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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7_자기생성 구조 접속 그리고 인지.hwp (94.30 K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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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www.isss.org/maturana.htm
[AUTOPOIESIS STRUCTURAL COUPLING AND COGNITION.mht (68.19 K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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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POIESIS, STRUCTURAL COUPLING AND COGNITION
자기생성, 구조 접속 그리고 인지
Humberto Maturana Romesin 움베르또 마뚜라나 로메인
F. Ciencias Dpto. Biologia F. Ciencias Dpto. Biologia
University Of Chile 칠레 대학교
Casilla 653 Santiago Chile 카실라 653 산티아고 칠레
DRAFT 초고
editorial changes not yet reviewed by author
저자에 의해 아직 재검토되지 않은 편집의 변화들
Purpose 목적
My intent in this essay is to reflect on the history of some biological notions such as autopoiesis, structural coupling, and cognition, that I have developed since the early 1960’s as a result of my work on visual perception and the organization of the living. No doubt I shall repeat things that I have said in other publications (Maturana and Varela 1980 and 1988), and I shall present notions that once they are said appear as obvious truisms. But the reader it is not invited to attend to the truisms, rather he or she is invited to attend to the consequences that they entail for the understanding of biological processes. After all, explanations or demonstrations always become self evident once they are understood and accepted. 이 논문 안에서 나의 의도는 1960년대 초 이래로 시(視) 지각과 살아 있는 것의 조직의 결과로서 내가 개발했던 자기생성, 구조접속, 그리고 인지와 같은 몇몇 생물학적 관념의 역사를 성찰하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나는 내가 다른 출판물{마뚜라나(Maturana)와 바렐라(Varela) 1980, 1988} 안에서 말했던 것들을 반복해야 하고, 그리고 나는 명백하고 자명한 이치로 보인다고 말해졌던 관념들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독자는 자명한 이치를 경청하도록 초대되지 않고, 차라리 그 또는 그녀는 그들이 생물학적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일으킨 결과를 경청하도록 초대된다.
KEYWORDS Autopoiesis, structural coupling, cognition, explanations, self-consciousness, 키워드 자기생성, 구조 접속, 인지, 설명, 자기 의식,
1. Autopoiesis
1. 자기생성
1.1 Origins of the notion
1.1. 관념의 기원들
In November 1960, a first year medical student asked me the question “What began three thousand eight hundred million years ago so that you can say now that living systems began then?” I realized that I could not properly answer that question, so I said “I cannot answer this question now, but if you come back next year I shall propose an answer then.” Thus I accepted the question of the student to be answered later, and as I did so, I accepted also the question for myself. I realized that to answer this question I had to create a living system, either conceptually or practically, because I had to be able to say what kind of systems were living system to be able to say how they began.
1960년 11월에, 1학년 의대생이 나에게 질문했다 “3천 8백만 년 전에 무엇이 시작했고 그래서 당신은 지금 그때 생명체가 시작했다고 말하는가?” 나는 알았다 내가 그 질문에 적당하게 대답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나는 이 질문에 지금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네가 내년에 돌아온다면 나는 그때 대답을 제시하겠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 대답될 학생의 질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는 또한 내 자신을 위하여 질문을 받아들였다.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생명체를 창안해야 했다는 것을 실감했는데, 개념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왜냐하면 나는 어떻게 그들이 시작했는지를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어떤 종류의 체계가 생명체였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While in the attempting to answer the dual questions of what kind of systems are living systems, and of how did they begin so that I could now speak of their origin, it became obvious to me that living systems exist as autonomous entities in the form of self contained closed molecular dynamics of self production, open to the flow of molecules through them. Indeed, one can say that living systems arose in the history of the earth in the moment in which some spontaneous networks of molecular autocatalytic processes became closed upon themselves. This happened when, as a result of their own dynamics, they became singular separable entities that realized their boundaries as a consequence of their own operation, and existed in that way as autonomous totalities in a molecular medium with which they were in recursive molecular interchange. Through this understanding my claim became that a living system is a dynamic composite entity, realized as a unity as a closed network of productions of components such that through their interactions in composition and decomposition the components:
어떤 종류의 체계가 생명체인가의, 그리고 내가 지금 그들의 기원을 말할 수 있기 위해서 그들이 어떻게 시작했는지의 이중의 질문들에 답하기를 시도하는 동안, 자기 생산의 자기 내포적인 폐쇄된 분자 역동성의 모양으로, 그것들을 관통하는 분자들의 흐름들에 개방된 채, 생명체가 자율적인 실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나에게 명백해졌다. 진실로, 일부 자동적인 분자적 자정 과정이 스스로 닫친 순간에 지구의 역사상 생명체가 일어났다고 누구는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때 일어났다, 그들 자신의 역동성의 결과로서, 그것들은 그들 자신의 작업의 결과로서의 그들 자신의 경계들을 실현한, 그리고 귀납적인 분자적 교환 안에서 그것들과 함께 있는 분자적 매질 안에서의 자율적인 총체성으로서 그 과정에 존재하는 특이한 개별적 실재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구성 요소들의 혼합과 분해의 그들의 상호작업을 통해서 그 같은 성분들의 생산의 폐쇄된 네트워크로서의 통일체로서 실현된, 역동적인 합성의 실재가 생명체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 되었다.
a) recursively constituted the same network of production that produced them, and
ㄱ)그들을 생산한 귀납적으로 구성된 똑같은 생산의 네트워크, 그리고
b) specified the extension of the network and constituted operational boundaries that separate it as ㄴ) a dynamic unity in a space defined by elements of the kind of those that compose it, is an autopoietic system.
그것을 구성하는 그것들의 종류의 요소들에 의해 정의된 공간 안에서의 역동적 통일체로서 그것을 잘라서 떼어 놓는 구성되고 작업적인 경계들과 상술된 네트워크의 연장이, 자기생성적인 체계이다.
My first full understanding of living systems as discrete self producing molecular networks closed in the dynamics of molecular productions, but open to the flow of molecules through them, took place suddenly at the end of 1963. In conversation with my friend Dr. Guillermo Contreras I was highlighting a fact that we of course both knew, namely, that nucleic acids participate with proteins in the synthesis of proteins, and that proteins participate as enzymes with nucleic acids in the synthesis of nucleic acids, all together constituting a discrete circular dynamics supported by the continuous flow of the molecules that we usually call metabolites. As I was drawing a diagram of this circularity, I exclaimed “This is it!”.
분자적인 생산들의 역동들안에 닫혀 있는, 그러나 그것들을 거쳐서 분자들의 흐름에 개방된 따로따로의 자기 생산적 분자적인 네트워크로서의 생명체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충분한 이해는, 1963년의 끝에 갑자기 일어났다. 나의 친구 길레르모 박사와의 대화 안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다. 단백질의 합성 안에서 단백질과 핵산이 참여한다, 그리고 핵산의 합성에 핵산과 효소로서의 단백질이 참여한다, 우리가 대개 물질대사라고 부르는 분자들의 연속적인 흐름에 의해 지지되는 따로따로의 순환적 역동성들을 모두 함께 구성하면서 말이다. 내가 이 순환성의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나는 설명했다 “이것이 그것이다!”
After this event I was impressed to see that although the metabolic charts that usually hang on the walls of biochemistry laboratories show cases of closed molecular dynamics, they do not show the participation of molecules in the realization of a boundary that would make of the molecular network a discrete entity in the molecular space. I think that those metabolic charts did not show autopoiesis because there was no concept of metabolic closure as a central feature of the constitution of a living system as a discrete entity, and because the metabolic network represented there did not constitute in its operation an autopoietic unity. But I did not have the word “autopoiesis” to speak with then.
이 사건 이후, 나는 그것을 본 것에 인상지어졌다 비록 생화학 연구실들의 벽 위에 보통 걸린 물질교환의 도표는 폐쇄된 분자적인 역동성의 경우를 보여준다, 그것은 분자 네트워크를 분자적 공간에서 구별된 실재로 취급하는 경계의 실현에서의 분자들의 참여를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저 물질대사 도표가 자기생성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구별된 실재로서의 생명체를 구성하는 중심적인 특징으로서 물질대사 폐쇄라는 개념은 없기 때문이고, 거기에 나타난 물질대사 네트워크가 그것의 작업으로 자기생성적 통일체를 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가지고 말할 “자기생성”이라는 용어를 그때 가지고 있지 않았다.
At the beginning of 1964 I began to say that living systems were constituted as unities as circular closed dynamics of molecular productions open to the flow of molecules through them in which everything could change except their realization as unities as closed circular dynamics of molecular productions open to the flow of molecules through them. It was later, in 1968 that I began to speak of living systems as closed molecular networks, and it was not until 1970 that I choose the word autopoiesis in order to connote the organization of living systems as closed networks of molecular production, and I could say that living systems existed only as long as their autopoietic organization was conserved. I did not think of autopoiesis in an experiential vacuum as I conceived it as an abstraction of what I knew of the molecular biology of the times.
1964년의 시작에 그것들을 거쳐 모든 것이 그들의 분자적인 생산들의 폐쇄된 순환적 역동성들이 그들을 거쳐 분자들의 흐름으로 열릴 때 통일체로서의 그들의 실현을 제외하고 변할 수 있었던 그것들을 거쳐 분자적인 생산들의 순환적인 폐쇄적 역동성이 분자들의 흐름을 열 때 생명체가 통일체로서 구성됐다고 나는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명체를 페쇄된 분자적 네트워크라고 물하기 시작했던 것은 더 뒤의, 1968년이었고, 내가 자기생성이라는 단어를 분자적인 생산들의 페쇄된 네트워크로서의 생명체의 조직을 내포하기 위해 선택했던 것과, 그리고 나는 생명체가 오직 그들의 자기생성적 조직이 보존될 수 있었던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1970년이 되어서였다. 나는 그 시대의 분자 생물학이라고 내가 알았던 것의 추상으로서 그것을 내가 품고 있었던 것처럼 자기생성을 경험적인 진공에서의 자기생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1.2 Molecular systems
1.2. 분자적인 체계
If the components of a closed network of productions that recursively constitute the same network of productions that produced them are molecules, then this autopoietic system is a living system that exists in the molecular space in a continuous molecular interchange with the molecular medium that contains it. Molecular systems exist only in the satisfaction of the structural conditions of molecular existence, thus the satisfaction of all that is required for molecular processes to occur is implicit in the understanding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The fundamental thing that happens in the constitution of a living system as a molecular autopoietic system is its constitution as an autonomous entity that has a singular existence as such in the continuous flow of molecules through it. Biological phenomena occur in the actual realization of living systems as singular unities, not in the particular nature of any of the molecular processes that realize them. Any phenomenon that occurs through the actual realization of the living of at least one living system, is a biological phenomenon.
만약 귀납적으로 생산의 똑같은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그리고 그것이 그것을 생산하는 생산의 폐쇄된 네트워크의 성분은 분자들이라면, 그러면 이 자기생성적 체계는 그것을 내포하는 분자적 매질과 연속적인 분자적 상호교환의 분자적 공간 안에 존재하는 생명체이다. 분자적인 체계는 오직 분자적인 존재의 구조적인 상태의 만족에만 존재하고, 따라서 일어나는 분자적인 과정에 요구된 모든 것의 만족은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는 이해에서 암시적이다.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로서의 생명체의 구성에서 일어나는 기초적인 것은 그것을 거쳐 분자들의 연속적인 흐름에서 그러한 것처럼 특이한 존재를 갖는 자율적인 실재로서의 그것의 구성이다. 생물학적 현상은 특이한 통일체로서의 생명체의 현실적 실현에서 일어나고, 그것을 실현하는 어떤 분자적 과정의 특정한 본성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한 생명체의 삶의 현실적 실현을 거쳐 일어나는 어떤 현상은, 생물학적인 현상이다.
Biological phenomena take place in a dynamics that occurs in the present without any operational relation to the past or the future. Past and future are explanatory notions introduced by the observer. The notion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has been minimized by some biologists under the claim that it is a notion already used by Kant as he thought of organisms as totalities in which each part existed both for and by means of the whole, while the whole existed for and by means of the parts (Kant1952, Kauffman 1995). Yet, what I say has a precision beyond what Kant could have said. I am speaking of how living systems are constituted operationally as singular molecular entities in a way that reveals their dynamic architecture. I am not saying, as Kant and others have said, that the parts exist for the whole and the whole for the parts. I talk of the manner in which the molecular process interconnect with each other so that a living system exists as a totality that appears to an observer as if the parts existed for the whole and the whole for the parts -- which is not the case. The components of any system exist as local entities only in relations of contiguity with other components, and any relation of the parts to the whole established by the observer as a metaphor for his or her understanding has no operational presence. Autopoiesis is not something that can be called a property of living systems; rather it is their actual manner of being as the organization that constitutes them as singular entities in the molecular space.
