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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레닌과 레닌주의

레닌과 레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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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혁명가들이 살아 있는 동안억압하는 계급은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혔고가장 야만적인 악가장 격렬하게 증오하고 가장 파렴치한 거짓말과 비방 캠페인으로 그들의 이론을 받아 들였다그들의 죽음 이후그들을 해가 없는 상징으로 바꾸고말하자면 신성시하고억압받는 계급의 위로를 위해 그리고 후자를 속이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의 이름을 어느 정도 거룩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혁명 이론의 실체를 빼앗고 혁명적인 예리함을 무디게 하고 저속하게 만든다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 기회주의자들은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도용에 동의하고 있다그들은 이 이론의 혁명적 측면즉 혁명적 영혼을 생략하거나 모호하게 하거나 왜곡한다그들은 부르주아지가 수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찬양한다.” (레닌국가와 혁명, 1917)

 

레닌의 시신이 방부 처리되어 모스크바에 공개 전시된 지 100년이 지났는데이는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레닌의 진정한 공헌을 체계적으로 왜곡하는 것과 더불어 '붉은부르주아지의 기괴한 제스처였다시대가 변하면서 러시아는 더는 레닌을 '건국의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제국 붕괴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묻고 있으며()동구권의 많은 국가에서는 '()코뮤니즘화'의 목적으로 레닌 동상이 철거되고 있다따라서 레닌 서거 100주년은 큰 틀에서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위기와 전쟁의 세계에서 '코뮤니즘사상은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지난 수십 년 중 그 어느 때보다 인기가 높은 것 같다따라서 자본주의 너머 세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애매모호한 기념일은 '코뮤니즘'이 라는 개념과 함께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사람을 다시 돌아볼 기회이다.

 

레닌집단적 조직가

 

1870년 레닌은 오늘날 상류층 가정으로 묘사되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ladimir Ilyich Ulyanov)로 태어났다아버지는 농노 출신이었지만대학에 진학하여 교사가 되었다어머니 역시 교사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대부분 시간을 자녀를 양육하면서 보냈다일곱 형제가 있었는데그중 두 형제는 유아기에 사망했다자유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부모의 설득에도 자녀 중 다섯 명은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장남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Aleksandr Ulyanov)는 대학 재학 중 나로드나야 볼랴(Narodnaya Volya)에 가입했는데암살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1887년 차르 당국에 의해 처형당했다이 사건이 레닌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두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는지 모르겠지만그 후 2년 동안 지역 도서관을 뒤져 급진적인 서적을 찾다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저작과 칼 맑스의 자본을 접하게 되었고곧 나로드냐와 맑스주의 연구 서클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은 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혁명 세포와 연구 서클이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었다레닌은 특히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 Plekhanov)와 베라 자술리치(Vera Zasulich) 등이 주도한 '노동해방그룹의 맑스주의 사상에 매료되었다그는 1895년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 연맹을 설립했고곧 체포되었다.

 

감옥과 망명지에서 그는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나로드닉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 경제 문제를 연구했다(사회주의혁명당(SR)이 창당된 이후에도 계속 유지됨). 레닌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 러시아에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존재한다.

• 더 많은 수의 농민이 아닌 노동계급이 미래의 혁명에서 주도 세력이 될 것이다.

• 이 혁명은 사회주의(계급제 파괴를 목표로 한 자본가계급과의 투쟁)와 민주주의(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절대주의와 투쟁과제를 모두 결합하게 될 것이다.

•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던 혁명가들은 이후 과제에 맞서기 위해 하나의 통합된 정당으로 뭉쳐야 했다.

 

사회주의 운동 통일을 레닌 홀로 추진한 것은 아니었으며,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 1차 대회가 민스크에서 열렸다그러나 경찰의 탄압과 내부 다툼으로 인해 새로운 RSDLP는 주로 이름만 존재했다레닌의 수정주의와 경제주의에 대한 비난이스크라를 중앙당 기관지로 만들려는 시도, 1902년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당시 레닌은 러시아에서 부상하는 계급 운동에 개입할 수 있는 정치적조직적 일관성을 갖춘 당을 건설하기 위해 직업 혁명가들로 구성된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주장했다이러한 당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레닌은 동맹 중 일부와 결별하게 되었고, 1903년 제2차 RSDLP 대회에서는 당원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사소한 정의 차이로 인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라는 두 당파가 등장하게 된다그러나 그 이면에는 1905년 혁명에서 드러난 실질적인 정치적 차이가 있었다.

 

레닌혁명적 국제주의자

 

1905년 사건은 정교회 사제에서 경찰 스파이로 변신한 가퐁 신부가 이끄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평화 시위가 차르에게 탄원서를 제출하려는 의도로 별다른 생각 없이 시작되었다그런데 그들은 소총 공격을 받게 되었다이 학살 사건은 러시아 제국 전역 대중의 분노를 일으켜 시위파업봉기그리고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의 창설을 촉발했다. 1905년은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조직에 불을 지피는 시기였다.

 

레닌은 1905년 혁명이 발발했을 때 망명 중이었지만, 1789, 1848, 1871년 혁명을 연구하며 통찰력을 얻기 위해 사건을 면밀히 추적했다그는 러시아 제국의 거리와 공장에서 볼셰비키 동지들에게 파업을 연장하고노동자들이 무장할 것을그리고 군인들이 정부에 대항할 것을 촉구했다차르가 두마(의회)의 설립과 언론 및 결사의 자유를 약속하는 10월 선언을 선포한 후 레닌은 러시아로 돌아왔다그는 이제 당이 새롭게 부상하는 노동계급 요소에 개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민주적 중앙집권주의를 기반으로 당을 변화시키기 위해 싸웠으며모든 상급 기관이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책임을 지며 소환될 수 있도록 했다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같은 당이었지만두마 선거를 통해 분열의 깊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볼셰비키가 봉기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수립을 요구했지만플레하노프와 파벨 악셀로드 같은 멘셰비키 지도자들은 바로 이때 입헌민주당이나 카데트(Kadets)와 같은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요소와 의회 연정을 제안하고 있었다.

