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국제코뮤니스트전망/코뮤니스트

[코뮤니스트 13호]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 환상 : 영원한 반(反)노동계급 무기인 개혁주의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 환상 : 영원한 반(反)노동계급 무기인 개혁주의

 

  _20210629_185322224.jpg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각각의 새로운 충격으로 그 위기는 더욱더 심화한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생산과 유통의 혼란은 기존 시스템의 어려움을 더 어렵게 할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노동계급은 국가 개입이 계급과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그들의 조건과 "공동체"에 가져올 이로운 효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자본의 좌파에 속하는 여러 정치 집단에 따르면,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유럽연합(EU)과 세계 각국이 대규모로 유동성을 공급한 것은, 국제 코뮤니스트들이 수십 년 동안 주장해 온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 내에 여전히 노동계급이 현재의 역사적 시기에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여지가 있는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위기 원인을 분석한다는 측면에서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더 나아가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통해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맑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도 바로 그런 사람이다. 세계 자본주의 위기에 대해서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EU와 유로존의 상황을 충족시키기 위해 중국식의 오래된 국가 자본주의와 다름없는 경제 요리법을 생각해낸다. 지난 4월 코비드-19 비상사태가 한창일 때 그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유로의 코로나 위기 : thenextrecession.wordpress.com)은 로버츠의 비전을 특히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 로버츠는 이탈리아와 같은 EU 회원국들의 심각한 어려움을 언급했다. 그는 결국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경우 유로존 재무장관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경제 지원책이 비참한 이탈리아 자본주의를 되살리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중앙은행(ECB)의 공적 채무 매입을 통해 이탈리아 국가가 실업자를 위한 일시적 노동 계획을 지원하고 채권시장에서 저비용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은 이탈리아 자본주의를 위해서 마지막 결전을 미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전에 국가 개입을 결정적인 요인으로 폐기했던 로버츠가 같은 글에서 투자 계획을 위한 EU 예산 증액과 대기업 과세의 조화를 완성하는 마셜 플랜의 실행을 제안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난국에 대한 로버츠의 대응은 모순적이다. 로버츠를 비유하자면, 자본 흐름에 아주 낮은 세금을 부과하는 유로존 국가들에만 이익이 되는 최저의 공통분모를 위한 경쟁이다. 요컨대, 그와 같은 로버츠와 다른 사람들의 관점은, 자본주의적 위기에 대한 그의 분석을 공유하지 않지만, EU 경제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나아가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유로존을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 분명히 "개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로버츠가 주창하는 이러한 국가 개입주의는 마치 EU와 유로존 개별국가의 더 많은 자본 투자가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본질을 바꾸거나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것처럼,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을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계급 없는 사회로 전환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우리에게 교활하게 그리고 터무니없이 선전하고 있다. 이 법칙은 맑스에 의해 확인되었고, 2007~2008년에 발생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그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로버츠 자신에 의해 종종 신중하게 분석된다. 그러나 사실 맑스는 코뮤니스트 혁명가이면서 정치경제 평론가였고, 단순히 사회주의를 "국민"의 각성과 자본주의의 부흥으로 보는 마이클 로버츠 같은 학구적 맑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정치경제가 자본주의와 함께 태어나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고, 연구되어야 하는 규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로버츠와 그의 친구들이 자본주의, 상품, 국가, 그리고 유럽연합과 같은 초국가적 기구와 "사회주의"를 상상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코뮤니즘은 경제에서 국가 개입의 강력한 신봉자와 함께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구제를 열심히 하는 여러 개혁론자에게서, 경제 또는 자본주의 계급의 역할을 담당하는 국가가 아닌, 현재 상황을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진정한 운동(1)이라고 아마도 말할 것이다.

 

맑스 「자본」 제1권의 한 구절에서 단일 자본가 또는 자본가 연합의 독점 형성이 사회 자본의 집중과 중앙집중화 과정의 극단적인 결과로 제안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2) 이것은 자본가 연합이 사회적 자본을 독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본가 국가일 수 있고, 집단적 자본가나 기업가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엥겔스는 「반 뒤링」에서 집단 자본가로서의 국가의 역할에 관해 썼다. 그는 자본주의 발전 수준 자체가 자본가 착취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을 해야 하여 현대 자본주의 국가가 결국 직접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이런 식으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반 뒤링」에서 엥겔스의 주장을 모든 자본주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제국주의 시대에 이것은 모든 곳에서 국유화 또는 경제 전반에 대한 국가 개입의 증가가 특징지어져 왔다.

 

실제로 지난 50년 동안 이윤율 하락으로 매우 심각한 구조적 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 국가도 신자유주의 단계로 간주하는 경제 지원 대책에 의존해 왔으며, 또한 국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통제되는 특정 기업이나 기업집단의 민영화와 분배를 진행해 왔다. 비록 이러한 국가 개입의 형태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30년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중요한 개입을 보았다. 특히, 국가 개입은 공공 부채를 늘려서 수익성이 없는 기업과 은행의 "구제"로부터 노동 시장의 구조 개혁이라 불리는, 연구와 개발로 만들어진 투자뿐만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에 더욱 더 호응하는 노동계급의 착취 방법, 그리고 그 가치보다 낮은 노동력의 가치를 낮추는 방법까지 다양했다. 소부르주아 선거 고객의 충성심을 보장하고 "사회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상품에 대한 "수요"를 지원하기 위해 국가가 제공한 돈의 홍수도 잊지 말아야 한다.(3)

 

자본주의 국가는 그들이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이익을 해친다면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의 조건을 결코 "개선"한 적이 없다. 반대로, 자본주의 국가는 이른바 말하는 노동 시장의 "개혁"을 통해 노동력 가치 이하의 임금 감소를 촉진하는 것 외에도 사회 서비스, 보건 및 연금(즉, 간접 임금과 지연 임금)을 대폭 삭감하여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연계된 전염병의 확산에 매우 적합한 조건을 만들었다. 이윤율 하락에 따른 구조적 위기 등으로 복지제도를 무참히 축소해 온 자본주의 국가 스스로 공동체 전체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조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실 임금노동자들의 상태는 대유행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가 강요해 온 생산 중단과 한계로 인해 악화하였다.

 

게다가, 이윤 때문에 헐떡이는 경제에 대해 자본주의 국가가 지원하는 부문에 대해 대가를 지불한 것은 항상 프롤레타리아트였다. 노동자가 자본주의를 먹여 살리는 잉여 가치의 원천인 노동계급은 이번에도 생활과 노동조건이 악화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국가 “자선”에 대한 법안이 해결되는 방식이 이러하다. 일부 개혁주의자들이 기대하는 자선은 "사회주의"나 일반적으로 더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이다. 사실, 공채와 사채는 자본주의 운영 메커니즘이 실패할 때 단지 잃어버리게 될 미래의 재화 생산에 대한 도박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마이클 로버츠도 지난 6월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에서 채택된 조치가 위기를 종식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부채가 늘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인정했다.(4)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관점에서 볼 때, 한편으로, 개혁주의가 조장하는 환상에 의해 나타나는 피해는 단지 일상 투쟁에서 계급 투쟁을 훼손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그러한 신뢰는 노동계급의 자주적인 정치 조직을 약화시키고, 그로 인해 세계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전망을 약화시킨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적 전복과 노동자평의회 건설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

 

반면에, "공동체"의 추정되는 복지를 가장한 국가의 개입은 심각한 체제 위기나 노동계급에 기반을 두고 세워진 경제 부흥의 단계에서 자본주의를 안정시키는 데에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것은 사회 평화를 유지하고 제국주의 간 충돌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자본주의 국가 언론과 선전 공세가 제대로 봉사하였으며, 이것은 반드시 "후방"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마침내, 만약 맑스와 엥겔스(5) 시대에 어떠한 환상이 이해될 수 있다면, 이것들은 이제 위험하고 시대착오적이다. 1세기 이상 우리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에 자본주의 국가의 개입주의가 어떻게 해서 강력한 반혁명 무기로 제공되어 왔는지를 보아왔다. 게다가, 그들의 시대에도, 맑스와 엥겔스는 페르디난드 라살레와 그의 초기 독일 사회민주주의 추종자들처럼 사회주의가 갑자기 그리고 설명할 수 없이 일하는 "사람들"의 통제 속에 있는 자본주의 국가를 통해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회주의 운동의 지지자들을 거칠게 비난했다.(6) 맑스가 「고타 강령 비판」에서 썼듯이, 민주주의 국가 초당파(7)를 믿는 노동계급은 자신의 혁명적 과업과 노동계급 내에서 이러한 신념의 확산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8)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경험하고 있는 반혁명 단계의 깊이와 계급에 뿌리를 내리는 혁명 정당을 건설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확인시켜 준다.

 

2020년 11월 21일

Gracchi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주>

 

(1) 「독일 이데올로기」를 보시오.

 

(2) 분명히, 그것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와 함께 두말할 것도 없는 순전히 교훈적인 가설이었다.

 

(3) 게다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반적인 수동성.

 

(4) 그는 그가 바라던 새로운 마샬 플랜이 이윤율 하락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이것은 로버츠의 “해결책”이 국가 자본주의(즉, “공공 소유”가 가치법칙 자체를 없앨 수 있다는 생각)를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Weekly Worker의 Modern Monetary Theory (MMT)에 대한 기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MMT 지지자들이 맑스주의적인 정책 결론, 즉 공공 소유와 생산 계획을 통한 생산적 부문의 전용과 경제 가치의 법칙을 억제하거나 종료하는 '지배적인 수위'로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무제한 자금 창출을 통한 정부 지출 정책은 실패할 것이다.”  (weeklyworker.co.uk)

 

MMT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leftcom.org를 참조하시오.

 

(5) 무엇보다도 맑스와 엥겔스는 항상 자본가들이 단지 전형적인 "더블 브레스트 재킷을 입은 제철소 사장"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본의 좌파는 생산 수단의 소유권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자본-임금노동 관계가 착취 시스템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항상 무시해 왔다.

 

(6) 그들은 「반 뒤링」에 의해서 입증된 바와 같이 노동운동 내의 이러한 종류의 논쟁에 익숙했다.

 

(7) 번역자 주 – 공정한, 초당파

 

(8) 역자 주 – 두 가지 이상의 내용을 비교할 때 서로 다른 상황을 고려하기 위해 변경이 필요하지만, 기본 사항은 동일하게 유지된다고 말할 때 사용된다.

 

 

 

 

<원문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0-12-07/the-illusion-of-state-intervention-in-the-economy-the-eternal-anti-working-class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2호] 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 다시 꺼내든 낡은 당 건설 노선 비판 -

 

  221212134324.jpg

 

노동자의 주변에는 항상 자신들이 노동자계급을 대변하거나 지도하는 세력이라 자임하는 정파와 파벌이 득세하고 있다. 여기에는 소수이지만,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사회주의를 실천한다는 세력도 일부 포함된다. 그들은 항상 "노동자계급이 역사와 혁명의 주체이고...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고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여 사회 전체를 통제해야만 노동해방에 이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노동자계급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과 권력 장악 이후까지 일관되게 노동자계급을 권력과 투쟁의 주체로 세우는지, 아니면 반대로 노동자계급을 대리하거나 이용하는 역할을 하는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별히 한국에는 사회주의/혁명 세력을 자임하면서 반(反)자본주의, 사회변혁, 노동해방, 사회주의자 등을 내걸고 노동자 운동에서 이른바 좌파 블록을 형성한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이 좌파 블록으로 모인 것은 한국의 노동운동 내부에서 온갖 폐해를 끼치며 기득권을 누려온 다수파 운동(이른바 자민통으로 지칭되는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반사작용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보면 여전히 자기 운동의 최종목표와 노선을 명확히 하지 못한 운동의 퇴보에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 쇠퇴기 위기 상황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개량/개혁을 넘어선 혁명적 이행전략을 가진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 투쟁에서는 사회주의와 무관한 실천만을 하면서도 급진적 구호나 그럴듯한 전술로 조합주의/노동자주의/선거주의 실천을 가리고 있다. 이른바 ‘좌파’의 정체성은 단지 다수파 운동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혁명적 기질과 줄서기로 드러낼 뿐이다.

 

이들 좌파 중 다수는 혁명적 이행전략인 노동자(평의회) 권력 창출이라는 전략적 과제를 현실에서 혁명적 조직과 실천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시시때때로 전술을 바꾸면서 전략적 과제를 혼란에 빠트리는 운동을 하고 있다. 즉, 계급이 처해있는 현실에서 출발하면서도 장기적 전망에서 현실의 장벽을 넘기 위한 실천을 통해, 주체들의 혁명적 계급의식 획득과 자기 조직화라는 전략적 목표로 꾸준히 나아가지 않고, 단기적이고 정파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전술을 바꾸는 것이다. 공동전선의 일종인 좌파 블록이 정치노선과 전략적 목표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우파에 대한 상대적 반(反)정립으로 형성되는 경향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더욱이 이들이 개량주의 세력을 대중적으로 폭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입당 전술, 노동자 공동전선은 개량주의 세력에게 노동자성을 부여하고 혁명 세력과 함께한다는 환상을 유포 시켜, 오히려 개량주의자들의 본질을 가려주고 입지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동맹은 자신들이 다수파를 장악하지 않는 한 이들과 함께하는 내내 개량주의 노선을 묵인하게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깨고 나와 모든 것을 무효화시킬 수밖에 없다. 결국, 개량주의 세력들과 동맹을 맺는 것을 옹호하는 전술의 결말은 노동자들이 그것으로부터의 단절하는 시간을 지연할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전술의 남발로 인한 이합집산과 분열의 반복은 노동자 대중에게 정치 운동의 신뢰를 잃게 할 뿐 아니라, 현장 투쟁에서 단결을 실질적으로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계급의 전위역할을 해야 한다는 착각과 대중을 지도해야 한다는 자만에 빠져, 온갖 현장 투쟁에 개입하면서 투쟁의 목표와 원칙을 훼손하거나 계급의식과 자기조직화를 자신들에게 맞춰 인위적으로 재단해 왔다. 계급의식과 계급투쟁 발전에 목표를 두지 않고, 자기 정파(그룹)의 이해관계에 따라 당면 정세에 조급하게 개입하는 운동이, 장기적 전망이나 운동의 본질에 접근하는 투쟁을 계획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계급의 전위란 자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전위는 계급투쟁 과정에서 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전투적인 부분을 조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매우 길고 힘든 계급의식 발전 과정에서 (계급투쟁의 퇴조-상승의 모든 기간에) 운동의 최종목표를 명확히 하고 (코뮤니스트) 혁명 강령을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방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혁명적 소수의 신뢰와 영향력이 노동자계급 안에 깊이 뿌리 내려 주요한 투쟁의 중심에 설 때 비로소 계급의 전위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전위(혁명조직)가 노동자계급을 혁명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안에 혁명적 부분(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위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당(조직)은 적대하는 계급과의 투쟁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계급 안에서 모든 투쟁에 함께하면서 혁명강령을 방어하는 집단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노동자계급 주위에서 전위 역할을 한다는 세력들은, 계급투쟁 개입을 노동자 투쟁을 대리하거나 자신들이 투쟁의 배후 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공동전선’이라는 외피를 쓰고 상층중심의 공동전선(투쟁), 입당 전술, 노동자 후보/선거연합, 계급연합, 노동자정부 등의 혼란스러운 전술을 남발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전선은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공동전선의 상대에 따라 강령의 수준을 낮추고 전술의 원칙을 바꿔가면서 계급의식을 혼란에 빠트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 노동자의 절대다수가 부르주아의 책략에 눈을 감는 상태에서, 혁명조직의 책무는 혁명의 최종목표를 보다 명료하고 직접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알려 행동을 촉진하는 일이지, 자신의 정치를 부르주아 대중 정치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당 건설 경로에서도 철저한 강령 원칙과 실천적 검증에 따른 혁명적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세력의 재구성을 통해 당 건설의 기반을 마련하고,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코뮤니스트 노동자가 계급투쟁 속에서 직접 만나 혁명적 주체를 형성하고 자기 조직화를 이루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이들은 강령적 실천과 혁명적 주체의 자기 조직화라는 본질을 망각한 채, 조급한 정세 대응에만 매달리거나, 자기 조직 유지와 양적 확산만을 위해 강령원칙을 폐기하면서 당 건설 운동을 지속해서 후퇴시켜왔다.

 

이제는 그것의 만회를 위해, ‘(사회주의/좌파 대선후보를 통한 당 건설’이라는 낡고 악취 나는 전술을 슬그머니 들고나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정치 노선이 불분명한 (오랜 전통의?) 의회주의 제도권 소수 정당과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포기한) 비제도권 소수 정당이 추진 중인 사회주의 대중정당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중 한 축은 9년 전에 선거주의 세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다른 한 축에서는 준비되지 않은 위로부터의 대선 투쟁(후보전술)을 통해 그리고 실패한 진보정당 운동과 야권연대에 대한 반(反)정립 운동을 통해 투쟁 동력과 당 건설 주체를 확보하여 당 건설을 할 수 있다는 거짓을 유포했다. 결국, 공동전선을 통한 단계론적 계급정당 건설 노선이 선거 전술과 혼합되어 타락하는 운동 세력의 유력한 생존전략이 되었었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 제대로 된 반성과 성찰도 없이 이들은 더욱 우경화하여 ‘사회주의 좌파 후보’ 간판을 내걸고 부르주아 제도권 정당으로 향하는 최악의 생존 전략을 채택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이제라도 사회주의당 건설 운동을 포기하고 부르주아 정치의 좌익으로 전향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노동자들에 대한 신의며, 운동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

 

이들이 향하고 있는 제도권 정당에 대한 비판은 아래의 인용문으로 대신한다.