생물학적인 현상은 과거 또는 미래에 어떤 작업적으로 관계도 없이 현재에 일어나는 역동성에서 생긴다. 과거와 미래는 관찰자에 의해 소개된 설명적 관념이다.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는 관념은 그것은 이미 칸트가 유기체를 총체성 - 전부가 부분의 수단을 위해 그리고 수단에 의해 존재했던 동안, 각각의 부분들이 전부의 수단을 위해 그리고 수단에 의해 존재했다는 - 으로 생각했을 때 이미 사용된 관념이라는 주장 하에 일부 생물학자들에 의하여 과소평가 되어 왔다(칸트1952, 카우프만 1995).그러나, 내가 말한 것은 칸트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을 넘어서 정밀함을 가진다. 나는 어떻게 생명체가 그들의 역동적인 건축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특이한 분자적인 실재로서 작업적으로 구성되는지를 말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칸트와 다른 이들이 말했던 것처럼, 전부를 위해 부분이 존재하고 부분을 위해 전부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 아니다. 나는 분자적인 과정이 서로서로에게 상호연결되어 그래서 생명체가 마치 부분이 번부를 위해 존재하고 전부가 부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 실정에 맞지 않게 - 관찰자에게 보이는 전체성으로서 존재하는 방법을 말한다. 어떤 체계의 성분은 다른 성분과의 접촉의 관계에서만 오직 특정한 실재로서 존재하고, 그 또는 그녀의 이해를 위한 은유로서 관찰자에 의해 확립된 전체에 대한 부분의 어떤 관계도 어떠한 작업적 현존을 가지지 않는다. 자기생성은 생명체의 재산으로 불릴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분자적 공간에서 특이한 존재로서 그들을 구성한 유기체로서 존재하는 그들의 현실적인 방법이다.
As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living systems exist in the continuous flow of molecules through them in their realization as closed networks of molecular process that exist as movable singularities in a molecular space. Accordingly, and this is basic to their understanding, living systems are not the molecules that compose and realize them moment by moment, they are closed networks of molecular productions that exist as singularities in a continuous flow of molecules through them. Their closed dynamics constitute them as separable entities that float in the molecular domain in which they exist. It is this manner of constitution of living systems as molecular systems that Francisco Varela and I (Maturana and Varela, 1973) connote when we claim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in operational terms. Of course living systems are not unique in being entities that are not the components that realize them at any instant because they exist as dynamic unities in the continuous flow of the elements that compose them. I shall mention two cases in which it is apparent that what constitutes a dynamic system is its manner of composition, not the elements that compose it. One is a tornado, that exists as the manner in which the air molecules that realize it as a singular entity at any instant flow through it. Another is a club, that exists as a discrete network of conversations realized by persons that change in the course of the years, but which remains the same club as long as the network of conversations that defines it is realized and conserved through the interactions of the persons that are its members at any moment. The elements that compose a system are not its components by themselves, they are its components only as they participate in its composition, and only while they do so. So a particular molecule is a component of an autopoietic system only as it participates in the autopoietic molecular dynamics that constitutes it, and stops being a component of it as it stops participating in such dynamics.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로서, 생명체들은 분자적인 공간에 움직이는 특이성들로 존재하는 분자 과정의 폐쇄된 체계로서 분자들의 연속적인 흐름에 그들의 실현에서 그들을 거쳐 존재한다. 따라서,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이해 - 생명체가 순간순간 그것들을 실현하고 합성하는 분자들이 아니다 - 에 기본이고, 그들은 그들을 거쳐 분자들의 연속적인 흐름에 특이성들로서 존재하는 분자적인 생산의 폐쇄된 네트워크이다. 그들의 폐쇄된 역동성들이 그들을 그들이 존재하는 분자적 영역에서 떠다니는 분리할 수 있는 실재로서 구성한다. 그것이 우리가 작업적인 관점에서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고 주장했을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와 내가 (마뚜라나·바렐라, 1973) 내포했던 분자적 체계로서 생명체의 구성의 이 방법이다. 물론 생명체들은 어떤 순간에 그들을 실현하는 성분들이 아닌 존재하는 실재에서 유일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연속적인 흐름에서 역동적인 통일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역동적인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합성하는 그것의 방법이지, 그것을 합성하는 요소들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한 두 가지 경우를 언급해야 한다. 하나는 토네이도이다, 그것은 그것을 어떤 순간에 특이한 실재로서 실현하는 공기 분자들이 그것을 거쳐 흐르는 방법으로서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클럽이다, 그것은 다년간의 진행에서 변하는 사람들에 의해 실현된 대화의 따로따로의 네트워크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을 규정하는 대화의 네트워크가 어떤 순간에 그것의 멤버들인 사람들의 상호작업을 거쳐 실현되고 보존되는 한 같은 클럽으로 남는다.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는 그들 혼자에 의한 성분이 아니고, 그들은 오직 그들이 그것의 구성에 참가할 때만, 오직 그들이 그렇게 하는 동안만 그것의 성분이다. 그래서 특정한 분자는 그것이 그것을 구성하는 자기생성적인 분자적 역동성에 오직 참가할 때만 자기생성적 체계의 성분이고, 그것이 그러한 역동성에 참가하기를 멈출 때 그것의 성분이기를 멈춘다.
1.3 Conservation and historical processes
1.3. 보존과 역사적 과정
The notion of conservation is a fundamental notion of which I was aware since I was a medical student in the early fifties, but which I did not begin to use with full understanding until the early sixties. In fact, it was when I began to think on how to answer the question about the origin of living systems that it became obvious to me that that which we usually call relations of conservation are not features of the process in which we see them, but abstractions of the structural coherences under which the historical process takes place. As such, the notion of conservation has heuristic value because it reveals operational coherences in the structural (relational) matrix of the dynamic architecture of the domain in which a process takes place. Thus, in 1978 I began to speak of two relations (or laws) of conservation in the domain of biology that defined the course that different biological processes necessarily had to follow in order to happen at all. These are, the law of conservation of autopoiesis and the law of conservation of adaptation. These are both relational conditions of the realization of living systems in the medium that must be satisfied for biological process to occur. That is, conservation of autopoiesis and conservation of adaptation are constitutive conditions for the realization of living system as such. Historical processes occur moment after moment following a path constituted at every instant in the conservation of something that connects the successive moments in it, and around which all else is open to change. To say that living systems are historical systems, is to say precisely that they exist as singular entities in a continuous flow of structural change around the conservation of autopoiesis and adaptation. Thus it is not change that makes biological evolution a historical process, but the continuous conservation of autopoiesis and adaptation as that around which all else is open to change. What is primarily conserved in the history of living systems is living (autopoiesis and adaptation), and what is secondarily conserved are the different forms of the realization of living. These forms are conserved through the reproductive conservation of different manners of realization of autopoiesis in the conservation of adaptation. Understanding the participation of the dynamics of conservation makes possible the understanding of living systems and their history so that one can say now how they began millions of years ago. In this sense the biosphere, as I began to describe it in my lectures since 1990, is a historical wave front of co-evolving living systems in the systemic reproductive conservation of both autopoiesis and adaptation (Maturana and Mpodozis 1992 and 1999).
보존의 관념은 내가 50대 초반에 의학대학의 학생이었던 이래로 내가 알고 있던 기초적인 관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60대 초반이 될 때까지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쓰기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상, 바로 내가 생명체의 기원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법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우리가 보통 보존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들이 우리가 보는 그것들을 보는 과정의 두드러진 점들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이 일어나는 구조 응집의 추상이라는 것이 내게 명백하게 됐던 것은 말이다. 그 자체로, 보존의 관념은 발견적인 가치를 가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과정이 일어나는 영역의 역동적인 건축술의 구조적인 (관계적) 매트릭스에서의 작업적 응집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1978년에 나는 어쨌든 일어나기 위해서 다른 생물학적 과정이 필수적으로 좇아야만 하는 코스들을 규정하는 생물학의 영역에서 보존의 두 가지 관계 (또는 법칙)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자기생성의 보존 법칙과 적응의 보존 법칙이다. 이것들은 둘 다 일어나는 생물학적 과정을 위해 만족되어야만 하는 매질에서 생명체의 실현의 관계적 상태이다. 즉, 자기생성의 보존과 적응의 보존은 그 자체로 생명체의 실현의 구성적인 상태이다. 역사적 과정은 그것 안에서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이 변화에 열려 있는 주위에 잇따른 순간을 연결하는 무언가의 보존에서 모든 순간마다 구성된 작은 길을 따르는 순간 이후 순간에(moment after moment) 일어난다. 생명체가 역사적 체계라고 말하는 것은, 틀림없이 그들이 적응과 자기생성의 보존 주위에 구조적 변화의 연속적인 흐름에서 특이한 존재로서 존재한다고 틀림없이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물학적 진화를 역사적 과정으로 만드는 것은 변화가 아니고, 그 외의 모든 것이 변화에 열려 있는 주위에 그것으로서 적응과 자기생성의 연속적인 보존이다. 생명체의 역사에 첫째로 보존되는 것은 삶 - 자기생성과 적응 - 이고, 두 번째로 보존되는 것은 삶의 실현의 다른 모양이다. 이 모양들은 적응의 보존에서 자기생성의 실현의 다른 방법의 재생산적인 보존을 거쳐서 보존된다. 보존의 역동성의 참가를 이해하는 것은 생명체의 이해를 가능하게 만들고 그래서 한 사람이 지금 그들이 수백만 년 전에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말할 수 있다. 이 의미에서 생물권, 내가 1990년 이래도 나의 수업에서 그것을 묘사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자기생성과 적응 둘 다의 체계적인 재생산적 보존에서 생명체 공진화(共進化)의 정면의 역사적 물결이다.
1.4 The living
1.4. 살아 있는 것
My assertion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is neither a definition nor an explanatory proposition, it is a claim about what constitutes living systems, a claim about how they arose, and a claim about how they operate in the pragmatics of their living. That is, it is a claim that I have generated as an abstraction from the observation of how living systems on earth operate as unities and are constituted as autonomous molecular entities in the domain of the processes that molecular biology has revealed. Moreover, as I claim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I do not make a claim about some particular molecular structure in them, but I make a claim about the kind of molecular network that constitutes them, and the domain in which they exist. In these circumstances, the claim that living systems exist as singular autonomous molecular autopoietic unities through interactions in a medium with which they are in a continuous molecular interchange, is a claim about how they exist in their internal composition as well as about how they exist as totalities. Systems as composite entities have a dual existence, namely, they exist as singularities that operate as simple unities in the domain in which they arise as totalities, and at the same time they exist as composite entities in the domain of the operation of their components. The relation between these two domains is not causal, these two domains do not intersect, nor do the phenomena which pertain to one occur in the other. The generative relation between the two as seen by an observer is a historical relation. And the totality arises together with the relational domain in which it exists as such. That living systems are autopoietic molecular systems entails, then, several conditions that all biologists know even though they do not always fully consider their consequences: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는 나의 주장은 정의도 아니고 설명적인 제안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주장이고, 그들이 일어나는 방법에 대한 주장이고, 그들이 그들의 삶의 기호론에서 작업하는 방법에 대한 주장이다. 즉, 그것은 내가 생명체가 도대체 통일체로서 작업하는 방법의 관찰로부터의 추상으로서 낳은 주장이고 분자적 생물학이 드러낸 과정의 영역에서 자율적인 분자적 실재로서 구성된 주장이다. 게다가, 내가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고 주장한 것처럼 나는 그것들에서 일부 특정한 분자적인 구조에 대한 주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구성하는 분자적 네트워크의 일종에 대한 주장을 만드는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존재하는 영역을 만드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생명체가 그들이 연속적인 분자적 상호교환에 있는 매질에서 상호작업을 거쳐 특이한 자율적인 분자적 자기생성 통일체로서 존재한다는 주장은, 그들이 총체성으로서 존재하는 방법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부의 합성에서 그들이 존재하는 방법에 대한 주장이다. 합성의 실재로서 체계는 이중의 존재를 갖으며, 즉, 그들은 그들이 총체성으로서 일어나는 영역에서 단순한 통일체로서 작업하는 특이성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그들의 성분의 작업의 영역에서 합성의 실재로서 존재한다. 이 두 영역 사이의 관계는 인과적이지 않고, 이 두 영역은 교차하지 않으며, 하나에 속하는 현상이 다른 것에서 일어나지도 않는다. 관찰자에게 보여진 둘 사이의 발생적 관계는 역사적 관계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관계적 영역과 함께 총체성은 일어난다. 자기생성적인 분자적 체계인 그 생명체는, 그러면, 그들이 그것의 결과를 언제나 충분히 고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물학자들이 아는 몇몇 상태들을 남긴다.
1) Living systems exist as singular entities that operate as totalities in interactions in the medium where each conserves its individual identity under the form of a unicellular or a multicellular organism.
생명체는 각자가 단세포적 또는 다세포적 유기체의 모양 아래 그것의 개개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매질에서 상호작업의 총체성으로서 작업하는 특이한 실재로서 존재한다.
2) A living system as a molecular system is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thus everything that happens in it or to it, happens in each moment as determined by its structure at that moment.
분자적 체계로서의 생명체는 체계에 의해 결정된 구조이고, 따라서 그것에서 또는 그것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 순간에 그것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 각각의 순간에 일어난다.
