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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라덱의 제국주의에 관한 테제(1915)

라덱의 제국주의에 관한 테제(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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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현재 일으키고 있는 전쟁과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제국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우리 이해는 한 세기가 넘는 경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한다. 그중 많은 부분이 우리보다 앞서 온 혁명가들에게 빚지고 있으며, 이러한 취지로 1차 세계대전 중에 작성된 아랫글을 번역하게 되었다.

 

이 테제는 원래 1915년 9월경에 작성되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왕국 사회민주주의(SDKPiL)의 '로즈라모프시(rozłamowcy)' 분파(1) 기관지인 가제타 로봇니차(Gazeta Robotnicza : 노동자 기관지)에 게재되었다. 칼 라덱(Karl Radek), 미치스와프 브론스키-바르샤프스키(Mieczysław Broński-Warszawski), 와디스와프 슈타인-크라제프스키(Władysław Stein-Krajewski)가 서명했다. 1916년 4월에는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과 헨리에트 롤랜드 홀스트(Henriette Roland Holst)가 편집하여 침머발트 좌파 독일어 신문인 보르보테(Vorbote : 헤럴드)에 실렸다. 이 글을 읽은 레닌은 1916년 10월에 민족 자결권을 지지하는 장문의 비평문을 발표했다.(2) 그 결과 보르보테는 다시 출간되지 않았다. 가제타 로보트니차의 테제는 1976년에 영어로 번역된 적이 있지만, 우리는 온라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폴란드어 원본과 독일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하여 번역하기로 했다.

 

이 문서를 1915년 11월 니콜라이 부하린이 초안을 작성하고 게오르기 퍄타코프(Georgy Pyatakov)와 예브게니아 보쉬(Yevgenia Bosch)가 공동 서명한 민족 자결권에 관한 테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3) 그러나 이 두 테제가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레닌은 부하린 테제에 서명한 퍄타코프와 보쉬에게 불만을 품고 이 모든 것을 라덱의 영향 때문이라고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고. 읽지 않았으며 공부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라덱의 말을 두세 번 듣고(그는 오래된 "폴란드"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혼란스러워했다) 서명했다.” (1916년 3월, 레닌이 A.G. 쉴랴프니코프에게 보낸 편지)

 

물론 오래된 '폴란드‘병은 민족 자결권에 대한 반대였다. 이 입장은 1880년대 루드비크 바린스키(Ludwik Waryński)와 그의 '프롤레타리아트' 당이 처음 발전시켰고, 그 후 로자 룩셈부르크와 SDKPiL이 받아들였다.(4) 라덱, 브뢴스키, 크라제프스키 모두 세기가 바뀌면서 사회주의 정치에 입문한 젊은 세대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SDKPiL에 가입하여 1905년 혁명에 참여했다. 탄압에 직면한 그들은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정치적 인맥을 넓혔다. 브론스키와 크라예프스키가 레닌 및 볼셰비키와 긴밀하게 협력을 시작하는 동안 라덱은 독일에서 판네쿡과 브레멘 좌파에 합류했다. 이미 1912년에 라덱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독일] 당의 지적 활동은 ... 자본주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 사회주의는 당의 광범위한 서클에서 '현재의' 쟁점이 아니기 때문에 제국주의적 문제에 대한 확실한 대안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제국주의 전쟁 선동에 대항하는 구호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 정치의 관점에서 답을 찾는다.” (라덱, 제국주의에 맞선 우리의 투쟁, 1912년 5월)

 

라덱과 주변 사람들에게 "대중 투쟁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제국주의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뿐만 아니라 반동 세력과 노동계급 사이 경제적, 정치적 분쟁은 언제든지 공이 굴러가듯 일어날 수 있다". 2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공은 본격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라덱, 브론스키, 크라예프스키는 안전한 피난처인 스위스로 돌아와서 「가제타 로봇니차」를 계속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국제주의자였던 이들이 침머발트 좌파에 합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월혁명이 일어나자 모두 볼셰비키의 편에 섰다. 1916년 6월 크라예프스키가 바르샤바로 돌아왔을 때 라덱과 브론스키는 취리히에서 페트로그라드로 가는 악명 높은 기차 여행에서 레닌과 함께 있었다.(5) 이후 라덱, 브론스키, 크라예프스키는 폴란드와 독일에서 코뮤니스트당이 설립되는 과정에 이바지했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러시아 당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 무렵 그들은 민족 문제에 관한 이전 입장을 포기했다(특히 라덱은 1923년 '국가 볼셰비즘'의 옹호자가 되는 등 끔찍한 행보를 보였다). 궁극적으로 반(反)스탈린주의 반대파에게 다양한 경로로 참여해야 했던 그들은 모두 숙청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전후로 민족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했으며, 심지어는 레닌(레닌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915년 테제는 당시 그들의 견해를 가장 완벽하게 드러낸 것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설명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필자들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시대에 접어들었으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가 더는 ’자본주의의 연장이나 확장이 아니라 자본주의 전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이 새로운 역사적 시기에는 ’민족 문제에 대한 맑스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 더는 적절하지 않다. 민족 억압에 대한 해결책은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고 낡은 국가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전체에 대항하는 국제 노동계급의 단결된 투쟁에 달려 있다. 이들은 ’민족 자결권‘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제국주의 시대에는 실현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국가가 더는 ’정치 경제적 단위의 성격‘을 갖지 않는)에도 적용될 수 없는 ’권리‘인 타락한 제2 인터내셔널의 유산으로 간주한다. 실제로 이 슬로건이 어떻게 ’사회혁명적 관점을 대체‘하고 노동계급 운동 내에서 분열로 이어지는지 경고한다. 그 결과는 오늘날 민족이라는 개념이 많은 노동계급 사이에서 계급이라는 개념을 무너뜨렸음을 알 수 있다.(여전히 후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혁명적 소수일 뿐이다).

 

이 테제가 모호한 여지를 남기고 제2 인터내셔널 언어의 흔적을 보여주는 부분은 ‘민주적 권리’ 또는 ’자본주의 틀 안에서 정치적 조건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관련된 부분이다. 필자들이 지적했듯이 ‘당면한 요구를 위한 투쟁’은 ‘혁명적 관점’과 연결될 필요가 있지만, 다른 곳에서 주장했듯이 이것이 코뮤니스트 강령을 ‘최소’와 ‘최대’ 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6) 사실 러시아혁명은 테제 저자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차르주의 폐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 결과로 이루어졌고, 전후 혁명적 물결은 처음에는 '무르익은' 서구가 아니라 '저발전' 동구에서 촉발되었다. (여전히 제2 인터내셔널에 남아 있는 개혁주의 영향 아래 있고 더 강력한 자본가계급에 직면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집권할 수 없었던 곳에서)

 

그런데도 이 테제는 국제주의 전통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인데, 후반부에서는 '억압받는 국가'의 혁명적 성원이 어떻게 민족 자결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보여준다.

 

디즈바스와 틴코트카 (Dyjbas and Tinkotka)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3년 10월

 

<주>

(1) 1911년 룩셈부르크와 요기헤스가 이끄는 베를린 당 중앙을 지지하는 '자르조도프시(zarządowcy)'등과 중앙과 개인적, 전술적, 조직적 이견이 있고 볼셰비키에 더 가까운 '로쟈모프시(rozłamowcy)'로 SDKPiL이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훗날 라덱이 당의 재산을 훔친 혐의로 기소되어 1912년 당 중앙으로부터 추방당한 이른바 '라덱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레닌과 판네쿡 등이 라덱의 편에 섰다). 그러나 두 분파를 하나로 묶어준 것은 전쟁, 혁명, 민족 문제에 관한 입장이었고, 결국 1916년 11월에 SDKPiL이 재결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2) 레닌, 자결권에 관한 토론 요약, marxists.org

(3) 서론에 나와 있지만, 부하린의 테제는 1915년 「코뮤니스트」 지에 실린 적이 없지만, 여기에서 볼 수 있다: libcom.org

(4) 바린스키와 룩셈부르크에 대해서는 왼쪽 참조: leftcom.org

(5) 라덱은 러시아 입국이 거부되어 스톡홀름에서 내려야 했지만.

(6) 민주 혁명 - 과거의 강령(PDF로 제공) 참조: files.libco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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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와 민족 억압에 관한 가제타 로봇니차(Gazeta Robotnicza)의 테제

 

1915년 9월 9~10일 가제타 로보트니차 편집위원회에서 채택, 1916년 1월 25호 가제타 로보트니차에 게재. 보르보테, 1916년 4월 2호에서 재발행

 

I. 민족 억압과 국제 사회민주주의

 

1. 제국주의는 금융 자본이 민족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여 해외 원자재 및 식량 공급원, 투자 및 시장을 정복하고, 유럽에서조차 주민의 국적을 고려하지 않고, 인접해 있고 경제적으로 상호 보완적인 지역까지 합병하여 더 큰 국가기구를 만드는 경향을 보여준다. 제국주의는 국가 사이 모순을 심화시켜 공격과 방어의 필요성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후자의 경향은 군사적 측면에서도 지원받는다.

 

제국주의가 식민지 및 대륙을 합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역사적, 지리적 이유로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통치하는 다민족 국가에서만 존재했던 민족 억압이 증가하고 일반화되었음을 의미한다.

 

2. 이러한 민족 억압은 노동계급 이익과 모순된다. 민족적 억압 기관인 바로 그 제국주의 관료집단은 자국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적으로 억압하는 세력이 되며, 투쟁하는 지배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피억압 민족에 대항하는 투쟁에 사용되는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 따라서 억압받는 민족의 노동계급에 관한 한, 민족적 억압은 그들의 조직적 자유를 감소시키고 사회적 수준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자국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연대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계급투쟁을 제한한다. 손과 발이 묶이고 민족주의로 정치적으로 타락한 피억압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무력한 착취의 대상이 되어(임금을 낮추고 파업을 중단함으로써) 억압 민족 노동자의 위험한 경쟁자가 된다.

 

승리한 국가는 외국 영토를 자국 영토로 강제로 편입함으로써 새로운 전쟁의 장을 만든다. 패전국은 영토가 경제적, 군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또는 민족의 복수라는 구호가 패전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기에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3. 그러므로 사회민주당은 제국주의의 합병 정책과 그 결과로 발생하는 민족 억압 정책에 전력을 다해 반대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 식민지 획득이 필요하다는 제국주의의 주장에 대해 사회민주당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서부 유럽에서도 이미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전환할 때가 왔으며, 사회주의 국가는 저개발 국가에 무관심한 사회 원조를 제공할 수 있기에 사회주의에는 식민지가 필요하지 않다고 답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그리고 현재 완전히 실현 가능한 임무는 자본주의 연장이나 확장이 아니라 자본주의 전복이다. 유럽에서 승리한 제국주의 국가의 군사 안보, 그리고 평화 안보를 위해 합병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사회민주주의는 합병은 모순을 악화시킬 뿐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 위험을 증가시킬 뿐이라고 답한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회민주주의는 민족 억압에 기반을 둔 평화를 만드는 데 관여할 수 없다. 만약 사회민주주의가 그러한 평화를 지지한다면, 이는 지배국 프롤레타리아트와 피억압국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틈이 생기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배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합병을 지지함으로써 제국주의 정책에 책임이 있고, 그 정책을 계속 지지함으로써 제국주의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반면 피지배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국 부르주아지와 단결함으로써 지배국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적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국제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가 국제적으로 투쟁하는 대신 프롤레타리아트의 분열과 정신적 타락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일상적인 이익과 사회주의를 위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완전히 무기력하게 될 것이다.

 

4. 합병에 반대하는 사회민주주의 투쟁의 출발점, 피억압 민족을 폭력적으로 점령하는 것에 반대하는 투쟁 출발점은 제국주의 시대에 외국을 억압하고 약탈하는 자국 부르주아지 권리에 해당하는 조국에 대한 모든 방어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투쟁은 민족 억압을 지배국 프롤레타리아트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비난하고, 정치적 분리를 위한 선동 자유를 포함하여 피억압 민족을 위한 모든 민주적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으로 구성되는데. 민주주의 원칙은 어떤 형태로든 힘보다는 사상을 통해 싸워야 한다는 그러한 선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억압 정책의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거부하고 타협하지 않으며 이에 맞서 싸우는 사회민주주의는 결코 유럽에 새로운 국경 지대를 만들거나 제국주의에 의해 무너진 국경 지대를 다시 만드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자본주의가 독자적 국가 없이 발전한 지역에서, 역사적 발전은 독립 국가가 생산력 발전과 사회주의 구현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제조건이 결코 아님을 보여주었다. 제국주의 수레바퀴가 이미 형성된 자본주의 국가가 굴러가는 곳에서 제국주의 억압의 잔인한 형태로 자본주의 세계 정치적, 경제적 집중이 이루어지고 사회주의로 가는 기반을 닦는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족적, 경제적 억압을 통해 대중을 선동하는 이렇게 집약된 결과에 기초하여 피억압 민족과 억압 민족의 노동자 대중을 제국주의를 통해 인류를 사회주의로 인도함으로써 경제적 착취와 함께 민족 억압을 타도할 수 있는 단결된 투쟁으로 나아가도록 교육해야 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민주주의가 제국주의의 타도를 낡은 형태로의 회귀, 새로운 민족국가의 수립과 재건이 아니라 "국경은 없어져야 한다!"라는 호소로 생각할 수 있다면, 이미 경제적 관계가 무르익은 사회주의 길을 닦기 위해, 이 과제는 또한 "식민지는 없어져야 한다!"라는 요구를 제기하게 되고, 이는 제국주의 민족 억압에 대한 우리 투쟁을 상징하게 된다.

 

식민지는 수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자본에 새로운 이윤을 획득하게 하는 원천이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원주민 군대를 만들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상대로 현재 경쟁국과 세계 전쟁에서 활용하는 것처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 힘을 그들에게 끌어내려고도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만이 혁명적 투쟁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식민지 확장에 대해 국제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결코 사회제국주의자들 주장처럼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야만으로 퇴행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년 동안 동방의 가장 중요한 국가들(터키, 중국, 인도)에서 자본주의보다 앞서 있는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임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부르주아적 요소가 눈에 띄게 성장했다. 유럽 자본주의의 식민지 확장 포기를 요구하고, 유럽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젊은 식민지 부르주아지 투쟁을 활용하여 유럽의 혁명적 위기를 심화시킴으로써 사회민주주의는 유럽 밖에서도 사회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는 순간을 앞당기는 역할을 한다, 유럽 및 국내 자본에 대항하는 식민국가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지원하고, 식민지 프롤레타리아트의 영구적 이익을 위해서는 자국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는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와 연대가 필요하다는 관점을 식민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5. 자본주의의 지형에서 제국주의를 노동자 이익을 위해 재편하거나 군사화를 종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제국주의의 민족 억압 경향을 제거하거나 민족 자결권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민족 억압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국가에 억압받는 대중을 해방하기 위한 사회민주주의 투쟁은 자본주의 지배를 파괴하기 위한 사회혁명적 투쟁이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유재산을 폐지해야만 노동계급은 계급 지배의 일부에 불과한 국가 억압의 동기도 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억압을 허용하지 않고 모든 국가에 모든 필요를 공동으로 결정할 권리를 부여하고 모든 시민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임무를 결정할 자유를 부여할 것이다.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적 대중 투쟁의 광범위한 흐름에서 민족적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의 방향은 제국주의 시대의 혁명적 결과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사슬을 부수는 사회주의 혁명기를 준비하기 때문에 이 투쟁을 불확실한 시기로 연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피억압 인민들이 더 나은 미래에 대해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II. 이른바 민족 자결권

 

자결권이 공식적으로 계승된 것은 제2 인터내셔널에서였다. 제2 인터내셔널에서 이 개념은 모호한 역할을 했는데, 한편으로는 모든 민족적 예속에 대한 항의를 표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민주주의가 ‘조국을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개별 국가와 관련된 질문의 경우, 구체적인 내용과 발전 경향에 대한 검토를 피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세계대전에서 조국 방어 정책의 결과는 제국주의 시대에 이 공식의 반(反)혁명적 성격을 완전히 명확하게 보여주지만, 민족 억압에 대한 우리의 투쟁을 분명히 하기 위한 공식으로서의 오해의 소지가 있는 성격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혼란스럽게 여긴다. 제국주의 억압 경향에 대해 날카롭게 표현하면서 반대하고 있기에 일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보기: 러시아)는 이를 우리의 혁명적 선동에 필요한 도구로 간주한다. 우리는 그들이 자결권이라는 슬로건을 담은 선전을 통해 추구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목표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 공식이 제국주의에 대한 우리의 투쟁을 올바르게 표현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결권은 실현될 수 없다.

 

현대 민족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에 대한 부르주아지 독재라는 정치적-문화적 형태를 띠고 있다. 계급으로 나뉜 민족은 공동 관심사도 없고 어떤 공동 의지도 없다. ‘국가적’ 정책은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이다. 이것은 개별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민주주의 존재와 절대 모순되지 않는다. 자본의 대중에 대한 경제적 지배와 영향력,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기관(교회, 학교, 언론)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가공하여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 의지를 일방적인 방식으로 대다수 인민에게 강요하고 자본주의 의지를 인민 의지처럼 보이게 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민주주의다! 민족 사이의 관계에서 더 강한 부르주아지 또는 여러 국가 그룹으로 구성된 연합의 이익이 현재 세상을 지배한다. 자본은 확장을 원하는 지역에서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을 확보할 때까지 확장을 미룰 수 없기에 수십 년이 걸리고, 그러한 평화 확장은 종종 다른 자본주의 집단의 상반된 의지에 저항을 받아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외국 영토를 합병하는 문제에서 정치적 민주주의 형태가 제거되고 폭력 규칙이 공개적으로 적용된다. 여기서 국민투표는 폭력 행위를 제재하기 위한 공개적인 기만 수단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이른바 자결권이 요구하는 것처럼 국경을 변경하는 문제에서 민족의 의지가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자본주의 지형에서는 실제로 불가능하다.

