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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코뮌 칼 코르쉬

혁명적 코뮌  칼 코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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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코르쉬는 그람시, 루카치와 더불어 서구 3대 맑스주의자다. 1920년대 볼셰비키 당사와 역사를 암송하는 이들에게, 칼 코르쉬는 불편한 인물이다. 코르쉬는 1920년대 독일공산당 안에서 「공산당 정치」지를 중심으로 분파활동을 했는데, “자본주의는 안정화되지 않았고, 주체적인 혁명정치를 위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일공산당은 ‘의회주의 백치’ 태도를 버리고,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또한 코르쉬는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회귀했으며,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혁명정치와 관련해서 타협을 거부하던 코르쉬와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은 당연히 갈등관계에 있었는데, 아니다 다를까, 스탈린이 직접 나서서 1926년 7월 중앙위원회 총회자리에서 코르쉬를 울트라 좌파 (ultra left)로 맹공을 퍼부었다. 예상되는 정치 수순으로(!), 코르쉬는 독일 공산당에서 축출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소수파는 재정 문제가 중요한데, 코르쉬 그룹이 발간한 「공산주의 정치」는 코르쉬가 받는 국회의원 월급으로 근근이 발간을 이어가다, 1928년에 발간을 중단한다.

 

코르쉬 그룹은 노르웨이 좌파 공산주의자, 이탈리아 보르디가 그룹과 국제적 관계를 맺고, 레닌과 노동조합 논쟁을 벌였던 러시아 노동자 반대파 (worker’s opposition) 실리아프니코프를 지지했다. 트로츠키가 주도한 좌파 반대그룹(the left opposition)에는 반대했다. 1933년 나찌가 집권하자 코르쉬는 정치적 망명길에 나서는데, 이로써 고독한(?) 사상투쟁을 벌였던 정치조직 활동은 중단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걸쳐 좌익공산주의자로 활약하면서 코르쉬가 굳게 믿었던 맑스주의 혁명이론은 ‘프롤레타리아 실천과 의식’이었다. 우리가 흔히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통일적으로 얘기하지만, 코르쉬가 볼 때 최초의 계기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 즉 실제 혁명운동에서주어 진다. 예를 들어, 혁명이론은 지도부나 이론가들에 의해서 외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표현’이어야 한다. 요컨대 ‘노동자를 위한 혁명’일지라도, ‘노동자가 나서지 않는 방법’이라면 코르쉬는 거절하는데, 이러한 그의 고집은 노동자평의회 강조로 이어진다. 코르쉬에게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안에서 직접적으로 정립되며, 부르주아 사회 제도, 생활양식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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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쉬는 역사적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추상적 이론에는 결코 매달리지 않았는데, 그는 맑스주의 혁명 이론을 재검토하며 파리코뮌과 러시아 소비에트, 독일 노동자 평의회에서 혁명 모델에 대한 역사적 탐구의 단계를 밟아나간다. 코르쉬는 파리코뮌을 혁명적 실천 모델로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회적·경제적 내용이지 정치적 형식이 아니라는 점을 논증한다. 파리코뮌에서 본보기가 되는 점은 인민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또한 정부 및 사회적 삶의 새로운 형태를 스스로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이 글은 1929년 좌파 저널인「행동(Die Aktion」에 실렸다.

 

 * 출처: Douglas kellner, Karl Korsch: Revolutionary Theory, University of Texas Press, Austin & London, 1977
옮긴이|남궁 원

 

 

 
자본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자기 해방 의제를 제기하는 역사적인 현 시기에, 계급의식적인 모든 노동자는 혁명적 코뮌에 관하여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가? 더구나 오늘날 정치적으로 완전히 계몽되고 따라서 자기 의식적인(self-conscious) 프롤레타리아트 부분은 혁명적 코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이, 맑스와 엥겔스, 레닌의 적절한 몇몇 논평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는 1차 대전에 앞서 사회민주주의의 선전(propaganda)이 이루어진지 반세기만에, 또한 최근 15년간의 강력하고 새로운 경험 이후로 현재, 이미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계사의 한 조각을 다루는 유파(schools)는 과거 카이저 제국의 군주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바이마르(Weimar)) 공화국 안에도 대체로 거의 없다. 나는 지금 영광스러운 파리코뮌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파리코뮌은 1871년 3월 18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붉은 깃발을 올렸고, 72일간 이 깃발을 휘날리며 잘 무장된 적대적인 세계의 공격에 맞서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1871년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뮌이다. 이에 대해 칼 맑스는 1871년 5월 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프랑스 내전에 관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리코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이 유산계급에 맞서 벌인 투쟁의 결과였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였다”는 사실에 있다. 20년 후, 직접적인 국제적 대중행동의 첫 번째 형태로서 제2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 프롤레타리아 메이데이 기념일이 제정되었던 그 때, 다시 한 번 유산계급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는 놀라운 말이 울려 퍼질 때마다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깜짝 놀란 속물들 면전에 긍지에 찬 문장을 들이댔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독재는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습니까? 파리코뮌을 보십시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20년도 더 지난 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혁명적 정치가 레닌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저술 <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 주요부에서 파리코뮌 및 기회주의자의 쇠퇴와 혼란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과 관련지어 정확하고 상세하게 분석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1917년 2월, 민족 혁명이자 부르주아 혁명으로 시작되었던 러시아 혁명이 그 민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장벽을 돌파하고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 나갔다. 서구 유럽의 노동자 대중은 (그리고 전 세계 노동계급의 진보적 분파는) 레닌과 트로츠키와 더불어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이 새로운 정부 형태를 환영했으며, 파리 노동자들이 반세기 전 창조했던 “혁명적 코뮌”을 직접 계승하는 것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공식 아래 혁명적인 모든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킨다는 그 이상은 불명확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4년간의 전쟁이라는 경제적·정치적 격변 이후 유럽 도처에 퍼져 있던 동요와 압력으로 인해 혁명적 시기가 뒤따랐다. 그러나 이미 그 무렵 이러한 이상과 새로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전면화되었던 저 현실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에 있어 평의회에 대한 요구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지를 달성하고자 끓어오르는 긍정적인 발전 형식이었다. 당시 오직 시무룩한 속물들만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모든 이상과 마찬가지로 평의회 개념은 모호하다고 개탄할 수 있었으며, 오직 무기력한 공론가들만이 도이미히(Däumig)와 리처드 뮐러(Richard Müller)의 악명 높은 “작은 상자들의 체계”처럼 인위적으로 설계된 “체계”를 통해 이러한 결점을 완화하고자 시도할 수 있었다. 이즈음 프롤레타리아트는 1919년 헝가리와 바이에른에서 일시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그 혁명적 계급독재를 확립하는 곳 어디에서나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혁명적 평의회 정부를 조직했다. 이는 유산계급에 맞선 생산계급의 투쟁의 결과였고, 이들의 결연한 목적은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 당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좀 더 큰 산업국가 중 하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러니까 혹시 만일 1919년 봄 독일의 대규모 경제파업 중에, 또는 1920년 카프(Kapp) 반란을 저지하던 중에, 또는 1923년 루르(Ruhr) 점령 및 인플레이션의 기간 중 이른바 쿠노(Cunow) 파업 과정에서, 아니면 1920년 10월 이탈리아의 공장점거시기에 승리를 거뒀더라면, 그랬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은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형식 속에서 확립될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존재하던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연방”과 함께 혁명적 평의회 공화국들의 세계연방 속에서 통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조건 하에서 평의회 개념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는 소위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평의회 정부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1921년 세계적 경제위기가 극복되고 이와 관련하여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패배한 이후 ― 또한 영국의 1926년 총파업과 광산노동자 파업 등에서도 잇따라 프롤레타리아가 패배한 이후 ― 이러한 노동계급의 패배의 결과로 현재, 유럽 자본주의는 그 독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처럼 변화된 객관적 조건 하에서 우리 전 세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사들은 더 이상 우리의 낡은 신념, 즉 평의회 개념이 혁명적 의의를 지니고 평의회 정부가 혁명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파리코뮌 가담자들이 반세기 전에 “발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이 직접적으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 검증되지 않은 불변의 신념에 주관적으로 매달릴 수만은 없게 되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라는 명칭과 그 현실적 조건 사이에 오늘날 존재하는 명백한 모순을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현재 러시아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 원래의 “혁명적” 평의회 원칙을 “배신한” 것은 독일에서 샤이데만(Scheidemann)과 뮐러(Müller), 라이파르트(Leipart)가 전쟁 직전 자신들의 “혁명적” 사회주의 원칙을 “배신했던” 것과 똑같은 것일 뿐이라고 말해버린다면, 이는 피상적이고 거짓된 만족일 뿐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두 주장은 모두 사실이다. 샤이데만과 뮐러, 라이파르트는 자신들의 사회주의적 원칙을 배신한 자들이다. 또한 현재 러시아에서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정부-정당기구의 최고 정점에 무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관료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비에트 러시아 전체 위에 군림하면서 이용하고 있는 “독재”는 ― 그 이름만으로는 여전히 “코뮤니즘”과 “볼셰비키”의 정당을 연상시키지만 ― 1917년과 1918년의 혁명적 평의회 개념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저 독재는 차라리 과거 이탈리아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무솔리니(Mussolini)의 파시스트 정당 독재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배신”에 관해서는 설명되는 것이 거의 없다. 오히려 배신이라는 사실 자체가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과거의 혁명적 슬로건이 오늘날 소위 사회주의 소비에트 국가의 자본주의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체제로 발전했다는 이 모순은 우리 계급의식적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현실적 과제를 제기한다. 그 과제란 정확히 말해, 혁명적 자기비판이라는 과제이다.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점은 혁명의 변증법이 봉건적 과거와 부르주아적 과거의 이념 및 제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이 지금까지 해방을 위한 역사적 투쟁에서 지배적 국면마다 스스로 이미 들고 나왔던 모든 사유와 조직형태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 괴테(Goethe)가 <파우스트(Faust)>에서 했던 말처럼 ― 어제의 선한 행위가 오늘의 고통을 만드는 그러한 변증법이며, 또한 칼 맑스의 보다 명료하고 확실한 표현에 따르면, 역사적인 모든 형식은 그 발전의 특정 지점에서 혁명적 생산력과 혁명적 행동의 발전형식에서, 발전하는 의식이 발전형식의 족쇄로 전화된다는 그러한 변증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발전의 변증법적 안티테제는 다른 모든 역사적 이념과 형성과정에도 적용되며, 이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의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철학적이고 조직적으로 산출하는 결과에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를 예증하는 것이 바로 약 60년 전 혁명적 코뮌의 모습을 띤 “마침내 발견된”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정치 형식 한가운데 있었던 파리코뮌의 가담자들(communards)이다. 그에 뒤이은 투쟁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으로서, “혁명적 평의회 권력”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들고 나온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국제적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에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하다.

평의회 개념에 대한 “배신”과 평의회 권력의 “타락”을 비통해하는 대신, 우리는 환상에서 벗어나 냉정하게, 객관적인 역사적 관찰을 통해 이러한 운동 전체의 그 시작과 중간, 끝을 총체적인 역사의 파노라마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1871년 처음으로 혁명적 코뮌을 달성해냈으며, 비록 그 발전은 72일 만에 강압적으로 중단되었지만 그러나 다음에는 더욱 결정적으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달성해낸 ― 이러한 총체적인 역사적 경험 이후에 ― 이 새로운 정치 형식의 정부가 갖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 그 계급지향적 의미는 무엇인가?

혁명적 코뮌 및 그 발전태인 혁명적 평의회 체제의 역사적이고 계급지향적인 성격을 문제 삼을 때 오히려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혁명가들 사이에는 의회를 그 기원과 목적 때문에 부르주아적 기관으로 간주하여 이론적으로는 거부하고 실천적으로는 “파괴”하고자 하지만, 그러나 또한 동시에 소위 평의회 체제와 그 전신인 “혁명적 코뮌”을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본질적 형식으로 바라보고 그 완전한 본질은 부르주아 국가의 본질과 양립 불가능한 대립관계에 있다고 여기는 그러한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러한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점은 심지어 가장 날것 그대로의 역사적 비판에서조차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코뮌”은 거의 천 년에 걸친 그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의회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즉 부르주아 정부 형식으로서 출현했다. 11세기에 시작되어 1789년 및 1793년의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운동이 도달한 그 정점에 이르기까지, 코뮌은 대부분 순수하게 계급지향적인 투쟁의 표현으로서 형성되었다. 즉 코뮌은 이러한 역사적 시기 전체에 걸쳐 당시의 혁명적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의 봉건적 사회질서 전체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다양한 형식으로 형성되었다.

맑스가 ― 앞에서 그의 <프랑스 내전>을 인용한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 1871년 파리 노동자들의 혁명적 코뮌을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칭송했을 때, 동시에 그는 “코뮌”이 이러한 새로운 성격을 띨 수 있으려면 이전의 그 본성 전체가 ― 부르주아가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수백 년 동안에 걸쳐 전해 내려온 그 전통적 형태가 ― 급진적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당시 이러한 “현대의 국가권력을 분쇄하는 새로운 코뮌”을 “국가권력에 우선하고 또 그로부터 자신의 토대를 형성하는 중세적 코뮌의 부활”로 여기고자 했던 사람들의 오해를 염려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그는 코뮌 체제라는 정치 형식 그 자체가 ― 확고하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지향적인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즉 그의 생각에 따르면 파리의 노동자들이 역사적인 어떤 순간에 이러한 정치 형식을 채웠고, 투쟁을 통해 성취했으며, 자신들의 경제적 자기해방에 착수할 수 있도록 한 그러한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위한 놀라운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맑스가 볼 때 파리 노동자들이 “코뮌”이라는 전통적 형식을 원래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결정했던 목표와는 완전히 대립하는 목적을 지닌 기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는 오히려 거꾸로, 코뮌이 상대적으로 미발달된 상태였고 비규정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프랑스에서 특히 고전적인 형태로 발전했던 것처럼 충분히 형성된 부르주아 국가에서는 (즉, 현대의 중앙집권적 대의제 국가에서는) 국가의 최고권력이란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문구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의 공동업무를 전체 업무로서 관리하는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계급적 성격이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중세의 “자유로운 코뮌”까지 포함하여 부르주아 국가 체제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던 초기의 역사적 형식에서는 본질적으로 모든 국가에 따라붙는 이러한 부르주아적인 계급적 성격이 상당히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다. 이후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성격이 “노동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최고의 공공권력, 즉 계급지배 장치”(맑스)로서 점점 더 명백하게 드러나고 점점 더 순수하게 발전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러한 발전 초기 국면에서는 부르주아 계급 기구의 본래 규정된 목적이 중세의 봉건적 지배로 억압받던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해방투쟁 기관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록 중세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투쟁이 현재라는 역사적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해방투쟁과 공통점을 거의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투쟁은 아직 역사적인 계급투쟁으로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때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혁명적 투쟁의 필요에 따라 창조한 저 기구들은 특정한 범위에서 ― 그러나 단지 특정한 범위로만 ― 오늘날 또 다른 토대 위에서 또 다른 조건 아래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어가고 있는 혁명적 해방투쟁의 형성과 특정한 형식적 연관을 갖는다.

칼 맑스가 이미 초기에 지적한 바, ― 중세시대 혁명적 부르주아 코뮌 발전의 다양한 국면 속에서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표현을 발견했던 ―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경험과 성취는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 및 계급투쟁의 형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사실상 맑스가 이 점을 지적한 것은 1871년 파리코뮌 반란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사건, 즉 그가 파리 노동자들의 이 새로운 혁명적 코뮌을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식이라고 칭송할 수 있게 만든 그 사건보다 훨씬 앞서서이다. 그는 중세 봉건국가에서 억압당하던 계급으로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발전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유사성을 논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노동조합 및 노동조합 투쟁의 중요성에 관한 그 고유한 변증법적 혁명이론의 주된 이론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 그중 어떤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수많은 맑시스트 좌파와 우파 양쪽 모두에게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는 현대 노동자들의 연대와 중세 부르주아지의 코뮌을 비교함으로써, 부르주아 계급 역시 마찬가지로 연대의 형성을 통해 봉건적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미 프루동에 대한 반론에서 오늘날 고전으로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단계를 거쳤다. 봉건제와 전제군주제 하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스스로를 구성해나갔던 단계가 그 하나이고, 이미 구성된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를 부르주아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봉건제와 군주제를 전복했던 단계가 다른 하나이다. 이중 첫 번째 단계는 좀 더 길었고, 보다 큰 노력을 필요로 했다. 이 단계 역시 봉건군주에 대항하는 부분적 연대를 통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지가 코뮌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하나의 계급으로서 구성하게 되기까지 거쳐 간 여러 역사적 단계들을 추적하기 위해 수많은 탐구가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 탐구가 파업이나 연대, 또는 우리 눈앞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계급으로 자신들을 조직하게 만드는 또 다른 형식들에 관한 정밀한 연구를 필요로 할 때, 일부는 현실적인 공포에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터무니없는 멸시를 드러낸다. (맑스,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 )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로 막 전환했던 1840년대 초기 맑스의 이 이론적 설명은, 몇 년 후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 및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하는 다양한 국면에 대한 묘사를 통해 유사한 형식으로 반복되었고, 또 20년 후에는 저 유명한 노동자 인터내셔널 대회 제네바 회의의 결의에서 노동조합과 관련하여 다시 한 번 주장되었다. 즉 노동조합은 지금까지의 지배적 발전 과정에서 이미 “마치 중세의 자치체나 마을이 부르주아지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 노동계급 조직의 중심”이 되었다고 논증한 것이다. 이는 비록 노동조합 스스로는 자본의 과도한 요구에 맞서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시간을 방어하는 하루하루의 당면과제에 파묻힌 나머지 이를 넘어서는 자신의 중요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따라서 앞으로 노동조합은 노동계급 전체를 조직하는 그러한 중심으로서 의식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만일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뮌이 갖는 현실적 의미와 관련하여 후기 맑스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점으로서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 형태와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조직 형태 간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맑스의 독창적인 구상을 이해해야 한다. 코뮌은 착취계급에 대항하는 생산계급의 투쟁으로부터 발생했으며, 혁명적 행동을 통해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파괴했다. 맑스가 이 새로운 코뮌이 노동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형식이라고 칭송했을 때 그가 결코 바라지 않았던 것은, ― 이후 그의 추종자 일부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 혁명적 코뮌이든 혁명적 평의회 체제든 어떤 확정된 형식의 정치 조직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에 독보적으로 적합한 잠재적 형식으로 지정되거나 지명되는 것이었다. 바로 앞 문장에서 그는 “코뮌 및 코뮌 내에서 나타나는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지속시키는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며, 또한 그는 이미 수립된 이 새로운 정부 형식의 성격을 “철저하게 발전 가능한 정치 형식”이라고 표현했다. 파리코뮌 가담자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창조해낸 새로운 형식의 정치권력이 지니는 바로 이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야말로 코뮌을 “부르주아 정부의 고전적 발전”, 즉 현대 의회제 공화국의 중앙집권적 국가권력과 구별되도록 하는 것이다. 맑스의 근본적인 전제는 노동계급의 현실적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할 때 이러한 형식이 결국 계급과 계급 지배, 국가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경제적 토대를 전복시킬 지렛대로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혁명적 코뮌 체제란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 있는 발전 과정의 정치 형식이 된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이는 혁명적 행동의 정치 형식으로서, 이때 그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목표는 더 이상 어떤 하나의 형식을 지닌 국가지배를 유지하거나 또는 심지어 보다 새롭고 “보다 고차적인 국가유형”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국가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는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마지막 조건이 없이는 코뮌 체제는 불가능하며 환상에 불과하다”고 맑스는 이 맥락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순이 남아 있다. 맑스가 한편으로는 파리코뮌을 노동계급이 경제적·사회적 자기해방을 달성하기 위하여 마침내 발견한 “정치 형식”으로 특징지으면서도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파리코뮌이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이유가 주로 형식이 없다는 점, 즉 비규정적이며 다양한 해석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에 있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맑스의 입장이 완전히 명료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단 한 군데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그의 주장은 그동안 그가 부딪쳐 오면서 이 독창적인 정치적 구상에 통합해 낸 특정한 정치 이론들의 영향 아래 있었을 뿐, 적어도 파리코뮌이라는 엄청난 경험 자체의 실질적인 감동 속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1847년~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도, 또 1864년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개회사에서도 늘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해 오긴 했지만, 이제 파리코뮌이라는 경험은 그에게 “노동계급은 이미 주어진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그 자신의 그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혁명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분쇄해야만 한다”는 점을 입증해 주었던 것이다. 이후 이 문장은 특히 1917년 레닌이 국가에 대한 완전한 맑스의 이론을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저작 <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에서 부활시키고 또 실천적으로는 그 집행자로서 10월 혁명을 완수하여 현실화시킨 이래, 맑스주의 정치이론 전체의 본질적인 주요 명제이자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단지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위해”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노동계급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러한 소극적 규정만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혁명적 최고국가권력의 형식적 특성에 대하여 아직 그 어떤 것도 적극적으로 말해진 바 없음이 명백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만 한다. 왜 하필 특히 “코뮌”이라는 규정된 형식이 노동계급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이 되어야 하는가? 왜 맑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그렇게 주장했으며, 또 왜 20년 후 엥겔스는 <프랑스 내전> 3판 서문에서 다시 한 번 매우 상세하게 코뮌의 특징을 서술했는가? 맑스와 엥겔스는,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으로 실현된 혁명적 부르주아의 중앙집권화된 체제에 대한 저 열렬한 찬양자들은 도대체 왜, 정확히 “코뮌”이 부르주아 체제와 완전히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만 한다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정치 형식”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과학적 사회주의의 두 창립자인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바에 따르는 정치적 강령과 목표들을 좀 더 정확히 분석해 보면, 사실상 파리코뮌 반란 이전뿐 아니라 그 이후에 있어서도 이 정치이론들과 1871년 파리코뮌으로 실현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형식이 어떤 특정한 의미에서 합치된다는 주장은 유지될 수가 없다. 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맑스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미하일 바쿠닌(Michael Bakunin)은 이 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역사적 진실을 알고 있었다. 맑스가 소급적으로 파리코뮌을 추가한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코뮌주의 반란의 영향은 매우 강력해서 맑스주의자들조차 자신들의 사상을 전부 잊어버리고 그에 경의를 표하도록 만들었다. 맑스주의자들은 그보다 더한 일도 했다. 즉, 모든 논리나 자신의 가장 깊숙한 감정과는 반대로 이들은 코뮌 및 코뮌의 목표를 자신들의 강령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모두에게 거부당하거나 버려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 혁명이 전 세계에 불러일으킨 열정은 그토록 강력했다.” (Cf. Brupbacher: Marx and Bakunin, pp.114-115.)