3) Each living system as a molecular system is constituted as a closed network of molecular productions in which the molecules produced through their recursive interactions constitute the same closed network of molecular productions that produced them, dynamically realizing its operational boundaries as a singular entity that operates as a totality in interactions in a molecular domain.
분자적 체계로서의 각각의 생명체는, 역동적으로 그것의 작업적 경계를 분자적 영역에서 상호작업의 총체성으로서 작업하는 특이한 실재로서 실현하면서, 그들의 귀납적 상호작업을 거쳐 생산된 분자들이 그들을 생산하는 분자적 생산의 같은 폐쇄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분자적 생산의 폐쇄된 네트워크로서 구성된다.
4) Living systems as molecular systems are constitutively open to the flow of molecules in the continuous realization of the recursive closed self-producing dynamics that constitutes them as singular entities.
분자적 체계로서의 생명체는 연속적으로 특이한 실재로서 그들을 구성하는 귀납적인 폐쇄된 자기생산적 역동성의 연속적인 실현에서 분자들의 흐름에 열려 있다.
5) Everything that happens in the history of living systems occurs through their realization as singular entities that exist as organisms while in interactions with the medium in which they operate as totalities.
생명체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들이 총체성으로서 작업하는 매질과의 상호작업에 있는 동안 유기체로서 존재하는 특이한 실재로서의 그들의 실현을 거쳐 일어난다.
6) Living systems exist in two domains: one; the domain in which they exist as totalities or organisms, that is the domain in which they realize and conserve their identity as multicellular or unicellular singular beings, and two; the domain in which they operate as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which is the domain of their realization as composite molecular entities.
생명체는 두 가지 영역에서 존재한다. 그들이 전체성 또는 유기체로서 존재하는 영역, 그것은 그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분자적 또는 단세포적인 특이한 존재로서 보존하고 실현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합성적인 분자적 실재로서의 그들의 실현의 영역인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로서 그들이 작업하는 영역.
Frequently the dual existence of living systems in particular, and of systems in general, is obscured by the notion of emergent properties. By treating the features that an observer distinguishes in a system as if they were intrinsic to it, the notion of property obscures the relational nature of these features. All the characteristics that we as observers distinguish in a system pertain to the relational space in which it operates as we distinguish it, and are dimensions of its existence in that space. So, to speak of emergent properties in the constitution of a system is both a mistake and misleading. As a system is constituted as a totality, a new domain arises, the domain in which the system exists as that totality. To say that autopoiesis is an emergent property would be a mistake. To say that the constitution of an organism gives rise to emergent behavior would also be a mistake; the behavior that appears is not a feature of the organism, but a condition of its existence in the relational space in which it is a totality, and in which behavior as a relational dynamics involves both the organism and the medium in which it exists.
종종 특정한 생명체와 일반적인 체계의 이중적 존재는 불시에 나타나는 성질의 관념에 의해 모호해진다. 관찰자가 체계에서 구분한 특징들을 마치 그것들이 그것에 본질적인 것처럼 다룸으로써, 성질의 관념은 이 특징들의 관계적 본성을 모호하게 한다. 우리가 관찰자로서 체계에서 구분한 모든 특징들은 우리가 그것을 구분할 때 그것이 작업하는 관계적 공간에 속하고, 그리고 그 공간에서 그것의 존재의 차원들이다. 그래서, 체계의 구성에서 불시에 나타나는 성질들의 말하는 것은 실수와 오해 둘 다이다. 체계가 총체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처럼, 새로운 영역이 일어난다, 체계가 그 총체성으로서 존재하는 영역이. 자기생성이 불시에 나타나는 성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유기체의 구성이 불시에 나타나는 행위를 일으킨다고 말하는 것 또한 실수일 것이다. 나타나는 행위는 유기체의 특징이 아니고, 그것이 전체성이고, 관계적 역동성으로서의 행위가 그것이 존재하는 환경조건과 유기체 둘 다를 말아 넣는 관계적 공간에서 그것의 존재의 상태이다.
1.5 Not an explanatory principle
1.5. 설명적인 원리가 아닌
One of the basic conceptual difficulties in understanding living systems as autonomous autopoietic systems arises from our cultural training that leads us to think in terms of external causes to explain the occurrence of any phenomenon. This attitude blinds us to the spontaneous nature of all processes in the molecular domain in which we exist. All molecular processes occur spontaneously following a path that arises moment after moment according to the structural dynamics of the different molecules involved. That is, nothing occurs in the molecular domain through an external cause, and all that happens occurs as determined by the structural coherences inherent in the circumstances in which it occurs. In our culture, we are surprised when we see order appearing spontaneously, and we do no find an external cause for it. When that happens the conceptual difficulty entailed is frequently avoided or denied by resorting to some explanatory principle that is used without full awareness as if it were the external cause of that unexpected order.
생명체를 자율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로 이해하는데 기본적인 개념적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현상의 일어남을 설명하기 위해 외부의 원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우리의 문화적 훈련으로부터 생긴다. 이 태도는 우리가 존재하는 분자적 영역에서 모든 과정의 자발적인 본성에 우리가 눈멀게 한다. 모든 분자적 과정은 관련된 다른 분자들의 구조적 역동성에 따라서 순간 이후의 순간에 일어나는 좁은 길을 좇으며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즉, 어떤 것도 외부적 원인을 거쳐 분자적 영역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선천적인 구조적 응집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처럼 일어난다. 우리의 문화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보이는 명령을 볼 때 놀라고,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대한 외부적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것이 일어날 때 남겨진 개념적 어려움은 마치 그것이 그 예기치 못한 명령의 외부적 원인인 것처럼 충분한 인식 없이 사용되는 일부 설명적 원리들로의 재분류를 통해 종종 부정되거나 피해진다.
This is, I think, what has happened with the use of the notion of autopoiesis as it has been frequently treated as an explanatory principle. But the notion of autopoiesis as I have conceived it, and as I have indicated above, is not an explanatory principle. Autopoiesis occurs only when the dynamic structural architecture of the molecular domain in which it can occur satisfies the conditions for its occurrence.
이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종종 설명적 원리로서 취급되었을 때 자기생성의 관념의 사용과 함께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생성의 관념은 내가 그것을 착상했을 때처럼, 그리고 내가 위에서 지시했던 것처럼, 설명적인 원리가 아니다. 자기생성은 오직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분자적 영역에서 역동적인 구조적 건축술이 그것의 사건을 위한 상태를 만족시킬 때에만 일어난다.
Furthermore, I claim that autopoietic systems exist only in the molecular domain, and that this is so because the molecular domain is the only domain in which the interactions between the elements that define it, produce elements of the same kind as a spontaneous result of their structural dynamics: the interactions between molecules produces molecules through composition or decomposition. Indeed, this was my original claim when I said in my lectures in 1971, and later in the first edition of the book "De máquinas y seres vivos" that Francisco Varela and I published in 1973, that autopoiesis was both the necessary and sufficient condition for the constitution and realization of living systems. Later, while answering questions about whether there were other autopoietic system in other domains, and whether they were living systems or not, I though that it was perhaps possible that autopoietic systems could exist in other domains different from the molecular one. While considering this I found it necessary to insist that living systems were autopoietic systems in the molecular space. Yet, as I became more aware of the uniqueness of the molecular domain, I realized that it is only in the molecular domain that systems like living systems can exist because it is only in this domain where autopoiesis can take place. Let me be explicit.
더욱이, 나는 자기생성적 체계가 오직 분자적 영역에만 존재한다고, 그리고 이것이 그렇다면 왜냐하면 분자적 영역이 그것을 정의하는 상호작업이, 그들의 구조적 역동성의 자발적인 결과와 같은 종류의 요소를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분자들 사이의 상호작업은 합성과 분해를 거쳐 분자를 생산한다. 진실로, 이것이 내가 1971년에 나의 강의에서, 그리고 나중에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내가 1973년에 출판한 책 “(De máquinas y seres vivos)”의 첫 번째 판에서 자기생성이 생명체의 구성과 실현에서 필요조건 충분조건 둘 다라고 했을 때의 본래의 주장이었다. 나중에, 다른 영역에 다른 자기생성적 체계가 있는지에, 그리고 그들이 생명체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나는 자기생성적 체계가 분자적인 것과는 다른 영역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숙고하는 동안 나는 생명체가 분자적 공간에서 자기생성적 체계였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찾아냈다. 그러나, 내가 분자적 영역의 독특함을 더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생성이 일어날 수 있는 영역에서 유일하기 때문에 생명체와 같은 체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오직 분자적 영역에서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분명히 해보도록 하자.
The molecular space is peculiar in that,
분자적 공간은 저것에서 특유한데,
a) it is constituted by dynamic composite entities (the molecules) that as a result of their interactions produce through composition and decomposition elements of their same kind (that is new molecules),
ㄱ) 그것은 그들의 상호작업의 결과로서 합성과 분해를 거쳐 그들의 같은 종류의 (새 분자들인) 요소들을 생산하는 역동적인 합성의 실재들 (분자들) 에 의해 구성된다.
b) the composition and decomposition of the elements of this space (the molecules) occurs while these elements exist as composite entities under thermal agitation that operationally constitutes the energy for their composition and decomposition, and
ㄴ) 이 요소들이 그들의 합성과 분해를 위한 에너지를 작업적으로 구성하는 열 운동 아래 합성의 실재로서 존재하는 동안 이 공간 (분자들) 의 합성과 분해가 일어나고, 그리고
c) the course of the compositions and decomposition to which the elements of this space give rise in their interactions, is determined at every instant by the dynamic architecture of the composition (the structure) of the interacting elements (molecules).
ㄷ) 이 공간의 요소들이 그들의 상호작업에 일으키는 합성과 분해의 진행은, 상호작업하는 요소들 (분자들) 의 합성 (구조) 의 역동적인 건축술에 의해 매순간마다 결정된다.
In these circumstances, the molecular space is a space in which all that happens in it in terms of structural dynamics occurs without any external guidance or support as a spontaneous architectural dynamics. Or, in different words, the molecular space is a space in which all that happens in it at any instant occurs following a course determined and guided by the structure of the elements that constitute it in a dynamics that is proper to it as a dynamic architecture. There is no other domain like this in which the interactions of the elements that define it generate through composition and decomposition elements of the same kind without external support. Thus, the interactions of the elements of the sub-molecular space do not give rise to composite elements of the same kind. The elements of the supra-molecular space constitute entities that exist as totalities in a different domain than the molecular domain and exist as dynamic entities through the spontaneous dynamic architecture of the molecular components that realize them, and not by themselves as molecules do. So, I claim that the elements of neither the sub-molecular nor the supra-molecular domain cannot by themselves give rise to autopoietic systems as singular entities constituted as closed networks of productions of components that do not need external- support to operate as such.
이 상황에서, 분자적 공간은 구조적 역동성의 관점에서 그것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어떠한 외부적인 안내 또는 자발적인 건축적 역동성 없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또는, 다른 말로, 분자적 공간은 어떤 순간에도 그것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역동적 건축술로서 그것에 적당한 역동성에서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구조에 의해 안내되고 결정된 진행을 따르면서 일어나는 공간이다. 그것을 규정하는 요소들의 상호작업이 합성과 분해를 거쳐 외부적인 지지 없이 같은 종류의 요소를 낳는 이 같은 다른 영역은 없다. 따라서, 하위 분자적 공간의 요소들의 상호작업은 같은 종류의 합성의 요소들을 일으키지 않는다. 상위 분자적 공간의 요소들은 분자적 영역보다 다른 영역에서 총체성으로서 존재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구성하는 분자적 성분들의 자발적인 역동적 건축술을 거쳐 실재를 역동적인 실재로서 존재하는 실재를 구성하고, 그리고 분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들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하위 분자들도 아니고 상위 분자들 영역도 아닌 요소들이 그 자체로 작업하기 위해 외부적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성분들의 생산의 폐쇄된 네트워크로서 구성된 특이한 실재로서 자기생성적 체계를 그들 혼자서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Accordingly, a living system exists as an autopoietic system in the molecular space. But, at the same time, a living system exists also as an organism in the supra-molecular space where it arises as a totality through its interactions as a whole while it is constituted and conserved as a dynamic supra-molecular singularity through the autopoiesis of its cellular components. That is, an organism is an autopoietic system through its cellular composition, not through its supra-molecular existence. (some comments on social systems and ecosystems to be added in the final version of this paper)
따라서, 생명체는 분자적 공간에서 자기생성적 체계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생명체는 또한 그것이 그것의 세포적 성분의 자기생성을 거쳐 역동적인 상위 분자적 특이성으로서 보존되고 구성되는 동안 전부처럼 그것의 상호작업을 거쳐 전체성으로서 그것이 일어나는 상위 공간에 유기체로서 존재한다. 즉, 유기체는 그것의 세포적 합성을 거친 자기생성적 체계이다, 상위 분자적 존재를 거친 것이 아니라. 생태계와 사회적 체계에 관한 일부 논평은 이 논문의 최종 버전에서 덧붙여질 것이다.