 

"민주주의 공화국은 자본주의를 보호하는 가능한 최고의 정치적인 외피이다. ... 자본은 ... 그 권력을 매우 공고하게 확립하는데,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어떤 사람이나 제도, 또는 어떤 정당의 변화도 이를 흔들 수 없다."(레닌, 「국가와 혁명」)

 

"민주주의" 선거는 부르주아지 손에 있는 권력을 합법화하는 기만적인 정치 무대이다. 실제로 부르주아지는 이른바 "공공의 의견"을 매스미디어부터 시작하여 학교, 종교 제도로 모양 짓는 도구들을 통제한다. 이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제도적 결정은 자본가들의 경제적 필요와 양립 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가의 관리자들은 지배계급의 대표들이다.

 

이러한 제도들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가들의 착취에서 자신을 해방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완전히 환상이며, 이 제도들이 진실로 부르주아지가 경제적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보유한 가장 훌륭한 정치적인 수단인 한 그러하다.

 

다양한 제도권 정당들은 지배하는 자와 그 반대에 있는 자들 사이에서 기만적인 게임을 수행한다. ‘당’끼리 대립 뒤에는 종종 부르주아지의 서로 다른 분파 간의 권력 투쟁이 있을 뿐이거나, 더 단순하게는 더 안락한 제도권 의석에 앉으려는 서로 다른 정치인들 간의 무의미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어떤 제도권 정당도 이 체제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최선의 경우에도 정당은 관리에 있어서 환상에 불과한 차이를 제안할 뿐이다: 보다 인간적인, 공정한, 더욱 ‘민주적인’ 얼굴의 자본주의 등. 의회에 의석을 차지하고 있거나 그러고 싶어 하는 자칭 코뮤니스트 정당들 또한 진정한 혁명적 강령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은 노동자 투쟁을 위한 제도적인 경로라는 환상만을 확산시킬 뿐이며, 대부분 언제나 (이른바 ‘급진 좌파’ 정당과 마찬가지라도) 지역 기관들에서 다른 부르주아 정당과 협력한다.

 

따라서 우리의 약속은 선거에서 대중 투표를 목표로, 제도권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당의 건설이 아니다.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당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정치적 기준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급정당이다.”

(‘우리는 모든 제도권 정당에 반대한다’ 「국제코뮤니스트경향」)

 

 

 

 

 

자본주의 착취체제가 지속하는 한 계급투쟁에 진공상태는 없으며, 오히려 계급투쟁과 혁명적 계급의식을 담아낼 그릇이 부족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발전 없이 혁명당 건설은 불가능하다. 계급투쟁의 깊이는 당 건설의 주체를 담보해주고, 계급의식의 발전은 강령으로 표현된다. 당 건설의 주체와 강령을 포기한 당 건설이야말로 진공상태에서의 당 건설과 같다. 더욱이 진공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진흙탕(부르주아 선거판)에 빠져버리는 것은, 그동안 진공상태에서 운동을 해왔다고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혁명의 승리는 계급의식이 혁명 강령에 근접했을 때 현실화한다. 이때 당과 계급은 차이는 가장 가까워지며,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당, 프롤레타리아 대중정당으로 현실화한다. 따라서 계급의식이 정체되어 있거나 혼란스러운 일상시기에 대중정당을 건설하겠다는 것은 혁명과는 거리가 먼 개량주의 당을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또한, 강령에 입각하지 않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활동가 당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계급의 일을 대신하거나 관료적으로 관리하는 대리주의 당으로 향하게 된다.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들이 일상적 투쟁의 과정에서 얻게 된 계급의식은 혁명적 의식으로 진전될 수도 있지만, 투쟁의 시기가 지나면 다시 후퇴할 수도 있기에, 노동자계급에는 계급의 모든 역사적·이론적인 성과와 경험을 온전히 담아내는 강령을 가진 혁명당이 필요하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에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게 하고, 미래의 혁명적 투쟁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혁명당의 과업이다. 혁명가/코뮤니스트는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일반화하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또한, 혁명가들의 개입은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 전망을 설정하고 혁명적 무장을 준비하는 데 필수적이다.

 

 

코뮤니스트 혁명이 모든 투쟁의 순간에 구체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저항과 계급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혁명가들은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통일을 위해 반드시 혁명당을 건설해야 한다. 이것은 세계혁명을 위해 세계적 수준에서 개입하여 전 세계의 혁명진영을 재규합하는 혁명적 인터내셔널 건설의 과정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건설할 당은 선거가 아닌 계급전쟁을 실천하는 정당, 부르주아 제도권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당이 아닌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위해 부르주아 정치로부터 철저하게 독립한 계급 정당이다. 자본주의 쇠퇴기, 끝 모를 위기의 시기, 노동자계급에 필요한 당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과 코뮤니스트 혁명의 정치적 기준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임을 명심하자.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편집자 주>

이 글은 「코뮤니스트」 창간호에 실렸던 글이다. ‘공동전선’, ‘당 건설’에 대한 문제의식은 현재의 정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에 보완하여 다시 싣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3호] 코로나19 위기 속 코뮤니스트 활동의 틀

코로나19 위기 속 코뮤니스트 활동의 틀

 

KakaoTalk_20210607_132730302.jpg  

 

대유행은 모든 생산양식에 대한 실험이다. 그것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위기의 늪에 빠진 체제에 대한 특별한 실험이다. 결국 사스와 코로나19는 자본주의 체제의 결함을 드러냈다.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급격한 감염 전파에 대한 대응이 늦었을 뿐만 아니라, 역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예측한 대유행에 대한 환경 및 위생 상태 준비는 축적의 만성적 위기로 인해 지난 수십 년간 축소되고 간과되었다.

 

대유행에 앞선 위기

 

코로나19 위기가 자본주의의 실패에 새롭고 위대한 구실 제공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역설적인 사실로 남는다. 2019년 11월 채택한 관점에서 지적했듯이(1), 전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이미 새로운 붕괴로 향하고 있었다. 이는 거의 반세기 동안의 축적의 순환 고리가 끝나는 시점이다. 또한, 전 지구적인 전면적 계급투쟁은 제쳐두고라도, 2019년 말의 대중적 저항 사건은 증가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대유행 시기, 조지 플로이드의 국가적 살해에 대한 청년 흑인과 백인 노동자들의 전례 없는 단결, 그리고 더 나은 보호를 요구하는 전 세계적 여러 시위는 노동자계급이 역사적 현장에서 사라진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경찰력 확대 및 경찰 부대에 대한 군사화 조직들이 증명하듯, 프랑스에서 호주에 이르기까지 여러 국가의 지배계급은 사회적 위기를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심지어는 대유행을 진작시키기 위한 세계 각국의 모든 경비지출(혹은 화폐발행) 이전에도, 세계 부채는 이미 세계 GDP의 3배였다. 2019년에는 255조 달러의 신기록을 세웠다.(3) 2020년 4월까지의 부채는 세계 GDP의 331%에 이르렀다.(4) 이처럼 주요 자본주의 경제 전반에 걸친 부채는 이제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볼 수 없던’ 수준에 달했다(5). 그리고 이는 단지 대유행 때문만이 아니다. 2012-2016의 전 세계 부채는 6조 달러 증가했지만, 이후 4년(2020년 9월까지) 동안 52조 달러로 증가했으며, 여기에는 당해의 9개월간의 15조 달러 증가분만 추가된 것이다.(6) 영국은 1945년 국가 부채 대부분을 갚는 데 40년이 걸렸다. 그것은 20년 동안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긴 세속적인 호황으로, 그 후 부채의 대부분을 평가절하한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뒤따랐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는 이 모든 조건이 작동하지 않는다.

 

부채가 중요한가? 현재 글로벌 기업(일부 은행 포함)의 16%를 사망한 것(좀비)으로 간주할 수 있다(2019년 11월 10%에서 증가). 기업은 절대 줄지 않는 부채에 대한 이자를 갚기 위해 존재할 뿐이며, 오로지 마이너스 이자율만이 그들이 기능하게 한다. 어떤 금리 인상으로든 그들은 무너질 것이고, 일자리에 가져올 결과는 뻔하다. 마이너스 금리는 경제의 이윤 창출 비율이 낮다는 사실을 스스로 반영하는 것이고, 이는 수익성 있는 투자 기회가 드물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제의 또 다른 실패

 

대유행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자본 국가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예외로 주목할 수 있다) 대부분 정부의 우선순위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생산을 유지하고 경제가 지속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모든 정당의 정부에 의한 수십 년 동안의 삭감 이래 남아있는 건강돌봄서비스의 부적합성을 강조했을 뿐이다. 너필드 트러스트(Nuffield Trust)에 따르면, 1948년 영국의 NHS(National Healthcare Service, 국민보건서비스)가 창설된 당시 480,000개의 병상을 보유하고 있었다. 1987-8년 병상은 여전히 299,000이었지만 (킹스 펀드에 의하면), 부유 국가 중 중환자실 병상이 가장 낮은 수치를 포함한 127,225로 떨어졌다고 가디언지는 올 11월 보도했다.(7) 같은 기간 동안 인구는 1,700만 명 증가했다. 이들 서비스에 대한 압도적인 두려움이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걱정하는 것 이상의 어떤 행위들을 유발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유행의 불가피성을 지적한 충분한 활동, 조사,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심지어 사스 유형의 한 종류로서),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경제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이미 고민하고 있던 지배계급에 의해 이것들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최근 ‘오로라(Aurora)’에 게재한 우리의 기사를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환경에 대한 자본주의의 지속적 착취와 파괴는, 박쥐, 설치류와 그 외의 작은 형태의 동물을 우리의 도시로 강제로 들여보내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병원체를 가지고 들어와 인간에게 옮긴다. 우리는 이들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없기에, 사스, 메르스와 같은 유행병을 낳고, 현재의 Covid-19 대유행을 초래하였다. 자본주의야말로 바이러스의 진정한 근원이다! Covid-19가 지금까지 끼친 영향은 파괴적이다. 11월까지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명 이상이 감염되었고 공식적으로 120만 명이 사망했다. 이 수치들은 분명 대단히 과소평가 된 것이다. 게다가 국제통화기금(IMF)은 대유행으로 인해 9천만 명이 더 극빈층으로 추락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이는 하루 1.9달러 미만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바이러스 – 도끼는 노동자계급에 떨어진다)

 

대유행의 즉각적 여파는 2022년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역사적 전례는 제시한다. 정신 질환의 증가는 말할 것도 없이, 사회적-경제적 비용이 비대해질 것이고, 오랜 기간 지속할 것이다.

 

대유행의 분명한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 생산 단계에 있는 백신의 효율적 적용 속도 및 그 효용성이 그것을 결정지을 것이다) 또한 매주 수정되어야 할 성장 예측(또는 부족)을 발표하는 OECD/IMF/World Bank/등의 게임을 우리는 원치 않는다. 현재 그들은 세계 경제가 4.4% 수축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은 전체 성장 3% 이상을 기록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결과는 노동자계급은 이미 심각하며, 더 악화하리라는 점이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2008년 투기 거품의 붕괴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한 10년간의 긴축정책 이후, 전 세계 많은 노동자의 상황은 한 가지 이상의 의미로 취약했다. 분명 Covid-19의 대유행은 취업률에 영향을 미쳤으며, 노동 조건에는 더했다. OECD에 따르면,

 

“...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출근이 불가능해지자, 활동이 예외적으로 급감했으며 전례 없는 실직이 초래되었다. 2008년 금융 위기 초기 몇 달과 비교해 일부 국가의 노동 시간은 최대 열 배가량 감소했다. 9월 말 발표된 수치에 따르면, 공식적으로는 유로존 및 미국의 2천 5백만 이상의 사람들이 실직 상태에 있다. 그러나 대유행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실제 숫자는, 국가가 지원하는 임시 휴업 제도에 의해 일시적으로 보호를 받는 사람들, 노동력에서 제외된 사람들, 일주일에 원하는 만큼 많은 시간을 일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 고려하면 그 이상이라고 경제학자들은 주장한다.(8)”

 

영국 경제는 다른 주요 선진국들보다 더욱 위축되었다. 2/4분기 영국 경제는 미국과 독일보다 두 배 이상 급격히 위축되었고, ONS(영국통계청) 기록이 시작된 이래 최악의 위축이었다. 영국에서는, Sunak(Rishi Sunak, 영국의 현 재무장관)의 해고 계획에 따라 노동자들은 몇 달간 기본급 혹은 임금의 80%만 받았는데, 그들은 이미 이전에 받았던 100%의 급여에 상응하는 청구 금액을 납부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이는 많은 노동자는 (질병의) 증상이 있을 때도 강제적으로 노동했다는 것을 의미하며(9), 영국은 병가 중 급여가 ‘현재의 OECD 국가 중 최저인 곳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현재 정부는 마지못해 그 계획을 내년까지 연장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이는 충분치 못할 것이다. 심지어 대유행으로 수백 만개의 일자리가 없어진 후에도, 소매업 및 자동차 업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10)

 

한편으로 정리해고는 이미 속담처럼 ‘기록적인 비율’로 증가했다. 10월 ONS에서 발표한 이 수치는 지난 8월까지 세 달간 적용된 것이다.

 

“1분기 정리해고는 11만4천 명으로 증가했으며, 1995년 첫 통계가 발표된 후 최대 폭이었다. 한편 실업급여를 요구하는 이들의 수는 2천 7백만으로 증가했다. - 이는 코로나바이러스 봉쇄 이전의 3월 대비 두 배 이상의 수치이다. 실업률은 작년의 3.9%와 전 분기의 4.1%에서 4.5%로 증가했다. 이는 남성 자영업의 감소로 인한 것이다.(11)”

 

18~24세의 실업률은 16%를 웃돈다. 이는 번복될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또한 더 높아질 확률이 더 높다.), 결과적으로 노동자계급은 세분화될 것이다. - 실업자, ‘안정적’ 일자리 노동자, 무기계약 기간 노동자, 등. 직업이 ‘안정적’인 노동자들은 생활 여건에 있어서 다른 둘의 상태, 훨씬 악조건 상황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요소에서 벗어나야 할 압박을 받을 것이다. (지난해의 딜리버루-영국판 배달 어플리케이션-파업에서 발견된 동지들과 같은) 불안정한 이들에게는 어떻게 효과적으로 단결할 것인가가 문제이다.(12) 한편 대량 실직은 노동자 투쟁에 있어서 결코 좋은 근거가 되지 못했다.

 

학생 또한 이제는 투쟁해야 한다. 그들은 경제를 유지 및 지속시키기 위한 시도 속에 두드러진 희생자였다. 그들의 지주(즉, 대학)가 존속할 수 있도록 빚을 더 지기 위해 대학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은 학생들은 흉악범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 감금 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브리스틀, 글래스고에서 맨체스터, 런던에 이르기까지 저항이 있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요컨대, 대유행은 이미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추세를 가속해왔다. 이들 사안 초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2019년 문서에 언급되었다. 자본주의 이윤 축적의 새로운 순환 고리가 작동토록 하기 위한 충분한 자본의 규모를 평가절하할 필요에 대한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대신에 국가적 개입(체제 붕괴의 큰 특징 중 하나)으로 필연적인 대규모 충돌을 피해왔다. 슘페터적 ‘창조적 파괴’의 순간은 발생하지 않았다(맑스주의 용어로는, 축적의 순환 고리 종식에서의 일반적 평가절하). 2008년, 금융권은 ‘너무 거대해서 실패할 수 없다’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양적완화’와 같은 정책들이 체제의 실패를 피하기 위해 적용됐다.

 

최근에는 「파이낸셜타임즈」의 사설에서 다소 분명하게 인식한 바 있다.

 

“대부분 국가에서 대유행의 경제적 후폭풍을 완화하는 데 있어서 공공영역은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 또한 그들은 국가가 다시 한번 자본주의를 구해주기를 계속해서 요구한다. ... 국가 개입에 대한 최고의 사례는 시장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위해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는 것이다. 수정되지 않은 자본주의는 유권자들의 판단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2008년 이래, 충돌은 불평등에 대한 대중(특히 청년)의 분노가 완전한 체제 변화에 대한 요구로 쏟아질 것이라는 위협이었다. 바이든노믹스(보기로 대기업 및 부자들에게 물리는 세금-CWO)가 이행된다면, 기업과 고소득자들에게 생활의 부담을 가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이 또한 더 큰 계산을 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체제의 실패에 대한 더 명확한 표현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떠한 잠재된 장점도 옹호하지 마라. 그저 이윤 제도를 대신하여 그것을 계속 유지하라. 이것은 축적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체제-이미 기업의 부채는 세계 GDP의 102%에 달한다.-를 규탄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전의 전망에서 명시한 똑같은 “세속적 침체”를 지속시키는 것을 규탄하는 것이다.

 

영국의 브렉시트 문제도 여기에 추가된다. 심지어 브랙시트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그것이 단기적으로 경제 성장률의 하락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전문가에 따라, 2021년 0.3%에서 5% 범주) 현 정부는 집권 이래 여느 때보다 무능해 보인다. 영국의 지배계급(전 세계의 다른 어떤 나라들과 마찬가지로)이 체제의 경제침체에 대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국의 EU로부터의 탈퇴(EU는 이를 저지했다), 브렉시트가 경제를 자극할 것이라는 환상이 탄생한 것이다. 존슨 정부가 다가올 대재앙을 대비하기보다는 ‘허드 면책권’이 확립될 수 있다고 가장하도록 유도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대유행이 브렉시트의 계획에 가져올 영향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그들은 PPE와 같은 문제에 딴지를 걸고, 마스크를 제작하는 일에 수십억 달러를 기부했다. 보건 경험은 없지만, 개인적 연줄이 있거나 토리당에 기부하는 민간 컨설턴트를 추적해서 찾아내서. 부패, 낭비, 무능함은 수 백만여 개의 PPE가 목적에 적합지 못한 존재로 버려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비록 정부가 요양원에 ‘소생시키지 말라’는 통보를 훨씬 더 잘 공급했지만! 막판에 이르러 그들은 EU와 피해 제한협정을 맺었다. 협정 없는 브렉시트는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므로, 이에 대부분의 영국 자본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상태로 브렉시트는 영국 자본의 거대한 목표 자체이며, 대부분의 기업 조직으로 인해 그 결과는 여전히 두렵다. 2021년의 경제가 급격히 침체하면서, 대유행은 ‘리틀 잉글랜드’ 여단에게 체면을 세울 구실을 마련해 줄 것이다.