 

민족의 개별 부분이 이 국가에 속할지 저 국가에 속할지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한, 자본은 국가 경계의 결정을 결코 국민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는 유토피아적일 뿐만 아니라 예외적이고 비민주적이다. 특정 나라의 대중이 국경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다면 이는 어느 특정 지역이 아닌 국가 전체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실제로 두 나라 사이의 분쟁이 있는 경우 민주주의에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자들 간에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보기를 들어, 프랑스가 알자스-로렌[당시 엘사스-로트링겐]을 합병함으로써(독일 제국으로 돌아가려는 그곳 주민들이 희망하는 것처럼) 독일이 프랑스에 보복당할 위험이 있다면, 즉 독일이 새로운 전쟁으로 프랑스를 위협한다면, 단순히 알자스 주민의 의사에 따라 결정에 발언권도 없이 이러한 모든 결과를 프랑스 국민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결코 민주적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2. 자결권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

 

이른바 자결권은 사회주의 아래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의미로 사회주의에 대한 우리 열망을 표현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우리는 사회주의가 모든 민족적 억압을 폐지할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그 원인이 되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폐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민족이 정치-경제적 단위의 성격을 띨 것이라고 가정할 이유도 없다. 사회주의 문화권의 영토 분할이 존재하는 한, 그러한 분할은 생산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기에 문화 및 언어 단위의 성격만 가질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분할을 결정하는 것은 당연히 개별 민족의 권한이 아니라 ("자결권"이 요구하는 대로) 관심 있는 모든 시민이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사회주의에 '자결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은 사회주의 공동체의 성격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3. 자기 결정권 개념 사용의 전술적 결과

 

모든 유토피아적 구호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의 성격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퍼뜨리고 민족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그릇된 길로 이끈다. 이 구호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자본주의를 폐지하지 않고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모순으로 파편화된 자본주의의 군사적, 경제적 필요에 따라 자신 운명이 자의적으로 결정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대신, 자본주의가 약소국 국익에 적응할 수 있다는 실현 불가능한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식으로 이 구호는 설파하는 사람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계대전에 이르게 된다는 가장 중요한 결과인 사회 혁명적 관점을 국가 개량주의적 관점으로 대체하게 된다.

 

민족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피억압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 강령에서 이 구호는 사회제국주의자들에게 국가 억압에 대한 우리 투쟁을 역사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은 감상주의로 제시할 기회를 제공하고, 따라서 사회민주주의 강령의 과학적 토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신뢰를 약화할 기회를 제공한다. 실제로 이는 억압받는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와는 달리 자신들은 이미 운명에 대한 자결권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민족의 다른 부분과 함께 자신들의 '공동' 이익과 의지를 옹호할 의무가 있다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다. 그러나 자결권이라는 구호가 사회혁명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 즉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이끄는 것으로 선동적으로 사용된다면(사회주의 사회의 특정 민족 집단이 일반적인 공동의 이익에 대해 자율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그것은 부적절하다. 사회주의가 경제적으로는 이미 가능하지만, 사회혁명적 계급투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과도기이기 때문에 우리의 전술적 이해관계는 우리 투쟁의 모든 부분을 확장하고 강화하는 중심사상으로서 사회주의, 사회혁명이라는 분명하고 희석되지 않은 구호를 뚜렷하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4. 역사적 관점에서 문제점 평가

 

맑스가 아일랜드의 해방과 폴란드의 독립을 지지했지만, 동시에 체코, 남부 슬라브 등의 독립운동에 반대했기 때문에 1848∼1871년 기간의 민족 문제에 대한 맑스의 입장을 언급하는 것은 전혀 가치가 없다. 오히려 맑스 입장은 추상적인 '권리'를 통해 구체적인 문제에 관한 입장을 공식화하는 것이 맑스주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테제에서 보여주었듯이 모든 민족적 억압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부정적 입장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지배계급에 대한 어떤 지원과도 결과적으로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모든 구체적인 민족 문제(알자스-로렌, 폴란드, 발칸 문제)는 전체 제국주의 시대의 틀 안에서 이 문제 자체의 구체적인 발전 경향에 기초할 때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자결권을 정식화하는 데에 반대하는 맑스주의적 입장을 프루동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프루동주의는 민족적 문제를 부정하고 계급투쟁이 아닌 소부르주아적 결속을 통해 모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른바 자결권에 반대하는 맑스주의자들은 민족 문제를 부정하지 않으며 사회주의가 승리할 때까지 민족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을 연기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프루동주의로 비난받을 수는 없지만, 자결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방법론은 민주주의 개념을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특징이 있다.

 

5.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와 이른바 자결권 문제

 

폴란드 사회민주주의당은 1893년 폴란드의 경제 발전 경향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폴란드 문제에 관한 입장을 정했다. 1905/06년 혁명이나 세계대전 중 폴란드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명한 사회 계층이 없었다는 점에서 폴란드 역사에서 그 후 20년은 이러한 분석을 확실하게 입증했다. 1896년 런던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자결권 슬로건이 제기되었을 때 SDKPiL은 폴란드 독립을 위한 투쟁을 기치에 새긴 폴란드 사회애국주의자들의 구체적인 슬로건과 관련된 입장을 취하지 않기 위해 이를 거부했다.

 

자결권이라는 구호가 사회적 애국주의의 방패막이로 변질하자 폴란드 사회민주주의 대표들은 1903년 강령에 이 구호의 채택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어쨌든 이런 일이 발생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애국주의에 맞서 우리가 결정적으로 승리함으로써 RSDLP 강령이 이러한 측면을 초래할 위험이 줄어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대중 투쟁으로 인해 의견 차이에도 모든 계급이 함께 모이는 것이 필요했던 1906년에 SDKPiL이 당 전체에 합류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강령 핵심은 혁명 기간 러시아 사회민주당 선동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고, 당의 중앙 기관에 우리 대표들이 있었으며, 선동에서 최대한 자율성을 누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反)혁명 시기에 러시아에서 민족 문제는 큰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그 결과 사회민주주의 입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관한 자신들의 입장을 광범위하게 설명했다.

 

우리는 이 테제에서 일반적으로 이러한 입장을 정립하고 발전시켰다. 우리는 1915년 9월 특별 결의안에서 폴란드 문제에 이 입장을 적용했는데, 이 결의안을 여기에 첨부하여 억압받는 민족 노동자 사이에서 사회혁명적 관점의 선동이 어떻게 수행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III. 폴란드 문제와 사회민주주의

 

1. 세계대전 중 재산 소유 계급 태도는 자본주의 발전이 폴란드 자본주의 이해관계를 서로 대립하는 부분으로 나누고 이를 분리된 세력의 이해관계에 묶어 놓았다는 SDKPiL의 주장이 진실임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독립 투쟁의 무덤은 폴란드 부르주아지들 사이에서 독립이라는 구호를 의식적으로 포기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들의 전체 전쟁 계획은 한쪽 또는 다른 제국주의 진영의 군사적 폭력에 의해 실현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폴란드 영토를 그 안에 통합함으로써 제국주의 진영중 하나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폴란드 부르주아지의 모든 전쟁계획은 폴란드 독립을 반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세계대전은 유럽에서 민족국가를 건설하던 시대가 끝났음을 증명했다.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에는 모든 국가가 합병과 다른 민족에 대한 억압을 통해 국경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든 분할[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에서 폴란드 부르주아지 태도는 제국주의 시대의 민족국가의 이상이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었고, 독립에 대한 열망에 대한 SDKPiL의 입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 독립을 목표로 삼은 적이 없었다. 이는 분할된 국가들과 폴란드 세 부분 모두 자본주의 통일을 기반으로 생겼으며 다른 모든 민족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국가 틀에서 민주주의, 경제 상황 개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수행했다. 그들은 기존의 국가 경계가 아니라 계급과 민족 억압 기관으로서 국가 성격을 파괴하려고 노력했다. 오늘날 세계 전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민족적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수단으로 독립이라는 슬로건을 채택하는 것은 유토피아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가장 간단한 기초를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구호는 새로운 제국주의 강대국, 즉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억압하는 강대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계획의 유일한 결과는 계급의식 약화, 국가 모순 심화, 프롤레타리아트 세력 분열, 새로운 전쟁 위험을 증폭시킬 것이다.

 

2. 제국주의 국가 중 하나 또는 제국주의 국가 연합의 통치 아래 폴란드 영토를 통일하는 계획, 즉 폴란드 오스트리아-러시아계가 작성한 것과 같은 계획은 폴란드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제국주의 전리품 중 더 높은 비율을 확보하기 위해 분할 강대국 부르주아지에 대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분할 하려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폴란드 땅을 통합하려는 경향은 국가 영토 확장이 필요한 전략적, 일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차례로 발생시킨다. 폴란드와 분할 국가들에서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폴란드 땅의 통일은 강대국 또는 연합한 강대국 통치 아래 제국주의 정책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는 일반적, 특히 경제적 이해관계 모두 폴란드 땅을 완전히 예속시킬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러한 영토에서 민주주의 체제는 허용될 수 없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 이익과 연결된 민족 문제의 유일한 측면인 자유로운 사회 발전을 최소한으로 보장하는 통일에 대한 논의는 있을 수 없다.

 

전쟁이 폴란드 영토를 승전국과 소속된 하나의 기관으로 통일할 것인지는 전쟁의 군사적 결과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외교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전쟁으로 인해서 역시 새로운 합병과 폴란드 지도가 새롭게 분할되어 폴란드 땅이 쪼개지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이러한 새로운 분열과 이로 인한 시장, 관습 및 법적 조건의 변화가 발생하여 폴란드의 자본주의 발전과 의회 폴란드의 사회주의 운동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는 과장된 것이다. 폴란드의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 발전 수준은 이미 새로운 조건에 적응할 수 있는 생산력을 창출했으며, 폴란드 한 지역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약화하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 오히려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로 상쇄된다. 그러나 이러한 적응의 필요성으로 장기적인 경제위기를 초래할 것이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프롤레타리아트에 돌아갈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독립적인 완충 지대를 만들자는 생각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공교롭게도 작고 힘없는 집단에는 공허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러한 구상은 하나 또는 다른 초강대국 블록의 군사 식민지, 군사 및 경제적 이익 거점, 외국 자본을 착취하는 영역, 미래 전쟁에서 전쟁이 일어날 장소가 될 작은 폴란드 식민지국을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

 

3. 이로부터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프롤레타리아트 이해관계가 폴란드 부르주아지 전쟁계획에 관한 모든 지지를 거부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기존 프롤레타리아 정치는 변하지 않아야 하며,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전쟁계획을 위해 이를 포기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정당화할 실질적인 효용이 없는 그러한 계획에 대한 지지는 독립적인 계급 행동을 포기하고 전쟁 기간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맺는 것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 이는 앞으로 수년 동안 프롤레타리아트 전술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트는 현시대에 모든 자본주의 국가가 발전의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에 분할된 권력이 계급 억압뿐만 아니라 국가 억압의 기관이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분할된 국가의 국경 방어를 받아들일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폴란드의 새로운 분할이 일어날 때 프롤레타리아트에 발생하는 위에서 강조한 모든 위험에 눈을 감지 말고, 제국주의의 다른 모든 위험이 사회주의 승리 없이는 사라질 수 없는 것처럼 제국주의 시대의 틀 안에서는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4. 이는 전쟁이 제기한 일반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고, 제국주의 시대에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의 민족-문화적 이익이 결실을 볼 수 없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전쟁의 새로운 위험과 부담, 민족 억압의 새로운 위험으로부터 해방될 사회주의 도래를 팔짱 끼고 마냥 '기다려야 한다'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제국주의는 사회주의적 생산 조직을 가능하게 하는 발전 단계의 자본주의 정책이다. 전쟁으로 인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희생, 세금 부담 증가, 정치적 반발, 노동조건 악화 등 전쟁의 모든 결과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 이끌 것이며, 이는 다가오는 역사적 시대를 완성할 것이다. 전쟁에 맞선 투쟁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도살장으로 보내고, 민족을 여러 가닥으로 쪼개고, 민족적 요구를 짓밟고, 대중을 우매한 소처럼 취급하는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지 프롤레타리아에게 보여주고, 이러한 사람들의 희생, 강대국 간의 자의적 국가 분할, 민족 억압의 강화에 저항함으로써 우리는 혁명적 투쟁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가 준비할 수 있도록 한다.

 

정치적 위기가 심화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미 전쟁 중에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든, 아니면 이러한 투쟁이 나중에 일어날 것인지에 관계없이 프롤레타리아트는 분리주의 정책(현상 유지 방어, 하나의 권력 아래 통일을 위한 투쟁)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폴란드 독립이라는 헛된 꿈을 좇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쟁의 결과(희생, 경제적 피해, 합병, 민족 억압)에 대한 항의를 제국주의 원인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전환할 것이다.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혁명을 위한 의식적인 투쟁, 무엇보다도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특히 분할 강대국 프롤레타리아트와 연대하여 이 투쟁을 수행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 혁명적 투쟁은 러시아의 차르주의 폐지와 같은 자본주의 틀 안에서 정치적 조건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나 지역, 지방 및 국가 자치권 확대와 같은 민족적 자유를 위한 투쟁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혁명적 관점은 즉각적인 요구를 위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열정을 강화해야 하는데, 사회혁명만이 계급적-민족적 억압을 완전히 철폐하는 길을 열 수 있다는 의식이 계급투쟁을 약화하는 모든 정치적 타협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제타 로보트니차(Gazeta Robotnicza) 편집위원회

칼 라덱, 미치스와프 브론스키-바르샤프스키그리고 와디스와프 스타인-크라제프스키(Karl Radek, Mieczysław Broński-Warszawski and Władysław Stein-Krajewski)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10-29/radek-s-theses-on-imperialism-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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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생계비 위기 = 자본주의 위기

생계비 위기 = 자본주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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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삭감, 불안정한 일자리, 무너지는 보건 서비스, 학교 교육의 붕괴, 인플레이션, 광범위한 빈곤과 나라 전체가 겪고 있는 박탈감 등이 바로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물론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이 없다. 양당 모두 너무 게으르거나 무능해서, 자신들의 주변에 재난이 쌓이고 있는데도 바보 같은 문화 전쟁 문제로 경쟁하기를 선호하고 있다. 수도 회사를 운영하는 사기꾼들은 공금으로 주머니를 불리며 오물을 우리 수로에 버리고 있고, 수십 년 동안 방치해 온 탓에 학교는 문자 그대로 붕괴할 위험에 처해 있으며, 이제는 기본적인 상품들도 비싸져 살 여유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붕괴에서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이러한 붕괴를 주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붕괴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임금으로 생계비를 사용하는 노동계급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품을 살 임금을 노동자에게 지급하고, 생산 현장에서 노동계급에서 최대한 많은 가치를 창출하려는 자본가계급에 의존한다.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받는 임금과 노동자가 일하는 동안 창출한 가치의 차이에서 자본가의 이윤이 나온다. 따라서 사장과 정부는 항상 노동계급에 분배되는 부의 비중-이는 임금, 의료 서비스 혜택, 교육 또는 기간 시설 등의 형태를 가진다-을 최대한 줄여서 이윤을 늘리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보기를 들어, 국민보건서비스(NHS) 소속 노동자의 기본적 생활 수준은 불필요한 사치로 취급되는 반면에, ‘산업 안정화’라는 말은 노동자의 생활에 새로운 공격이 밀려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시간 노동, 저임금, 노동 강도의 증가 그리고 노동조건과 생활 조건은 점점 더 악화해 간다. 노동자가 집에서 매일 창출된 가치를 소비하는 시간은 사장을 위해 이윤을 창출하는 데 사용하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줄어들게 된다.

 

모든 산업은 일정 이윤율 이하로 떨어지면 버려지는 것이 공정한 게임으로 여겨진다. 최근 윌코(Wilko)의 사례처럼, 버려진 기업들의 부품은 빼앗기고 노동자는 해고당하고 있다. 자본은 우리가 개인적인 삶에서 가능한 한 적은 금액으로 만족하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막대한 돈을 벌기 위해 주정부 재원을 샅샅이 뒤져 학교, 병원, 주택으로 자금을 갈취하고 있다. 여러분이 가는 공적 공간 어디든지 가릴 것 없이 점점 상업화되어 가고 있으며, 이전에는 신성불가침이었던 국가기관들이 파멸 직전에 있다.

 

생활 조건과 실질 임금의 하락은 무능이나 탐욕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가 생산하는 상품을 추가적으로 빼앗기기 때문이며, 애초에 노동자가 자기 노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겼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자본은 노동이 필요하고, 자본은 노동계급의 착취를 통해서만 유지하고 성장하지만, 노동은 자본이 필요 없다. 만약 세계의 노동계급이 이윤 대신에 필요를 위해 산업을 통제하고 생산한다면, 노동계급은 자기 삶을 집어삼키는 무의미하고 잔인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화석 연료 시설이나 플라스틱 쓰레기를 바다에 버려지는 운명으로 만들기보다는, 우리는 자본에 의해 낭비되는 엄청난 생산 능력을 자본이 고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의약품, 식량, 주택이 부족한 것은 과거의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장의 배를 불리기 위해 일하는 한, 의약품, 식량, 주택들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사치품이 될 것이다. 전 세계에서 고조되고 있는 곤궁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분명히 더 악화할 것이다. 노동계급이 자본에 의해 자기 삶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노동계급은 자기 요구를 해야 하고, 노동자로서 이 썩어가는 체제에 맞서 자기 투쟁을 이끌어야 한다.