2. Structural coupling
2. 구조 접속
2.1 Structure and organization
2.1. 구조와 조직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is a system such that all that takes place in it, or happens to it at any instant, is determined by its structure at that instant. We living systems, as molecular systems, are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There are two features of the constitution of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that I distinguish with the words organization and structure. These two features correspond to distinctions that we make in daily life as we handle any system or composite entity, even though we are frequently not consistent with the words that we use to refer to them. In these circumstances, I shall consistently use the word organization to connote the configuration of relations between components that define the class identity of a composite unity or system as a totality or singular entity. I shall consistently use the word structure to refer to the components and the relations between them that realize a system or composite entity as a particular case of a particular class.
구조 결정된 체계는 어떤 순간에 그것 안에서 일어나는 또는, 그것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 순간의 그것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그러한 체계이다. 분자적 체계로서, 우리 생명체는 구조 결정된 체계이다. 내가 조직과 구조라는 두 단어를 가지고 구분하는 구조 결정된 체계의 구성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이 두 가지 특징은 우리가 어떠한 체계 또는 혼성의 실재를 다룰 때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만드는 구분과에 상당한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와 우리가 종종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혼성의 통일체 또는 체계의 종류 정체성을 총체성 또는 특이한 실재로 규정하는 성분들 사이의 관계의 배치를 내포하는 조직이라는 단어를 시종일관하게 사용해야 한다. 나는 체계 또는 혼성의 실재를 특정한 종류의 특정한 경우로 실현하는 그것들 사이의 관계들과 성분들을 언급하기 위해 구조라는 단어를 시종일관하게 사용해야 한다.
The organization of a system is only an aspect of the relations included in the structure of the system, and does not exists independently of the structure in which it is realized. In these circumstances, a system conserves its class identity, and stays the same while its structure changes, only as long as its organization is conserved through those structural changes. The conservation of the organization of a system is a condition of existence, if the organization changes, the system disintegrates and something different appears in its place. This is not the case for the structure of a system. The structure of a system is open to change, and can change in two ways:
체계의 조직은 체계의 구조에 포함된 관계의 단지 양상일 뿐이고, 그것이 실현되는 구조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상황들에서, 체계는 그것의 계급 정체성을 보존하고, 그것의 구조가 변하는 동안 똑같이 머문다, 오직 그것의 조직이 그 구조적 변화를 거쳐서 보존되는 한에서만. 체계의 조직의 보존은 존재의 조건이다, 만약 그 조직이 변한다면, 그 체계가 분해되고 그리고 다른 무언가가 그것의 장소에 나타난다. 이것이 체계의 구조에 대한 경우는 아니다. 체계의 구조는 변화에 열려 있고, 두 가지 방식으로 변할 수 있다:
1) structural changes through which the organization of the changing system is conserved; I shall call these changes of state
1) 변화하는 체계의 조직이 보존되면서 거치는 구조 변화; 나는 이것을 상태의 변화라고 불러야 한다.
2) structural changes through which the organization of the structurally changing system is lost, not conserved; I shall call these disintegrative changes
2) 구조적으로 변화하는 체계의 조직이 분실되고, 보존되지 않으면서 거쳐야 하는 구조 변화; 나는 이것을 분해 변화라고 불러야 한다.
In changes of state the operational characteristics of the system change while it conserves it class identity. In disintegrative changes, as the original system disappears, something else arises in its place.
상태 변화에서 체계의 작업적 특징은 변한다 그것이 그것의 계급 정체성을 보존하는 동안. 분해 변화에서, 조직적 체계가 사라질 때, 다른 무언가가 그것의 장소에서 일어난다.
2.2 Congruent change
2.2. 적합한 변화
The structure of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changes both as a result of its internal structural dynamics and as a result of its interactions. The structural changes arising as part of the internal dynamics of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follow a course that arises determined at any moment by the structure of the system at that moment. The structural changes triggered in the interactions of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arise moment after moment determined by its structure also, but they follow a course that is generated moment after moment by the succession of encounters with the medium in which the system participates. The same applies to the medium as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that changes following a course that arises in the interplay of its own structural dynamics and the structural changes triggered in it by the systems that interact with it. As a consequence, in this process the structure of the living system and the structure of the medium change together congruently as a matter of course, and the general result is that the history of interactions between two or more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becomes a history of spontaneous recursive coherent structural changes in which all the participant systems change together congruently until they separate or disintegrate. I have called this structural dynamics, including the structural coherences between the interacting systems that results from it, structural coupling.
체계를 결정한 구조의 구조가 그것의 내부적 구조적 역동성의 결과로서와 그것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둘 다 변한다. 체계를 결정하는 구조의 내부적 역동성의 부분으로서 일어나는 구조 변화는 그 순간에 체계의 구조에 의해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 과정을 따른다. 체계를 결정하는 구조의 상호작용에서 촉발된 구조 변화는 그것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 순간 이후 순간에 일어나고 또한, 그러나 그들은 체계가 참가하는 매질과 우연히 만나는 것의 연속에 의해 순간 이후 순간에 낳아진 과정을 따른다. 그 자신의 구조적 역동성의 상호간작용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따르면서 변하는 체계를 결정하는 구조로서 똑같은 것이 매질에 적용되고 구조 변화는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체계에 의해 그것을 촉발한다. 결과적으로, 이 과정에서 생명체의 구조와 매질의 구조는 진로의 문제로서 일치해서 함께 변하고, 그리고 일반적 결과는 둘 또는 더 많은 구조 결정된 체계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역사가 모든 참가 체계들이 그들이 떼어 놓거나 분해할 때까지 적합하게 함께 변하는 자발적이고 귀납적이며 응집된 구조 변화의 역사라는 점이다. 나는 이것을 구조적 역동성이라고 불렀다, 그것, 구조 접속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호작용하는 체계들 사이의 구조 응집을 포함해서 말이다.
All living systems, as well as the non-living medium with which they interact recursively, are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that change together congruently, form ing the biosphere as a network of multidimensional structural coupling. Indeed, living systems and their conditions of living, whichever these may be, exist in a network of continuous structural coupling, and change together congruently in a process that spontaneously lasts as long as the autopoietic organization of the living systems is conserved. In these circumstances, a living system lives only as long as its internally generated structural changes occur with conservation of autopoiesis, and its encounters in the medium do not trigger in it a disintegration. Disintegration does not happen as long as there is an operational dynamic congruence between the medium and the living system through which the living is conserved. I call the operational coherence between the living system and the medium in which it exists, adaptation. A living system lives only as long as its organization and its relation of adaptation to the medium are conserved. Or, in other words, the life history of a living system courses as a spontaneous flow of continuous structural changes that follow the path or course in which the living system conserves autopoiesis and adaptation in its domain of existence. I call this process ontogenic structural drift. We biologists do not easily see that adaptation is a constant and not a variable because we usually treat it as a variable in the evolutionary discourse.
그것들이 함께 귀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비(非) 생명적 매질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적합하게 함께 변하는 체계에 의해 결정된 구조이다, 다차원적 구조 접속의 네트워크로서 생물권을 형성하면서 말이다. 진실로, 생명체와 생명이라는 그들의 조건은, 이것들이 무엇일지도 모른다더라도, 연속적 구조접속의 네트워크에 존재하고, 그리고 생명체의 자기생성적 조직이 보존되는 한 자발적으로 지속되는 과정에서 적합하게 함께 변한다. 이 상황에서, 생명체는 그것의 내부적으로 낳아진 구조 변화가 자기생성의 보존, 그리고 매질에서의 그것의 만남과 함께 일어나는 한에서만 그 안에서 분해를 촉발하지 않는다. 분해는 그것을 통하여 생명이 보존되는 매질과 생명체 사이에 작업적인 역동적 조화가 있는 한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 안에서 그것이 존대할 수 있는 생명체와 매질 사이의 작업적 응집성을, 적응이라고 부른다. 생명체는 조직과 매질에 대한 적응이라는 그것의 관계가 보존되는 한에서만 산다. 다시 말해서, 또는 생명체의 삶의 역사는 그 안에서 생명체가 존재라는 그것의 영역에서 자기생성과 적응을 보존하는 경로와 진로를 따르는 연속적인 구조 변화의 자발적인 흐름으로서 일정 코스를 나아간다. 나는 이 과정을 개체적인 구조적 표류라고 부른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적응이 지속적이고 가변적이지 않다고 쉽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그것을 진화론에서 가변적인 것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The most fundamental result of the dynamics of structural coupling is that a living system is never out of place while living. I call the place that a living system occupies in the realization of its living its niche. As a living system lives in the conservation of adaptation in its niche, it will always appear knowing how to live until it dies: living systems are never out of place, or more or less adapted, while living. As a living system it lives in its niche in the spontaneous conservation of adaptation and autopoiesis, the niche is also its cognitive domain.
구조 접속이라는 역동성의 가장 기초적인 결과는 생명체가 사는 동안 제 장소에 놓이지 않은 것이다. 나는 생명체가 그것의 생명의 실현에서 일어나는 장소를 그것의 생태적 지위라고 부른다. 생명체가 그것의 생태적 지위에서의 적응의 보존에서 살기 때문에, 그것은 그것이 죽을 때까지 사는 방법을 아는 것으로 늘 보일 것이다 : 생명체는 절대로 제 장소에 놓이지 않을 수 없거나, 또는 다소 적응되지 않을 수 없다, 사는 동안 말이다. 생명체로서 그것은 적응과 자기생성의 자발적인 보존에서의 그것의 생태적 지위에서 산다, 생태적 지위는 또한 그것의 인지적 영역이다.
Precisely because an organism, as a system, exists as an architectural dynamics in the present that it is realized moment after moment according to the local structural coherences of its components, that there is no general organizational principle or force guiding the operation of its components. Further, the organism is not a whole by itself, rather it results as a whole in the relational space in which it is conserved as an autopoietic system through its interactions in its niche. And it is precisely because living systems exist in this way, that the wholeness of a particular organism is defined through the conservation of its particular manner of being as a result of its operation in structural coupling in its niche. What constitutes the identity of a living system as a particular organism is the manner of living conserved in it through structural coupling.
틀림없이 왜냐하면 유기체는, 체계로서, 그것이 그것의 성분의 지역적 구조 응집에 따라 순간 이후 순간 실현되는, 그것의 성분의 작업을 안내하는 일반적 조직 원리 또는 힘이 전혀 없는 현재에서 건축적 역동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기체는 그 혼자서 전체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그 안에서 그것이 그것의 생태적 지위에서 그것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자기생성적 체계로서 보존되는 관계적 공간에서 전체로서 결과한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왜냐하면 생명체가 이런 방식 - 특정한 유기체의 전체성은 그것의 생태적 지위에서의 구조 접속에서 그것의 작업의 결과로서 있는 그것의 특정한 방법의 보존을 통하여 규정된다 -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유기체로서 생명체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구조 접속을 통하여 그것에서 보존되는 생명의 방법이다.
2.3 Conservation of organization
2.3. 조직의 보존
A system arises in the moment in which the organization that defines it, as well as the relation of adaptation in the medium that makes possible the realization and the conservation of that organization, begin to be conserved. Systems arise, exist, and are conserved spontaneously in this manner. Moreover, the medium in which a system exists, also arises spontaneously with it as a new phenomenal domain defined by the system or systems that constitute it through their existing in it. In fact, all systems arise in this way from a background, that see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herences of their existence, was unordered or chaotic. That is, a system arises and exists in the constitution of the dynamics of interactions that realizes and conserves both the system and its domain of existence through their recursive interactions. Nowadays there is much concern with the development of notions such as complexity and chaos, notions that are frequently used as explanatory principles. I think that they are evocative notions, and that the formalisms associated with them permit computations in domains that are operationally isomorphic with those formalisms. A mathematical formalism is a conceptual and operational system that reveals the relational coherences of the space that it defines. It is because of this that one can use mathematical formalisms to compute changes of states in systems whose operational coherences appear isomorphic to the relational coherences that they specify. But mathematical formalisms do not by themselves create an understanding of the phenomena that an observer helps to explain through them. In this same context one can say that biological phenomena occur on the edge of chaos, because one can use some mathematical formalisms as evocative metaphors. However, to say that does not say what kind of systems living systems are, nor how they exist in the new domains that arise as their operation as totalities begins to be conserved in the flow of their structural coupling with the medium that arises with them. Living systems, as do systems in general, occur in their happening as actual discrete singular entities, not in the formalisms that an observer may use to think about them.
체계는 그 조직의 실현과 보존을 가능하게 만드는 매개에서 적응의 실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규정하는 조직이 보존되기 시작하는 순간에 일어난다. 체계는 이 방법으로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존재하고, 그리고 보존된다. 게다가, 체계가 존재하는 매개는, 그것에서의 그들을 존재를 통하여 그것을 구성하는 체계 또는 체계들에 의해 규정된 새로운 현상적 영역으로서 그것과 함께 자발적으로 또한 일어난다. 사실상, 모든 체계는 배경으로부터 이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그들 존재의 응집이라는 견해로부터 보여진 것이다, 이 방식은 정연하지 않았고 혼돈스러웠다. 즉, 체계는 그들의 귀납적 상호작용을 통하여 체계와 그것의 존재 영역 둘 다를 실현하고 보존하는 상호작용의 역동성을 구성하는 데에서 일어나고 존재한다. 오늘날 복잡성과 혼돈과 같은 관념, 설명적 원리로 자주 쓰이는 관념에 대한 많은 관심이 있다. 나는 그것들이 환기적인 관념이고, 그리고 그것들과 연관된 형식주의가 그 형식주의와 작업적으로 동형적인 영역에서 계산을 허가한다고 생각한다. 수학적 형식주의는 그것이 규정하는 공간의 관계적 응집을 드러내는 개념적이고 작업적인 체계이다.