1871년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혁명적 이념 중 일부는 바쿠닌과 프루동의 연방주의적 강령으로부터, 또 일부는 블랑키주의 및 아주 약간의 맑스주의가 남아 있는 혁명적 자코뱅파의 사상적 조류에서 유래했다. 20년 후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주장에 따르면, 파리코뮌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블랑키주의자는 “새로운 혁명정부 수중의 모든 권력을 엄격한 독재로 집중시킨다”는 자신들의 강령 대신 그와 정반대되는 강령, 즉 파리코뮌과 프랑스 모든 코뮌의 자유로운 연방이라는 강령을 선언했다는 사실의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바로 이 주제에 관해서 동일한 모순이 지금까지 확인된 맑스 및 엥겔스의 정치이론과 이들이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 무조건 승인했다는 현재의 지배적인 이론 사이에 발생한다. 이 오류는 레닌이 1917년의 저작 <국가와 혁명>에서 맑스 국가이론의 전개에 대해 서술했을 때 생겨났다. 레닌은 마치 맑스가 1852년까지의 전환기에 이미 (1847~1848년에 <공산당 선언>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과제에 대한 이론적 정식화를 계획했고, 그 취지는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최고권력을 “파괴”하고 “전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는 듯이 서술했다. 이에 반해 레닌의 테제는 맑스와 엥겔스의 증언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모두, 바로 1871년 파리코뮌의 경험이 최초로 “노동계급은 단순히 이미 주어진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이를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입증했다고 반복적으로 밝혔다는 것이다. 즉 논리적 간극을 제공한 것은 레닌 자신이었다. 다른 곳에서 그는 국가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언급을 그렇게나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철학적으로 정밀하게 재생산해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맑스주의 국가이론의 전개를 설명할 때는 이 지점에서 20년이라는 기간을 단숨에 건너뛰었던 것이다. 레닌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에서 곧장 <프랑스 내전>(1871)으로 건너갔으며, 그러는 가운데 그가 간과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맑스가 <제1인터내셔널 개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정교한 한 문장으로 노동계급의 “정치적 강령” 전체를 요약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 노동계급의 중대한 과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맑스가 파리코뮌의 경험에 근거하여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명백한 방식으로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분쇄 및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 건설의 불가피한 필연성을 주장하던 1871년 이후 시기에도 아직, 그는 혁명적 파리코뮌을 모델로 한 정부형식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으로서 선전하는 일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역사적인 한 순간 ― 승리한 반동세력에 맞선 코뮌의 영웅적 투사들 및 희생자들을 대표하여 맑스가 무조건 주저 없이 앞으로 나섰던 바로 그 순간 ― 그가 이러한 입장을 지지했거나 또는 지지한 것처럼 보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그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국제조직을 대표하여 피와 열정으로 써내려 간, <프랑스 내전>에 대한 인터내셔널 노동자대회 총평의회 연설에 주목하고자 한다. 파리코뮌의 혁명적 본질을 지키기 위하여, 맑스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역사에 출현한 이 특별한 형식을 이용했어야 한다는 비판을 내놓기를 자제했다. 만일 그가 이를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적 코뮌 체제라는 정치형식을 곧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형식”으로서 축하했다면, 그 이유는 더 이상 단지 파리의 혁명적 노동자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부차적 목적에도 있게 된다. 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연설을 쓰면서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영예로운 전투 및 그 패배 직후 맑스는 코뮌의 맑스주의를 추가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맑스주의에 코뮌을 추가하고자 했다. 만일 우리가 이 주목할 만한 문건의 의미와 중요성의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한다면, 즉 이 문건을 그저 마치 영웅 서사시나 죽음의 애도처럼 보이는 고전적인 역사적 기록으로서만 이해하고 말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문건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오히려 저 모든 것을 넘어서서 이 문건은, 당시 이미 시작되어 이후 곧 제1인터내셔널의 붕괴로 이어지게 될 씁쓸한 투쟁 속에서 맑스가 그 가장 내부의 반대자들에 맞서 내놓은 단편적인 반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단편적이고 부차적인 목적은 맑스가 1870년 리옹과 마르세유 코뮌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1871년 파리 코뮌의 반란으로 절정에 달했던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들 간의 상호연관성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완전한 방식으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는 맑스가 혁명적 코뮌 체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서, 또한 중앙집권적인 정부로서 환영받았다고 ― 비록 이것이 그 실제 본질과는 반한다 하더라도 ― 설명하도록 만들었다.

이미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스스로, 파리코뮌이 본질적으로 연방주의적 성격을 지녔다는 혐의를 레닌보다도 더 부정한 바 있다. 만일 맑스가 파리코뮌으로 생겨난 프랑스 모든 코뮌 체제의 역사를 짧게 서술하면서 그 명백히 연방주의적인 양상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여전히 목적의식적으로 이러한 코뮌 체제를 통해 “국민의 동맹은 깨어지지 않았으며 반대로 조직되었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과 같은 연방주의자들이 당연히 거부하지 않았던) 바로 그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코뮌 체제 내에서 “중앙 정부”가 처리해야 할 것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작지만 중요한 기능들”을 강조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코뮌의 계획에 따르면 이러한 기능들이 “― 일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처럼 ― 폐지될 수 없으며, 코뮌의 (철저하게 책임을 지는) 시민 봉사자들에게 양도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기초로 이후 레닌은 코뮌의 사례에 대한 맑스의 저작에서 “연방주의의 흔적은 발견될 수 없다“며, ”맑스는 중앙집권주의자이고, 여기 인용된 그의 설명에서는 중앙집권주의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일탈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국가와 혁명>) 이는 상당히 정확하지만, 그러나 레닌은 이 지점에서 파리코뮌에 대한 맑스의 해설이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열망으로 그 첫 시작에 실현되었던 이 혁명적 코뮌 체제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특징짓는 것만은 제외시켰다는 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빠트려 버렸다.

파리코뮌의 연방적이고 반(反)중앙집권적 성격으로부터 가능한 한 벗어나기 위하여 맑스 및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레닌은, 다른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파괴 등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부정적 양상을 강조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혁명가들 사이에 어떠한 논란도 없다.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 정확하게 강조했던 것은, 파리코뮌에 의해 공표된 정치적 최고권력의 형식이 지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성격의 결정적 토대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실현이라는 그 사회적 실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방주의적인” 반대자들에게 분권화된 연방국가 형식은 그 자체로 현대 부르주아 국가의 중앙집권적 정부 형식과 다름없이 전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을 매우 신랄하게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강력하게 대립했던 반대자들과 같은 오류를 저질렀다. 코뮌 체제의 “연방주의적” 성격에 집중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의회주의나 그 밖의 부르주아 국가 체제의 지양된 형식으로부터 파리코뮌을 구별 짓는 다른 형식적 차이들을 (예를 들어, 시민군을 통한 상비군의 대체에 관하여, 집행부 권력과 입법부 권력의 통합에 관하여, “코뮌” 공무원을 해임할 책임과 권리에 관하여) 지나치게 많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적지 않은 개념상의 혼란을 만들어냈으며, 이는 파리코뮌에 대한 맑스주의의 입장과 관련해서뿐 아니라, 또한 이후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새로운 역사적 현상에 대한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향 설정에 있어서도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다. “연방” 형식으로 부르주아 국가를 극복한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에 동의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오늘날 일부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코뮌의 신봉자들이 혁명적 평의회 체제에 관하여 맑스와 엥겔스, 레닌의 그러한 잘못된 설명을 토대로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는 위임에 매여 있는 단기적인 의회의 대표들이나 또는 평균 “임금”을 위해 사적인 계약으로 고용된 정부 공무원들은 선출된 의회정치가에 비해 보다 덜 부르주아적인 방식일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이들이 만약 어떤 “코뮌의” 체제 형식 또는 “평의회와 유사한” 체제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결국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통치하는 국가가 모든 국가에 달라붙어 있는 저 계급억압의 수단이라는 성격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완전히 틀렸다. 최종적으로 “코뮌주의 사회 속에서 국가를 사멸 시킨다”는 이론, 즉 맑스와 엥겔스가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전통으로부터 이어받아 당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실천적 경험을 토대로 더욱 발전시킨 그 이론 전체가 그 혁명적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은, 우리가 레닌과 함께 더 이상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국가가 아니라 “인민 그 자체라는 다수가 자신들의 억압자를 억압하는” 국가가 존재한다고 선언한 그 순간, 또한 이때 참된 민주주의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현자”로서의 능력을 갖는 그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이미 사멸 중인 국가이다.” (<국가와 혁명>)라고 선언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참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이론의 두 기초이론을, 1871년 파리코뮌 반란이나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과 같은 투쟁의 특정 국면에서 현실적 요구들에 일시적으로 순응함으로써 결국 폐지될 위험에 이르렀던 그 이론들을, 다시 충분히 명료하게 정립할 때가 왔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본질적인 최종목적은 어떤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도, “코뮌” 국가도, 또는 심지어 “평의회와 유사한” 국가도, 그 어떤 국가도 아니다. 그 최종목적은 계급도 없고 국가도 없는 코뮌주의 사회이며, 그 종합적인 형식은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그러한 연합”(<공산당 선언>)이다.

맑스주의적 개량주의자들의 환상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무런 변화 없이 지양된 국가장치를 “장악”해내든, 또는 혁명적 맑스주의 이론에 따라 급진적으로 그 지양된 형식을 “분쇄”하고 또 자발적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대체”함으로써 그러한 형식을 전용하든, 둘 중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 그렇게 될 때까지 어떤 경우가 됐든 이러한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코뮌주의 사회로 변화하는 혁명적 기간을 거치면서 그 정치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 계급적 성격 및 사회적 기능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와는 달라질 것이다. 혁명적 코뮌과 혁명적 평의회 체제, 또는 역사적으로 출현하는 다른 모든 노동계급 정부의 “진짜 비밀”은 이러한 사회적 내용에 담겨 있을 뿐, 다른 어떤 인위적으로 고안된 정치형식이나 또는 일부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 언젠가 한번 실현된 적이 있었던 그러한 특수한 제도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옮긴이|기관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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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이형로·  정현철

 

 


1. 노동조합의 한계

 

노동조합은 18~19세기에 노동계급이 자신을 방어하고 생활 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서 성장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개선들을 자본주의 체제가 감당할 수 있었고, 노동조합은 한편으론 계급의 조직으로 발전하며 계급의식을 발전시켰고, 한편으론 노동자의 노동력 판매조건에 대한 협상자이자, 노동과 자본의 중재기관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노동조합은 계급의 연대와 결합의 중심이 되었고, 계급의식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나가며, 혁명가들이 노동조합에 개입하여 ‘공산주의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 사민주의 정당들과 함께 제국주의적 학살을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는데 노동조합이 협력함으로써 노동조합의 반(反)계급적 역할이 처음 드러났다.1)

 

또한, 전쟁 이후의 혁명 물결 속에서도 노동조합은, 자본주의를 타파하려는 노동자들의 시도들을 좌절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20세기 주요 제국주의 전쟁에서 전쟁을 지지했다. 그 후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서도 생존하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계급적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한 역할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을 위해 대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87년 이후 노동조합이 ‘계급투쟁의 학교’ ‘사회주의 훈련소’ 역할을 했으나, 이제는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에 해악적인 요소가 더 많아졌다. 극소수의 정파활동가나 초보 사회주의자를 양성하고 공급받을 수는 있겠으나, 대중행동의 자발성과 혁명의식과 대중이 직접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더욱이 정치조직과 노조운동의 잘못된 결합, 즉 정치조직의 노조운동 지도-피지도 관계에서 나타난 대리주의 경향은 계급행동의 수동성과 상층부의 관료주의를 양산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조직 전반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축소시켜왔다.2)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상대로 공동의 요구를 이루기 위한 기구로서 노동조합은 의미가 있다. 헌법의 노동 3권과 관련한 하위법들은 노동조합의 활동과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노동조합이 체제 내화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노동조합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그간 많은 시도가 있었다.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 지역일반 노동조합운동, 산업별 노동조합건설 등- 하지만 결론적으로 모두 실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은 산별노조-진보정당의 양 날개 전략 속에서 진보정당의 몰락과 함께 내셔널센터(산업별 노동조합의 전국 중앙 조직)로서의 위상마저 무너져 버렸다. 최근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를 둘러싼 희대의 촌극은 민주노총의 현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은 민주노총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소수 해고자들이 이끌고 있다. 재능교육, 쌍용차, 콜트콜텍, 코오롱 등 이른바 장기투쟁사업장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역할과 권위의 상실은 내부 자정능력도 상실시켰다. 최근 10여 년간 민주노총 내부의 무수한 조직 갈등에서 민주노총은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조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노동조합의 근본적인 한계는 말하지 않고 ‘개량주의’나 ‘관료주의’의 문제로 대체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좋은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것은 대개 노동조합의 ‘급진화’-좌익리더십 선출, 급진적인 요구안, 많은 임금 인상이나 정부 정책의 변화 촉구-로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의 핵심은 기본적인 노동조합의 형태를 방어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재편, 강화, 혁신’ 등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전체 노동자의 90%가 노동조합의 밖에 존재한다. 노동조합만이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투쟁하며 계급성을 고양시키는 기구라는 생각은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2. 노동조합과 노동자평의회

 

우리가 말하는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조합운동의 개조나 발전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없으며, 좌익적(전투적) 노동조합이나 평조합원 운동이 그것을 대체할 수도 없다. 20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투쟁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혁명적 임무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냈다. 소비에트 혹은 노동자평의회, 즉 노동자 총회에 의해서 통제당하는 대표들의 회의가 그것이었다.

 

소비에트나 평의회는 준 상설적인 총회에 의해서 선출된 대표들의 회의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존재는 전적으로 일반화된 계급투쟁에 의존한다. 계급이 모든 공장에서 투쟁하고 있지 않다면,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는 모든 장소에 노동자들의 총회가 없다면, 노동자평의회는 존재할 수 없다. 노동자평의회는 노동계급이 전면적이고 공공연한 투쟁을 이어나갈 때에만 상설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그 자체로 혁명적 시기를 뜻한다. 노동자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권력 특유의 기구이다.

 

그렇다면 노동계급은 일상시기이거나 계급의식의 고양기가 아닐 때 어떻게 그 자신을 조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난 50여 년 동안 진행된 수천 번의 비공인(와일드캣) 파업3) 의 경험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을 제공해준다. 이러한 노동조합을 넘어선 파업은 특히 매우 단순한 조직 형태로 자발적으로 일어났으며, 항상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총회에서 선출되어 언제나 소환되며 총회에 책임을 지는 파업 총회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똑같은 조직적 기초가 평의회의 형태로 이러한 파업 속에서 발견된다. 형식과 내용은 결합되어 있다. 그들의 형식이나 조직은 어떤 태동기에 그 형태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혁명 기관의 조직 형태인 노동자평의회이다.

 

파업참가자들의 총회에 의해 주도되고, 총회에 의해 선임되고 언제나 소환될 수 있는 대표들로 구성된 각종 평의회에 의해 협력하고 확장되면서, 이러한 투쟁들은 노동조합의 한계와 작업장, 업종의 울타리를 넘어 부르주아 국가와의 정면대치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의 확대와 급진화를 통해서만이 노동계급은, 자본주의국가에 대항한 방어적 투쟁에서 공개적이고 전면적인 공세적 투쟁으로 이행할 수 있다. 대중 파업, 급진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자기 조직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 자신을 노동조합의 한계와 영역에서 넘어설 때 노동자 투쟁은 확장되고 막혀있는 모든 곳을 열어놓을 것이다.


 

3. 평의회의 특징과 직접민주주의

 

평의회는 아래와 같이 공통의 특성이 있다.
           
첫째, 평범한 노동자, 농민과 소시민, 군인, 저임금 노동자 포괄적으로 보면 억압받는 대중이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그리고 다른 비중을 가지고 평의회의 주체로 활동했다. 이러한 계급 또는 계층은 사회적, 경제적(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서 오는 임금노동자), 정치적(법에 따른 선거권 제한)으로 권리를 억압받았었고, 박탈당하였으며, 최소한 어떤 특정한 계급에 종속되어 사회적으로 박해받는 위치에 있었다.

 

둘째, 평의회운동의 정치적 조직형태는 지배층이 자신들의 권력을 실행하는 직접적 영역이거나, 권력의 유지에 도움을 주는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법률적 조직과 제도들에 대항하면서, 급진적인 직접민주주의 조직형태를 지향했다. 이러한 정치적 조직을 통하여 평의회는 지금까지 박해받던 계급이 직접 사회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이의 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평의회의 첫 번째 조직원칙은 평의회를 구성하는 선거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대표하는 자들은 제외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노동력을 항시적으로 고용하는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하거나 생산수단을 임대한 모든 사람에게서 선거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셋째, 평의회 직접민주주의는 다음의 실천과 제도들이 특징이다.

1) 모든 지도적 위치는 선거를 통하여 결정된다.
2) 선거권자는 통일된 선거단위에서 행동하며, 자신들이 속한 기본단위(작업장, 분과, 위원회, 부대)와 대중집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형성한다. 
3) 선거권자는 필요한 결정을 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논의 사항을 스스로 결정하며, 자신들이 뽑은 선출자에게 되도록 적은 사안에 대한 결정권한을 위임한다.
4) 당선된 선출자는 결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선거권자의 위임에 통제 받는다.
5) 당선된 선출자들은 선거권자의 지속적인 통제하에 있으며, 이들에게 규칙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해명해야 하며, 과오가 있을 때 언제든지 소환되거나 대표성이 상실된다.
6) 피선거권자와 선거권자의 사회적 지위는 가능한 한 같아야 한다.

 

이러한 형태의 조직원리가 확산되어 일반화되면 ‘지배받는 자와 지배하는 자가’ 동일화되는, 즉 ‘대중의 직접지배’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평의회가 지향한 직접 민주주의의 골격을 이룬다.

 

평의회의 특징에서 우리가 현실에서 가져야 할 무기는 직접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이다. 직접민주주의의 내용으로서 직접행동은 노동조합 관료들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노동자 스스로의 행동을 의미한다. 직접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모임 참가자들 모두가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또한, 직접행동에 참가하는 그룹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움직일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프롤레타리아(노동자) 민주주의는 정치와 경제가 융합된 평의회 형태를 보일 때에만 가능하며, 평의회 안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계급 고유의 단결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4)
     

 

4. 새로운 노동자운동에 대하여

 

자본의 체제적 위기 속에서 노동자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가고 있고, 노동조합은 이제 노동자계급의 기본생활을 방어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있다. 자본의 공격은 노동조합의 존재 여부, 인정 여부에 관계없이 철저한 계급적 분리(분업)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희생5) 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전체 노동계급의 단결 없이는 막아낼 수 없다. 계급의 분업과 분리를 용인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노동조합을 통해서는 계급 전체의 단결을 유지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는 노동계급을 분리하고 눈을 가림으로써 무장 해제시킨다. 노동계급은 그 힘과 의식을 노동조합 안팎에서 노동조합주의와 때로는 노동조합 자체와 맞서 싸우지 않고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이미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은 급속도로 제도권으로 통합되고 관료화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자본가의 수단으로 변질하여 버렸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 개량과 의회주의에 몰입된 노동운동의 상층 관료들은 노동자 대중의 계급의식을 왜곡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선 대안은 무엇인가?6)

 

그것은 비공인파업, 점거운동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대중총회, 파업위원회, 직접행동네트워크 등이 투쟁의 내용과 일치되는 조직형식이다. 하지만 최근의 점거운동은 국제적으로 활성화되었지만, 대중총회 형식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내용에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 자본주의 개조 주장에 머물렀다. 지나친 정치조직의 지도의지, 느슨한 시민운동과의 결합이 운동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프롤레타리아(프레카리아트) 자발적 행동과 의식적 투쟁이 지역평의회에서 만나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평의회운동은 현실에서 노동조합을 넘어선 노동자 대중의 직접행동과 비공인파업 투쟁 형태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투쟁의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평의회적 조직인 파업위원회, 투쟁위원회를 통해 계급 안으로 확산해나갈 수 있다. 또한,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생존권 방어에 내몰린 불안정노동자, 실업자, 빈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소수자들이 거리투쟁, 광장점거를 통해 투쟁의 주체가 되는 대중총회를 개최하고, 지역에서의 계급적 연대를 실현하는 지역(투쟁)평의회 건설을 통해 새로운 계급투쟁의 주체가 형성될 수 있다.

피티민주주의.jpg

이러한 평의회운동 속에서 노동자 대중과 새로운 계급주체들이 작업장, 업종, 고용 여부, 성별, 조합원, 비조합원 장벽을 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수평적 연대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광장점거와 파업투쟁을 하나로 묶어낼 것7)이며, 자본과 국가권력에 맞선 전 계급적 투쟁전선의 형성에 기여할 것이다.

 

여기서 정치조직은 노동조합 역할에 개입하거나 경제투쟁을 배후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운동에 나서는 것을 조력, 촉진하고, 대중총회, 파업위원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계급의식을 혁명의식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토론문화, 토론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상시기부터 준비와 단련이 필요하다.

 

역사적인 평의회운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본에 의하여 분열 통치되는 노동자 대중의 의식을 ‘주체적 자각’에 의하여 자본주의 극복을 열망하는 ‘계급의식’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조직형태가 ‘평의회’임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일, 모든 것이 불안정한 새로운 계급주체들8)이 평의회운동, 코뮤니스트 정치와 만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대중투쟁의 분출과 함께 파시즘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새로운 계급주체,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모든 조직 형식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철저히 관철되고 수평적인 계급 연대에 기반을 둔 평의회 형식이어야 한다.

 

 

5. 평의회 운동의 지평 확대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

 

앞으로의 평의회운동은 이제 노동자권력을 지향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새로운 주체형성, 새로운 계급투쟁의 창출, 계급의식의 발전 기관으로 지평을 확대하여야 한다.

 

첫째, 새로운 주체형성과 새로운 계급투쟁의 창출은 비정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불안정노동 계급의 지역적 연대투쟁과 이른바 프레카리아트 계급의 직접행동 분출로 현실화될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이 수평적으로 만나 지역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지역평의회로 발전할 때 계급의식 또한 급속도로 회복, 발전할 것이다.

 

오늘날의 평의회운동은 대공장 사업장의 노동조합(현장조직)이 아닌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이 계급성과 연대를 회복하려면 이러한 지역평의회 체계 속에서 새로운 주체들과 만나 기성 노동조합운동을 압박하고 포위해나가야 한다. 노동조합을 버리거나 이용한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어느 곳에서든 새로운 노동자 투쟁과 평의회적 조직형태를 결합시켜야 한다.

 

둘째,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중총회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정치토론 광장을 통해 노동자 토론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의 토론능력(문화)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선 계급의 무기9)가 될 것이다. 이러한 대중총회와 정치광장이 확장되어 조합원, 비조합원 구분하지 않고, 실업자, 학생, 지역의 프롤레타리아까지 광범위하게 참여할 때 대리주의 노동자(진보)정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자신이 주체가 되는 직접정치가 실현될 것이다.

 

셋째, 광장에서의 토론은 직접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며, 내용과 형식은 항상 일치해야 한다. 직접행동들은 수평적 네트워크로 확장되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중심에 서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경험과 확장만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계급의식으로 자리 잡게 할 것이다. 대중총회, 지역평의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연대는 대중들이 한국이라는 지역에 갇히지 않고 국제주의 관점에서 국제적 계급투쟁의 흐름과 새로운 운동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여기 흔들리는 민주노조라는 노쇠한 나무가 있다. 노동자계급의 뿌리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그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계급의 뿌리에서 자라난 나무는 풍성한 가지들을 번창하며 민주노조운동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관료주의, 노사협조주의, 노동조합주의라는 병에 걸렸고, 대부분 열매는 의회주의, 민족주의, 사민주의 세력이 가져갔다. 노동자에게 해악한 세력들은 여전히 건강한 가지들을 훼손하고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마저 자신들이 취하려 이전투구 중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를 잘 보호해 결실을 얻을 것인가? 썩은 가지 쳐내고 쓸 만한 가지만을 되살릴 것인가? 아니면 뿌리부터 튼튼히 하여 새싹을 틔울 것인가?

 

아직도 ‘노동조합이 더 폭넓은 단결 투쟁의 근거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노동조합운동을 과감히 뛰어넘어 노동자계급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야 하지 않을까?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비조합원, 실업자, 퇴직자, 모든 장벽을 없애고 노동자계급으로 재탄생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평의회) 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들고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여 계급투쟁의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자!

