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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쓸 즈음, 박태환이라는 어린 수영선수가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그것도 아시아인에게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져 온 자유형 400미터 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낭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에서 경기를 다시 보았더니, 역영力泳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싶을 정도로 아예 물 밖으로 튀어나와 물살을 가르더군요. 50미터를 남겨둔 지점에서 4위로 턴하고도 결승점까지 채 30미터도 남지 않은 지점에서 앞선 세 선수를 순식간에 제치고 1위로 골인하는 장면에서는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마도 같은 거리의 육상경기였다면 이처럼 놀라운 역전장면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겁니다. 육상에서 400미터 경기는 거의 처음부터 전력 질주하는 단거리주법을 구사하는 관계로 초반 페이스가 그대로 끝가지 간다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물의 저항을 힘겹게 헤치고 가야 하는 수영이니까 이런 식의 역전이 가능할 법도 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25미터에서 경기를 뒤집는 것은 체력이 완전 소진되어 숨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상황에서 가히 초인적인 체력과 정신력을 구비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모든 세상사가 그러하듯이 스포츠 경기는 본 게임보다 후일담 혹은 낙수거리가 더 재미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해서 언론에서 이 대사건을 다룬 기사를 뒤적거리다가 우리나라에 대표적인 진보적 스포츠사회과학 연구자인 동아대학교 정희준 교수가 <프레시안>이라는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글을 대단히 흥미 있게 읽었더랬습니다. 정희준 교수 자신의 말마따나 국제경기나 엘리트 스포츠에 대해 절대 좋은 소리가 안 나오도록 머리가 설계되어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평소 그 답지 않게 박태환 군의 이번 우승에 대해서는 어찌된 일인지 ‘백년 만에 이룬 민족의 꿈: 모던시대의 꿈, 포스트 모던 시대에 이루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더군요. 그만큼 백인공동체로 구성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쳐놓은 게임의 법칙에서 아시아인들 혹은 황인종에게는 그 장벽을 뛰어 넘는 게 도저히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져 온, 그것도 ‘신체조건론’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수영이라는 경기에서 역전 우승이라는 대드라마를 일구어낸 것 그 자체가 일대 사변임을 강조하기 위해 민족이라는 거대담론을 일종의 은유로 사용했다고 여겨집니다.
정교수님의 글을 읽고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음도 심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이 나올 때면 한미FTA 협상결과가 이미 다 나와 타결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긴 하겠지만, 사태의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한미FTA 협상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우리들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불행한 식민지 노예의식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비록 수영이라는 단 하나의 스포츠 경기에서 벌어진 일이고 한 선수가 이룬 쾌거이기에 과장할 필요가 없다곤 하지만, 의식보다는 몸이 먼저 앞서가는구나, 노력하면 몸은 정직하게 답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정말이지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은 해방 이후 지난 반세기동안 피와 땀으로 얼룩진, 고통에 찬 노동의 시간들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달성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있던 백 오십 여 개 나라들을 제치고 이제는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고 한다면 인정하겠습니다. 민중들이 흘린 피로 민주주의도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그래서 이제는 그 민주주의를 기념하자고 한다면 그 또한 기꺼이 인정하겠습니다. 그런데 경제도 좋아지고 민주주의도 이뤘다고 하는데, 어째서 우리들의 삶은 이다지 힘들고 고단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일제에 이어 ‘미국’이라는 제국에 주박된 우리의 ‘예속의식,’ ‘노예의식’은 죽어도 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아지기는커녕, 한미FTA 협상과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듯이, 증상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단순한 찬반양론을 문제 삼는 게 아닙니다. 1년이 넘게 지금껏 지켜 본 바로는 정부 측 협상논리나 협상태도 어느 한 구석에도 ‘한미FTA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거나 고려하려했다는 흔적은 조금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맹목 그 자체요, 국민들의 아우성과 비판에는 눈과 귀를 닫아 버린 청맹과니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애용하는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쇄국이냐, 개방이냐’, ‘미국 밟고서 잘 되는 나라 못 봤다’는 게 유일한 협상지침이요 참조사항일 뿐 입니다.