이것 때문이다, 누군가 그것의 작업적 응집이 그것들이 상술하는 관계적 응집에 동형적인 것으로 보이는 체계에서 상태의 변화를 계산하기 위해 수학적 형식주의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말이다. 그러나 수학적 형식주의는 관찰자가 그것들을 통하여 설명하는 것을 돕는 현상들의 이해를 혼자서 창조하지 않는다. 같은 문맥에서 누군가 생물학적 현상이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 일부 수학적 형식주의를 환기적인 은유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생명체가 어떤 종류의 체계인지를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들이 총체성이 그들과 함께 일어나는 매개와의 그들의 구조 접속의 흐름에서 보존되기 시작할 때 그들의 작업으로서 일어나는 새로운 영역에서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또한 말하지 않는 것이다. 생명체는, 체계가 일반적으로 할 때, 현실적인 이산적 특이한 존재자로서의 그들의 발생에서 일어난다, 관찰자가 그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데에 쓸지도 모르는 형식주의에서가 아니라 말이다.
2.4 Explanations
2.4. 설명
The development of the insight that led to my abstraction of the notion of autopoiesis from the biological molecular dynamics known to me during the years 1960 to 1966, force d me to generate a conceptual frame that would allow me to say what I wanted to say.
1960년부터 1969년까지 동안 나에게 알려진 생물학적인 분자적 역동성으로부터의 자기생성이라는 관념에 대한 나의 추상을 이끈 시각의 발달은 나에게 내가 내가 말하기를 원하는 것을 말하도록 허락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을 낳도록 강제했다.
The notion of structural determinism is an abstraction that the observer makes from the coherences of his or her experiences. As such, the notion of structural determinism is at the same time the conceptual and the operational fundament of all explanations. The notion of structural determinism does not arise as an ontological assumption about a domain of transcendental realities, it arises as an abstraction that grasps the operational coherences of our living as human beings as we use the coherences of our experiences to explain our experiences. Accordingly, we live as many domains of structural determinism as we live domains of operational coherences as human beings. Further, we live as many domains of explanations as we live domains of experiential coherences that we use to explain our experiences.
구조 결정론이라는 관념은 관찰자가 그 또는 그녀의 경험의 응집으로부터 만들 수 있는 추상이다. 그 자체로, 구조 결정론이라는 관념은 동시에 모든 설명의 개념적이고 작업적 기초이다. 구조 결정론이라는 관념은 초월론적 실재의 영역에 관한 존재론적인 가정으로서 일어나지 않고,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 경험의 응집을 사용할 때 인간 존재로 우리 생명의 작업적 응집을 파악하는 추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인간 존재로 작업적 응집의 영역에서 살 때 구조 결정론의 많은 영역으로 산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험적 응집의 영역에서 살 때 설명의 많은 영역처럼 산다.
An explanation entails two conditions that must be satisfied together:
설명은 함께 만족되어야만 하는 두 가지 조건을 일으킨다 :
1) the proposition of a structure determined process that if it were to take place in the structural domain in which it is proposed, the result would be that the observer would live the experience to be explained as a result of that process
1) 구조 결정되 과정이라는 주장은 만약 그것이 그 안에서 그것이 제안된 구조 영역에서 일어난다면, 결과가 관찰자가 그 과정의 결과로서 설명될 수 있는 경험을 사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2) the acceptance by an observer of such a proposition as doing what it claims to do because it satisfies some other conditions that the observer puts through his or her listening.
2) 그것이 하기를 주장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그러한 주장의 관찰자에 의한 수용은 왜냐하면 그것이 관찰자가 그 또는 그녀의 듣기를 성립하는 일부 다른 조건을 만족하기 때문이다.
I call the first of these two conditions the formal condition, and the second, the informal condition. The formal condition has a fixed form, the form of a generative mechanism, and is what formally defines an explanation as such. The informal condition is fluid, it can be anything that the observer uses in his or her listening in an explicit or implicit manner, aware or not aware of his or her doing so, as a condition that has to be satisfied by the generative mechanism proposed for him or her to accept it as an explanation. The informal condition is arbitrary, yet it is the satisfaction of this in the listening of the observer that makes him or her accept some particular generative mechanism as an explanation. That the formal condition in an explanation entails the proposition of a generative mechanism, has two consequences:
나는 이 두 조건의 첫째를 정식 조건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둘째를, 비정식 조건이라고 부른다. 정식 조건은 고정된 형태, 산출적 매커형태를 가지고, 그리고 그 자체로 설명을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비정식 조건은 유동적이고, 그것은 관찰자가 분명하거나 또는 암시적인 방법에서의 그 또는 그녀의 듣기에서 사용하는 어떤 것일 수 있다, 그 또는 그녀가 그렇게 하는 것을 알아차리거나 또는 모르거나 말이다, 그 또는 그녀가 그것을 설명으로서 받아들이도록 주장된 산출적 메커니즘에 의해 만족되어야 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비정식적 조건은 임의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또는 그녀가 설명으로 일부 특정한 산출적 메커니즘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관찰자의 듣기에서의 이것의 만족이다. 설명에서 그 정식적 조건은 산출적 메커니즘의 주장을 일으킨다, 두 결과를 갖는다 :
a) the phenomenon explained and the mechanism that gives origin to it take place in different operational (phenomenal) domains that do not intersect
ㄱ) 설명된 현상과 그것에 기원을 주는 메커니즘은 상호작용하지 않는 다른 작업적 (현상적) 영역에서 일어난다.
b) as a direct consequence of the above, explanations do not constitute, and cannot constitute, phenomenal reductions.
ㄴ) 위의 직접적 결과로서, 설명은 현상적 환원을 구성하지 않고, 그리고 구성할 수 없다.
That the informal condition in an explanation should be arbitrary also has two main consequences:
설명에서 그 비정식적 조건은 임의적이어야 한다 또한 두 주요한 결과를 갖는다 :
a) there are as many different kinds of explanations as there are different informal conditions put by the observer in his or her listening
ㄱ) 그 또는 그녀의 듣기에서 관찰자에 의해 두어진 다른 비정식적 조건이 있는 만큼 많은 다른 종류의 설명이 있다.
b) if the informal condition that an observer puts in his or her listening is not made explicit, one does not know what the observer accepts when he or she accepts a particular generative mechanism as an explanation.
ㄴ) 만약 관찰자가 그 또는 그녀의 듣기에 둔 비정식적 조건이 분명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관찰자가 그 또는 그녀가 설명으로 특정한 산출적 메커니즘을 받아들일 때 받아들인 것을 모른다.
All that I have just said is valid for scientific explanations. Yet, what is peculiar of science as an explanatory domain is the particular informal condition that scientists put in their listening, and that I shall hence forth call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This criterion of validation can be made fully explicit as a set of four operations that an observer must realize in his or her living. What is remarkable is that these four operations are made with no assumption about the existence of an independent reality because what is explained is the experience of the observer with the experiential coherences of the observer. The four operations are:
내가 막 말했던 모든 것은 과학적 설명에 유효하다. 하지만, 설명적 영역으로서 과학의 독특한 것은 과학자들이 그들의 듣기에 두는, 그리고 내가 그러므로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이라고 네 번째로 부르는 특정한 비정식적 조건이다. 유효성의 이 표준은 관찰자가 그 또는 그녀의 생명에서 실현해야 하는 네 가지 작업의 세트로서 충분히 분명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네 가지 작업이 독립적 실재의 존재에 대하여 어떤 가정과 함께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명된 것은 관찰자의 경험적 응집과 함께 관찰자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네 가지 작업은 :
1) The description of what an observer must do to experience the experience to be explained.
1) 관찰자가 설명되는 경험을 경험해야 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의 기술(記述).
2) The proposition of a generative mechanism such that if it is allowed to operate the result in the observer is the experience that he or she wants to explain.
2) 만약 작업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관찰자에서 결과가 그 또는 그녀가 설명하기를 원하는 결과라는 그러한 산출적 메커니즘의 주장.
3) The deduction from all the operational coherences implicit in point 2, of other possible experiences of the observer, and of what he or she should do to live them.
3) 지점 2에서 암시적인 모든 작업적 응집부터의 연역, 관찰자의 다른 가능한 경험들의, 그리고 그 또는 그녀가 그것들을 살리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의.
4) The realization of what has been deduced in point 3, and if it happens as deduced, point 2 becomes a scientific explanation.
4) 지점 3에서 연역되었던 것의 실현, 그리고 만약 그것인 연역된 대로 일어난다면 지점 2는 과학적 설명이 된다.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presented above is not an idiosyncratic reformulating of what scientist and philosophers usually call the experimental scientific method. The epistemological fundaments implicit in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and in the experimental scientific method are quite different, even though they seem to lead to the same result, namely, a scientific explanation. These differences can be presented as follows: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does not entail the implicit or explicit assumption of the existence of a reality independent of what the observer does as it only involves the experiential coherences of the observer. Thus an explanation reveals and gives rise to an expansion of those experiential coherences. The experimental scientific method entails the implicit or explicit assumption that there is a reality independent of the observer and his or her doings. The observer expects the reality to confront his or her explanations presented as expressions of the phenomena to be explained in more fundamental terms. I claim that we scientists say that we apply the experimental scientific method, but what we do is to follow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위에서 제시된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은 과학자와 철학자가 실험적인 과학적 방법이라고 보통 부르는 것의 색다른 재정식화가 아니다.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에서 그리고 실험적인 과학 방법에서 암시적인 인식론적 입지 조건은 완전히 다르다, 비록 그들이 똑같은 결과를, 즉, 과학적 설명을 이끄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 다름은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은 관찰자가 그것이 관찰자의 실험적 응집을 포함하기만 하는 것처럼 하는 것과 독립적인 실재의 암시적이거나 또는 분명한 가정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설명은 그 실험적 응집의 확장을 드러내고 일으킨다. 실험적인 과학적 방법은 관찰자와 그리고 그 또는 그녀의 함과 독립적인 실재가 있다는 암시적이고 분명한 가정을 일으킨다. 관찰자는 더 많은 기초적 용어로 설명된 현상의 표현으로 제시된 그 또는 그녀의 설명에 직면한 실재를 기대한다. 나는 우리 과학자들이 우리가 실험적인 과학적 방법을 적용한다고 말한다고 주장하나, 그러나 우리가 하는 것은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은 따르는 것이다.
Accordingly, what I say is that scientific explanations do not explain an independent reality, but explain the experiences of the observer. Moreover, I say that the observer in fact explains his or her experiences, using his or her experiential coherences to fulfill, in his or her experiential domain,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Furthermore, I claim that the observer itself is explained in this way as it exists as a biological process (Maturana, in Maturana and Varela, 1980).
따라서, 내가 말하는 것은 과학적 설명이 독립적 실재를 설명하지 않으나, 그러나 관찰자의 경험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관찰자가 사실상 그 또는 그녀의 경험을 설명한다고 말한다,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을, 그 또는 그녀의 실험적 영역에서, 이행한 그 또는 그녀의 경험적 응집을 사용하면서 말이다. 더욱이, 나는 관찰자가 그것이 생물학적 과정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이 방식으로 그 자체로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마뚜라나, 마뚜라나와 바렐라, 1980)
2.5 Grounds for the claim
2.5. 주장의 근거
The main difficulty that one encounters in the attempt to answer any question, is to know when one has indeed answered it. The power of scientific explanations rests on the fact that it constitutes at the same time both the procedure that generates the explanation, and the criterion that tells when the explanation has been fulfilled. Some authors have criticized the notion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as unscientific on the ground that Varela and I have claimed that the condition of autopoiesis cannot be observed directly as a feature of the living system because it occurs in the flow of its changing present as a historical process. They say that a scientific theory must have empirical support. Yes, indeed! But, what constitutes an empirical support or demonstration in scientific explanations is the actual observation that the satisfaction of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in the domain in which it is claimed has been fulfilled.
누군가가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한 시도에서 만나는 주요한 어려움은, 누군가가 진실로 그것에 답했을 때 아는 것이다. 과학적 설명의 힘은 그것이 동시에 설명을 낳는 순서와, 그리고 설명이 이행되었을 때 말하는 표준 둘 다를 동시에 구성한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일부 저자들은 바렐라(Varela)와 내가 자기생성의 조건이 생명체의 특징으로 직접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역사적 과정으로 그것의 변하는 현재의 흐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는 근거로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는 관념을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들은 과학적 이론은 실험적 지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진실로! 그러나, 과학적 설명에서 실험적 지지를 또는 증명을 구성하는 것은 실제로 그 안에서 그것이 주장되는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의 만족이 이행되었다는 관찰이다.
