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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 (1)

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17세기 전반기 :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 바로크 양식의 등장과 특성 ▼

-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Baroque)라고 부른다.” (387쪽)

- 원래 바로크라는 말은 포르투갈어나 에스파냐어에서 <비뚤어진 모양의 진주>를 뜻하는 <바로코(baroco)>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처음에는 곡선을 많이 사용한 장식 과잉의 이 양식을 <불규칙한> <그로테스크한>이라는 부정적이거나 모멸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 좀 더 세분화해서 말하자면 바로크는 매너리즘과 로코코 사이의 17세기 문화 전반의 양식을 지칭하며 이는 처음으로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바로크는 <매너리즘>(17세기 비평가들이 16세기 말의 미술가들을 비난하는 데 사용했던 가식과 천박한 모방이라는 본래의 의미 ; 선배들이 사용했던 부조화를 종종 모방했다는 의미)과 <로코코>(결벽증적인 단편성 추구)와는 다르게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였다.

- 바로크는 프랑스의 고딕양식(즉 중세 고딕양식)이 국제적 성격으로 발전하였던 것처럼 범 유럽적 문화 현상이었다. 그러나 국가나 각 지방 특유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나타난다. 즉 하나의 공통분모를 갖기엔 너무 방대하고 다양한 예술 경향이었던 것이다.

- 바로크는 크게 두 종류로 나타나게 된다. 즉 가톨릭적 바로크와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로 나뉜다.

- 가톨릭적 바로크는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로부터 루벤스, 베르니니의 예술에서 나타난다.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는 렘브란트와 얀 반 호이엔(Van Goyen, Jan)의 예술에서 나타난다.

- 전자는 감각주의적이고 기념비적, 장식적인 반면 후자는 이보다 더 엄격하고 더 형식을 존중하는 ‘고전주의적’ 양식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14세기 옥캄의 중세 경험론에 기인한 바 크다.

- 가톨릭적 바로크는 로마를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려는 로마 교황의 진흥책에서 발단되었으므로 반종교개혁의 유력한 수단이 되어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는 종래의 종교 그림이나 조각상을 새롭게 하여 종교 미술에 신선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 이렇게 해서 나타난 가톨릭적 바로크 미술의 특징은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이다(그러나 19세기 중엽의 독일 미술사가들에 의해 바로크란 용어에서 <변칙․이상․기묘함>이라는 부정적 평가는 제거되었다).

- 동시에 가톨릭적 바로크는 귀족들의 표현 수단이기도 하여 화려 호사한 의식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구실을 다하였다.

- 이런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장식을 바탕으로 한 가톨릭적 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에 비해 감동이 넘치는 극적 표현을 특색으로 한다.

- 결론적으로 바로크 미술의 성격은 3가지로 정의될 수 있다.

⑴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바조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가톨릭적 바로크.

⑵ 전성기의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였다-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

⑶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과 코레조의 예술에서 이탈리아 바로크의 색깔과 빛의 풍요로움이 비롯된다-가톨릭적 바로크.

▲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 1541?-1602) ▼

- 도판 250(<로마의 일 제수 교회>, p.389)을 보자. 이 교회 건물은 지금으로 보면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세워질 당시인 1575년에는 “대단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388쪽) 왜냐하면 이 건물은 “유럽 전역에 걸친 종교개혁에 대항해서 싸우려는 드높은 기대를 걸고 새롭게 설립된 예수회(Jesuits) 교단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388쪽)

- 이 교회 건물은 이전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들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장식적이고 현란하면서도 나름대로 규칙성을 부여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잃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먼저 이 교회 건물이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들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장식적이고 현란한 것은 “이 건물이 고전기 건축의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388쪽)

- 일단 “원주가 틀을 이루고 양 쪽에 작은 현관을 거느리고 있는 중앙의 대현관은” “고대 로마의 개선문(<티베리우스 황제의 개선문>, 도판 74, p.119) 형식을 상기시켜 준다.” (388쪽)

- 또한 “원주(오히려 반원주나 벽기둥에 가깝다)가 아키트레이브를 받치고 있고 그 위로 높은 ‘아티카(attica)’가 있으며 이번에 이것은 또 위층을 지탱하고 있다.” (388쪽)

- 그러나 이전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 즉 “브루넬레스키의 <파치 예배당>(도판 147, p.226)”, “브라만테가 설계한 <템피에토>(도판 187, p.290)”, “심지어 산소비노의 <산 마르코 교회 도서관>(도판 207, p.326)” (389쪽)과 비교해서 훨씬 더 현란하고 장식적인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고전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융합시킨 방법을” 볼 때 “로마나 그리스, 심지어 르네상스 건축법까지도 도외시하고” (388쪽)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도외시하는 특징들은 크게 2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⑴ “마치 전체 구조를 보다 호화스럽고 다채롭고 또한 장엄해 보이게 하려는 듯 기둥이나 반기둥이 모두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388-9쪽) ⑵ “이 건축가가 단조로운 중복을 피하고 이중 틀에 의해서 강조된 대현관이 있는 중심부에 초점을 주기 위해 각 부분들을 세심하게 배치한 점이다”(예를 들어 각 현관 문 위에 장식된 부조상은 삼위일체의 형식을 띰으로써 양쪽 작은 현관문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389쪽)

- 그런데 ⑵의 특징인 ‘세심한 배치’는 “모든 부분이 전체적인 효과를 이루기 위해 존재”하도록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하나의 커다랗고 복잡한 형태 속에 융합되어 있다.” (389쪽) “이 건축가가 아래층과 위층을 조화 있게 연결”시키기 위해 “고전 시대의 건축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종의 소용돌이 형태를 사용했다” (389쪽)는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 “사실상 순수한 고전적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크 건축가들에게 퍼부었던 비난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곡선과 소용돌이 무늬 때문이었다.” (389쪽)

- 그러나 이 무늬를 빼면 이 교회 건물은 ‘기계적’으로 분할되어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무늬는 그 자체로 보면 이상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건물 전체에 건축가가 의도했던 그런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390쪽)

 

▲ 17세기 회화의 특성 ▼

- “매너리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회화가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양식보다 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은 여러 모로 바로크 건축의 발달사와 비슷하다.” (390쪽)

- “우리는 틴토레토(도판 236, 237 ; pp.369, 370)와 엘 그레코(도판 238, 239 ; pp.372, 373)의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17세기 회화”의 “새로운 이념들”, 즉 “빛과 색의 강조라든가 단순한 균형을 무시하고 보다 복잡한 구도를 선호한다든가 하는 것”들이 “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390쪽)

- 그렇지만 “17세기 회화는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을 단순하게 지속시킨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논쟁을 벌였다.

- (그런데 “미술 세계에서의” “논쟁 자체는” 16세기에 처음 일어난 것이었는데, “16세기에는 회화가 조각보다 나은 예술이냐 또는 구도가 색채보다 더 중요하냐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식의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예컨대 피렌체 사람들은 구도를 중시했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색채를 높이 평가했다).” (390쪽))

- 17세기 논쟁의 쟁점은 다음의 2가지 흐름 사이의 대립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한편으로 라파엘로의 단순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 즉 고전주의적인 아름다움의 추구, 다른 한편으로는 추한 것이라 할지라도 추한 그대로의 진실, 즉 본 그대로의 진실 추구였다.

- 이러한 쟁점에 서 있던 두 화가가 있었는데, 그들은 전자와 관련해서는 <안니발레 카라치>, 후자와 관련해서는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였다.