 

제국주의 경쟁의식

 

많은 사람에게 봉쇄의 시간은 늘어만 가는 것 같지만, 역사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다. 심지어 대유행 와중에도, 제국주의 전선에 그저 서 있기만 한 것은 분명 아니다. 대유행 동안 계속되는 내전 및 소규모 교전(인도/중국, 시리아, 예멘), 군사 위협(대만), 군사 폭력에 대한 새로운 소요들(나고르노-카라바흐, 티그레이)로 인해 제국주의적 긴장이 급격히 고조 되고 있다. 더욱이 상하이협력기구(최초로 군사적 차원의 대응. 미국은 영국 및 호주와 같은 국가들과 ‘민주주의 방어’ 기치 아래 활발한 반(反)중 연합을 형성 중이다)와 블록 형성(중국-러시아-이란을 파키스탄과 같은 국가들과 하나로 연합)이 명백히 가속화되고 있다.(15). 과거의 영국 파운드화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여전히 세계 최강국으로 당연시될지라도, 그리고 세계 통화로서 달러의 역할 유지를 포기할 준비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일일지라도, 그의 패권은 지속해서 도전받고 있다. 그런데도 아프리카의 ‘소프트 파워’를 통해서건 아시아에서의 노골적인 공격에서건 중국의 제국주의적 행진은 멈출 줄 모른다. 최근 신청자가 지나치게 많았던 최초의 국채 발행은 베이징의 또 하나의 작은 승리로 판명되었다. 중국의 영향력은 11월 15일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미 동맹국, 호주 및 일본을 포함하여 아-태평양 열네 국가들과의 체결)으로 더욱 커졌다(RCEP).

 

자본주의 강국들은 갑작스러운 전쟁을 벌이지 않고, 그들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상대 자본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거나, 다른 모든 선택권이 배제되었다고 느낄 때만 그렇게 한다. 순간의 대리전, 대체로 드러나지 않은 사이버 전쟁으로 대체하지만, 이들 역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미국 지배계급의 (매우 실제적인) 분열의 중요성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 중국의 가능성은 제쳐두고서라도, 중국의 (느리지만) 지속적 성장은 그 자체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가 호언장담했던 유라시아 전역의 기반 시설로 1조 달러를 투자(1940년대 미국의 마셜플랜 보다 7배 이상의 규모이다.)한 ‘벨트 및 도로’ 계획이 지금은 난관에 부닥쳐있다.

 

2016년, 중국의 국영 은행들은 ‘의존국’에 750억 달러를 빌려주고 있었는데, 이것이 2019년에 한낱 40억 달러로 급감한 것이다. 파키스탄 및 스리랑카, 말레이시아와 같은 국가는 채무 상환 연기를 논의 중이다. 그 사이 중국은 채무 불이행금액 150달러 중 60달러를 빌려줌으로써 베네수엘라의 경제 붕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두 제국주의 거국에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한편, 지배 엘리트들은 상대방에게서 오는 위험을 인식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상대방’에 대한 일상적 악마화에서 시작하여, 백신을 먼저 획득하기 위한 경쟁, 그리고 대유행을 일으킨 것에 대한 경쟁국의 비난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획득되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일반화된 전쟁에 대한 준비의 일부가 될 것이다.

 

환경 위기

 

또한, 장기적으로(단기간이더라도), 환경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초기 배출량을 일부 감소(항공편의 결항 및 재택근무자를 고려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에너지의 사용 증가는 모든 이득이 무효임을 의미했다. 2020년은 가장 뜨거운 해로 기록되며 막을 내렸다. 코로나19 위기는 그린 뉴딜 및 새로운 방식의 노동에 대한 모든 종류의 생각을 촉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윤 및 지속적 성장으로 몰아가는 것이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핵심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그들은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하에서는 기후변화를 완화에 대한 유의미한 변화가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120억 파운드의 존슨식 녹색 에너지 투자 계획으로 입증된다. 이는 이미 목적에 맞지 않는 시험 및 추적 프로그램에 낭비된 120억 파운드(17)와 비약적으로 비교된다. 예정된 투자의 적어도 3분의 1, 아마도 3분의 2가 새로운 자금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그것은 무색해진다. 뜨거운 정치적 입김이 지구 온난화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지구의 생태계가-여느 인간 문명의 외관과 더불어-우리가 아는 것처럼 생존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가의 노동자계급이 이 행성을 죽이고 있는 자본주의 정권을 전복해야 한다. 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한 생산에 근거한 사회주의 세계를 건설해야만 한다. 인간에게 남아있는 모든 위협은 단기적으로는 제국주의 전쟁이며, 장기적으로는 생태계 재앙이다.

 

  KakaoTalk_20210607_132732771.jpg

 

인간의 마지막 희망 – 세계의 노동자계급

 

인간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희망은 노동자계급 연대 투쟁이다. 2019년 말 이미 다음과 같은 징후가 있었다. 우리가 지난해 약술한 바와 같이, 은퇴 40년 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레반트에 이르기까지 파업 및 시위에서 그것이 재발견되기 시작했다. 짐바브웨, 터키,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소위 ‘신흥’ 경제국, 혹은 빈국 및 중위권 국가들에서 인플레이션이 높아질 것인데, 엄청난 달러를 빌렸음에도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통화에 대한 이자 및 만기 상환에 수입의 대부분을 사용하게끔 양산하기 때문이다. 달러 대출에 대한 접근성이 없는 이란과 같은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신용이 낮은 그들 역시 화폐를 찍어내는 데 의존한다. 이유가 어떠하든, 인플레이션의 결과는 경제 붕괴를 가중할 것이고, 삶은 더욱 비참해질 것이며, 전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이 실재적 굶주림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위기로 2019년의 저항이 멈췄지만, 이후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수천이 아니라면, 바로 지구 건너편에서 ‘우리는 당신의 이윤 때문에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구와 임금 삭감에 반대하는 수백의 파업을 보았다. 코로나19와의 전투를 위한 단계적인 긴급 조치들로, 이미 상당수의 노동자는 우리 ‘모두는 함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으며, 그들에게 실직이든, 낮아진 임금이든 어떤 식으로든 그 대가로 비용을 지급할 것이 요구된다. 현재도 전 세계적인 파업이 진행 중이며, 상당수는 몇 달간 임금을 받지 못한 이주 노동자들이 벌인 것이다. 정확히는 히드로 공항의 노동자들이 더 나빠진 임금과 조건으로 재계약 할 수 있다는 ‘제안’으로 계약이 철회되는 상황을 우리는 이미 목격하고 있다. 우리가 적은 것처럼, 그들은 파업하고 있지만, 이것은 노조가 통제하는 한 승산이 없는 매우 겸손한 법적 항의이다. 만일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자기 방어만 하려 한다면 그들 손에 투쟁을 떠맡아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세계적 혁명이 필요하다.

 

우리는 여기서 일부 유럽 국가의 소부르주아, 점주 등의 봉쇄에 대한 ‘혁명’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코로나를 부정하는, 극우파 및 신파시스트의 지원을 받는 소부르주아들에게 노동자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데 충분하고도 남는, 반동적이고, 인종차별적이며, 퇴행적인 안건만 있을 뿐이다. (이탈리아에서조차 마피아는 갈취할 것이 없다면 부정한 책임을 질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안건은 전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조직 혹은 조합에 근거한 부분적 대응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더욱 확장된 조직으로 결집할 것이 절박하게 요구되는데, 이는 체제의 실패에 대해 우리에게 또다시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시도들에 대한 현재의 저항을 넘어서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반발이 다가오고 있음을 이미 인식하고 있다.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비단 중국, 러시아, 이란뿐만이 아니다. 보기로, 프랑스 정부는 경찰의 부정한 행위를 가리기 위해 그것에 대한 불법화(더 이상의 조지 플로이드는 없다?)를 시도했다. 다른 한편, 호주와 같은 그 외의 국가들은 계급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것을 예상하여 그에 대한 준비로 경찰에 대한 군사화를 진행 중이다. 중요한 물음은 새로운 사회적 경련이 도래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가 우리에게 던져줄 모든 파장을 충족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이 얼마나 준비가 잘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미 많은 젊은이는 현재의 체제가 갈수록 인류에게 미래를 제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코뮤니스트 좌파에게로 오고 있으며,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은 지금 겪고 있는 것과 같은 성장을 누려본 적이 없었다. 오랜 계급 후퇴 이후 다소간 고무된 것이지만, 이는 작은 시작에 불과하며, 우리에게 거대한 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들의 최우선은 코뮤니스트를 위한 투쟁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과거 혁명의 파도 실패에서 등장한 다양한 거짓된 친구들, 보기를 들면 자본주의 국가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의 형태를 옹호했던 이들을 드러내는 습관적인 활동 이상의 것을 포함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트로츠키주의자뿐만 아니라, 맑스주의자-레닌주의자-스탈린주의자, 마오주의자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은 여전히 유지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또한 주로 소셜 미디어에 등장하는 ‘좌파 코뮤니스트들’은 반(反)자본주의 투쟁이 진실을 파헤쳐 특정 입장을 고수하려는 개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앞으로의 길은 피와 살이 있는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세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행해져야 하는지를 논의하고 조직하는 것이 혁명적 투쟁의 역할이다. 자본주의는 삶을 견딜 수 없게 하는 모순을 제시할지 모르겠으나, 자본주의 안에서 사회주의가 자동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 체제와 그 이상의 것들로부터, 혁명의 ‘케케묵은 흙더미’에서 자신을 제거할 수 있는 한 계급의 의식적 행동이어야 한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의식이란 불균일하게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 여기에서, 지금의 그곳에서, 그리고 역사적 시간을 통틀어, 의식이 확고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제 혁명 조직을 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형태의 자본에 대한 우리의 여러 투쟁 속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우리가 배운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코뮤니스트강령이라 일컫는다. 이것은 고정적이거나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한두 가지의 ‘위대한 뜻’의 산물도 아니다. 그러나 전 지구적인 노동자계급 투쟁의 모든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경험에 근거한다.

 

우리는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이 미래 세계의 정당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절대 멈추지 않고 반복할 것이지만, 그것을 생성하는 과정 일부가 될 의향이 있다. 비록 미래 세계 혁명의 성공 조건이 충분치 않을지라도, 국제 정치조직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점에 관한 생각에서 자칭 여러 ‘좌파 코뮤니스트’들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러시아혁명이 고립 속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아닌 자본주의 국가의 탄생을 가져온 사실로 인해 그들이 망설이는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결국 이것은 스탈린 치하 전체주의 독재정권의 가장 큰 축으로 이어졌다.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맹공격을 주도한 같은 당 역시 결국엔 노동자계급을 지배하는 자리를 차지한 사실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각인된 교훈이다. 그런데도 ‘모든 정치적 정당은 부르주아다.’는 사실이 아닌, 역사적으로 발견된 계급 전반의 조직을 통해서 노동자계급 스스로 사회를 운영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반(反)자본주의적 혁명에 있어서 당은 계급을 이끌 수 있지만, 계급 전체에 의해서만이 사회적 변혁이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계급은 누구에게도, 심지어 그 계급 정당에도 권력을 거저 주지 않는다.(19) 무엇보다 사회주의란, 그저 부의 새로운 분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회에 관한 것이며, 구성원들의 자발적 활동이 국가 관료의 수동적 수용을 대체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자신을 혁명적 대립으로서 조직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과 그 안에서 당의 역할은 필수 불가결하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코뮤니스트의 아기를 반혁명적 목욕물에 내던지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코뮤니스트의 과제는 코뮤니즘을 위한 사례를 주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조직의 기반을 확장하고, 다른 노동자들과 학습하기 위하여 계급의 모든 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해야 하는데, 그럼으로써 우리는 역사의 새로운 국면, 아직 쓰이지 않은 역사 속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혁명적 이론 없는 혁명적 실천도 없지만, 혁명적 실천 없는 이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증도 없다. 과도한 머리 없는 닭 같은 행동주의를 피하는 한편, 이러저러한 요구를 내세우지 않고 즉각적인 투쟁을 미래의 코뮤니스트 사회 -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한 승리-로 연결하기 위해 코뮤니스트들은 계급투쟁에 참여한다. 우리의 목표는 그 일을 더 넓히고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핵심 도구로서 미래의 국제적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우리의 대열에 합류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 2020년 11월, 연례총회에서 논의한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에 대한 관점 -

 

  KakaoTalk_20210607_132724535.jpg

 

 

<주>

 

(1) 현재 위기와 코뮤니스트 과제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0-02-07/the-current-crisis-and-the-tasks-of-communists

(2) 이후 전망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9-11-20/perspectives-for-the-coming-period

(3)

https://www.iif.com/Portals/0/Files/content/Research/Global%20Debt%20Monitor_April2020.pdf

(4)

https://economictimes.indiatimes.com/news/international/business/global-debt-hits-record-high-of-331-of-gdp-in-q1-iif/articleshow/77000231.cms

(5) 파이낸셜 타임즈 데이터워치, 19 October 2020

(6) 파이낸셜 타임즈, 19 November 2020

(7)

https://www.theguardian.com/politics/2019/nov/25/hospital-beds-at-record-low-in-england-as-nhs-struggles-with-demand

(8) 파이낸셜 타임즈, 델핀 스트라우스(Delphine Strauss), 7 October 2020

(9) 새라 오코너(Sara O’Connor) “징벌적 병가 규정으로 우리 모두가 대가를 치르게 된다.”, 파이낸셜 타임즈, 15 December 2020

(10) 파이낸셜 타임즈, 15 December 2020

(11)

https://www.ons.gov.uk/employmentandlabourmarket/peopleinwork/employmentandemployeetypes/bulletins/uklabourmarket/december2020

(12) '임시계약 경제(Gig Economy)'에서 조직화의 어려움을 강조하는 리버풀 쿠리어스(Liverpool Couriers)의 자기조직화 투쟁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9-12-02/the-self-organised-struggle-of-liverpool-couriers-highlights-the-difficulties-of

(13) 파이낸셜 타임즈, 22 October 2020

(14)

https://www.ft.com/content/168e908a-03a5-4a0c-b993-355e88afee41

(15)

https://militarywatchmagazine.com/article/putin-says-formal-russia-china-military-alliance-possible-amid-mounting-western-threats

(16) “시진핑 주석의 '세기의 프로젝트'를 되새김”, 파이낸셜 타임즈, 12/13 December 2020

(17) 파이낸셜 타임즈, 15 October 20

(18) 이후 전망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9-11-20/perspectives-for-the-coming-period

(19)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당」 정치 강령 (1952)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0-03-16/political-platform-of-the-internationalist-communist-party-1952

 

 

 

2020년 12월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옮긴이 ┃ 지나

 

 

<원문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1-02-08/communist-work-in-a-covid-crisis-a-framework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2호]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3)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3)

 

「전쟁인가 혁명인가」와 「혼돈인가 혁명인가」의 공식화와 토론과 논쟁의 가능성을 열어놓다.

 

  KakaoTalk_20210512_121731335.jpg

 

1. 들어가며

 

「코뮤니스트」 11호(2020.5.1.)에서 나는 「코뮤니스트」 10호에서 시작된 ‘역사의 경로’를 둘러싼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의 내부 논쟁을 정리하면서 계속되는 논쟁의 진행경과와 제국주의 전쟁 가능성으로의 논의 전개를 다루었다.

 

나는 논쟁(2)에서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의 ‘역사의 경로’에 대한 논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1)

 

첫째,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는 ‘역사의 경로’ 개념이 ‘해체’ 시기에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하는 반면, ICT(국제코뮤니스트경향), IGCL(코뮤니스트 좌파 국제그룹), NC(신경로), GCCF(걸프만 코뮤니스트 분파) 등은 ‘혁명인가 전쟁인가’의 의제가 여전히 유효하며, ICC는 계급투쟁을 폐기했다고 비판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맑스주의에 대한 이해,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이해 등의 근본적 논쟁을 내포하기 때문에 더욱 심화한 문제제기와 논쟁이 요구되는 과제로 남겨두기로 하자.