 

 

<주>

1)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노동조합이 당보다 훨씬 더 기회주의적이었음을 폭로한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 내부의 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했었고 독일사회민주당(SPD)에서는 3년 동안 전쟁찬성파와 전쟁반대파 사이의 투쟁이 벌어지다가 결국 전쟁찬성파가 승리하고 그 반대파는 당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그와는 달리 노동조합은 전쟁발발 이전에 이미 향토전선에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로 정부와 협정을 맺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노동조합은 전쟁경제와 공장에서의 전시법의 수행을 더 많이 넘겨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소위 노동조합 측은 자본이 당을 정복할 때 추진력이었고, 독일에서 혁명의 실패에 있어서 그리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중요한 혁명가들의 살해에서도 그랬다. [필자]

 

2) 이른바 ‘민주집중제’로 표현되는 중앙 집중적 의사결정구조는 대의제 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와 결합하여 노동자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왜곡시켰다. 총회 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는 사라졌고, 집행부와 대의원 장악이 모든 것에 우선시 되었다. 노동조합 상층기구와 형식적 의사결정구조는 조합원들의 자발적 행동과 노동자투쟁의 확산을 가로막는 역할로 변질되었다. 이것이 노동조합운동의 몰락과 회복불능을 가속화 시켰다. ‘노동자 민주주의’가 실종된 상태에서의 ‘민주노조재건’이라는 구호가 얼마나 허구인지는 이미 평조합원들이 절감하고 있다.  [노동자연대와 노동자 민주주의 복원을 위해], 정현철, 2013, 코뮤니스트 2호

 

3) 직접행동은 노동조합 관료들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노동자 스스로의 행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파업은 규칙들과 규제들에 따라 노동조합에 의해 선언되는 파업과는 대조적으로 와일드캣 파업(비합법적이거나 비공식적)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자생적인 파업들은 다른 중요한 측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이 다른 개별 노동조합들로 분할되는 것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의 세계적 전통들은 노동자들을 종종 경쟁하고 시기하고 비난하는 회사들로 분리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작업장에서 다른 노동조합에 소속된 조합원들은 서로 간에 반목했다. 파업을 할 때도 그들은 종종 분리된 상태로 참여했다. 때문에 통일이라는 관념들에 접하기 어려웠고 행동의 조화와 타협은 유일하게 위원회와 관료들이 담당했다. 그러나 이제 직접행동에서 이러한 노동조합의 회원 차이는 어느 조합에도 속하지 않는 표시로써 의미가 없어진다. 이러한 자생적 투쟁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노동자들 사이의 통일이 요구되었다. 즉 통일이 없이는 어떠한 투쟁도 불가능했다. 와일드 캣 파업들이 거대한 대중들을 결집하고, 전 산업 분야, 도시와 구역에서 대규모로 발생했을 때, 조직은 새로운 형태를 취해야 한다. 파업위원회들은 관료들의 노동조합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노동자 평의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

 

4) 프롤레타리아계급에 1910~1920년대의 혁명적 물결은 계급의식의 생성과 발전을 모두 보여주었다. 계급투쟁의 발전과 동시에, 수많은 장소에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총회가 나타났고, 그곳 모두에서 회합과 토론, 생각과 제안들의 교류가 발생했다. 이전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자본주의가 부과한 심각한 무지와 의식의 왜곡 속에서 침체되어 있었지만, 평의회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실천적인 지성과 믿기 어려울 정도의 명료함과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생각과 사상들을 교환하고 정보를 소통하면서 그들은 정치적 토론에 임했고,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들의 창의력과 능동성을 증명해 주었다. 정치적 환경은 열정적인 토론을 창출하고, 다른 프롤레타리아들과의 교류와 성찰을 위한 수많은 통로가 만들어졌다. 이때 계급의식은 집단적이고 실천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급의식과 혁명조직(당)의 역할에 대하여],이형로, 2012, 붉은글씨 창간호,

 

5) 비정규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의 경우 파업의 대부분을 불법으로 몰아가거나 노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대공장(대기업) 노조들의 생산(자본)에 타격을 가하지 않는 공식적 파업에 대해 묵인하는 현상들은 이러한 자본의 지배방식(분업화)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필자]

 

6) 이 글에서 노동자운동 새로운 대안의 핵심 중 하나인 정치운동(혁명조직) 관련된 내용은 담아내지 못했다. 혁명조직의 역할, 혁명조직과 계급과의 관계, 혁명조직과 노동자평의회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서는 지면상 다음 호로 넘긴다. [필자]

 

7) 거리와 광장에서의 해방감이 일상적인 정치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터에서의 경제적인 차별에 대한 요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요구가 지금까지 운동에서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는 지나치게 조직노동운동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노동조합의 전투적 재편과 같은 요구들은 전체 임금노동자들의 채 10%도 되지 않은 조직노동운동에나 적용되는 요구이지 노동조합조차 설립하기 어려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시간 단축 같은 요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일반적인 요구를 넘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더욱 구체적인 요구들이 정식화되어야 한다.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이정인, 2012, 붉은글씨 창간호

 

8) 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저임금과 불안정성이라는 일반적인 공통성 아래에 다양한 소수자적 정체성을 포괄하고 있다. (중략) 이러한 주체 구성 때문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변부, 소수자들의 이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에 대한 투쟁으로 일상적인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다.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이정인, 2012, 붉은글씨 창간호

 

9) ‘노동자 민주주의'는 투쟁하는 노동자의, 토론하는 노동자의 발전하는 정치의식이다. 다수가 이러한 정치의식에 익숙해졌을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우월한 노동자계급 의식이 된다. 노동자들의 의식적이고 민주적인 토론만이 어제든 나타날 수 있는 계급 내부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수 있다. 이것은 지난한 계급의식 발전 과정의 일부이며, 이러한 토대에서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창조성과 자발성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넘어 더욱 높고 깊은 계급의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어렵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할 수도 있고, 토론의 결과가 행동으로 즉각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혁명의 승리는 고사하고 내부 분열이 반혁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에겐 열린 토론을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바탕 위에서 부르주아 대의제도의 허위의식을 타파하고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만들어 간다면 무너진 폐허에 새로운 것이 들어설 가능성이 실제로 보일 것이다.  [노동자연대와 노동자 민주주의 복원을 위해], 정현철, 2013, 코뮤니스트 2호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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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민족주의 세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방어를 넘어, 완전한 정치사상의 자유 쟁취와 지배계급의 폭압기구 해체 투쟁에 나서자!

'진보-민족주의 세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방어를 넘어,
완전한 정치사상의 자유 쟁취와 지배계급의 폭압기구 해체 투쟁에 나서자!

 


1. 위협세력?! 눈엣가시?!
 
국가정보원에 의한 부정한 여론조작으로 얼룩진 대통령선거를 통해 집권한 박근혜 정권의 실질적 ‘위협세력?! 눈엣가시?!’는 누구인가?


하나는 지금 대통령선거결과에 대한 무효와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다. 이것은 2008년 광우병 파동,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두 중학생 사망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분노와 자발성으로 결합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기댄 광범위한 대중행동이라 하겠다.


또 다른 하나는 특별한 설명이 더 필요 없는 휴전선 너머 60년 넘게 마주하고 있는 북한 정권과 한반도에서의 제국주의 군사적 충돌이다. 그리고 이들과의 관계설정에 있어 별도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한국 사회 내 이른바 ‘진보-민족주의 세력’이다. 그들은 다른 정치세력과의 내부투쟁을 통해 ‘통합진보당’으로 외화 되었고, 그 외부에서는 그들에게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공격하고 있다.

 

 

 

 

2. 국가정보원은 왜 'RO사건`을 통해 통합진보당을 공격했나?

.

 

 

부르주아 국가에 정보기관은 체제 유지에 필수요소다. 정보를 독점,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그들의 역할은 부르주아 입장에서는 음지에서 자신들의 양지를 지켜주는 최고의 파수꾼들이다. 이러한 때 자신들의 보호막이 엄청난 정치적 수세로 몰리고 이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정권의 안위를 위협할 정도로 확대될 조짐이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빨갱이 안보론’을 들고 나왔다. 이는 대중투쟁의 확산이 박근혜 정권으로 향하는 것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한 자기방어 측면과 함께 박근혜 정권 내내 직면할 세계경제위기 상황과 한반도 긴장상태를 고려한 정권 초기 안정적 통치기반 마련과 장기적인 정국주도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박근혜 정권 입장에서 정권 대 대중행동으로 광범위하고 부담스럽게 확대되는 전선을 국가정보원 대 통합진보당으로 왜곡, 축소시킨 후 애국세력 대 종북세력으로 역(逆)확장하여 대중행동을 분열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반대세력을 뿌리까지 제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특별하게 통합진보당을 공격한 이유는 위에서 말한 딱지를 붙이고 공격하기에 통합진보당이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으며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렇다면 통합진보당을 어떻게 볼 것인가?

 

통합진보당은 그간 목적의식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흐름에 함께 하면서 성장해 온 이유로 그들의 본래 계급적․정치적 지향과 무관하게 `진보', ‘좌파’로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계급적으로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이고, 동시에 북한지배권력과 정치 군사적 상당한 공통의 인식기반을 두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스탈린주의의 변종인 극단적 민족주의(김일성주의)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공산주의 혁명에서 분명히 적대 되는 세력이다.


한마디로 진보적이기는커녕 퇴행하는 반혁명 정치세력이다. 우리가 위에서 밝힌 ‘진보-민족주의 세력’이라는 표현은 사실 칭찬에 가깝다 하겠다.
 


4. 그럼에도 우리는 부르주아 폭압기구의 민족주의 세력 탄압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발언과 의지가 허무맹랑하고 시대에 뒤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치사상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탄압을 받는다면 이 사회에서 그 누구도 그러한 꿈과 목표를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위한 어떠한 노력을 하는 데에 많은 지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발언은 헌법에 위배되니 정신 차려야 하고, 박근혜 정권과 하수인 국가정보원은 이를 문제 삼아 공안정국 조성과 공안탄압을 중단하라’는 이율배반적인 회색주의자의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지금 이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모든 세력들의 그 신념과 의지에 대한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그 어떠한 탄압도 거부하고 반대하며 방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5. 전망과 과제

.

 

 

국가정보원은 공안탄압을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공안사건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으며, 이에 발맞춰 검찰과 경찰, 보수언론, 극우세력들 전체는 사회주의운동, 노동자운동 전반으로 공격을 확대할 것이 예상된다.

 

 

이때 의회주의자들과 기회주의 정치세력, 개량주의 노동자운동세력은 급격히 체제 내화 되어, 그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탄생과 공안정국은 한국 프롤레타리아계급에게 그동안 운동을 퇴보와 패배로 이끈 낡은 진보-민족주의와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공안탄압과 폭압기구 해체, 정치사상의 자유 쟁취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만 하며, 공세적 대중행동과 의식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가능하다.

 

 

이에 노동자계급과 혁명세력이 나서서 공안탄압, 공안정국에 굴하지 말고, 폭압기구 해체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보다 광범위하고 공세적으로 벌여나가야 한다.

.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위축되지 말고 노조관료나 의회주의자들에게 의탁하는 투쟁이 아니라 더욱 과감한 직접행동에 나서야 한다.

.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투쟁과 혁명(코뮤니스트)정치의 결합만이 낡은 진보와 민족주의를 넘어 다수계급의 사회혁명 열망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다.

 

 

다가올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소수의 내란이나 테러리즘이 아니라, 다수계급이 혁명의 주체가 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모두 철폐하고, 프롤레타리아 직접정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하는 가장 이성적이고 창조적인 혁명이다.


2013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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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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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여름호(3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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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3호에 실린 글>

 

□ 故 남궁원 동지 추모 특집

 
-안녕! 남궁원!

 
-추모시   /임성용

 
-남궁원 동지를 추억하는 시인의 일기    /조성웅

 
-남궁원 동지가 걸어온 고집스럽던 그 길목에 한편의 이야기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건
 

-덩치만큼이나 오지랖 넉넉 하고 푸근했던 사내    /이승찬

 
-사랑…
 


□ 故 남궁원 동지의 공산주의 출판 활동


-세계혁명- 당, 평의회, 노동조합
 

-좌익공산주의


-노동자평의회와 공산주의 길
 

-다시 혁명을 말한다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 특집 :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혁명조직의 구조

 
-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이형로.정현철

 
-혁명가조직 구조와 기능    /이형로

 
-운동과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이정인

 


□ 정세와 계급투쟁


-재능지부 문제 : 새로운 의사 결정 구조를 위하여

 
-거리시위와 계급 권력     /김명수

 
-노동조합과 코뮤니스트      /성승욱.이형로

 
-만덕5지구와 개발동맹들     /윤웅태

 
-[인터뷰] 영상활동가 김수목 동지    /정현철

 


□ 기획번역 연재


-기획번역1. 파국의 시대      /오세철


-기획번역2.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배신자들의 비난(2)

 
-기획번역3. 민족주의는 계급투쟁의 치명적인 독이다.     /성승욱


 

□ 좌익공산주의 역사와 인물

 
-헤르만 호르터의 사망기사     /김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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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혁명가 故 남궁원 동지 49재 및 추모사업 첫 준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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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평가와 정치운동 전망] 어제 우리를 속인 낡은 정치가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 이형로

[대선평가와 정치운동 전망]

 

어제 우리를 속인 낡은 정치가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형로

 

 


들어가며

 

2012년 겨울,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국가적 행사이지만 프롤레타리아트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부르주아 대선이 끝났다. 지금은 한편의 대형 정치쇼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통치를 위한 준비가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준비에는 늘 수많은 잡음과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이슈들이 생산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부르주아 권력재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선거에서 패배한 쪽에는 정비기간을 주어 부르주아 민주주의(선거)에 대한 환상을 지속하게 한다.

 

이번 대선에서 노동자 정치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나? 노동자독자후보에서 비판적 지지까지 늘 반복되는 선거전술의 재탕과 이합집산 속에서 두 명의 노동자후보, 민주노총의 무능, 저조한 득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 사회주의 정치의 실종 등 최악의 선거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부르주아 선거 국면을 노동자정치로 돌파하기는커녕, 노동자운동 전체의 쇠락을 가속하는 역할을 했다.

 

선거에 익숙한 대중들에게 부르주아 선거의 기억은 오래가지 못한다. 문재인은 1,000만 표 이상을 획득했음에도 승자만이 살아남는 정치쇼에서 어느새 잊힌 사람이 되었고, 이번 대선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안철수의 화려한 복귀의 그 빛 역시 바래고 있다. 노동자투쟁의 기억은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되어 계급투쟁에 도움이 되지만,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한 노동자 후보의 흔적은 금새 지워진다. 이미 부르주아 정치시스템에 편입된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은 자체 정비기간을 거쳐 의회활동, 보궐선거, 각종 사회적 이슈를 통해 자연스레 정치무대에 등장하겠지만, 노동자정치는 더욱 잊혀 가거나 부르주아 정치세력에 계급 고유의 과제마저 넘겨줄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지난 대선에서 민주노총 상층관료 상당수는 문재인과 안철수 캠프에 합류했고, 조합원들은 압도적으로 부르주아 정치인을 지지했다. 이것이 2013년 한국 노동자계급의 현실이며, 노동자정치의 출발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운동진영 내부는 어떠한가? 노동자계급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은 있었는가, 내부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투쟁은 벌어지고 있는가? 이제야말로 낡은 운동과 과감히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모색할 때가 되지 않았나? 답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반성하지 않는 세력들의 기득권은 여전히 보호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내부혁명이 가능하려면 기존세력이 기득권을 내려놓던가, 전면적인 내부투쟁으로 기득권을 몰수해야 한다. 비정규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모든 단위에서 동등하게 의사결정기구 참여를 보장받아야 한다. 소수 혁명적 정치세력은 모든 대중조직에서 완전한 정치활동을 보장받아야 한다. 막강한 부르주아 정치권력에 맞서 주요 생산수단의 사회화(국유화)와 노동자통제를 주장하던 세력들이 왜 노동자계급 내부의 문제에는 소극적이거나 부르주아 방식에 머물고 있는가.

 

이에 우리는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의 창출을 위해, 부르주아 정치제도 자체에 적대하는 태도에서 대선을 평가하고 현실 운동의 전망을 제시하려 한다. 아직 우리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역량과 운동의 방향에 대한 정답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므로 실천 속에서 모든 것을 열어 놓고 토론하고 검증받으면서 새로운 운동 조건을 창출해 나갈 것이다.

 


1. 부르주아 선거평가에 대한 코뮤니스트 관점

 

우리는 작년 부르주아 대선을 맞이하여 '사회주의의 정치의 실종'과 ' 부르주아 선거 자체에 대한 거부'를 주장했었다.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노동계급과 투쟁하며 그들을 정치의 주체로 함께 내세우고 있는가? 부르주아 정치판에 ‘진보’ 정당이라는 이름으로 끼어들어 노동계급을 배신하고 부르주아의 한 분파로 행세했음을 반성하고 있는가? 일부에서 ‘노동자 민중후보’를 내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 후보전술을 쓸 때인가? 제발 좀 반성하자.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지 말자. 선거가 아닌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맞서자.


노동자 대중의 열망과 사회주의 정치의 무능력의 틈을 파고드는 것이 파시즘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정치의 진정한 복원만이 파시즘을 이기는 길이다."

-오세철,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코뮤니스트』, 창간호, [사회주의 정치의 실종], 11쪽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은 지배계급의 위기를 평화롭게 넘기는 것이며, 격화되는 대중 투쟁을 잠재우고 대중의 불만표출을 잠시 멈추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선거에 휩쓸리지 말고 투쟁의 동력을 유지해 선거 이후 더욱 강력한 투쟁으로 지배계급에 맞서야 한다.
선거는 짧다. 두 개의 노선은 대립하고 있다. 사민주의와 동거, 선거정치 몰입이냐, 계급적 대중행동 투쟁 촉구냐?
이제라도 부르주아 잔치판에서 뛰쳐나와 노동자계급의 자리에서 자본주의가 인류 참상의 원인이고, 이를 넘어서는 공산주의 사회만이 대안이라고 대중적・공개적으로 말하고 싸워야 한다.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노동계급과 함께 투쟁하고 그들을 정치의 주체로 내세워야 한다.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012 부르주아 대선에 맞선 코뮤니스트노동자의 입장], 2012년11월
 

이 주장은 단순히 후보전술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치 자체를 거부하는 코뮤니스트 관점에서 선거를 판단하고, 노동자계급 고유의 영역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정치를 복원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코뮤니스트 관점의 선거평가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기존의 선거평가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의 모든 선거 평가는 표 분석(계층, 계급, 나이, 성별, 지역 등)과 표를 얻기 위한 선거운동 전반(후보자와 정책 포함)에 대한 사회학적, 통계적 분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 자체가 부르주아 선거제도에 포함된 선거 메커니즘의 일부기 때문에, 계급의식 측면에서 노동자 정치의식에 대한 분석은 불가능하다. 선택지 안에서의 투표행위는 계급의식을 왜곡해서 반영하기 때문에 득표수를 근거로 노동자 정치의식을 판단할 수는 없다. 또한, 계급의 불만을 체제 내로 흡수하고 지배 권력을 재편하는 것이 본질인 부르주아 선거를 지배계급 대 피지배계급의 계급투쟁 관점에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미 부르주아 선거가 모든 대립구도를 흡수하는 시스템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한 표 분석이 아닌 장기적으로 선거 이전과 선거 이후 계급의식변화에 대한 총체적 분석과 선거 국면에서 정치세력들이 계급의식에 미친 영향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부르주아 선거제도가 일반화되어, 체제 위기극복의 필수요소가 된 지금이 바로 부르주아 정치 자체를 거부하는 관점에서 선거평가를 해야 할 시점이다.

 

그렇다면 코뮤니스트 관점에서 선거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선거 시기 부르주아 민주주의(선거) 환상에 대한 계급의식 수준을 분석해야 한다.

 

둘째, 선거 시기 노동자 대중의 열망이 어떻게 선거에 흡수되는지, 사회주의 정치 세력을 포함한 선거 참여가 대중투쟁과 정치운동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평가해야 한다.
 
셋째, 선거 이후 선거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책과 새로운 계급투쟁 창출을 위한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아쉽게도 이번 대선평가에서는 계급의식 분석에 대한 사전준비가 부족하여. 문제 제기 수준에서 머물렀다. 앞으로 계급의식에 관한 조사와 연구는 장기적인 계획으로 진행될 것이며, 혁명 주체 문제를 푸는 단서를 제공할 것을 기대한다.

 


2.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정치노선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첫째, 부르주아 정치에 이미 편입되어 있거나 전문적인 선거(의회)주의 세력을 우리는 부르주아 정치의 좌익이라 부른다. 과거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에 뿌리를 둔 진보정당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그들과 연합했던 다함께와 같은 정파들이 이에 포함된다. 이들의 일부는 특별히 선거 국면에서는 부르주아 정파와 연합하거나 비판적 지지를 보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부르주아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둘째, 의회주의, 수권주의를 거부하는 사회주의 강령을 내걸고도 선거 시기에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했던 사노위, 노혁추 같은 세력을 사회주의 정치에서 후퇴한 기회주의 정치로 판단한다. 이들은 선거(연합)를 통해 대중투쟁 확산과 정치세력화를 주장했지만, 결국 계급투쟁과 무관하게 선거운동만 한 셈이 되었다.

 

셋째, 노동자(사회주의)후보를 세워 선거에 참여하려 했으나 현실 조건이 되지 않아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세력들이다. 이들은 본질에서 후보전술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둘째 세력과 유사하다. 다만 현실에서는 부르주아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보전술에 대해 제한적인지, 적극적인지 판단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

 

넷째, 부르주아 정치와 단절하거나 선거전술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정치단체와 혁명적 사회주의자 개인들인데, 이번 선거에서 모두 후보전술 자체를 반대했다.

 


3. 정치노선별 대선 참여와 거부의 이유

 

위의 정치노선들이 이번 대선에 참여하거나 거부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는 부르주아 정치인 문재인을 지지하거나 비판적 지지한 세력은 제외한다.)

첫째, 변혁모임, 사노위, 노혁추 등은 대선 시기 정세개입(야권연대 반대)을 통해 대중투쟁을 촉진하고 이후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기조 하에 후보전술을 구사했다.

 

“‘대선기획단’의 “반자본주의 반신자유주의, 야권연대 반대, 완주하는 노동자민중 독자후보, 당 건설 및 대선 대응 분리”라는 정치적 기조와 ‘변혁모임’의 “야권연대가 아닌 노동자 대통령 독자 후보 출마와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통해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제안에 따라, 이러한 정치적 기조에 동의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노동자대통령 선거투쟁본부’를 결성했다. 선투본은 논의를 거쳐 2012년 대선투쟁의 기조를 ‘투쟁하는 노동자 대통령 / 탐욕의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대선투쟁 / 야권연대가 아닌 노동자 계급정치 강화’로 결정하여 2012년 대선투쟁에 임했다.”

-‘노동자대통령 선거투쟁본부’보고 및 평가(안), 2013년 1월 25일


하지만 이러한 정세적인 당위성과는 다르게 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 노동자당(노동자혁명당) 건설 노선의 후퇴와 변경, 그리고 변혁모임으로 표현되는 전투적 노조운동의 위기 상황에서 정세개입과 당 건설 당위의 압박이 작용한 결과 무리한 선거전술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주체역량의 문제를 계급투쟁의 성과로 해결 하려하지 않고, 통진당 사태 이후 공백이 생긴 진보정당 영역을 선거의 매개로 차지하려 했던 것이 오류의 핵심이다.

 

둘째, 노건투, 해방연대, 사회주의 유기적 지식인 등은 역량부족, 후보전술 절차와 선거 강령상의 문제, 그리고 진보신당 참여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며 노동자후보 캠프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는 변혁모임의 선거논의 과정에서 독자후보투쟁에 대한 반대 이유를 밝혔고 김소연 후보 선거투쟁에 함께 하지 않았다. 변혁모임은 아직 후보투쟁을 감당할 수 있는 정치적·조직적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정치적으로 정돈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정돈하지도 않고, 조직의 실력을 냉정히 따져 보지도 않은 채 선거에 뛰어드는 것은 선거주의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며 정치적 투기라고 판단했다.”

-이용덕, 노건투, 정세초점, [2012년 대선/ 노동자후보투쟁이 남긴 것], 2012년 12월


“노동자 후보를 내세워 대선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자 역시 선거로는 안 된다는 식의 반응, 대중운동이 바로서야 한다는 진지하지만 상투적인 반응 등 여러 이야기가 떠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확인한 것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역량부족 자체였고 그것 이상의 한계는 없다. 선거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선거투쟁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후보가 필요했고, 대중운동이 바로 서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제대로 서지 못해 대중운동이 지리멸렬한 탓이다.”

-김광수, 해방연대, 해방 75호, [낡은 것, 뒤쳐진 것과 단절하고 사회주의 정당 건설하자]
 

이들의 후보전술에 대한 비판은 일면 타당성을 갖고 있지만, 아쉽게도 부르주아 선거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부르주아 선거참여를 전술의 하나로 판단하는 낡은 사고를 보여주었다. 또한, 강령에 입각한 당 건설이라는 원칙과 낮은 차원의 공동전선 형태인 변혁모임 참여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후퇴하거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거전술' 문제는 일찍이 코민테른 시절부터 볼셰비키와 공산주의좌파 사이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레닌과 호르터의 논쟁, 트로츠키와 보르디가의 '혁명적 의회전술' 과 '보이콧전술' 등으로 알려진 선거전술문제는, 흔히 알려진 대로 ‘부르주아 의회를 통한 혁명 전략의 부정’이나 ‘부르주아 의회(선거)의 이용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본질이 아니다.