 

이 혁명적 열기의 시기에 볼셰비키는 역동적인 조직이 되었고, 1907년에는 4만 명이 넘는 당원을 확보했으며그중 대다수가 노동자였다레닌은 1902년 악명 높은 팸플릿에서 공식화한 전술이 정치적조직적 일관성의 토대를 마련했지만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이야기했다차르가 모든 자유주의 개혁을 되돌리면서 촉발된 반()혁명 시기는 새로운 문제도 생겨났다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세력이 약화하면서 분파주의가 더욱 심해졌다레닌은 다시 망명길에 올랐고그곳에서 당 조직(악셀로드와 멘셰비키 청산파 반대), 맑스주의 정통성(알렉산더 보그다노프와 볼셰비키 사이에서 맑스주의 영향력 반대), 민족의 자결권(폴란드독일러시아 당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녀의 추종자 반대논쟁에 참여하게 된다.

 

러시아에서 점진적으로 부활하던 노동계급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혼란에 빠졌다레닌의 관심은 이제 국제무대로 옮겨져 제인터내셔널 붕괴와 배신의 원인을 파악하고 자본주의 제국주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했다침머발트와 키엔탈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주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고혁명가들이 제인터내셔널로 재결집할 수 있도록 투쟁했다. 2월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러시아로 돌아와 자신의 관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레닌은 러시아 제국 전역에서 다시 생겨나고 있는 소비에트가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을 가능하게 하고더 발전된 서구 혁명과 연대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의제로 삼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봉기해야 한다는 그의 요구는 처음에는 당내 일부의 반대에 부딪혔지만볼셰비키 대중은 이를 열렬히 받아들였다볼셰비키는 당원 수가 급증하여 당시 약 20만 명으로 늘어났고, '소비에트에 모든 권력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점차 운동 내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10월 혁명의 발발은 전 세계에 혁명의 물결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레닌정부의 수반

 

소란스러운 절차 끝에 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회의는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새로운 중앙집행위원회(VTsIK)를 선출했으며중앙 집행위원회에 인민위원회(소브나르콤)를 구성하는 임무를 맡겼다레닌은 이 새로운 기구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볼셰비키는 러시아 코뮤니스트 당으로 재조직하고 제인터내셔널 창당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10월 이후 6개월 동안 소비에트 원칙은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노동자와 농민은 착취와 억압의 체제를 뒤집기 시작했다역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례인 파리 코뮌은 72일 동안만 지속하다가 잔인하게 진압되었기 때문에 본받아야 할 청사진이 없었다그러나 초기의 혁명적 열정이 객관적 현실을 감출 수 없었다노동자들이 물려받은 러시아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수년간의 전쟁과 혁명으로 경제는 엉망이었다뿐만 아니라다른 나라에서 혁명이 실패하게 되면서 제국주의의 개입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1918년 3월에 체결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중요한 최초의 후퇴였다레닌은 페트로그라드 진격을 불과 몇 주 앞둔 독일군의 진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그런데도 이 결정은 당내에서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하는 좌파 사회혁명당(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채택된 후에야 모당과 분열했다)과의 갈등을 야기했다좌파 사회혁명당은 소브나르콤에서 철수하고 독일과의 전쟁 재개를 목표로 봉기를 일으켰다레닌의 팸플릿 소비에트 정부의 당면 과제는 다음과 같이 사고의 전환점이 되었다이러한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여 이제 "움직이고후퇴하고기다리고천천히 건설하고무자비하게 닦달하고엄격하게 규율하고느슨함을 분쇄"하는 것이 과제로 떠올랐다. 1918년 8레닌은 공장 대회에서 연설한 후 최근 해산된 제헌의회 지지자가 쏜 총에 맞았다레닌이 거의 죽을 뻔한 상황에서 소브나르콤은 '백색 테러'와 '적색 테러'에 맞서기로 했다.

 

독일과의 평화조약으로 인해 러시아혁명의 고립이 다른 곳의 혁명으로 해소될 때까지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는 희망은 얼마 가지 못했다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북부에 대한 연합군의 개입콜차크(Kolchak), 랑겔(Wrangel), 데니킨(Denikin)의 백군 정복은 모두 길고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1920년까지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주요 내부 위협이 패배하면서 새로운 '평화 건설'에 대한 희망이 잠시 생겨났지만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공세로 인해 또 다른 전쟁이 발발했다이 시기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전직 차르 관리들이 이끄는 징집병으로 적군을 구성하고체카가 경쟁자 정치 세력을 탄압하고산업계에 1인 경영을 도입했으며농촌에 곡물 징수를 시행하는 등 포위망을 구축하는 방식을 채택했다한편 새로운 제인터내셔널은 러시아 외교의 이해관계에 의해 점점 더 지배되고 있었다러시아 밖에서 혁명이 실패하자 서방에서는 사회민주주의에동방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에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당 내부에서는 당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다양한 반대파가 등장했다(코뮌주의자민주적 중앙주의 그룹군부 반대파노동자 반대파노동자 그룹). 이에 대해 레닌은 혁명가는 전진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후퇴하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이들의 제안 중 일부를 수용하려 했지만이러한 그룹에 대해서는 반대했다그러나 그는 또한 당 지도부의 일부 과잉 행동(보기노동의 군사화에 대한 트로츠키그루지야에 대한 스탈린)에도 반대했다결국엄청난 역경을 딛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존립은 보장되었지만소비에트 성격을 점진적으로 상실하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전쟁과 억압 상황은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를 약화했다지역 소비에트는 회의를 열지 않았고회의를 연다 해도 주로 위에서 내려온 결정에 고무도장을 찍는 수준이었다소브나르콤은 소비에트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기관이 아니라 소비에트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 되었다. 1921년 크론슈타트 봉기는 이러한 부분의 증가로 인해 나타난 하나의 징후였다이 비극적인 진압 이후 레닌은 또 다른 필수적 후퇴로 간주하는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했다전쟁 경제를 시장에 개방하는 것은 수년간의 혼란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을 해결하고 노동계급 기반을 재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레닌의 마지막 저서에는 혁명의 진전 부족과 혁명이 만들어낸 제도의 부적절함에 대한 실망감이 담겨 있다그는 관료주의의 부패에 대한 대안으로 더 많은 노동자를 체제 운영에 참여시키기 위해 다양한 행정 개혁을 제안했다하지만 1922년 뇌졸중으로 두 차례 쓰러진 레닌은 전신이 마비되었다레닌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던 국가 기관의 가택 연금에 가까운 강도 높은 감시 아래서 그는 비서에게 유언을 남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923년 3월 세 번째 뇌졸중으로 활발한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1924년 1월 21일 혼수상태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