 

둘째, 해체 시기를 양대 제국주의 블록의 소멸(소련의 해체로 인한)로 보고 계급의 힘의 균형이 더는 의제가 아니라는 ICC는 소련을 포함한 이른바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기 때문에 이미 세계 자본주의 틀 안에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을 자본주의 해체라는 새로운 의미로 규정하기에는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계급투쟁은 필연적인 역사발전의 동력이기 때문에 ‘해체’ 문제를 자본주의를 넘어선 ‘인류의 파괴’로 본다면 우주적 차원의 더 넓고 깊은 인식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셋째,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의 논쟁이 맑스주의 원칙, 정치노선, 강령 등의 본질적 개념과 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기회주의’, ‘기생주의’라는 조직 문제로 한정되고 서로를 비난하는 방식으로는 세계혁명과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이루어 낼 세계혁명당 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사의 경로’ 논쟁이 깨닫게 했다는 점이다,

 

 

2. 입장의 공식화를 통한 대립구조의 명확화와 앞으로 전망

 

2-1. 「기생주의」를 둘러싼 비난의 심화

 

자신을 코뮤니스트 좌파라고 규정하는 스페인의 NC(신경로)그룹에 대해 ICC는 NC그룹에 대한 본질적 비판을 넘어서서 NC의 주요 활동가인 Gaizka가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PSOE)과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를 자유주의자이거나 극우세력의 일부분이라고 비난했다.(2) 더 나아가 「Gaizka의 귀청이 터질 듯한 침묵」(3)이라는 글에서는 NC와 IGCL(이전 ICC의 내부분파)을 함께 기생주의 그룹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ICC는 맑스, 엥겔스, 베벨, 트로츠키가 첩자로 몰렸던 보기를 들면서 Gaizka의 친구와 동료, 특히 IGCL의 깡패 같은 기생집단의 행동이 모험가 방어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에 놀라지 않는다고 하면서 IGCL이 ICT에 친화적인 관계로 보이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ICT에까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바쿠닌 같은 인물 세계관에 대해 IGCL과 Gaizka는 정직성, 조직원칙,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도덕성에 대한 의지가 안 보인다고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부르주아 국가의 고급관료와 접촉하고 협력한 인물을 프롤레타리아 정치 환경에서 우리는 참을 수 있는가? 이러한 개인들과 프롤레타리아 조직을 건설하고 미래의 혁명당을 준비할 수 있는가?”(4)

 

그런데 NC에 대해서 IGCL은 NC와의 소통에서 트로츠키주의와 강령적, 이론적, 정치적 그리고 전투적 단절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 바가 있으며(5), 코뮤니스트 좌파로서의 NC의 입장은 2020년 트로츠키 암살 80주년을 맞이하는 글에서도 드러난다. NC는 그중에서 혁명가들의 화석화와 성역화를 반대하면서도 제4 인터내셔널이 1차, 2차, 3차 인터내셔널과 달리 1933년 노동계급의 거대한 역사적인 패배 속에 건설되었음을 강조한다. 물론 1940년 이후 이른바 트로츠키주의가 통일전선으로 온갖 유형의 스탈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민족주의자에 대한 지지의 변명이 되고 있음을 비판하지만, 그 이전의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에 대해서는 코뮤니스트 좌파와 입장이 다름을 드러내고 있다.(6)

 

반면 ICT는 「레온 트로츠키의 암살-우리가 잊지 못하는 날」에서 그의 혁명가로서의 의미를 기리면서도 1920년대 이후 트로츠키가 러시아 안팎에서 혁명의 실패를 맞게 된 것에 대한 이론적, 정치적 접근에 매우 비판적인 ICT의 입장과 그들의 팸플릿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를 상기시키고 있다.(7)

 

한편 ICC는 스페인에서 새로운 그룹과 논쟁을 시작하며 그들의 입장을 넓혀가고 있다. Alicante의 그룹과 그동안 소통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만, 노동계급 자율성의 진지한 필요성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두 가지 요소에 동의했다는 진전을 보인다. 그런데 스페인 동지들이 팬데믹의 심각성에 약간 회의적이며 자본주의 해체의 역사적 단계와 관련된 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쇠퇴기 전쟁은 더는 사회 생산력 발전을 위한 경제적 필요성으로부터 도출되지 않고 본질적으로 진영 사이의 힘의 균형으로부터 나오는 정치적 원인이라는 ICC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8)

 

ICC의 편에 서서 IGCL과 NC를 기생그룹으로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새로운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은 IV(국제주의 목소리)가 있다. 그들은 최근 글 「코뮤니스트 좌파에 대한 신뢰 추락을 멈추라」라는 글(9)에서 이란의 Ahmad Farsi의 활동을 보기를 들어 NC와 IGCL을 코뮤니스트 좌파의 가치와 목표를 파괴하는 기생집단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2-2. 계급성격에 대한 논쟁 그리고 당

 

「코뮤니스트」 11호, 논쟁(2)의 마지막 부분 「(3-2) 최근 세계의 계급투쟁과 그 의미」에서 세계 노동자 투쟁과 사회 반란 투쟁이 자본주의에 맞서는 계급투쟁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내의 개혁 투쟁에 머무는 소부르주아 운동에 머물 것인가를 논의하면서 프랑스의 연금개혁에 맞선 투쟁, 노란조끼운동, 홍콩, 칠레 등지에서의 투쟁이 계급상호주의(inter-classism)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계급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10)

 

최근 ICC는 「‘연금개혁’에 맞서는 운동: 미래 투쟁을 준비하는 교훈을 도출하기」라는 글(11)에서 노동계급의 전투성 회복, 연대, 투쟁 인원의 증가, 계급 정체성, 계급의식의 회복으로 정리하면서 계급상호주의가 계급투쟁을 패배로 이끄는 죽음의 길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정체성 상실이 민족주의와 같은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손아귀에 잡힐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12)

 

이러한 계급 정체성의 문제는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미국에서의 사회반란운동이 확대되면서 다시 한번 계급 정체성의 의제를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에 던졌다.

 

「국가억압에 대한 저항과 반란의 물결에 대한 국제주의자 성명서」를 종합한 「A Free Retriever’s Digest」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13)

 

⓵ 미네아 폴리스 : 경찰 폭력과 계급투쟁 ((Flyer, IWG & Klasbatalo, 2020년 5월 30일)

⓶ 반란 만세 (무명 리플릿, 2020년 6월 1일)

⓷ 이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다 (「브루클린 철도」 권두언, 2020년 6월 3일)

⓸ 미국에서의 반(反) 경찰 폭력 저항 : 정치적 함의와 노동계급의 전망 (GCCF와 IGCL의 공동성명, 2020년 6월 5일)

⓹ 왜 우리는 숨 쉴 수 없는가 (국제주의자 전망, 2020년 6월 7일)

⓺ 경찰을 재원 고갈시키자 아니면 무엇? (Fredo Corvo, 2020년 6월 10일)

⓻ 인종주의에 대한 대답은 부르주아 반(反) 인종주의가 아니라 국제적 계급투쟁이다. (아모스, ICC 온라인, 2020년 6월 11일)

 

이러한 미국의 사회반란투쟁 역시 인종주의, 민족주의, 계급상호주의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이 문제를 ICT는 「자본주의는 끝없는 계급분할적, 인종적, 성적 공포다」라는 글에서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14) 노동계급 대부분은 유색인과 여성이며 축적과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억압이 필요한, 착취의 더 높은 수준에 종속되는 철칙을 가진 자본주의 아래에서 어떤 개선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식하는 길이라고 본다. 결국 자본주의는 끝이 없는 계급분할적, 인종주의적, 성적 공포이지만,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하나 징후를 제거하기보다는 계급분할 원인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따라서 오직 전체 억압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세력은 통일된 노동계급뿐이며, 조직화하고 통일된 노동계급은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유일한 세력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런데 계급정체성 문제와 미국의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사회반란투쟁의 관련성에 대해 최근 ICC는 이른바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이 노동계급의 영역을 확인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판을 하는 본격적 논쟁을 제기한 글을 발표했다.

이는 「역사의 경로」의 논쟁에 이어진 계급정체성 문제로 나아간 것이며, 앞으로 코뮤니스트 좌파 사이의 생산적인 토론을 여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ICC는 자신들과 ICT, 그리고 보르디가주의 세 그룹이 모두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모든 전쟁을 비판하고 그들에 대해 지지를 거부하도록 노동계급에 호소했으며, 부르주아의 어느 한쪽 분파를 정당화하는, 맑스주의의 왜곡된 유형을 이용하는 트로츠키주의와 같은 사이비 혁명가들과 구분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이들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들이 최근 프랑스 노란조끼운동을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새로운 형식으로 결론을 내는 등 노동자의 소부르주아 구호 뒤에서 개인으로 함께하는 계급상호주의 운동과 경계가 불명확하다고 분석하면서 4개 그룹을 대상으로 비판하고 있다.

 

세 그룹은 보르디가 경향의 그룹으로 「국제코뮤니스트당(ICP)」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Le Proletaire/The Proletarian; Il Partito Comunista/The Communist Party; /Programma Comunista/The Internationalist이고, 네 번째는 ICT이다.

 

ICC는 인종주의, 경찰의 잔인성은 자본주의의 산물이고, 생산양식 파괴를 통해서만 근절할 수 있다는 Le Proletaire의 입장, 그리고 이들 시위에 따른 폭동에 가담한 세력도 노동계급의 부분이라는 The Internationalist, Il Partito Comunista, ICT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15)

 

반란은 분리된 개인들의 집합이지 조직화한 집합적 성격을 지닌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방법이 아니라고 보는 ICC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온갖 혼란과 요구를 포함하지만, 노동계급의 본질적 요구를 방어하기 위해 행동하는 데 반해 미국의 저항운동은 노동계급의 통일을 위한 수단으로 봉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대다수가 계급상호간 또는 부르주아 영역에 동원된 경우 혁명가들의 역할은 그러한 ‘흐름에 맞서는’ 개입을 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이와 관련하여 ICC는 보르디가 그룹들이 당의 역할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혁명적 정치조직과 노동자평의회 같은 넓은 계급조직과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ICT에 대해서는 ICT가 보르디가주의의 대리주의 뿌리에 있는 오류에 대해 실질적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가 구분한 분파와 당 사이의 구별을 포기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보기를 들어 ICT의 리플릿 부제 “7. 도시 반란은 세계혁명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는 말은 바로 그러한 개념오류라고 지적한다,(16)

 

2-3. 다시 팬데믹 위기 시대의 제국주의 전쟁 논쟁으로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코뮤니스트 좌파의 한 축의 대표 격인 ICT는 다시 한번 최근 글 「지구적 팬데믹과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글(17)에서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기후변화 위기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즉, 지구화된 형식일지라도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조정된 반응을 만드는 데 부적절하다는 것을 확인해주지만, 반대로 코비드19는 두 지구적 제국주의 세력 (미국과 중국) 사이의 경쟁적 투쟁에 있어서 제국주의 경쟁을 강화하는 무기가 되고 있다고 보면서 ‘중국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는 서구 자본과 동맹을 맺은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한다.

 

코비드19의 영향으로 중국의 성장률은 27년 중 가장 낮은 성장률이고 미국도 더는 좋은 형국이 아니라서 미국과 중국은 모두 상대방을 바이러스를 생산하는 국가로 비난하는 음모론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더구나 2000년 이래 중국 군사비는 급증(2008년 이후에는 3배로)하고 있으며, 2020~35년의 시진핑이 내세운 대목표로 ‘완전히 현대적인’ 경제사회 건설은 미국에 대한 직접적 도전을 선언한 것으로 해석한다.

 

지금의 경제후퇴가 코로나 팬데믹에 무엇을 가져다줄 건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전 세계 국가들이 전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부채를 흡수하고 자본의 새로운 집중과 강화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앞으로의 전쟁은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예멘, 리비아 같은 지역전쟁이 아니라 지구를 포괄하는 지구적 전쟁이며, 싸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쟁은 이러한 용광로 체계를 무너뜨릴 계급전쟁임을 전 세계 노동계급과 논쟁을 지속해야 한다.(18)

 

「반란의 감염이 퍼지고 있다」는 글을 발표한 새로운 그룹인 「유아적 무질서가 아닌 좌익코뮤니즘」은(19) 자본주의 사회관계에 내재한 요구를 구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면서 여러 국가의 감옥에서 폭동과 반란, Hubei에서 항거, 이탈리아와 파나마 갈등, 봉쇄국들의 조치에 대한 불복종 등은 2019년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에 맞서는 투쟁의 준비였으며, 팬데믹은 프롤레타리아에 맞서는 자본주의 공격의 일반화라는 구호이고, 우리의 삶의 조건을 국제 수준에서 난폭하게 동질화시키는 기제이므로 부분적 국면에 대한 투쟁, 반(反)인종주의, 여성주의, 환경주의 등을 계급투쟁의 쟁점으로 이전시켜야 한다고 본다.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을 오직 부르주아지와 개량주의 목표를 추구하는 두 진영으로 틀 지우려고 하기에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재양극화 시도, 다시 말하면 모든 국가의 부르주아지와 자본분파 사이 투쟁으로, 그리고 그 배후에는 미국과 중국의 상업 전쟁과 같은 양극화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세계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ICT의 지구적 제국주의 갈등의 전망에 관한 글에 대한 동의와 문제 제기 글은 ICGL의 「혁명인가 전쟁인가」(16호, 2020년 7월)에 「ICT 문건에 관한 토론과 성찰」이라는 글이다.(20) 여기서 IGCL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데 실패한다면 현재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어떤 갈등도 일으킬 것이라는 축이 될 것이며, 이는 지난날 자본주의와 세계전쟁의 역사 속에 지배적이었던 고전적, 역사적 제국주의 상황의 틀과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2013년 「혁명인가 전쟁인가」 1호에서 자신들이 미국에 맞서는 제국주의 블록의 선두로 중국의 가능성을 부정했던 입장을 수정한다. 코비드19 위기로부터 나오는 제국주의 긴장의 상황은 예전과 달리 변화했음을 인정하면서 코뮤니스트 좌파 모든 그룹이 이 문제의 토론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2013년 테제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여 논쟁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ICT에 대해서는 그들의 글이 구체적인 용어나 조건에 대한 정의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책임을 말하는 것으로 불충분하다고 하면서, 국제자본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엄청난 대규모의 경제적, 정치적 격돌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앞으로의 토론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21)

 

이미 「역사의 경로」 논쟁에서 「혁명인가 전쟁인가」의 입장과 전혀 다른 입장과 해석을 한 ICC는 최근의 글 「제국주의와 군사주의 바이러스는 자본주의 안에서 절멸될 수 없다」라는 글(22)에서 ‘모두에 맞서는 각자’의 상황이 커지므로 제국주의 세력 사이의 투쟁이 격화되고 전쟁과 같은 야만과 혼돈을 자극한 결과로 세 가지 현상을 꼽고 있다. 첫째로 중동에서의 미국의 지도력 하강, 둘째, 미국과 중국 사이의 경제적, 전략적 갈등은 두 강대국 사이 긴장의 양극화로 나아가는 경향, 셋째, 포퓰리스트 트럼프의 예측할 수 없는 결정이 제국주의 세력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가져오고 최선의 전략에 대한 미국 부르주아지 내의 긴장을 강화한다고 보면서 구체적으로 제국주의 긴장의 진화에 대한 코비드19 위기의 영향에 대한 몇 가지 예측을 제시한다. 첫째, 트럼프가 팬데믹과 혼돈을 다루는 방식이 예측 불가능하여 외교정책의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라는 점, 둘째, 중국은 팬데믹의 거대한 수혜자가 아닌 이유를 경제적 수준, 정치적 수준, 그리고 제국주의 수준에서 그렇다는 점, 셋째, 러시아의 파괴적인 게임은 팬데믹의 수혜자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 넷째, 팬데믹은 여러 제국주의 사이의 ‘모두에 맞서는 각자’의 경향을 강화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팬데믹 위기를 조정된 방식으로 다루는 쇠퇴하는 자본주의 무능력은 모든 수준에서 분열과 혼돈 경향을 강화히고, 전체 인류와 노동계급에는 전쟁 같은 야만과 피 튀기는 학살의 격화만이 진행될 전망이라고 ICC는 결론 짓는다.(23) 이러한 ICC의 불명료한 입장은 「역사의 경로」에 대한 23차 ICC 대회의 입장의 연장선에 있으며, 결국 ‘혁명인가 전쟁인가”의 입장과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 절에서 다룰 ICC 내부의 논쟁(소수파 입장의 공개)을 검토하고 앞으로의 토론과 논쟁의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한다.

 

2-4. ICC 내부논쟁 - 대회에서 부결된 소수파의 다른 견해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부 논쟁(3)을 준비하면서 지금까지의 논쟁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반가운 글이 나왔다. 이 글은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ICC 23차 대회에서의 「국제상황에 대한 결의문」에 대한 ICC 내부의 소수파 의견과 그에 대한 ICC의 공식 입장을 동시에 담고 있다. 소수 의견을 대회에 제출한 Steinklopfer는 대회에서 부결되었지만, ICC 내부의 의견 차이를 드러낸 문건으로 1단계 논쟁의 중간 결산을 하는데 큰 자극제가 되었다.