이것의 본질은 러시아의 후진적 정치상황에 적합한 볼셰비키의 의회전술을 일반화하여 유럽 국가들에도 적용하려는 코민테른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일정수준 괘도에 올라 의회의 이용 자체가 혁명운동에 걸림돌이 된 유럽의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의 반의회적 혁명 전략이 대립한 결과이다. 당시의 유럽은 이미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계급 일부가 되어 버렸고, 이들이 진출한 의회가 오히려 노동자계급을 학살하는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은 의회를 이용하기보다는 의회를 타도할 목적으로 반의회적 노동자평의회 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현재에도 국제적 혁명조직들은 선거참여와 선거거부에 대한 선거원칙을 강령에 정확히 명시하고, 그에 복무하는 전술을 펼치고 있다. 즉, 부르주아 선거는 전략의 문제이고, 현실적으로는 '선거개입' 과 '선거거부'라는 타협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혁명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조직은 '선거전술' 문제를 강령으로 정립해야 한다.

 

셋째,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은 부르주아 선거와 후보전술 자체를 반대하였다. 즉,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원칙을 강령수준으로 판단하여 “노동계급에게는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하는 투쟁만이 계급 간의 교착상태를 깨고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 수 있다. 선거가 아닌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대리인과 우상을 내세우지 말고 투쟁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부르주아 정치를 거부하고 노동자의 방식으로 직접정치를 실현해 나가야 할 것” 임을 주장했다.

 -이형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코뮤니스트』, 창간호, [코뮤니스트조직의 정치원칙을 세우며], 44쪽

 

마지막으로 대선에 참여한 70%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선거제도를 자신의 삶으로 완전히 받아 들였는가! 이다. 한국에도 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25년간 부르주아 선거제도가 확실히 정착되었다. 즉, 모든 정치가 선거를 통해 결과 맺으며 선거 메커니즘 자체가 삶의 일부가 되었고, 대중들을 자연스럽게 투표소로 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번 선거에 투표율이 높은 것은 계급의식 측면에서 계급적 열망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전면적으로 흡수된 결과이기도 하다.

 


4. 후보전술의 실패와 계급의식의 왜곡

 

지난 대선에서 노동자후보를 내세운 세력은 왜 실패하였는가?

 

한마디로 기획단계에서부터 모든 과정이 총체적으로 실패한 결과였다. 노동자 민주주의와 상관없는 자신들만의 후보선출과정에서부터 선거운동기간 동안 선거투쟁이라는 목적에 맞는 전술은 부재했다. 특히 짧은 준비기간은 후보등록 자체를 목표로 만들었고, 선거운동을 치를 역량조차 부족하여 처음부터 진보신당의 직간접적 도움이 필요했다. 말로는 ‘구속되는 후보’, ‘투쟁하는 노동자 집단후보군’을 내세웠지만, 현실에서는 철저히 선거법의 테두리 안에 갇힌 채 선거유세에 전념 해야 했다. 대중 집회, 광장 점거, 자본주의 상징 타격 등과 같은 투쟁은 벌이지 못했고, 이들이 공격적으로 무시해야 했던 선거법은 오히려 삼성, 현대차 등의 자본 측에서 무시하며 이들의 선거유세를 방해하는데 사용되었다.

 

“후보를 내세워 노동자투쟁을 촉진할 수 있다는 환상과 조급성이 후보중심의 전술을 강제하고, 위로부터의 공동전선, 심지어 사민주의 세력과의 선거연합을 허용하고, 나아가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게 되어, 결국 선거개입은 항상 대리주의와 선거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더욱이 국가보안법의 탄압에도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정치활동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10여 년 전으로 후퇴하여, 사민주의자들도 상당수 수용하는 경제 요구를 노동자계급의 행동강령이라고 내걸고, 사민주의 세력과도 기꺼이 연합하면서, 대중투쟁과 직접행동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부르주아 정치 공간에서 벌이는 선거개입이야말로, 사회주의운동을 급격하게 퇴보시키는 정치적 타락행위이다.”

 이형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코뮤니스트』, 창간호, [코뮤니스트조직의 정치원칙을 세우며],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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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정치적 퇴행의 근본 원인은 사실은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이라는 당면과제가 난관에 봉착하자 이에 대한 해결책을 선거개입과 노동자계급정당 건설로 후퇴시켰기 때문이다.


여전히 철저한 강령 원칙과 실천 검증에 따른 혁명적 공산주의 세력의 재구성을 통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주체들과 공산주의 운동이 계급투쟁 속에서 직접 만나, 계급 안에서 혁명적 주체를 세우고 자기 조직화를 이루는 것을 통한 당 건설을 해 나가는 원칙은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명심해야 한다.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발전 없이 혁명당 건설은 불가능하다. 당 건설의 주체와 강령을 포기한 당 건설이야말로 주체의 조건이 아닌 진보 정당류와 노동조합과 같은 주변 변수에 흔들리는 당 건설 노선일 수밖에 없다.

 

김소연 선본은 선거 이후 다음과 같이 자체적인 선거평가를 하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진보정당의 위기에 절망하여 독자적 노동정치 자체를 포기해 버리려 한 현실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얼마 안 되는 좌파 정치 역량으로 2012년 대선을 치러낼 수 있을까 회의하고 우려하는 현실에서!
그래서 노동조합의 일부 상층 지도자들이 문재인과 안철수 등 자유주의진영에 투항해 버리고, 현장 활동가들이 좌절하여 노동조합‘만’으로 후퇴해 버리거나, 좌파 정치 활동가들이 역량 부재를 탓하며 서클정치에 안주해 버린 척박한 노동정치의 현실에서!
그 얼마 안 되는 역량을 가지고, 노동자대통령 선투본은 2012년 대선투쟁을 역동적으로 완주함으로써, 독자적 노동자계급정치의 가능성을, 그 꺼져 가는 불꽃을 다시 살려냈다.”

 -‘노동자대통령 선거투쟁본부’ 보고 및 평가(안), 2013년 1월 25일


이러한 평가는 한마디로 총체적인 왜곡과 자기 만족형 평가다. 김소연 선본 평가서에서 주장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진보정당의 위기에 절망하여 독자적 노동정치 자체를 포기해 버리려 한 현실”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은 진보정당의 위기에 절망한 것이 아니라, 이미 민노당 시절부터 노동자 직접정치와 노동자 민주주의가 실종된 대리주의 정치무대를 떠난 상태였다. 과거 노동자들이 민노당을 지지한 것도 노동자정치 환상과 의회주의 환상이 결합하였기 때문이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졌으나 ‘독자적 노동정치’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민노당은 처음부터 독자정치가 아닌 민족주의와 연합하여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하는 의회주의의 길을 걸었다.

 

김소연 선본을 주도한 사노위 또한 8차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고 있다.


“97년 이후 노동자정치세력화와 관련해 노동자·진보정치진영 내에서 형성된 양자택일적이고 왜곡된 대립구도인 ‘선거냐-대중투쟁이냐’의 논쟁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노위 8차 총회 결과, 2013년 1월 12일


사노위에서 말하는 선거냐-대중투쟁이냐의 논쟁은 왜곡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논쟁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운동진영의 미숙함. 즉 그 동안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근본적인 노선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한편, 현장투쟁, 현장복원 등을 시도하고 있는 사회주의 세력들은, 여전히 전투적 조합주의와 낡은 정치노선(공동전선, 행동강령)을 버리지 못해 계속된 운동의 축소와 한정된 현장을 둘러싼 쟁탈전이 예상된다.


“이러한 한계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노동자후보들의 선거투쟁은 자본가정당들에게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조직과 투쟁이 필요하다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의 의지와 희망을 대변했다. 이 의지와 희망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소중한 거름이다.”

-이용덕, 노건투, 정세초점, [2012년 대선] 노동자후보투쟁이 남긴 것, 2012년 12월
 

특별히 대선을 지나면서 구사노련 주축 세력들이 혁명당 건설 시기 상조론과 노동자계급정당 흐름(변혁모임) 참여 결정으로 당 건설 운동 흐름을 사노련 이전으로 후퇴시킨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사회주의당 건설을 폐기한 세력에 파산을 선고하고 새로운 틀에서 혁명당 건설에 대한 논쟁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노동자 후보전술과 무관하게 부르주아 정치인에게 투표한 70%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계급의식은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우선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앞서 말한 대로 부르주아 선거 메커니즘에 의해 각자의 정치의식에 따라 유리한 후보에게 투표하였다. 부르주아 선거공간에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반정부 의식, 반자본주의 열망은 대중행동이나 선거거부로 표출되지 못하고, 사람들을 투표소로 향하게 하였다. 선거 국면에서는 모든 열망이 정치적 요구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투표행위라는 제한된 여과장치 속에서 모든 것은 가장 큰 이슈나 정권교체라는 목표로 흡수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중의 열망을 부르주아 정치세력이 야권연대로 왜곡시켰다면, 노자후보는 선거에 제한 당한 노동자정치로 왜곡시켰다. 노동자정치를 주장하면서도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는 세력들은 노동자정치를 노동자계급 고유의 영역인 투쟁의 장에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선거공간에서 할 수 있다면서 그 속에서 선전선동과 조직화를 꿈꾸며 선거운동을 선거투쟁으로 미화시켰다. 하지만 선출된 사람에 대한 통제권과 소환권을 갖지 않는 모든 선거는 부르주아 정치를 강화시킨다. 이러한 선거는 정치와 일상을 철저히 분리시킨다. 투쟁의 공간에서 대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고 자기 조직화를 통해 투쟁을 발전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실패 속에서 계급이 단련되어 스스로 전망을 가질 때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비정규, 미조직 노동자 투쟁에서의 자기 조직화와 직접정치는 더욱 어렵다. 따라서 정치조직은 정세에 따라 원칙을 바꾸면서 노동자에 대한 조직화 자체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식 자체에 장기적으로 개입하여 계급 고유의 공간에서 직접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5.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거부 입장

 

그렇다면 부르주아 선거 자체를 거부한 국제코뮤니스트전망과 같은 세력은 왜 보이콧에 대한 행동을 기획, 실현하지 못했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선거유세용 집회나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대중총회를 개최하자. 대중총회, 대중집회를 통해 노동자들이 정치적 의사표현과 투쟁의지를 제한 없이 표출하는 ‘수평적 노동자 직접행동’, ‘노동자 직접정치’를 실현하자!


선거 시기만큼이라도 모든 것에서 소외되었던 비정규 중소 영세노동자, 장애인, 소수자, 빈민, 실업자, 이주노동자 등 미조직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에 집중하자. 노동자투쟁과 미조직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직접행동이 결합하는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행동(연대)’을 실현하자!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012 부르주아 대선에 맞선 코뮤니스트노동자의 입장],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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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정책반대, 인물반대를 위한 보이콧이 아닌 계급투쟁과 연관된 선거거부는 대중의 불만과 욕구가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것으로까지 표출되었을 때 가능하다. 여기에는 선거거부 투쟁의 경험과 장기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아직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장기적 계급의식 관점에서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과 대중행동을 준비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의 입장이 행동을 전제로 할 수 없었다. 대선에 대한 코뮤니스트노동자의 견해를 밝히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량이 실제 부르주아 선거에 개입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고, 선거거부라는 행동 자체가 아직 대중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선거거부 행동을 위해서는 선거 환상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 노동자 직접정치에 대한 열망, 노동자 민주주의의 숱한 경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선거거부를 구호로만 외치는 것은 정치에 대한 기권이 아니라 장기적인 개입조건 창출을 위한 선전활동, 정치원칙 정립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부르주아 선거 환상에 대한 전면적인 이데올로기 투쟁과 대중행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만 다음의 선거 국면에서 정치 활동의 공간을 열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6. 선거 환상의 지속과 ‘노동중심’ 진보정당 건설의 허구성

 

앞서 우리가 부르주아 정치의 좌익이라고 부르는 전문적인 선거(의회)주의 세력은 선거 이후 왜 이합집산하고, 어떻게 선거 환상을 지속시키는가?

 

이들은 본질에서 ‘선거’가 모든 정치의 중심이기 때문에, 선거주기에 따라 발 빠르게 재편되는 속성이 있다. 더욱이 의회에 진출하지 못한 정당이거나 소수 의석의 정당은 경쟁력 확보와 최대의 시너지 효과를 얻기 위해 선거를 염두에 둔 이합집산이 필수적이다. 이들 모두는 선거에 지든 이기든 즉시 다음 선거를 위해 선거 환상을 지속시켜야 한다. 2012~13년 이른바 ‘노동중심 정치’가 유행처럼 번지는 현상은 본질에서 노동자정치 고유의 계급성과 전투력을 복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통진당 사태 이후 혼란에 빠진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지지를 다시 한 번 끌어내겠다는 발상에 불과하다. 이것이 상층부 중심의 지지세력 확장으로 이어지던 아래로부터의 정치세력화로 이어지던 결국 의회주의와 조합주의의 결합이기 때문에 낡은 운동의 반복일 수밖에 없다.

 

한편, 지난해 11월 구성된 ‘노동정치연석회의’는 넉 달에 걸친 논의 끝에 노동포럼, 노동자정당추진회의, 노동자연대다함께, 혁신네트워크가 새로운 노동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구체적 노력을 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기존 노동자 정당들의 분열ㆍ분화로 말미암아 조직 노동계급 내에서 정치적 공백이 생겨나고 있다. 노동계급의 여러 정치 경향들이 연합해 이 공백을 메우자는 것이 ‘노동정치연석회의’의 취지였다.”

-김인식, <레프트21> 99호, 2013년 3월 4일, [분열을 넘어설 진보정치 재편,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운 노동 중심의 진보정당이라는 구상은 통합진보당 분당 이후 발생한 스탈린주의와 개혁주의의 분화에서 개혁주의의 정치 공간을 메우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 양당이 제도권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한국 정치 맥락에서 이런 프로젝트는 여전히 필요하다.(그렇더라도 통합진보당이 노동자 정당이므로 특정 쟁점을 놓고 사안별 연대를 해야 한다.)”

-김인식, <레프트21> 99호, 2013년 3월 4일, [분열을 넘어설 진보정치 재편,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 또한 부르주아 정치의 좌익인 이른바 개혁주의 정치의 공간을 메우려는 사고만 있을 뿐, 파산한 낡은 진보정치와 단절하고 새로운 계급정치를 실현할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게만 특별히 높은 평가를 받는 개혁주의자들의 본질은 노동자계급의 주변에서 현 자본주의 위기 상황을 일시적이거나 주기적 현상으로 이해하면서 자본주의 개혁과 보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세력들이다. 이들은 노동정치, 진보정치로 포장되어 계급에 환상을 심어주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자본주의에 포섭된 세력이다.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법 제도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를 고칠 수 있다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에게 조금 더 고통을 견뎌 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자본주의 회생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혁명을 통해 낡은 체제를 철폐하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직접 사회를 운영하는 것만이 기나긴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이러한 진실을 감추고 오히려 자본주의 회생의 가능성과 환상을 그럴듯하게 유포시키는 이들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수호자이다.

 

“개혁주의자들은 반드시 배신할 거라며 추상적이고 종파적으로 비난하는 자세는 틀렸을 뿐 아니라, 변화하는 노동계급의 의식과 운동에 전혀 개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좌파적 개혁주의 운동과 그것의 성공적 활동을 지지해야 한다.”

-김인식, <레프트21> 99호, 2013년 3월 4일, [분열을 넘어설 진보정치 재편, 어떻게 할 것인가]


자본주의 수호자들인 개혁주의자들을 노동자계급의 주변에서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빈자리에 조합주의와 선거주의를 결합한 낡은 노동중심의 진보정당을 앉히려는 행위야말로 기회주의의 전형이라 하겠다. 우리는 1920년대 제3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에 맞섰던 호르터의 경고를 오늘날 다시 반복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이른바 ‘노동중심의 진보정당’을 주장하는 모든 세력에게 오늘날 더욱 강조해야 할 것은,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황폐화 하고 노동자 계급을 오염시키는 기회주의야말로 우리가 급진적으로 되는 것보다 수만 배 나쁘다는 경고를!

 

“다시 공산주의자들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 의회로 들어갈 것입니다.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들은 선거에서의 투표를 위해 옹호될 것입니다. 공산주의를 위해 건설하는 당 대신, 관성적으로 정당들을 조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 애국주의자들 및 부르주아 분자들과의 의회주의적 타협이 다시금 등장할 것이며, 그로 인해 결국 서유럽에서 모든 혁명은 점진적인 과정이 될 것입니다. 연설의 자유는 억압당할 것이고, 훌륭한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추방당하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제2 인터내셔널에서 발생했던 모든 관행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기회주의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 대열 외부에서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신과 힘을 황폐화하는 기회주의가 다시 섞여 들어오는 것은 좌익이 너무 급진적으로 되는 것보다 수천 배 더 나쁠 것입니다.”

-헤르만 호르터, [레닌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1920년 
 

 

결론

 

이상과 같은 대선평가는 참담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낡은 것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낡은 것뿐 아니라 운동을 과거로 돌리려는 세력도 있다. 어제 우리를 속인 낡은 정치가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낡은 것과의 단절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시켜야 한다. 내부모순의 극복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 이데올로기 투쟁의 전면화

 

계급의식의 발전은 노동자의식을 파괴하는 조건들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혁명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절대다수의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계급의식의 발전은 사회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조건들에 반대하여, 즉 그들의 역사적 혁명적 과업을 생각하는 노동자들의 의식을 방해하고 끊임없이 파괴하는 조건들에 반대하여 이루어진다.”

-‘당의 본질과 기능에 대하여’, [국제주의] (Internationalisme) 38권, 1948년


낡은 운동과의 단절을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이유는 첫째, 노동자운동이 전체적으로 퇴조하는 현상은 낡은 운동의 몰락과정이지만,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운동 내부까지 침식시켰기 때문이다.

 

둘째,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가 전면화된 시기에 노동자 계급의식을 방어할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낡은 운동과 단절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사회주의 운동의 유산을 극복하고 과거 운동에 대한 철저한 평가와 반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면전인 이데올로기 투쟁을 위해서는 첫째, 계급투쟁의 열쇠인 계급의식의 중요성을 전면에 부각시켜, 장기적이고 총체적인 계급의식 발전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둘째, 모든 대중투쟁 공간에서 자유롭고 제한 없는 정치토론을 보장받고 확장시켜야 하며, 새로운 노동자토론문화와 토론 능력 발전을 위한 혁명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혁명조직은 노동조합 등 모든 대중조직에서 선전활동과 정치활동의 자유를 완전하게 보장받아야 한다.


둘,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형 창출

 

“미국 즉 노동력의 88%가 노동조합에 속해 있지 않고, 20%가 실직상태이거나 혹은 할 일이 충분치 않아 매일매일 점점 더 많은 집 없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으며, 거의 노동조합원에 맞먹을 정도의 많은 프롤레타리아 혹은 후보 프롤레타리아가 감옥에 있는 국가에서, “노동조합을 혁명 전략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발상 즉 혁명을 위해서는 “노동조합을 차지한다”는 식의 오늘날 아직도 다양한 그리고 잡다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선전하는 발상들은 우스갯소리에 불과하다.”

-로렌 골드너.[Andy Stern 종말과 현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조합 문제], <반란자노트> 2호, 2010년 10월


로렌 골드너가 말한 미국의 상황이 한국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기나긴 계급투쟁의 침체기를 지나 아큐파이 운동으로 대중투쟁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낡은 운동은 저물었고 새로운 운동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낡은 노동조합, 진보정치를 붙잡고 새로운 운동 창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데올로기 투쟁과 함께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계급투쟁은 계급 스스로 창출해야 하지만, 낡은 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창조적 노력이 필요하다.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되고, 계급투쟁은 투쟁의 경험과 현재의 정세에서 창출된다. 낡은 노동조합을 넘어 보다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을 벌여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첫째, 노동조합 자체를 넘어서려는 의식적인 투쟁만이 조합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노조집행부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직접행동을 제안하고, 실제 노동자 행동그룹이 출현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노동자들이 한국이라는 지역에 갇히지 않고 국제주의 관점에서 국제적 계급투쟁의 흐름과 새로운 운동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를 조성해야 한다. 세계적인 계급투쟁은 다시 한 번 혁명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분출되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이 보여준 용기와 결단, 그리고 깊은 연대의식은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계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계급투쟁의 경험으로부터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는 비공인파업, 점령운동 등 새로운 노동자연대의 전형을 창출해야 한다.

 

셋째, 지역, 국경을 넘어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을 실현하는 국제적 공동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위의 모든 조직 형식은 노동자 민주주의가 철저히 관철되고 수평적인 계급 연대에 기반을 둔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지역 투쟁평의회와 같은 평의회 형식이어야 한다. 모든 노동자 대중조직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위계질서 없는 수평적 대중총회를 보장받아야 한다. 대중총회 결정에 따라 모든 간부를 즉시 소환할 수 있어야 한다. 대중총회는 지역으로 확장되어 비조합원, 실업자도 참여해야 한다.


셋, 공산주의 운동의 전면화

 

오늘날 자본주의는 역사적인 파산이 명백해졌고, 공산주의 사회의 전망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 공산주의라는 대안 사회가 인류의 단순한 희망과 꿈이 아니라 역사발전의 물질적 필요성이며, 우리가 실현해야 할 역사적 과제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 운동의 전면화를 위해 아래와 같은 실천을 해내 갈 것이다.

 

첫째, 사회주의 당(노동자혁명당) 건설 노선의 파산선언과 새로운 조건에서의 공산주의 노동자당 건설 노선 제시할 것이다. 새롭게 건설될 공산주의 노동자당은 세계혁명당 건설에 복무하는 혁명조직이어야 한다.

 

둘째, 중단되었던 강령투쟁을 심화시켜 국제적 수준의 강령원칙을 정립하고, 국제적 차원에서 혁명세력을 재조직화할 것이다.

 

셋째, 국제적인 수준에서 코뮤니스트,국제주의 세력과 교류 연대를 활성화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 국제대회를 개최하고, 국제주의 행동의 전면화를 통해 국제적인 수준에서 계급투쟁 개입을 실현할 것이다.

 

계급투쟁의 새로운 조건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신들의 운동 속에서 그동안 투쟁을 패배로 이끈 낡은 것들과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 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금은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 분출과 공산주의 노동자들의 집합적 존재 여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낡은 운동과 단절하고 공산주의 정치와 노동자투쟁이 직접 만나 자본주의의 혁명적 타도라는 목표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모든 것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만 하며, 그 목표에 이르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인 투쟁에 달렸다.

 

우리가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 길이 먼 것이다!


공산주의는 실현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인 투쟁과 공산주의 전망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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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글씨] 자본주의는 망해가고 있어 -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인터뷰

자본주의는  망해가고  있어!

 

노동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위한,  새로운 사회로 가야 해!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인터뷰

 

남궁원|국제코뮤니스트전망

 

 

 

 

김수행 선생은 한국 맑스주의 1세대를 대표한다.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맑스주의 운동과 이론의 대중화를 위해서 노력해 온 분이다. 선생과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서 골똘히 생각한 문제가 있다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선생의 그 ‘원칙’이 무엇인가였다.
인터뷰는 크게 네 가지 틀로 진행했는데, 맑스주의 입문 동기, 현 세계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정세 인식, 새로운 사회와 과거 소련 사회 평가, 복지 담론에 대한 질문이었다. 인터뷰 내내 느낀 답은, 선생의 ‘맑스 원칙’과 ‘노동자 해방’이라는 굳건한 이론적 원칙이었다. 게다가 선생은 학술적인 용어보다는 대중적인 화법으로 쉽게 설명한다.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현학적인, 문헌학적 경향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설명하려는 선생의 노력이 몸에 밴 탓이리라.
선생의 청년 시절인 1960년대는 분명 독재 정권의 암흑시대였다. 선생의 지속된 맑스주의 ‘이론 연구 투쟁’은, 한국 사회 「자본론」 완역으로 빛났다.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의 공산주의 유령은, 그래서, 이렇게 성큼 한국에 다가올 수 있었다.
선생과 인터뷰는 성공회대 연구실에서 3시간 정도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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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008년 자본주의 공황 이후 유럽에서도 「공산당 선언」의 판매량이 급증하는 등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맑스주의 관련 서적들이 연이어 출판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맑스주의를 어떻게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까?