 

레닌주의

 

여기에 요약된 레닌의 전기는 혁명의 물결에 올라탔지만혁명이 무너지면서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그림을 그려낸다그가 어떻게 쓰러졌는지그리고 개인으로서 어떻게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는 러시아혁명이 관심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한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하지만 이는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다레닌이 사망할 무렵 소비에트 권력이 당 국가로 전환된 후누가 당을 이끌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전에는 '레닌주의'라는 용어가 구어체로 사용되었다면이제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1924)와 지노비예프의 레닌주의 연구 입문(1925) 같은 팸플릿에서 경쟁적으로 해석이 등장하면서 공식 이데올로기로 만들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이미 1923년 3월에는 당 안팎에서 '레닌주의'를 홍보하기 위해 카메네프가 이끄는 레닌 연구소가 설립되었다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 3인방은 이른바 '레닌 레비'를 통해 트로츠키에 대항하는 분파 투쟁에서 조종하기 쉬운 약 50만 명의 경험이 부족한 당원들을 당에 대거 끌어들였다. 1924년 레닌이 완전히 불참하게 되는 첫 번째 대회인 제인터내셔널 제5차 대회가 열렸다이 대회는 "우익의 위험"과 "극좌의 일탈"에 맞서 "맑스-레닌주의"의 정신으로 제인터내셔널의 "볼셰비키화"를 요구했다트로츠키룩셈부르크아마데오 보르디가헤르만 호르터안톤 판네쿡과 같은 인물에 대해 코뮤니스트당의 볼셰비키 화에 관한 테제(1925)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정치 지도자들이 레닌주의에 가까울수록 레닌주의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서 그들의 견해는 더 위험하다." 1926년 모스크바에 레닌 학교가 설립되어 전 세계의 당 간부들에게 '볼셰비키화기술을 가르쳤다.

 

"볼셰비키화는 ... 맑스-레닌주의(제국주의 시대와 프롤레타리아혁명 시대 맑스주의)가 마침내 이념적으로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 레닌의 죽음은 러시아코뮤니스트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모든 부문에서 맑스-레닌주의 이론의 선전에 큰 자극을 주어야 한다." (1924년 7, '코민테른과 지부의 선전 활동에 관한 제5차 코민테른 대회 테제')

 

모스크바의 책략과 추방을 통해 제인터내셔널 정당들은 모스크바의 충실한 대변인으로 변모했다. 1928년 스탈린은 권력 투쟁에서 우위를 점했고, 5개년 계획 도입과 함께 그의 '일국 사회주의이론이 국가 정책이 되었다그는 1930년대 대숙청을 통해 자신의 정적과 옛 동맹들까지 물리적으로 제거하며 쿠데타를 성공시켰고그 중에는 옛 볼셰비키도 많았다. '맑스-레닌주의이데올로기는 선전과 군사력을 통해 전 세계로 수출되었고특히 국가 통제집단화산업화가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는 저개발 지역(주로 중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모스크바 지배계급은 공식적으로 '탈 스탈린화'와 '레닌주의로의 회귀'를 통해 면죄부를 받으려 했지만중국과 알바니아 같은 곳에서는 이를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어느 쪽이든동서양에서 공식적으로그 이후로 다양한 '인민 공화국'과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가 어떤 식으로든 레닌의 유산이라고 주장해 왔다이러한 해석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스탈린주의자와 마오주의자뿐만 아니라 많은 아나키스트와 평의회주의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요소다.

 

그러나 레닌의 러시아와 스탈린의 러시아를 항상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가장 유명한 것은 추방된 트로츠키와 그의 추종자들이지만이들은 스탈린주의에서 테르미도르주의적 반동만 보았을 뿐 반()혁명은 보지 못했다덜 알려졌지만더 중요한 것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선배들이다.

 

우리의 '레닌주의'와 그들의 레닌주의

 

우리의 경향은 종종 너무 '레닌주의적'이거나 충분히 '레닌주의적이지 않다'라는 비난을 받아왔다오늘날 우리는 명확성보다는 혼란을 일으키는 이 딱지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다혁명이 고립된 상황에서 레닌이 옹호한 타협은 레닌을 비방하는 자들과 그의 선배들이 '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장 간절히 호소하는 타협이다후자는 타협이 객관적 현실에 의해 강제될 수 있다는 사실과 타협을 출발점으로 삼는 정치 강령을 혼동한다.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북부 이탈리아의 공장에서 계급투쟁이 되살아나던 시기에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을 설립한 우리 선배들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다르게 보았다.