 

「국제상황에 대한 ICC의 내부 논쟁」(24)을 요약 정리하기로 한다. 소수 의견을 낸 Steinklopfer(이하 S)는 ICC의 원안과의 차이를 첫째, 제국주의 긴장, 둘째,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 계급 세력의 지구적 균형에 있다고 보고 ICC가 제국주의 블록 사이의 재구성을 향한 양극화의 경향과 큰 블록 사이의 점증하는 군사 충돌 위험성을 과소평가한다고 지적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혁명적 전망의 상실 속에서도 방어적인 노동자 투쟁을 통해 계급 정체성을 찾고 혁명적 전망을 다시 찾는 심각성을 과소평가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부르주아지의 ’모두에 맞서는 각자‘의 경향이 해체의 중요한 특성이라는 ICC의 입장에 동의하지만, 그것이 주요 근본 원인의 하나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쇠퇴하는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요소로 구심력을 가지는 ’모두에 맞서는 각자‘의 경향의 우세론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으면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본주의 해체기의 주요경향은 없다고 비판한다.(25)

 

또한,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경쟁하는 두 제국주의 세력(미국과 중국) 사이의 제국주의 양극화가 지속하고 그것이 인류 미래에 위험을 초래한다는 전망을 하면서 양극화의 경향이 ‘모두에 맞선 각자’ 때문이 아니라 지구적 도전에 맞설만한 후보자가 없기 때문이고, 현재의 포퓰리즘은 전쟁을 향한 사회가 보이는 명백한 징후라고 진단한다.(26)

 

두 번째로 계급 세력의 균형에 대한 수정의견으로는 첫째, 전망 부재가 계급투쟁 어려움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둘째, ICC가 강조하는 1989년(소련, 동구의 몰락)은 일대 변혁의 사건이지만, 계급투쟁의 제국주의 투쟁의 전사(前史)에서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 셋째, 1989년의 극적인 사건은 계급 세력의 지구적 균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 넷째 자본주의 위기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경제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이론적 차원이 있다는 점을 구체적 견해 차이로 들고 있다.(27)

 

결론적으로 S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직 결정적 성격을 지니게 될 지금까지의 패배를 회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 전망(ICC대회에서 거부)이 있다고 보고, 이러한 계급투쟁의 전망과 코뮤니스트 좌파의 입장을 지니는 소수파와 젊은 코뮤니스트들의 출현은 반(反)혁명의 암흑기에도 가능한데 그들은 노동계급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처음이자 으뜸인 혁명적 본질의 표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1989년 이래 20년간 프롤레타리아트 주요 약점의 하나는 위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소수파의 실패였으며, 코뮤니스트 좌파의 역사적 그룹들은 특히 이러한 실패에 책임이 있다고 자성을 촉구한다.(28)

 

소수파 의견을 낸 S의 입장에 대해 ICC는 같은 글에서 「23차 ICC대회의 국제상황 결의문에 대한 Steinklopfer 동지에 대한 답변」을 싣고 있다. ICC는 S의 조직 해체에 대한 일반적 이해에 대한 설명이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해체단계에 작동하는 질적인 변화에 대한 이해를 보기를 들고 있다. 「질적인 변화」에 대한 강조는 ICT 등 다른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과의 본질적 차이를 드러내는 ICC의 기본입장이다. (이 부분은 이 글의 결론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ICC는 제국주의 적대에 대해서는 중국의 미국과 경쟁할 주요세력으로 부상을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중국의 부상이 해체단계의 산물이라고 논쟁을 비껴가고 있으며,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1980년대 계급 세력의 균형과 진화를 강조한 S동지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하늘에서 노동계급에 내려온 1989년 사건 이후의 질적인 변화를 S동지가 과소평가했다고 다시 질적인 변화를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ICC는 계급의 현재 어려움에 대한 S의 결론, ⓵ 포퓰리즘 부상이 전쟁으로 나가는 사회의 표현이다. ⓶ 우리는 의식의 잠재된 성숙이 아니라 증명할 수 있는 “잠재적 퇴행”이다 에 강력하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뚜렷한 반대 의견을 밝히고 있다.(29)

 

결론적으로 ICC는 S동지가 깊은 비관론에 빠진 인상이며 어디서 계급 정체성과 혁명적 전망이 재생할는지 모른다고 하면서도 코뮤니스트 좌파는 정치화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세대 앞에서 서로 냉혹한 비판을 해야 하며 무엇보다 기회주의적 본질의 오류를 비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ICC가 23차 대회에서의 내부 논쟁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사실에 대해 앞으로의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 토론과 논쟁이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고 서로의 상호비판이 치열하게 전개될 계기를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본원칙과 계급투쟁에 관한 판단은 아직은 변화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이는 최근에 ICC가 발표한 「코비드19 팬데믹과 자본주의 해체 시기에 관한 보고서」(30)에서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ICC는 1989년 소련⦁동구 몰락과 그로 인해 열린 사회해체라는 역사적 쇠퇴의 마지막 단계를 다시 확인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기를 2020년 코비드19 팬데믹으로 규정한다. 몇 가지 주요 특징으로 첫째, 1967년에 시작된 장기적 경제위기의 지속, 둘째, 팬데믹의 기원은 과잉생산의 만성적 자본주의 위기의 지속이 만든 환경파괴에 있다. 셋째, 팬데믹에 대한 세계 부르주아지의 반응은 과거의 동맹 사이 제국주의 세력의 균열된 경쟁 관계, 넷째, 개별 국가에서 사회에 대한 부르주아지와 국가의 정치적 통제 상실, 다섯째, 지배계급과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능력 저하를 들고 있다.

 

여기서 ICC는 전례 없는 ICT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한다. 이윤 동기를 팬데믹에 대한 원인으로 비난하는 ICT가 구체적인 상황, 몰락의 시기와 규모에 대해서는 신비에 머물러 있으면서 해체라는 특정한 시기의 특징이라는 ICC의 분석에 대해 시대의 변혁을 헤아리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과 양극화 경향에 대해서는 미국이 남긴 세계 제국주의 지도력 공백에 대해 중국을 포함한 어떠한 세력도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결론적으로 ICC는 자본주의 쇠퇴의 모든 시기의 공통적인 특징인 자기 파괴로의 근본적 경향이 해체 시기에는 전쟁으로부터 사회와 인류 전체에 자본주의 위협만을 증가시키는 세계적 혼돈으로 지배적 형식이 바뀌었다고 단언한다.

 

인류를 혼돈, 참상, 야만, 파괴와 죽음으로 이끄는 자본주의 야만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그래도 세계혁명이라는 끈을 놓지 않지만, ICC가 공통 언어로 사용하는 혼돈, 야만 등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일반화된 정치화가 긴 시간 동안 전진과 후퇴를 통해 발전하는 과정이지만, “미래는 계급투쟁에 속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결론을 놓치지 않고 있다.(31)

 

 

 

3. 결론 : 새로운 토론, 논쟁 그리고 연대⦁단결을 전망하며

 

이번 논쟁(3)에서는 「코뮤니스트」 11호(2020년 4월) 이후 5~6개월 동안 팬데믹 위기가 중첩되면서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부의 논쟁도 이와 무관하지 않고, 그동안 대립 구도가 절충을 통하지 않고 더욱 깊고 첨예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몇 가지 특징적 논쟁을 살펴보자.

 

첫째, NC와 IGCL에 대한 ICC의 비난이 더욱 거세어지면서 편 가르기가 일단락되었다.

 

둘째, ICC 내부 논쟁이 공개되면서 ICC 내부 반대 의견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내부 논쟁의 지속과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으로의 확장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셋째, ICC가 다른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 특히 ICT에 대해 계급 정체성 문제와 당 문제를 직접 제기하며 핵심적 논쟁 의제를 쏟아낸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넷째, 그러나 논쟁이 시작된 “혁명인가 전쟁인가”의 중심의제는 ICC가 전쟁을 ‘세계적 혼돈’으로 대체하면서 이윤을 강조한 ICT 등의 입장과 혼돈, 야만 등의 질적인 차원이라는 인류 문명 차원의 ICC 대립구조는 앞으로도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팬데믹 위기가 자본주의 위기,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전망, 맑스주의와 코뮤니즘 원칙에 굳건히 서 있는 젊은 코뮤니스트들의 성장과 발전, 계급 정체성을 회복하는 혁명적 노동계급의 복원은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그 과정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스트들의 연대, 단결, 통일을 위한 자기반성, 상호비판이 계속될 것이다.

 

2020년 11월 13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오세철

 

 

<주>

 

(1) 「코뮤니스트」 11호, 2020년 4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150~151쪽

 

(2) 「코뮤니스트」 11호, 2020년 4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163~164쪽, (주) 3

 

(3) 「Gaizka의 귀청이 터질 듯한 침묵」 ICC, 2020년 4월 11일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835/gaizkas-deafening-silence

 

(4) 윗글, 8쪽

 

(5) 「코뮤니스트」 11호, 2020년 4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148쪽

 

(6) 「트로츠키 암살 80주년을 맞으며」 NC, 「해방」 2020년 8월

https://en.communia.blog/what-did-trotsky-mean-for-communism/

 

(7) 「1940년: 레온 트로츠키의 암살 - 우리가 잊지 못하는 날」 ICT, 2020년 8월 21일

 

(8) 「팬데믹은 자본주의의 쇠퇴와 해체를 드러내고 가속화시킨다」 ICC, 2020년 4월 20일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845/pandemic-reveals-and-accelerates-capitalist-decadence-and-decomposition

 

(9) 「코뮤니스트 좌파에 대한 신뢰추락을 멈추라」 IV, 2020SUS 8월 12일

https://internationalist.ueuo.com/en/pdf/DefenceOfMarxismE.pdf

 

(10) 「코뮤니스트」 11호, 2020년 4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157~163쪽

 

(11) 「‘연금개혁’에 맞서는 운동: 미래투쟁을 준비하는 교훈을 도출하기」 ICC, 2020년 3월 13일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851/movement-against-pension-reform-drawing-lessons-prepare-future-struggles

 

(12) ICC는 특히 「노란조끼 운동에 대한 공개모임의 결산(대차대조표)」라는 글에서 거리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이 ‘혁명적’이지 않고 이러한 저항이 분명히 프롤레타리아트의 역동성으로 간다는 위험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혼돈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사회세력인 혁명계급으로서의 계급의식과 자신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있어서 계급상호주의는 주요 걸림돌이라고 결론짓는다. (ICC, 2020년 3월 29일)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890/balance-sheet-public-meetings-yellow-vest-movement

 

(13) 「A Free Retriever’s Digest」 2020년 6월 13일

https://afreeretriever.wordpress.com/2020/06/13/internationalist-statements-on-the-wave-of-protests-spring-2020/

 

(14) ICT, 2020년 6월 29일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0-06-29/capitalism-is-a-class-divided-racist-sexist-horror-without-end

 

(15) ICC, 2020년 7월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883/groups-communist-left-faced-black-lives-matters-protests-failure-identify-terrain

 

(16) 윗글, 5~8쪽

 

(17) ICT, 2020년 6월 14일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0-06-14/the-global-pandemic-and-imperialist-competition

 

(18) 윗글, 9~11쪽

 

(19) Proletarios Internacionalistas, 2020년 6월 28일

https://leftdis.wordpress.com/2020/06/29/the-contagion-of-the-revolt-is-spreading/

 

(20) 「혁명인가 전쟁인가」 16호, IGCL, 2020년 7월

http://igcl.org/A-Few-Comments-of-Discussion-and

 

(21) 윗글, 4쪽

 

(22) ICC, 2020년 9월 25일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920/virus-imperialism-and-militarism-cannot-be-eradicated-capitalism

 

(23) 윗글, 6쪽

 

(24) ICC, 2020SUS 8월 24일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898/internal-debate-icc-international-situation

 

(25) 윗글, 1~2쪽

 

(26) 윗글, 4~6쪽

 

(27) 윗글, 7~11쪽

 

(28) 윗글, 12~14쪽

 

(29) 윗글, 16~21쪽

 

(30) ICC, 2020년 7월 16일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924/report-covid-19-pandemic-and-period-capitalist-decomposition

 

(31) 「세계혁명」 386호, ICC 영국지부, 2020년 여름

 

 

<이전 글>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2)

- ‘역사의 경로를 중심으로’와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9116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9130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1)

- 역사의 경로를 중심으로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8758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3호] 백신 전쟁과 자본주의 바이러스

백신 전쟁과 자본주의 바이러스

  vassdsf.jpg

 

코로나19 감염병은 계속해서 사회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 세계적으로 약 3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회경제를 파괴하는 제3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가장 선진적이고 현대적인 자본주의 도시들에서 평화의 거품이 꺼졌다; 자본주의 야만성은 그 민낯을 보여주었다. 부르주아 문명의 요람인 프랑스에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코로나 유행병으로 일자리를 잃은 채 음식 꾸러미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1]. 주변부 자본주의에서는 대도시 자본주의보다 여건이 더 비인간적이고, 살아남기 위해서 쓰레기를 뒤져야만 하는 뼈아픈 현실이 되었다.

 

사실은, 지금까지 수년 동안, 더러운 자본주의 체제의 긴축 정책은 주변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중심 자본주의에서도 건강관리시스템을 괴롭혀왔다. 최선진국에서 인력과 의료장비 등의 부족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유사한 바이러스는 이 나라 또는 그 나라의 일부 관료들의 잘못된 관리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 바이러스의 산물이다.

 

우리는 코로나19 감염병 초기의 마스크 전쟁을 기억한다. 가장 문명적이며 가장 교양 있는 부르주아 정부는 문명과 도덕의 가면을 벗으려 했고, 도적과 폭력배들처럼, 싸움에 휘말려 서로 훔치고 전리품을 약탈하려 했다. 같은 문명화된 야만인들이 이미 백신 전쟁을 시작했다.

 

부르주아계급이 폭력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백신 전쟁의 결과를 줄이고 모든 국가에 백신을 접종할 수 있도록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백스(COVAX)라는 이름으로 코로나19 예방접종 계획을 수립했으며 180여 개국이 코백스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물론 미국은 코백스 계획에 가입하지 않았고 독자적으로 백신을 추진하고 있다. 사실, 코백스 프로그램은 모든 나라, 특히 가난한 나라에 코로나19 백신을 "공평하게" 접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코백스는 자본주의 세계의 역전이 허락하는 만큼만 공정했다.

 

EU는 6억 투여량의 화이자를 주문했으나 최근에 유럽에 대한 백신 공급을 축소한다고 발표했다. 확실히 아시아 국가, 중남미, 아프리카에 대한 화이자 공급은 유럽보다 훨씬 더 원활하지 않을 것이다. EU는 아스트라제네카가 영국을 우선시한다고 비난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EU에 인도될 선량의 수를 줄였고 영국 스스로 충분한 백신을 보유하고 있어야만 주문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EU는 전체 인구의 약 14%만 예방접종을 할 수 있었고 영국은 전체 성인 인구의 절반 이상인 약 44%가 예방 접종했다. 인도는 2021년까지 중하위 소득 국가들을 위해 약 10억 개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생산하기로 약속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영국에 백신 수출을 제한하는 것을 지지한다. 콘테(Conte) 이탈리아 총리는 화이자와 아스트라제네카의 코로나 백신 제공 지연을 용납할 수 없다며 두 회사[3]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폴란드는 코로나19 백신 제공 지연에 대해 유사한 법적 조치를 약속했다. 캐나다에 의해 주문된 백신의 수는 캐나다 인구의 5배이다. 이 목록은 계속된다.

 

전 세계 인구의 14%에 불과한 소수의 부유한 나라들이 코로나19 백신의 절반 이상을 구입했다.[4]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정의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문명과 문화이다! 주변부 자본주의에서 예방접종은 중심 자본주의보다 더 치명적이며, 이들 국가의 부르주아계급과 부유층은 민간 의료와 재정 능력에 따라 예방접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서민과 하층계급이 비용을 부담한다.

 

백신 전쟁은 너무 역겨워서 심지어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테드로스(Tedros)는 부유한 나라들은 국제적인 필요성과 상관없이 ‘나 먼저’라는 접근법으로 그들 자신을 우선시해 왔다고 말했다. 반면에 가난한 나라들은 백신 접종을 받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계를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세계가 심각한 도덕적 실패의 위기에 처해 있고 이 실패의 대가는 세계 최빈국의 삶과 생계에 의해 지불될 것이다."라고 말했다.[5]

 

자본주의 백신 전쟁을 고려할 때, 면역사회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한 나라에 백신을 접종하고 다른 나라에 백신을 접종하지 않고 백신을 한 나라의 70~80%만 확보하면 바이러스 변이가 백신 미접종 국에서 백신 접종 국으로 확산하기 때문에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 대유행병이 국제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한, 어떤 나라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대유행에 대항하는 투쟁 또한 국제적이어야 한다.

 

코로나19 백신은 그것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고려할 때 정부의 제국주의 이익에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도구를 갖는 것은 국제적인 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 등이 코로나19 백신 생산과 전 세계 백신 유통 독점을 위한 경쟁에 뛰어든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들의 의제는 인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 정치적, 실용주의적이다. 정부가 제약회사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과는 달리, 백신의 생산은 자본주의 규칙, 즉 수익성에 부합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이 69개 개발도상국에 백신을 기증하고 43개국에도 수출할 계획이라고 발표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6] 중국은 제국주의 이윤을 추구하고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코로나19 백신을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 수출할 예정이다. 중국의 코로나19 백신 정책은 지역 경쟁자인 인도를 긴장시켰다. 인도는 비슷한 정책을 추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보기를 들어, 네팔과 방글라데시는 두 나라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러시아도 특히 EU와 가까운 발칸반도에서 스푸트니크 백신의 생산과 수출을 가속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잔인한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다; 목표는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않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인간을 죽이는 것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아니라 인류를 학살하는 자본주의다. 백신을 접종할 수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달리 자본주의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은 없다.

 

문명화된 야만인들이 벌이는 백신 전쟁 앞에서 노동자계급만이 가장 위대한 계급연대와 높은 수준의 인간 문명을 제공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만이 계급투쟁을 통해 자본주의 바이러스를 근절할 수 있다. 생산과 서비스의 목표가 이윤이 아닌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인류를 위한 미래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계급만이 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이제 인류에게도 일종의 사회적 고립을 가져왔다. 현재와 같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이 항의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매우 제한적이다. 노동자계급은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인한 참상을 노동운동이 진전할 기회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노동자계급은 계급투쟁을 강화함으로써 세계혁명의 지평을 넓히고 지구상의 수십억 명의 불행을 종식할 수 있을 것인가? 미래의 계급투쟁에서는 그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피와 흙, 쓰레기 냄새가 난다. 노동자계급이 역사적 정언 명령인, 코뮤니스트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인류 파멸은 필연적이다. 인류 파멸은 세계전쟁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자본의 잔혹성, 바이러스 감염병 및 환경 파괴를 통해서 진행될 것이 틀림이 없다. 자본주의 야만성과 잔혹성을 종식하기 위해 국제주의자들의 대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유효하다.

 

코뮤니스트 혁명이나 인류 파멸이냐!

 

2021년 4월 10일

자한기리(M. Jahangiry)

국제주의자 목소리(Internationalist Voice)

옮긴이 ┃ 이명수

 

 

<주>

 

[1] 무료 음식 꾸러미를 받기위한 긴 대열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 스위스 등과 같은 다른 부유한 나라들 에서도 볼 수 있다.