In the claim that autopoiesis in the molecular space is the organization of living systems, two things are claimed:
분자 공간에서 자기생성이 생명체의 조직이라는 주장에서, 두 가지 것이 주장된다 :
1) that as a molecular autopoietic system arises in the molecular space, a living system arises in it, and;
1)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는 분자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명체는 거기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2) that as a molecular autopoietic system arises, all biological phenomena arise or may arise as a direct or indirect historical consequence of their operation as such.
2) 분자적인 자기생성 체게가 일어나는 것처럼, 모든 생물학적 현상은 그 자체로 그들의 작업의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역사적 결과로서 일어나거나 또는 일어날 지도 모른다.
Accordingly, the scientific demonstration of the claim that living systems are in fact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would be either to show that all the molecular processes in them course constituting a closed network of molecular productions that realizes the autopoietic organization, or to show that all biological phenomena would necessarily occur as either a direct or an indirect consequence of the operation of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and that they would not occur if molecular autopoiesis were interrupted. Francisco Varela and I show that the latter is the case in a book that we called "De Máquinas y Seres Vivos" and that we first published in 1973 in Spanish, and then in English as part of a book published in 1980 with the title, "Autopoiesis and cognition". Thus, we claim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and that such a claim is a scientific claim.
따라서, 생명체가 사실상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는 주장의 과학적 증명은 그것들에서 모든 분자적 과정이 자기생성적 조직을 실현하는 분자적 생산의 폐쇄된 네트워크를 구성하면서 일정 코스를 잡아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또는 모든 생물학적 현상이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의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결과로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들은 만약 분자적 자기생성이 가고막힌다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와 나는 후자가 우리가 “De Máquinas y Seres Vivos”라고 불렀고 그리고 스페인어로 1973년에 첫 번째로 출판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영어로 “자기생성과 인지(Autopoiesis and cognition)”, 제목으로 1980년에 출판한 책의 부분인 책에서 그 경우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고,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과학적 주장이라고 주장한다.
2.6 Implications of the claim
2.6. 주장의 암시
What we scientists distinguish as phenomena of the natural world, occur spontaneously. As such the natural world is in its spontaneous presence the proof of its own existence. That is, natural phenomena occur when they occur, and we human beings as observers distinguish them as features of our experiences. An observer attempts to explain only those of his or her experiences (phenomena) which do not seem obvious to him or her. And in order to do so, he or she resorts, as I have said above, to the coherences of his or her experiences and uses them to propose a generative mechanism under the operation of which that which he or she wants to explain will appear or result spontaneously. In these circumstances, the theory of autopoiesis says that whenever the adequate dynamic structural conditions occur in the molecular domain for molecular autopoietic entities to arise spontaneously, a living system will appear. If in addition the conditions for its systemic reproduction occur, the phenomena that result from the conservation of molecular autopoiesis in the constitution of lineages of living systems will also happen spontaneously.
우리 과학자들이 자연 세계의 현상으로 구별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그 자체로 자연 세계는 그것의 자발적 현재에서 그 자신 존재의 증거이다. 즉, 자연 현상은 그들이 일어날 때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 인간 존재는 관찰자로서 우리 경험의 특징으로 그것들을 구별한다. 관찰자는 그 또는 그녀에게 명백해 보이지 않는 그 또는 그녀의 경험 (현상)의 그것만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그 또는 그녀는 의지한다, 내가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 또는 그녀의 경험의 응집에 그리고 그것들을 그 또는 그녀가 설명하기를 원하는 그것이 자발적으로 보이거나 또는 결과하는 작업 하에서의 산출적인 메커니즘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 상황에서, 자기생성의 이론은 적당한 역동적인 구조적 조건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존재자에 대한 영역에서 일어날 때에는 언제든지, 생명체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만약 게다가 조건이 그것의 체계적 재생산에 대하여 일어난다면, 생명체의 계통의 구성에서의 분자적 자기생성의 보존으로부터 결과하는 현상이 자발적으로 또한 일어날 것이다.
In these circumstances, what is the proof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I claim that the proof is the actual closed dynamics of the network of molecular productions and transformations that becomes apparent when one observes the cellular metabolic processes as a systemic whole, open to the flow of molecules through it. Many people who consider that explanations have to be reductionist propositions, find the claim that explanations in general, and scientific explanations in particular, are not reductions to simpler terms epistemologically objectionable. But explanations are constitutively not reductionist propositions, quite on the contrary, they are, as I have indicated above, propositions of generative processes such that if they take place they give rise as a result to the experience that is being explained. Further, explanation and phenomenon take place in different non-intersecting domains (Maturana 1990). But there are still other difficulties for the full understanding of all the implications of the claims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and that they can be seen to be so when one observes the cellular metabolism as a systemic whole. These difficulties have to do with two other claims that I have made, namely: that a living system does not have inputs or outputs, and that the observer cannot see the organization of the system directly because the organization of a system is the configuration of relations that makes and defines a system as a singular totality through its conservation through the flow of the structural dynamics of the system.
이 상황에서,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나는 증거가 누군가 체계 전체로서 세포 물질대사 과정을 관찰할 때 명백해지고, 그것을 통하여 분자의 흐름에 열리는 분자적 생산과 변형의 네트워크가 갖는 실제적인 폐쇄적 역동성이라고 주장한다. 그 설명이 환원주의적 주장임에 틀림없다고 고려한 많은 사람들이, 설명이 일반적으로, 그리고 과학적 설명이 특정하게, 인식론적으로 반대할만한 더 단순한 용어로의 환원이 아니라는 주장을 찾아낸다. 그러나 설명은 본질적으로 환원주의적 주장이 아니고, 아주 이에 반하여, 그것들은, 내가 위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만약 그것들이 일어난다면 그것들이 설명되고 있는 중인 경험에 대한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산출적 과정의 주장이다. 더욱이, 설명과 현상은 다른 비(非) 교차적 영역에서 일어난다(마뚜라나 1990). 그러나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이고, 그리고 그것들이 누군가가 체계 전체로서 세포 물질대사를 관찰할 때 그렇게 보여질 수 있다는 주장의 모든 암시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다른 어려움들이 여전히 있다. 이 어려움들은 내가 했던 두 가지 다른 주장과 관련이 있다, 즉 : 생명체가 투입 또는 산출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찰자가 체계의 조직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체계의 조직이 체계의 구조적 역동성 흐름을 통한 그것의 보존을 통하여 특이한 총체성으로 체계를 만들고 규정짓는 관계의 배치이기 때문이라는 것.
Let us consider first the claim about the absence of inputs and outputs. As living systems are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all that occurs in them or to them, happens determined in their structure. The same happens to the medium that contains them to the extent that the medium is also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Accordingly, an external agent acting upon a living system does not specify what happens in it as a result of its action. Such external agent can only trigger in the living system a structural change determined in it. An external agent, therefore, does not and cannot be claimed to constitute an input for the living system because it "tells" nothing to the living system about itself or about the medium from which it comes or about to itself. The same happens as the living system impinges upon the medium; the living system can only trigger in the medium a structural change determined in the structural dynamics of the medium, and cannot be properly claimed to be an output of the organism because it "tells" nothing about itself to the medium. It is in this sense that I claim that a living system does not have inputs or outputs, and that its relation with the medium is that of structural coupling as long as it lives in interactions with the medium in a structural dynamics in which both living system and medium undergo congruent structural changes until the living system dies (Maturana 1998). If one does not see how it is that living systems do not have inputs and outputs, it is not possible to understand cognition as a natural phenomenon, and one does not see that that which we call cognition is the effective operation of a living system in a domain of structural coupling. Moreover, if one does not understand that living systems do not have inputs or outputs, one cannot understand how the domain of structural coupling of a living system, as the domain in which it realizes its living (autopoiesis), is indeed its domain of cognition (Maturana 1980, and Maturana and Varela 1988).
투입과 산출의 부재에 관한 첫 번째 주장을 숙고해보자. 생명체가 체계에 의해 결정된 구조이기 때문에, 그것들에서 또는 그것들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것들의 구조에서 결정된 채 일어난다. 같은 것이 매질이 또한 구조 결정된 체계인 범위까지 그것들을 내포하는 매질에 일어난다. 따라서, 생명체에 근거해서 행하는 외부적 대행자는 그것 안에서 그것의 행위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을 상술하지 않는다. 그러한 외부적 대행자는 생명체에서 그 안에서 결정된 구조 변화를 단지 촉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외부적 대행자는 생명체를 위한 투입을 구성하도록 요구되지 않고 그리고 요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체에게 그것으로부터 그것이 나오거나 그 자신으로 방향을 돌리는 그 자신에 관하여 또는 매질에 관하여 어떤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것이 생명체가 매질을 침범할 때 일어난다; 생명체는 단지 매질에서 매질의 구조적 역동성에서 결정된 구조 변화를 단지 촉발할 수 있고, 그리고 유기체의 산출이도록 적당하게 요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신에 관하여 매질에게 어떤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생명체는 투입 또는 산출을 가지 않고, 그리고 매질과의 그것의 관계가 그것이 그 안에서 생명체과 매질 둘 다 생명체가 죽을 때까지 적합한 구조적 변화를 겪는 구조적 역동성에서 매질과 함께 상호작용에서 사는 한 구조 접속의 그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이런 의미이다. 만약 누군가 생명체가 투입과 산출을 가지지 않는 방식을 보지 않는다면, 자연적 현상으로 인지를 이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그리고 누군가는 우리가 인지라고 부르는 것이 구조 접속의 영역에서 생명체의 효율적인 작업이라는 것을 보지 않는다. 게다가, 만약 누군가 생명체가 투입과 산출을 가지지 않는가는 것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생명체의 구조 접속의 영역이, 그 안에서 그것이 그것의 생명 (자기생성) 을 실현하는 영역으로, 진실로 인지에 대한 그것의 영역인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마뚜라나 1980, 그리고 마뚜라나와 바렐라 1988).
The second claim, namely, that an observer cannot see the organization of a system directly, is related to the first and to the fact that an observer cannot directly see the components of a system because these arise as such through their participation in the relations of composition of the system. Any distinction that an observer makes, is made by him or her in his or her domain of structural coupling as a human being. This is why an observer cannot claim that he or she sees something as if it existed in itself, independently of his or her doings in distinguishing it, and must in fact use what he or she does in the doing of the distinction to describe what he or she has distinguished and how it operates. Of course all biologists know this as they know that they must use their interactions with the entity that they have distinguished to characterize it. That the observer cannot directly see the organization of a system does not invalidate the notion of organization or the fact that the organization must be inferred from the history of interactions of the system and from its structural dynamics, because it is the configuration of relations between components conserved through these structural dynamics that constitute its organization as a system.
두 번째 주장, 즉 관찰자가 직접적으로 체계의 조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첫 번째 것과 그리고 관찰자가 체계의 성분을 직접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과 관계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체계의 합성이라는 관계에의 그들의 참가를 통하여 그 자체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관찰자가 만드는 어떤 구별이라도, 인간 존재로 구조 접속의 그 또는 그녀의 영역에서 그 또는 그녀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이 관찰자가 그 또는 그녀가 마치 그것이 본래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을 구별하는 데에서 그 또는 그녀의 함과 독립적으로 무언가를 보는, 그리고 그 또는 그녀가 그 또는 그녀가 구별한 것과 그리고 그것이 작업하는 방식을 묘사하는 구별의 함에서 하는 것을 사실상 사용해야 하는 이유이다. 물론 모든 생물학자들은 그들이 그것의 특성을 기술하기 위해 구별했던 존재자와 그들이 그들의 상호작용을 사용해야 한다고 그들이 아는 것처럼 이것을 안다. 그 관찰자는 생명체가 조직의 관념 또는 조직이 체계의 상호작용의 역사와 그리고 그것의 구조적 역동으로부터 추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무효로 하지 않는다고 직접적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체계로서 그것의 조직을 구성하는 이 구조적 역동을 통하여 보존된 성분 사이의 관계 배치이기 때문이다.
Accordingly, then, only the results of the operation of an autopoietic system as such can tell an observer that it is an autopoietic system. Thus also, the participation of an element in the relations of composition that constitute a system is what tells the observer whether the element is or is not a component of that system. This is why not just anything that an observer distinguishes or sees as a "part" of a system, that he or she thinks is an autopoietic system, is a component of that system as an autopoietic system. As I said above, something is a component of a system only if it participates in its composition.
따라서, 그때, 오직 자기생성적 체계의 작업 결과만이 관찰자에게 그것이 자기생성적 체계라고 그 자체로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또한, 시스템을 구성하는 합성의 관계에서의 요소는 관찰자에게 요소가 그 체계의 성분인지 또는 아닌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관찰자가 체계의 “부분”으로 구별하거나 또는 보는, 그 또는 그녀가 생각하는 단지 어떤 것이 자기생성적 체계가 아니고, 자기생성적 체계로서 그 체계의 성분이 자기생성적 체계인 이유이다. 내가 위에서 말했던 대로, 무언가는 그것이 그것의 합성에 참가하기만 한다면 체계의 성분이다. 내가 위에서 말했던 대로, 무언가는 그것이 그것의 합성에 참가하기만 한다면 체계의 성분이다.