 

▲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 1560-1609) -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 ▼

- “매너리즘에 진력이” 났다. (390쪽)

- “안니발레 카라치는 베네치아 파, 특히 코레조 파의 미술을 배운 화가 집안의 일원이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대단히 존경했던 라파엘로의 작품 세계에 매료되었다. 그는 매너리즘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라파엘로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했다.” (390쪽)

- “당시 그가 속해 있던 로마의 집단이 부르짖은 구호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양성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그의 의도를 죽은 그리스도의 시체를 보며 슬퍼하는 성모를 묘사한 제단화(도판 251,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성모>, p.351)에서 찾아볼 수 있다.” (390-1쪽)

- 그뤼네발트가 그린 고통으로 심하게 일그러진 예수(도판 224,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p.351)와 비교해보면 안니발레 카라치는 보는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와 아픔의 고통을 상기시키지 않으려고 아주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91쪽)

- “이 그림 자체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처럼 구도가 단순하고 조화롭다.” 그러나 “이 그림은 르네상스 회화라고 착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구세주의 몸 위에서 아른거리는 빛의 묘사 방식이라든가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는 표현 방식은 르네상스 양식과는 아주 다른, 말하자면 바로크적이다.” (391쪽)

 

▲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 1573-1610) - 밀라노 근처 출신 ▼

- “그의 작품은 카라치와는 전혀 달랐다. 카라바조”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 즉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392쪽)

- “그는 고전적인 규범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 대해 아주 새롭게 생각하고 싶어 했다.” 비평가들은 “그를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비난했다.” (392쪽)

- “성 토마를 묘사한 그의 작품(도판 252, <의심하는 토마>, p.392)을 살펴보자.”(393쪽) 이 그림에서는 “카라바조의 ‘자연주의’,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것을 추하다고 생각하든 아름답다고 생각하든지 간에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려는 그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393쪽)

- 이러한 “그의 의도는 아마도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는 카라치의 태도보다 더 돈독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393쪽) 그의 신앙심은 성경 이야기(“네 손가락으로 내선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복음 20장 27절)(393쪽에서 재인용))에 충실한 것에 기초하고 있는 것 같으며, 이러한 충실함은 성경의 인물들을 아름답게 묘사하기보다는 그 당시에 성경의 인물들, 즉 성인들이 겪었을 고초와 풍상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 이러한 그의 자연주의는 그림에서 성 토마가 예수를 의심하면서 자기 손가락을 예수의 옆구리 상처에 집어넣는 장면, 그리고 성인들의 모습이 풍상을 다 겪은 노동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를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였던 그는 그 전의 조토(도판 135, <그리스도를 애도함>, p. 203)와 뒤러(도판 222, <예수 탄생>, p. 347)처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마치 그의 이웃집에서 일어난 듯이 그 자신의 눈앞에 그려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오래된 성경의 등장인물들을 보다 진실되고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393쪽)

- “심지어 그가 명암을 다루는 방법도 그의 이러한 효과를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빛은 인체를 우아하고 부드럽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어둠과의 대조를 생겨나게 하는 눈부시도록 번쩍이는 거센 빛이다. 그러나 그 빛은 이 이상한 장면 전체를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393쪽)

- “안니발레 카라치와 카라바조는 19세기의 유행에서 배제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 다시금 그들의 진가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당시에 회화에 불어 넣어준 자극과 영향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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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겨울방학 서양 미술사 스터디 예비 모임^^

서양 미술사를 겨울방학 때 같이 공부하기로 했는데,

예비모임2011년 1월 11일 화요일 늦은 5시

 

학생회관 1층 식당에서 하고자 합니다.^^

 

교재는 <서양 미술사>(E. H. 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이종숭 옮김, 예경, 2009)이고요,

진도는 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부터 하고자 합니다.

같이 공부하실 분은 밑에 덧글을 달아주시고 연락처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변동 사항이 생길 경우 바로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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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뱀, 고양이, 쥐들에게 고함!

하도 매스컴 여기 저기서 GR GR하면서 쥐20을 떠들어대니,

하긴 학교 내에서도 쥐20때문에 건물 출입을 밤 9시부터 세컴을 작동시켜 통제한다더라마는...

참으로 뭐라 할까...

사람 사는 이 땅에 쥐가 얼마 전부터 설레발을 치고 온나라를 4대강 사업이니 어쩌니 하면서 들쑤시고 파헤치고 다니다보니, 그것도 모자라서 지구상의 방귀께나 뀐다는 쥐들을 20마리 초청했다나 어쨌다나,..

그러다보니 사람은 뒷전이고 쥐들이 먼저라,..

사람 먹고 싸는 것까지 뭐라 한다는 소리도 들리더라마는...

 

이에 이 땅의 모든 쥐들이 불만이 쌓여 볼멘 소리들을 해댄다.

- 아니, 빌어먹을 언제 지들이 우리 쥐들의 대표라구 이 땅에 모여서 GR들이야, GR들이!

- 도대체 그 놈들 때문에 밤에도 맘 놓고 다닐 수가 있어야지.

- 아니, XX... 짭새들이 우리들까정 검문한다고 난리라니깐...

- 그럼 우린 언제 밥 먹고 사냐, 밤에 인간들 거 살짝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하여간에 이 땅에 쥐 한마리가 온통 물을 흐리더니만,

이젠 지랑 비슷한 넘덜을 델꼬 와서 물만 흐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난리 부르스를 추고 야단이다...

울나라 그 쥐와 다른 쥐19마리가 모여 이제 사람 사는 것에 대해 감놔라 배놔라 한다는데...

하도 어이가 없는지라 일단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뭐, 이 땅의 모든 고양이들이 갱찰에 의해 집단으로 감금되었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런지

학교에 길냥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갱찰이 한숨 놓는 것은 뱀들이 겨울잠 자러 들어갔기 때문이라던데,

뱀들이 겨울잠만 자지 않았어도,

이 쥐20마리가 설레발이치치 못하지 않았을까...

겨울잠을 자고 있는 뱀들을 깨워서 전국의 고양이들을 감금으로부터 해방시켜

사람과 쥐, 고양이, 뱀들이 연대하여 쥐20이 이 땅에서 설레발이치치 못하게 해야 된다고 본다!

 

전국의 뱀들이여, 고양이들이여, 쥐들이여!!!

우리 인간과 연대의 깃발 높이 들고 쥐20마리를 몰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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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 플리즈 님 글에 대한 이야기^^...

ScanPlease님의 [등록금 투쟁과 대학입시] 에 관련된 글.

 

스캔 플리즈 님 글 잘 읽었습니다.

스캔 플리즈 님 글 요지는 대학 입학은 쉽게 하고 대학 졸업을 어렵게 해야

사교육비가 감소하는 등 대학 입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대학 입학을 쉽게 하고 졸업을 어렵게 하는 정책은 이미 전두환 정권 시절에 <졸업 정원제>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전두환 정권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단행한 정책 중 하나로서, 대학의 엘리트화에서 대학의 대중화로 대학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수혜(?)를 입어서 저도 대학이라는 곳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대학의 대중화는 신분 상승의 기회를 넓혀 준 계기가 되었고, 이것은 동시에 사교육의 대표격인 입시 학원을 활성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교육 폐해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는 대학 입시 전형의 다양화로 대학 입학이 조금 더 쉬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꼭 공부를 잘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특기가 있다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오로지 공부를 잘 해야만 대학에 입학할 수 있던 것에 비하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대학이 졸업하기 쉽다고 하셨는데, 졸업하기가 이전에 비해서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일단 졸업 이수 학점이 대체로 좀 높아졌고, 설렁설렁해서 졸업할 수 있는 조건이 못됩니다.

한 학기에 18학점 정도 듣는 것은 그나마 적게 듣는 것입니다. 보통 20학점씩 정도를 들어야 합니다.