 

"우리를 가장 매료시키고 우리의 사고를 자극하는 중요한 인물인 레닌은전술가 레닌이 아니라최초의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이끌면서 다가올 새로운 혁명적 물결에 대한 기대 속에서 사나운 적인 부르주아 세계의 함정 사이를 능숙하게 움직였던 전술가 레닌이다또한러시아에서 여전히 살아남은 자본주의 세력과의 타협즉 그가 항상 고통스러운 후퇴혁명의 행진에서 중단을 고려했던 기발하고 매우 위험한 편법인 신경제(NEP)의 레닌도 아니다레닌우리의 레닌오늘날의 레닌은 4월 테제와 10월 봉기의 레닌이다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싶은 것은 이론가정치가지도자로서 그의 삶에서 바로 이 순간이다." (레닌 오기(Lenin Oggi), 프로메테오(Prometeo), 1944년 2월 1)

 

"우리레닌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이것은 또한 그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토대를 구축하는 요점을 보여준다.

 

• 레닌은 계급투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정치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볼셰비키는 종종 동질적이고 독단적인 정당으로 묘사해 왔지만이렇게 묘사된 당은 스탈린주의 신화다볼셰비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상황에 항상 대응하며 발전하였다.

• 소비에트이미 1905년에 레닌은 당과 소비에트가 다가오는 혁명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그는 1917년에 이 개념을 더 발전시켰다레닌은 최선을 다해 소비에트를 "노동자 국가"로 만든 것이 이러한 소비에트 권력의 존재라는 것을 이해했다.

• 국제주의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 의미를 이해하고노동자 운동 내에서 쇼비니즘민족주의사회애국주의 경향에 대항했다그는 자본주의가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며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적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레닌은 영향력 있는 당 지도자가 되었지만결국 다른 사람들처럼 당의 일원이었다그는 비판에 직면했고때때로 자신이 소수임을 알게 되었으며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1906년 볼셰비키에 가입한 젊은 투사 가브릴 미아스니코프(Gavril Miasnikov)는 창당부터 1921년까지 당 활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볼셰비키는 비판과 반()비판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모든 우상을 타도하라! 대회의지방 또는 중앙위원회에서 비판을 허용했다오히려볼셰비키는 소수가 당 기구에 대항하여 글을 출판할 수 있는 포괄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보호할 용기가 있었다따라서 모든 허풍모든 가십과 모든 추문에서 벗어나고 분명히 하기 위해 그것을 신념을 견지하는 투쟁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배치하기 위해 투쟁을 강화하려고 했다… 1905년과 1917년 사이에볼셰비키의 이러한 관행은 혹독한 세 번의 혁명 과정을 통과했다당의 내부 구조는 혁명에서 살아남은 세력에 제대로 계승되었고이것은 세계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승리로 이어졌다.” (미아스니코프, 1930년 최근의 속임수)

 

10월 혁명의 전제는 언제나 러시아 국경 밖에서 혁명을 비교적 빨리 확대하는 것이었다경제적으로 낙후된 혁명 요새는 아래에서 보여주듯이 다른 곳의 노동계급에 영감을 주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소비에트 권력은 관료제경찰정규 군대가 없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다. ... 러시아에서는 거의 시작하지 않았고 잘못 시작되었다. ... 우리는 유럽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는지어떻게 지향하는지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보여줘야 하며이를 통해 유럽 노동자들은 사회주의를 어떻게 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러시아인들이 가치 있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해야 하며러시아가 잘못하고 있다면 우리 유럽은 더 잘해야 한다. ... 우리는 유럽 노동자들이 그 길에 들어서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그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하되 더 잘할 것이고무게 중심은 형식적인 관점에서 구체적인 조건으로 옮겨갈 것이다." (레닌, 1918년 3월 8강령 검토 및 당명 변경에 관한 보고서)

 

러시아혁명의 비극은 이러한 도움이 절대 없었다는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코뮤니스트당인터내셔널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스스로 점점 더 비상시적이고 임시방편적 성격의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는 진정한 혁명 정당이 가능한 역사의 한계 내에서 기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그들이 기적을 이루어 낼 수는 없다세계대전으로 지친제국주의에 목이 졸리고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 배신당한고립된 땅에서 모범적이고 흠잡을 데 없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은 기적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혁명은 정치권력 정복과 사회주의 실현이라는 문제를 실질적으로 실행하면서국제 프롤레타리아트 선두에서 행진하고 끊임없이 역사적으로 공헌하였으며세계 전체 자본과 노동 사이의 균형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러시아에서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그리고 그런 점에서 모든 곳의 미래는 "볼셰비즘"을 비껴갈 수 없다.” (룩셈부르크, 1918년 러시아혁명)

 

혁명 과정 퇴보의 씨앗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1918년 3월까지 볼셰비키는 소브나르콤에서 대표되는 유일한 정당이었고그 다음 몇 년 동안 지역 소비에트가 공동화했지만, (때로는 선거의 게리맨더링을 통해) VTSIK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지배력을 확보했다사실상볼셰비키는 유일한 통치 정당이 되었고 점점 더 당과 국가의 구별이 사라졌다. 1922년에 레닌은 당 기구가 정부 기구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지만그가 제안한 개선책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고 너무 늦었다단지 소비에트 권력 부활만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지만그것은 혁명 물결의 부활이 요구되는 일이었다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고안되었다(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계급 전체가 아니라 그 전위즉 당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트로츠키는 그 후에 소비에트를 '노동자 국가'로 만든 것은 국유화된 재산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편내전 기간 정당 민주주의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만, 1921년 3월 분파 금지령이 도입되었다고 해서 분파가 즉시 소멸하지는 않았다그러나 그 후 몇 년 동안 정치국과 당 사무국은 스스로 권력이 되어 당 대회와 중앙위원회의 권위를 약화했다이에 따라 권력은 본질적으로 스탈린과 그 분파의 손에 집중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우리는 미래의 인터내셔널은 기다리는 정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집단적 권력기관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전체 노동계급이다인터내셔널은 더 광범위한 운동 지침이 되어야 하며이와 같은 의미에서 집단적 권력기관 내에서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볼셰비키처럼 그 기관을 대신하거나 그 안에 녹아들 수는 없다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 운명을 혁명적 보루에 묶어두는 것을 의미하며혁명적 보루가 자본주의 세력에 굴복하게 되면 세계 혁명운동의 구심점이 되는 것을 멈추게 된다.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또 다른 논쟁은 레닌이 민족 자결권을 옹호했다는 이야기다이는 종종 추상적으로 민족 자결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그러나 그는 민족 자결권이 반동적 목적에 부합한다고 판단하면 반대했으며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억압 민족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피억압 민족이 분리 독립권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국가에 대한 평등권과 국제 노동계급 연대의 인정은 사실상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한 위선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반면에 피억압 민족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피억압 민족 노동자와 억압 민족 노동자의 단결과 통합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며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국 부르주아지의 동맹자가 될 것이다." (레닌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민족의 자결권, 1915)