[2] https://www.bbc.com/news/world-asia-india-56513371

[3] https://www.bbc.com/news/world-europe-55780431

[4] https://www.bbc.com/news/world-55795297

[5]https://www.cnbc.com/2021/01/18/coronavirus-vaccine-rollout-worlds-moral-failure-whosays.html

[6] https://www.fmprc.gov.cn/mfa_eng/xwfw_665399/s2510_665401/t1859985.shtml

 

 

 

 

<원문 출처>

https://internationalist.ueuo.com/en/pdf/VaccinWarsE.pdf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3호] 「미나리」, 한국이 미국을 바라보는 어떤 초상화

「미나리」, 한국이 미국을 바라보는 어떤 초상화

 

 

  20210609_120014554.jpg

 

어디를 가도 ‘미나리’가 천국이다. 봄이 제철인 나물 ‘미나리’는 물론, 한국에서는 지난 3월에 개봉한 영화 「미나리」도 많은 관객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작년부터 계속 이어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 인민들이 신음하는 가운데, 「미나리」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서사와 배우 한예리와 윤여정의 호연 등을 통해 점차 많은 사람에 영화 매력이 퍼지는 상황이다. 또한 수상 여부로만 영화의 가치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미나리」는 영화가 처음 공개되었던 미국의 독립영화제 ‘선댄스영화제’를 비롯해 무수한 영화제나 시상식을 거침없이 휩쓸며 평론가들의 찬사도 받고 있다. 이미 영국을 대표하는 영화 시상식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배우 윤여정이 상을 받았고, 곧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미나리」는 최소 1개 부문 이상에서 상을 탈 것으로 예상된다. (배우 윤여정은 4월 25일(현지시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나리」'의 순자 역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 편집자 주)

 

대체 무엇이 「미나리」를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도록 만든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잠시 언급했던 대로 「미나리」가 절망적인 상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끝내 희망을 발견하려 노력하는 ‘가족 드라마’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점차 미국 영화에서 비중이 늘고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이민 서사를 다루는 작품인 점도 서구 사회에서 주목받은 이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나리」가 일반적인 관객은 물론 비평가도 사로잡은 가장 큰 이유는 「미나리」가 일반적인 ‘이민 서사’를 넘어, 영화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1980년대 당시는 물론 영화가 공개된 2020년대에도 통용되는 ‘미국’에 대한 동경과 불안감이 겹쳐 있는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나간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미나리」에서 드러나는 이민의 과정이 쉽지 않음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치지 않는다. 1980년대 소위 ‘코리안 뉴웨이브’라 칭해지며 주목받았던 배창호 연출의 「깊고 푸른 밤」을 비롯해, 마틴 스코세이지의 유명한 작품인 「갱스 오브 뉴욕」을 비롯하여 한동안 미국 헐리우드 상업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아일랜드계 미국인를 주인공으로 삼은 갱스터 무비 등도 어떤 의미에선 이민의 고단함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예나 제나 자신이 본래 태어나서 살던 고향을 떠나, 다른 지방도 아니고 생판 다른 나라에서 살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부류의 작품은 이전부터 한가득 존재했다.

 

「미나리」가 다양한 결과 지층으로 ‘이민’과 ‘정착’의 과정, 그 속에서 이주민이 정착지로 택한 곳에 대해 지니는 복합적인 감정과 다시 거꾸로 정착지가 이주민을 대하는 환경과 자세를 복합적으로 비추며 섬세하게 이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이미 관객들은 영화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주인공 가족들에게는 어딘가 심상치 않은 지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던 ‘모니카’(한예리)와 ‘제이콥’(스티븐 연) 가족은 새롭게 살게 될 집에 도착하자마자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제이콥은 모니카와 깊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사할 장소를 정한 곳은 물론, 새집이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드넓은 푸른 잔디가 펼쳐진 곳이지만, 집은 컨테이너 가건물로 지어진 곳이며 설상가상으로 집에는 계단도 없다. 누가 봐도 제대로 된 집은 아니고, 잠시 머물다 떠날 목적으로 만든 용도의 집이지만 제이콥은 이곳이 자신들의 새로운 정착지가 될 것이라 호언장담을 하기에 바쁘다. 모니카는 이런 제이콥의 모습이 무척이나 마땅치 않다.

 

작중 정황상 이들은 미국에서는 꽤 오랜 시간 살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코리아타운’으로 유명한 LA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들은 왜 갑작스럽게 지금도 한국계는 물론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쉽게 보기 어려운 아칸소의 한적한 시골 마을로 이사한 것일까. 영화는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가끔 드러나는 제이콥의 대사를 통해 어느 정도는 추측할 수 있도록 만든다. 제이콥은 자신이 ‘한국 사람’인 것에 대해 자부심을 지니고 있지만, 정작 그는 미국에서 만난 ‘한국계’에 강한 불신과 환멸을 느끼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가족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기는 원해도, 같은 한국계 미국인들에게는 뭔가 큰 배신을 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이콥이 바라는 ‘아메리칸 드림’은 같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없으면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꿈이다. 동시에 제이콥은 같은 한국계 미국인이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도 불안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작중에서 그는 역사적으로도 많은 한국계 이민자들이 종사했던 직종인 ‘병아리 감별사’의 베테랑이지만, 그는 그 일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임금이 박봉인 것은 물론, 내심 그는 이 일이 자신의 권위나 가치를 하락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오히려 그는 자라면 암탉이 되어 달걀을 낳을 수 있는 암컷 병아리만을 살리고, 수컷 병아리들은 가차 없이 소각로로 보내는 모습에서 좀처럼 행사하지 못했던 ‘가부장의 권위’를 고민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제이콥은 하루빨리 병아리 감별사 일에서 벗어나, 아칸소의 푸른 잔디에서 고추나 배추 같은 한국 농작물을 심어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잔뜩 팔아 성공하고 싶어 한다.

 

제이콥이 한국계이지만 가족을 제외한 다른 한국계는 멀리하고 싶어 하지만 다시 그들을 상대로 한몫을 단단히 챙기고 싶어 하는 모습,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가부장적 권위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자세, 그리고 1980년대에도 절대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선망했던 ‘농장주’에 대한 꿈은 미국을 대하는 한국인의 어떤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제이콥의 독선적인 행보가 못마땅한 모니카 역시 마찬가지이다. 매사에 즉흥적이고 결코 쉽게 이룰 수 없는 꿈에 집착하는 제이콥과 달리 모니카는 겉으로 보기에는 이성적이고 차분해 보인다. 그러나 그 역시 미국의 생활이 불안한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칸소에 와서 남편 제이콥과 병아리 감별사 일을 시작하며 우연하게 만난 한국계 이민자에게 ‘한인 교회’를 묻는 것은 물론 부부의 아들 ‘데이빗’(앨런 김)에게는 딸 ‘앤’(노엘 조) 이상으로 끔찍하게 아낀다. 모니카는 그저 겉으로만 불안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교회’라는 일종의 플랫폼을 통하여 같은 ‘인종적 동질감’을 지닌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어하고 다시 ‘아들’을 통하여 자신의 결핍을 대리 만족하고 싶어 한다.

 

그 과정에서 정작 이민자 2세대인 ‘데이빗’은 부모님과 점차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선천적인 심장병을 지니고 태어난 데이빗은 지병으로 인해 더더욱 부모님들의 관심이 있지만, ‘한국인 남성’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제이콥은 물론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계속 ‘자신에게 좋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를 강권 받는 모니카도 모두 제이콥에게는 낯설고 어색하다. 부모님은 모두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국 문화에 익숙한 데이빗은 정작 부모님들이 어려워하거나 표면적으로만 대하는 ‘미국인’들과 친하게 지낸다. 아칸소에 한인 교회가 없어 모니카가 꿩 대신 닭으로 찾아간 현지 교회에서 모니카가 다른 백인 여성과 좀처럼 소통하지 못하는 가운데, 데이빗은 스스럼없이 백인 아이와 친하게 지내고 심지어는 곧바로 서로의 집에 놀러 갈 약속까지 잡는 모습은 데이빗의 정체성이 이미 부모님과 다른 방향으로 분화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20210609_120016287.jpg

 

이렇게 같은 가정 내에서도 균열이 반복되는 가운데 새롭게 이사한 모니카를 응원하기 위해 한국에서 방문한 모니카의 엄마이자, 제이콥에게는 장모님인 ‘순자’(윤여정)의 등장이 큰 파문을 만든다. 순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형적인 ‘한국인 할머니’의 모습이다. 대충 간단한 영어 단어 몇 가지는 쓸 수 있지만, 순자는 언어는 물론 행동도 ‘과거 한국의 정서’에 단단히 묶여 있다. 모니카에게는 오래간만에 보내는 가족의 존재가 너무나도 반갑고 순자가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온 한국 음식의 존재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지만, 데이빗은 순자가 자신의 할머니라는 사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동화나 각종 매체에서 봐왔던 ‘미국인 할머니’의 모습과는 생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고, 쿠키나 케이크를 잘 굽지도 못하며, 오히려 자신의 치부를 장난스레 놀리는 모습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미나리」의 가족 구성원들은 표면적으로는 ‘가족’으로 묶여있지만, 구성원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서로를 점차 멀리하고 있다. 영화의 중반부부터 모습을 등장하는 순자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고 제이콥이나 모니카가 주변의 다른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 역시 아니다. 모니카는 앞서 언급했듯 ‘한국계 미국인’이 아닌 다른 미국인들을 무척이나 불편해하고, 제이콥은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환멸을 지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른 미국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역시 아니다. 넓고 푸르지만, 주변에 다른 이웃 하나 발견하기 어려운 새로운 고향 아칸소의 풍경처럼, 이들은 서로 다른 성공의 꿈을 꾸지만 이미 이들은 해체 일보 직전의 상황이다. 그저 이미 ‘가족’으로 묶여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다시 가족을 벗어나는 순간 더욱 괴로운 상황을 원하지 않기에 이들은 남아있는 것이다.

 

「미나리」는 이러한 관계의 충돌을 연속적으로 그리며 한국에서 미국을 바라봤던 시선을 점차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작품은 그저 ‘아메리칸 드림’이 허상이라는 점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머물러 있지 않다. 대신 그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백일몽이 어떠한 맥락에서 태어나는지, 같은 백일몽이라도 왜 그 허상을 쉽게 놓고 싶지 않아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작중의 제이콥은 물론, 역사 속에서 이민을 택한 한국인들 역시 쉽게 미국을 단일한 존재로 말했지만 「미나리」 속의 주인공들은 물론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등장인물이나 존재들은 미국이 절대 단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더 계층적이며 분절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 계층의 공간에서 자신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하층 계급에 놓인 한국인 이민자들은 언젠가는 자신이 계급을 상승할 수 있다는 꿈을 꾸지만, 그 꿈은 다시 역설적으로 자신이 어떤 위치와 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의도적으로 망각할 수 있기에 꿀 수 있는 꿈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미나리」는 단순한 가족 드라마나 이민 이후의 고군분투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동시에 무조건적인 절망으로 일관하지도 않는다. 어찌 되었든 새로운 터전에서 정착하게 되었다면, 다시 어떻게 삶의 맥락을 만들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마치 제이콥도, 모니카도 저마다 자기가 바라는 성공만을 말할 뿐 쉽게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는 상황에서 데이빗만이 같은 마을, 하층 계급의 백인 아이와 친구를 맺는 모습에서 드러나듯 성공이라는 허울의 목표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주변을 다시 돌아보기를 말하는 것이다. 마치 습해서 푹푹 발이 꺼지는 뻘밭이지만, 그러한 공간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는 ‘미나리’처럼 말이다.

 

성상민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상근활동가, 문화평론가

 

 

<편집자 주> 이 글은 본지의 요청으로 싣게 된 소중한 기고 글로 「국제코뮤니스전망」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코뮤니즘 세상에서... 예술, 공예/장인, 전통 작품은?

코뮤니즘 세상에서...

예술, 공예/장인, 전통 작품은?

  KakaoTalk_20210603_131546428.jpg

 

코뮤니즘에서 사회적 생산력은 향상될 것이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킬 것이고, 경제는 더는 자본 축적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에 기초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 공예/장인, 또는 대량생산을 허용하지 않는 전통적인 형태의 생산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작은 규모로 직접 변형하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함으로써 소외가 뒷문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예술, 공예 또는 전통적인 생산과 같이 대량 생산이 아닌 형태의 생산은 코뮤니즘에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코뮤니즘에서... 노동생산성은 각자와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욱 발전한다. 그렇다면 공예/장인, 예술 등의 모든 전통적인 형태의 생산이 그들의 비생산성 때문에 사라지지 않을까? 사회적 대량 생산과 직접 노동, 개인 노동을 분리함으로써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각 개인의 변화된 역량의 발견으로부터 소외가 되돌아오지 않을까?

 

 

코뮤니스트 도덕, 노동생산성, 그리고 희소성의 인위적인 생산에 대한 소부르주아지의 사랑

 

우리 코뮤니스트는 자본주의가 문명의 위기에 점점 더 자주 의지하게 되면서 인간의 발전과 필요를 불필요하게 일상적으로 거부하는 인위적인 희소성의 창출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체제의 논리에 물들어 있는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소부르주아지는 투기에 참여하기 위해 끊임없이 희소성을 창출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가장 최근의 보기는 비용 없이 무제한으로 복제할 수 있고, 암호를 사용하여 독특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디지털 예술가들이 황홀해하는 장면이다. 이에 많은 사람이 박수를 보내는 작은 투기 붐.

 

다른 경우에는 그것을 뻔뻔스럽게 사회적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남미 각지의 매우 열악한 ‘골판지 수집으로 생활하는 사람들’(cartoneros, 영어로는 waste picker)이 현지 작가들의 책을 베껴 쓰고 제본하는 카토네라(cartonera) 출판 운동의 경우이다.

  KakaoTalk_20210603_131721563.jpg

 

가장 위태롭고 빈곤한 노동력 착취에 참여하기 위해 보헤미안적 소부르지아지의 가학적인 쾌락을 넘어 심지어 상징적일지라도, 손으로 무언가를 베끼는 것이 무엇에 필요할까? 독특하고 희귀한 복사본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오늘날 기술은 이미 배포된 새 복사본에 많은 노동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어떤 책의 복사본도 무한대로 제작할 수 있다.

 

예술과 공예품 생산에 대한 창조적 소부르주아지의 접근은 희소성, 비참함, 인간의 노동력 착취를 통한 즐거움이며, 코뮤니스트 사회는 지금의 이런 경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래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코뮤니즘에는 그런 일과 그런 도덕이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코뮤니스트 사회의 풍요와 대량 생산

 

  KakaoTalk_20210603_131544097.jpg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공동체의 비극’에 대한 거짓 신화. 그리고 코뮤니즘에서는 더더욱 그렇지 않다.

 

예술과 공예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더 넓은 견해를 반영한다. 맬서스주의자들(Malthusian)과 생태학자들은 좁고 반동적인 시각에서 풍요를 대규모 농축 공장과 환경 파괴와 연관시킨다. 그들은 심지어 음식에서도, 우리가 고기를 먹는 것을 멈추게 하고, 세계는 유한하며, 이미 우리 인간이 너무 많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장인적인 형태의 생산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약간의 반동적 메시지이다. 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가능한 사회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더라도 실제로 파괴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노동자가 너무 많고 너무 많이 요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필요를 요구하는 대신에 그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희생과 박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답답하고 반동적인 자본가의 비전이다.

 

우리는 이미 이 연재 글의 이전 편에서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우리 앞에 놓인 역사적 경향에도 새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코뮤니즘에서의 농업 생산은 생태적일 것이지만, 장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자동화될 것이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생산력은 엄청날 것이지만, 인간의 필요에 따라, 자본 축적이 아닌 만족을 위한 최적의 규모, 그리고 사회적 생산이 변화된 환경과의 공동 대사의 필요에 따라 분배될 것이다.

 

 

코뮤니즘의 예술과 공예

 

반면에 자본주의가 주는 풍요와 직접적인 모순에 빠지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경향은 예술, 공예 또는 전통적 생산의 실종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라진 것은... 그들은 해체되었고, 아무도 그들의 기본적인 공급에 의존하지 않으며, 더는 축적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예술이 사라진 곳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이다.

 

책의 보기를 계속해보면 : 오늘날 전자 형식은 실제로는 유통(배포) 단위당 추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책을 복제할 수 있다. 1,000부 배포에서 10만 부로 늘리는 것은 디지털 파일을 다운로드하는 사람의 수에 달려 있다. 이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풍요를 가장 가깝게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진보적이었을 때 자본주의 재산의 특징인 바로 그 법적 제도에 대한 진정한 변형되고 기괴한 희화화인 지적 재산에 관한 수많은 모순과 모든 괴물 같은 법안을 만들어내는 이유이다.

 

그러면 물리적 객체와 그 정교함은 어떻게 될 것인가? 수천 명의 사람이 그것에 관심을 두게 되고 기술을 배운다. 책의 제본 및 물리적 생산은 더는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수단이 아니다. 물리적 대상과 그 창조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그것은 그 자체로 끝이다. 읽고 싶은 욕구 충족을 넘어서고 싶은 사람들은 그것을 편집하고 아름답게 만들고 손으로 묶는 것을 즐길 수 있다.

 

이것은 코뮤니스트 도덕이 나타내는 것 이상의 단계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축적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고 자신과 서로를 위한 목적이 되는 세계를 나타낸다면, 자본주의가 접하는 최소한의 풍요의 경험은 우리가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모든 인간 활동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리라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사회화와 임금노동 폐지가 가져올 인간 본성의 급진적 변화에 접근하고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이며, 이들과 함께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노동 분업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분업의 종식은 단순한 조직적 사실이 아니라 코뮤니즘에서 사람들의 삶 전체 경험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능력을 자유롭게 하고 사회화하기 때문이다.

 

특정 개인에 대한 예술적 재능의 배타적 집중과 이에 따른 광범위한 대중에 대한 억압은 노동 분업의 결과이다.··· 어쨌든 사회의 코뮤니스트적 조직과 함께, 예술가의 종속이 사라진다. 이는 전적으로 분업에서 비롯되며, 또한 개인의 특정한 예술에 대한 종속은 그를 전적으로 화가, 조각가 등으로 만든다; 바로 그 이름은 그의 직업발전의 한계와 노동 분업에 대한 의존성을 표현하고도 남는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화가가 없고 다른 활동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사람만 있다.

(맑스 엥겔스, 「독일이데올로기」, 1846)

 

 

예술과 공예는 삶의 수단에서 해방되고, 소수의 전문적인 활동과 독점은 사라지고 종의 사회적 지식과 의식으로 통합된다. 즉, 코뮤니즘에서는 모든 인간의 활동이 예술이 되는 경향이 있다.

 

  KakaoTalk_20210603_131538523.jpg

 

그리고 시인들, 예술가들, 장인들... 그들은 그냥 사라질까?

