기적 동력을 통해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며, 존재들이 충돌하는 ‘정치적 장’과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 철학의 한계 인식을 통해 ‘철학의 외부’로 승인되어야 하는 것은 ‘사회적 제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는 정치적 육체’이다. 따라서 ‘집합적 의지를 창출하는 정치학’을 승인하고, ‘봉기의 정치학’을 ‘구성의 정치학’으로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때 ‘구성의 정치학’은 자본에 의해 형성된 것일 수도 있는 ‘거부의 몸짓’과 ‘욕망’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일 수는 없다. 자본에 저항하는 자생적 운동의 근원적 한계를 자각할 수 있는 ‘자본의 외부’로서 ‘집단적 조직화’가 필수적이다.
4. 스피노자-포이에르바하-맑스 노선으로 되살린 맑스 철학이 제기하는 과제
저자가 부활시킨 스피노자-포이에르바하-맑스의 실천철학 노선은 대단히 성공적인 것 같다. 특히 탈현대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들뢰즈로 이어지는 새로운 맑스주의가 ‘엄격한 사유 양식과 사유의 실천’에만 머물며, 어떤 의미에선 ‘오늘날 자본주의가 폭력적으로 재편하고 획일화하는 존재의 박탈이라는 니힐리즘적 전망이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는 복음’일지도 모른다는 지적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직관이다.
또한 탈현대 맑스주의를 스피노자-니체-들뢰즈로 이어지는 노선으로 이해하고, 그것의 존재론적 경향, 자연화의 경향을 비판하고 그 실천적 노선을 철학의 실천이자 윤리학적 실천으로 자리매김하는 지적 역시 많은 논란을 야기할 테지만, 내가 보기엔 상당한 중요한 비판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정치적 실천’과 ‘조직적 운동’에 대한 강조이다. 마지막으로 ‘정치’, 즉 ‘계급투쟁과 계급모순’이라는 철학의 외부와 필연적으로 마주치면서 이데올로기를 분쇄하고 과학의 길을 여는 ‘망치의 힘을 지닌 철학’에 대한 강조도 의미심장하다.
다만 저자가 새롭게 발굴한 스피노자-포이에르바하-맑스의 노선이 앞으로 어떤 작업에 직면해야 할지는 아직 더 두고 봐야 할 듯싶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그 방향과 제시하는 과제는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들뢰즈, 네그리, 발리바르 등으로 대표되는 탈현대 맑스주의와의 마주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가 과제로 제기될 것이다. 이론적으로 나름의 명확한 문제제기가 진행된 상황에서, 현재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는 탈현대 맑스주의의 실천적 지형과 어떻게 결합하고 대결해 나갈지가 궁금하다. 과연 탈현대 맑스주의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우연한 마주침’이 아니라 ‘필연적 마주침’으로 응대할까? 생산적 토론 자체가 둘 사이에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어찌됐건 좀 더 필연적인 ‘정치적 마주침’이 과제가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른 한편, 저자의 핵심 테제는 ‘정치적 실천의 우위와 망치 철학의 끊임없는 개입의 필요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일단 두 가지가 궁금하다.
첫째, 저자는 정치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정치적 실천=당적 실천, 당파성’이라는 점을 다시 부각시키는데 과연 이러한 입장을 어떻게 이해할까? 이때 당은 ‘이성의 화신으로서의 당’은 당연히 아닐 텐데. 과연 당이라는 조직운동의 상을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가?
둘째, 신자유주의라는 탈현대 지형에서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는 정치적 실천의 운동과 조직들에 과연 망치의 철학은 구체적으로 어떤 개입을 해야 하는 것일까?
최소한 이 두 가지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은 저자 박영균도 계속해서 떠맡아야 하는 과제이자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던져주는 필연적 마주침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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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평론 34호 서평란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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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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