누가 미국 밟고 가자고 했습니까? 애당초 제대로 된 개방, 제대로 된 미국과의 협상을 하자는 얘기였지 않습니까? 그러려면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고, 다른 나라와 맺은 유사한 협상에 대해서 연구하여 준비를 치밀히 하는 게 올바른 일의 순서일 것 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혹여 이러한 협정을 통해 향후 피해를 볼지 모를 당사자들이 생존의 고통을 겪지 않도록 만반의 공공 사회정책을 수립해야 하며 협상 그 자체에 대해서도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충분한 동의를 구하는 일이야말로 하나의 독립국가, 그것도 민주공화국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입니다. 민주공화국의 주체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입니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은 농민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자본과 시장, 무한 경쟁에 방해가 되는 애물단지 취급하며 시대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져 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요. 어차피 그냥 둬도 농민이라는 종족은 고령화 추세로 멸종할 텐데, 한미FTA로 사망시간을 조금 앞당긴다고 해서 뭐가 그리 대수냐고,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가 한미FTA로 인한 급작스런 농민 대참사를 막기 위해 근근이 삶을 연명할 수 있도록 푼돈이나 던져주면 되지 않겠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발상은 한마디로 농민들을 거지 취급하는 것으로 정말이지 정부고위관리들의 식민지엘리트 근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미국은 우리에게 지금껏 에비와 같은 존재였다고 하겠습니다. 아이들에게 놀람과 공포를 불러일으켜 행동에 주의하도록 사용하는 ‘에비’이든, 자율적 행위 능력이 없기에 후견자의 법적, 경제적 조력을 받아야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어른들이 함부로 판단해 버리는 어린이의 친권행사자로의 ‘에비’이든지간에, 그 어떤 경우든 모두 적당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줄곧 그 어떤 ‘국정’교과서에서도 미국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는 글을 단 한 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국가가 발 벗고 나서 미국을 북한공산도당의 억압에서 우리를 구해준 해방자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전파해 준 메시아로 한국인들의 의식에 깊숙이 각인시키는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그 해방자가 이제 한미FTA를 통해 한반도에서 완전한 재림과 영생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는지요.
독재정권이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먹을 것을 그럭저럭 해결해 주는 대신 ‘반도’ 밖으로는 아니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 ‘섬나라’ 남한 밖으로는 절대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자유로운 공론형성을 폭력적으로 억압한 채 민중들에게 사실상 영어囹圄의 삶을 살 것을 강요해왔습니다. 1980년대 말까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다녀 본 해외란 제주도가 고작 전부였습니다. 직접 경험한 일이지만 그나마 제주도도 출발 전에 공항에 상주하고 있는 안기부 직원에게 불려가 주민증 검사를 받고 여행목적을 상세히 설명해야 하는 수모 아닌 수모를 겪고 나서야 탑승을 허락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유란 바람과도 같아서 아무리 막으려 해도 스멀스멀 스며들어 사람들을 해방의 정신으로 감염시킵니다. 자유언론은 개방이며 동시에 민주주의입니다. 그렇습니다. 개방과 자유언론, 민주주의가 바로 군사독재를 종식시킨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민주주의가, 바로 그 자유언론이 그리고 개방이 자기를 역사의 공동묘지에서 불러내어 생명을 불어 넣어 준 민중들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우리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불러낸 자유와 민주주의, 개방이 사실은 그 원산지가 모두 미국이었음이 한미FTA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정이 이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선택이 개방 대신 폐쇄, 민주주의 대신 독재, 자유 언론 대신 정보정치나 관제여론일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이 사실상 존재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폐쇄국가의 대명사 북한 역시 이제 북미수교를 서두르며 개방의 물결에 동참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폐쇄를 유지한 채 자연사하느냐 아니면 생존을 모색하기 위해 개방이라는 불확실성에 몸을 맡기느냐에 기로에서 최종적으로 후자의 전략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미 FTA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각종 논쟁은 바로 우리들에게 어떤 민주주의인지, 어떤 자유언론인지, 어떤 개방인지의 문제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동안 우리를 짓 눌러온 식민지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 사실상 식민지 시대로부터, 제국주의라는 타자가 강제한 억압적 근대 기획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한마디로 여전히 무의식중에 식민지 인간의 심성을 내면화한 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선택지가 미 제국도 아니며 그렇다고 주체조선도 아님은 분명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식민지성으로부터 벗어나되, 모든 민중이 민주주의와 자유 언론 그리고 개방적이되 인간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이 절실히 필요로 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체계를 뒤엎는 전복적 사고 내지 기존 의식의 전복이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로 됩니다. 새로운 대안에 대한 모색은 기존 사고체계에 대한 도발, 주류 의식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을 기획하고 펴내게 된 가장 주요한 목적입니다.