No doubt the whole situation is circular in the sense that a system defines itself, and the observer can only know it through its operation as it defines itself.
의심할 바 없이 전체 상황은 체계가 그 자신을 규정짓는다는 이 의미에서 순환적이고, 그리고 관찰자는 그것이 그 자신을 규정짓는 대로 그것의 작업을 통하여 그것을 단지 알 수 있다.
3. Cognition
3. 인지
3.1 What is “to know”?
3.1. “아는 것”은 무엇인가?
The understanding of structural determinism brought with it for me the question of cognition as I asked myself: "If structural determinism is the case, what, then, is to know? If living systems are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and if all that occurs to them and in them arises in them at every instant determined by their structure at that instant, and if all that the external agents that impinge on them can do is to trigger in them structural changes determined in them by their structure at the moment of their interactions, what is to know? That which we human beings call cognition is the capacity that a living system exhibits of operating in dynamic structural congruence with the medium in which it exists. It does not matter if the living system observed is an insect or a human being. We may ask ourselves whether the knowledge that the living system exhibits is learned or instinctive, but our assessment is the same: namely, if we see a living system behaving according to what we consider is adequate behavior in the circumstances in which we observe it, we claim that it knows. What we see in such circumstances, is: a) that the living system under our attention shows or exhibits a structural dynamics that flows in congruence with the structural dynamics of the medium in which we see it, and b) that it is through that dynamic structural congruence that the living system conserves its living. We may ask how did the living system arrived at having the dynamic structure that allows it to operate in dynamic structural congruence in the medium or circumstances in which it happens to live. If we come to the conclusion that the living system attained that dynamic structural congruence with the medium or circumstances in which it lives as a result of its development as the kind of living system that it is, and independently of its individual life history, we claim that the knowledge exhibited by it is instinctive. Yet, if on the contrary, after our research we come to the conclusion that the dynamic structure through which the living system operates in dynamic structural congruence with the medium has arisen in the course of its individual history as a result of its interactions in the medium, we claim that the knowledge that such operational congruence shows, has been learned.
Instinctive and learned knowledge thus differ only in the historical circumstances of their origin. The origin of instinctive knowledge is phylogenic, and the origin of learned knowledge is ontogenic. Therefore, I claim that the process which gives rise to the operational congruence between an organism and its niche, the process that we distinguish in daily life either as learned or as instinctive knowing, is structural coupling.
구조적인 결정의 이해는 그것과 함께 나에게 내가 나 자신에게 물은 것과 같은 인지의 문제를 가져왔다. 만약 구조적인 결정주의가 실정이라면, 무엇이, 그러면 아는 것인가? 만약 생명체가 구조 결정되는 체계라면, 그리고 만약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 순간에 그들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 모든 순간에 그들 안에서 일어난다면, 그리고 만약 그들과 충돌하는 외부의 대행자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들 안에서 그들의 상호작업의 순간에 그들의 구조에 의해 그들 안에서 결정된 구조적인 변화의 방아쇠를 당긴다면, 아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이 인지라고 부르는 것은 생명체가 나타내는, 그것이 존재하는 매질과의 역동적인 구조적 조화에서의 작업의 능력이다. 관찰되는 생명체가 곤충인지 또는 인간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생명체가 나타내는 지식이 학습에 의해 터득한 것인지 또는 본능적인 것인지를 물을 수도 있으나, 그러나 우리의 판단은 마찬가지다. 즉, 만약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숙고하기에 어울리는 행위인 것에 응해서 행위하는 생명체를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서 보는 것은, ㄱ) 우리의 주의 하의 생명체가 보이거나 또는 나타내는 구조적인 역동성, 우리가 그것을 보는 매질의 구조적인 역동성과의 조화로 흘러드는 구조적인 역동성, 그리고 ㄴ) 생명체가 그것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역동적인 구조적 조화를 꿰뚫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생명체가 그것이 그것이 마침 사는 상황 또는 매질에서의 역동적인 구조적 조화에서 작업하도록 허락하는 역동적인 구조를 가지는 것에 도달했는지를 물을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생명체가 그것이 인 생명체의 일종으로서의 그리고 독립하여 그것의 개체적인 삶 역사의 일종으로서의 그것의 발달의 결과로서 사는 상황 또는 매질과의 그 역동적인 구조적 조화를 달성하였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 나타내진 지식이 본능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만약 이에 반하여, 우리의 연구 후에 우리가 매질과의 역동적인 구조적 조화에서 생명체가 작업할 때 거치게 되는 역동적인 구조가 매질에서 그것의 상호작업의 결과로서 그것의 개체적인 역사의 경과에서 일어났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우리는 그러한 작업적인 조화가 보이는 지식이, 학습을 통해 터득됐다고 주장한다. 본능적인 그리고 학습에 의해 터득된 지식은 따라서 그들의 기원의 역사적인 상황에서만 오직 다르다. 본능적인 지식의 기원은 계통적이고, 그리고 학습에 의해 터득된 지식의 기원은 개체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유기체와 그것의 생태적 지위 사이에서 작업적인 조화를 일으키는 진행, 우리가 학습에 의해 터득되거나 또는 본능적인 앎과 같은 매일의 삶에서 구분하는 진행이 구조적인 접속이라고 주장한다.
In other words, any attempt to explain the adequate behavior, that in daily life we call cognition, as if it were the result of some computation made by the nervous system on the data or information that the sensors obtain of an external objective world, is doomed to fail. Because whatever occurs to or in a living system occurs in it as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determined by its structural dynamics, hence there is no information, and there is no computation. Knowledge is an assessment made by an observer who sees the organism shifting what it does as it changes in coherence with its medium. We’re usually not aware of this situation, even though in daily life we ascribe knowledge to any living being, human or not, when we see it operating in a manner that we consider adequate for the domain in which we behold it. Indeed, that is the kind of assessment that you, reader, are doing now as you read what I have written, and you will either accept or reject what I have said as revealing knowledge according to whether what I say agrees or does not agree with what you consider adequate behavior in the domain in which you are attending to what you are reading of what I have written.
바꿔 말하면,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인지라고 부르는 어울리는 행위를, 마치 감각기가 외부의 객체 세계의 정보와 자료에 관하여 획득한 것에 관하여 신경체계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계산의 결과인 것처럼 설명하는 어떤 시도도 실패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생명체 안에서 일어나거나 생명체에게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나 그것의 구조적인 역동성에 의해서 결정된 체계에 의해 결정된 구조로서 그것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므로 정보도 없고, 그리고 계산도 없다. 지식은 유기체가 그것이 하는 것을 표류하는 것을 그것이 그것의 매질과의 응집 속에서 변하는 것으로 보는 관찰자 의해 만들어진 판단이다. 우리는 보통 깨닫고 있지 않다, 비록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지식을 어떤 살아있는 존재, 인간 또는 아닌 존재 또는 인간에 기인하는 것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는 영역에 어울린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 안에서 작업하는 것이 그것이라고 우리가 볼 때 말이다. 진실로, 그것은 여러분, 독자들이, 여러분이 내가 쓴 것을 읽을 때 지금 하고 있는 중인 판단이고, 그리고 여러분은 내가 쓰고 여러분이 읽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영역에서 어울리는 행위라고 여러분이 숙고하는 것과 내가 말한 것이 일치하는지 또는 아닌지에 따라 지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던 것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거절할 것이다.
3.2 Language
3.2. 언어
We human beings exist as observers in language as we operate in the domain of structural coupling to which we belong. That is, we human beings exist in structural coupling with all the other living and not living entities that compose the biosphere, and we operate in language as our manner of being in the present in the flow of our interactions in structural coupling as integral components of the biosphere. Our living in language does not violate structural determinism in general, nor our condition as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우리 인간 존재는 우리가 속하는 구조 접속의 영역 안에서 우리가 작업하는 만큼 언어 안에서 관찰자로 존재한다. 즉, 우리 인간 존재는 생물권을 구성하는 살아 있지 않은 존재자와 모든 다른 살아 있는 것과 함께 구조 접속 안에서 존재하고, 그리고 우리는 생물권의 없어서는 안 될 성분으로서 구조적인 접속에서의 우리의 상호작업의 흐름의 현재에 있는 우리의 방법으로서 언어 안에서 작업한다. 언어 안에서의 우리의 생명은 일반적으로 구조적인 결정론을 어기지 않는다, 또한 구조 결정된 체계로서의 우리의 조건도 어기지 않는다.
Language is a manner of living together in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 that arises in living together (Maturana 1988). We exist and operate as human beings as we operate in language; languaging is our manner of living as human beings. Language occurs in the flow of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s, not in any particular gesture, sound, or attitude, taken outside of that flow. It is like the movement seen in a film that exists as such only as long as the film runs. We human beings language while operating in the domain of structural coupling in which we coexist as languaging beings with other languaging beings.
언어는 생명 안에서 함께 일어나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 안에서 함께 사는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가 언어로 작업하는 만큼 인간 존재로서 작업하고 그리고 존재한다; 언어는 인간 존재로서 사는 우리의 방법이다. 언어는 흐름의 외부에서 가져와진, 어떤 특정한 몸짓, 소리, 또는 태도 안에서가 아니라 행위의 조정의 조정의 흐름 안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필름이 상영 중인 한 오직 그만큼 존재하는 필름 안에서 보여지는 운동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다른 언어화의 존재와 함께 하는 언어화의 존재로서 같은 때에 존재하는 구조적인 접속의 영역 안에서 작업하는 동안 우리 인간 존재는 언어화한다.
As we language, objects arise as aspects of our languaging with others, they do not exist by themselves. That is, objects arise in language as operations of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 that stand as coordinations of doings about which we as languaging beings recursively coordinate our behavior. I shall call the domain of objects that arises in our co-participation in the coordination of coordinations of behaviour a domain of shared objects. It follows that we humans can generate and, therefore, exist as languaging beings in as many different domains of objects as domains of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 we can generate in our living in structural coupling in the biosphere, and through this, in the cosmos. Accordingly, we human beings can in fact live with each other in as many domains of shared objects, or domains of interobjectivity, as there are dimensions of structural coupling in which we can live in coordinate our coordinations of behavior. Living in languaging is living a domain of shared objects in interobjectivity.
우리가 언어화할 때, 대상이 다른 것들과 함께 우리의 언어화의 양상으로서 일어나고, 그들은 혼자서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언어화의 존재가 귀납적으로 우리의 행위를 조정하는 만큼 어떤 우리에 대한 행실의 조정으로서 서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의 작업으로서 언어 안에서 객체가 일어난다. 나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 안에서의 우리의 공동-참여 안에서 일어난 객체의 영역을 공유된 객체의 영역이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 인간 존재가 우리가 우주 안에서, 이것을 거쳐, 생물권 안에서 구조적인 접속 안에서 우리의 생명 안에서 우리 인간이 낳을 수 있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의 영역만큼 많이 다른 대상의 영역에서 언어화의 존재로서 존재하고 그리고, 그러므로,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은 따른다. 따라서, 우리가 행위의 우리의 조정을 조정하면서 살수 있는 구조적인 접속의 차원이 있는 만큼, 상호객관성의 영역 또는, 공유된 객체들의 많은 영역 안에서 우리 인간 존재는 서로와 함께 살 수가 사실상 있다. 언어화 안에서 사는 것은 상호객관성에서 공유된 객체들의 영역에서 사는 것이다.
3.3 Self-consciousness
3.3. 자기 의식
When an observer sees a flow of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 through the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doings on the body of languaging beings, then he or she can claim that the beings are beginning to operate in a domain of awareness of parts of their own body. The body, and self, arise in language in the same manner as any other object arises in language. The operation of self-consciousness is the reflexive distinction of a self in language that takes place as an operation that constitutes our body and our being as an object in interobjectivity. Dr. Gerda Verden-Zöller has shown that this is the way self consciousness arises in human babies when the languaging mother plays with the baby, for example, saying “nose” as she touches the baby's nose (see Verden-Zöller in Maturana & Verden-Zöller, 1993). Thus self-consciousness arises as an operation of coordination of coordination of behavior that takes place in the mother/child play which constitutes self-awareness of the nose as the nose arises as an object in interobjectivity in the recursive coordinations of behavior of the baby with the mother. This is not seen easily when one thinks that language takes place as a symbolic operation that refers to entities that can be distinguished because of their independent existence. If to be conscious means to be aware of something as it exists independently of the being that is aware of it, how could a human being become aware of him or herself, if he or she is not an entity that exists independently of him or herself? It is because of this difficulty that we speak as we refer to ourselves as if we had a dual existence (e.g. when we say “I am speaking about myself”, or “I, in my true self”) The problem generated in this duality dissolves as we understand that language consists in living together in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s that arise in the flow of living together in recursive interactions.