 

그렇다, 코뮤니즘에서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화가 지식과 지위의 독점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사라질 것이다. 위험하거나 유쾌하지 못한 직업이 사회화되는 것처럼 예술작품과 의미 있는 물건의 제작도 사회화될 것이다. 물론 코뮤니스트 사회로의 전환 과정에서 오늘날 자본주의가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진정한 예술가와 시인은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

 

  KakaoTalk_20210603_131536564.jpg

 

오늘날 시인은 단지 저주받은 사람일 뿐이다. 현대 사회가 그에게 던지는 이 저주는 그의 혁명적 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나 시인이 완전히 변형되어 시와 과학에 관한 공통된 인간의 기원을 인식하게 될 때, 그가 강요받은 보호구역에서 벗어나 지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모든 사람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협력과 함께, 전 세계를 미지의 것에 대한 도전 상태에 올려놓을 의기양양한 신화를 창조할 것이다.

(「Péret tiene la palabra」 ,뱅자맹 페레(Benjamin Péret), 1943)

 

 

  KakaoTalk_20210603_131751484.jpg

 뱅자맹 페레(Benjamin Péret)

 

2021년3월21일

해방

 

 

<원문 출처>

https://en.communia.blog/in-communism-art-craftsmanship/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노동자 시와 노래 (2012~2021)

코뮤니스트 노동자 

시와 노래 

(2012~2021)

 

KakaoTalk_20210531_201436736.jpg

 

"어떤 이들은 말한다. 현실은 확장되고 변하는 것이라고. 또 어떤 이들은 우려한다.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깃발 아래 예술가들이 똘똘 뭉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고! 그렇다. 우리는 보고 있다. 세상이 변해 가는 것을. 하지만 그 속에서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중대한 도전이 가로놓여 있고 노동예술의 내용은 그 예술적 미학이나 형상화가 늘 낡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날로 버텨내기 힘겨운 강퍅한 삶 속에서, 부르주아들이 만들어놓은 공고한 질서의 전복을 꿈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밤은 별빛처럼 찬란하다. 사라지려야 사라질 수 없는 노래는 뜨겁다. 인류 문명과 문화예술이 낳은 생명이 노동이라면, 문학도 그 생명의 유기체로서 노동의 구성물질이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1%와 99%, 부자와 가난뱅이들로 전 세계 민중과 노동자들의 삶이 철저하게 분할된 오늘의 시대를 살면서, 다시 한번 선연한 프롤레타리아계급 문학의 복원을 꿈꾸며...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스무 명이 넘게 죽어 나가도 세상은 노동자를 외면하고 있다. 문학의 눈이 분명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서글픈 역사이며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노동의 현실이다. 자본은 세계화되었고 자본의 지배는 총체적이다. 노동자들은 꼼짝달싹 없이 자본에 포위되었다. 지구촌 전체가 그들의 식민지다. 중세 이후, 너무나 잔학한 형벌이라고 해서 금지되었던 화형(火刑)을 이명박이 남일당에서 자행하지 않았던가? 기억하라, 우리도 똑같이 너희를 산 채로 불에 태우리라!"

 

('문학, 그것은 짓눌린 삶으로부터', 임성용, 「코뮤니스트」 창간호, 2012년)

 

 

 

 

KakaoTalk_20210531_201446619.jpg

 

「코뮤니스트」 창간호, 2012년

 

 

 

KakaoTalk_20210531_201443822.jpg

 

「코뮤니스트」 창간호, 2012년

 

 

 

가슴이 저미도록

 

 

 

잊지 마라

사랑은 빗방울 같은 것

내가 이 땅 위에 한 방울 빗물로 떨어져

코뮤니스트의 이름으로 스며들기 위하여

오로지 그 하나의 신념을

사상과 실천으로 펄펄 담금질하기 위하여

나는 내 몸을 거침없이 달구는 풀무가 되고자 했나니

 

나는 이미 부박한 삶을 떠난 내 영혼이

가장 가까운 지척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안다

사무치게 안타깝지만 조금은 빨리 돌아가

회호리바람 같은 청춘을 여기, 내려놓고

붉은 가슴 붉은 글씨에 새겨진 혁명의 씨앗을

내 육신의 마지막 핏줄 속으로 흘려보내고 간다

저주받은 노동의 대지에 뿌려진 피와 땀들이

세상의 모든 선과 악으로 부딪쳐 싸울 때

나는 가슴이 저미도록 못다한 내 노래를 부르리라

 

오늘, 내가 고요하게 잠든 노을빛으로 사라져도

내가 맞선 적들은 여전히 나를 밟고

욕창처럼 욱쑤시는 뼈마디에 투쟁의 노래 그치지 않고

나는 사랑하는 계급과 동지와 혁명의 숨통을 끌어안고

환한 웃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되돌아오리라

날마다 나는 다시 태어나 내 앞의 일생을 마저 살고자

나를 찾아 내가 내일, 낯선 사람처럼 걸어온다면

아! 나는 얼마나 가슴이 저미도록 기쁠까

 

어머니시여, 아내와 아들과 누이들이여

벗들이여, 눈물겹게 보고픈 사람들이여

내 끈질기게 빛나던 눈동자와 열렬한 음성을 기억해다오

살다 살다 언젠가 나는

덧없이 잊혀지는 내가 못견디게 그리워지면

나는 터벅터벅 나를 찾아와

가슴이 저미도록 내 이름을 부리리라

마음이 애달픈 친구여

차마 나에게 작별을 고하려거든

너는 끝까지, 가슴이 저미도록 살다 죽어라!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2호, 2013년

 

 

 

 

 

코뮤니스트의 운명

고 남궁원 동지의 3주기를 기억함

 

 

 

이름 없이

한 명의 코뮤니스트가 사라지는 것이

유독 슬픈 것만은 아니다

그의 생이 온통 프롤레타리아트의 곁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도록 눅진한 날이었으나

그는 좀처럼 비 개인 맑은 하늘을 포기 하지 않았다

 

곁을 내어주고 난 그의 빈 몸에

비 개인 맑은 하늘처럼 채워지는 코뮤니즘의 길

 

남궁원 동지의 몸은 이미 저승으로 저물었으나

그가 남긴 웃음은

혁명정당 강령의 첫 번째 문장 같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곁이 되고 그 웃음에 베어드는 일,

낮은 곳에서 솟구치는 외침은 죄다 그의 문장이었다

조용조용 들어주는 그의 문장, 문장들

토닥토닥 토닥여 주는 그의 문장, 문장들을 거치면

 

아물지 않는 것이 없고

견디지 못할 것이 없고

해내지 못할 일이 없다

 

이름 없이 계급투쟁을 살고

이름 없이 혁명을 살고

이름 없이 사멸하는 국가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코뮤니스트의 운명,

가장 빛나는 전망이다

가장 빛나는 전망

남궁원 동지여!

더 할 수 없는 명예여!

 

 

詩 ┃ 조성웅

「코뮤니스트」 5호, 2017년

 

 

 

 

 

미루나무

 

 

미루나무는

비바람에 쓰러진 게 아니었다

가슴이 저미도록 사무친 것이 있다

 

어떤 통곡이 있다

어떤 기억이 있다

달그림자 드리워진 올가미가 있다

 

울며 울며 땅을 치더라는

울지도 못하고 하늘을 보더라는

목 놓아 부여잡던 손톱자국이 있다

 

검은 구멍 속으로

깊숙이 햇볕이 든다

시구통으로 질질 끌려나오는 사람이 있다

미루나무 혼자서 붉은 담벼락 언덕을 본다

 

피맺힌 것이 있다

잊혀진 것이 있다

무덤의 유골로도 남아 있지 않은 것

사라진 뼈에 사무친 것이 있다

 

외로운 목숨이 질 때

미루나무가 쓰러질 때

인간의 땅에 태어나 푸르른 미루나무가 있다

인간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마지막 숨결이 있다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7호, 2018년

 

 

 

 

 

동태

 

 

 

동태는 강자였다 콘크리트 바닥에 메다꽂아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동태를 다루려면 도끼 같은 칼이어야만 했다

아름드리나무 밑둥을 통째로 자른 도마여야 했다

실패하면 손가락 하나정도는 각오해야 했다

얼음 배긴 것들은 힘이 세다

물렁물렁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한때 명태였을지라도,

몰려다니지 않으면 살지 못하던 겁쟁이였더래도

뜬 눈 감지 못하는 동태가 된 지금은

다르다

길바닥에 놓여진 어머니의 삶을

단속반원이 걷어차는 순간

그 놈 머리통을 시원하게 후려갈긴 건

단연 동태였다.

 

 

詩 ┃ 박상화

「코뮤니스트」 9호, 2019년

 

 

 

 

 

마트 계산대에서

 

 

무겁고 긴 발을 끌고 들어와

시간의 목을 쥐고 걷듯이 가게를 한 바퀴 돌고

마침내 천 원짜리 아이스티를 한개 갖다 놓고

꼭 다문 지갑을 열어

보풀이 인 고지서들을 주섬주섬 꺼내놓다가

지갑의 바닥엔 바닥뿐임을 확인하고는

다시 주워 담는 동안

여기저기 삐져나온 살들 숨쉬며

오래 묵은 번뇌를 흘리고

퉁퉁한 큰 손이 작은 호주머니를 몇 번 파더니

우물 밑처럼 깊은 곳에서 건져 올린 건

먼지, 단추, 돌멩이, 그리고 수많은 주름을 가진

지전 한 장!

 

다시 먼지들을 주머니 깊이 묻어두고

두 손을 받쳐 아이스티를 가슴에 품고

느릿느릿 무겁고 긴 발을 끌고 환한 세상으로

나가시는 기나 긴 그림자

 

 

詩 ┃ 박상화

「코뮤니스트」 9호, 2019년

  

 

 

 

 

슬픈 대문짝

 

 

대문짝에 폐업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써 붙인 가게

그의 슬픔도 대문짝만했을 것이다

절을 한번 할 때마다 시를 한편씩 쓰는 마음으로

백팔 배를 하고,

천팔십 배를 하고,

삼천 배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참새처럼 종종 뛰며

똥 싸고 해탈할 시간도 없이

뱃속이 사리로 가득 찰 때까지

친구도 끊고

술도 끊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을 것이다

희망과 놀람을 거쳐 오기와 끈기,

다음은 겸허와 근면이었으나,

허무에 와서 무릎이 꺾인 그는

열망이 그를 다치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폐업을 써 붙이면서

누군가 다시 이 문을 열고

똥 싸고 해탈할 시간도 없이 살지 않기를

잠시 기도했지만

절 한 번에 시를 한편씩 쓰는 마음으로

매일 삼천 배를 하는 정성 가지고는

이 문짝 안에서 성공할 수 없으리라고

대문짝은

폐업을 덧바르면서

자꾸 얼굴이 두꺼워져 갔다.

 

 

詩 ┃ 박상화

「코뮤니스트」 9호, 2019년

 

 

 

 

 

새벽 여명은

 

 

이 소박한 권리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람들은

빨간 날 새벽 여명 속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 정규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새벽 출정처럼 한 무리였으나

새벽 여명은

그들이 서로 다른 업체에 소속된 비정규직 노동자란 걸

하청의 재하청인 사내들이 뼈마디 성한 곳 없이 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걸

물량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짜증내고 윽박지르고 화내고 있다는 걸

명령에 익숙하고 명령이 당연하며 명령에서 벗어 날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걸

매일 매일이 위험한 작업, 다행히 죽지 않았음으로 용접사가 되고 배관사가 되었다는 걸

좀처럼 친절할 수 없었다는 걸

살피지 않는다

새벽 여명은

더 이상 붉지 않았다

 

 

詩 ┃ 조성웅

「코뮤니스트」 10호, 2019년

 

 

 

 

 

개량주의자들에 대한 첫 번째 포고

-2012년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에 부쳐

 

 

 

더 이상 날 동지라 부르지 마라

민주노총 소속 같은 조합원이라고 하더라도

투쟁 현장에서 몇 번 구호를 함께 외쳤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와 뜻을 함께하는 동지가 아니다

 

1998년, 민주노총 합법화를 위해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파견법을 합의해 준 너는

 

2004년, 국회의원 선거 한다고 날 찾아 와

박일수 열사 투쟁을 접으라고 한 너는

민주노총 깨려고 아예 작정한 거냐

박일수 열사 투쟁을 접지 않으면 철수하겠다고 날 협박했던 너는

 

2005년, 비정규직 악법 폐기를 위한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을 기꺼이 폐기한 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항의를 양아치라 조롱하며

사회적 합의주의로 게걸음질 친 너는

 

2005년 류기혁 열사를 열사가 아니다라고 규정했던 너는

열사투쟁을 조직하라는 항의를 종파주의자들의 분열책동이라고 매도했던 너는

 

2007년, 민주노조 깃발을 위로금 몇 푼으로 맞바꿔치기 한 합의서에 직권조인 한 너는

하청노동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움켜쥐고

사람 목숨을 매매했던

대공장 정규직노동조합 간부였던 너는

노동자는 하나다란 슬로건(1사1노조 방침)을 외치며

기아비정규직노조 공장점거파업을 파괴했던 너는

2010년, 모든 사내하청의 정규직화는 지금 당장 불가능하니

현안문제부터 풀자며 CTS점거파업 해제를 중재했던 너는

CTS점거파업 해제를 위해 금속노조 총파업을 유예시킨 너는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김밥 가지고 장난친 너는

 

2012년 11월 11일, 자본가들을 만나고 악수하고 반갑게 협력하는 것이

확고한 정치적 신념인 너는

2012년 11월 11일, 밥 처먹고 허구한 날 교섭하고 중재하고 타협하고

굴종을 강요하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인 너는

2012년 11월 11일, 고작 부르주아 야당이 돼 보겠다고

저요 … 저요 부르주아 선거제도에 목매달고 있는 너는

 

노동자계급이 아니다

자본가계급이 노동운동 내부로 파견한 자들,

자본가계급의 마름이다

내게 다가와 반갑게 웃으며 악수하려 하지 마라

난 너의 적이다

 

난 나의 권리를 대의하겠다고 나선 자들을 믿지 않는다

난 너와 바리케이드를 앞에 두고 마주 설 것이다

 

 

詩 ┃ 조성웅

「코뮤니스트」 10호, 2019년

 

 

 

 

 

백만 촛불 마이너

- 2017년, 노동악법 철폐, 노동3권 쟁취, 광화문 고공삭발단식농성을 기억하며

 

 

사람만이 결정적인 봄이다, 라고 안간힘으로 외쳐보지만 사람 추린다는 소리에 휴무도 없이 출근한 공장 담벼락 안엔 어떤 꽃소식도 없었다 툭하면 ‘영구퇴출’ 입에 달고 사는 하청업체 안전팀장 새끼 아가리를 박살내지도 못했다

 

하청업체 안전팀장 새끼도 촛불을 들었고 박근혜 탄핵을 고대했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명령을 하고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는 하청의 재하청인 내게 촛불은 봉기로 다가오지 않았다 어떤 것도 계획할 수 없는 하청의 재하청인 내게 촛불은 혁명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하청의 재하청인 내 삶은 하루하루가 폭력적이었다 자본주의가 요약되어 있었다

; 나는 외친다

차별은 폭력이다

위계는 폭력이다

억압은 폭력이다

명령은 폭력이다

조합주의는 폭력이다

가부장제는 폭력이다

민족주의는 폭력이다

개량주의는 폭력이다

관료주의는 폭력이다

군대는 폭력이다

의회제는 폭력이다

 

촛불은 흐르고 흘러서 흐름 자체가 되는 것, 머물러 무대만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난 촛불의 흐름이 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 위험해 보였다 촛불이 멈춘 곳, 화려한 조명의 대형스크린과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 대형스피커로 꾸며진 무대가 내 눈엔 마치 명박산성 같았다 무대 앞에서 내 관심사였던 그대 표정을 결정적으로 잃어 버렸고 유독 주목하고 싶었던 그대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난 목소리를 잃고 그대를 데울 국도 밥도 나오지 않는 무대를 오래도록 바라봐야 했다 고착 당했다

 

물론 촛불은 하나의 구호가 아니고 여럿의 삶이었다 노빠도, 문빠도, 어용도, 노사협조주의자도, 조합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김일성주의자도, 가부장주의자도, 개량주의자도, 관료주의자도, 중도주의자도, 여성주의자도, 생태주의자도, 자율주의자도, 코뮤니스트도 함께 참여하고 함께 행진했다 촛불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 계급투쟁의 소용돌이었다 이질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정치적 경향들이 함께 지배질서를 잠시 정지시키는 압도적인 다수의 힘을 이뤄냈지만 국가 앞에서 갑자기 온순해졌다 국가에 대한 분노가 이토록 순종적 일 수도 있다니, 내겐 참 기형적으로 보였다

 

촛불의 흐름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나는 어떤 계획도, 어떤 결정도 할 수 없는 하청의 재하청인 사내로 죽도록 일만 하다 죽어갈 것이다 촛불의 흐름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노사협조주의자는 죽어라고 자본가계급에게 협력만을 할 것이고 조합주의자는 지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계급을 배반할 것이다 촛불의 흐름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성폭력 가해자들은 반성하지 않을 것이고 개량주의자들은 오늘도 투쟁 현장에 나타나서 선거가 다가오니 투쟁을 접자고 압력을 넣고 민주노총 깰 거냐고 협박하면서 계급화해의 정책들을 생산해낼 것이다 촛불의 흐름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민족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을 파괴하며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사냥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관료주의자들은 모든 비판을 진압하며 자신의 명령을 완성할 것이다 또한 촛불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나와 그대는 표정을 잃고 목소리도 잃게 될 것이며 나를 대신 해 내 운명을 결정하는 자들의 목소리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것이다

 