 

2023년 11월 18일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11-18/cost-of-living-crisis-capitalist-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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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와 녹색 자본주의의 신화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와 녹색 자본주의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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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가열: 자본주의의 산물

 

당사국 총회로 알려진 제28차 기후변화 정상회담(COP28)이 2023년 12월에 개최되었다. 이번 회담은 이전 27번의 그 어떤 회담보다 훨씬 더 희극적이었다. 세계는 지금 명백하게 재앙적인 기후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이 위기가 방치될 경우 문명이 붕괴하거나 심지어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지도자들은 이에 대처하는 행위가 자본의 수익성이나 축적을 위협한다면 이에 대해 그 어떤 진지한 조치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 이전에 주요 자본주의 기업들, 특히 화석 연료 회사들은 지구 가열 과학이 거대한 사기라고 주장하기 위해 싱크탱크들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으며, 정치인들이 온실가스 배출을 제한하는 것을 막고 사업을 평소처럼 진행하기 위하여 로비 단체에 수십억 달러를 더 투자했다. 이제 이 과학에 대해서 지구가 평평하다고 여기는 단체(flat-earth brigade)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기에 이르자, 녹색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전략이 고안되었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녹색 자본주의는 많은 정부와 기업이 수년간 부정해 온 과학을 받아들이지만, 그 대신에 기후 위기를 이용하여 새로운 이윤·축적·투기 분야를 개척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적인 정상 작동에 해당하는 것에 녹색의 후광을 퍼뜨리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최근에 등장한 녹색 자본주의의 거대한 작전에 대해서 검토해보려 한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이미 발표되었지만, 28차 당사국 총회에서 우리의 통치자들이 다시 한번 무시하기로 결정한 과학적 증거를 살펴보려 한다.

 

주요 과학적 사실에 대한 간략한 업데이트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지구가 에너지를 우주로 방출하는 것을 막아 에너지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 인간의 활동에 의한 에너지 가두기는 복사 강제력이라고 알려져 있다. 유엔의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사이 패널’(IPCC)의 6차 보고서(AR6)에 제시된 최신 정보에 따르면 2005년과 2019년 사이에 이 효과가 약 70% 증가했음을 <표 1>에서 확인할 수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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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열에 의해 배출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태양으로부터 흡수되고 있다. 그 결과 지구는 더 따뜻해져서 더 높은 온도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 온도에 이르러야 더 많은 에너지를 방출하여 에너지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유엔은 제26차 당사국 총회(COP26)에서 이루어진 모든 자발적인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 변화로 인해 19세기 평균 기온보다 2~50℃(5.0℃의 오자로 보인다―옮긴이)의 기온 상승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한다. 2차 협약(파리 협정)에서 전 세계가 약속했으며 제28차 당사국 총회가 여전히 가능한 것처럼 행세했던 1.5℃라는 유명한 제한에 대해서는 그만 이야기 하자.(1차 기후 협약은 교토 의정서이며, 파리 협정에서는 지구 온도 상승폭을 1.5℃로 제한하기로 했다―옮긴이) 매일 세계가 흡수하는 에너지의 양은 엄청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류가 매일 사용하는 에너지의 80배에 해당하는 양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사실은 이 에너지의 90% 이상이 바다로 흘러들어가 바다와 극지방을 가열한다는 것이다.2) 지구 온도 상승은 매우 고르지 않으므로 현재 육상 기반 온도 상승으로는 흡수되는 에너지의 양을 알 수 없다.

 

<그래프 1>은 현재 배출되고 있는 온실가스의 양과 현재 약속을 기준으로 향후 배출될 온실가스의 양, 그리고 세계가 1.50℃ 또는 2.0℃ 온난화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감축해야 하는 온실가스의 양에 대한 IPCC의 계산을 보여준다. 현재의 조치로는 이러한 제한된 온도 상승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분명하다.3) 이는 이러한 조치가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이 영향을 받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기본 조건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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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에너지기구(IEA)는 2021년에 새로운 석유와 가스 개발의 시기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평균 기온 상승을 1.5℃로 유지하려면 세계 지도자들은 기존 채광지를 넘어서는 새로운 석유, 가스, 석탄을 개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많은 부문의 수익성을 감소시킬 것이며 따라서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과 유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1.5℃ 제한을 고수하겠다는 일반적 입장을 표명했지만, IEA의 경고는 슬그머니 무시해버렸다. 보기를 들면, 미국은 가스 생산량을 하루 114억 입방피트로, 석유 생산량을 하루 1,320만 배럴로 늘렸는데, 이는 둘 다 현재 전 세계 최대 규모이다.4) 영국은 북해의 새로운 유전에서 시추를 허가하고 새로운 탄광을 개발했다. 우리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설교하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항상 핑계를 댄다. 최근에 내놓은 구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석유와 가스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세계 각국의 정부는 해마다 화석연료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해왔다. 보기를 들면 IMF는 각국 정부가 화석연료 회사에 제공하는 보조금이 매년 1조 3천억 달러에 이른다고 계산했다!5) 이에 비해, 유명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10년 동안 청정에너지에 4,000억 달러, 즉 연간 평균 400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한다.6) IEA의 계산에 따르면 파리 협정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2030년까지 매년 청정에너지에 5조 달러를 지출해야 한다.7)

 

화석연료를 단계적으로 퇴출하겠다는 약속은 진지하지 않으며 오직 서류상으로만 그리고 자발적인 결의안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현재 대기 중 총 탄소 배출량의 절반가량이 지난 30년간 배출되었다.8) 이는 탄소의 절반가량이 IPCC와 COP 설립 이후에 배출되었음을 의미한다. 현재 온실가스 배출량은 2015년 파리 COP 때보다 6% 증가했으며 2023년에는 새로운 기록을 세울 것이다. 지구를 구하기 위한 우리 지도자들의 헌신은 이 정도이다!

 

2022년 IPCC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누적된 과학적 증거는 명백하다. …… 전 세계적으로 협의된 선행 조치가 더 이상 지연된다면 …… 살기 적합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확보할 수 있는, 빠르게 닫히고 있는 짧은 기회의 창을 놓치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연과 활동없이 일관해왔으며 이러한 상황이 곧 바뀔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당사국 총회(COP)

 

제28차 당사국 총회는 세계 8위의 석유·가스 생산국인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렸으며, COP 의장인 술탄 알 자베르(Sultan Al Jaber)는 국영석유회사(ADNOC)의 최고 경영자이다. 회의가 열리기 전에, 알 자베르가 모잠비크, 캐나다, 호주, 콜롬비아 등 다양한 국가와 석유·가스 거래를 하기 위해 이 회의를 이용할 계획임을 보여주는 문서가 유출되었다. 알 자베르는 또한 평균 기온 상승을 1.5℃로 제한하는 파리 협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화석 연료의 단계적 퇴출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번 회의는 이전 회의보다 훨씬 더 많은 기업과 국가가 전시관을 갖추고 거래를 진행하는 대규모 무역 박람회로 변질되었다. 회의에는 8만 5천 명의 대표단이 등록되어 있었는데, 그 중, 2천 4백 명이 석유, 가스, 석탄 회사를 대표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2015년 파리 회의 이후 모든 COP가 보여준 것은 자발적인 제한으로는 온실가스 배출을 멈추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최근 COP의 최종 합의는 또 하나의 자발적 협정이다. 대표 국가들과 50개 주요 석유회사는 시간을 확정하지 않은 미래의 언젠가 자발적으로 화석연료를 단계적으로 퇴출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석유와 가스 생산을 줄이겠다는 약속 같은 것은 없었다. 그 대신에 50개 석유 생산회사는 2030년까지 공장에서 메탄가스 화염 기둥을 중단하고 메탄 누출을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자발적인 것이었으며, 과학자들에 따르면 이 50개 기업이 배출하는 온실가스 양은 전체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또 다른 주요 성과는 120개국이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설치 용량을 3배로 늘려 11,000기가와트의 설치 용량을 창출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전문가들이 보기에 이것은 달성될 가능성이 극히 낮은 것이다. 이러한 서약에 대해 IEA가 내린 최종 결론은 모든 자발적 서약이 이행되더라도, 배출량 감소는 1.5℃ 제한의 파리 협약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감축량의 30%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9) 유엔은 현재의 온실가스 배출 체계로 인해 전 세계의 기온이 2.9℃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는데, 이러한 기온 상승은 환경 재앙으로 이어지는 중대한 전환점을 촉발할 가능성이 높다.

 

주변부 국가들은 경제를 탈탄소화하기 위해 보조금을 구하고 있지만, 아래에서 고찰하는 것처럼 보조금은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국제 수준보다 높은 이자율의 차관인 경우가 흔하다.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자국의 석유와 가스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경제 발전에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화석연료 확산 방지 조약 구상(Fossil Fuel Non Proliferation Treaty Initiative)의 알렉스 라팔로위츠(Alex Rafalowicz) 이사는 다음과 같이 불만을 표명했다.

 

“기후 위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화석 연료의 단계적 퇴출을 위한 재정이나 기술 또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10)

 

EU 탄소 거래 시장은 이산화탄소 1톤을 배출하는 데 드는 비용을 71유로에서 66유로로 낮추면서 회의의 결과에 대해 간접적으로 견해를 밝혔는데,11)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시장은 배출 비용에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하며 COP의 결과를 오염을 계속할 수 있는 청신호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녹색 자본주의의 신화

 

녹색 자본주의는 사실 용어 모순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지속적인 축적을 필요로 하며, 결국 자연 자원의 지속적인 착취와 고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인한 자연의 무한한 전유가 유한한 행성에 요구되고 있으며, 이는 자본주의가 ‘녹색’이든 아니든 필연적으로 파국을 초래한다. “월드카운트(The World Counts)”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의 연간 소비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고 폐기물을 흡수하려면 1.8개의 행성이 필요하다. 2030년에 이르면 2개의 행성이 필요할 것이다.12) 지구 파괴와 지구 가열은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 지적 세력에 의해 더 이상 부정되지 않지만, 녹색 자본주의는 우리가 돌진하고 있는 재앙의 길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시장의 효과에 대한 순진한 믿음인데, 적절한 투입을 통해 기후 위기를 해결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1991년 지구 온난화에 관한 논문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윌리엄 노드하우스(William Nordhaus)는 201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소감에서 “시장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은 없다”고 말했다.

 

영국 정부의 2006년 “기후 변화의 경제학”에 대한 스턴 보고서(Stern Review)에도 비슷한 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기후 변화를 “극심한 시장 실패”로 규정했는데 배출 비용이 금전적 비용에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외부 효과의 비용이 가격 메커니즘을 통해 내부화될 필요가 있다. 가격이 올바르게 책정되면 시장은 기후 위기를 해결할 것이다.

 

물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는 시장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절망적으로 비효율적인지 보여주었지만, 자본주의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결론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맑스가 지적했듯이, 이는 그저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이란 사고에 반영된 지배적인 경제·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상의 주류는 이른바 외부 효과를 화폐 상품으로 전환하여 가격을 책정하고, 이를 통해 시장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 전기 자동차, 히트펌프, 탄소 포집, 재생 에너지와 같은 기술 개선을 탄소 가격 책정, 배출량 상쇄 같은 조치들과 결합함으로써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COP 회의들에 영향을 미쳤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녹색 자본주의의 첫 번째 계명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사회·경제적 관계를 보존하는 것이고, 두 번째 계명은 자본 축적을 위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다.

 

2022년에 출판된 아드리엔 불러(Adrienne Buller)의 「고래의 가치」(The Value of a Whale)에서처럼 “녹색 자본주의”는 이미 도전을 받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녹색 자본주의의 환상”으로, 녹색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신화를 훌륭하게 해체하고 있다. 불러는 미국 먼슬리리뷰 학파(US Monthly Review School)의 영향을 받았으며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와 사이토 코헤이(Kohei Saito) 같은 작가들이 개발한 “대사 균열”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이토 코헤이의 최근 책 「인류세의 자본론」(Capital in the Anthropocene)에 대해서는 우리의 웹사이트에서 논평한 바 있다.13) 물론 불러는 이 학파를 비판하는 저자들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불러의 책은 보편적 복지를 제공하는 인류 공동 소유권을 지닌 대안적인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불러는 이것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의미할지 모른다고 결론 내린다. 그런 세상은 코뮤니스트 세계처럼 들린다. 우리는 그것이 확실히 자본주의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며, 더 나아가 그러한 세계는 사회 혁명이 자본주의를 파괴한 후에만 건설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불러의 책은 이 중 어느 것도 다루지 않고 녹색 자본주의 추종자들이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지배적인 신화를 상세히 폭로할 뿐이다.

 

자연과 고래

 

고래를 상품화하고 가격을 매긴 후 고래에 대한 투자를 촉구하고, 결국 고래를 투자 자금에 포함시키려는 IMF의 시도는 녹색 자본주의의 전체 신화에 대한 음울한 은유를 제공한다. 고래 한 마리당 200만 달러라는 IMF의 가격은 고래가 일생 동안 격리하는 이산화탄소의 양―탄소 배출 가격으로 값을 매긴다―과 고래가 유치하는 관광 비용을 기준으로 계산되었다. 그런 다음 IMF는 고래 개체수가 포경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경우에 전체 고래 개체수가 격리할 수 있는 총 탄소량을 계산했는데 이는 연간 17억 톤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 단계는 사람들이 고래 보존을 위한 기금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비용-편익 분석을 수행하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 놓인 기본 전제는 자연에는 가격이 부여되어야 하고, 탄소에는 가격이 부여되어야 하며, 이러한 것들은 시장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투자를 위한 펀드를 조성하고 거래하여, 이를 통해 선물과 파생상품이 창출되어 투기와 헤징(연계 매매)의 장이 열리도록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의 우스꽝스러운 특성은 그것이 고래는 물론 인간이 살고 있는 생물권(biosphere)의 나머지 부분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해안으로 떠밀려온 많은 고래가 해양 엔진과 음파탐지기에 의해 귀가 먹고 중금속과 기타 독소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데, 이런 물질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바다에 쏟아 부은 것으로 독성 폐기물 처리장에서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 우화의 실제 순서는, 불러가 지켜보고 있던 실제 고래가 탄소를 격리하고 관광객을 끌어들인 후 관광객이 지켜보는 동안에 선박의 프로펠러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불러에게 고래는 녹색 자본주의의 파수꾼으로서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파괴적인 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기온과 날씨 패턴은 지구 가열의 가장 명백한 효과이지만, 고래의 우화가 보여주듯이 탄소 배출과 생물권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연관성이 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생태학적 위기도 심각하다. 스톡홀름 회복력 센터(Stockholm Resilience Center)는 지구 시스템의 안정성과 회복력을 규정하는 프로세스인 “지구 위험 한계선(planetary boundaries: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침범해선 안 되는 영역들―옮긴이)” 9개 중 6개를 이미 넘어섰다고 주장한다.14) 한계선을 넘으면 갑작스럽거나 돌이킬 수 없는 대규모 환경 변화가 발생할 위험이 높아진다. 그 한계선들은 우리가 속한 생태계와 사람들에 대한 위험을 증가시키는 중요한 임계값을 나타내며, 그것들은 지구가 지난 10,000년 동안 홀로세 간빙기 상태에 남아 있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 한계선들은 복잡한 생물물리학적 지구 시스템 내에서 상호 연관된 과정들이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기후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증대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 대신에 한계선, 특히 기후와 생물 다양성 손실의 상호 작용을 이해하는 것이 과학과 실천의 핵심이다. 생물권의 변화는 동물뿐만 아니라 우리가 꽃가루받이를 위해 의존하는 식물과 곤충의 멸종률을 크게 증가시키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한계선을 계속 넘어선다면 세계는 인간이 가한 영향으로 정의되는 것으로 과학자들이 “인류세”라고 명명한 새로운 지질 시대에 접어들(이미 진입했을 수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인류는 자연의 일부이며 호모 사피엔스의 거의 전체 역사 동안 인류는 자연과 지속 가능한 관계 속에서 살아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지구를 지배하는 시기에 이르러서야 인간 활동이 그처럼 파괴적인 차원을 띠게 되면서, 현재의 환경 붕괴, 즉 지질학적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인류세”라는 용어가 이를 포괄하는 규모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새로운 시대의 발전은 호모 사피엔스를 포함한 새로운 대량 멸종 시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지구 위험 한계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모든 경건한 COP 결의안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계속되고 있는 환경 파괴의 목록을 읽는 것은 우리를 암울하게 만든다. 한 가지 사례는 중요한 탄소 흡수원인 산림의 파괴이다. 2019년에는 영국 면적보다 더 넓은 3,600만 에이커의 산림이 벌채되었으며, 2020년에는 팬데믹 기간이었음에도 산림 파괴가 50% 더 증가했다. 석유 기업들은 1.5℃ 온난화 목표 달성을 위한 방법으로 브라질 크기만큼의 산림 상쇄를 필요로 하는 실행 불가능한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녹색 자본주의 단체(green capitalist fraternity)가 극히 선호하는 또 다른 프로젝트는 교통수단을 전기 자동차로 전환하는 것이다. IEA는 2030년까지 2억 3천만 대의 전기 자동차가 도로를 달릴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배터리 제조에 필요한 리튬, 니켈, 코발트, 카드뮴, 구리 등 광물 채굴과 정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 가스 배출량과 생물권 파괴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모든 광물의 추출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 수치는 다음과 같다. 2002년과 2015년 사이에 광물 추출량이 53% 증가했는데, 이는 1900년 이후 전체 광물 추출량의 33%가 이 기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동차 소유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는 것은 필요한 에너지 생산량을 증가시킨다. 녹색 자본주의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자연에 가격을 매기고 생물권 파괴의 해결을 시장의 힘에 맡기는 것을 해결책으로 간주한다. 한 연구팀은 1996년 생물권의 총 가치가 33조 달러에 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더 최근에 이루어진 세계 경제 포럼의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GDP의 50%가 자연에 매우 또는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세계 생태계의 가치가 44조 달러로 증가했다고 한다! 불러가 말한 것처럼, 복잡하고 서로 연결된 생태계에 가격을 매기는 것은 말도 안 되며 생태 위기를 해결할 수도 없다. 물론 부르주아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을 가상적으로 자산으로 묶어 펀드를 만들어서 자본을 동원하고 이 펀드에서 거래, 투기, 파생상품 등을 허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펀드는 일반적으로 윤리, 사회, 지배구조(Ethical, Social and Governance: ESG) 펀드로 알려져 있으며 그 규모가 매우 커졌다.