 

내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들어간 게 1961년이야. 경제학이 너무 재미가 없어요. 무슨 소리인지, 현실적인 감각이 전혀 없더라고, 방법이 없느냐 해서, 생각을 해보니까, 일본 책을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1학년 때, 책 읽기 위해서 일본 말을 서너 달 배웠어. 그때 상과대학에 경성제국대학 시절의 책이 많이 남아있어서 일본 책으로 이론에서, 경제사에서, 경제사상사에서, 맑스와 맑스의 위치를 공부했지.

 

독학으로 맑스주의 입문


0 선배들 권유가 아니라, 선생님은 독학하셨네요. 그러면서 신영복 선생님하고 남산에서 고초도 당하셨죠?

 

우리 때는 권유 그런 거 없었어. 독학을 했지. 대학원에 들어가서, 석사논문으로 [금융자본에 관한 일 연구]를 썼는데, 힐퍼딩과 독점자본, 금융자본, 산업자본, 은행자본이 어떤 식으로 융합되느냐 하는 공부를 했지. 주로 일본 책 읽으면서, 석사 논문을 쓰고 나서 경제학과 조교가 됐어. 신영복 선생님과 만나는 것은, 상과대 경제학과에 동아리가 있었는데, 경우(經友)회가 있었지. 내가 들어갔는데, 6기더라고, 신 선생은 2년 선배니까 4기지. 1년에 선후배 관계로 한 두 번씩 보는데, 신 선생하고 통일혁명당 사건에 걸린 것은, 내가 종암동에 살았는데, 우리 집 가까운데 신 선생이 살았어. 그때 신 선생은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하고 있었어, 내가 석사 논문을 쓰고 나서 하도 힘들어서, 재밌는 책이 없느냐고 했더니, 신 선생이 갖고 온 책이 레닌이 쓴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 [꽃 파는 처녀]로 기억해, 근데 보니까 한글로 돼 있더라고.

 

0 선생님 그러면, 북한판본이네요.

 

맞아, 북한에서 나온 책이야. 그때는 그런 책이 남한에서 나올 수가 없었어, 그걸 보고서, 어, “이거 어디서 난 거에요” 물었지. 그랬더니 신 선생이 육군사관학교에 많이 있다고 하더라고. 읽고 나서 돌려줬지. 근데 68년에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졌는데, 신문에 신 선생이 잡혀가고 청맥회가 거론됐지. 나는 68년 한여름에 잡혀 들어갔지. 상과대 경우회 사람들이 잡혀가고, 나한테도 올 것 같더라고. 부산에 도망가 있었는데, 내가 조교라서 학교에 전화했더니, 학교 선생님들이 “정보부 사람들이 교무실에 매일 와서 앉아 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학교에 갔지, 바로 잡아가더라고. 근데 사건이 종결될 때가 된 거야. 나 같은 사람은 크게 가치가 없는 거야. 신 선생하고 걸린 게 별로 없어서, 나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 조사받으면서, 신 선생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그랬지. 그러다가 많이 맞았어. 정보부에서 사건을 빨리 끝내야 할 필요가 있었던지, 신 선생이 진술한 내용을 내게 던져주더라고. 근데 보니까, 책 빌린 내용밖에 없잖아. 그 사람들이 “이걸 읽어보고 인정해” 그러잖아, 그래서 인정했지. 그 당시 내가 조교를 하고 있었는데, 정보부 수사관들이 조교하고 조교수를 구분을 못 해서 신 선생이 나한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거야. 나갈 때쯤 되니까, 정보부 수사관이 “당신은 기소 유예될 것 같다”라고 귀띔을 해주더라고. 기소유예 받은 거지. 그러고 나서 학교 조교 사표를 냈고, 은행에 들어가서 영국에 갔지. 런던대학교 버크벡(Birkbeck) 대학인데, 거기에 영국 좌파들이 다 와 있었다고. 내 지도교수는 로렌스 해리스(Laurence Harris)라는 사람이고, 심사위원은 벤 파인(Ben Fine)이었어.

0선생님은 영국에서 공황 연구를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책 [세계 대공황] 부제가 ‘자본주의 종말과 새로운 사회의 사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번 자본주의 세계 대공황이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가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지금 자본주의 사회는 붕괴하고 있나요? 흔히 말할 때, 자본주의는 경쟁자본주의, 국가주도 케인즈주의, 신자유주의 이런 식으로 발전해왔는데, 현재 신자유주의가 파국을 맞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2007년 미국 금융위기 시점부터 보시는 겁니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거는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금융 주도적인 경제체제로 됐기 때문에, 고용이 늘지 않아. 금융이 주도하다 보니까, 선진국 산업 자본들은 중국에 투자하고 노동자를 착취해서 생산하여 자기 나라나 다른 나라로 수출하는 이런 경제형태가 된 거야.

 

0 선생님, 중국이 세계 공장화됐다는 걸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지. 신자유주의는 실제로 1979년 5월 영국의 대처가 수상이 되고, 1980년 11월 미국의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어 추진한 정책이야. 그전에는 1950~1970년대가 자본주의 복지국가 시기야. 이론적으로 케인즈주의가 영향을 줬지만, 복지국가 시대에는 실제로 노동조합하고 서민의 힘이 굉장히 강했다고, 복지수준, 생활수준도 높았지. 대처와 레이건이 노동자계급의 힘을 꺾기 시작해, 그게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야. 1974년부터 경제가 내리막으로 가기 시작했는데, 이 친구들이 노동법을 개악하고, 레이건이 미국 항공 관제사 노조 파업을 탄압하고 해고를 했지, 그러면서 긴축 정책을 펴는 거야. 이게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인데, 그러니까 산업자본이 파괴되면서, 실업자도 많이 생기고, 경기가 불황에 빠졌는데, 그렇게 되니까 금융밖에 국제경제력이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금융자본을 지원하여 전 세계적으로 주식시장, 자본시장을 자유화하면서 경제를 살리려고 했단 말이야. 그런 사이에 산업자본은 갈 데가 없으니까, 중국에 투자하기 시작하는 거야. 세계적으로 중국이 세계 공장이 되고, 금융은 미국 월가를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세계 경제가 구성됐어. 금융이 붕괴했다는 이야기는, 경제가 다 망가졌다고 보면 돼. 경제를 일으킬 방법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옛날과는 다르지. 산업자본의 우위 하에서 금융이 산업자본을 도왔는데, 금융자본이 주도했기 때문에, 산업자본이 기반을 확충하지 못했어. 경제가 전혀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 그대로 증명이 되고 있잖아. 2007년, 2008년 전 세계적으로 공황이 전개되는 것을 보니까. 미국은 자동차 산업 살린다고 수천억 달러를 넣은 것뿐이야. 실업을 해소하는 방법이 없는 거야. 금융자본은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가지고, 금리가 제로잖아, 온갖 투기를 하는 거야. 손해 본 것을 보충하려고. 투기를 자꾸 한다는 얘기는 중산층에서 부를 뺏어갈 수밖에 없어. 중산층이 몰락하는 거야. 1%대 99% 사회로 가는 거야.

 

“자본주의 체제는 망해가고 있어”


0 바로 이어서 재정위기도 말씀해주세요

 

2010년쯤 그리스 재정위기가 터지는데, 공황이 오기 전에 그리스 은행들이 국제금융자본(외국계 은행이고 주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은행들)한테서 돈을 차입해서 온갖 투기(부동산, 주택담보 대출)를 해서 돈을 잃어버렸어. 만기가 되니까 채권은행한테 돈을 갚아야 하는데, 그리스 은행이 정부에 돈 좀 꿔달라고 구제 금융을 신청한다고.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 돈을 빌려줬어. 근데 그리스 정부는 국채를 발행했으니까 만기에 국채를 갚아야 하는데 경제는 망해 가고 돈은 없어 갚을 수가 없게 된 거야. 그러니까 국제채권은행단이 트로이카(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IMF)에, 그리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놓고 돈을 안 갚는다고 비판하면서 트로이카가 자기들의 채권을 추심해달라고 강요한 거야. 그래서 트로이카는 하는 수 없이 먼저 자기의 자금(근데 이 자금은 각 회원국이 국민으로부터 거두어들인 혈세, 세금이야)으로 국채를 대신 갚아주고, 그리스 정부에 예산에서 흑자를 내서 자기가 대신 갚아준 ‘구제금융’을 상환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판이야. “공무원 수를 줄여라”, “공무원 봉급을 줄여라”, “공무원 연금을 줄이고 퇴직 연령을 높여라”, “최저임금 수준을 더 낮추어라”, “국영기업들을 매각하라”, “공공요금을 인상하라” 등등, 국민들이 죽어나가는 거야. 불경기인데, 국제금융자본을 위한 긴축 내핍 정책을 쓰니까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하고. 만약에 산업자본을 살리라고 트로이카가 돈을 주었다면, 고용, 소득이라도 늘잖아. 이런 상태가 세계 전체를 지배하고 있으니까, 자본주의는 망했다는 거야.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신뉴딜정책을 얘기하고, 한국에서도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운운하면서, 신뉴딜정책 얘기를 한 바 있습니다. 선생님은 신뉴딜정책으로 회복이 힘들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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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채무가 꽉 차있어. 국제금융자본들은 채무가 더 늘어나면, 자기가 갖고 있는 국채를 채무국들이 상환을 못 한다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 빚낼 수도 없고, 각국의 신용등급을 계속 내리고 있잖아. 자금 조달도 힘들어. 미국도 마찬가지야. 전 세계적으로 고용이 늘 수가 없어.

0중국 경제도 하락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건설 붐이 일었는데, 아파트 200만 호가 텅 빈 상태로 있다고 합니다. 중국 상황은 어떤가요?

중국의 가장 큰 시장이 미국이야. 중국은 다른 나라에서 원자재를 사서 수출하잖아. 근데 중국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중국 노동자들도 파업하고 있잖아. 중국 자체도 산업자본이 제대로 성장이 안 되는 거야. 중국 같은 나라에서도 계급투쟁이 활발히 일어날 거야. 중국은 세계경제의 엔진이 될 수 없어. 세계경제가 침체될 수밖에.

 

0 선생님은 현 자본주의가 역사적 경향으로 볼 때 붕괴경향으로 간다고 보시는 거죠. 그러면 자본주의가 번영기에서 팍 꺾이고 있는데, 봉건제보다 진보적 생산양식인 자본주의는 이제 힘들다고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맑스는 1825년부터 10년 주기로 자본주의의 경기 변동을 본 거야. 1847년의 「공산당 선언」에 보면, 자본주의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시장을 만들어내고 생산력을 거대한 규모로 발전시켰는데, 자본주의의 모순들이 격렬하게 폭발하는 ‘공황’이 자본주의에 치명적 타격을 준다고 보는 거야. 공황에서는 노동자나 기계가 남아돌지만, 이윤의 전망이 없기 때문에 자본가가 생산을 개시하지 않으며, 이리하여 노동자나 서민의 생활이 엉망이 되는 것이지. 자본가계급이 생산수단을 독차지하면서 이것을 주민 전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 혼자의 이윤 획득에 사용하기 때문에, 인민 전체가 실업과 빈곤과 자살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야. 이것이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이잖아. 노동자들은 생산의 3대 요소(자본, 노동, 토지)는 남아도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못 사는가를 고민하면서, 자본가계급이 생산수단을 독차지하고 있는 ‘생산관계’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생산수단을 노동하는 사람들이 차지하여 모든 사람의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하게 되면, 자본주의는 사라지면서 더욱 나은 새로운 사회가 오는 것이에요.

 

0 금본위제에서 달러 본위제로 갔는데, 미국이 발권 국가로서 달러를 계속 찍어내고, 군사력에서 세계헤게모니를 유지해서, 미국이 붕괴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런 면도 있겠지. 근데 1973년 10월 오펙이 기름 값을 4배나 올렸는데, 그때가 베트남 전쟁 때야. 미국이 달러를 너무 많이 찍어내서, 세계시장에서 원자재 가격, 온갖 물가 폭등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펙이 기름 값을 올릴 수 있었어. 3차 양적 완화 정책을 쓴다고 하는데, 실제로 달러 값이 ‘상당히’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어? 다른 나라에서 세계화폐로서 달러를 안 가지려고 할 거라고. 안정적인 세계화폐가 없으면 국제간의 무역이나 자본거래가 크게 축소할 수밖에 없고, 세계경제는 1930년의 세계 대공황처럼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0 선생님, 유로화, 위안화가 세계화폐로 등장할 가능성은 없나요?

 

지금까지 미국 달러만큼, 다른 나라들이 그런 힘을 갖지 못해. 유럽이 경제통합은 했는데, 정치적으로 하나의 힘이 안 되잖아. 미국처럼 연방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고. 유로존이 애를 먹는 이유가, 각국의 재정이나 금융을 하나의 집단으로 유럽연합이나 유럽 중앙은행이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야. 유로존이 하나의 세력으로 뭉쳐야 유로화가 세계화폐로 가능한데, 지금 그럴 능력이 하나도 없잖아. 중국은 자기 나라 안의 정치적 불안 때문에, 위안화가 세계화폐가 될 수가 없어. 아까 질문에서 얘기했듯이 미국이 군사력으로 세계헤게모니를 유지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려면 군사비 지출이 대폭 증가해야 할 것이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이란 등지에서 온갖 일을 벌이고 있잖아. 금융자본은 미국의 재정적자와 국가채무의 증가를 싫어해서 군사력으로 세계헤게모니를 유지하는 것까지 반대할 거라고.

 

0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 경제의 회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요? 예를 들면 케인즈주의를 다시 부활시킨다든지?

 

케인즈주의 방법은 안 되고, 부르주아들이 뭘 하냐면, 돈을 찍어내어서 증권시장을 강화하고 있어. 이게 양적 완화 정책의 핵심이야. 돈이 산업자본으로 가서, 노동자의 실업을 해소하는 그런 정책이 안 나온다고. 은행들이 기업한테 대출을 안 해줘. 돈 떼일까 봐. 스스로 금이나 곡물 등에 대한 투기를 자꾸 하기 때문에, 돈이 인민을 살리는 방법으로 안 간다는 거야. 금융공황을 겪으면서 금융자본가들과 증권투기꾼들이 큰 손실을 보았는데, 그들은 언제 주식가격과 증권가격이 다시 폭등할까 그런 생각만 하고 있어. 양적 완화 정책으로 돈 푼다고 하는데, 산업자본가는 큰 이익을 얻을 수가 없어.

 

0 이번 세계 대공황을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출발했다고 보시는데. 1929년 세계 대공황과 지금 세계 대공황의 차이는 어떻게 되나요?

 

1929년 공황이 일어났는데, 대공황을 극복하는 방식이 미국에서는 루즈벨트가 뉴딜을 했지. 실업자와 빈민들이 데모하거나 굶어 죽으니까, 사회보장제도로 못사는 사람들에게 돈을 푼 거야. 그리고 댐, 도로, 주택을 정부가 건설해서 일자리를 만들어 준 거야. 독일에서는 나치가 등장하여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자원을 획득하고 ‘생활권’을 확대해야 독일이 번영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게르만 민족주의가 나오는 거야. 1930년대 공황은 전쟁을 계기로 회복되는 거지, 케인즈주의가 뭐한 게 아니야. 히틀러가 전쟁을 위해서 군수산업을 일으키니까, 딴 나라도 할 수 없이 군수산업을 일으키는 거야. 전쟁이니까 정부가 개입해서 군수산업을 확대하면서 일자리가 생기고 경제가 회복된 거야.

 

0 선생님은 1930년대 대공황시기 무솔리니, 히틀러, 파시즘이 나온 것처럼, 지금도 노동자계급이 투쟁을 제대로 못 하면 민족주의나 파시즘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지금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나 서민을 살릴 수 없으니까 이민자나 회교도를 박해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다른 곳으로 전환하고 있는 중이야. 이런 외국인 혐오주의를 강화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반발을 억제하려는 것이지. 각국에서 나치계통의 정당이 조금씩 세력을 얻는 것도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한 가지 전략이야. 이것은 결코 노동자나 경제를 살리는 정책이 아니야.
 

0 그런 맥락에서 이명박 정부가 일본과 독도 분쟁하고 있는 거죠.

 

맞아. 그리스, 스페인, 아일랜드 등 온갖 나라들이 경제에 골치를 앓고 있잖아. 내가 생각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공장을 접수하는 수밖에 없어. 이윤추구가 아니라, 같이 일해서 주민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야 해.

 

“구소련사회는 자본주의 사회”


0 자연스럽게 대안 사회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새로운 사회를 말하려면, 1917년 러시아 혁명 경험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은 최근에 쓴 책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6장에서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결국 소련 사회가 레닌의 정치혁명 시기나 스탈린의 공업화 시기에도 결국 자본-임금노동 관계가 지배적이었다고 보시나요?

 

그래요. 자꾸 생각하면 할수록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 자체도 소련 경제를 어떻게 개발할 거냐 하는 문제에 집중된 것 같아. 혁명과정에서 적군이 백군을 진압한 뒤 ‘신경제정책’을 실시하거나 ‘국가자본주의’를 이야기하거나 농업 집단화나 중화학 공업화의 추진 등에서 새로운 사회의 특징인 ‘노동자의 해방’은 전혀 논의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생산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가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하게 되요. 내가 자본주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맑스가 얘기할 때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해방되는 거야, 임금노동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맑스대로 얘기하면 상품, 화폐, 임노동 관계가 소멸해야 돼. 근데 소련에서는 자꾸 경제개발 문제만 생각하는 거야.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계획경제로 보느냐, 아니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로 보느냐는 가장 핵심적 쟁점이거든. 그런데 특히 스탈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기본 문제라는 것이 생산의 무정부성이다, 무계획성이다, 계획적으로 운영하면, 자본주의적 공황도 없고 낭비도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러니까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개념이 빠지는 거야. 국유화의 의미가, 맑스에 따르면 생산수단을 자본가로부터 노동자에게로 소유를 이전하는 것이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표지인데, 소련에서는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해서 노동자를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해서 군수산업 등 각종 산업을 건설하는 이런 식으로 갔다고.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이 인간의 탈을 쓴 게 자본가라고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소련에서는 국가, 당과 정부의 관료나 노멘클라투라가 자본가계급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

 

0 선생님, 소련의 국영기업과 달리 예를 들면 콜호스, 소프호스는 소련의 집단 농장으로 모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협동조합 형식에 의해서 농민이 집단 경영을 하고, 각자의 노동에 따라 수익을 분배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콜호스, 소프호스도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라고 볼 수 있나요?

 

집단농장도 모두 정부가 통제했어요, 자발적으로 했다고 볼 수 없지. 생산량 할당하고 임금도 위에서 다결정하고. 맑스에 따르면, 각 공장을 공동으로 소유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고, 다른 공장들과 연계해서 전국적 계획을 세워야 해. 그게 인민을 중심으로 한 계획경제지. 이리하여 직접 생산자들이 자꾸 협력하게 되고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연합)을 형성하는 거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국가’라는 것이야. 그런데 소련에서처럼 정부나 당의 관료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계획을 세우면 노동자들이 일할 맛이 나겠어.
소련 사회가 네프(NEP. 신경제정책)로 넘어갈 때, 레닌이 그러잖아, 경제를 움직여야 하는데, 머리가 빨갛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 없다고. 잘 모르는 사람이 공장 운영을 어떻게 해? 네프 도입은 자본주의의 시작이야.

 

0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지난 1980~90년대 한국사회에서는 소련사회를 자본주의라고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스탈린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해야 된다고 봅니다. 스탈린주의 경제학은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이나, 자본주의 전반적 위기론, 정치적으로는 진영테제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스탈린주의 경제학 비판을 하려면 마르크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선생님은 과거 소련 사회 경험에서 본 것처럼, 국유화가 문제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 일부 운동진영에서도 국유화를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경쟁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그리고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성장하다가 새로운 사회(사회주의 사회로 부르든, 공산주의 사회로 부르든)로 간다는 거야, 이거는 엥겔스 도식이야. 새로운 사회가 계획경제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거야. 여기에 노동자가 어디에 있어? 없지. 엥겔스 도식을 스탈린이 받아들여서 계획경제의 실현을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제시했어. 진영테제는 이론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야.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나 강제수용소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얘기한 ‘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이야. 옛날 소련경제를 전형으로 하는 중앙지령형 통제경제에서는 국가가 세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가 동원한 노동하는 개인들은, 사실상 국가에 노동력을 파는 임금노동자, 노예에 지나지 않아.
맑스가 생각한 노동자 해방, 해방된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창의적으로 협동하는 그런 개념이 없어진 거야. 평의회나 이런 게 없어진 거야. 이런 게 문제점이라고 생각해. 혁명적 이행기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공권력을 장악한 노동자들의 연합이 공장을 접수하여 임금노동제도를 폐기하고 자본가계급을 ‘노동하는 개인들’로 전환시켜서 계급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
결국, 해방된 노동자가 주체가 돼야 하고 중심이 되어 자본주의 잔재를 부수어야 하는데, 새로운 계급인 당이나 정부의 관료가 하니까 안 돼. 정부 관료가 “금년 목표는 이거야” 노동자들한테 “따라와” 이렇게 하니까 말로만 계획경제야. 지금 새롭게 나오는 소련 문서를 보면, 국영기업들이 이윤율을 올릴수록 경영자와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인센티브(incentive), 보너스를 받게 되었다고. 전체적인 계획경제도 안되고, 거짓말 보고만 되는 거야. 자본주의의 임금노동자와 무엇이 달라.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은 이런 특수한 소련 자본주의를 시장에 다 맡겨 경쟁적 자본주의로 전환시켜야 비리가 없는 능률적 사회가 된다는 거야. 지배계급인 당과 정부의 관료가 국유재산을 모두 헐값으로 사들여 경쟁적 자본주의의 자본가계급으로 둔갑했는데, 소련의 역사 80여 년이 이런 식으로 쭉 연결된 거야.

 

0 선생님 견해에 따르면, 지금의 중국, 북한도 자본주의로 볼 수 있겠네요. 국가 주도적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 권력이 자본가계급에게 있기 때문에 국가 주도가 잘 안 돼. 박정희체제를 국가 주도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재벌한테 모든 걸 맡긴 거야. 새로 탄생한 국영기업이 별로 없잖아? 정부가 재벌한테 금융혜택, 세제혜택 줬지. 외국 차관의 도입에 정부가 지급 보증을 했지. 재벌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고 중소기업을 수탈하는 것을 박정희가 총칼로 보호한 거야.
흔히들 박정희체제에서는 정치권력이 경제력을 제압했다고 보면서 ‘국가주도’를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을 가리킬 뿐이야. 독재적 정치권력은 권력 유지에 돈이 필요해서 증권파동을 일으킬 정도였기 때문에, 재벌에 크게 의존했고, 미국 정부가 국영기업이 아니라 민간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개발하라고 지침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독재 권력은 재벌 중심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어. 따라서 ‘국가 주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경우는 낡은 사회를 타파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혁명적 전환기’일 뿐이야. 실제로 해방된 노동자들이 공권력을 장악하여 공장을 접수하면서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야 한다고.

 

“새로운 사회로 가려면, 상품 화폐 자본을 없애야 해. 


이 기본 요소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계속 살아남게 돼 있어.”