거리로 내쫒긴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촛불이 됐고 가장 먼저 박근혜 퇴진투쟁을 외쳤지만 백만 촛불 내내 발언권조차 얻지 못했다 촛불, 그 한 뼘의 빛조차 서러웠지만 죽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투쟁을 조직했던 투명한 맨몸들은 자립적이었다 촛불은 민주주의를 위해 한사코 계급투쟁을 배제하려 했지만 자립적인 몸짓들은 “선거를 넘어 (계급) 투쟁으로” 나아갔다 투명한 맨몸의 사람들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를 우선적으로 폐지했다 밀착되어 서로를 느끼고 그 몸의 언어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비우면서 그 곳에 배제하지 않는 힘, 평평하고 너른 마당을 키워내기 시작했다 스스로 결정하고 직접행동으로 비상했다 의회 없이도 운영되는 노동자민주주의였다 부재함으로 증명되는 삶은 끝났다 나와 그대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지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방법이 내가 생각하는 정치였다 모든 폭력에 맞선 가장 뛰어난 무장이었다

 

 

詩 ┃ 조성웅

「코뮤니스트」 10호, 2019년

 

 

 

 

 

  KakaoTalk_20210531_201441690.jpg

 

  KakaoTalk_20210531_201449397.jpg

「코뮤니스트」 11호, 2020년

 

 

 

 

 

KakaoTalk_20210531_201447288.jpg

 

 

 「코뮤니스트」 12호, 2020년

 

 

 

 

 

 

비극을 위하여

 

 

그는 나무라고 생각하며 서 있다

그는 가스라고 생각하며 숨 쉰다

그는 박스라고 생각하며 잘린다

그는 기어라고 생각하며 끼인다

그는 포장지라고 생각하며 불탄다

그는 모터라고 생각하며 돌아간다

그는 망치라고 생각하며 떨어진다

 

그는 남편이고 그녀는 아내다

그는 아들이고 그녀는 딸이다

그는 아버지고 그녀는 어머니다

그는 죽고 그가 아니면 동료들이 죽는다

 

이런저런 말을 하고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이것저것 요구하고 기다릴 필요가 없다

 

피 묻은 손이 피 묻은 기계를 붙잡는다

목숨은 멈출 수 있어도 공장은 멈출 수 없다

매일 반복되는 비극은 증거를 지우지 않는다

 

살아있는 눈에 마지막 노동의 흔적이 그어진다

나도 언젠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날이 있으리라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12호, 2020년

 

 

 

 

 

비정규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잠잘 때 조금만 움직이면

아버지 살에 닿았다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아버지가 출근하니 물으시면

늘 오늘도 늦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골목을 쏘다니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아버지는 가양동 현장에서 일하셨다

오함마로 벽을 부수는 일 따위를 하셨다

세상에는 벽이 많았고

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귀가 시간을 여쭤본 이유는

날이 추워진 탓이었다 골목은

언젠가 막다른 길로 이어졌고

나는 아버지보다 늦어야 했으니까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버는지 궁금해하셨다

 

배를 곯다 집에 들어가면

현관문을 보며 밥을 먹었다

어쩐 일이니 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외근이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실까

거짓말은 아니니까 나는 체하지 않도록

누런 밥알을 씻었다

 

그리고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詩 ┃ 최지인

「코뮤니스트」 12호, 2020년

 

 

 

 

 

나에게 돈은 목숨이다

- 고 김용균 노동자 추모시

 

 

컨베이어벨트 위 석탄으로 실려 가 본 적 있는가

 

분진을 나르며 굉음을 내는 컨베이어벨트는 죽음을 운반하지 낙탄이 됐다가 삽이 됐다가 나는 찰리채플린처럼 시커매져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지

 

가까이 왔다가 멀어지는 별처럼 아득해지는 눈

 

스물네 살의 눈빛은 영롱하지 아니 참혹하지 누가 날 멈추지 않는 기계 속으로 떠밀었나 나에게 감성팔이를 하지 말라 하청과 비정규직이란 말은 나도 안다

 

열심히 일한 것이 죄인가

 

부릅뜬 눈으로 벨트와 함께 돌다가 속도에 휘말려보라 숨통을 틀어막다가 숨이 헐떡거리다가 먼지의 뽀얀 사막 속에서 길을 잃어 보았는가

 

컵라면 하나가 나의 유일한 위안거리다

 

나의 일터는 목숨을 거는 전쟁터다 엄마가 말했지 용균아 오늘도 무사히 일하고 와야 해 컨베이어벨트는 엄마 말을 집어 삼켰지

 

컨베이어벨트는 키득키득 지금도 누군가의 목숨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詩 ┃ 봉윤숙

「코뮤니스트」 12호, 2020년

 

 

 

 

 

30년

 

 

 

30년 전에 야간고 실습생 영국이는 나사를 깎았다.

아침까지 일을 해야 되는 건 영국이뿐이었다.

영국이는 태핑기에 장갑이 끼였다.

손가락이 잘린 채 그대로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30년 후에 특성화고 민호는 기계에 끼여 죽었다.

민호와 영국이는 혼자 작업을 했다.

30년이 가고 다시 30년이 와도 영국이는 엎드려 있다.

30년 후에 민호가 죽어서 엄마의 통곡 앞에 누워 있다.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13호, 2021년

 

 

 

 

 

백종원 김밥

 

 

 

 

편의점 김밥을 고르는데 백종원김밥이 눈에 띄었다.

조리 모자에 위생복을 입고 내 김밥 드시라고 엄지척한다.

 

음식장사로 성공한 백종원은 유명 요리사다.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골목 식당 주인들에게 호통을 친다.

이래 가지고 장사가 되겠어?

나는 그 말이 이래 가지고 나처럼 성공하겠어,라는 말로 들렸다.

 

새벽, 치킨집 오토바이 한 대가 교차로에 들어섰다,

직진 신호가 바뀌면서 승용차 한 대가 달려왔다.

오토바이를 탄 청년이 날아올랐다.

통닭이 죽고 오토바이가 죽었다.

 

누구도 백종원이 될 수 없다.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13호, 2021년

 

 

 

 

 

저녁이 있는 삶

 

 

얼마 전에 과로로 사망한 서른두 살의 택배 노동자는 하루에 14시간을 일하면서 1만 건의 배달 물품을 처리했다고 한다. 일요일만 쉰다 치고, 25일이면 1일 400건이다. 1시간에 28.5건이다. 그러니까 2분에 1개씩은 배달해야 되는 중노동이었다. 두 아이의 가장인 그는 그렇게 일하다 쓰러졌다. 다시는 일어나 눈을 뜨지 못했다.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13호, 2021년

 

 

 

 

 

나의 노동으로

 

 

1899년, 런던에선 자동차 두 대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 자동차는 쌍두마차만큼이나 훌륭하게 영국 여왕의 편지를 배달했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났다.

 

나의 노동으로 나무가 베어지고 있다.

나의 노동으로 땅이 파헤쳐지고 있다.

아름다운 나무의 꽃과 순결한 땅의 벌레들이

나의 노동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나의 노동으로 숲이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나의 노동으로 강물은 막혀 댐이 완공되고 있다.

나의 노동으로 수백만 대의 자동차가 쏟아져 나오고

나의 노동으로 수천만 대의 냉장고가 넘쳐난다.

나의 노동으로 총탄과 포탄이 만들어지고

나의 노동으로 탱크와 전폭기가 사람들을 살육하고 있다.

나의 노동으로 나무와 석탄과 석유를

마지막 한 그루까지 마지막 한 삽까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없애고 있다.

나의 노동은 고향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

노동과 생산은 너무 위험해졌다는 말이다.

노동의 권리는 발전의 가치와 다르다는 말이다.

나는 노동력을 판매하면서 노동을 소진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윤에 지배당한 생산은 파괴적 종말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쌍두마차가 지나가고 자동차가 지나가고

영국 여왕이 보낸 편지는 스마트폰으로 전송된다.

다시 120년 후에 나의 노동은 무엇으로 남아 찬란한 고통이 될까.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13호, 2021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3호] 詩 : 나의 노동으로

232423.jpg     

KakaoTalk_20210525_205011419.jpg

KakaoTalk_20210525_205014204.jpg

 

나의 노동으로

 

 

1899년, 런던에선 자동차 두 대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 자동차는 쌍두마차만큼이나 훌륭하게 영국 여왕의 편지를 배달했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났다.

 

나의 노동으로 나무가 베어지고 있다.

나의 노동으로 땅이 파헤쳐지고 있다.

아름다운 나무의 꽃과 순결한 땅의 벌레들이

나의 노동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나의 노동으로 숲이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나의 노동으로 강물은 막혀 댐이 완공되고 있다.

나의 노동으로 수백만 대의 자동차가 쏟아져 나오고

나의 노동으로 수천만 대의 냉장고가 넘쳐난다.

나의 노동으로 총탄과 포탄이 만들어지고

나의 노동으로 탱크와 전폭기가 사람들을 살육하고 있다.

나의 노동으로 나무와 석탄과 석유를

마지막 한 그루까지 마지막 한 삽까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없애고 있다.

나의 노동은 고향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

노동과 생산은 너무 위험해졌다는 말이다.

노동의 권리는 발전의 가치와 다르다는 말이다.

나는 노동력을 판매하면서 노동을 소진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윤에 지배당한 생산은 파괴적 종말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쌍두마차가 지나가고 자동차가 지나가고

영국 여왕이 보낸 편지는 스마트폰으로 전송된다.

다시 120년 후에 나의 노동은 무엇으로 남아 찬란한 고통이 될까.

 

詩 | 임성용

 

 

KakaoTalk_20210510_193405635.jp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3호] 모든 부르주아 정치 세력의 부동산정책은 가격상승 대책

모든 부르주아 정치 세력의 부동산정책은 가격상승 대책

 

KakaoTalk_20210520_194551253.jpg

 

국가, 문재인 정부, 부르주아 정당들의 부동산정책의 계급적 본질

 

2020년 이전까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지난 「코뮤니스트」 12호에 언급했듯이 일관되게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책이었다. 한마디로 집값 억제가 아니라 집값 폭락을 막는 것이 핵심이었다. 말로는 집값 상승 억제를 주장했지만, 20여 차례에 걸친 부동산 대책은 주거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부동산 가격을 끝없이 수직 상승시켰다. 그 이후에도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100%를 넘었고, 수도권도 100%에 가까운 상황인데도 아파트 공급 확대를 계속 추진했다. 아파트 공급 확대가 자본에 개발 이익을 보장하는 길만 열어주고 집값 억제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은 이미 지나간 수많은 사례에서 드러났다. 더 정확하게는 말로는 집값 억제를 떠들 뿐 노골적으로 자본의 개발 이익을 보장하였다. 2017년 시행된 ‘임대사업자 등록 활성화 방안’을 통해 취득세, 양도소득세, 재산세, 종합부동산세 감면 등 온갖 세제 혜택과 더불어 임대사업자에게 집값의 80%까지 주택담보대출을 허용한 것이 대표적 보기이다. 그리고 4⦁7 재보궐 선거 직전 터져 나온 LH 직원들의 개발정보를 이용한 부동산 투기 및 공기업, 중앙/지자체 부동산 관련 업무 공무원들의 투기 의혹과 정부 자체 조사과정은 부동산 시장에서 문재인 정부와 국가기관이 짜고 치는 거대한 노름판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게다가 부동산가격 폭락 방지책에는 국가와 문재인 정부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들 역시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아파트 공급에 대한 표면적 방법은 다르게 보이지만 본질은 똑같다. 부르주아 정당들은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서로 간 약속이나 한 듯 규제 완화와 아파트 공급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여기에는 자본의 개발 이익은 보장되어도 집 없는 노동자의 내 집 마련은 끼어들 틈조차 없다. 또한 개발을 통한 주택 공급 과정에서 투자 정보는 덤으로 관료와 정치가, 자본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그래서 부르주아 정당들의 집값 억제대책은 노동자에 대한 기만이고 사기이다. 물론 다른 정책과 국책사업도 마찬가지지만, 집값 폭락 방지에서도 이른바 진보 대 보수의 구분은 전혀 의미가 없다. 부동산 가격 폭락 방지라는 일치된 이해관계뿐이다.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지배계급의 정당과 정책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청년과 노동자의 분노를 의식한 듯 최근 LH 사태에 대한 여러 가지 재발 방지대책과 주택공급 확대를 거론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는 주택공급으로는 주거 안정의 토대를 마련할 수 없다. 주거 문제는 공급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본이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토지와 건물, 주택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매매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주택을 많이 공급해도 무주택자가 아닌 자본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주거 안정화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철폐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 가능하다

 

부르주아 정부와 정당들의 집값 안정 대책은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를 전제로 하고 그 바탕 위에 있다. 이것은 토지와 주택에 대한 사적소유와 매매 및 임대를 통해 소유주가 이득을 취하는 것은 물론 부동산 가공을 통해 증가한 부가가치까지도 보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동산 관련 세금을 올리고 공급을 확대해도 더 비싼 집값의 형태로,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노동자의 삶에 전가될 뿐이다. 그렇다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토지 국유화가 부동산 문제의 근본 대책일까?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그대로 둔 채 일부 생산수단만을 국유화하는 것은 코뮤니즘의 사회화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자본의 총체로서 국가의 역할을 간과하는 주장이다.

 

'국유화'와 '사회화' 관련해서 사회주의자/코뮤니스트는 맑스, 엥겔스뿐 아니라 이후의 논쟁과 이론도 검토해야 한다. 칼 코르쉬1)는 모든 사회화가 국유화의 형태로 완성되지 않으며, 단순한 국유화로는 사회주의적 사회화로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일시에 또는 단계적으로 완성된 사회적 생산과정으로부터의 사적소유의 완전한 철폐 없이는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반해 베른슈타인은 사회정책으로 현존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화를 점진적이고 합법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래 소개하는 코르쉬의 이론은 매우 논쟁적이고, 전체 내용(소련의 경험과 규정 차이 포함)을 동의하지는 않지만, 국유화, 사회화, 주택, 도시 문제에 대한 코뮤니스트 전망을 밝히기 위해서는 국제코뮤니스트그룹(G.I.C.), 보르디가 등의 글과 함께 반드시 토론되어야 한다.

 

코뮤니즘에서 요구되는 사회화는 자본주의적 사적 경제를 사회주의적 공동체 경제로 대체하려는 목적을 가진 생산의 새로운 규칙을 의미한다. 사회화의 첫 번째 단계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이로 인하여 실현되는 노동의 해방이며, 두 번째 단계는 노동의 사회화이다. 코르쉬는 생산을 모든 기술적 생산과 연결된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생산관계로 파악한다. 사회화의 새로운 규칙의 대상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의 생산이다. 따라서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를 지배하는 자본과 노동의 적대성과 이러한 적대성에서 유래하는 사회적 계급구분, 계급지배 그리고 계급투쟁을 제거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사회주의적 공동소유는 국가 소유와 절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국유화는 사회화의 하나의 형태에 불과하며, 사회화의 모든 형태는 단지 결과적으로 우리가 ‘산업 자치’라고 묘사하였던 사회적 생산관계의 규칙에 도달했을 때만, 우리에 의하여 진정한 사회주의적 ‘사회화’로 인정된다. 모든 집중화된 국유화에 반대하여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이의는 산업 자치의 형태에서의 사회화에 대하여는 근거가 없다. 산업 자치 형태에서의 사회화는 관료적인 획일화와 경직화는 있을 수 없고, 개인적 활력은 절멸되지 않고, 오히려 더 성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적 활력은 자본주의적 사적 경제에서는 수행될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생산참여자 집단에서 자치로 인하여 그러한 개인적 활력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경제성의 위험은 기껏해야 생산으로부터 사적 소유자를 배제한 결과 사적 이익이 가능한 최고의 경제적 생산을 위하여 지속적인 자극을 주는 것을 멈추는 것에서 발생한다.”2)

 

코르쉬의 주장처럼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철폐 없이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서의 주택과 토지문제는 '사회주의적 주거권'과 연계하여 원칙을 정립해야 한다. 즉, 주택과 토지의 공적인 성격과 이윤이 아닌 인간의 필요를 위한 생산 체제인 사회화 차원에서 검토해야 한다.

 

“노동자통제 없는 사회주의가 있을 수 없지만, 사회주의 없는 진정한 노동자통제도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통제의 점진적인 증가가 실제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동경영, 참여, 또는 공동결정 같은 말로 치장한 거짓 사회개혁으로 자신들의 절대적인 계급지배를 숨기려는 지배계급의 악선전에 놀아나는 짓일 뿐이다. 노동자통제는 계급 협조를 배제한다. 그것은 자본 생산 체계에 참여할 수 없고 대신에 그것을 폐지한다.” (폴 매틱, 「노동자통제」, 1967년)

 

또한, (노동자통제와 마찬가지로) 공적인 영역의 통제와 사회화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 권력(평의회)과 국가의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한다. 자본의 총체로서 국가가 주체가 되는 국유화는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에서 토지 국유화를 통한 주거 안정은 불가능하며, 노동자인민의 주거 안정은 오직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철폐하고 평의회를 통해 생산수단을 사회화한 코뮤니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소유관계 폐지 없는 토지 국유화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사적소유의 폐지를 통한 생산수단의 사회화만이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코뮤니스트 혁명과 평의회를 통한 사회화만이 주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모두에게 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리와 주택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

 

1. 1920년대와 1930년대 걸쳐 코뮤니스트 좌파로 활동하면서 코르쉬가 굳게 믿었던 맑스주의 혁명이론은 ‘프롤레타리아 실천과 의식’이었다. … 코르쉬에게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안에서 직접 정립되며, 부르주아 사회 제도, 생활양식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조한다. (남궁원, “혁명적 코뮌, 칼 코르쉬”, 「코뮤니스트」2호, 2013)

 

 

2. 칼 코르쉬 「사회화란 무엇인가?」

 

 

2021년 4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윤태상

 

 

 

<관련 글> 

 

부르주아 정부의 부동산정책 허구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9048

 

코뮤니즘 세상에서... 도시와 주택은 어떤 모습일까?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24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