한미FTA 협상과정은 식민지 의식의 최종판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단 한번도 미국중심적 세계관, 우리의식의 식민지성에 대해 의심해본적도, 아니 의심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 ‘에비’에 대한 도전,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그것은 식민지 의식의 독특한 표출이며, 미국적 세계관의 손쉬운 추수가 낳은 주류적 사유의 총칭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인문사회과학에서 더 두드러지며, 근자에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 일제 식민지 시대까지 합리화하려는 시도조차 등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한편에선 인문학의 위기라고들 하지요. 여기서 결정적 문제는 인문학이 왜 위기에 처했는지, 그 근본 원인에 대한 진단과 성찰이 삭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우리 사유의 독립이 아직껏 성취되지 않았음을 드러내주는 표피적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란 바로 사유의 미 제국종속에서 근본적으로 기인하는 바 크며, 이러한 형태의 총체적 학문종속은 사대事大가 국시였던 조선시대에조차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근대 이후 자아가 무엇인지 알려고도, 아니 알고 싶지도 않던 몇 안 되는 OECD 국가 가운데 하나로,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방이후 전 세계의 위장 역할을 자임한 거의 유일한 나라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렇듯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는 우리들에게조차 오랜 자아부재의 교육에 길들여온 관계로 사유의 독립이 결코 성취되기 쉽지 않은 과제임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디 첫술에 배부른 일이 있겠습니까? 늦었지만 이 책이 우리 사유의 독립을 위한 다양한 시도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 책은 계간지『진보평론』의 <다시 읽기> 난에 실린 글들을 모아 새롭게 구성한 것입니다. 『진보평론』은 어느 덧 31호를 발간하여 창간 9주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다시 읽기> 코너는『진보평론』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대표적 아이콘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읽기>는 말 그대로 그 어떤 학술잡지도 시도해보지 못한 유쾌한 발상 전환을 통해 기획된 것으로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사상가들의 주류적 해석 방식에 도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독자들이 여기 실린 글들을 직접 읽어보면 잘 알 수 있겠지만, <다시 읽기> 난에 실린 글들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주류적 해석에 도전하는 내용들과 함께 해당 사상가의 주장은 물론 기존 해석방식에 대해서도 팁으로 자연스레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논문 하나를 통해 이처럼 세 가지 내용 모두를 알 수 있기에 여기서 소개된 해당사상가들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겐 향후 공부에 좋은 길잡이가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 사유의 서구 종속성, 특히 미국에의 종속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의 자발적 수용 혹은 그 내면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유의 종속에서 벗어나는 길이 과거 학문의 토착화를 부르짖었던 관변어용학자들의 한국학 열풍에서 찾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텍스트의 국적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 그러한 텍스트를 어떤 시각에서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 독해할 것인가가 관건이라 하겠습니다. 이 책은 앞서 언급대로『진보평론』 <다시 읽기>에 실린 글 들을 엮은 시리즈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하며 정치학, 사회학, 철학과 관련된 글을 먼저 묶었습니다. 이외에도 앞으로 ‘맑스주의 사상에 대한 다시 읽기’, ‘종교 다시읽기’ 등 몇 권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루고 있는 사상가나 그 독해방법 등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새로운 학적 사유를 모색하고자 하는 저자들의 열정과 고민이 독자 제현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글쓰기의 영원한 벗인 불면의 고통에서 다소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짐짓 위안삼아 봅니다.
2007년 4월 1일
저자들을 대신하여 최형익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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