0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이행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선생님은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에서 이행기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이행기 강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행기 강령에 시장도 사라지고 화폐도 없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일반 노동자들이 볼 때 쉽게 다가서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일반적인 좌파들, 트로츠키 이행기 강령보다도 더 센 이행기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세요.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자본론]에서 상품부터 시작하잖아.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하면서 상품교환이 이루어지고, 상품교환에서 화폐가 생기며, 화폐를 가지고 더 많은 화폐를 얻기 위해서, 결국 임금노동자를 착취하잖아. 상품, 화폐, 자본은 결국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으로 귀결하게 돼 있어. 이 기본 요소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계속 살아남게 돼 있어.
새로운 사회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에서는 노동하는 개인들이 모든 노동조건들에 대해 공동으로 자기의 것으로 상대하기 때문에, 혁명적 이행기에 생산수단이든 소비수단이든 사회적 생산물을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처분 사용하는 것을 완전히 없애야 해. 이래야만 생산물이 상품형태를 취하거나, 가치에 따라 교환되거나 하는 것이 없어지고, 따라서 일반적 등가물인 화폐와 시장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고. 이행기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고 모든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해. 물론 이행기의 초기에는 아직 자본주의가 지배적이니까 화폐가 있을 수 있겠지만, (공장평의회에서, 지역평의회로, 전국평의회로 가면서) 노동자들의 연합이 사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계획적으로 이용하여 주민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생산한 것을 각 가정에 ‘택배’로 배달하면 될 것이므로 생산물이 시장에서 팔릴 필요도 없고, 노동자들이 화폐를 갖고 물건을 살 필요도 없어. 화폐가 계속 사용된다면, 화폐를 많이 가진 사람들이 상품을 매점매석하여 물가를 폭등시켜 혁명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에, 쿠바혁명에서도 체 게바라가 몇 번에 걸쳐 화폐개혁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0 최근 한국 사회에서 복지담론이 화두입니다. 한국 사회도 경제 성장 후퇴가 발생하고 있는데, 복지담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최근 대선 주자들이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 IT산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복지국가가 성립하기도 전에, 복지국가를 타도하는 신자유주의가 1997년 말에 폭발한 금융․외환위기에 대한 IMF 처방으로 광범하게 도입됐잖아. 서방에서 복지국가를 해체하기 위해 채택된 신자유주의가 한국에서는 복지제도도 없는 상태에서 도입되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 즉 민중은 살기가 더욱 어렵게 된 거야. 대량 해고의 실시,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공기업의 민영화, 교육의 시장화, 부자 감세, 공공요금의 인상, 대외거래 자유화와 개방화, 긴축내핍정책 등이 대표적이지. 한국 사회는 깡패 자본주의 사회라고. 실업문제, 자살문제, 빈곤문제를 전부 개인의 문제로 돌리잖아. 사회 문제로 봐야 한다고, 그래야 복지가 문제로 될 수 있어. 빈곤․실업․불안․자살 등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고 ‘사회’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야 ‘복지정책’이 제대로 나올 수 있어. 그런데 한국 사회의 지도자들은 전혀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고통에 시달리는 민중도 이런 인식이 부족해.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사상이나 생각 면에서는 완전히 어린애 수준이야. 이런 상태니까, 복지에 대한 요구가 어느 날 갑자기 ‘초등학교의 무상급식’이나 ‘반값 등록금’이라는 형태로 분출해서 나오는 거야. 이것을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욕하든 말든, 무상급식을 ‘쟁취’했기 때문에 민중은 이제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계속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할 수 있다고. 복지에 대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부자에 대한 공격, 부자를 위한 정당과 정부에 대한 반대가 강화될 것이고, 부자들은 ‘옛날 그 좋던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할 것이지만, 이제는 세상이 ‘디지털 세상’이 되어 그런 폭력과 부정․부패가 지배할 수가 없어.
내가 요새 일정한 생활급 수준의 기본소득을 모든 국민에게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약 2만 달러(2,000만 원)야. 한국 사회는 지난해에 써버린 원료와 기계를 보충하고 난 뒤, 어린애부터 100세 넘는 노인에게까지 한 사람마다 세금을 빼고 매년 2,000만 원(매월 167만 원)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경제력이 있다는 거야. 즉 4인 가족이 매월 667만 원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이야기야. 1%의 부자가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99%의 서민은 빈곤에 시달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없애버리고, 매년 생산된 부를 나누어 가지면,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사회가 될 거라고.
대통령 후보들이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치 민주화가 정치면에서의 ‘1인 1표’라면 ‘경제 민주화’는 당연히 경제면에서의 ‘1인 1표’일 것이므로, 경제 민주화의 핵심은 간단히 말해 공장과 회사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이 공장과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야.

 

0 선생님의 앞으로 연구 계획은?

 

이제 마르크스경제학의 원론을 뛰어넘어 좀 더 구체적인 한국경제를 연구하고 싶어.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7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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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봄호(2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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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1)

 


 

국제공산당 International Communist P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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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이 글은 1960-61년, 이탈리아어판과 프랑스어판으로 기관지에 실렸으며, 이후에 팸플릿으로 출간한 당에 대한 작업(party work)을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것이다.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국내 좌익 소아병으로 알려짐 : 역자 주)이 출판되고 40년이 지나, 전 세계의 기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노동계급을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에 감히 레닌과 그의 저작들에 대해 찬양하면서, 그의 빛나는 유산과 프롤레타리아의 일상적인 예속 속에서의 싸움을 부르주아지의 뜻과 필요에 팔아먹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1960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자 정당들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고, '결의안'을 내놓는데, 이에 대해 우리는 이미 '돼지들의 선언'라고 이름붙인 바 있다. 그 결의안은 우리의 글에서 자주 참고하는데,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기회주의자들이 처음부터 맑스나 엥겔스, 이후에는 레닌에 이르기까지의 인물들의 뛰어난 비판을 거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듯이, 기회주의의 새로움이란 그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상황> 에 대한 새로운 설명들(악명 높은 발견물들!)을 찾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잘못을 저지른 배신자들을 정당화하고, 새롭고 이해하기 힘든 단어들을 써서 노동자들이 속고 있다는 것을 알기 힘들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새로운 주장이 거짓임을 밝힐 필요가 있어서도 아니고, 이미 죽은 자들에게 바치는 의례에 참여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도 아니다. 레닌과 그의 저작들은 우리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생생하기 때문이다. 용병들과 변절자들이 우리를 살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헛소문들로부터 당의 원칙과 조직을 보호하는 것이 당의 변함없는 책무인 것처럼, 그러한 주제에 대해 정신을 쏟는 것이 차라리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변절자들이 우리들과 혁명적 맑스주의에 가까워질수록,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적의 편으로 돌아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신비화 속에서 더욱 초라해질 것이다.

이 돼지들의 테제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글에서, 그리고 이후에 레닌의 글에서 좌익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주장은 불행히도 여전히 그들의 생각 속에 뿌리내리고 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국제 혁명 운동 속에 간교하게 침투한 일종의 변종, 거짓된 극단주의자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글은 차이가 오직 전술적이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유럽의 운동과 비교해 본다면, 그 차이가 러시아에서의 운동을 특징짓는 다른 시각뿐만 아니라 독특한 역사적 경험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국제적인 정당의 결정에 달려있었고, 역사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그 시대에 그것이 정당했다고, 명백하고 최종적인 해답을 내렸다. 그러나 이 글은 1920년과 그 몇 년 전, 우리가 아직 레닌을 알기도 전에, 우리와 볼셰비키 사이에 있었던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공통점도 보여준다. 규율되고 중앙 집중적인 맑스주의 당에 의해 지도되는 프롤레타리아의 폭력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 뒤이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 아나키스트와 개량주의자라는 두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타협 없는 투쟁이 그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진짜 자본주의의 중심 권력을 공격할 수 있게 되기 전에 쓰러뜨려야 할 첫 번째 장애물임이 증명된,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실질적 담지자인 '극단주의자들'에 대항한 볼셰비키와 우리가 함께 어깨를 맞대고 들어가 있는 참호이다. 국제적인 정당을 정화하는 것은 완전히 이뤄질 수 없었고,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바이다.

원칙에 있어서 그러한 공통점은 좌익 공산주의의 입장과 실질적인 활동에 대해 숨은 동기 없이 연구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들에게는 명백했다. 그리고 이 공통점은 텔레파시나 신비스런 국제적 연결 때문이 아니라 두 운동이 맑스주의의 방대한 학설들을 참고, 연구했기 때문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도 볼셰비키도 그런 신비스런 연결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레닌 스스로 그 사실을 그의 저작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야 역사에서 우리의 학설의 틀 속에 이미 교훈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레닌의 글은 스탈린이 레닌이라는 대가의 가르침을 속이고 배신하기 위해 만들어 낸 '레닌주의'의 창시자의 글로서가 아니라 맑스주의의 위대한 학자라는 관점에서 읽고, 그의 위대함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가 혁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평생에 걸친 이론적 작업 덕분이었지, 그 반대가 아니다. 10월 경험으로부터, 몇 십 년 전부터 이론적 무기를 강화하고 날카롭게 하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왔던 진정한 맑스주의 정당이 지도했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고,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 외에 어떤 더 대단한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

레닌의 <‘좌익’공산주의>는 그 경험의 성취를 평가하고, 앞으로 다가올 혁명적 작업의 기반을 그의 방식에 따라 쌓고자 한 것이었다. 단결 이전에, 우리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좌익의 입장은 질서정연했으며, 레닌은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오늘날 배신자로 알려진 이들은 최근 노동계급의 구원자인 체하며, <'좌익' 공산주의>가 그들에 반대하여 작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왜 1960년, 모스크바에서 81인의 돼지들에 눈앞에서 던져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1984년 우리가 여전히 그 글이 우리의 것임을 전에 없이 더욱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인지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또한 이것이 우리가 24년 전의 글을 영어권의 프롤레타리아도 볼 수 있도록 만들고 있는 이유다. 국제 노동자 운동의 역사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연구에서 이야기했던, 노동조합주의가 탄생한 영국에서 일찍이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들을 보여준다. 다른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뛰어난 정치적 투쟁을 벌이는 동안 영국의 노동계급은 애국주의자, 협력주의자(collaborationists)라는 기회주의와 화려한 대영제국에 의한 부패의 덫에 빠져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혁명적 파도로 영국에서도 공산당의 창당되었다. 그러나 이들도 처음에는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시작되었으나 제3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들의 운명이 그러했던 것처럼 스탈린주의적 타락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영국 노동계급은 영국 사회를 문제에 빠뜨렸던 경제투쟁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자랑할 수 있지만, 대륙의 대중들이 역사적 전환점이 된 몇몇 사건들 속에서 겪은 혁명적 투쟁의 전통들이 실질적으로 없다. 이러한 과거의 차이는 영국의 노동자 전위와 국제적 혁명당 사이의 역사적 연결에 언제나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은 미래에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제 공산당이란 러시아,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공산당이라기보다 세계의 공산당이며, 그 기원을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계급의 역사 속에서 경험한,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경험, 승리와 패배, 정복과 후퇴로부터 찾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국, 미국, 그리고 호주의 노동자들의 정당도 마찬가지이며, 또한 그들 투쟁의 산물이며 그들의 역사적 이해의 성과이다.

맑스주의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하여 러시아에서 성공하였으며, 이탈리아에서 지칠 줄 모르고 방어되었으며, 맑스주의로 인해 멀지 않은 미래에 영국과 미국의 노동자 대중들이 자본의 요새를 공격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1장. 1920년 역사적 드라마의 배경

 

레닌의 죽음 직후 공산주의 좌파의 발의로 로마의 카사 델 포폴레(Casa del Popolo)에서 그의 추도식이 열렸다. 추도식에서 한 연사는‘레닌의 것이라고 주장된 전술적 기회주의’를 발표한 후 고전 <국가와 혁명>의 초반 문장을 인용했다. “레닌은 혁명의 위대한 선구자들의 가짜가 넘쳐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맑스와 그의 위대한 추종자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그렇다면, 레닌은 과연 그러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단연코 아니다!”

이러한 태평한 예측 이후 36년이 흘렀다. 좌익의 가차 없는 비판 아래 펼쳐진 그들의 성적표는, 기회주의자들이 레닌이라는 인물 위에 쌓아 올리려고 한 거짓된 허튼 소리가 맑스에게 쏟아진 것보다 적어도 10배는 메스껍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곡하는 이들의 기본 체계는 언제나 똑같다. 우선 위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방법과 강령을 형성시켰던 역사적 진실의 장소에서 전설을 만든다. 이 전설 속에서, 고전적인 문헌들을 형성시켰던 실제 투쟁의 조건들과 분리하여, 완전히 동떨어지고 이런저런 불순물이 섞인 인용구들을 골라낸다. 마지막으로, 혁명 계급이 어려운 조건 속에서 싸우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 의미를 노골적으로 완전히 바꿔버린다. 대부분의 경우 이 계급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에 몇 번씩이나 중고로 팔아 넘겨진 듯한 이론적 무기들로 무장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우리 계층이 그러하듯, 맑스주의자의 작업은 비현실적이고 억지스럽게 갖다 붙이는 아마추어리즘이나, 야비하고 타락하기 쉬운 출세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맑스주의자의 작업은 ‘좌익 공산주의’의 모든 페이지와 모든 문장이 배신자들과 변절자들의 뻔뻔한 얼굴 위로 무자비한 채찍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수사나 선동을 읽고 실재의 역사적 사실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 당시 벌어진 사건들의 값싼 소문의 연대기가 아니라 진정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우리는 코볼트 (독일 도깨비: 역자 주)가 한 세기동안 부인하려 했던 독특하고 명백한 혁명적 교훈과 성취의 흔적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1920년 봄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온 지 4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17년에 10월 혁명이 일어났고, 파괴된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를 밝힘으로써, 1919년 3월 혁명 1년 전, 제3인터내셔널이 건설되었다.

볼셰비키당은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전 방위적인 저주와 승인, 맹렬한 악담과 정열적인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 이 시기 러시아 당의 첫 번째 공헌은 데니킨(Denikin), 유데니치(Judenic), 브랑겔(Wrangel) 등이 이끄는 백군에 저항해 본격적인 내전을 시작한 것이었는데, 백군은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의 군사 원조를 등에 업고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시기는 정치적 의미에서 전선뿐 아니라 첨예하고 실질적인 군사적 대립이 팽팽하던 시기로, 이런 조건 속에서 러시아의 혁명의 궤적을 다루고 있다. 모든 것은 승리를 위해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그들이 40년 동안 애써 묘사하려고 했던 것처럼 레닌이 진짜 기회주의자였더라면, 그는 지원과 전쟁 선포 사이에서 단 1분도 선택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나운 적들에 포위당하고, 적색 독재의 테러에 격분한 모든 부르주아지가 똘똘 뭉쳐 흉포한 공격을 감행하는 국제 사회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가능한 모든 우군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그 대신, 2차 대회 준비를 선포하는 글을 쓰고 1920년 6월 대회를 소집했다. 그는 역사의 교훈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글이 보여주고 있듯이, 당이 그 설립과 준비 과정에서 적과 아군을 가차 없이 구분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첫 번째 걱정거리는 세계 혁명당이 강령과 조직 교의(Organizational Doctrine) 없이 형성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러시아 외부의 수많은 지지자들을 거부하는 일이 될지라도 말이다.

그와 같은 선택은 부르주아 의회 정치를 빌려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익’으로부터의 위험도 이미 명백했고,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의 인물들이 새로운 인터내셔널로 침투해 가길 바람에 따라, 인터내셔널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카우츠키주의와 중도주의가 그것이다. 레닌은 이미 그들을 맹렬하게 공격했었다. 그러나 ‘좌익’, 아나키스트, 자유의지론자(libertarians), 그리고 소위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라는 소렐 학파로부터 정치적 영역에서 지원들은 세심하게 검토되어야만 했다.

이들(좌익, 아나키스트, 자유의지론자, 소렐 학파)은 러시아의 사건을 계급투쟁에서 무장 폭력의 승인이라는 점에서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멍청이들이 싸움이나 값싼 총질을 보고 흥분하는 것-이들은 대부분 인격적으로는 진정한 겁쟁이들이다-이 혁명적 입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레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인물들이 좌익주의자라고 잘못 불리며, 종종 프롤레타리아 태생이며, 자신의 잘못에 대해 진실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또한 그것이 도덕적인 면죄부를 나눠주는 문제가 아니라, 혁명적 세력을 조직하는 문제임을 잘 알았다. 그는 이러한 일탈자들을 향해, 우익 기회주의에게 한 것에 비하면 덜 거친 용어를 썼다. (물론 이 둘은 모두 노동자들을 잘못 이끌고, 스스로 지도자가 될 생각에 가득 찬 지식인이 되곤 하지만)

이런 거짓된 극단주의가 무척이나 위험한 까닭은 역사의 전 과정에 걸쳐 국가와 당이 모두 혁명의 필수불가결한 도구라는 러시아 혁명의 근본적인 교훈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의 교의와 조직에 대해서는 이미 맑스와 엥겔스가 제1인터내셔널의 논쟁과정에서 평가한 바 있다. 레닌이 말하길,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1870년에서 1880년까지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길을 잃었음을 증명해 보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혁명 이론으로서 아나키즘은 어리석은 것임이 드러났다.’소렐의 생디칼리스트들은 라틴계 국가들이었기 때문에 레닌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 교의에 대한 비판은 전쟁 전까지 우익 맑스주의자들이 담당했다. (이탈리아의 상황은 달랐는데, 개량주의 사회주의자 소렐의 생디칼리스트와 심지어 아나키스트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어떻게 사회-애국주의(나치)에 빠져들었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레닌은 소렐 학파가 독일 공산당 스파르타쿠스 그룹의 이른바 ‘좌익’ 안에서, 호르터와 판네쿡의 트리뷴 네덜란드 그룹 안에서 어떡해든 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왜 이 분파가, 10월 혁명에 대해 공개적으로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레닌을 괴롭혔는가? 그것은 정확히 레닌이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이론적 엄격함을 방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거짓된 좌익주의자들을 거의 용서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도 맑스주의 전통에 서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레닌은 그의 명석함으로, 여전이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이들에 대해 더 신경을 썼다. 우리들이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에 대해 그러하듯이. 레닌은 칼 오일러의 교훈적인 제목의 글, ‘당의 해산’으로부터 다음을 인용했다.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부르주아 국가를 없앨 수 없다.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당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없앨 수 없다.’

여기서 레닌은 큰 소리로 호통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명백하게 맑스주의자로 여기는 빈틈없는 독일인들이 완전히 어울리지 않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에 라틴 국가들의 더 어리석은 생디칼리스트와 아나키스트들은 ‘만족’할지도 모른다.’(레닌, 선집, 1977년 판, 529쪽)

 

중요한 문제: 당의 독재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단순히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무장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하게 여기는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으로 정의할 수 없다. 그러한 구분은 불충분하다. 레닌이 그러한 그룹들에 대해 당연히 의심을 품었으나 우익에 대해서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말했다.

“(1920년 4월) 9차 당 대회 때에도 “지도자의 독재”, “소수 독재” 등에 반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독일에서‘좌익 공산주의’의 ‘유아적 무질서’가 나타난 것은 놀랍거나, 새롭거나, 또는 끔찍한 일이 아니다. 그 병은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오히려 병을 앓고 난 뒤 유기체는 더욱 건강해진다.” (위의 책, 531쪽)

이것이 유명한 레닌의 유아적 무질서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나 그는 중도파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우익’으로부터 다른 위험이 닥쳐오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노년기적 무질서’였으며, 이것은 혁명 유기체를 죽음으로 몰고 가, 결과적으로 제2인터내셔널의 파괴적인 재앙보다 훨씬 더 해로울 것이었다.

러시아 혁명이 불러일으킨 비평의 파도 속에서, 우리를 비판하는 많은 이들과 중상모략자들-맑스-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이들-은, 우익 부르주아지에서부터 민주주의자, 아나키스트까지 다양했는데, ‘독재자들’또는 독재자 레닌에 대해 합창으로 비난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크롬웰에서부터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가리발디에 이르는 그들의 위대한 독재자들을 잊었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을 언급하며, 어리석게도 다음과 같이 썼다. 애도할 것인가, 축하할 것인가? 홀란드, 독일, 그리고 다른 많은 나라들의 좌익은‘독재’에 대해 이야기하길 망설였는데, 레닌은 올바르게도 그들의 그런 행위가 민주적이고 소부르주아적 정신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괘씸한 카우츠키의 중도파와 그 이후로 지금까지“사회주의는 단지 민주주의이며, 모두를 위한 자유이다!”라고 외치는 얼간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오늘날 레닌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미심쩍은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진정한 좌익 맑스주의자 레닌은, 마치 우리들에 반대해서 쓴 것이라고 주장되는 이 글에서, 그 이름에 걸맞게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당 독재, 심지어 주어진 인물들의 독재의 구분에 대한 모든 망설임과 원칙들을 찢어놓는다.

그 다섯 번째 장은 “독일에서의 ‘좌익’ 공산주의, 그 지도자, 당, 계급, 대중”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레닌은 공허한 대안을 내놓고 있는 독일의 좌익 공산주의의 팸플릿에서 풍부한 인용을 한다. 우리가 원칙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공산당의 독재인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인가?이들은 하나의 대안을 다른 대안들에 반대하여 내놓는데, 투쟁의 발발을 기대하는 당의 지도자는 위에서부터, 대중 정당은 아래에서부터행동한다는 식이다.

이 지점에서의 레닌의 비판은, 공산주의자들을 아연실색케 하는‘당 독재’를 우리가 거부한다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혁명을 모두 거부해야 하고, 당이‘지도자’라는 단어가 무서워 지도자를 통해 움직이길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찬가지의 불능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뤄진다. 우리의 당은 다른 모든 당과 다르고, 우리의 혁명적인 인간의 메커니즘은 다른 운동들이 떠들고 광고하는 메커니즘과 다르다.그리고 레닌은 이를 ‘비합법’ 조직의 필수 불가결성으로 연결할 것이다.

레닌은 그의 뛰어난 명쾌함으로 대중, 계급, 당, 지도자라는 ‘범주’들의 철학적 정의를 선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다급했고, 그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레닌의 글은 당 독재와 극단적인 경우 특정 당 구성원들의 독재에 대해서도 그 필연성에 대한 모든 망설임을 제거한다. 이것은 그 이후 모든 정통의 사상가들-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네 지도자의 정상회담, 소위 네 거물들 앞에 엎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을 공포로 몰아넣어 왔다.

모든 것은 임시정부와 국민선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당의 독재인가 계급의 독재인가, 지도자의 독재 정당인가, 대중의 독재 정당인가?’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가망 없이 어리석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대중들은 계급으로 나눠지는 것이 상식이다. 대중들은 계급과 대립하는데, 그것은 오직, 생산의 사회적 체계의 상태에 따른 구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광범위한 대중을, 생산의 사회 체계의 결정적인 상태에 대한 범주들과 대조할 때에만 그러하다. 대개, 적어도 현재 문명화된 국가들의 대부분의 경우에서, 계급들은 정치적 정당에 의해 이끌어진다. 정치적 정당이란, 일반적으로 가장 권위 있고 영향력 있으며, 경험이 풍부한 구성원들로 구성된, 다소 안정적인 그룹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가장 책임 있는 자리에 선출되며, 지도자라 불린다. 이 모든 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명확하고 단순하다.”(위의 책, 527-8쪽)

 

‘지도자’의 배신에 대한 올바른 진단

 

이런 명쾌한 문장은 엥겔스가 스페인 아나키스트에게 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혁명은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권위주의적인 사건이다’

계급 혁명은 전쟁이며, 내전이다. 군대, 본부, 그리고 당은 필수적이며, 승리 이후의 국가, 정부, 권력자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은 활동이 과거 완전히 합법적이었던 상황에서 1차 세계대전 이후 비합법적 상황이 되어버린 독일에서와 같이, 어떻게 비합법적 활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런 어리석은 생각들이 도출되는지를 설명한다.

“혁명과 내전의 폭풍과 같은 발전으로 인해 활동이 합법적인 것에서 비합법적인 것으로 빠르게 변화해가는 상황에서, 그 둘을 결합하고,‘불편하고’‘비민주적인’ 선택을 하거나 ‘그룹의 지도자’를 형성하거나 보호하는 것에 적응해가는 것이 가는 것이 관습적(customary)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 될 때,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을 잃고, 완전한 난센스를 생각하기 시작한다.”(위의 책, 528쪽)

1914년, 사회주의자의 배신으로 손을 덴 많은 훌륭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자들을, 그들이 누구였든 간에 불신하기 시작한다. 레닌은 우리에게 지도자들의 몰락은 맑스주의자들에게 오래된, 그리고 명백한 사실이며 ‘지도자를 대중에 대립’시키는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나쁜 지도자와 좋은 대중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지도자와 대중 모두의 변질에 대한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1852년과 1892년 영국의 예를 들어 이러한 일들의 주요한 원인을 여러 차례 설명했다. 지역의 배타적인 입장으로 인해 ‘대중’으로부터 반-또는 소-부르주아지, 기회주의 ‘노동 귀족’들이 출현한다. 이 노동 귀족의 지도자들은 지속해서 부르주아지로 나아가며, 직접적이든 간접적인 역할을 다한다. 맑스는 그들을 배신자로 낙인찍음으로써 이러한 불명예스런 인물들의 증오를 유발하는 영예를 얻었다.’ (위의 책, 528-9쪽)

레닌은 같은 현상이 전쟁 과정에서,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 일어났다고 말한다.