 

두 번째 조건은 이른바 많은 '레닌주의자'들이 종종 잊어버리는데이들은 타락한 제인터내셔널의 '통일 전선'과 '인민 전선개념을 받아들여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본다우리는 레닌 시대부터 모든 민족 전쟁이 제국주의 경쟁과 필연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보아왔다레닌이 제국주의 시대에도 민족 전쟁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민족 전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면자본주의 발전은 룩셈부르크와 그의 동지들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자유로운 제국주의 시대에는 더는 민족 전쟁이 있을 수 없다국익은 노동 대중을 속여 그들의 숙적인 제국주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작용할 뿐이다. ... 지배계급이 강대국들의 부속물이자 부속품에 불과한약소국들은 강대국들이 벌이는 제국주의 게임에서 졸에 불과하다그들도 노동 대중과 마찬가지로 전쟁 중에 도구로 악용되고 있으며전쟁이 끝난 후 자본주의 이익에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룩셈부르크양자택일, 1916)

 

우리가 항상 반복하듯이러시아혁명은 모방할 모델이 아니라 배워야 할 하나의 교훈이다혁명이 결국 탄생시킨 당 국가는 오늘날까지 노동계급 운동이 회복하지 못한 유산을 남겼다그리고 반()혁명에 직면하여 레닌을 포함하여 혁명에 참여한 사람 중 그 진정성을 온전히 지켜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그러나 이윤의 이해관계로 병든 지구에서 또다시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레닌이 오늘날 남긴 최고의 유산은 그가 러시아 밖의 노동자와 혁명가들에 바랬던 바와 같이 미래 세대가 "더 잘 해 내는것이다.

 

다이즈바스(Dyjbas)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3년 12

 

<출처혁명적 전망」 23, 2024년 1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4-01-21/lenin-and-leni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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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선택적(파트타임) 국제주의’에 대한 간략한 비판

선택적(파트타임국제주의에 대한 간략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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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팔레스타인또는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백 건의 군사 분쟁(1) 등 현재 제국주의가 초래하고 있는 공포는 국제 노동계급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지금 우리는 일반화된 전쟁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현재의 심각한 상황은 진정한 국제주의자들의 단결을 촉구한다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진정으로 국제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한다.

 

이전 글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자본의 좌파 대응이 "제국주의 전선(나토 또는 러시아중 어느 한쪽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거나 같은 입장을 숨긴 가짜 평화주의"라고 비판했다.(2) 우리는 그러한 입장이 전쟁 없는 세상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노동계급을 멀어지게 하는 데만 기여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우리가 자세히 다루지 않은 것은 트로츠키주의스탈린주의마오주의 진영에서 표면적으로 국제주의적 입장을 제시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다. '혁명적 패전주의또는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운 국제맑스주의경향(IMT)(3), 사회주의노동자당(SWP)(4), 그리스코뮤니스트당(KKE)(5), 진보노동당(PLP)(6) 등이 포함된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이 단체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제국주의 사이 전쟁이며따라서 자본주의 한쪽을 지지해서는 안 되고사회주의를 위한 노동계급 투쟁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인식한다여기까진 괜찮다이것은 침머발트 좌파와 10월혁명의 모든 혁명가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준점으로 삼고 있는 척도이다트로츠키주의스탈린주의마오주의 그룹은 반()혁명 산물임에도 계속해서 그 유산을 고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 다른 분쟁에 대한 같은 그룹의 반응을 살펴보면 상황은 더 암담하다. 그리스코뮤니스트당(KKE)은 팔레스타인 투쟁 목표를 "외국의 이스라엘 점령을 몰아내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것"으로만 보고 있으며심지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제국주의 분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일반화된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7) 한편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하마스에 대해 노골적으로 지지를 표명했는데이는 "사회주의적 입장을 채택하는 것을 조건으로한 것이 아니라 '친제국주의 붕괴로나아간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8) 둘 다 우리가 "선택적 국제주의"(9)라고 부를 수 있는즉 어떤 분쟁이 제국주의이고 어떤 분쟁에서 자본주의 세력 편을 드는 것이 허용되는지를 취사선택하는 노골적인 사례다.

 

적어도 중동에 관해서는 국제맑스주의경향(IMT)이 좀 더 일관된 모습을 보인다. IMT는 "두 국가 해법에 대한 지지팔레스타인에 대한 사회주의 계획 부재"를 이유로 KKE를 비판하는 대신 "팔레스타인 대중의 투쟁은 이 지역의 모든 반동적 자본주의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만 성공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10) 그러나 IMT도 비슷한 혼란을 겪고 있다베네수엘라에 대해 IMT는 차베스를 "진정한 국제주의자"이자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칭송했다.(11) 물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러시아의 중요한 군사적경제적 동맹국이었으며 이란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이는 오늘날 IMT가 제국주의 국가로 비난하는 것과 같은 러시아이고, IMT가 '전체주의'로 간주하는 것과 같은 그 이란 정권이다차베스가 '형제'인 푸틴과 아마디네자드(Ahmadinejad)에 아부했을 때 그는 '진정한 국제주의자'였을까?, 아니면 차베스가 국영 TV에서 앨런 우즈의 말을 인용한 것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의 다른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까?