거기다가 학점이 나쁜 과목은 삭제시키고 다시 그 과목을 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18학점 정도 듣는다면 레포트에다가 뭐에다가 일주일에 3일은 밤을 새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학점이 잘 나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평균이 그렇다는 거지요.

거기다가 토익 점수가 보통 750점 이상이어야 한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전에 제가 공부할 때와 비교해 보면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으로서도 입학은 예전에 비해 쉬워졌지만, 졸업은 훨씬 어려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 입시의 문제는 대학 입학을 쉽게 하고 졸업을 어렵게 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입시 문제는 대기업의 취직 입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대학생들의 사교육비는 고등학생의 사교육비와 맘먹거나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취직에 맞는 스펙을 쌓으려면 그 스펙에 맞는 여러 학원들을 다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해외 어학 연수를 1년 정도 다녀 오려면 1,500만원 정도 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교육비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대학입시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학 입학을 쉽게 하고 졸업을 어렵게 한다고 해서 이것이 대학입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학입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는 <대학이 얼마나 자본의 힘에 저항할 수 있느냐>, 즉 <대학생들이 얼마나 정치세력화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정치 세력화를 위한 첫걸음은 바로 대학생들 자신이 스스로를 정치세력화할 수 있는 <자유 시간>의 확보가 필수불가결한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시간 확보 투쟁은 한 학교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투쟁이고, 오히려 전국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대정부 정치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서 대학생들은 자신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는 실전활동(이것을 맑스는 <프락시스>라고 하더군요^^)을 활발히 펼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학은 지금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등록금을 주물럭 주물럭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입생들의 등록금을 자기 맘대로 올리다간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학입시 문제는 대학생들 자신이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시간 확보 투쟁>을 통해서 자신들을 정치세력화시켜 대학을 자본에 대한 강력한 저항 교두보로 변화시킬 때 대학입시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는 것입니다.^^

대학이 중급 노동자 양성소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면, 즉 자본에 종속되면 대학입시 문제 해결은 요원할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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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 투쟁에 관한 단상...

서울의 모 대학 총장이 일명 <빵장>으로 불리고 있다.

그 이유인즉슨, 그 총장이 <더 맛있는 빵을 먹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면서,

내년도 등록금을 2~3배 정도 올려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란다.

물론 그 이후에 해명을 했단다. <단과대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려면 등록금을 그 정도로 올려야 한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뭐,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시대가 천박하니까 교육자라는 사람도 입이 경박해지고 천박해지는가부다.

맑스가 한 말이 절실하게 생각난다.

<교육자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

교육자를 누가 교육을 시킬 것인가?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학생들이다.

학생들의 <힘>이 없으니까 즉흥적으로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힘이 있었다면 저런 식으로 교육자가 천박함을 드러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교육자가 천박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책임이 크다 할 수 있겠다.

 

90년대 이후로 줄기차게 대학 사회의 중요한 이슈 중이 하나가 된 것이 바로 <등록금 인상> 문제이다.

학교는 끊임없이 인상하려고 하고, 학생들은 인하하려는 저항을 계속 해 왔다.

그러나 등록금은 학교가 마음 먹은대로 계속 인상되어 왔고,

학생들의 저항은 별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것은 곧 학생 운동권의 불신을 넘어서서 학생회 자체에 대한 불신,

더 나아가 학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공부이자 활동인 <자치>에 대한 무관심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자치는 학생들에게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러고서는 오로지 취업, 취직만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

대학은 이제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 불모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

대학이라는 횃불이 점점 더 사그러지고 있다.

 

그러다고 하더라도 아주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여전히 투쟁의 불씨는 남아 있다.

그 불씨가 바로 등록금 인하 투쟁이다.

지금까지의 등록금 투쟁은 대학 재단과 총장에게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 등록금을 인하해 달라는 식이었다고 본다.

이때 대학의 답변 역시 먹고 살기 힘드니까, 다시 말해 자꾸 물가가 오르니까 등록금을 올리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 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똑같은 전제를 깔고 있는데, 누가 더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여 싸움의 승패를 가를 수가 있을까?

그러니 이 투쟁은 아무런 진전도 없이 지리하게 이어지는, 김 빠진 사이다와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칼자루를 대학 재단이 쥐고 있으니 싸움을 오래 끌면 끌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학생들 쪽이다.

그러니 이 싸움의 승리는 결국 재단이 하게 된다.

등록금 인하 투쟁을 한다고 대학 본관(행정관), 총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한다고 해도 학생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싸움의 승자를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싸움은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늘 항상 투쟁의 방식은 이런 식이었음을 학생들은 보아 왔다.

학생회는 학교에 선전포고를 한 다음에 말싸움 몇 번 하고 서명을 받고는 더 이상 무엇을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것 이외의 어떤 다른 전술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학생회, 학생운동 진영의 상상력의 빈곤... 이것은 교육자의 천박함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단순히 등록금만 인하하자고 하는 투쟁은 이제 안 하느니만 못한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

안 하자니 마땅히 할 사업이 없고, 하자니 이미 결판난 싸움이고, 또 학생들한테 곱지 않은 눈길을 받을 테고.

 

<등록금 투쟁은  졸업 이수 학점을 대폭 낮추는 투쟁과 결합해야 한다!>

 

먼저 등록금 투쟁은 학생들의 관심과 주체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

이 말은 아주 진부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부하다고 생각되는 이 말 속에 진리가 있다.

진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들의 관심과 주체적인 참여가 가능하도록 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학생들이 현재 수준에서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학생들은 과중한 노동, 즉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재미 없는 공부와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 공부에 지쳐 있다.

그래서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너무도 필요로 한다.

그들의 입에서는 <어휴~~! 힘들어!> 하는 소리가 무의식중에 흘러 나온다.

속된 말로 똥 누고 밑 닦을 틈도 없는 것이 학생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학생들은 정말로 약간이라도 인간적인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재미 있는 대학생활을 원한다.

학기 중엔 잠도 맘 편히 실컷 자볼 수도 없다.

시험과 레포트에 치여 일주일에 삼사 일은 거의 밤을 새다시피한다.

(잠 좀 자자라는 말은 촛불시위를 당긴 여고3학년의 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대학생들 전체의 입 속에서 신음소리인 듯이 나오는 말일 것이다.)

어느 딱한 책상물림들이 한국 대학생들은 공부를 안 한다고 했던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고3보다도 더 빡빡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한국의 대학생들이다.  

 

친구들과 마음 편히 영화 한편, 연극 한편 등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

그러한 여유를 누리고 싶지만, 거의 대부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럴 시간에 토익 한자라도 더 공부해야 하고,

A+ 학점을 맞기 위한 공부를 한자라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렴풋이 자기가 꿈꾸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어하지만,

그러한 것을 할 시간이 없다.

늘 해야 하는 것의 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그러다가 졸업할 때쯤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도 잘 모르게 된다.

그냥 그렇게 떠밀려 대학을 떠나게 된다.

대학생들은 이러한 것을 대단히 두려워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하면서 받아들인다.

 

학생들의 공부라는 노동의 강도를 완화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이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완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이러한 노동 강도의 완화 투쟁은 졸업을 위한 이수 학점을 대폭 낮추어야 하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

절반 이상으로 낮추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고, 인간다운 대학생활을 위한 자유시간을 쟁취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시간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즉 졸업 이수 학점을 절반으로 낮추는 투쟁을 어떻게 등록금 투쟁과 연결시킬 것인가?

학교 측의 경제 논리를 역이용하면 된다고 본다.

