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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넌 장애인, 난 정상인?

 
넌 장애인, 난 정상인?
[서평] 김도현의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텍스트만보기   이기원(jgsu98) 기자   
 
 
 
▲ 책표지
ⓒ 메이데이
내가 장애 문제에 처음 눈을 뜨게 된 건 첫째 아이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 척수종양 수술을 받고 하반신 마비 상태에서 꽤 오랜 기간 치료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병원 측 얘기를 듣고 가족 모두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아이가 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재활치료를 받을 때는 길거리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만 보면 장래 아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별 생각 없이 보던 모습이 아이가 그 상황에 처해지면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상적으로 걸어다니는 길이 휠체어를 탄 이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장애물로 변할 수 있는지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아이가 걷게 되었다. 의사도 기적이라고 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지금까지 3년을 제 발로 걸어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 뒤로는 거리에서 휠체어를 보면서 느끼는 느낌의 강도가 점차 약해졌다. 아이가 걷게 되면서 장애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닌 남의 문제로 되돌아가 잊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잊혀지던 장애에 대한 관심을 되살린 게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란 책을 통해서였다. 도발적 제목에 걸맞게 수많은 장애인과 함께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치열한 경험과 다양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아니면 정상인이라고?

우리나라에서 남녀란 말을 많이 쓴다. 반대로 여남이란 말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남이란 말을 들으면 어색하다.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모든 걸 좌우하던 시절에 쓰던 군관민이란 말이 있었다. 군인을 중심에 놓고 관과 민이 그에 따르던 시절의 질서를 표현했던 말이다. 그 험한 세월이 지난 지금 그 용어는 민관군으로 바뀌어 사용된다.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를까. 정상인 또는 일반인이라 부른다. 장애가 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니까 정상인이고 일반적 생활이 가능하니까 일반인이라 부르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장애인의 상대적 개념으로 비장애인이란 말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비장애인이란 표현을 쓰면 좋아하지 않는다. 장애인이 중심이 된 상대 개념이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남이란 말이 불편하게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장애인이란 말은 불편하고 불쾌한 말로 들릴 수 있다.

비장애인이란 말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장애와 단절하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다. 그 결과 한 사회 속에서 장애인은 있음의 존재가 아닌, 없음의 존재로 여겨졌다. 학교와 거리, 극장이나 직장, 일터나 공원에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시설과 집구석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방치되어 왔다는 것이다.

장애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책을 읽으며 장애에 대해 무지에 가까웠다는 걸 절감했다. 장애인이 전체 인구의 1/10이나 된다는 것도 몰랐다. 그 많은 장애인들을 거리나 일터에서, 그리고 시장이나 극장에서, 학교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도 없다.

유대인을 학살했던 가스실은 애초에 장애인을 학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나치를 떠올릴 때 유대인 학살 이외의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역사적 심판도 유대인 학살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 이유는 장애인에 대한 학살과 강제 불임이란 범죄 행위가 다른 전승 국가에서도 조직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아직까지 나치의 학살 대상에 독일인 장애인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독일 뿐 아니라 미국,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일본에서도 우생이란 명분으로 정신 장애나 신체 질환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제 불임 수술과 인공 임신 중절 수술을 강행했다고 한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나 윤정모의 <섬>이란 소설에서 일제시대 소록도에서 나병환자들을 대상으로 자행되었던 일들이 섬뜩하게 묘사되고 있다.

왜 이렇게 많은 국가에서 장애나 신체 질환자를 없애려 애썼던 것일까. 자본주의 생산구조 속에서 임노동을 행하기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구조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노동력을 가진 인간에서 장애인이나 질환자들은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가치 창출에 유용하지 않은 인간들을 소외시키고 차별하고 제거하려 했던 게 자본주의의 비정한 모습이었다.

진보적 장애운동이 필요한 이유

자본주의의 가치를 창출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장애인은 끊임없이 차별되고 소외되어 왔다. 하지만 그 문제가 장애인들만의 문제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계속 늘어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차별과 소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 또한 또다른 장애인이 되어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진보적 장애운동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우리 사회가 운영되는데 기본 원칙인 경쟁과 효율성, 그리고 적자생존의 논리가 결국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인권을 확장시켜 나가는 활동은 바로 이러한 경쟁 및 효율성의 원칙과 대척점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권리를 확장하는 투쟁은 장애인의 이익을 위한 투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러한 사회의 논리와 가치를 바꾸어나가는 활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즉 평등과 유대, 공동체성의 논리를 확장시켜나가는 활동인 것이다. (207쪽)
 
 
  2007-05-24 09:4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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