 

진보노동당(PLP)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례다. PLP는 자본주의를 종식하기 위한 민족해방 투쟁의 실패로 인해 이전의 입장을 재고하게 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0세기 내내 반()식민지 투쟁은 정착민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서 민족을 해방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이 전략은 자본주의와 착취를 종식하는 데 실패했다. PLP는 이러한 많은 투쟁을 지켜보고 참여했지만이 전투에서 얻은 이익이 역전되는 것을 목격했다.”(12)

 

드물게 인정하는 경우다그러나 이것이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 과거와의 단절로 해석할 수는 없다. PLP는 현재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 반()제국주의 축이 없다고 보지만소련(1950년대까지)과 중국(1970년대까지)은 여전히 이러한 축을 구성했다고 간주한다(중국코뮤니스트당에 따르면 소련과 중국은 "사회주의국가였기 때문이다). 문제 핵심은 국제주의 문제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사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사회주의를 돈국경계급국가가 없는 전 세계적으로 자유롭게 연합하는 코뮤니즘과 동의어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소련(혁명 물결의 확산 실패로 탄생한 국가자본주의 체제)과 중국(애초에 노동계급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이 기존 강대국의 제국주의 경쟁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혁명의 유산

 

이러한 사례가 전부는 아니지만자본의 좌파 우여곡절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트로츠키주의자든스탈린주의자든마오주의자든 이 모든 그룹은 타락한 제인터내셔널에서 물려받은 일련의 전술적 편법을 받아들인다사회민주주의 정당 입당좌파 정부 참여 또는 지지소련이나 중국이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적'이라는 믿음통일 전선 또는 인민 전선 옹호또는 단순히 민족해방에 대한 지지 등을 통해 '선택적 국제주의'에 도달하든 도달하지 않든다음 질문에 대해 그들은 항상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제국주의 시대에 '피억압국'이든 '억압국'이든 특정 자본주의 세력이 반()제국주의의 한 축을 구성할 수 있을까?

 

우리의 대답은 '아니오'이다이 질문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에도 민족해방 전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물론 제국주의 전쟁으로 변질할 수 있다는 점도 이해했다). 인터내셔널은 터키와 중국 같은 곳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했다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세력(국가 또는 비국가) 사이의 모든 갈등이 레닌 시대보다 훨씬 더 발전한 제국주의 체제에 얽혀 있음을 알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단체들의 표면상 국제주의 입장이 일시적인 정치적 편의주의이든(상황이 바뀌면 버려질), 진정으로 새로운 방향이든자본의 좌파 조직은 오래전에 루비콘강을 건넜다그들은 과거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결국 그들이 모집한 노동자와 자신을 자본주의 사각지대로 이끌 수 있는 공식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전쟁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그리고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군사적 충돌이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는 인식 아래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은 다양한 경향의 진정한 국제주의자들과 함께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위원회를 부활시키는 데 기여했다.(13) 아래 다섯 가지 사항은 공동 활동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 자본주의제국주의 및 모든 민족주의에 반대한다어떤 국가 자본, '덜 악한국가국가가 형성되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 국가임금 노동사유 재산화폐이윤을 위한 생산이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들의 세계로 대체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 현재 전쟁과 앞으로 일어날 전쟁이 노동계급에 가할 경제적정치적 공격에 맞서기 위해.

•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한 투쟁독립적인 파업 위원회대중 집회노동자 평의회의 결성을 위해.

• 억압과 착취에 반대하고노동계급 단결과 진정한 국제주의자들의 단결을 위해.

 

장기간의 어려운 작업이지만, '선택적 국제주의'가 아닌 일관되고 명확한 국제주의 메시지를 이미 벌어지고 있는 계급투쟁과 앞으로 벌어질 투쟁에 전파해야 한다.

 

다이즈바스(Dyjbas)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4년 1월 22

 

<>

(1) https://geneva-academy.ch/galleries/today-s-armed-conflicts

(2)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7-05/the-no-war-but-the-class-war-initiative

(3) https://socialistrevolution.org/no-war-but-the-class-war/

(4) https://socialistworker.co.uk/features/ukraine-year-one-of-a-terrifying-imperialist-war/

(5) https://inter.kke.gr/en/articles/No-to-imperialist-war-Greeces-involvement-must-stop/

(6) plp.org

(7) https://inter.kke.gr/en/articles/Short-answers-to-current-ideological-political-questions-concerning-the-Israeli-attack-and-massacre-against-the-Palestinian-people-in-the-Gaza-Strip/

(8) https://socialistworker.co.uk/features/free-palestine-why-we-say-by-any-means-necessary/

(9) 이탈리아의 동지들이 SI 코바스 기지노조 내에서 나온 팔레스타인 관련 성명을 비판할 때 사용한 용어를 빌려온 것이다.

(10) https://www.marxist.com/the-communist-party-of-greece-and-the-struggle-for-the-liberation-of-palestine-a-necessary-debate.htm

(11) https://www.marxist.com/a-tribute-to-hugo-chavez.htm

(12) plp.org

(13)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7-05/the-no-war-but-the-class-war-initiative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4-01-24/a-brief-critique-of-part-time-intern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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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옥중 선언

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옥중 선언

 

소개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1923년 대부분(2월 3~10월 26)을 로마에 있는 감옥에서 자신과 30여 명의 동료 피고인들의 변론을 준비하는 한편창립 2년밖에 안 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이 직면한 위기에 대한 정치적 선언을 작성하고 전체 당원들이 토론했다는 사실은 이른바 '코뮤니스트좌파진영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보르디가의 체포 이후 당원에 대한 체포와 탄압이 잇따르면서1) 조직이 약화할 수밖에 없었지만이는 보르디가가 우려했던 위기가 아니었다그가 선언문에서 분명히 밝혔듯이더 심각한 위기는 이탈리아 당의 원칙적인 전체의 틀과 그가 정중하게 인터내셔널과 그 집행 조직의 다수파라고 부르는 러시아 코뮤니스트당즉 점점 더 반()혁명적인 소련의 외교 정책이라는 목표를 위해 구성 정당들을 관료적인 '예스맨'으로 만들려는 인터내셔널 내에서 권위적 입장을 꾸준히 행사하고 있는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사이에 균열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물론 이것은 100년이 지난 후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당시 보르디가는 1921년 1월 이탈리아당이 사회민주주의에서 이탈한 이후 인터내셔널이 채택한 전술과 이탈리아당이 채택한 정치적 틀과 정책 사이에 불협화음이 커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인터내셔널과 이탈리아당 내부에서 완전히 공개적인 토론을 요구했을 뿐이다.