‘특정 유형의 배신자, 기회주의, 그리고 사회적-애국주의 지도자들이 양산되었는데, 이들은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것들과 노동 귀족정치 속 일부인 자신들의 이해를 지켰다. 기회주의자들의 당은 ‘대중들’, 다시 말해 노동 인민들의 광범위한 계층들, 그들의 다수, 저임금 노동자들로부터 분리되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악’과 싸우지 않고서는, 그리고 기회주의자, 사회적 배신자 지도자의 정체를 밝히고, 의심하고, 추방하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 없다. 이것이 제3인터내셔널이 취하고자 하는 정책이다.’(위의 책, 529쪽)

대체 어떤 맑스주의자가 이러한 역사적 입장을 자유의지론적 제안- 악은 당과 유명한 ‘지도자’들에게 있다 -과 혼동할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조건적, 또는 더 나쁘게도, 지역적,민족적, 독일적전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원칙과 강령에 대한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심지어 그 특수하고 계급적인 혁명적 교훈들을 참고했던 지도자들과 모든 정당들이 계급의 적들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이,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지도자들’과 당의 힘을 거부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사실 맑스주의 교의는 처음부터 -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정당으로 조직하길 요구하는 공산주의선언에서부터 (제1 인터내셔널의 인물들에 따르면, ‘모든 다른 정당에 대한 거부’), 독일의 혁명과 반혁명에 대해 쓴 맑스와 엥겔스의 저술들 등에 이르기까지 - 그러한 거부를 논박해왔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야기할 수 있다. 맑스와 레닌의 시대에는 프롤레타리아가 승리한 러시아와 같은 ‘국가’가, 외교적으로도(연합군), 국내 정치적으로도(자본주의적 경제, 사회적 조치) 적의 편으로 넘어가는 지점까지 타락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기회주의가 지난날 맑스나 레닌에게 알려졌던 것에 비해 20배는 더욱 혐오스러운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멍청한가를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러한 짓거리들은 당과 프롤레타리아트를 욕보일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첫 번째 언급에 대해서도 망신을 준다. 그러한 사실은 단순히 다음과 같은 ‘말함’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사람은 타락하기 쉬운 존재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타락하기 쉽다.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타락하기 쉽다. 당은 타락하기 쉽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국가도 타락하기 쉽다. 진짜 역사적인 권력관계, 살덩어리의 나약함이나 다른 윤리적인 설명 때문에.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한 것들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한다. 국가를 비난하자. 권력은더러운 것이며, 모든 이를 부패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론적인 이단은 맑스와 레닌에게 잘 알려져 있었고, 그들은 이를 완전히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레닌은 독일의 좌익주의자들의 원칙들로부터 똑같은 잘못된 생각들을 발견했다. 그는 우리가 사람, 당, 그리고 국가 정부의 지도와 같은 모든 어려운 무기들을 다뤄야만 함을 확인했다. 우리의 정치적인 동지들, 우리의 혁명적 당, 우리의 국가 기구들은 과거가 생산해 내었던 것들- 슬프지만 부분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것들을 포함하여 -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며, 그것들은 우리의 교의가 이론화되어 독자적인 형태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역사적인 과정을 보여주는데 있었다.

레닌은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제기했으나, 그도 인간인지라 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 좌익주의자들이 당의 형태에 대한 의심을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국가의 형태에 대해서도 불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들의 강령에 따르면, 맑스주의가 거리낌 없이 선언했던, 독재의 역사적인 형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더 이상 배신자들이 볼 수 없도록 당이 해산되어야 한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지가 ‘권력을 휘두르는 타락한 유혹’을 저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국가도 해산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독재의 기간

 

그러므로, 레닌이 맞선 위험은 우리가 이후에 다룰 전술의 오류가 아니라, 근본적인 원칙의 잘못, 그러므로 당의 내부의 조직적 수단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오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순간, 대부분의 오류들은 절단과‘제명’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않고, 구성원의 증가라는 유혹에 굴하지 않고 그것을 재빨리 칼로 끊어냄으로써 피할 수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세계의 공산당은 ‘어떤 구성원을 받아들일지’ 그 조직적 방법에 대한 문제다. 이 논증을 끝내기 전에, 독재가 짧은 기간이 아니라 꽤 긴 역사적인 단계에 걸쳐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는, 레닌의 비할 데 없이 박력 있는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속된 말로 ‘구급책’이 아니라, 우리의 이론과 우리의 전투를 생동감 살아있게 하는 산소와 같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당과 ‘부르주아지’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은 아무리 작은 오류라도 그것이 지속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 한다면, 그 논리적 결론에 가서는 엄청나게 거대해 질 것이라는 진실에서 납득할 수 있다.

당의 반대파는 결국 당의 원칙과 규율의 거부에 도달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이해에 프롤레타리아트를 완전히 무장 해제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부단한 노력과 단결, 그리고 조직적 행동이 불가능한 소부르주아지의 산만하게 흩어지는 성격과 불안정함은, 만약 그것이 장려된다면,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을 필연적으로 파괴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이치에 닿는다.’(위의 책, 529쪽)

이런 점에서 이 구절은 매우 고전적이다. 그리고 현재 연구의 결론과, 우리가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이탈리아 맑스주의 좌파의 테제와 일맥상통한다. 레닌은 죽어서 우리와 함께 있지 않지만, 그가 살아있었을 때조차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함께하는 우리의 이탈리아에서의 운동과 레닌의 비밀 협약(1920년,‘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가 포함되지 않은, 이탈리아 사회당의 공산주의 기권주의 분파의 대표가 모스크바로 갔을 때, 레닌이 개인적으로 맺은 협약)이 있기 전부터 우리는 그것을 주장해왔다. 여기서부터 강조는 레닌이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것이다.

‘공산주의의 관점에서 당의 원칙에 대한 거부는 (독일의) 자본주의의 붕괴 전야에서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 또는 중간 단계로의 도약이 아니라 높은 단계로의 도약을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러시아에서(부르주아지의 전복 이후 3년차)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로의 이행의 첫 단계를 밟고 있다. 계급은 여전히 남아 있고,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획득한 이후에도 몇 년 동안(레닌의 강조)은 모든 곳에 여전히 그럴 것이다. 더 이상 소농이 없는(그러나 소부르주아지는 존재하는) 영국에서는 아마 이 기간이 좀 더 짧을 수 있다. 계급철폐는 지주나 자본가들의 단순한 추방(또는 죽음. 우리의 주석) - 우리는 상대적으로 이를 쉽게 달성할 수 있다 - 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소-상품생산자를 없애는 것(레닌의 강조)이다. 우리는 그들을 추방할 수도 없고부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사는 법을배워야 한다. 그들은 매우 장기적이고 느린, 그리고 주의 깊은 조직적 수단을 통해서만 변형되고 재교육될 수 있다(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스며들어 그들을 오염시키고, 지속적으로 나약하고 분열되어 있으며, 개인주의적이고, 그리고 고양과 우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변덕으로 되돌아가게 하는원인이 되는 소부르주아지의 공기로 프롤레타리아트를 둘러싼다. 이에 대항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그조직적 (그리고 주요한)역할을 올바르게, 성공적으로, 승리하도록 수행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정당내의 가장 엄격한중앙 집중화와 규율이 요구된다.’

(레닌의 마지막 강조는 반(半)프롤레타리아트가 내전 동안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나 이후에 그들은 해산되고 분산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제 이를 강조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피가 흐르든 그렇지 않든, 폭력적이건 평화적이건, 군사적이든 경제적이든, 교육적이든 관리적이든 지속적인 투쟁이다. 수억의 습관의 힘은 가장 무시무시한 힘이다. 투쟁 속에서 다듬어진 철의 당이 없다면, 계급의 모든 정직한 사람들의 신뢰를 누릴 수 있는 당이 없다면 (우리는 대중 속에서, 심지어 계급 안에서 건강하지 못한 잔여물들, 반혁명의 영향의 희생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그들이 교화될 수 없다면, 잔인하게 진압될 것이다) 대중의 분위기를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파악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당이 없다면, 그런 투쟁은 성공할 수 없다.

똘똘 뭉친 거대한 부르주아지(독점자, 파시스트로 읽는다)를 무찌르는 것은 수천 수억의 작은 지배자들을‘없애는’것에 비하면 천 배는 쉽다. 일반적이고 일상적이며 미세하고 교묘하며 사기를 꺾는 활동들을 통해, 그들은 부르주아지가 필요로 하고, 복원(레닌의 강조)하고자 하는 바로 그 결과, 부르주아지를 만들어낸다. (특히 독재의 기간 동안) 프롤레타리아 당의 철의 규율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는 것이 누가 됐든, 그는 실제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여 부르주아지를 도와주는 것이다.’(위의 책, 529-30쪽)

이러한 명백하고 단호한 공식화를 통해 레닌은 노동자 소비에트가 공산당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좌익 공산주의가 혁명 투쟁 이전에 소비에트를 소집하는 것을 제안할 만큼 어리석은, 다른 생각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관이나 다름없는 소비에트의 기관은 부르주아지가 찬성표를 던지지 않음으로써,‘당을 해산할’권리를 부여받았다. 1919년 이후 이탈리아 좌파는 이후 2차 당 대회의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의 결의안을 비난하는, 그러한 반맑스주의적 테제와 싸워왔다. 이 테제로 돌아가 보는 것은 의미 있다.

 

인터내셔널의 전략과 전술

 

최근 기회주의 스탈린주의자들의 언론은 레닌의 <‘좌익’공산주의>가 40년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이 무리들에게 이것은 그저 의례적인, 관습적으로 인사하는 날이나, 생일과 같은 무슨 무슨 날을 모아놓거나 농담 등으로 가득 찬 노트의 메모에 불과하다. 그들은 <‘좌익’ 공산주의> 문구에 대부분 찬양하면서도, 이탈리아 좌파에 반대하여 속임수를 쓰거나 인용하기 위해 수백 번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것들은 지금부터 우리가 이야기할, 이탈리아 지방의 국지적인 문제를 넘어선 국제적인 방법과 심지어 레닌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최소한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레닌이 상황적이거나 국가적인 전술 문제를 다룰 때,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구성적이고 역사적인 전략들을 고려하는 원칙의 명확한 지점들을 밝히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이란 오직 세계혁명과 세계공산당의 조직이라는 목표를 가진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 중요한 작업 속에서 어떻게 이탈리아 좌파가 레닌을 지지했으며, 다른 누구보다도 결정적인 지점에서 그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짧게 이야기할 수 없는 우리들의 설명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 그 당시 네덜란드-독일로 일반적으로 기인하는 전술적인 지점들이 보고되어야만 한다. 그들의 입장과 이탈리아의 입장이 흔히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독일 반대파는 실질적으로 두 지점에서 이탈리아 공산주의와 다르다. 무엇보다도, 독일 반대파는 공산주의자는 기회주의적 - 그 당시에는 반동이라고 불렸던 - 노동조합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점에서 독일 반대파는 이탈리아 공산주의와 아무런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다. 이탈리아에 아나키스트 경향과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이 독일에서 만들려고 했던 것과 같은 좌익 노동조합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노동조합과 분리를 지지한 적은 없으며, 그 지도자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바로 그 개량주의 일반노조, 이탈리아 노동총동맹(Confederazione Generale del Lavoro) 안에서 활동했고, 그것은 레닌이 선호한 바로 그 전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전술적 해결책은 원칙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혁명적 기능은 주요하게 당에 있는 것이지, 노동조합이나 공장위원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익 노동조합이나 다른 노동조합을 거부함으로써가 아니라, 레닌이 명백하게 동의했던 것처럼, 정당을 쪼갬으로써 새로운 공산당을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오히려 그 이후야말로 단일한 노동조합을 위한 투쟁의 시점이다.

독일 좌익의 두 번째 실수는 의회 선거를 보이콧한 것이었다. 보라, 실리주의자들이 기뻐 날뛰지 않는가! 레닌은 독일과 이탈리아 모두를 비난해야 했다. 그러나 그 경우 입장이 다름을 레닌은 알았고, 그것을 가르쳤다.

평범한 바보에게 혁명적 반란과 국가 속에서 공산당의 주요한 기능을 거부하고 다른 ‘즉자적인’프롤레타리아 기관인 노동조합, 위원회, 소비에트 등 (이것들은 우리의 주요한 적, 직접주의 경향이다)에 넘겨주고, 그러한 투쟁의 정치적인 측면에 대한 거부로부터 의회적인 측면에 대한 거부까지 이끌어내는 일이 실수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어진 역사적 단계에서 혁명적 정책에 반대하는 합법주의 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동의에 이르진 못했지만 레닌과 논의한 바이다. 우리는 규율을 위해 그의 해결책을 받아들였다.

이 연구의 마지막, 또는 그 다음의 연구에서, 오늘날 배신자들이, 의회주의 문제에 대해 원칙적으로 레닌과 우리들과 반대에 입장에 선 반면, 이 경우 우리들이 실제로 레닌과 원칙적으로 함께했던, 그러나 전술적인 차원에선 불일치를 보였던 의회주의에 대해 보여주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 될 것이다. 사실 2차 당 대회에서의 논의는 의회주의를 파괴하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한 것이었고, 레닌과 다수는 그러한 파괴가 의회주의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로부터 행해져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했다. 우리는 저기 있는 의회 속으로, 스스로 레닌주의자라고 맹세하면서 실제로는 의회를 지킬 준비가 된 광대들들 속으로 들어간다. 이 문제에 대해 대중들이 광대들을 따르는 한, 대중들은 그야말로 일탈하여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믿음을 갖고 투표소로 향한다.

 

레닌의 계획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문장만을 인용하는 이들(이러한 이유에서도 이들은 왜곡을 잘하는 스탈린주의자의 학생일 수밖에 없다)과 우리들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좌익’공산주의>에 대한 팸플릿의 모든 부분을 순서대로 검토하여 그 강령과 원칙을 모두 뽑아낼 것이다.

추가적으로 역사적으로 자세한 부분들을 제시하고, 요약을 해 보자.‘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주요한 책무에 대한’ 2차 당 대회의 테제는 당과 노동계급과 몇몇 대중 운동의 관계에 대한 개념들이 불충분하다고 선언한다. 독일 공산주의 노동당(Communist Workers Party of Germany), 헝가리 잡지 공산주의(Kommunismus) (그들이 아무리 러시아 혁명에서 아름다운 투쟁을 펼쳤다 하더라도 그것이 관념적 유형인 교의의 오류를 숨기지는 못한다), 영국 사회주의 노동 연합, 미국 세계산업노동자(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스코틀랜드 직장 위원(공장 위원회)가 그러한 운동들이다. 여기서는 노동조합과 의회 보이콧을 모두 비난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우리가 여전히 오늘날까지, 심지어 반스탈린주의 그룹 안에서도 싸우고 있는, ‘직접주의’라는 이름의 경향에 반대하는 하는 정통적 맑스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 다른 점인데, 레닌그라드에서 있었던 대회 전 모임에서 그러한 운동들을 대회의 한 부문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참관자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심지어 러시아인들도 깜짝 놀랐던 것은, 이탈리아 대표가 그러한 운동들을 배제하자고 제안했으며, 이 대회는 오직 공산당만이 가입할 수 있는 인터내셔널의 정당 대회라는 데까지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이후에 21개 항의‘가입 조건(conditions of admission)’에서 명확해진다.

이제 레닌의“‘좌익’공산주의”를 살펴보자. 이것은, 읽고 읽을 수 있는 문제이다.(It is a matter of reading it, and of being able to read it). 우리는 이미 역사적인 윤곽을 제시했다. 요약은 다음과 같다.

1.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인 중요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2. 볼셰비키 성공의 본질적인 조건

3. 볼셰비즘의 역사에서 주요한 단계

4. 노동계급 운동 내의 적들에 대한 투쟁은 볼셰비즘이 발전하고 힘을 얻으며, 강철로 다듬어지는데 도움이 된다.

5. 독일에서의 ‘좌익’ 공산주의. 지도자, 당, 계급, 대중

6. 혁명가들은 반동적인 노동조합에서 활동해야 하는가?

7. 우리는 부르주아 정당에 들어야 하는가?

8. 타협은 없는가?

9. 영국에서의 ‘좌익’ 공산주의

10. 결론들

부록

1. 독일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분리

2. 독일의 공산주의자와 무소속

3. 이탈리아의 투라티

4. 올바른 전제로부터의 그릇된 결론

우리는 레닌이 이 글을 쓸 결심을 했을 때의 역사적인 순간에 대해 이미 언급했다. 이 글의 테제는 매우 중요하며, 언제나 타당성을 갖고 있지만, 공식적인, 자칭 레닌주의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계속 짓밟혀져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섹션5의 주제를 강조하며, 레닌의 주요한 걱정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그것은 당의 주요한 기능에 대한 과소평가의 위험뿐만 아니라 당 독재에 대한 두려움이 가진 위험이었다. 진부한 직접주의자와 너무 열심히 일하는 반-정치주의자의 진정하고 고전적인 비난은 언제나 고전적인 맑스주의자들이 부숴왔다.

그 후에 우리는 다른 주제들에 대해 간단하게 다룰 것이다. 의회주의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레닌의 주장은 보이콧과 참여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다룰 것이다. 우리는 이탈리아 정당의 역사와, 부르주아 아벤티노(Aventino)와 함께 한 어리석은 후퇴의 단계를 다시 끄집어 낼 것이다. 아벤티도는 좌파가 당을 더 이상 지도할 수 없는 위치에서 귀환을 강제했지만 중도파에 의해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레닌이 기권주의자들이 1919년 10월, 볼로냐에서 투라티와 함께 선거를 원한 압도적인 다수로부터 분리되었어야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구를 인용할 것이다.

타협의 이론에 대해서는, 우리는 1918년 브레스트-리톱스크 평화조약의 거부를 언급할 것이다. 이탈리아 좌파는 러시아와 연결되어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멸에 이를 혁명적 전쟁을 선택하지 않고, 독일의 도적들과의 조약을 조인한 레닌의 입장을 공유한다.2)

인터내셔널이 싸우고 있었던 주제,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에 대해서는, 그 정통성이 언제나 의심스러운 그람시의 오르디누보 (신질서 운동)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쉬울 것이다.

레닌이나 맑스의 저작들을 읽는 방식이 매우 고된 일이라는 것은 우리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이 미쳐 날뛰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의 유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유일한 길이다.

선정적인 효과를 좋아하고 진부한 것에 스스로 만족하고, 기만적으로 사형을 회피한 이들은 누구나 하수구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번역: 편집부)

 

 

<주>

 

1) 출처: http://www.sinistra.net/lib/upt/comlef/ren/renegadebe.html

이 글은 공산주의 좌파 인터내셔널 도서관 (www.sinistra.net) 에 실린 문서로, 출처는 이탈리아 공산주의 좌파 계열의 국제공산당이 발간한 4호 <공산주의 좌파의 텍스트>다.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문건은 I.1920년 역사적 드라마의 배경 II. 러시아, 또는 인류의 역사 III. 볼셰비즘의 토대 : 중앙 집중화와 규율 IV. 볼셰비즘의 역사적 궤적 V. 반-볼셰비즘 두 운동에 대한 투쟁: 개량주의와 아나키즘 VI. 레닌이 한 것으로 주장되는 '타협안에 대한 승인'의 핵심 VII. 이탈리아의 문제에 대한 부록 총 7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중 서문과 1장을 번역한 것이다. 이후 기획번역으로 완역할 예정이다. (편집자) 

 

2) 우리의 Storia della Sinistra Comunista, Milano, Ed. 「Il Programma Comunista」, 1964를 보라. 특히 342쪽 기사, 전진(Avanti)의 ‘결정적인 국면의 러시아 혁명의 방향’, 1918년 5월 25일.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4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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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공산당-국제공산당 운동의 교훈 - 그람시와 보르디가를 넘어 세계혁명당을 향해

이탈리아 공산당-국제공산당 운동의 교훈

- 그람시와 보르디가를 넘어 세계혁명당을 향해

-이형로

 

 

 

이탈리아 사회당과 혁명적 분파의 형성

 

1892년 Genoa에 의해 창건된 이탈리아사회당(PSI)은 개량주의 세력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존재했으나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적 원칙을 고수하는 진정한 좌파 세력은 1917년 전까지도 형성되지 못하고 있었다. 1917년 로마대회 이후에야 비로소 비타협적 혁명분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 혁명분파는 아직 소수였지만 “전쟁 이후 평화적인 삶”이라는 당내 개량주의 다수파의 주장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세우기 위해 모든 나라에 프롤레타리아의 권리를…….”,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자본가에 대한 사회주의적 몰수를 통해 모든 부르주아 기구에 대한 투쟁을…….”이라는 강령을 방어했다. 당시 보르디가가 주도했던 혁명분파는 당의 분리까지는 원하지 않았는데, 위의 혁명적 강령으로 당의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20년 3월 토리노에서 10일간의 총파업이 일어났을 때, 주류 법적 노조의 지원을 받던 이탈리아사회당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노동자계급을 배신했다.

 

1919년 5월 1일 그람시, 톨리아티, 타스카 그룹은 신질서(L'Ordine Nuovo)를 창간했고, 이때 그람시는 레닌과 De Leon의 혁명적 생디칼리즘을 섞어 “노동조합주의가 공장평의회와 소비에트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한편, 당시 파업이 일어난 지역인 이탈리아사회당의 토리노그룹은 보르디가가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그람시와 다르게 핵심문제를 혁명당의 부재라고 보았다. 보르디가도 물론 평의회를 지지했지만, 평의회가 “공산당 지역단위”의 기반 위에서 형성될 때 비로소 혁명적 내용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질서와 논쟁했다.

 

그런데 정작 보르디가가 신질서와 논쟁한 중요한 이유는 이론적 문제가 아니었다. 신질서 그룹이 개량주의자, 중앙파와 선을 긋고 스스로 혁명분파를 형성하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당의 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개량주의 세력이 노동자계급의 투쟁에서 배신하거나, 당 내부가 혁명적 강령을 관철하고 실천할 태세가 갖춰져 있지 않을 경우, 혁명적 원칙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당내 기반과 일부 건강한 인자들을 포기하더라도 그들과 분명하게 선을 긋고 단절하는 것이 혁명분파의 원칙이자 노동자 계급에 대한 신뢰를 지키는 일이었다. 당시의 신질서 그룹은 혁명분파의 역할과 혁명 강령의 실천적 의미를 소홀히 인식한 결과 개량주자들과의 단절을 주저했던 것이다.

 

우리는 현재에도 말로는 사회주의나 혁명그룹을 주장하고 있지만, 실천적으로는 개량주의 그늘에 놓여 있는 수많은 기회주의자와 투쟁하고 있다.

 

코민테른 지부,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건

 

결국,1920년대 말 신질서 그룹은 보르디가 분파로 움직이게 된다. 9월의 공장점거투쟁 실패가 “경제관리”와 “노동자 통제” 이론에 대한 심각한 타격을 입혔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결정적으로 보르디가가 강조했던 “공장점거 투쟁이라는 혁명적 사건이 그 운동을 지지하고 지도할 공산당이 부재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되었다. 그해 11월 밀라노에서 “통일공산주의분파”가 형성되었고, 1921년 드디어 리보르노에서 코민테른의 지부인 이탈리아공산당(PCI)이 창건된다. 각 분파는 해소하여 신당에 결합했고, 당 대회의 안건에는 “혁명 중에 일어난 평의회는 그의 다수가 공산당에 의해 획득되었을 때 혁명적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때 혁명투쟁에 대한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했다. 대중행동의 자발성과 혁명의식 사이의 문제는 결국 당과 계급의 문제였고, 이후 보르디가주의와 좌익공산주의 경향의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그람시는 혁명분파 구성에 주저하긴 했지만, 이탈리아공산당 창건에 일정 정도 기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는 모스크바와 빈에서 코민테른을 위해 활동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이 수립되어야 하는가와, 서유럽에서 사회주의자와 새로운 공산당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1920년대와 30년대에 코민테른의 변질에 대한 혁명적 반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맑스와 레닌의 방법론적 전제의 변질 비판에 기초하고 있었다. 1921년 리보르노(libomo)에서의 이탈리아공산당 창립성원과 코민테른 내에서 노동자와 혁명가들의 살인에 책임이 있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지도자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하려는 정책에 반대하여 싸웠던 혁명적 전투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이탈리아공산당 내에서 다수를 대표하고 있었고 당이 볼셰비키화 되어감에도, 당에서 좌파를 축출하는 것에 반대한 혁명가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코민테른에 의해 그 자리에서 제거되었다.