학교 측의 논리는 대체로 등록금 인상 요인이 일반적으로 물가 상승이고, 이러한 물가 상승이 인건비의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등록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인건비의 상승이 등록금 상승의 요인이라는 것이다(그렇지만 대학 교육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시간강사의 경우 강사료의 인상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거의 20년간 강사료의 인상율은 그간의 물가 상승율에 비하면 거의 10분의 1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인건비를 낮추면 등록금을 인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졸업 이수 학점을 낮추어서 인건비를 절감하면 된다. 다시 말해서 졸업 이수 학점을 절반으로 낮춘다는 것은 그 학점에 해당하는 과목 또는 강좌를 줄인다는 것이고, 이는 곧 그 과목 또는 강좌를 담당하는 교강사를 줄이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등록금 인하 요인을 학교 측의 경제 논리를 이용하여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었을 때 당장 생존에 지장을 받는 이는 나 같은 시간강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 보장의 책임은 학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부 및 자본에게 있다. 그러므로 교강사들의 생존 보장은 학생들의 노동 강도 강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부 및 자본에 대해 요구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요구 투쟁을 할 때 학생들은 기꺼이 연대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학교 측에 공을 넘겨 버리면 학교는 분명히 <졸업 이수 학점을 낮추는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 의지의 문제이다>라고 하면서 비껴가려고 할 것이다.

학교의 답은 분명히 맞는 답이다.

사실상 졸업 이수 학점 감소 문제는 개별 학교에서 투쟁할 사안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국 전체 대학생의 문제로서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답게 공부하기 위해, 즉 과도한 노동강도의 공부, 그리하여 재미 없게 된 공부의 양을 대폭 줄이기 위해 학생들 스스로 촛불시위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학생들은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지난 번 촛불시위는 여고3학년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이제는 좀더 구체적이고 절실한 삶의 문제인 노동강도의 완화로서의 졸업 이수 대폭 감소를 위한 촛불시위는 대학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충분히 시작될 수 있으리라 본다.

대학 안에 갇혀 있던 대학, 외부와 소통이 단절된 대학이 아니라 사통발달의 거리 광장의 대학,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한 대학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해 와서 발표하고 토론하며, 또한 서로 격려해 가면서 공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듦으로써 스스로 대학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러한 대학 만듦은 자연스럽게 대학 안에 갇힌 대학에 대한 동맹 휴업으로 나타날 것이고, 휴학 투쟁으로 나타날 것이고, 졸업 연기 투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은 서서히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자본은 자기 입맛대로 노동력을 공급 받을 수 없을 텐데, 졸업하는 학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대학은 더 이상 대학에 갇힌 대학이 아니라 사통발달의 광장의 대학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할 커리큘럼을 만들기 시작하고, 이 커리큘럼대로 공부하기 시작할 것이고,

이 공부한 것을 발표하고 토론하며 서로 격려해 가는 공부의 장, 축제의 장, 소통의 장, 정치의 장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러한 장은 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릴 것인데, 이는 기존의 축제와는 전혀 다른 학생들 스스로를 생산해 내는

생산력 발전의 축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축제는 곧 학생들 자신의 코뮌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이것은 곧 등록금 인하가 아니라 대학의 무상 교육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아가 대학 입시제도도 폐지될 것이고, 누구든지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대학에 올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학의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좀 더 생각이 구체화되는 대로 세부적으로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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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 윤리학에 대하여^^...

# 메타 윤리학 #

 

- <과학(합리성) = 윤리>라는 도식이 아예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문제의식은 에피쿠로스학파, 흄, 칸트와 거의 똑같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성 작용의 영역을 과학에 한정시키고 윤리의 영역은 빼 버린다는 것이다.

- <과학(합리성) ≠ 윤리>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면, 윤리(~해야 한다, 당위, 도덕, 자유의지의 영역; 가치판단의 영역) 영역에 속하는 주장은 그 근거를 과학․합리성의 영역(~이다, 자연법칙․필연성의 영역; 사실판단의 영역)으로부터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조류가 메타 윤리학이다.

 

** 메타 윤리학 1 : 무어와 이모티비즘

- 메타윤리학의 대표적인 학자가 <무어>이다. 무어는 윤리적인 판단의 참됨을, 즉 가치판단의 참됨을 과학․합리성의 영역에서, 즉 사실 판단에서 그 근거를 끌어대는 것은 오류이고, 이러한 오류를 <자연론적 오류>라고 불렀다.

- 예를 들어 ‘인간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규범 윤리학자에게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결국 행복하게 잘 살더라’는 등의 사실에 관한 판단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규범 윤리학자에게 <윤리 = 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실판단의 예를 많이 끌어들여도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는 증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과 당의는 그 존재의 층위가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 이렇게 해서 메타 윤리학은 규범 윤리학이 학문, 즉 과학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현대의 대표적인 메타 윤리학의 조류는 <이모티비즘(emotivism)>이다. 이모티비즘을 주장하는 윤리학자들은 예를 들어 ‘인간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판단은 ‘아 슬프다’, ‘나쁜 녀석’ 등과 같이 말하는 사람의 감정(emotion)을 표출하거나 듣는 사람의 감정을 일으키는 구실을 할 뿐이며 우리에게 아무런 사실도 알려주지 않는다.

- 그러므로 이모티비즘에 따르면 이런 도덕판단은 예를 들어 ‘이 사과는 빨갛다’는 사실판단과 달리 참, 거짓을 가릴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도덕판단을 핵심 내용으로 삼는 규범 윤리학은 과학이, 즉 학문이 될 수 없다.

 

** 메타 윤리학 2 : 헤어

- 무어나 이모티비즘에 따르면 모든 도덕판단과 그 도덕판단을 핵심으로 하는 규범 윤리학은 주관적인 개인 감정에 기초하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도덕, 윤리는 성립할 수 없게 되고, 인간 사회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 바로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규범 윤리학이 학문(과학)으로 성립할 수 있다고, 즉 도덕판단도 참, 거짓을 가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메타 윤리학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20세기 미국의 윤리학자 헤어이다.

- 헤어는 도덕판단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적 요소>, 즉 이성(과학)이 작용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도덕판단도 참, 거짓을 가릴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도덕판단 속에는 <누구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과 <이런 이웃 사랑을 적극적으로 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전자는 이 도덕판단의 내용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보편화 가능성>과 그 내용을 행동에 옮기도록 촉구하는 <규제성>이 들어 있다.

- 보편화 가능성을 먼저 살펴보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 또는 없는지, 즉 그 보편화 가능성의 참․거짓(정당성과 부당성)을 가질 수 있으며 이 결과에 따라 규제성의 ‘~을 하라’는 것 역시도 해야 되는지 또는 하지 않아야 하는지, 즉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참․거짓을 판별할 수 있게 된다.

- 그렇기 때문에 헤어는 규범 윤리학이 학문, 과학으로 성립할 수 있다, 즉 <과학 = 윤리>라는 도식이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 메타 윤리학 3 : 듀이

-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철학자 듀이는 도덕판단이란 인간이 부딪친 <문제 상황> 속에서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 일종의 <실천 판단>이며, 이 실천판단 속에는 <현재 사실>에 대한 정보와 미래 사실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 예를 들어 ‘너는 병원에 가야 한다’는 실천판단 속에는 현재 너의 몸이 아프다는 사실에 대한 정보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나을 것이라는 미래 사실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다. 그리고 현재 몸이 아프다는 점과 병원에 가면 나을 것이라는 점은 참․거짓을 가릴 수 있다.

- 그러므로 듀이에 따르면 도덕판단도 참․거짓을 가릴 수 있으며, 이 도덕판단을 핵심 내용으로 가지는 규범 윤리학은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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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 윤리학에 대하여 주저리 주저리 2^^...