 

논쟁의 주요 쟁점은 a) 리보르노 분할이 너무 좌파에 치우쳤다는 모스크바의 원래 불만과 이탈리아 사회당(PSI) '다수파'와의 융합을 통해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b)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인터내셔널 집행부가 처음으로 공식화했고 보르디가가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코뮤니스트가 다른 정당과의 정치적 거래로 정책을 타협할 수 있는 기초가 아니라 집단적 노동자 행동을 위한)으로 이해하기로 한 '통일전선정책을 해석하는 방법. c) 이로부터 전쟁 직후 피우메(Fiume)를 점령했던 다눈치오(d'Annunzio)의 전()파시스트 부대를 모방한 반()파시스트 저항투사 인민군대(Arditi del Popolo)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d) 보르디가가 주로 초안을 작성하고 제2차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 대회에서 다수결로 승인한 로마 테제를 코민테른 집행부가 단지 권고문으로 축소했다.2)

 

이러한 문제 중 그 어느 것도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에서 보르디가의 입지를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았으며비록 인터내셔널의 나머지 이탈리아 대표들이 제4차 세계대회(1922년 11/12)에서 PSI와 원칙적으로 융합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설득'되었음에도 그 자신이 당 지도부에서 사임하겠다고 위협했지만아무도 그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1922년 10투라티(Turati)의 개혁파가 국제코뮤니스트당 대회에서 축출되자 러시아가 원하던 정치적 융합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이 정책은 코민테른 의장 지노비예프(Zinoviev)가 추진하였으며그는 이 정책을 통해 투라티 당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따라서 보르디가를 제외한 '융합위원회가 구성되었다그가 하던 지도부 역할은 지난 6월 '이탈리아 문제'에 관한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 이후 러시아에 머물고 있던 그람시가 대신하게 되었다.

 

1923년 4월 이탈리아 사회당(PSI) 총회에서 그 정책을 부결시켰다.3) 어느 정도 상설화된 인터내셔널의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에서 통일전선을 준수하도록 러시아에서 끊임없이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러시아의 책략에 대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의 정치적 탄력성에 유일하게 균열이 생긴 시기는 1921년 5월이었다이는 인민군대에 대한 신질서(L’Ordine Nuovo)에 실린 기사에서 그람시의 열정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다른 정치조직에 가입하는 것은 당 규약과 양립할 수 없다는 당의 결의문을 발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4) 당시 인터내셔널은 부하린의 방식으로 개입했는데그 방식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이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를 저지르고 있다고 선언하여 불화를 더욱 부추겼다.5)

 

어쨌든 점점 더 러시아가 지배하게 되고 주로 러시아가 자금을 지원하지만국제적인 정치조직이 이탈리아당이 통일전선 정책을 계속해서 준수하지 않아도 용인할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그리고 보르디가가 더 순응하지 않는다면 ... 그람시는 무솔리니의 손이 닿지 않는 러시아에서 치료 기간을 연장하고 코민테른의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에 항상 참석하여 이탈리아 문제 (현재 우리가 재판을 받는 보르디가의 문제로 점점 더 인식되고 있는 문제)를 고려할 수 있었다.

 

전체의 재판 과정은 긴 여정이었다보르디가와 그의 공동 피고인 31명은 국가 전복 음모 및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다적어도 1924년 로마의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이 만든 기록에 의하면 보르디가의 경우에는 장시간의 예비 심리가 있었다보르디가는 당이 지하 본부를 세우려던 프라티나(Frattina)의 한 아파트 블록 밖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3,000리라약 3,000파운드(1923년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액수)를 소지하고 있었다보르디가는 3,000파운드가 크라신(Krasin)이라는 '러시아 담당자'에 의해 송금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자신이 외국 국가의 돈을 받고 있지 않다는 점즉 외국의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곤혹스러워했다.

 

판사 모스크바 집행위원회는 러시아 정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까?

 

보르디가 아니오그 정부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며이제 이 두 기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설명하겠습니다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는 다른 국가에 상주할 수도 있습니다보기를 들어로마의 비아 프라티나(Via Frattina)에 있는 우리 본부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된 경찰이 없었다면 집행부의 본부를 이곳으로 옮기는 것에 반대했을 것입니다기존 인터내셔널은 브뤼셀제네바 등에 본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제인터내셔널은 모스크바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인터내셔널에는 가장 중요한 정당 중 하나이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정당인 러시아 코뮤니스트당이 포함되어 있고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가장 경외심을 갖고 있으며 또한 가장 부러워하는 정당입니다.