 

ESG 펀드

 

이러한 펀드를 통해 금융 자본은 녹색 자본주의에 대한 소유권과 통제권을 축적할 수 있다. 2020년에는 1조 달러 이상이 이 펀드에 투자되었으며,15) 이 펀드의 자산 관리자들은 자본주의가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을 구체화하고 있다. 거대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 Rock)은 녹색 자본주의의 선도적인 금융 세력으로 부상했다. 또 다른 사례로 프랑스의 거대 은행인 BNP 파리바(BNP Paribas)는 생태계 복원 펀드를 출시했다. ESG 펀드는 자연의 영역을 거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ESG의 기본 이념은 자연의 공공재에 대한 지배권이 민간 자본에 넘겨져 투기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펀드는 기후 위기가 자본 가치에 미치는 재정적 영향을 줄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어떤 것에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질문해야 할 것은, 이 펀드들이 배당금을 지급하는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고래를 보존하거나 숲을 보호한다고 해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는 것은 아니다. 이 펀드들이 동원하는 가치는 아마도 탄소세, 탄소 상쇄에 대한 지불 등을 통해 생산적인 경제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금융화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전체의 수익성을 고갈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만, 물론 금융자본가들은 이익을 얻는다.

 

탄소세

 

탄소세는 녹색 자본주의의 기본 요소이다. 탄소세는 탄소 배출량 1톤마다 금전적 가치를 매겨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기후 위기를 통제하기 위해 자본주의 시장을 이용하려는 최초의 시도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완전히 실패했다. 모든 소비자가 부담하는 정액세는 여러 나라에서 시도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종류의 과세의 결과는 부르주아지보다는 소득의 더 많은 부분을 에너지에 지불하는 노동 계급에게 더 큰 불이익을 주고, 따라서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는 사실이다. 2008년 EU가 채택한 또 다른 제도는 배출량 규제(cap and tax: 직역하면 ‘상한과 세금’―옮긴이) 제도였다. 산업 또는 서비스에는 허용량이 주어지고 허용량을 초과하는 배출량에 대해서는 세금이 부과된다. 상한선은 정부가 설정하고 초과 이산화탄소에는 정부가 정한 세율로 세금을 부과한다. 상한에 의해 허용된 미사용 허용량은 탄소 시장에서 거래하거나 상쇄를 구매하여 상쇄할 수 있다. 이 제도를 통해 자본가 계급은 상한선과 세율을 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제도는 대규모 배출업체들이 너무 유리한 상한선을 설정하고 그것을 거래하게 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대규모 배출업체들은 이 계획이 시작된 이래로 배출권을 거래하여 500억 유로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오염자가 비용을 지불하는 대신 오염자가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16) 현재 톤당 평균 가격은 40달러에서 80달러 사이지만 IMF에 따르면 2020년에는 평균 가격이 톤당 2달러였다. 이렇게 낮은 가격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려는 인센티브를 감소시킨다. 일부 과학자들은 1.50℃를 달성하려면 가격이 톤당 14,300달러로 책정되어야 한다고 추정하는데, 이는 가격 책정 시스템 자체가 결코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탄소 가격은 이윤을 유지하고 축적을 계속하려는 거대 자본의 욕구를 반영한다. 영국석유회사(BP), 쉘, 엑손, 미국석유협회(American Petroleum Institute)는 모두 탄소 가격의 필요성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전 세계 주요 오염자가 5년 동안 추진했던 탄소 배출 방지 정책을 이제 와서 뒤집은 것은 이제 그 정책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물권과 마찬가지로, 오염에 대한 권리를 설정하여 사고팔고 금융 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되면 새로운 투기 분야가 열리게 된다.

 

탄소 거래를 통해 창출된 상쇄 시장은 근본적으로 배출량 감축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 규모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2021년에는 분명 10억 달러의 가치가 있었다! 오염자가 숲, 이탄 습지, 그리고 유사한 탄소 흡수원을 구매하여 오염을 상쇄함으로써 탈탄소화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시장은 규제가 거의 없으며 산림을 벌채하지 ‘않’거나 산림이 불에 타지 않도록 방화선을 치우는 것만 거래 가능한 상쇄로 취급할 수 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오염자에게 상쇄를 거래하는 중개인 산업이 생겨나서, 산림이나 기타 흡수원을 보유한 국가로부터 상쇄 가격을 대폭 깍아버렸다. 보기를 들어, 이러한 상쇄를 통해 토탈(Total: 국제 석유자본―옮긴이)은 1,700만 달러 규모의 가스 운송 선적을 탄소 중립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쇄로 인해 지구 남쪽에 있는 국가(빈곤 국가―옮긴이)에서는 토지가 몰수되고, 단일 종 농장이 설립되고, 지역 사회가 이주하는 결과가 초래된다.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기금

 

수년 동안의 COP 회의들에서 부유한 국가들은 가난한 국가들이 녹색 에너지로 전환하고 경제를 탈(脫)탄소화하는 것을 돕기 위해 1,000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이것은 지구 북쪽(부유한 지역―옮긴이)의 주요 국가들이 자선 사업으로 선보인 것이다. 하지만 1,000억 달러라는 목표액은 결코 달성되지 않았으며, 제공된 자금은 자선이 아니었다. 2021년에는 800억 달러가 조성되었지만, IMF의 계산에 따르면 이 기금의 80%가 대출이며 이 대출의 40%는 시장 이자율보다 높은 이자율이었다. 사실상 이것은 가난한 국가로부터 부유한 국가로 가치가 이전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부채, 값싼 노동력, 그리고 유기적 구성이 높은 자본과 낮은 자본 간의 무역을 통해 주변부 국가들에서 자본주의 핵심 국가들로 부를 이전하는 일반적인 과정의 일부이다. 농산물, 원자재, 광물 같은 주변국의 수출품은 노동력이 저렴하고 환경 비용이 포함되지 않아서 여전히 낮은 가격으로 남아 있다. 유엔 무역개발회의(UNCTAD)에 따르면 2000년에서 2018년 사이에 16개 저소득 국가에서 부유한 북부 경제권으로 연간 4,400억 달러가 유입되었다.17) 가난한 국가들이 새로운 자산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은 부채 상환을 통해 갚아야 하는 채무부담보다 훨씬 적다. 1980년대 이후 IMF는 자본 흐름의 자유화, 공공 자산 민영화, 규제 완화를 포함한 구조 조정 프로그램을 대출 조건으로 부과해 왔다. 그 결과는 이들 국가를 북부(부유한 지역―옮긴이) 자본에 개방하는 것이었으며, COP 기금은 기본적으로 이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자본주의적 해결책은 없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 생산 체제인 한 기후 위기나 그로 인한 생태 위기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이 체제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 체제는 이윤을 위해 생산하며, 이는 반드시 지속적인 자본 축적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결국 지속적인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는 에너지 소비의 증가를 수반하여 탄소 배출, 환경 파괴, 그리고 지구가 보충할 수 없는 자원의 소비를 초래한다. 이것은 환경 붕괴의 지름길이며 새로운 대량 멸종 시대로 이끌고 있다. 자본가계급의 상당 부분은 이제 이것을 이해하고 있지만, COP 회의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진로를 바꿀 수 없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체제의 논리에 갇혀 있다! 그들의 최근 대응 조치는 지구를 구할 만병통치약으로 녹색 자본주의의 미덕을 떠들썩하게 치켜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녹색 자본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이며 따라서 이 모든 문제의 연속일 뿐인데, 그 치어리더들은 이를 위장하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의 근본을 은폐하려고 한다. 우리는 녹색 자본주의의 기본 전제가 어떻게 자본주의 관계를 보존하고 자본이 기후 위기를 통제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본 축적을 위한 새로운 분야를 창출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들이 주변부 국가들로부터 더 많은 가치를 빨아들일 수 있게 하여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이 전략을 계속하면 사회적 붕괴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세계의 많은 부분이 삶에 적합하지 않게 된다고 해도, 자본주의적 생산, 이윤, 축적은 계속될지 모르지만, 현재 수준의 문명이 존재할 수 없는 시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르면 붕괴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을 것이다.

 

인간의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더 고도의 생산 시스템만이 우리가 따르고 있는 파국적 과정을 되돌릴 수 있다. 이것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이 나누어진 사회이며, 권력을 장악한 자본가계급은 죽을 때까지 싸우지 않으면 자신들의 부와 특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면 사회혁명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노동계급이다. 자본주의 체제 전체가 의존하는 모든 가치를 생산하는 계급으로서 노동계급의 지위는 체제 전체를 전복할 수 있는 영향력을 그 계급에 제공한다. 집단적 생산자 계급으로서 노동계급의 상황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사회화된 글로벌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를 통해 노동계급은 임금 노동, 국가, 화폐를 폐지하고 진정한 코뮤니스트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18) 이것이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온실가스를 없애고, 폐기물 생산을 없애고, 우리가 직면한 거대한 문제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을 실행하기 위한 세계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전 세계적으로 이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 전 세계 노동계급이 현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이것을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식을 지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적인 혁명적 정치 조직이 필요하다. 현재의 시급한 과제는 그러한 정치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혁명적 전망」(Revolutionary Perspectives) 19호에서 썼듯이,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 생산 체제로 남아있는 한 지구 온난화와 싸우는 사람들의 노력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후 위기에 맞서 싸우는 유일하게 효과적인 투쟁은 진정한 코뮤니스트 사회의 건설과 현 체제의 전복에 도움이 될 정치 조직을 설립하기 위한 투쟁이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은 바로 이것을 이루고자 투쟁하고 있으며, 자본주의가 지구에 가하는 끔찍한 피해를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19)

 

CP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

1. ipcc.ch

2. See: Chris Rapley, Five Times Faster: Rethinking the Science, Economics, and Diplomacy of Climate Change, youtube.com

3. ipcc.ch

4. Reported in Financial Times 5/12/2023.

5. Financial Times 3/12/2023.

6. mckinsey.com

7. irena.org – 2030-for-Successful-Energy-Transition.

8. Hannah Ritchie and Max Roser, CO2 and Greenhouse gas emissions. Quoted A. Buller in The Value of a Whale, p.188.

9. Financial Times 19/12/2023.

10. fossilfueltreaty.org

11. Financial Times 16/12/2023.

12. theworldcounts.com

13. leftcom.org

14. stockholmresilience.org.  6가지는 다음과 같다. 질소와 인 생화학적 과잉 유출, 담수 변화, 토지 시스템 변화, 생물권 보전, 이산화탄소 농도와 복사 강제력을 포함한 기후 변화, 신물질.

15. A. Buller, The Value of a Whale, p.152.

16. A. Buller, The Value of a Whale, p.60.

17. UNCTAD 9/12/2019. Quoted A. Buller, The Value of a Whale, p.199.

18. 이것은 임금 노동, 화폐, 착취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국가가 통제하는 자본주의의 한 유형이었던, 러시아에 존재했던 국가 자본주의 시스템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19. leftcom.org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4-02-01/cop28-and-the-myth-of-green-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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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좌파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지지는 자본주의 독약이다 - 삼키지 말자

좌파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지지는 자본주의 독약이다 - 삼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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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7일, 민간인에 대한 하마스의 잔혹한 공격과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초토화 대응으로 촉발된 가자지구 전쟁으로 인한 위기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주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인 자본의 좌파 단체가 동원되었다. 이들의 해결책은 약간 다른 방향에서 나왔지만,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지지하면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운다는 점에서는 거의 같다. 이런 식으로 좌파가 지배계급을 위해 하는 '주요' 역할은 노동자들이 자본의 끝없는 전쟁(즉,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느끼는 진정한 혐오감을 은폐한다. '억압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라는 구실로 노동자들이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도록 끌어들인다. 이들은 민족주의나 '피억압자 운동'에 대한 지지를 얻으려고 하지만, 그들의 근본적 입장은 노동자 운동의 기본 원칙인 국제주의, 즉 '노동자에게는 지켜야 할 나라가 없고, 국익도 없다'는 구호에 맞지 않는다. 코뮤니스트좌파는 이 전쟁에 대해 분명한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하며 양측을 모두 비판했고, 아나키즘 일부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코뮤니스트좌파와 같은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대부분 좌파는 교전 세력의 군사 파벌 뒤에 노동자를 동원하고 노동계급이 본질적으로 국제적으로 단결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자본주의 테러를 응원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당(SWP)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이미 사회주의노동자당(이하 SWP)의 입장과 하마스와 그 잔학행위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1]에 대해 살펴봤지만, 이 단체의 규모와 상태에 대한 중요성을 고려해 조금 더 살펴보자면, "제국주의 전쟁과 폭력"(「사회주의노동자」, 23.12.4)이라는 기사에서 실제로 "자본주의 전쟁의 해결책은 어느 제국주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경쟁을 낳는 체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계급투쟁을 중심에 두는 국제주의적 견해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본주의에 어떻게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가? 라는 임무는 과연 무엇일까? SWP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피억압 민족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의미한다"라고 하는데, 이는 하마스의 살인자들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말하는 것이다! SWP가 제국주의 야망을 품은 지배계급을 지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60년대와 70년대 이후에는 현재 남아공[2]을 통치하고 있는 만델라의 아프리카민족회의의 살인 깡패들을 지지했고, SWP가 '피억압자'라 부르는 대다수 사람이 빈곤과 비참함에 빠져 있는 베트남을 스탈린주의적 공포의 철권통치를 통해 지배하며 미국과 중국 사이의 동남아시아 제국주의 책동에 완전히 편입된 베트콩을 지지한 바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SWP는 '피억압 인민'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하는 수많은 자본주의 살인 기구를 지지하고 연대와 지원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스스로 '반(反)제국주의자'라고 칭하거나 SWP가 호명하는 이 세력들은 야만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SWP는 소수 국가만이 제국주의이지만, 제국주의는 전 세계를 휩쓸고 ‘모든 곳에 둥지를 틀며’[3]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 또는 ‘피억압 민족’ 운동을 반드시 스스로 흡수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레닌의 제국주의, 민족해방 문제에 대한 과거 노동자 운동의 약점과 주저를 이용하거나 오히려 악용한다. SWP는 속임수를 쓰기 때문에 전쟁과 경쟁을 낳는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고 ‘대항’하려는 운동의 진영(프롤레타리아 운동일 수밖에 없는)에 속하지 않는다. 어린이들을 포함한 민간인 살해와 여성의 강간을 '정당화'하는 하마스라는 전쟁기구에 대한 지원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오히려 SWP는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자본주의의 중요한 병사 모집 수단 중 하나이다. 하마스 군사 및 정치 세력(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팔레스타인 '반제국주의' 단체들)은 실제로 '반(反)제국주의' 세력이 아니라 여느 민족해방 '운동'과 마찬가지로 강대국들이 곳곳에 배치한 비밀 기관과 군사 자산을 이용해 만들어낸 자본주의 국가 세력이다. 그들은 스스로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노동계급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와 탄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그들과 SWP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착취와 전쟁에 반대하는 계급투쟁을 벌이는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지 않고 SWP는 가자지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싸우는 것은 이스라엘과 그 후원자들을 짓밟아, 제국주의를 타격하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SWP의 '이스라엘 타격'은 반드시 이스라엘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도 포함한다. 최근 기사[4]에서 SWP는 "이스라엘 노동자들은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배제, 억압, 소외를 통해 이익을 얻게 된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착취로 얻은 이익 일부를 확보하고 있다... 개인은 시오니즘에서 벗어날 수 있고 때로는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스라엘 노동자들은 계급적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회주의자들은 시오니즘 테러를 종식할 수 있는 힘을 찾아야 한다. 그 힘은 바로 팔레스타인의 저항, 지역 전체의 노동계급이며 이스라엘에 자금을 지원하고 무기를 제공하는 국가들에 대한 항의 운동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SWP의 논리에 따르면 암묵적으로 이스라엘 노동자들은 10월 7일의 학살[5]과 같은 '저항 행위'로 공격당하는 것이 정당화할 수 있다.