** 근대 윤리학 1 : 칸트의 윤리학

- 중세 봉건 공동체가 해체되고 근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각 개인들은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지게 되었다. 이것은 곧 각 개인들의 생존이 각 개인 자신에게 달려 있을 뿐 다른 어떤 누구에게도 간섭 받거나 침해 받을 수 없음을 뜻한다.

- 이러한 생존의 법칙은 타인을 완전히 배제하는 배타적 특성을 가진 사적 소유의 원리가 된다. 모든 합리적인 수단․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신만의 부를 소유․축적할 수 있다는 것이 근대 시대의 <자유> 이념이며, 누구나 이러한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근대 시대의 <평등> 이념이다.

- 자기 자신만의 생존을 위하는 근대 인간은 곧 만인 대 만인 투쟁 상태, 즉 먹지 않으면 먹히고 마는 정글 법칙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 이러한 상태는 여타의 다른 동물들이 사는 자연 세계와 똑같은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서로 돕고 협력하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윤리’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가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피쿠로스학파에게서처럼 칸트에 오게 되면 고대의 전통인 <과학(합리성 또는 이성) = 윤리>라는 도식이 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정글법칙에 따라 사는 이 현실의 삶이 왜 그러한지를, 즉 신의 뜻을 이 현실 속에서 찾아봐야 정글법칙이 그 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글법칙은 정확하게 말해서 신의 뜻이 아니다.

- 정글의 법칙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배타적인 사적 소유의 원리, 즉 적대적인 무한 경쟁의 원리로서 이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만드는 원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사회성, 즉 협력과 단결, 연대와 우애라는 특성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제 인간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간의 사회성을 회복시켜야만 하는 의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안 하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러한 의무의 영역은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적 현상의 영역, 즉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객관적 ‘사실’의 영역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영역이다. 이 영역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당위’ 또는 ‘도덕’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 이러한 의무․의지를 칸트는 ‘선 의지’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지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그러한 의지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답게, 즉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사회성(연대와 협력, 그리고 우애와 단결)을 실현시키며 살아가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 칸트의 이러한 <선 의지>는 <정언명령>이라는 정식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 위와 같은 내용을 고찰해 볼 때 칸트의 ‘선 의지’, ‘정언명령’은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유의지처럼 <자발성>에 기초한 윤리 법칙이라 할 수 있다.

- 그런데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유의지>와 칸트의 <선의지>와의 차이점은 아마도 칸트의 선의지가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유의지 방향을 구체적으로 설정하였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유의지의 발현방향을 <선>으로 구체화하였다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 이러한 윤리 법칙은 국가들 간의 윤리적․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UN과 비슷한 <국가연합>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 근대 윤리학 2 : 공리주의

- 에피쿠로스학파와 칸트의 윤리학이 자발성에 기초해 있다고 한다면 공리주의는 비자발성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수로서의 나의 이익이 다수로서의 여러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충돌이 일어나게 될 때, 공리주의는 다수의 여러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지지하게 되며, 소수로서의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여러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법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는 <적대적인 무한 경쟁>을 생존 원리로 삼고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 대다수가 이 생존 경쟁으로부터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는 칸트가 말하는 선의지, 즉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정언명령이 실현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이런 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즉 비합리적인 것으로 비판 받을 수 있다.

- 윤리는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리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윤리관을 통해 공리주의가 성립한다. 그런 점에서 공리주의는 <경험주의적>이다.

- 공리주의는 이러한 자본주의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다시 말해서 <적대적인 무한 생존 경쟁> 원리를 이미 그 바탕에 깔고 있다. 그 경쟁에서 탈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 경쟁에서 탈락한 자는 경쟁 구조 속에 다시 뛰어들 수 없는 죽은 자(또는 비존재)이다.

-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는 경쟁 이전의 전체의 측면에서 볼 때 <최대 다수>이다. 왜냐하면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에는 애초부터 경쟁에서 승리한 자뿐만 아니라 패자부활전 같은 것을 통해서 다시금 경쟁 체제에 편입될 수 있도록 구원 받은 자들과 앞으로 경쟁 체제에 들어올 예비 경쟁자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일단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킨 <행복한 자들>이다.

- 그러므로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의 원리는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 된다.

-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그 특성상 <배제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경쟁에서 탈락한 소수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다른 한편 경쟁은 단 1번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한하게, 그것도 적대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계속 최대 다수 중에서 경쟁에 탈락한 소수가 배제되고 결국에 가서는 <1등 혼자만이> <최대 다수>가 되고, <최대 다수>인 경쟁자는 <최대 소수>가 된다.

- 이렇게 해서 공리주의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 결국에 가서는 1등만을 위한 윤리법칙이 되고 만다.

- 또한 공리주의 경제지상주의(경제적인 이익이 커져야만, 즉 파이가 커져야만 각 개인에게 돌아갈 이익도 커진다는 논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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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 윤리학에 관해 주저리 주저리 1^^...

# 규범 윤리학 #

 

- 의미 : 당위에 관한 학문이라는 의미.

‘~을 해야 한다’, ‘~이어야 한다’ 등의 도덕 판단으로 표현.

- 이러한 도덕 판단의 기초, 토대 : <이성>

- 그런데 <이성>의 의미나 그 기능(또는 작동 방식)은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성>의 의미나 작동 방식은 시대적인 인간의 삶․문화 형태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또한 인간의 삶․문화 형태는 <이성>의 <대상>인 <인간 자신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그런데 세계에 대한 이성의 파악은 궁극적으로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법칙성, 즉 필연성을 파악하는 데 있다. 이러한 필연성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가지 형태로 나뉘게 되는데, 그 하나는 인간 삶의 필연성, 즉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당위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법칙이 가지고 있는 필연성, 즉 사실관계가 가지고 있는 필연성에 관한 것이다.

-고대에서는 이 둘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즉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후로 가게 되면 인간이 자연 존재이면서도 여타의 다른 자연 존재들과는 구별된다는 특성에 따라서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 관계에 초점을 두게 된다. 이는 인간을 여타의 다른 자연 존재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을 강조하게 되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그 특성을 ‘자유의지’로 보았다.

-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방점을 두고서 대체로 윤리의 보편성, 절대성을 강조하는 목적론적 윤리설과 법칙론적 윤리설, 공리주의 등의 규범 윤리학에서 나타난다.

- 다른 한편으로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방점을 두고서 대체로 윤리의 특수성과 상대성을 강조하는 상대론적 윤리설 등의 메타윤리학에서 나타난다.

- 아래에서는 규범 윤리학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 고대 그리스 윤리학 1 : 플라톤

- 플라톤의 윤리학은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 <이성>은 이데아 세계의 진리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인간은 바로 그 진리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 그런데 이데아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하는 현실 세계의 원본이면서도 이 현실계와 분리되어 있다.

- 그렇다면 <이성>은 이 이데아 세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이성은 현실세계를 분석하고 쪼개고 따져서 이데아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데아 세계는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오로지 도를 깨치듯이 아는 방법, 즉 직관을 통해서 이데아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그 당시의 <신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그런데 이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 당시의 인간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도시국가(폴리스)의 시민 성인 남성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 고대 그리스 윤리학 2 : 아리스토텔레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비판하였다.