관찰자가 언어화적인 존재의 몸에 관한 행위의 조정의 조정을 거쳐서 행위의 조정의 조정의 흐름을 볼 때, 그러면 그 또는 그녀는 존재가 그들 자신의 신체의 일부의 각성의 영역 안에서 작업하기 시작하고 있는 중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몸, 그리고 자기는, 어떤 다른 객체가 언어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언어 안에서 일어난다. 자기 의식의 작업은 상호객체성 안에서 객체로서 우리의 몸과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작업으로서 일어나는 언어 안에서 자기의 귀납적인 구분이다. 게르다 베르덴-졸러 박사는 이것이 언어화적인 어머니가 아기와 놀 때, 예를 들어, 그녀가 아기의 코를 만지며 “코”라고 말할 때 자기 의식이 인간 아기 안에서 일어나는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줬다(베르덴-졸러, 마뚜라나와 바렐라, 1993을 보라). 따라서 자기 의식은 코가 어미니와 함께 한 아기의 행위의 귀납적인 조정 안에서의 상호객체성 안에서의 객체로서 일어날 때 코의 자기 의식을 구성하는 어머니/아이 놀이에서 일어나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의 작업으로서 일어난다. 이것은 한 사람이 언어가 그들의 독립적인 존재 때문에 구분될 수 있는 존재자에 대해 언급하는 상직적인 작업으로서 일어난다고 생각할 때 쉽게 보여지지 않는다. 만약 그것을 깨닫는 존재와는 독립적으로 그것이 존재할 때 무언가를 깨닫는 의식적인 수단이 있다면, 어떻게 인간 존재는 그 또는 그녀자신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만약 그 또는 그녀가 그 또는 그녀 자신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마치 우리가 이중의 존재를 가진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 어려움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중이다”, 또는 “나, 나의 진짜 자기 안에서”라고 말할 때). 이 이중성 안에서 낳아진 문제는 우리가 언어가 귀납적인 상호작업들 안에서 함께 사는 흐름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 안에서 함께 사는 데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 풀린다.
No doubt we feel in an act of self-distinction the same way that we feel when we distinguish something that for an external observer has the quality of being an entity independent from the distinguisher. We feel as we feel with any object in the domain of shared objects that we live with others. And this is so precisely because the self arises in interobjectivity. as Dr. Verden-Zöller shows that all objects arise in the mother/child relations of play. Feelings take place as an aspect of our self-distinction in language as in the coordination of coordinations of behaviors the distinction of relations among the body distinctions expands the domain of interobjectivity into a meta-domain of self-distinctions. Due to their manner of arising, feelings are secondary to language. In the origin of humanness the self must have arisen in the same manner that it arises in a modern human babies, namely in the flow of the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s that bring about the body and its parts as shared objects in interobjectivity through the mother/child play. Accordingly, I say that self-consciousness is a simple recursive operation in languaging that constitutes an open ended possibility for the continuous arising of new worlds that we may live as we recursively live as self-conscious languaging beings.
의심할 바 없이 외부의 관찰자에게 구분자로부터 독립적인 존재자로 있는 질을 가지는 어떤 것을 우리가 구분할 때 우리가 느끼는 똑같은 방식을 자기-구분의 행동 안에서 우리는 똑같이 느낀다. 우리가 다른 것들과 함께 사는 공유된 객체들의 영역 안에서 우리가 어떤 객체들과 함께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정밀하게 그렇다 왜냐하면 자아는 상호객관성 안에서 일어난다. 베르덴-졸러 박사가 무든 대상들이 연극의 어머니/자식 관계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 것처럼. 행위의 조정의 조정 안에서 몸 구분 사이에서의 관계가 상호객체성의 영역을 자기-구분의 메타-영역 안으로 넓힐 때, 감정은 언어 안에서 우리의 자기 의식의 양상으로서 일어난다. 일어나는 그것들의 방법에 기인하는, 감정은 언어에 2차적이다. 인간적인임의 기원에서 자기는 그것이 현대의 인간 아기들 안에서, 즉 공유된 객체가 어머니/아이 놀이를 거쳐서 상호객체성 안에서 고유된 객체로서 몸과 그것의 부분을 일으킨 행위의 조정의 조정의 흐름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나야만 했다. 따라서, 나는 자기 의식이 우리가 자기 의식적인 언어화적 존재로서 귀납적으로 살 때 우리가 살 수도 있는 새로운 세계의 연속적인 일어남에 대한 열리게 끝내진 가능성을 구성하는 언어화 안에서의 단순한 귀납적 작업이라고 말한다.
Indeed, we can generate many new worlds but we do not have to do so. There is always another realm that may arise; but we do not have to do everything that is possible, not engage in all the reflections, or develop all the concepts, or build all the technologies. We are living in a culture that acts as if we should do everything that we imagine as possible. We do not see that in doing so we are making a choice, and that we should be responsible for it. (the sections on Language and Consciousness will be expanded in the final version of this paper)
진실로, 우리는 많은 새로운 세계를 낳을 수 있으나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일어날 수도 있는 또 다른 범위가 언제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거나, 모든 반사에 종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거나, 또는 모든 개념을 개발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거나, 또는 보든 기술들을 지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상상 가능한 모든 것을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문화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하는 속에서 우리는 선택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보지 않는다. 언어와 그리고 의식에 관한 부분은 이 논문의 최종 버전에서 확장될 것이다.
4. Epistemology and conclusions
4. 인식론 그리고 결론
In my view the central theme of cognition is the explanation of experience, not reality because reality is an explanatory notion invented to explain experience. Moreover, we explain experience with the coherences of experience as we exist in languaging as a domain of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doings as we operate as observers. So, to say that something arises as the observer brings it about in his or her distinction in language by specifying its condition of constitution, is to say that something exists in the same domain of existence in which the observer operates as a living system. That is, the entities that an observer distinguishes have the concreteness of the operations with which the observer distinguishes them through his or her operation as a living human being. It is in this sense that living systems are living systems, and molecules are molecules -- as real or objective entities in their respective domains of existence. It is in this sense that we as observers can claim that molecules arise as the conditions of their constitution apply. What follows is said under this understanding. It seems to me that the main difficulty that biologists have in accepting that the notion of autopoiesis connotes the organization of the living, is our cultural refusal to accept that things, systems, relations, and entities in general, arise as existing in the instant in which the conditions of their constitution take place. We as observers can claim that a living system arises in the moment in which autopoiesis begins to take place and lasts as long as its autopoiesis is conserved. And although that is a cognitive claim, it is a claim that has operational validity as a living system exists in the operational domain (the molecular domain) in which that happens.
나의 견해로 인지의 중심적 테마는 사실이 아니라, 경험의 설명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초대된 설명적인 관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관찰자로서 작업하는 행실화의 대등의 대등 영역만큼 우리가 언어화 안에서 존재할 때의 경험의 응집성을 가지고 경험을 설명한다. 무언가가 관찰자가 생명체로서 작업하는 생물 존재의 같은 영역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도 그렇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일어난다고 관찰자로서 말하는 것은 그것의 구성 조건을 상술하는 것을 통해 언어 안에서 그의 또는 그녀의 구별을 야기하는 것이고. 즉, 관찰자가 구별하는 존재자는 관찰자가 그것들을 그의 또는 그녀의 작업을 거쳐 살아 있는 인간 존재와 구별하는 작업의 유형성을 갖는다. 그것들의 각각의 존재의 영역 안에서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존재자로서 생명체는 생명체이고, 그리고 분자들은 분자들이라는 이 뜻 안에서의 그것이다. 우리가 관찰자로서 분자들이 그것들의 구성 조건이 적용될 때 일어난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이 뜻 안에서의 그것이다. 따라오는 것은 이 이해 하에서 말해진다. 나에게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생물학자들이 자기생성의 관념이 살아있는 것의 조직을 내포한다는 관념을 받아들이는 데 안에서 갖는 주된 어려움은, 그것들의 구성 조건이 일어나는 순간 안에서의 존재로서 것들, 체계들, 관계들, 그리고 존재자들이 일반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거부이다. 자기생성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순간에 생명체가 일어나고 그리고 자기생성이 보존되는 한 생명체가 지속된다고 우리는 관찰자로서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인지적인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어나는 작업적인 영역(분자적 영역)에 생명체가 존재할 때 작업적인 정당성을 가지는 주장이 그것이다.
In our culture we like to explain with causes and principles that are external to that which is explained. This is why to say that a living system exists by itself, and that to explain living systems consists in proposing the generative mechanism that gives rise to a living system as a consequence of its operation in a different domain than the domain of its components, appears epistemologically unacceptable. But such a statement is valid and sound epistemologically in the domain in which one is aware that explanations constitute the proposition of generative mechanisms. In these circumstances the claim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can only be dismissed by showing that there are biological phenomena that do not directly or indirectly entail molecular autopoiesis. This claim cannot be dismissed on epistemological grounds. Biologists have frequently ignored the notion of autopoiesis and the theory of cognition that it supports (Maturana 1970 and 1980), because it does not seem to be pragmatic enough. Philosophers have frequently objected to it because it relates abstractions and pragmatics (Scheper and Scheper 1998). I also think that sometimes scientists and philosophers do not see that explanations do not replace that which they explain. They forget or ignore that what explanations indeed do is to propose generative mechanisms such that if they were allowed to operate, they would generate as a consequence of their operation that which they intend to explain, and that to do so they relate abstractions and pragmatics.
우리의 문화 안에서 우리는 설명되는 그것에 외재적인 원인과 원리를 가지고 설명하기를 좋아 한다. 이 때문에 생명체는 그것만으로 존재하고, 그리고 그것의 성분의 영역보다 다른 영역 안에서 그것의 작업의 결과로서 생명체를 일으키는 생식의 메커니즘을 제안하는 것에 생명체에 대한 설명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한 사람이 설명이 생식 메커니즘의 제안을 구성한다고 아는 영역 안에서 그러한 진술은 인식론적으로 건전하고 그리고 근거가 확실하다. 이 환경 안에서 생명체가 분자적이고 자기생성적인 체계라는 주장은 분자적인 자기생성을 직접적으로나 또는 간접적으로나 일으키지 않는 생물학적인 현상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에 의해 결말이 내려질 수 있다. 이 주장은 인식론적인 기초 위에서 결말이 내려질 수 없다. 자기생성의 관념과 그것이 지지하는 (마뚜라나 1970 그리고 1980) 인지의 이론을 생물학자들은 자주 무시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분히 실용주의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자주 그것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추상과 어용론을 (세퍼와 세퍼 1998)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때때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설명이 그들이 설명하는 것을 대체하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다고 나는 또한 생각한다. 그들은 잊거나 또는 무시한다 진실로 설명하는 것은 생식의 메커니즘을 그 같이 제안하는 것이고 그들이 작업하도록 허락받았다면, 그들이 설명하기를 의도하고,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이 추상과 그리고 어용론을 연결시키는 작업의 결과로서 낳을 터인 그러한 생식의 메커니즘을 제안하는 것이 설명이 진실로 하는 것이라는 걸 그들은 잊거나 또는 무시한다.
Finally I think that an epistemological difficulty that is commonly present is that the mistake of using autopoiesis as an explanatory principle. To conclude, I wish to insist in that the epistemological shift in the notions of autopoiesis and the biology of cognition that I have developed lies in abandoning the question of reality while turning to explain the experience of the observer with the experience of the observer. This is a fundamental move away from a domain of transcendental ontologies to a domain of constitutive ontologies.
최종적으로 보통으로 있는 인식론적인 어려움이 자기생성을 설명적인 원리로서 사용하는 그 실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기 위해, 내가 개발한 인지의 생물학과 자기생성의 관념 안에서의 인식론적인 이동이 관찰자의 경험을 가지고 관찰자의 경험을 설명하는 데에 의지하는 동안 실재의 문제를 버리는 것에 있는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이것은 초월론적인 존재론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구성적인 존재론의 영역으로의 기초적인 움직임이다.
References 참고문헌
Kant, I. 1952. The Critique of Judgment. In,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 Vol. 42
Kauffman, S. 1995. At Home in the Universe. Oxford University Press
Maturana, H. R. 1970. Biology of cognition. BCL Report 9.0. Biological Computer Laboratory. Department of Electrical Engineering, University of Illinois
Maturana, H. R. 1980. Biology of Cognition, in Autopoiesis and Cognition, by Maturana and Varela, edited by D. Reidel
Maturana, H. R. 1988. Reality: The search for objectivity or the quest for a compelling argument. Irish J. of Psychology (issue on Constructivism) 9(1): 25-82
Maturana, H. R. 1990. Science and Daily Life: The Ontology of Scientific Explanations . In: Selforganization: portrait of a Scientific Revolution. W. Krohn, G. Kuppers. (eds.) Kluwer Academic Publishers, Dordrecht, Boston,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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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urana, H. R., F.J. Varela. 1988. The Tree of Knowledge. Shambhala New Science Library, Boston and London
Maturana, H. R., G. Verden-Zöller. 1993. Liebe und Spiel, die Vergessene Grundladge des Menschlichkeit. Carl Auer Verlag, Hamburg
Scheper, W. J., G. C. Scheper 1996. Autopsy of Autopoiesis. Behavioral Science, vol. 41,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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