 

그람시는 1924년 이탈리아 의회에 선출되어 돌아와서 당의 지도권을 확보하고, 코민테른의 노선에 따라 이탈리아공산당 창당 초기의 분파주의 경향으로부터 대중운동에 뿌리박은 대중정당으로 전환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당 노선을 두고 보르디가 경향과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이탈리아는 이미 파시스트운동의 발전이 당 운동의 행동적 제약을 가져왔고, 모든 투쟁은 방어적 수준에 머물렀고 대중들의 경제투쟁조차 광범위하게 줄어든 상태였기 때문에 대중정당 노선은 보르디가에게는 혁명적 원칙을 포기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람시는 처음엔 공식적으로는 보르디가 노선을 지지하며 공산당의 사회당과의 연합을 반대했으나, 날로 증대하는 파시즘 세력의 위협을 느끼면서 코민테른의 연합전선론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타락하는 코민테른과 이탈리아 좌파의 투쟁

 

당시 코민테른과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사회당과 이탈리아공산당이 통합하여 대중정당을 만들기를 원했지만, 보르디가는 무솔리니와 “평화협정”을 맺는 “중립주의” 정책을 채택한 이탈리아사회당과는 결코 동맹을 맺을 수 없었다. 강령적으로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투쟁 노선을 갖고 있지 않거나 사실상 폐기해버린 정치세력들과의 “통일전선”을 거부하는 노선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결국, 통일전선 문제는 보르디가 지도부와 코민테른 사이의 대립을 가져온다. 당시의 코민테른 3차 대회는 모든 나라에 통일전선 전술의 적용을 명령했는데, 이탈리아공산당 4차 대회에서 오히려 이것에 반대하는 선언을 한다. 1924년 5월 Como에서의 당 대회에서 보르디가 등이 제안한 테제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무장투쟁 노선(프롤레타리아독재냐 부르주아지독재냐)을 절대다수로 수용한 것이다.

 

다음 해인 1925년은 본격적으로 보르디가 경향과 코민테른의 러시아 지도부의 전쟁이 일어난 중요한 해이다. 또한, 1925년은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와 러시아공산당 및 코민테른이 대립한 시기였다. 1925년 3월~4월 코민테른 확대집행위원회는 이탈리아공산당 3차 대회의 의제에 대한 보르디가 경향을 강제로 삭제·제거했고, 트로츠키에게 우호적인 보르디가의 글 ‘트로츠키 문제’의 출판을 금지했다.

 

이때 그람시와 톨리아티는 이탈리아공산당을 볼셰비키화 시키면서 당 중앙을 장악해나갔는데, 좌파를 축출하기 위해 당 중앙테제 찬성투표, 좌파(보르디가)의 테제 반대투표라는 공작을 펼쳤다. 이런 공작은 당 기관지인 Unita에 1925년~1926년에 걸쳐 보르디가를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방하면서 악의적인 캠페인을 펼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코민테른의 스탈린 정책을 이탈리아공산당에 이식시키기 위해 그람시는 혁명적 좌파들의 입을 막음으로써 다수의 당원과 분리하려 했고, 코민테른 안에 이미 뿌리내리고 있던 강압적 관료주의(스탈린주의)를 이용하여 혁명분파들을 차례로 축출하는 변절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또한, 그것이 참혹한 스탈린주의의 잉태였던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혁명적 좌파들은, 그해 4월 보르디가의 동료이자 훗날 보르디가 경향을 극복하고 국제공산당(PCint)을 창설한 데이먼 등을 통해 조정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그람시는 “조직화한 분파”라고 위원회를 비난하면서 격렬하게 공격했고, 그를 추종하는 다수의 맹목적 조직보존주의자들의 축출 위협 아래 위원회는 결국 해산해야 했다. 그것은 다수파로서의 이탈리아 좌파 종말의 시작이었다. 그 후 당을 장악한 그람시의 대중정당 노선 아래 당은 12.000명에서 30.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당시의 신규 당원들은 사상적으로 무장되지 않은 젊은 노동자와 농민이 다수였고, 낮은 수준의 강령으로 정치의식의 하락을 가져왔고, 정치적 미숙함과 무능력은 당을 급속도로 변질시켰다. 정치의식이 균질화되지 않은 미성숙한 다수에게 조직보존주의, 양적 팽창주의 노선을 강제하는 것과 사상투쟁의 자유마저 제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사상투쟁과 혁명적 실천을 통해 다수를 획득해나가고자 하는 혁명적 좌파들에게는 치명적인 상황을 초래했다. 코민테른이 채택한 조직보존주의와 양적팽창주의 당 노선은 혁명분파의 역할을 축소하면서 개량주의적 당 노선으로 자리 잡아 현재에도 혁명분파의 탄생과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적 재조직 화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결국, 1926년 주위상황 때문에 이탈리아 밖 리옹에서 비밀리에 열린 이탈리아공산당대회에서 그람시는 공산당 총서기로 승인돼 당의 지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보르디가 경향은 완전히 제거된다.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축출당한 보르디가는1926년2월~3월 6차 코민테른 확대집행위원회에 마지막으로 참여했는데 트로츠키와 장시간 토론할 기회를 가졌다. 위원회의 참여는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투쟁에 이탈리아 좌파의 연대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보르디가는 극단적 개입의 형태로 가장 맹렬하게 스탈린을 공격했다. 그는 당시를 “분파의 역사는 레닌의 역사이다.”라고 회상했다. 이것이 코민테른 내에서의 이탈리아 좌파의 마지막 투쟁이었고, 그 이후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저항 그리고 스탈린의 잔혹한 숙청과 살해의 역사였다. 1927년 12월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선언한 러시아 공산당 15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를 축출했다. 또한, 혁명과 관계된 모든 사진과 기록들에서 트로츠키의 흔적을 지워나갔고, 수많은 공산주의자와 혁명적 노동자계급을 추방하고 살해했다.

 

1926년 이탈리아 좌파는 보르디가를 중심으로 다음의 문제를 제기하며 싸웠다. ‘코민테른의 혁명적 의회주의 발상에 대한 문제 제기’, ‘공동전선 개념, 그리고 중도주의자와 명백한 부르주아 요소들과 함께 당을 만드는 것을 지시한 코민테른에 대한 반대’, ‘러시아 국가가 부르주아 국가로 발전한 것과 코민테른이 차츰 국제주의 입장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반대’, ‘공산당들이 반파시즘과 민주주의 수호를 내걸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함으로써 점점 부르주아 민족주의당으로 되어가는 것에 대한 투쟁’

 

그러나 이탈리아 좌파는 당의 역할,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당의 관계 문제에 관해서는 러시아 혁명 퇴행의 모든 교훈을 끌어낼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다. 이들은 혁명에서 당의 역할과 관련하여 전적으로 코민테른의 테제와 입장(1920년 채택)으로 되돌아갔다. 보르디가는 오래된 분리. 즉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발전된 경제와 정치투쟁 사이의 낡은 분리를 또다시 채택했다. 보르디가는 노동자계급은 오직 혁명적 소수를 통해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계급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는 부정확한 결론에 이른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을 경제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치적 운동을 통해서, 즉 당을 통해서만 정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이 단순히 경제적 범주만이 아니며 혁명적 당은 그 정치적 의식의 동질화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정확한 전제에서 출발했지만,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러시아혁명과 20년대 혁명적 물결의 퇴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오직 통일되고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당, 어떤 소수도 이 과업을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신해서 수행할 수 없다. 이탈리아도 노동자계급의 퇴보에 직면하여 당의 역할이 이를 대신할 수 없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좌익분파의 결성

 

1926년 파시스트 정부의 정당금지령에 따라 이탈리아공산당은 해산 당했고, 그해 11월 그람시는 체포되어 20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혁명적 좌파와 결별한 당은 이미 혁명성과 전투력을 모두 잃은 채 파시스트의 탄압 하에 조직적 활동이 끊어지게 된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귀국한 톨리아티의 대중정당형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스탈린주의에서 사민주의까지 혼재된 다원주의의 길로 접어든다. 또한, 톨리아티의 사후에는 러시아파와 이탈리아파로 양분, 유로코뮤니즘과 민족 공산주의 노선 등으로 혼란을 겪다가 결국 소련 붕괴 후 완전한 사민주의 좌파 정당으로 몰락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파시즘과 통일전선의 반혁명적 성격을 명확히 하지 못해 파시스트에게 길을 열어주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혁명노선을 굳건히 하지 못해 전투성을 잃어 변절한 이탈리아공산당의 비극이었고, 그람시가 주도한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실패였다.

 

보르디가 또한, 1926년 말 파시스트에 의해 체포되어 3년간 추방되었다. 당시 국외로 망명한 이탈리아 좌파는 유럽에서 투쟁을 계속했지만, 보르디가는 점점 정치적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혁명운동에서 멀어져 간다. 하지만 보르디가를 극복한 그의 동지 데이먼과 후배 혁명가들은 파시즘 하에서도 전쟁 중에도 수백 명이 분명하게 살아남아 여러 공장과 거리에서 목숨을 건 선전활동을 해나갔으며, 혁명적 분파활동의 원칙과 실천적 경험들 때문에 전쟁이 끝나기 전 독자적인 국제공산당(PCint)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수백으로 시작한 당원들이 수천으로 증가하는 데에는 채 몇 년이 걸리지 않았고, 이것은 대중적 노선이 아닌 혁명적 원칙과 혁명 강령을 전투적 노동자계급에 굳건히 뿌리내린 결과였다. 이들은 파시스트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자들에게서도 탄압을 받았지만, 그들은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그리고 외국으로의 망명 속에서도 투쟁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는 1928년 파리의 팡탱(Pantin)에서 이탈리아공산당(PCI)의 좌익분파가 결성되면서 시작되는데, 이 대회의 목적은 새로운 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도주의”를 제거함으로써 인터내셔널에 재결합하는 것이었다. 즉 “이탈리아분파”로서가 아니라 “코민테른의 좌익분파”로서 자신을 규정하는 대회였다. 팡탱에서는, 다른 여러 가지 결의안 중에 코민테른에서 축출된 모든 반대파를 재통합하기 위하여 의장인 트로츠키와 함께 코민테른 6차 대회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탈리아 좌파는 이미 러시아 반대파와 10월 혁명의 영광스런 원칙의 수호 아래 연대했으나, 차이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프로메테오(Prometeo)를 발행했는데, 프로메테오는 원래 이탈리아공산당 나폴리 지역의 보르디가 분파의 혁명적 잡지였다. 당시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일국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반대했던 국제 좌익반대파에 동의했지만, 그것을 주도한 트로츠키와의 강령적 차이에 의해 1930년대부터 선을 긋게 되고, 특정경향의 국제적 분파를 거부하며 1933년 제4인터내셔널을 만들려는 트로츠키의 시도에 반대한다.

 

프로메테오는 첫째, 스페인 문제와 민주적 슬로건에 대해 트로츠키가 「스페인 혁명과 공산주의자의 임무」에 “공화국 슬로건은 자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슬로건”이라고 한 것을 두고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트로츠키가 코민테른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체제를 포기했다고 비판하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전쟁 아니면 혁명이라는 하나의 구호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둘째, 독일 문제와 통일전선에 대해 1931년 트로츠키가 독일공산당과 독일 사민당의 통일전선을 주장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중도주의 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비판한다.

 

셋째, 분파와 당 문제에 대해 1931-32년에 러시아 국가에 모든 공산당이 복속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모든 나라 좌익분파의 실질적 발전이 당이며 혁명적 상황에서만 존재할 인터내셔널의 인위적 구성이 당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한편, 벨기에와 프랑스에서는 이런 흐름이 1930년대에 걸쳐 나타나게 되는데, 1933년 브뤼셀에서 좌익분파의 이론지인 빌랑을 발간한다. 빌랑 주변의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당시의 임무들을 정확히 정의했는데, 첫째, 전쟁에 직면해서 국제주의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 둘째, 러시아 혁명 실패의 대차 대조표를 작성할 것. 그리고 미래의 계급투쟁 부활 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들에게 이론적인 기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것 등이었다.

 

이 시기에 트로츠키와 이탈리아 좌파 입장의 가장 큰 차이는 통일전선 문제였다. 트로츠키에게 통일전선은 코민테른의 가장 높은 성취의 표현이었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정치적 틀을 처음 네 번의 당 대회에 두었는데 반해 이탈리아 좌파는 처음 두 번의 대회에 두었다. 그들 사이에서 드러난 격차는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자 계급 일부를 조직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적이라는 트로츠키의 시각으로부터 나왔다. 하지만, 공산주의 좌파는 이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반혁명세력을 프롤레타리아라 명명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공산주의자의 임무는 노동계급에 공산주의 원리를 명확하게 하려고 투쟁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좌파와 트로츠키 사이의 틈새는 그래서 균열로 결론이 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비타협적 투쟁과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당을 위한 강령적 기초를 세우는 임무를 가장 충실히 수행했음에도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파시스트와 공산당의 이중 탄압 속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1943년 전쟁의 시기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

 

전쟁 중에 창설 한 국제공산당

 

전쟁 시기 감옥이나 가택연금 상태 속에서도 데이먼(Onorato Damen) 주변의 핵심활동가들은 2년 동안 비밀리에 파시스트 하에 생존하면서1945년 국제공산당(PCint)을 창설한다. 국제공산당은 2차 제국주의 학살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이탈리아 좌파의 많은 구성원들이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고, 전후 계급투쟁의 파고 속에서 금세 수천 명의 당원을 얻게 된다. 이때 망명 중인 프랑스 동지들의 대부분이 돌아왔고, ICC의 창설자인 Marc Chirik 주변의 프랑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1944년 파리에서 별도의 분파인 프랑스 좌파공산주의자(GCF)를 창설한다. 프랑스좌파공산주의 또한 강령적 기반은 빌랑과 좌익분파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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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먼(Onorato Damen) : 1893~1979, 국제공산당(PCint)의 창설자>

 

그리고 이탈리아 공산당의 주류였던 보르디가는 스탈린주의를 이탈리아 공산당에 이식한 그람시에 의해 축출된 이래 파시스트 시절과 전쟁기간 동안 집에만 머물러 있었고, 당의 출판물 발행에만 협조했을 뿐 결코 당에는 가입하지 않았었다. 단지 1945년 전쟁의 끝 무렵에 이탈리아 남부로부터 보르디가 주위에 모여 있던 수많은 동지가 당에 가입했을 뿐이다. 1948년 선거 참여를 두고 ‘혁명적 의회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데이먼 그룹과 보르디가 그룹은 대립하기 시작했는데, 이후 소련 제국주의의 특징, 공산당의 성격, 노조개입, 당과 계급의 문제 등에서 대립하게 되고, 데이먼 그룹이 다수의 지지를 얻는다. 하지만, 1949년 이후 보르디가의 노골적인 개입은 당내 반대 블록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3년 후에 또 하나의 국제공산당을 분리하는데 성공한다.

 

보르디가는 1952년 자신의 조직을 설립하고 Il Programma Comunista를 발간한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그 후에 경직된 분파주의를 위한 이론적 정당화를 하면서 자신을 지구상의 가장 유일한 프롤레타리아트 당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분파주의는 분명히 반혁명의 대가 중 하나였다. 한편으로는 어렵게 성취한 정치적 입장 주위에 불변하는 공식의 벽을 쌓음으로써 적대적 환경 속에서 원칙을 고수하는 시도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으로부터 고립되고 소그룹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혁명가들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정한 요구로부터 분리한 써클 정신을 강화시켰다.

 

1930~40년대 반혁명과 전쟁의 암흑 속에서도 진정한 이탈리아의 좌익분파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본질과 공산주의 운동의 전망을 세우는데 공헌했고, 그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이탈리아 공산주의 좌익분파는 단지 양적으로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국제적인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된다. 국제공산당은 파시스트와 반 파시스트에 대해 혁명적 패배주의 입장을 방어했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론과 실천의 측면에서 모두 그렇게 한 유일한 당이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 빨치산으로부터 많은 전투 파를 얻었고 한동안 전후 이탈리아 투쟁에서 수천의 노동자들을 이끌었다.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 대오에 가려지고, 1921년 좌익에 의해 세워진 이탈리아 공산당과 그 주류인 보르디가의 명성에 축소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이들이야말로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로부터 직접 탄생했으며 자본주의와의 피할 수 없는 결전의 과정을 비타협적 투쟁과 혁명적 전통을 지키면서 이어오고 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19세기 말부터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 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당시부터 그 투쟁이 분산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좌익공산주의 세력의 분산은 코민테른과 반 혁명기를 거쳐 1970년대까지 지속하였는데, 68년의 파업투쟁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부활하면서 수많은 그룹으로부터 새로운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시작된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혁명적 일관성을 추구한 좌익공산주의 전통이 새롭게 조명되었는데, 옛 프랑스 좌익공산주의 분파의 공산주의자들은 이탈리아 좌익분파의 옛 그룹들을 고무시켰고, 1975년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6개 그룹이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을 창설한다.

 

한편, 국제공산당도 이탈리아에서의 고립에서 벗어나 세계의 여러 좌익공산주의 그룹들에게 국제회의를 제안한다. 1차 대회는 1977년 밀란에서 열렸는데 이는 단순히 “좌익공산주의 세력의 국제 연결망”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 세계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분산을 극복하고 집중화와 재구성을 위한 국제공산당의 노력이었다. 대회에서는 1936년 그들의 국제대회에서 채택한 정치조직의 계급적 성격을 판단하는 기준을 토론했다. 2차 대회는 6개 조직의 참여와 3개 조직의 동의 속에 1978년 파리에서 열렸는데, 대회 주제는 자본주의 위기와 자본주의 사멸의 경제적 기초, 당의 역할이었고, 보르디가주의 전통의 많은 그룹에게 걸림돌이었던 민족해방투쟁에 관한 토론이 있었다. 3차 대회는 1980년 파리에서 있었는데 자본주의의 위기상황과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전면적 반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노동자정당과 노조 영향의 제거를 합의했다. 1983년부터 공산주의노동자조직(CWO)이 참여함으로써 혁명당국제서기국(IBRP)의 형성을 고무시켰다.

 

공산주의 국제대회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서기국의 결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은1975년 영국에서 만들어졌고, 륄레, 호르터, 판네쿡 등 독일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을 계승하여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이라는 조직이름이 증명해준다. 이 서기국의 형성과 함께, 당의 재건을 향한 과정의 새로운 단계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경험의 교훈에 기초하여 시작되었다.

 

1984년에 작성된 서기국의 강령은 다른 나라의 혁명적 공산주의 그룹들이 결합하는데 기본적으로 인정할만한 원칙적인 내용으로 작성되었고, 서기국의 입장을 다른 지역에 이식하기 위한 복제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룹들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준역할을 하고자 했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할 때 이러한 그룹들이 지역의 조건들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영역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생겨나기를 기대한 것이다. 서기국에는 1984년 이후 프랑스와 독일, 미국, 캐나다와 남미의 그룹들이 가입하게 되고, 국제공산주의흐름과 함께 현재 최대의 국제적인 좌익공산주의 조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제공산주의경향(ICT)은 1983년 혁명당국제서기국(IBRP)으로 결성되었다가, 2009년 국제공산주의경향(ICT)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재 6개국(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미국, 캐나다)에 지부를 두고 있다.

 

국제공산주의경향의 정치적 입장은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 전통에 기반을 두는데, 이는 독일 좌익공산주의 전통에 기반을 둔 다른 조직들과 차이점으로 나타난다. 특히 국제공산주의경향은 이탈리아 좌익의 주류였던 보르디가주의를 극복하고 독자적 좌익분파를 형성한 데이먼주의를 전통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당 문제 등에 있어서는 레닌주의와 보르디가주의 모두를 극복했다고 하는 데이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경제이론은 폴 매틱의 이론을 일부 수용하고 있다. 정치적 입장에 대한 이런 점들이 국제공산주의경향을 좌익공산주의 경향 내에서의 레닌주의 경향으로 보이게도 한다. 물론 국제공산주의경향의 다른 한 축인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은 출발이 독일 좌익공산주의 전통이었기 때문에 양쪽의 장점을 모두 받아들인 것도 사실이다. 특히 좌익공산주의 그룹 중 유일하게 노조문제에 대해 그것의 자본주의적 본질과 자본의 기구화를 인정하면서도, 적극 노조를 이용(노조 자체의 이용이나 노조개조·장악은 반대함)하여 광범위하게 노동자계급을 만나고 그들 안에서 공산주의 그룹을 만들 것을 주장한다.

 

평가와 교훈

 

이탈리아 공산당 운동의 역사를 평가하면서 우리는 코민테른의 퇴행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무게가 오늘날도 여전히 공산주의 운동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과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분파가 혁명이론과 미래의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기초를 세우는데 많은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이탈리아공산당 운동은 혁명적 분파의 역사였고, 개량주의와 기회주의세력과의 투쟁의 역사였다.

둘째, 이탈리아공산당은 출발에서부터 코민테른의 지부로서 인터내셔널 관점을 가졌으며, 코민테른의 타락에 맞서 형성된 좌익분파 또한 이탈리아 분파가 아닌 코민테른 내의 좌익분파로써 자신을 규정했다.

셋째, ‘신질서’와 ‘공장평의회 운동’, ‘옥중 수고’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람시는 이탈리아공산당 창건에 기여했으나, 타락하는 코민테른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좌파와 결별하고 스탈린주의 정책을 이탈리아에 이식시킨 핵심역할을 했다. 그람시 이후의 공산당은 스탈린주의 당, 사민주의 당, 부르주아좌파 당으로 몰락해갔으며, 맑스주의의 연속성과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전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넷째, 이탈리아 좌파의 선구자였던 보르디가는 이탈리아공산당 창건에 공헌했고 이후 타락하는 코민테른에 맞서 투쟁했으나 한계 또한 명확했다. 프롤레타리아독재 강령, 통일전선, 의회주의, 반파시즘 문제에 대해 혁명적 원칙을 주장했으나 당 문제(당의 역할, 당과 계급과의 관계)에서 코민테른 초기의 입장으로 후퇴했고, 파시즘 이후 경직된 분파주의를 강화시켜 혁명세력의 분열을 초래했다. 따라서 그람시의 스탈린주의 행적에 대한 객관적 평가, 보르디가의 전기, 후기사상에 대한 구분과 냉철한 평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보르디가를 넘어섰던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 분파인 데이먼 그룹과 망명 중이던 빌랑주변의 공산주의 좌파들에 대한 온전한 복원과 1970년대 말 일련의 국제대회를 이끌면서 미래의 세계혁명당(인터내셔널) 형성을 위해 노력한 좌익공산주의자들의 공헌을 꾸준히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좌익공산주의 혁명세력의 재구성, 결합과는 반대로 트로츠키주의는 수많은 당파로 나뉘어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며 좌파 분열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들의 다수는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 당의 좌익으로 기능하여 결국 부르주아 정치기구의 좌익을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험난한 역사적 상황에서 탄생하고 비타협적으로 살아남아, 세계혁명과 인터내셔널 건설이라는 혁명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이제 계급투쟁의 새로운 주체와 혁명적 공산주의를 만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자본주의 최대의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부활 속에서 그들은 이미 계급의식의 발전과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혁명적 진전을 위한 새로운 행보를 시작하고 있다. 이 시기에 전 세계에 걸쳐 성장해나가는 전투적 노동자계급과 새로운 혁명가들이 좌익공산주의자들과 만나 소통하고 서로 논쟁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의 대오로 모여 혁명적 공산주의 진영을 공고히 한다면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세계혁명의 전망을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의 형성에 공헌할 것이다.

 

오직 공산주의자(혁명가)들의 세계적인 재조직화와 계급투쟁의 결합만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낡은 껍질을 벗기고 노동자투쟁의 명확한 전망을 밝히는 일을 앞당겨 줄 수 있다.

 

국제주의와 공산주의 원칙을 더욱 명확히 철저하게, 그리고 모든 계급투쟁의 무기로!

 

<출처 :국제코뮤니스트전망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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