예) ‘개(dog)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범신론적이고 경험론적인 형상론과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 <이성>의 목적은 <순수형상>, 즉 <신>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신>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 그런데 이 <신>은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 이 <신>은 이데아 세계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이 <신>은 <직관>을 통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분석하고 쪼개고 따지는 연역적 방법>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 그런데 이 <직관>은 그것이 참된 것이니, 거짓된 것인지 확인․증명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개인 또는 몇몇이 신의 뜻을 빌러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인간의 삶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 이 <신>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 인간 삶(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 이르는데, 이 행복은 현실 세계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연역적으로 파악하는 <이성적 활동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 그리고 이러한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중용이란 현실 세계의 이런 저런 변화에, 그리고 그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임의적인 주관에 휘둘리지 않는,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불변의 이성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질적인 삶에 휘둘려 살지 않고 <과학적인 태도>의 삶을 견지하는 것을 말한다.

- 그런데 이런 변화의 현실은 필연적인 신의 뜻이므로, 당시의 모든 정치․경제․계층적 삶은 신의 뜻에 의한 것이다.

 

** 고대 로마의 윤리학 1 : 스토아학파

- 고대 로마의 문명은 고대 그리스의 문명을 계승․발전시킨 문명이다. 그러므로 고대 로마의 윤리학 역시 고대 그리스 윤리학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러한 고대 로마의 윤리학 가운데 하나가 스토아학파가 내세우는 윤리학이다. 스토아학파가 내세우는 윤리학은 금욕의 윤리학이다.

- 고대 그리스의 윤리학의 쟁점은 참된 진리가 어느 정소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이성의 작동 방식이 달라지는 데 있다. 그런데 스토아학파가 문제 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이성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가>였다.

- 스토아학파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 작동 방식이 암묵적으로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의 물질적인 변화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 이것은 곧 물질적인 측면에서 금욕주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고, 금욕주의를 통해 마음의 평정, 고요함(부동심)을 얻은 후에야 이성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과학적 태도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 과학적 태도․실천은 곧 윤리적 태도․실천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고대 로마의 윤리학 2 : 에피쿠로스학파

- 절제와 평정을 강조했던 스토아학파와는 달리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를 주장했다.

-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은 <자유의지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 에피쿠로스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와는 달리 자연의 필연적 인과율을 거부하는 비결정론적인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의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의 필연적 인과율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신의 의지, 뜻(자연법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인간 이외의 여탸 다른 생명체와 인간 사이의 어떠한 구별․분리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의’ ‘윤리’는 성립될 수 없다. ‘인간의’ ‘윤리’가 성립되려면 인간 이외의 여타 다른 생명체와 구별될 수 있는 특성이 인간에게 존재해야 한다. 그러한 특성이 바로 ‘자유의지’라 하겠다.

- 자유의지는 자연법칙을 파악하는 능력 이외의 것이다. 자연법칙을 파악하는 능력은 자연을 분석하고, 쪼개고, 따져서 그 본질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이렇게 해서 파악된 여러 개별적인 자연법칙 그 자체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결론적으로 동물의 삶의 방식과 구별되지 않는다. 인간은 단순히 이러한 법칙들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법칙들을 자신의 삶의 목적에 맞게 종합․통일시킨다. 이렇게 종합․통일시켜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현실화하는 것이 자유의지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런데 자유의지의 실현은 이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학파의 윤리학 역시 이성을 통한 자유의지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이성은 분석하고, 쪼개고 따지는 능력이 아니라 종합하고 통일시키는 능력이 된다.

- 또한 동시에 이러한 능력은 과학적 실천의 기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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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미술의 위기(16세기 후반 유럽) 2

▲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cos Theotocopoulos : 1541?-1614) ▼

- 이 사람은 “보통” “간략하게 ‘그리스인’이라는 의미의 엘 그레코(El Greco)로” 불렸는데,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의 화가”로서 “16세기의 화가들 중에서 틴토레토의 화법을 한층 더 밀고 나간 사람”이다. (371쪽)

- 엘 그레코가 베네치아로 갔다가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한 이후에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감동적이고 극적인 환상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엘 그레코가 틴토레토를 능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는 아직도 미술에 관한 중세의 이념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73쪽)

- “도판 238(<요한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 p.372)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놀랍고 흥미진진한 것 가운데 하나다.” (373쪽)

- “흥분된 몸짓을 하고 있는 나체의 인물들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인 흰 두루마기를 받기 위해서 무덤에서 일어난 순교자들이다. 제아무리 정확하고 빈틈없는 소묘력을 가진 화가라 할지라도 성인들이 이 세상의 파괴를 요구하는 최후의 심판날의 그 무서운 광경을 이처럼 무시무시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373쪽)

- “틴토레토의 한 쪽으로 치우친 비정통적인 구성 방법에서 엘 그레코는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고 또 파르미자니노의 기교를 부린 <마돈나>(도판 234, p.365)에서와 같이 인물을 길쭉하게 그리는 매너리즘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73-4쪽)

- “그의 작품은 믿기 힘들 만큼 매우 ‘현대적’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스페인 사람들은…… 반감 같은 것은 가지지 않은 것 같다.” (374쪽)

- “그의 가장 위대한 초상화들(도판 239 <펠릭스 오르텐시오 파라비시노 수사>, p.373)은 티치아노의 초상화(p.333, 도판 212)에 비견될 수 있다.” (374쪽)

 

 

▲ 북쪽(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 미술가들의 위기 ▼

- “남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롭고 놀라운 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제와 씨름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회화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었다. 이 커다란 위기는 종교 개혁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 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374쪽)

- 또한 거대한 제단화나 프레스코화를 그린다는 것은 캘빈 교도들에게는 일종의 사치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화가들의 정상적인 수입원으로 남게 된 것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과연 그것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374쪽)

 

 

▲한스 홀바인(아들)(Hans Holbein the Younger : 1497-1543) ▼

- “우리는 이러한 위기의 영향을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 화가인 한스 홀바인(아들)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374쪽)

- 도판 240(<성모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p.375)을 살펴보자. “이 그림의 형식은 모든 나라에서 전통적인 것으로서, 우리는 이미 이런 형식이 <윌튼 두폭화>(p.216-17, 도판 143)나 티치아노의 <페사로의 성모>(p.330, 도판 210)에 적용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홀바인의 그림은 이러한 종류의 그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76쪽) 즉 완벽한 삼각형의 구도(이 삼각형의 구도의 원리는 중세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인물 배치 구도이다 ; 성모와 예수가 무대의 정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동일한 거리 내에 헌납자들의 가족들이 왼쪽에는 남성들로, 오른쪽에는 여성들로 배치되어 있다)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 “고전적 형태의 감실(龕室)에 둘러싸인 고요하고 품위 있는 성모 양쪽에 헌납자의 가족들을 별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배치해 놓은 방법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조반니 밸리니(p.327, 도판 208)와 라파엘로(p.317, 도판 203)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조화로운 구성을 상기시켜 준다. 세부 묘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인습적인 아름다움을 다소 무시하는 것으로 보아, 홀바인은 북유럽에서 화가 수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376쪽)

- 도판 242(<리처드 사우스웰 경>, p.377)를 살펴보자. “홀바인의 이러한 초상화들에는 드라마틱한 것은 하나도 없고 사람의 눈을 끌 만한 것도 없으나 이 그림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모델의 마음과 인품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다. 홀바인이 그 인물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호의 없이 본대로 충실하게 그린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376-9쪽)

- “홀바인이 이 인물을 이 그림에 배치한 방법을 보면…… 전체 구성이 아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아주 ‘알기 쉽게’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홀바인이 의도한 것이었다.” (379쪽)

- 홀바인은 “그의 초기의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배경, 즉 평소에 그 인물이 가까이 했던 것들을 통해서 주인공의 특성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세부를 묘사하는 그의 탁월한 솜씨를 여전히 과시하려고 했다(도판 243<런던의 한 독일 상인 게오르크 기체>, p.378).” (379쪽)