 

미묘하게 자본주의 테러를 응원

 

나름 독특하게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SWP와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국제맑스주의경향」(International Marxist Tendenc, 이하 IMT)[6]은 일반적으로 하마스를 이스라엘 하수인(오랫동안 가자지구를 분할하고 통제하는 데 이용했다)으로 여기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스스로 방어할 권리’가 있음을 지지한다. IMT는 "그리스 코뮤니스트당과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투쟁: 필요한 논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 스탈린주의자(둘 다 자본의 좌파에 속한다)인 이 두 그룹 사이에는 서로 '동지애'가 넘쳐난다. 그리고 레닌과 제3 인터내셔널을 인용하는 등 진정한 '맑스주의' 단체임을 보여주려는 어설픈 언어 구사도 많지만, IMT는 SWP와 마찬가지로 결국 제국주의 요소를 지지하는 입장을 드러낸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 아닌’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하는 그리스 코뮤니스트당(KKE)을 ‘동지적으로’ 비판한 후, ‘진정으로 맑스주의적 입장’을 취하기 위하여 IMT는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이 팔레스타인 코뮤니스트 강령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KKE의 주장에 동의한다. '사회주의'와 '맑스주의'를 끝없이 외치면서도 '민족해방', 즉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승리할 때까지의 인티파다'가 자본주의 야만으로 추락이 아니라 사회주의로 가는 단계라는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다. IMT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와 함께 행진하자"며 "세계 인티파다를 위해 대담하게 투쟁하자"라고 말한다. 일련의 민족주의 봉기를 통해 세계혁명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트로츠키주의가 제국주의 세계를 어떻게 지지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과거 전투적이었던 사회당(Socialist Party)은 두 단체에 비해 가자지구 전쟁에 대해 별로 호의적이지 않고, 제국주의에 대한 지지를 다양한 민주적 미사여구로 감추고 있다. 20년 전 1차 걸프전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이 단체는 "어떻게 하면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멈추기 위한 운동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SWP의 '하마스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와는 다른 태도를 취하며 10월 이스라엘 공격에 대해 비판한다. ‘대신 사회주의 인티파다’를 요구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보다 "좌파적" 형태의 전쟁일 뿐이다. 실제로 사회당은 "민족해방 투쟁에 대한 지지가 필요하다고 동의한다"는 점에서 SWP와 맥락이 같은데,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지지에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회당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해방을 위해 민주적으로 조직된 방어위원회(투쟁)’에 의해 운영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며, 그들은 ‘사회주의 이스라엘을 따라 독립된 팔레스타인 국가’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한다.(SP 웹사이트). 우리는 민족주의에 대한 지지를 빨간색으로 채색하는 것에 속아서는 안 된다.

 

노동자자유동맹(AWL)은 전쟁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더 부드럽고’ 평화주의 어조를 취한다. 노동자자유동맹(이하 AWL)은 ‘노동자 통제’, 국가 소유권, ‘더 완전한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평화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접근 방식은 SWP의 호전성만큼이나 프롤레타리아 의식에 위험하다. AWL은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강령을 ‘사회주의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언어 왜곡을 하는 또 다른 그룹이다. 휴전과 이스라엘 인질 석방을 지지하는 AWL은 이스라엘에 무기 금수 조치와 군사 원조 철회를 요구하지만, 미국 밖에서 이스라엘이 가장 큰 미국의 무기 저장고 중 하나를 갖고 있다는 것 외에 무기를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단체는 "완전한 휴전, 평화, 두 개의 국가!"라는 웹사이트 제목의 기사에서 ‘민주적으로 조직화’하면 ‘사회주의 이스라엘과 함께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가 탄생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증가하는 평화 운동’을 지지한다. 이러한 평화주의는 항상 지배계급의 손을 들어주었고, 제국주의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인류를 위한 전망을 더욱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AWL은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이라는 구상을 내세우고 있다.

 

위에서 좌파들이 제시하는 가자지구 전쟁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은 전적으로 상호보완적이며, 실제로 현재 부르주아지가 만들어내고 있는 전쟁 열풍의 일부이다. ‘민족해방’과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전쟁기구 엔진의 일부인 제국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요소이다. 전쟁, ‘사회주의’, ‘맑스주의’에 대한 좌파의 일반적인 혼동과는 별개로, SWP와 IMT 같은 단체는 더욱 구체적으로 노동계급의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노동조합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SWP는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직장에서 진행하자"라며 ‘일터에서 행동하는 날’을 정하여 실행하려 한다. IMT는 ‘전쟁기구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로 무기가 흘러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파업을 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그러한 행동으로 ‘시오니스트 전쟁 노력이 무산될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고 노동자를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분파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이러한 모든 시도에 맞서 노동계급은 무엇보다도 명확한 계급의식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전쟁, 특히 오늘날 확산하고 있는 규모의 전쟁에서 부르주아지는 항상 인플레이션을 통해 노동계급을 더 많이 공격하고, 노동계급이 더 많이 희생하도록 요구한다. 여기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의 핵심은 노동자들이 지배계급과 그 국익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민족주의 또는 민족주의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는 요구는 계급투쟁의 근본적인 목표(민족국가의 파괴)를 약화하는 역할을 한다.

 

바분(Baboon)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2024년 1월 25일

 

<주>

[1] 「세계혁명」 398호, 하마스 학살을 정당화하는 SWP

[2] 아래 링크된 기사에서 ANC의 계급적 성격을 설명한다. 「세계혁명」 257호, 남아공의 파업 물결, ANC와 노조에 맞서다.

[3] 제국주의의 근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유니우스 팸플릿」을 참조하라, marxists.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이스라엘 노동계급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회주의 노동자」 16.1.24

[5] 이스라엘 노동계급을 단순한 '정착민'으로 치부하는 이 생각, 즉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진영에 대한 공개적인 공격은 결코 SWP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글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6] 「국제맑스주의경향」은 1970년대 전투적 좌파에 뿌리를 둔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트로츠키주의 조직이다. 이 단체는 35개국에 존재하며, 영국 지부는 「사회주의자 호소」를 발행하고 있는데, 이 단체의 구호는 "끝까지 인티파다"이다. 여기서 '끝까지'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국민을 의미한다.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7459/leftist-support-palestinian-nationalism-dose-capitalist-poison-dont-swallow-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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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레닌 사후 1세기...

레닌 사후 1세기...

레닌은 모든 코뮤니스트 투사에 모범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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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지는 항상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왜곡하고 그 안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을 악의적이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묘사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왔다. 부르주아지는 우리 못지않게 이를 잘 알아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기억에서 그들을 지우기 위해 과거의 위대한 혁명가들의 투쟁과 노동자 운동에 대한 공헌을 왜곡하거나 은폐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한다. 끊임없이 자본주의와 대결하는 우리 계급의 근본적인 무기 중 하나는 계급의식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혁명 이론과 맑스주의 이론, 그리고 투쟁의 교훈과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레닌이 사망한 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는 위대한 혁명가였던 레닌이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에 이론, 조직, 전략적으로 이바지한 부분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 공격이 예상된다.

 

레닌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왜곡

 

맑스가 대담하고 다소 파괴적인 철학자로 소개되지만, 그런데도 자본주의가 최악의 실패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공헌이 있었기 때문이라면, 레닌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시도에 참여하고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자본주의 기반을 흔든 사건에 참여했다. 많은 저서에서 레닌은 이러한 근본적 경험에 대한 위대한 흔적을 남겼다. 레닌의 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미래 투쟁을 위해서 교훈이 될 매우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10월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전,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 형식에, 정치, 전략적으로 모두 결정적 공헌을 했다. 그는 오늘날 혁명에 꼭 필요한 무기인 토론과 성찰하는 방법, 이론 수립에 이바지했다.

 

레닌은 부르주아지가 언제나 배출하는 것과 같은 “정치인”이 아니라 혁명 투사로서 노동계급에 헌신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부르주아지가 레닌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독재자, 반대자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만을 위해 억압과 공포를 즐겼다고 제시하면서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배계급은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 같은 노선이라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스탈린은 소련에 공포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레닌의 업적을 완성했고, 이는 레닌이 개인적으로 설계한 작업의 정점으로 여겨진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부르주아지는 뻔뻔한 거짓말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것 외에도 레닌의 오류를 다른 모든 것, 무엇보다도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고 극복할 수 있었던 토론과 해명 과정으로부터 고립시켜 레닌의 오류에 집착한다. 또한, 이는 세계혁명 운동의 패배라는 국제적 맥락에서 그들을 고립시켰고, 이로 인해 러시아혁명은 계속 진전되지 못하고 스탈린의 지배 아래서 단일한 형태의 국가자본주의로 후퇴하게 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필두로 한 좌파가 특히 자본주의 주변국의 민족해방 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잠재력에 대해 심각한 착각과 왜곡을 했던 레닌의 오류('가장 약한 연결고리' 이론)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신비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좌파들은 민족주의 구호와 한 제국주의 진영을 다른 제국주의 진영에 대한 지지를 통해 프롤레타리아를 제국주의 분쟁의 총알받이가 되게 하려는 전쟁 선동을 펼치기 위하여 이러한 오류를 활용해왔고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 이는 레닌이 아주 단호하게 방어했던 혁명과 국제주의 관점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자본의 집중이 코뮤니즘으로의 전환을 촉진할 것이라는 레닌의 신탁업과 대형 은행에 대한 잘못된 개념도 마찬가지다. 좌파들은 ‘소비에트’ 경제와 소련에서 야만적 착취가 자본주의의 사례가 아니었다는 거짓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은행과 대기업의 국유화를 요구하고 그에 따른 코뮤니즘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약대로서 국가자본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이를 이용한다.

 

하지만 레닌이 저지른 실수로 축소해서는 절대로 간단하게 레닌을 설명할 수 없다. 이는 그러한 실수를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선, 그들은 비판적 검토를 통해 노동자 운동을 위하여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닌에 대해 부르주아지가 가증스럽게 그리는 초상화 앞에서 레닌을 완벽하고 모든 것을 아는 지도자로 설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레닌은 끈기, 조직에 대한 통찰력, 신념과 전술 면에서 존경을 받는 노동계급의 투사였다. 지난 세기 초에 혁명적 발전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레닌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상황, 운동, 투쟁, 국제적 논쟁에서 일어나며, 이 당시에는 레닌이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에 아무것도 공헌하지 못했다. 맑스 역시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정치적 출현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행동하고 그 엄청난 업적을 달성할 수 없었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조직 건설에 헌신하고 전투적 에너지를 쏟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조건에서만 혁명적 개인이 자신을 표현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 레닌이 짧은 생애 동안 조직, 정치, 이론, 전략적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에 근본적인 공헌을 하고 유산으로 남긴 것은 바로 이러한 특별한 역사적 조건에서였다.

 

전사, 투사

 

학술적 지식인과 달리 레닌은 무엇보다도 혁명적 투사였다. 침머발트 대회1)에서 레닌은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확고하게 방어하고 1914년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제2 인터내셔널의 붕괴에 맞서 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유럽에서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국제주의의 불꽃을 살리기 위한 투쟁의 선봉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침머발트 대회에는 신념에 찬 국제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를 총알받이로 삼는 민족주의 광기에 맞서 싸우려는 레닌의 계획을 약화하고 평화주의 환상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이 참석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대표단 내에서 레닌은 당시 프롤레타리아트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의에 참석한 다른 경향과 타협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침머발트 대회 후에도 평화주의와 평화주의가 조장하는 위험한 환상을 단호하게 비판함으로써 당면한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계속해서 투쟁했다. 이러한 확고함, 이론적 연구와 논쟁의 대결을 통해 자기 입장을 강화하면서 자기 입장을 옹호하려는 결단력은 오늘날 모든 혁명적 투사에게 영감을 주는 핵심요소이다.

 

당 정신에 대한 방어

 

조직적인 측면에서 레닌은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를 뒤흔든 논쟁에서 큰 공헌을 했다.2) 레닌은 이미 1902년 당내 논쟁에 대한 기고문으로 발간한 소책자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당내에서 제기되고 있던 경제주의적 전망에 반대하고 대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 즉 혁명당의 전망을 내세우는 자기 입장을 개괄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멘셰비키가 옹호한 것처럼 혁명조직에 대한 느슨한 개념, 즉 '동조자'와 가끔 기여하는 자들의 집합체로 간주하는 것에 맞서 투쟁 정신에 이끌려 계급에 대한 헌신과 책임을 자각한 투사들의 정당이라는 자신의 전망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내에서 관철하기 위해 결단력 있게 투쟁한 것은 바로 2차 대회 때였다. 따라서 이 투쟁은 혁명당 성원은 개인적 충성심을 우선시하는 동료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 전체 노동계급의 공동 이익, 즉 공동 이익의 표명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 조직의 일원임을 명확히 하는 순간이었다. 노동자 운동이 '서클 정신'을 넘어 '당 정신'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투쟁 덕분이었다.

 

이러한 원칙을 바탕으로 볼셰비키 당은 전위 정당으로 조직되어 노동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이질적 이데올로기의 침입에 맞서 싸우며 10월 봉기까지 러시아에서 투쟁의 발전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내일의 당을 건설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이러한 원칙을 방어해야 한다.

 

레닌은 그의 저서 「일보전진, 이보후퇴」에서 제2차 대회의 투쟁을 돌아보며 인내, 끈기, 논증, 확신 등 이러한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을 페이지마다 보여준다.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믿는 것처럼 권위주의, 위협, 배제와 같은 방법이 아니다. 레닌이 남긴 방대한 양의 글만 봐도 그가 혁명적 사상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인내심과 단호한 논증, 즉 강요가 아닌 설득의 원칙을 얼마나 잘 옹호하고 실천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혁명적 관점에 대한 방어

 

1903년 대회 이후 14년이 지난 1917년 4월에 레닌은 망명지에서 돌아와 시대의 문제를 분명하게 하고 당을 장악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방법을 적용했다. 유명한 4월 테제3)는 볼셰비키 당이 부르주아 임시정부 방어에 매몰되지 않도록 강력하고 명확하며 설득력 있는 논거를 몇 문장으로 제시하고 제2의 혁명 단계를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그 글은 레닌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당을 위해 쓴 글이 아니라 당내에서 벌어진 토론에 대한 기고문으로, 레닌이 다수파를 설득하기 위해 쓴 글이었다. 이 글에서 레닌은 대중 내에서 소수당의 특성을 기반으로 한 전략을 정의하며, 이를 위해서는 토론과 인내심 있는 선전이 필요하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내심을 갖고 체계적으로, 끈질기게 설명하라". 이는 부르주아지가 계속해서 ‘피에 굶주린 독재자’로 묘사하는 모습이 아니라 레닌의 실제 모습이다...

 

레닌은 절대 강요하지 않고 항상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탄탄한 논리를 개발해야 했고, 개인의 교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 전체와 노동계급에 미래의 투쟁을 위한 무기로 전수하기 위해 이론적 숙달을 도모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접근 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혁명 이론 없이 혁명운동은 없다." 특히 중요한 저작 「국가와 혁명」4)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제공한다.

 

레닌은 4월 테제에서 2월 봉기 이후 등장한 국가에 대해 경고하고 이러한 국가에 단호하게 대항하는 혁명적 동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9월에는 이 주제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가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 성과를 바탕으로 논증을 전개하기 위해 「국가와 혁명」을 쓰기 시작했다. 「국가와 혁명」의 집필은 10월 봉기로 인해 중단되었고 끝내 마무리하지 못했다.

 

여기서도 레닌의 접근 방식이 드러난다. 부르주아지는 '천재성'과 '재능'에만 기반을 둔 타고난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을 좋아한다. 한편으로 레닌의 능력은 그가 방어하고 있었던 운동에 대한 깊은 헌신을 통해 설득한 덕분이었다. 그는 당내 권력을 이용하거나 배후에서 계략을 꾸며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기보다는 국가 문제에 대한 노동자 운동의 작업에 몰두하여 기존 국가기구를 단순히 인수하는 사회민주주의적 발상과의 단절에 찬성하고 이를 파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혁명가는 천재성만으로는 올바른 전략을 '발견'할 수 없으며, 상황의 위기와 계급 사이 힘의 균형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올바른 전략을 '발견'할 수 있다. 1917년 7월에 이것을 보여주었다.5) 4월 볼셰비키 당은 2월혁명 이후 등장한 부르주아 국가에 맞서 노동계급을 이끌기 위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외쳤다. 7월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대규모로 민정 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일,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성급하게 봉기를 하도록 유발하여 특히 볼셰비키에 대한 무제한의 탄압을 펼칠 수 있는 함정을 파 놓으려고 했다.

 

그러한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확실히 러시아의 혁명적 동력을 결정적으로 약화했을 것이며, 10월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점에서 볼셰비키 당은 노동계급에 공격을 주도할 때가 아직 오지 않았으며 페트로그라드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준비되지 않았고 지금 봉기를 하면 전멸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였다.

 

당면한 시점에 제시할 구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결정하는 두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이 어떤지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했지만, 페트로그라드에서 노동계급이 정부 전복을 열망하던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신뢰를 얻는 것도 필요했다. 이러한 신뢰는 강압, 위협 또는 어떤 종류의 '민주적' 장치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명확하고 심오하게 잘 논증하는 방식과 계급을 이끌 수 있는 능력으로 획득한 것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레닌의 역할은 확실히 중요했다. 1903년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창당부터 침머발트와 1917년 4월 테제를 통해 볼셰비키 당이 혁명의 각 단계에 맞는 역할을 맡게 되고,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에 코뮤니스트혁명의 진정한 등대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인내하며 투쟁한 레닌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르주아지는 항상 레닌을 권력에 굶주린 책략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거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한 사람으로 묘사하려고 할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이러한 관점에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혁명의 역사를 언제나 다시 쓸 수 있지만, 레닌의 삶과 업적은 이러한 조잡한 이념적 책략을 끊임없이 부정한다. 현재와 미래의 모든 혁명가에 레닌의 헌신, 맑스주의 이론과 방법 적용의 엄격함, 인류를 코뮤니즘으로 이끌 계급의 능력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은 레닌이 사망한 지 1세기가 지난 지금도 코뮤니스트 투사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한없이 풍부한 모범이 되고 있다.