-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고 기법이 완숙해감에 따라서 그러한 트릭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도 않았으며 또 초상 인물로부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게 의도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높이 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거장다운 절제 때문이다.” (379쪽)

 

 

▲ 니콜라스 힐리어드(Nicholas Hilliard : 1547-1619) ▼

- 홀바인이 죽자 독일어권과 영국의 회화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가운데서도 홀바인이 지켜낸 유일한 분야가 초상화인데, 이 초상화 분야에서도 “남유럽의 매너리즘 취향이 나타나고 홀바인 풍의 간결한 양식 대신에 귀족적인 세련과 우아함이 이상시되었다.” (379쪽)

- “이런 새로운 유형의 최고 수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젊은 귀족의 초상화(도판 244 <들장미 곁의 젊은이>, p.379)”인데, 이 초상화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이었던 유명한 영국의 화가 힐리어드가 그린 ‘세밀화’이다.” (379쪽)

- “아마도 이 세밀화는 청년이 구애를 하고 있는 숙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 그린 그림 같다.” (379쪽)

 

 

▲ 16세기 후반 네덜란드 미술의 상황 ▼

-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을 통해 일찌감치 부를 축적하였고, 이러한 부의 축적은 곧바로 상인계급, 즉 부르주아지를 경제적․정치적으로 급성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급성장은 네덜란드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중세 가톨릭의 규제를 덜 받고 그만큼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 종교 개혁이 가져왔던 엄청난 역사적 파장도 네덜란드에서는 그닥 큰 파장을 가져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교 개혁은 부르주아지들이 깊숙이 연관된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시대적 배경은 네덜란드의 미술, 특히 회화의 영역을 다양하게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 “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무사하게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 그들은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그러한 모든 유형을 전문화하였다.” 신교 교회의 신도들 대부분은 상인계급, 즉 부르주아지였다. “일찍이 반 에이크의 시대로부터 네덜란드의 미술가들은 자연을 모방하는 데 완벽한 대가들로 정평이 나 있었다.” (380쪽)

- “따라서 더 이상 제단화나 기타 다른 종교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진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공인된 전문적 특기를 사줄 수 있는 시장(市場)을 발견하려고 애썼고, 또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솜씨를 과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381쪽)

- 그림을 살 수 있는 부를 가지고 있는 계급이 부르주아지였고,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일상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들을 선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일상 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들을 뒤에 가서 소위 ‘풍속화(genre painting)’라고 부르게 되었다. (381쪽)

 

 

▲ 피터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 : 1525?-69, 아버지) ▼

- 브뢰헬은 “16세기 플랑드르 최대의 풍속화가”였다. (381쪽)

- 도판 245(<화가와 고객>, p.380)를 보면, 브뢰헬은 “뒤러나 첼리니에게”서처럼 “미술과 미술가의 존엄성을 중요”시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에서 화가의 뒤에서 “지갑을 만지작거리는” 고객(부르주아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붓을 들고 그림 작업을 하고 있는 화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381쪽)

- “브뢰헬이 주로 그렸던 그림의 ‘종류’는 농민들의 생활 장면이었다. 그는 농부들이 떠들썩하게 술잔치나 축제를 벌이고 일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381쪽)

- “브뢰헬이 그린” 풍속화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시골의 결혼을 다룬 유명한 작품”은 도판 246(<시골의 결혼 잔치>, p.382)이다. (382쪽)

- 이 그림에서 “넘치는 기지와 뛰어난 관찰력으로 묘사된 이처럼 많은 일화들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브뢰헬이 비좁다거나 번잡스러운 인상이 전혀 들지 않게 그림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틴토레토라 하더라도 이렇게 수많은 인물들이 가득 들어찬 공간을 브뢰헬만큼 교묘한 수단으로 더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383쪽)

- “식탁은 원근법에 의해서 뒤로 후퇴하고 있고, 인물들의 움직임을 배경에 있는 헛간 입구의 군중들로부터 시작해서 전경의 음식을 나르는 두 사람을 거쳐 음식을 받아 상 위에 올려놓는 사람을 통해서 다시 배경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바로 이 음식을 옮겨 놓는 사람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곧장 조그맣게 그려졌지만 회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흐뭇한 표정의 신부에게로 향하게 된다.” (383쪽)

- “이 유쾌한, 그러나 결코 단순하다고 할 수 없는 그림들에서 브뢰헬은 풍속화라는 미술의 새로운 왕국을 발견했다. 그 이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 왕국을 더 완벽하게 개척해 나갔다.” (383쪽)

 

▲ 16세기 후반 프랑스 미술의 상황 ▼

-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미술의 위기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탈리아와 북유럽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는 양쪽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프랑스 중세 미술의 굳건한 전통이 처음에는 이탈리아 미술의 유입으로 위협을 받았다. 프랑스 화가들은 네덜란드 화가들(p.357, 도판 228)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미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 상류 계급이 마침내 받아들인 이탈리아 양식은 첼리니 유형(도판 233)의 세련되고 우아한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이었다.” (383-4쪽)

 

 

▲ 장 구종(Jean Goujon : 1566? 사망) ▼

- “이탈리아 미술의 이러한 영향을 우리는 프랑스 조각가 구종이 만든 분수의 부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도판 248 <님프>). 이들 흠 잡을 데 없이 우아한 인물상들과 좁고 긴 면적에 인물을 적절하게 짜맞추어 넣는 방법에서 우리는 파르미자니노의 까다로운 우아함과 잠볼로냐의 절묘한 기교를 함께 엿볼 수 있다.” (384쪽)

 

 

▲ 자크 칼로(Jacques Callot : 1592-1635) ▼

- 칼로는 “틴토레토, 더 나아가 엘 그레코와 같이”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인물들과 예기치 않은 광경을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결합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수법을 구사하여 브뢰헬처럼 부랑자, 군인, 병신, 거지, 떠돌이 악사들의 생활 정경(도판 249 <두 이탈리아 광대>, p.385)을” 그렸다. (3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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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미술의 위기(16세기 후반 유럽) 1

18장. 미술의 위기(16세기 후반 유럽)

 

 

▲ 16세기 후반 이탈리아 젊은 미술가들의 문제의식 ▼

- “1520년 경 이탈리아 도시들의 모든 미술 애호가들은 회화가 완성의 극에 달했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레오나르도 등은 그전 세대가 이룩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실제로 해냈다.” (361쪽)

- 젊은 미술가들과 미술 지망생들은 이들을 모방하고 따르는 데 열중했다.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의 유행에 휩싸여 단순히 그의 수법(manner)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보는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매너리즘(mannerism) 시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 모두가 어려운 포즈를 취한 나체들만 모아 놓으면(“미켈란젤로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자세의 나체상을 즐겨 그렸다.”) 그림이 된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었다.” (361쪽)

- 그래서 이 젊은 미술가들은 이전의 거장들과는 달라 보이는 기발하고 색다른 것을 추구함으로써 이전의 거장들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하였다. 물론 이전의 거장들 역시도 이러한 실험적이고도 독창적인 창안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였다. 그래서 “선배들(이전의 거장들)을 능가하려는 이들(젊은 미술가들)의 미친 듯한 노력 그 자체가 그들의 과거의 거장들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였다.” (362쪽)

 

 

▲ 페데리코 추카리(Federico Zuccari : 1543?-1609) ▼

-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다소 재미있는 디자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건축가이자 화가인 추카리가 설계한 얼굴 모양의 창문(도판 231)은 이러한 기발한 창안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보여 주는 좋은 예다.” (362쪽)

 

 

▲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 : 1508-80) ▼

- 추카리와는 달리 “다른 건축가들은 그들의 박식과 고전 작가들에 관한 지식을 과시하는 데 더 열을 올렸는데, 사실 그들은 이런 점에서 브라만테 세대의 거장들을 능가했다. 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박학했던 사람은 건축가 팔라디오였다.” (362-3쪽)

- “도판 232(<비첸차 부근의 빌라 로톤다>, p.363)는 비첸차 근처에 있는 그의 유명한 별장인 <빌라 로톤다(Villa Rotonda)>이다. 이것도 어떤 점에서는 ‘기발한 창안’에 속한다. 왜냐하면 사면이 동일하며, 하나의 중앙 홀을 중심으로 각 면이 신전의 정면 형태를 한 현관을 가지고 있어 로마의 판테온(p.210, 도판 75)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363쪽)

- “하지만 그 구성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할지라도 이것은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부적합한 것 같다. 기발함과 인상적인 효과에 대한 추구가 건축의 일반적인 목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363쪽)

 

 

▲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 1500-71) ▼

- 첼리니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미술가”로서 “피렌체의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였다.

- “첼리니의 태도는 그전 세대가 했던 것보다 더 흥미롭고 비범한 것을 만들려는 당대의 불안정하고 열광적인 노력들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364쪽)

- 이러한 전형을 “몇 안 되는 그(첼리니)의 작품 중에 1543년에 프랑스의 왕을 위해 만든 금제 소금 그릇(도판 233 <소금 그릇>, p.364)”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그릇에서 “첼리니가 만든 매끈하고 우아한 인물 모습은 약간 지나칠 정도로 정교하고 장식적이라” 할 수 있다. (364쪽)

 

 

▲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 1503-40) ▼

- 첼리니와 동일한 태도를 “코레조의 제자였던 파르미자니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364쪽)

- 도판 234(<긴 목의 마돈나>, p.365)의 “작품은 일명 <긴 목의 마돈나>라고도 불리는데 그 까닭은 이 화가가 성모를 자기 나름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나머지 성모의 목을 마치 백조처럼 길쭉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367쪽)

- “그는 인체의 비례를 기묘한 방식으로 길게 늘여놓았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가진 성모의 손, 전경에 있는 천사의 긴 다리, 초췌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펼쳐보고 있는 비쩍 마른 예언자 등은 마치 일그러진 거울에 비친 상처럼 보인다.” “이러한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그(파르미자니노)는 이 그림의 배경에 인체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비례를 가진 괴상한 모양의 높은 원주를 세워 놓았다.” (367쪽)

- “이 그림의 구도는 그가 종래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조화를 기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파르미자니노는 자기가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여진 형태를 좋아한다는 것을 열심히 보여 주려고 했다.” (367쪽)

- 이러한 방식은 파르미자니노의 일관된 방식이었고, 문학에서 고전주의로부터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사실 선배 거장들이 이룩해 놓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엇인가 새롭고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창조하고자 모색했던 파르미자니노를 비롯한 그 당시의 모든 미술가들은 아마도 최초의 ‘현대적인’ 미술가들이었을 것이다.” (367쪽)

- “소위 ‘현대’ 미술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미술도 이들처럼 분명한 것을 피하고 인습적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는 다른 어떤 효과를 이룩하고자 하는 욕망에 그 근본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367쪽)

- ‘현대적인 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에 기초한 해체주의, 아방가르드 쪽 계열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장 드 불로뉴(Jean de Boulogne : 1529-1608) ▼

- 파르미자니노처럼 “선배들을 능가하려고 그처럼 절망적으로 노력”했던 몇몇 뛰어난 미술가들 중의 한 사람이 “이탈리아 이름으로는 조반니 다 볼로냐(Giovanni da Bologna) 혹은 잠볼로냐(Giambologna)라고 알려진 플랑드르의 조각가” 불로뉴이다. (367쪽)

- 도판 235(<머큐리 상>, p.366)을 살펴보자. “그(잠볼로냐)는 여기서 불가능한 것을 성취하고자 하였다. 즉 생명이 없는 물체의 무게를 극복하고 공중을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조각상을 창조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까지 성공하였다.” (367쪽)

- “이 조각상은 아주 교묘하게 균형이 잡혀 있기 때문에 실제로 공중에 떠서 빠르고 유연하게 날아가는 것 같이 보인다.” 이것은 기존의 조각상들이 땅에 힘차게 발을 딛고 서 있는 것과는 반대로 하늘을 날아가는 것처럼 함으로써 정통적인 조각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인지해 주고 있다. 이것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전기의 조각가라면, 심지어 미켈란젤로까지도 그러한 효과는 본래의 무거운 재료 덩어리를 생각나게끔 하는 조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368쪽)

 

 

▲ 야코포 로부스티(Jacopo Robusti : 1518-94, 통칭 틴토레토(Tintoretto) ▼

- “16세기 후반의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바로 틴토레토였다. (368쪽)

- 틴토레토 역시 “역시 티치아노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형태와 색채에 있어서의 단순하 아름다움에 진력이 나 있었다.” (368쪽)

- 틴토레토가 티치아노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그 불만은 “예외적인 것을 만들어 내려는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티치아노의 작품은 성격의 엄숙한 이야기와 성자의 전설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할 만큼 열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368쪽)

 

 

▲ 틴토레토의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도판 236, p.369) ▼

- 틴토레토는 이 그림에서 “성경의 이야기들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그린 사건의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368쪽)

- “이 그림은 성 마르코의 유해를 (‘이교도’인 회교도들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왔던 이야기 중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368쪽)

- “얼핏 보면 이 그림은 혼란스럽고 번잡하다.” (368쪽) 왜냐하면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과 어둠, 원경(遠景)과 근경(近景) 및 조화가 결여된 몸짓과 동작” 때문이다. (371쪽)

- 먼저 이 성경 이야기의 주인공인 <성 마르코>가 이전의 그림과는 달리 무대의 중앙에 위치해 있지 않고 구석으로 배치되어 있다. 또한 성 마르코는 시신으로, 또한 살아 있는 인간으로 이중적인 모습으로 처리되어 있다.

- 또한 양탄자 위에 널브러진 시신(성 마르코)은 “괴이한 단축법으로 그려져 있다.” (368쪽)

- 각 인물들의 동작과 행위 구성 원리는 이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빛의 명암이 이러한 구성의 원리라고 한다면, 성 마르코는 성경 이야기의 중심인물이니까 빛을 밝게 그린다고 하지만, 오른쪽에 배치된 커다랗게 놀란 몸짓을 보이는 남녀는 왜 빛을 밝게 그렸는지에 대한 이유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 이 남녀는 아마도 성인을 보고서 놀라는 몸짓인데, 그들의 시선은 성인을 향해 있지 않다.

 

 

▲ 틴토레토의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도판 237, p.370) ▼

- “런던에 있는” 이 그림은 “음산한 빛과 불안정한 색조가 어떻게 긴장감과 흥분된 감정을 고무시키는지를 보여준다.” (371쪽)

- 이 그림에서 “공주는 마치 그림 속에서 곧바로 우리들을 향해 달려 나올 것 같이 보인다. 한편 주인공인 성 게오르기우스는 일반적인 규칙과는 정반대로 주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배경 속에 멀리 들어가 있다.” (371쪽)

 

 

▲ 틴토레토에 대한 평가 ▼

- “틴토레토와 같은 사람은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했으며 또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그의 그림이 전설적인 장면에 대해서 그가 상상한 바를 전달하기만 하면 그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매끈하고 세심한 마무리 손질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보는 사람들의 주의를 그림의 극적인 사건으로부터 다른 데로 돌려 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았던 것이다.” (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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