 

GD

2024년 1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사진>은 1900년대 초의 당 기관지 「이스크라(불꽃)」이다. 레닌은 언제나 혁명신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

1. 침머발트(1915-1917): 전쟁에서 혁명까지, 「국제 평론」 44

2. 이번 글에선 이 투쟁을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볼셰비즘의 기원에 대해 작성했던 일련의 글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자 한다: 1903-4: 볼셰비즘의 탄생, 「국제 평론」 116, 1903-1904: 레닌에 대항하는 트로츠키, 「국제 평론」 117, 1903-1904: 볼셰비즘의 탄생, 레닌과 룩셈부르크, 「국제 평론」 118

3. 1917년 4월 테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간판, 「국제 평론」 89

4. 레닌의 「국가와 혁명」 : 맑스주의에 대한 놀라운 검증, 「국제 평론」 91

5. 러시아혁명 이래 80년: 7월의 날들과 당의 중요한 나날들, 「국제 평론」 90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7463/century-after-his-death-lenin-remains-example-all-communist-milit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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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호 ] '혼돈의 시대'인가,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인가?

'혼돈의 시대'인가,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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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우리는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이 발행하는 「혁명적 전망」 최신호(24호)의 사설을 공유한다. 사설에는 매체의 기사를 소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기사이고, 국제주의 관점의 정치적 지향에 동의하기에 「코뮤니스트」에 싣는다.

 

이번 호를 준비하기 시작한 이후 러시아 미사일이 소아과 병원을 공격했고, 이스라엘 폭탄이 가자지구 누세이라트(Nuseirat)에서 또 다른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기구(UNRWA) 학교를 무너뜨리는 등, 선거로 정신이 없는 올해에도 전 세계 최소 50개국에서 전쟁이 계속해서 생명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뉴스가 잇달아 들려왔다. 우크라이나의 '궤멸 작전'이나 가자지구의 참상은 황금 시간대에는 보도되지 않지만, 사선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비참함을 가져다준다. 보기를 들어 수단에서는 15개월 전부터 시작된 집권 세력 사이의 전쟁이 현지 및 타지 제국주의 열강의 지원으로 계속되고 있다. 15,000명이 넘는 실제 사망자 수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공동묘지는 현재 가득 차 있다. 여기서 특히 인도주의적 지원이 필요한 곳은 보건소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몇 달 동안 60건의 공격으로 의료 서비스의 70%가 무력화되었다고 한다. 제국주의의 전면전은 '부수적 피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가변 자본과 불변 자본 모두에서 파괴하는 것이 운동의 목표인 치열한 싸움이다. 지난 2월 유엔 사무총장이 말했듯이, 세계는 이제 전쟁이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무자비한 자유경쟁”을 의미하는 “혼돈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그는 심지어 “확고하게 정립된 메커니즘이 초강대국 관계를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냉전 시대와 달리 “오늘날의 다극 세계에서는 그러한 메커니즘이 사라졌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의 관찰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지만, 그의 해결책은 유엔이 평화를 위한 기구가 아니라 제국주의 사이 경쟁을 위한 또 다른 포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단순히 유엔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자는 제안에 불과했다. 더욱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현재의 추세를 이해하려면 다른 곳을 살펴봐야 한다.

 

즉, 우리는 사회의 물질적 기반으로 접근해야 하며, 이는 경제 상황을 심층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엔 사무총장보다 조금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냉전 시대에는 '핵 대치'가 전면전을 막은 주된 이유가 아니었다. 근본적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권을 차지한 두 강대국이 현상 유지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많은 가치가 파괴되었고 그 뒤에는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큰 호황이 이어졌다. 두 초강대국 모두 전면전을 통해 얻은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았다. 1970년대 초호황이 끝나고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이 위기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시도에 대한 노동계급의 저항이 일어나면서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과 같은 조직이 탄생했다. 거의 50년 전 창립 이래로 우리는 자본주의 발전의 모든 변화와 전환의 물질적 토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으며, 이에 대한 기여로 이번 호에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에 대한 시리즈 5장을 게재한다.

 

이는 세계화가 발생한 이유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세계 노동계급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한다.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서 포드주의 시대의 오래된 대규모 공장들이 소규모 단위로 대체되었고, 심지어 독점 기업조차도 서비스를 보조 기업에 위탁하고 있다. 이 새로운 계급 구성은 혁명가들에게 더 큰 도전을 의미한다. 일부 이론은 사건에 의해 추월당했다. 노동자들이 단순히 생산 단위를 장악함으로써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는 생디칼리스트와 평의회 코뮤니스트들의 생각은 안톤 판네쿡에 관한 비평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그 힘을 잃었다. 하지만 판네쿡이 옳았던 한 가지는 바로 노동계급 해방의 열쇠는 노동자의 의식에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초강력 투쟁으로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전복과 새로운 코뮤니스트 세계의 토대 구축은 전 세계 수백만 노동자의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한 강령을 중심으로 계급을 통합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국제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환경 파괴로 인한 인류 생존에 대한 위협과 오늘날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제국주의 전쟁이 일반화될 가능성을 고려할 때, 이는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과제이다. 판네쿡은 노동계급을 배신한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의 재앙을 겪으며 살았다. 1930년대 반(反)혁명 시기에 소련의 스탈린주의 정권이 국가 자본주의적 '맑스주의'가 화석화하면서 그는 '당'이 계급의 혁명적 의식 발전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고 '자발성'을 점점 더 신뢰하게 되었다. 그는 노동계급의 근원적 투쟁이 혁명 사상의 발전을 수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투쟁이 어떻게 시간이 지나도 유지될 수 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평의회(소비에트) 자체가 종종 정당에 의해 구체화하기는 하지만, 이념 사이 투쟁의 장일 뿐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당을 혁명 이전의 노동자 의식의 집단적 발산으로 보지는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계급이 투쟁의 역사를 통해 획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명확한 혁명 강령을 갖춘 조직화한 국제 정치기구가 체제 전복 투쟁의 필수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정부를 열망하는 정당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평의회의 임무이다. 러시아 노동자들이 역사적으로 발견한 대중사회를 운영하는 방법의 형태이며, 모든 구성원의 참여를 최대한 보장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여기서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라는 반동적 이데올로기(오늘날 많은 트로츠키주의자가 받아들임)를 선전하는 노동자의 가짜 친구들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자주적 투쟁을 방해하고 약화하기 위해 등장할 새로운 정치적 위험에 맞설 수 있는 인터내셔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이 틀 안에서 우리는 우선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모든 국가의 부를 생산하는 노동계급이 제국주의 세계전쟁 추진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세계적 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과 협력하여 전쟁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을 구축할 준비가 되어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에도 우리는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가와 동일시하는 것은 자본가들에게 항상 쉬운 선택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더 큰 전쟁을 위한 준비는 이미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준비 일부는 이념적이며, 이는 최근 유럽연합, 영국, 프랑스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반영되었는데, 유권자들의 '선택'은 군사적 대비를 강화하고 전 세계의 전쟁과 경제 위기의 희생자들이 '이질적인 가치'를 가져오는 것을 막는 최선의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정체성 정치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했다. 프랑스에서는 국민전선의 부상으로 북아프리카나 프랑스의 다른 옛 식민지 출신 프랑스 시민에 대한 인종차별적 공격에 청신호가 켜졌다. 한때 홀로코스트를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일축할 정도로 반(反)유대주의자였던 르펜의 당은 이제 이스라엘과 함께 이슬람주의에 맞서 싸우는 동료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배틀리(Batley), 듀스베리(Dewsbury) 등의 지역구에서 팔레스타인 민족 대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무슬림 유권자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수천 명의 백인 노동자들은 인종주의 개혁당에 표를 던졌다. 이러한 양극화는 수십 년 동안 지속한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이며, 오늘날 영국 성인의 거의 절반인 2,030만 명이 생존을 위해 신용대출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에서는 거의 3백만 명이 정기적으로 푸드뱅크를 이용하고 있다. 부유한 OECD 국가들 전반에서 실질 임금은 2021년 이후 하락했으며, 이는 1979년 이후 GDP 대비 임금이 오랫동안 하락한 것에 더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비참한 삶의 질이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추상적인 원인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민자나 무슬림, 유대인 등 희생양이 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게 얼마나 쉽고 저렴한 일인가?

 

하지만 계급 운동을 구축하는 데 있어 이것이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판네쿡에 관한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100년간의 반(反)혁명이 낳은 혁명 운동의 분열도 있다. 이는 스탈린주의자들처럼 '혁명적 패전주의'를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를 지지하는 명분으로 삼는 가짜 또는 선택적(파트타임) 국제주의자들을 양산할 뿐만 아니라, 정치 조직화를 위한 모든 시도를 '사기'로 보는 혁명가들 사이에서도 의심의 유산을 남겼다(카마트의 말처럼). 올바른 국제주의적 입장을 취해도 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레초(Arezzo) 회의에서 다른 모든 대표단은 일반화된 전쟁에 대한 우리의 우려가 과장되었다거나 “노동계급이 전쟁을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프라하에서 가장 큰 차이는 모범적인 행동(19세기의 '행동에 의한 선전')이 군국주의와 싸우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주로 아나키스트라고 해야 한다)과 자본주의를 중단해 전쟁을 멈출 수 있는 것은 혁명적 소수를 넘어 더 넓은 노동계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우리와 같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였다. 우리의 과업은 자본주의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에 대한 선전을 확산하는 것이며, 이는 나머지 노동계급에 도달할 만큼 충분히 광범위한 운동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신과 이러한 동기로 우리는 더 광범위한 계급 저항을 향한 구체적인 단계를 제공하기 위해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위원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했다. 이번 호에 보도된 프라하 국제 모임과 아레초에서 열린 소규모 모임에도 이러한 정신으로 참석했다.

 

더 넓은 계급을 위해 일하지 않고 정치 게임을 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경고로, 우리는 정치적 위기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으로 이어진 자코모 마테오티(Giacomo Matteotti) 살해 100주년을 맞아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의 기사를 번역했다. 당시 코민테른이 그람시를 수장으로 세운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은 반도 전역에서 들끓는 계급 운동을 소홀히 하고, 사회민주당 및 자유당과 함께 이른바 아벤티노(Aventine) 분리주의1) 라는 희극적인 의회 게임을 벌였다. 이에 따라 무솔리니는 몇 달간의 위기에서 살아남았고, 결국 1925년 1월 독재 정권을 선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안타깝게도 「혁명적 관점」 이번 호의 준비 중에 우리의 동지 올리비에(Olivier)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어 다소 늦게 발간하게 되었다. 올리비에는 2년여 동안 전립선암을 앓았고, 생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의 프랑스 지부인 「국제주의 혁명그룹」(GRI)의 설립을 위해 마지막 힘을 쏟았다. 그의 정치적 삶 전반에서 보여준 헌신과 결단력, 용기와 존엄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GRI의 동지들과 그의 동반자 프랑수아즈( Françoise), 그리고 가족에게 애도를 표한다.

 

2024년 7월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

사진: 유엔 사진/셰리프 사르한 (CC BY-NC-ND 2.0), flickr.com

 

<역자 주>

아벤티노(Aventine) 분리주의는 1924년 6월 10일 자코모 마테오티(Giacomo Matteotti) 의원이 파시스트에 의해 살해된 이후, 1924~1925년에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사회당, 자유당, 인민당 등으로 구성된 의회 야당이 의회에서 탈퇴한 사건이다. 이 분리주의는 고대 로마의 아벤티노 분리주의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항의 행동(비폭력적 반대)으로 무솔리니와 그의 국가 파시스트당이 전권을 장악하고 이탈리아에 파시스트 독재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4-08-10/an-age-of-chaos-or-of-deepening-capitalist-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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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즘: 자기 시대가 도래한 사상?

코뮤니즘: 자기 시대가 도래한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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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악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탈출구를 찾지 못하며, 투쟁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현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한 계급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레닌, 1910)

 

세계는 갈림길에 서 있다. 경제 위기, 전쟁으로의 질주, 생태 재앙, 사회 붕괴는 이미 전 세계 많은 사람에게 고통과 파괴로 가득 찬 미래를 예고한다. 가자지구, 레바논, 수단, 우크라이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경고의 역할을 하고 있다. TV를 켜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소셜 미디어를 확인할 때마다 새로운 공포가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낙담하기 쉽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묻지 않는 한 가지 질문은 '대안은 무엇인가?'이다.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도전은 운명의 장난이 아니며, 단순히 나쁜 개인이 저지른 잘못된 선택의 결과도 아니다. 이 모든 문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고 부르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적 관계의 산물인 같은 나무의 가지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욕구 충족이 아닌 이윤 추구를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인류가 국제적, 국가적, 심지어 대인관계 수준에서 내리는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이윤 동기이다. 물론 사회의 소수 일부 계층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발언권을 갖는다. 돈, 재산, 토지를 가진 사람들, 즉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이 실질적인 권력의 수단을 장악하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노동력을 팔 수 있을 뿐이며, 4~5년마다 투표를 통해 부자의 대표가 우리를 통치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는 강압과 수탈에 의해 확립된 체제이며, 모든 수준에서 치열한 경쟁과 착취, 억압이 그 특징이다.

 

20세기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주장했던 모든 사회가 때로는 파국적인 방식으로 체제를 재생산하는 가짜로 판명되었다는 사실이다. ‘사회민주주의’든, ‘국가사회주의’든, ‘실제 존재하는 사회주의’든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근본적인 특징(임금노동, 화폐 및 상품 생산)은 그대로 존재했지만, 정부의 개입이 강화된 조건에서 유지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모든 체제를 진정한 대안이 아닌 국가자본주의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나 코뮤니즘과 같은 용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용어는 인류가 노동의 산물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분배하여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국가가 없고, 계급이 없고, 돈이 없는 사회를 예고한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작동할 수 있도록 이윤을 창출하는 노동계급의 대중 운동만이 이러한 세상을 가져올 수 있다.

 

인간 사이의 관계가 착취와 억압의 형태를 취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자연과 서로 전쟁을 벌이며 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를 잘 알고 있다. 인류는 종으로서 약 30만 년 전에 출현했으며, 우리 존재의 대부분을 협력과 연대가 생존의 핵심인 국가가 없고, 계급이 없고, 돈이 없는 작은 사회에서 보냈다. 우리는 시대를 되돌릴 수 없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인류는 모든 최신 기술과 사회적 발전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새롭고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의식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우리는 이것이 현재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 체제 아래에서는 무엇보다도 이윤 추구가 가장 '합리적'인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매일 협력과 연대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때때로 이러한 행동은 사회를 변혁하려는 혁명 운동에서 보았던 것처럼 대규모로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코뮤니즘 또는 사회주의가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서 탄생한 진정한 계급 운동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맑스의 비유를 빌리자면, 계급 운동은 땅속을 파헤치고 파헤치다가 주기적으로만 표면에 나타나는 늙은 두더지와 같다. 때로는 너무 깊이 파고들어 자칭 혁명가들조차 희망을 잃거나 지름길을 찾기 시작하는데, 지배계급과 그 옹호자들은 계급투쟁이 끝났다고 선언하며 기뻐한다. 그러나 계급 사회가 존재하는 한, 계급투쟁은 다른 장소, 다른 시기에 새로운 형태로 계속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일시적인 승리일 뿐이다.

 

한 세기가 넘도록 자본주의 체제는 전복될 시기가 무르익어 왔으며, 수십 년간 점점 더 부패해가고 있다. 오늘날의 제국주의 국가는 “토마스 홉스의 환상이 어린이 장난감처럼 보이는 새로운 리바이어던1)”(부하린, 1915)과 같다. 그러나 그들은 이윤 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선택지가 부족하다.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분석 방법으로 이해되는 맑스주의는 상품 사회에 대항하는 무기이다. 이를 통해 우여곡절과 갑작스러운 단절도 인류 역사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점차 그러한 시기에 가까워지고 있다. 문제는 ‘노동계급이 진정한 사회 세력으로 역사의 무대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역사가 전하는 잠자는 거인으로 남을 것인가’이다.

 

 

다이즈바스(Dyjbas)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ommunist Workers’ Organisation)

2024년 12월

 

<역자 주>

리바이어던(Leviathan)은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1651년 출간한 책으로, 원제는 「리바이어던, 즉 교회 및 세속적 공동체의 질료와 형상 및 권력」(Leviathan, or 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이다. 홉스는 사회계약을 통해 창출한 주권자를 지상의 절대자로 상정했다. 개인들은 신과 같은 주권자에게 모든 권리를 넘겨주며 주권자는 이 넘겨받은 권리를 하나로 모아 행사한다. 홉스는 그렇게 등장한 절대주권자를 <구약성서>의 바다 괴물에 빗대 ‘리바이어던’이라고 불렀다. 이 리바이어던으로 홉스가 가리킨 것이 국가, 더 정확히 말하면 국가의 체현자인 군주다.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5-01-04/communism-an-idea-whose-time-has-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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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호]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박영근 작품상을 반납합니다

조성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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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혜영 시인은 자신의 시 「미투」를 통해 고 박영근 시인이 행한 성폭력 사건을 폭로했습니다. 저는 제5회 박영근 작품상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제 알았으므로 조혜영 시인에게 미안하고 몰랐으므로 18년이 넘도록 홀로 고통을 견뎌왔을 조혜영 시인에게 더욱 미안합니다.

 

지금 제가 시인으로서 지켜야 할 명예가 있다면 피해 생존자 조혜영 시인의 외침을 경청하고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함께 삶의 체온을 느끼는 것입니다.

 

“박영근 작품상 반납을 고민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글은 조혜영 시인의 요청에 대한 제 화답입니다. 일생일대의 결단, 놀라운 용기를 보여준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저의 지지와 격려입니다. 문단 내에서 그녀의 삶이 안전하게 보장되고 노동자 시인으로서의 긍지가 지켜지기를, 상처가 아물어 치유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기원입니다.

 

1. 박영근 작품상을 반납합니다

 

조혜영 시인이 시집 발간 이후 정말 오랜만에 연락했습니다. 시집을 보내줄 주소를 요청하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요?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해줄 ‘이 한 사람’이 얼마나 절박했을까요? 저는 조혜영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줄 수 있는 ‘이 한 사람’이 되고 싶고, 우리가 조혜영 시인의 ‘이 한 사람’이 되자고 제안하기 위해 박영근 작품상을 반납하고자 합니다.

 

2.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

―조혜영 시인이 고발한 미투 사건 성격 규정

 

“석바위 사거리 수(水)다방에서/하룻밤만 자주면 문단에 데뷔시켜주겠다며/성 상납을 요구하던 사람/유명한 문예지에 작품을 실어주고/등단시켜 시인으로 만들어주겠다며/돈 2백만 원을 요구한 유명했던 노동 시인//그 유명했던 시인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여전히 그를 기억하고/그의 문학을 연구하고/그의 문학상을 만들어 후배를 양성하고/양지바른 공원에 시비를 세워/해마다 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진행된다/꽃다발을 들고 시비 앞에 줄지어 서서/활짝 웃는 많은 문인을 본다//그를 알았거나 알지 못했거나 가리지 않고/그의 시비 앞에 모여 묵념하고/시대의 진정한 노동자 시인을 칭하며/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그의 시로 만든 노동가를 목청껏 부른다/그의 시와 문학을 연구하는/새파란 젊은 대학원생도/그의 시비 앞에 머리를 숙인다//나는 그의 시비 앞에 차마 침을 뱉을 수 없어/나는 그의 사후 미투를 한다/나는 그의 기일마다 유별나게 흥분을 감추지 못해/나는 해마다 그를 고발한다.”(조혜영, 「미투」, 『그 길이 불편하다』, 푸른사상, pp. 66-67)

 

아프고 아픈 시입니다. 시인은 시에 자신의 운명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영근 시인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사건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지만,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을 ‘시’로 기록한 조혜영 시인의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피해 생존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야말로 진실에 다가가는 열린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 「미투」를 읽은 저녁, 마음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뒤척이며 조혜영 시인이 겪었을 고통의 뿌리를 명료하게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성폭력이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성적 언동으로 상대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여성가족부,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 2021.7.)

 

“성폭력이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한 불쾌한 성적인 언사, 몸짓, 신체적 접촉, 추행, 강간 등 성적 자율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며, 법적으로 예시된 이외에 다음의 내용도 포함된다. 1. 개인의 성적 자율권 및 성정체성을 침해하는 모든 언어적, 정신적, 물리적, 환경적 폭력행위. 2. 성적 호의를 조건으로 타인의 경력, 급여, 보직, 고용 등에 영향을 미치거나, 기타 일방적으로 만남이나 교제를 강요하는 행위.”(「민주노총 성폭력, 폭언, 폭행 금지 및 처벌 규정」)

 

문단에 데뷔시켜준다고 하룻밤 잠자리를 요구하다니요. 유명 문예지에 등단시켜준다고 금품을 요구하다니요. 고 박영근 시인은 문단 내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조혜영 시인의 의사에 반하는 하룻밤 잠자리를 요구함으로써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습니다. 국가기구인 여성가족부에서도, 제가 속한 민주노총에서도 박영근 시인이 행한 행위를 ‘상대방의 의사에 반한 성적 자율권을 침해하는 행위, 즉 성폭력’이라고 명료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작가회의 회원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작가회의의 성폭력 규정은 모르지만, 한국작가회의가 시민사회의 일부라면, 국가기구도 인정하는 성폭력 개념을 부정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조혜영 시인이 시 「미투」에서 고발한 사건의 성격을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성폭력’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으로 부르고자 합니다. 이러한 호명은 피해 생존자 삶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성폭력 가해자가 오해의 여지 없이[!] 우리가 아는 박영근 시인임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박영근 시인을 아는 사람 중 누구는 “그게 무슨 성폭력이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고 성폭력은 인정하나 사건명에서 박영근 시인의 이름은 빼자고, 시끄럽게 하지 말고 문단 내에서 조용히 마무리하자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부정하고 싶거나 머뭇거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죽은 박영근 시인이 저지른 잘못을 살아 있는 우리가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박영근 시인이 살아 있는 우리에게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떠넘겼듯이 우리도 다음 세대의 후배들에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떠넘겨서야 되겠습니까? 사건의 성격을 명료하게 규정하고 구체적으로 평가하며 피해 생존자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사려 깊게 함으로써, 기만과 허위의 우상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박영근 시인을 문학 앞에 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몰랐고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 앞에, 고발 이전의 고통보다 고발 이후에 더 큰 고통을 맞이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조혜영 시인은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을 고발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저는 그 마음을 먼저 헤아립니다. 자신에게 성폭력을 행한 자가 “시대의 진정한 노동자 시인”으로 칭송되는 그 기만과 허위가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있음을 직시합니다.

 

어떤 일이든 이름을 바로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봉책이 아니라 해결의 수단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공론의 무대에 서는 출발점. 조혜영 시인의 용기 있는 결단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의 심연을 드러내 주어야 합니다.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이라는 명료한 규정으로부터 문제 해결의 수단을 내와야 합니다.

 

3. 더듬더듬 해답을 찾아가는 몸짓을 보고 싶습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저는 여성들이 자신의 상처와 피해를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했던 시기, 이 땅에 성폭력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대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피해 생존자와 작은 공동체들의 고통스럽고 끈질긴 투쟁으로 이 땅에 성폭력 개념이 구성되고 확장해온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 반성폭력 운동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살고 투쟁하며 시를 써오는 동안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피해 생존자의 고통을 제 안에 들여 앓음으로써 제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일상은 반혁명이었던, 정치적 기형의 삶을 겨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조금은 더 인간다워질 수 있었습니다.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은 과거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뒤엉켜 있습니다. 박영근 시인이 사망했기 때문에 원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성폭력 사건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조혜영 시인도 살기 위해서 잊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처가 덧나고 악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시 「미투」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그의 문학을 연구하고 그의 문학상을 만들어 후배들을 양성하고 양지바른 공원에 시비를 세워 해마다 그를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꽃다발을 들고 시비 앞에 줄지어 서서 활짝 웃고 그의 시비 앞에 묵념하고 그의 시로 만든 노동가를 목청껏 부르며 시대의 진정한 노동자 시인으로” 박영근 시인을 칭송하는 것이 그녀가 보기엔 기만과 허위였기 때문입니다. 그 기만과 허위를 매년 목격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을 파괴하는 고통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고통을 헤아리는 자리에 문학은 있었고, 덧난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이 여전히 문학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해야 하는 일은 덧난 상처가 아물 수 있도록 그녀의 고통을 헤아리고 사려 깊게 배려하는 것입니다. 시인인 제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박영근 작품상을 반납함으로써 그녀의 용기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혜영 시인의 시집 『그 길이 불편하다』를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세상을 보는 시선이, 참 순정한 사람이구나. 박영근 시인이 훼손한 “시대의 진정한 노동자 시인”으로 살아내기 위해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전투를 치르고 있구나. 그리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데, 조혜영 시인이 자신의 고통을 드러냄으로써 시인 조성웅의 명예도 회복시키려 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참 고맙고 고마운 일입니다.

 

조혜영 시인에게 곁을 내주면서 맞이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있습니다. 제가 반성폭력 운동에서 경험했던, 피해 생존자를 향한 가혹하고 잔인한 말과 행동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미 부끄러움조차 사라진 시대에 어떤 말과 행동이 비수로 날아올까 긴장됩니다.

 

성폭력 사건이 고발되었을 때, 누구나 당황하고 안절부절못했습니다. 가해자들이 믿고 신뢰하던 대표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격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피해 생존자의 상처보다 자기 이해관계가 먼저이고 피해 생존자의 고통보다 조직의 안위가 먼저였습니다. 예외 없이 가해자 살리기 호위무사들이 등장하고 피해 생존자에 대한 체계적인 비난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난의 목적은 단 하나, 피해 생존자를 고립시키고 지쳐 쓰러져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동자 투쟁 앞에 피해 생존자의 고통은 침묵하고 참아야 하는 것으로 강제되었고, 조직 방어 논리 앞에 피해 생존자의 외침은 빠르게 축출되어야 했습니다.

 

예상하건대, “윤석열을 탄핵해야 하는 엄중한 정세에 조·중·동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짐짓 문단을 걱정하는 듯한 자들의 말을 경계합니다. 피해 생존자의 목소리를 삭제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문단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녕, 우리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고 성찰하여 극복하는 수단을 함께 찾음으로써 적들의 공격과 조롱에 맞설 수는 없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이 자본주의와 다르게 살기 시작함으로써 적들을 부끄럽게 하고 두렵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아, 정말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30년이 넘는 지난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로 ‘성폭력 사건 처리 규정’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매뉴얼을 과신하거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규정은 만능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종합해 피해 생존자의 치유를 지원할 뿐만 아니라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한, 미완의 규정이기 때문입니다.

 

피해 생존자의 시간에 밀착해 섬세하게 돌보지 않으면 정무적이고 사무적인 사건 처리 과정, 치워야 할 물건처럼 서둘러 치워버리는 형식적인 과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피해 생존자의 시간과 분리되어 그녀의 일렁이는 다층적인 감각으로부터 멀어지고 피해 생존자의 고립감은 깊어집니다. 집행 단위와 피해 생존자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고 서로 상처를 더하기도 합니다. 저는 ‘성폭력 사건 처리 규정’에 따라 피해자의 요구를 반영하고 사건 처리 과정을 다 밟았다고, “자 이제 다 치유됐습니까?”라고 물을까 봐 겁이 납니다. 치유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해 생존자가 관계망 내에서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안전지대, 정서적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공동체가 구성되어야만 치유는 지속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치유의 공동체는 관계의 바닥을 뒤집어엎는 집단적 성찰을 통해서만 오겠지요. 훈육된 습성을 끊어내기 위한 고통스러운 투쟁의 단계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드물고 귀한 관계론이겠지요. 쉽지 않겠지요. 그렇다고 포기하겠습니까? 조혜영 시인의 치유를 바란다면 우리 스스로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 공론화 이후 문단 내에서 작지만 귀한 공동체가 구성될 수 있을까요? 저는 함께 가보자고 제안하고 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소위 문단이라는 곳에 속해본 적이 없고, 또 조혜영 시인이 거주하는 인천 지역에서의 관계망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요?

 

저도 정답을 모릅니다. 다만 피해 생존자의 곁에서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더듬더듬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더듬더듬 해답을 찾아가는 몸짓을 보고 싶습니다. 알았으니 미안하고 몰라서 더 미안하다고 조혜영 시인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문자가 아닌 우리가 촉감하는 ‘시’가 되고 싶습니다.

 

올해는 김남주 시인 30주기입니다. 김남주 시인은 제게 “혁명하는 사람, 그가 시인”(김남주,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창작과비평사, 1995, p. 204)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젊은 날, 이 가르침을 따라 살았습니다. 나이 들어 낡아가고 있지만, 조혜영 시인의 곁을 지키는 것이 제가 지금 행하고 있는 하나의 혁명입니다.

 

4. 우리들의 치유 보고대회

 

“언제 시골 가면 제가 사찰 요리 잘하고 좋아하니 우리 집에서 밥 한번 대접할게요.”

 

조혜영 시인이 말하는 ‘시골’은 우리 집과 지척이지요. 한 8년 전인가요? 조혜영 시인을 처음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는데 집으로 초대해 강원도식 막장[된장찌개]으로 차려진 밥상을 내주었어요. 제게 조혜영 시인은 따뜻한 시골밥상 같은 분입니다.

 

조혜영 시인이 밥 한번 대접하는 자리, 전 치유 보고대회라고 부르고 싶어요. 사찰음식으로 정갈하게 차려진 치유 보고대회, 두런두런 맛나는 대화로 기쁘게 맞이하고 싶습니다.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 공론화 과정에서 조혜영 시인과 더 많은 이들이 우정으로 맺어져 초대장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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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과제 : 피해자의 온전한 치유와 공동체적 해결을 위하여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온전한 치유를 위해 함께하는 이들을 지지한다. 그리고 작가 사회의 성평등 문화 실현을 위한 집단적 노력과 공동체적 해결을 촉구한다.

 

“이미 박영근기념사업회에서 입장문을 올린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된 것 아닌가?

 

조성웅 : 박영근기념사업회에서 진위 파악한다며 진흙탕이 될 수 있었던 시간을 피하게 해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기념사업을 중단함으로써 조혜영 시인의 바닥없이 깊어지던 고통에 쉼표를 찍어줬잖아요. (기념사업 중단이) 고통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지지대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박영근 시인 사망 이후 기념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누적된 억장 무너지는 마음과 고통이 치유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박영근기념사업회 입장문을 봤어요. 기념사업을 중단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인데 사건에 관한 규정이나 평가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조혜영 시인의 고통을 헤아려보려 하고 사려 깊게 배려하는 마음을 찾아볼 수 없어 무척 아쉽습니다.” (‘박영근 작품상 반납한 조성웅’, 2024년 9월 24일, 「오마이뉴스」)

 

<첨부> 한국작가회의 「성차별·성폭력 처리 및 예방에 관한 규정」

 

 

한국작가회의 「성차별·성폭력 처리 및 예방에 관한 규정」

 

(2018.7.14 이사회 승인)

 

한국작가회의는 사람 사이의 차별이 없는 존엄한 평등의 문화를 이뤄내고자 ‘성차별·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을 제정한다. 이는 올바른 사건 해결을 통해 성별로 인한 억압과 차별을 해소함과 동시에 사건의 축소, 은폐, 왜곡의도를 척결하기 위한 한국작가회의의 조직 규율이다. 또한, 성 평등의식을 구성원 모두에게 자각시켜 성차별·성폭력을 예방하고자 하는 한국작가회의의 의지이다.

 

제1조 목적

 

이 규정은 본 조직에서 발생하는 성차별, 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제반사항을 규정하며 성차별, 성폭력의 근절과 예방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정의

 

① 성차별이란 성별과 성 정체성을 이유로 행하여지는 차별, 배제, 제한을 말한다.

② 성폭력이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신체, 언어, 정신, 환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희롱·성추행·성폭행 모두를 일컫는다.

③ 2차 가해란 사건 이후 피해자에게 직간접적인 또 다른 가해와 고통을 주는 일체의 행위를 포괄한다.

④ 대리인이란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를 대리하도록 선임한 자연인을 말한다.

 

제3조 적용 범위

 

본 규정은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피해자나 가해자, 어느 한쪽만 회원인 경우를 포함한다.

 

제4조 사건처리의 원칙

 

① 사건처리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1. 사건의 성립과 처리는 피해자의 구체적인 진술에 바탕을 둔다.

2. 사건의 처리 과정과 결론에서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한다.

3. 피해자가 제2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다.

4. 신고, 제소된 사건은 절차에 따라 최대한 신속하게 해결한다.

② 사건의 처리는 공식적 해결을 원칙으로 하며, 필요한 경우 가해자의 실명, 처리결과, 조직의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공개할 수 있다.

 

제5조 피해자 권리 및 보호

 

① 사건의 조사와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는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가진다.

1. 대리인을 동반하거나 선임할 권리

2. 증인이나 참고인 등 특정인을 신청할 권리

3. 임시조치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

4. 사건 해결의 전 과정과 결과에 대해 알 권리

5. 가해자 처리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권리

② 본 조직은 피해자의 보호 및 치유와 복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피해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 유관기관과 연계하여 상담, 치료 등을 지원한다.

 

제6조 사건의 성립

 

① 사건을 신고함과 동시에 성립된다. 단, 신고자의 신원과 연락처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② 사건은 피해자, 피해자의 동의를 받은 대리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신고할 수 있다.

 

제7조 적용시한

 

적용시한은 따로 두지 않는다.

 

제8조 임시조치

 

① 대책팀은 피해자의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격리, 활동중단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② 대책팀은 피해자의 제1항과 같은 청구가 있었을 시 임시조치 여부를 신속히 결정하여야 한다.

③ 대책팀은 임시조치를 결정한 때에는 이를 피해자, 피해자 대리인, 윤리위원회에 통지해야 한다.

 

제9조 성폭력대책팀

 

① 구성

1. 평화인권위원회 내에 성폭력대책팀을 둔다.

2. 대책팀장은 평화인권위원회 위원장이 겸한다.

3. 팀원은 5인 이내로 구성하며 윤리위원회에서 정한다.

 

② 대책팀의 역할

1. 성차별·성폭력 상담 및 신고접수를 전담한다.

2. 피해자의 진술을 확보하고 가해자 조사 및 소명 절차를 밟는 등 공정한 활동을 한다.

3. 가해자가 소명에 응하지 않았을 시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4. 조사 도중 발생한 비용은 조직에 청구할 수 있다.

 

제10조 가해자에 대한 징계 및 조치

 

① 신고가 접수된 시점부터 징계가 결정될 때까지 해당 회원의 탈퇴를 인정하지 않는다.

② 대책팀은 조사가 마무리되면 윤리위원회에 그 내용을 회부한다.

③ 윤리위원회는 가해자에 대한 징계와 방법을 심의한다.

1. 윤리위원회에는 성폭력대책팀장을 포함하고 성폭력 상담전문가 또는 교육이수자 등 외부 인사를 참여시킬 수 있다.

2. 성폭력대책팀과 윤리위원회는 사건 처리에 필요한 자료의 제출, 관련인의 소환을 요청할 수 있으며 회원과 조직은 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3. 정관에 의거한 제명, 자격정지 외에 경고, 견책, 주의 등을 결정한다.

4. 가해자의 성평등 교육프로그램 이수 권고, 활동금지, 재가입 불가처분을 내릴 수 있다.

5. 가해자, 또는 회원이 2차 가해를 한 사실이 명백할 경우 제10조에 의거하여 처리한다.

6. 법적인 분쟁의 경우, ①항의 의거하여 탈퇴금지 및 회원자격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다.

④ 본 규정이 제정되기 이전에 발생한 사건의 경우에도 1~6항의 조치를 적용할 수 있다.

⑤ 조사결과와 징계 결정 사실을 이사회에 보고한다.

 

제11조 공동해결

 

피해자나 또는 가해자 중 어느 한쪽이 회원이 아닌 경우, 사회적 해결을 위해 당사자의 소속집단과 공동해결의 원칙에 따라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

 

제12조 예방

 

 

성폭력의 근절과 예방, 성평등 조직문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성폭력 예방 및 성평등 교육을 회원 교육에 포함하여 실시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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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호를 내면서

「코뮤니스트」 20호를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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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축적의 위기에서 비롯된 전쟁과 기후위기의 일상화는 자본에는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노동계급에는 고통과 죽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국제 부르주아지는 선거에 대한 환상과 민족주의를 내세워 노동계급을 무력화시키고 체제 유지와 전쟁에 동원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에 의한 가자/레바논 인민 학살을 포함하여 현재 전 세계적으로 50여 개의 무력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 분쟁에 노출된 인구수가 20억 명에 달하고 1억 800만 명이 난민으로 내몰렸다. 분쟁 지역 중 여러 곳에서 인종 청소, 공동체 사이의 폭력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해마다 기후위기 난민이 증가하고 있지만, 국제 부르주아지의 대응은 겉으로는 녹색으로 포장하고 뒤로는 자본주의 사회·경제적 관계 보존과 자본축적을 위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한쪽을 지지하는 자본의 좌파에 맞선 국제 코뮤니스트좌파는 일관되게 혁명적 패전주의와 노동자국제주의를 방어했다.

 

“그런데 이른바 ‘좌파’ 세력, 특히 ‘혁명적’이고 ‘국제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세력 상당수는 ‘반(反)제국주의’ 또는 ‘차악(次惡)’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에게 한쪽 또는 다른 쪽을 지지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들은 ’억압받는 이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논리로 노동자들에게 한쪽 편을 드는 전쟁 지지를 촉구한다. 그들은 억압받는 국가(민족)의 노동계급이 지배계급 사이의 전쟁에 총알받이로 동원되어, 자국 지배계급을 위해 싸우다가 희생당하는 것을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왜곡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에 '피억압 국가'든 '억압 국가'든 특정 자본주의 세력이 반(反)제국주의의 한 축을 구성할 수 없다. 제국주의는 세계 체제이며, 자본주의 세계 운영의 한 단계이므로 모든 국가는 어떤 식으로든 이 체제에 참여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모든 국가가 자본주의 제국주의 체제에 참여하는 시대에 ’진정한 반(反)제국주의 투쟁은 체제 자체를 전복하는 투쟁뿐이다. 물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은 자본주의 전복을 향한 국제적인 계급투쟁이다. 이른바 '좌파'가 그토록 사랑하는 '반(反)제국주의' 투쟁은 실제로는 제국주의 사이 투쟁이다. 그들의 실제 내용은 제국주의의 협력 속에서 한 국가의 지위를 바꾸는 것이다.” (‘계급전쟁만이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 「NWBCW 한국위」,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이번 「코뮤니스트」 20호에는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코뮤니스트좌파의 대응과 올해 주요 국가에서 치러진 부르주아 선거를 다뤘다. 또한, 코뮤니스트좌파 진영 내부 논쟁, 자본주의 경제적 토대,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등 연재 기사와 코뮤니스트 혁명가 안톤 판네쿡 서평을 실었다. 그 외에도 현 정세에 참고할 만한 글과 흥미진진한 주제가 풍성하게 실렸다.

 

□ 특집, 제국주의 전쟁과 국제주의에는 ‘오늘날의 혁명적 패전주의: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평화 요구는 전쟁 게임의 일부이다’, ‘학생 시위 : 뒤섞인 신호’를 실었는데, 평화주의에 대한 비판과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제국주의 전쟁에 맞선 혁명적 패전주의를 다루었다.

 

“평화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전쟁이 자본주의 체제에 본질적으로 내재하여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자본주의 내의 평화는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적 계략을 숨기기 위한 홍보 수단으로 노동계급을 호도한다. 그들이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평화는 용어상 모순이다. 대신, 전쟁에 대한 유일한 진정한 반대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다.” (‘평화 요구는 전쟁 게임의 일부이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오늘날 혁명적 패전주의는 동지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나요?

 

현재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혁명가들이 전쟁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의 질문을 전면에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분명한 답변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혁명적 패전주의',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입니다.

 

우리는 제국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제 세계적인 체제이며, 전쟁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세계와 자원을 재분할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경제 위기의 시기에는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군사적 해결책을 선호합니다. 전쟁이 가져오는 자본의 파괴는 또한 체제의 수익성을 회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호황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 지배계급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고 자본주의는 새로운 생명선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세계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가운데 편익 동맹(alliances of convenience)이 형성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어떤 국가 프로젝트도 이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국) 지배계급이 강대국 파트너의 공범인 약소국은, 강대국의 제국주의 체스판에서 졸에 불과하며, 전시에는 자신의 노동대중과 마찬가지로 강대국이 도구로 이용하고, 전쟁 후에는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 희생될 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따라서 민족 해방, 민족의 자결권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역사적 모순이 되었습니다. 제국주의 전쟁에 계급전쟁으로 맞서는 혁명적 패전주의는 한 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늘날의 혁명적 패전주의: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

 

□ 코뮤니스트 정치에는 ‘계급전쟁만이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 ‘노동자에 국가와 민족은 없다’,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전복의 전망’,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을까?’를 실었는데, 자본주의 위기에서 비롯된 전쟁의 일상화와 기후위기의 배경과 지배계급의 행태와 대안을 고민하고 있다. 체제 유지와 제국주의 이익에 복무하는 민족주의, 기후위기를 통해 이윤추구의 새로운 방법을 구사하는 자본의 적나라한 모습과 왜 노동계급만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인지를 보여준다.

 

“자본주의 쇠퇴기에 전쟁은 삶의 방식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잔인함과 야만성을 더 많은 영역으로 확산할 뿐 인류의 미래를 제공할 수 없다.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게 전쟁을 멈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역사는 전쟁이라는 자본가계급의 살인 기계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노동계급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독일혁명의 위험 때문에 자본가계급이 휴전 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이 계급전쟁을 벌일 위험에 처할 때만 전쟁 중단을 고려할 뿐이다. 오늘날 세계 노동계급이 대대적인 계급투쟁을 즉시 벌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계급투쟁의 확산과 발전만이 그러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오직 노동계급만이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를 전복함으로써 제국주의적 긴장의 물질적 기반을 파괴하고 인류에게 영구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계급전쟁만이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 「NWBCW 한국위」,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자유민주주의적 사고와 비판으로 박정희를 비판하는 것은 박정희 신드룸과 박정희 동상을 잠재우기는커녕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대한 집착과 향수만 자극했다. 마찬가지로 뉴라이트 사관의 극복은 한국 민족주의가 아니라 코뮤니즘을 향한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국제주의로 가능하다.” (‘노동자에 국가와 민족은 없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 국제에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의 지배계급이 부르주아 선거를 어떻게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환상을 심어주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또한, 북미 지역 노동조합의 한계와 그것을 넘어서는 노동자 투쟁의 절실함과 볼리바르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실었다.

 

“모든 선거는 위기이며, 자유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국민투표가 된다. 부르주아지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잃고 있다”고 선언하며 우리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말한다. 투표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투표하지 않았으니 불평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공허한 반동적 활동(자본주의 선거에서 투표)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벌이고, 선거를 집단행동의 대체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을 대안이 있다.

해리스나 트럼프 모두 미국과 세계 자본주의가 나아가는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노동계급은 투표를 통해 계급 지배를 정당화하는 대신, 누가 당선되든 일어나게 될 경제적 공격과 전쟁 준비에 맞서 스스로 조직하고 싸워야 한다.” (‘미국 : 민주·공화 양당, 하나의 썩은 체제’, 「국제주의노동자그룹」)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이미 의문을 제기한 문제이다! ……… 프롤레타리아 여러분, 우리는 이 선거가 우릴 위하여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체제를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임을 알기에, 이 모든 것을 거부하자! 좌파든 우파든 우리의 적들에게 투표하지 말자, 그들은 모두 우리를 착취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 선거에서는 언제나 자본주의가 이긴다!’), 「국제주의혁명그룹」)

 

□ 코뮤니스트좌파 진영 내부 논쟁에는 ‘혼돈의 시대'인가,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인가?’, ‘또 다른 가짜 인터내셔널’, ‘부르주아지가 조직하는 방법’을 실었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의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NWBCW) 위원회」’ 참가 이유와 「국제맑스주의경향」(IMT)에 대한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비판과 포푤리즘에 대한 분석을 소개했다.

 

”자본주의의 전복과 새로운 코뮤니스트 세계의 토대 구축은 전 세계 수백만 노동자의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한 강령을 중심으로 계급을 통합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국제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우리의 과업은 자본주의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에 대한 선전을 확산하는 것이며, 이는 나머지 노동계급에 도달할 만큼 충분히 광범위한 운동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신과 이러한 동기로 우리는 더 광범위한 계급 저항을 향한 구체적인 단계를 제공하기 위해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위원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했다. 이번 호에 보도된 프라하 국제 모임과 아레초에서 열린 소규모 모임에도 이러한 정신으로 참석했다.” ('혼돈의 시대'인가,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인가?‘,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더 오래되고 최근의 이 모든 예는 IMT의 국제주의가 사기이며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다고 주장하는 구호가 거짓말임을 보여준다! IMT는 다른 모든 트로츠키주의 조직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전복을 위한 모든 노동계급의 투쟁을 방해하는 반(反)혁명의 도구다. ……… 그러나 일단 '혁명적 패전주의'에 대한 강령을 정확하게 인용하고 나면, 그들은 구체적 문제로 넘어가서, 실제로는 기존의 전쟁 전선에 참여하고 노동자들을 제국주의 학살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구분하기 시작한다."[9]. 이는 트로츠키주의에 있어 정치적 입장보다 정치적 실천이 더 결정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실천은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동원에 끊임없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기사에서 CWO가 쓴 것처럼 ‘파산한 정치적 경향’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트로츠키주의는 노동자 투쟁이나 제국주의 전쟁의 영향을 받아 급진화하는 계급 내 소수를 통제하고 탈선시키는 부르주아지의 중요한 도구이며, 이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더 거대하고 정치화된 계급 대립으로 가는 길을 막는 역할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부활하는 IMT의 정책이다.” (‘또 다른 가짜 인터내셔널’, 「국제코뮤니스트흐름」)

 

□ 혁명가에서는 혁명적 맑스주의자로서 안톤 판네쿡을 조명했다. 안톤 판네쿡(1873-1960년)은 노동자 운동에서 엄청난 기복의 시대,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끝낸 혁명적 파고를 겪었다. 판네쿡이 그 사건들에 직접 참여한 기간은 비교적 짧았지만, 노동계급 역사에서 격동의 시기를 겪었던 판네쿡은 평생 맑스주의자로 남았고, 혁명적 변혁의 열쇠는 노동계급 대중의 계급의식 발전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전체적인 전망은 노동계급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의식을 획득한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판네쿡은 다른 평의회주의자들과 다르다. 그리고 의식은 조직적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판네쿡은 평의회를 이상적인 형태로 보지만, 혁명적 계급의식은 노동자들 사이의 논쟁과 토론 없이는 도달할 수 없으므로 그 과정에 기초한 “당”이라는 개념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위대한 시기는 당쟁의 소음으로 가득할 것이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그룹을 형성하여 자신들을 위해 자신들의 생각을 논의하고 동지들을 계몽하기 위해 그 생각을 선전한다. 이러한 공통된 의견 그룹을 당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 성격은 이전 세계의 정당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의회주의하에서 이 당들은 서로 다르고 상반되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지닌 기관이었다. 노동계급 운동에서는 이 당들은 계급을 선도하고, 그 대변자이자 대표로 활동하며, 지도와 지배를 열망하는 조직이었다. 이제 그들의 기능은 정신적 투쟁일 뿐이다. 노동계급은 실천적 행동을 위해 당이 필요하지 않다. 노동계급은 행동을 위한 새로운 조직, …… 즉 평의회 조직을 만들었고, 행동하는 것은 전체 노동자 자체이며,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것도 전체 노동자 자체이다.” (‘혁명적 맑스주의자로서 안톤 판네쿡: 비평’,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 기회주의에 맞선 코뮤니스트좌파의 투쟁에서는 헤르만 호르터의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중 의회주의에 관련된 내용을 실었다. 헤르만 호르터는 서유럽과 러시아의 정치, 경제 상황은 다르며, 따라서 의회주의 전술도 달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反)의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방어에 이어, 저는 동지의 의회주의 방어에 대해 자세히 답변하고자 합니다. 동지는 영국과 독일의 의회주의를 (36쪽부터 68쪽까지) 방어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러시아(그리고 극히 일부 다른 동유럽 국가)에만 유효하며, 서유럽에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바로 그 점이 동지의 실수입니다. 그것은 동지를 맑스주의자에서 기회주의 지도자로 전락시킵니다. 이에 따라 맑스주의자이자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의 급진적 지도자인 동지가 서유럽과 관련해서는 기회주의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동지의 전술이 여기서 받아들여진다면, 서유럽 전체를 멸망으로 이끌 것입니다. 이 점은 동지의 주장에 대한 답변에서 자세히 입증하겠습니다.” (헤르만 호르터,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 문화에서는 낯선 땅에서 노동자로서 삶을 시작하는 소박한 청년의 일상을 소개한 ’나의 스무 살‘과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요?‘를 실었다. 조혜영 시인의 시 ’미투‘를 통해 고 박영근 시인이 행한 성폭력 사건을 알게 된 조성웅 시인이 박영근 작품상 반납에 대한 이유와 앞으로의 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글은 조혜영 시인의 요청에 대한 제 화답입니다. 일생일대의 결단, 놀라운 용기를 보여준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저의 지지와 격려입니다. 문단 내에서 그녀의 삶이 안전하게 보장되고 노동자 시인으로서의 긍지가 지켜지기를, 상처가 아물어 치유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기원입니다. ……

저는 조혜영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줄 수 있는 ‘이 한 사람’이 되고 싶고, 우리가 조혜영 시인의 ‘이 한 사람’이 되자고 제안하기 위해 박영근 작품상을 반납하고자 합니다.” (조성웅,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요? ―박영근 작품상을 반납합니다’)

 

□ 코뮤니스트좌파 역사에서는 창립 45주년을 맞이한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탄생 배경과 간략한 연표를 실었다.

 

이번 「코뮤니스트」 20호에는 자본축적의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경제 분석부터 지배계급의 반동적 전쟁과 여기에 맞서는 국제 코뮤니스트좌파들의 원칙(노동자국제주의), 역사, 투쟁을 깊게 다루었다.

 

“미래는 노동자의 것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여전히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안톤 판네쿡, 1907)

 

다시 한번 소개하는 안톤 판네쿡의 생애와 사상은 노동계급에 영감을 불어넣기에 부족함이 없다. 앞으로도 우리는 독자와 지지자들의 격려와 다양한 의견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일 것이다.

 

한국-북한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개입 반대!

자본가 정권 타도! 제국주의 전쟁 타도!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자본주의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만이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

민족에 맞선 민족이 아니라 계급에 맞선 계급으로!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2024년 11월 9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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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24년 20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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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24년 20호
 
 
차례
 
 「코뮤니스트」 20호를 내면서  
 
□ 코뮤니스트 정치
▸ 계급전쟁만이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 
▸ 노동자에 국가와 민족은 없다 
▸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전복의 전망 
▸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을까? 
 
□ 특집, 제국주의 전쟁과 국제주의
▸ 오늘날의 혁명적 패전주의: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 평화 요구는 전쟁 게임의 일부이다 
▸ 학생 시위 : 뒤섞인 신호 
 
□ 국제
▸ 미국 : 민주·공화 양당, 하나의 썩은 체제 
▸ 영국 : 노동당이 이겼지만, 노동계급의 승리가 아니다 
▸ 프랑스 : 선거에서는 언제나 자본주의가 이긴다! 
▸ 볼리바르 '사회주의'의 허세 
▸ 전투적 노동절이 필요한 노동계급 
 
□ 코뮤니스트좌파 진영 내부 논쟁
▸ '혼돈의 시대'인가,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인가? 
▸ 또 다른 가짜 인터내셔널 
▸ 부르주아지가 조직하는 방법 
 
□ 혁명가
▸ 혁명적 맑스주의자로서 안톤 판네쿡 : 비평 
▸ 계급투쟁에 관한 5가지 테제 - 안톤 판네쿡 
 
□ 코뮤니스트좌파 역사
▸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창립 45주년 
 
□ 이론
▸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4부) 
▸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5부) 
 
□ 기회주의에 맞선 코뮤니스트좌파의 투쟁
▸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3) 
 
□ 문화 
▸ 나의 스무살 
▸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요?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 올리비에를 추모하며  
▸ 올리비에 동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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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전복해야 한다.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은 임금 노동, 화폐, 국가가 없는 새로운 사회, 바로 코뮤니즘이다.
 
 
□ 가격 :  20,000원 
□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코뮤니스트」20호는 2024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배포/판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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