 

러시아 정부러시아 코뮤니스트당과 제인터내셔널은 완전히 별개의 조직입니다자금 송금은 여러 국가의 동지들로 구성된 제인터내셔널 예산위원회에서 이루어졌으며우연하게도 이 위원회의 의장은 이탈리아 출신이었습니다그래서 그 금액을 보내기로 한 사람은 실제로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그는 러시아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일 수도 있지만이는 우리에겐 모두 똑같았습니다인터내셔널과 러시아 정부 사이의 차이는 분명합니다우리는 전 세계 코뮤니스트당이 가입된 제인터내셔널에 소속된 코뮤니스트당입니다러시아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다른 나라와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이런 의미에서정부의 조직이 아니라 정부가 인터내셔널의 조직이라는 의미에서또는 적어도 인터내셔널이 정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국가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종속되는 관계가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 러시아 정부와 여러 조직은 인터내셔널 코뮤니스트 운동 문제에서 행동할 권한이 없으며오직 인터내셔널만이 이를 수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러시아 코뮤니스트당 대회와 지도 조직의 지시를 받는 러시아 정부의 정책은 인터내셔널에 의해 논의되고 수정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러시아 정부의 대외 대표에 불과한 크라신과 어떤 교류도 할 수 없었습니다그는 내가 감사하고 존중하는 나의 동지이지만우리와 러시아 국가의 다른 대외 대표 사이에 어떤 관계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와 아무런 조직적 관계도 없는 사람입니다.6)”

 

부르주아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보르디가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러시아 국가 사이의 분리를 강조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그가 이것을 얼마나 깊이 믿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그의 선언문은 '이탈리아 문제'뿐만 아니라 우익으로의 일탈에 맞서 싸우는 인터내셔널 강령조직 및 전술적 문제에 관한 공개 토론이 여전히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실제로 1923년에 일어난 사건은 완전히 반대의 결과를 보여주었다3차 대회 이후 러시아는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올바른결정즉 자본주의 세계에서 러시아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리한 결정이 나오게끔 관료적 변화를 강요해 왔다우리는 1922년 말 인터내셔널 코뮤니스트당과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에서 그람시가 보르디가를 대신해 단순히 교체된 것을 보았지만더 일반적으로는 러시아가 통제하는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위원들이 총회 사이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전에 각 정당의 성원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 현장에서 '선출'했다.7) 또한대회 사이에 보르디가가 선언문을 작성할 무렵이었던 1923년 중반부터 1년에 두 번씩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를 개최하는 패턴이 확립되었는데여기에는 선출직 위원도 포함되었다러시아에서 반()혁명이 일어나면서 '레닌의 당'의 근본적인 목표는 새로 출범한 소비에트 및 지금의 소련 코뮤니스트당(CPSU)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었다한편으로는 러시아 국가의 고립을 깨기 위해 혁명적 봉기특히 1923년 불가리아 사태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독일 10월혁명을 기획하고다른 한편으로는 무역 협정을 체결하여 자본주의 열강과 화해를 시도하는 등 결과적으로 초래된 불규칙한 외교 정책은 언급할 수 없다코민테른 당원들의 충성심이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에 매우 중요해졌을 뿐만 아니라코민테른 내부에서는 소련 코뮤니스트당(CPSU)의 지도력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이탈리아 법정에서 보르디가가 묘사한 러시아는 이보다 더 선명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러시아 정부러시아 코뮤니스트당인터내셔널은 완전히 별개의 조직이다.”

 

좌파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의 다수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러시아가 지배하는 코민테른이 보르디가그리고 필요하다면 당 지도부 전체를 편들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였다러시아 정당의 정치적 방향과 미래 지도력을 둘러싼 내분이 심화하면서 이탈리아 문제는 이러한 책략에 얽히게 되었다보르디가의 구속으로 인하여 확대집행위원회(ECCI)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6월에 그람시는 스코치마로(Scoccimarro), 타스카(Tasca), 테라치니(Terracini), 포르티차리(Fortichiari), 보타(Vota)와 함께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에 참석하여 이탈리아 문제에 대해 연설했다그 결과 우익의 소수파 대표들이 포함된 새로운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 '혼합집행위원회가 임명되었고포르티차리는 이 위원회에 합류하기를 거부했다이 새로운 집행부는 그동안 중앙위원회에 속해 있지 않았던 톨리아티스코치마로타스카보타겐나리(Gennari)(포티차리 대신)로 구성되었다. 8감옥에 갇혀 있던 보르디가와 그리에코(Grieco)는 새로운 집행부의 소식을 듣고 물러났다.

 

이제 보르디가는 이탈리아 당 내부와 외부에서 자기 선언문에 대해 최대한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놀랍게도 감옥에 갇혀 있어도 간단한 암호와 협조적인 교도관을 통해 외부 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후자는 주로 톨리아티에게 메시지를 전달했고톨리아티는 이탈리아의 다른 당원들지노비예프와 부하린을 포함한 코민테른그리고 보르디가는 잘 몰랐겠지만그람시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확대집행위원회(ECCI)의 내용을 충실히 따르는 지도부이탈리아 당을 위한 새로운 지도부즉 타스카로 대표되는 우파에 너무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보르디가와 구()집행부보다는 '온건'한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미 갖고 있던 그람시였다그람시가 보르디가를 약화하려는 첫 번째 움직임이 그람시 자신의 표현대로 파시즘의 승리에 대한 책임은 당신들(, PCd'I 전체)에게 있다는 지노비예프의 확대집행위원회(ECCI) 선언에 의해 타격을 입었다면그는 장어처럼 미끄러지는’ 방법보르디가와 달리 당의 어떤 권위 있는 자리에서도 물러날 이유가 없는 직책을 지키는 전쟁에서 교묘하게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한편 보르디가는 분파 작업을 하는 것은 모스크바의 지시에 대해 공개적으로 대놓고 반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의 대표 자리에서는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그가 감옥에서 석방된 후 1923년 말확대집행위원회(ECCI)의 최고 간부 회의(Praesidium)는 다시 한번 보르디가에게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 집행위 위원으로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보르디가는 어떤 경우에도 전 이탈리아 집행부 전체를 복직시켜야 하는데그들은 그럴 권한이 없으며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코민테른 집행부가 승인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고 응수했다그러나 그 무렵 보르디가는 미끄러지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에 의해 완전히 조종당했다그람시는 처음부터 보르디가의 선언문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톨리아티가 수정하여 제출했음에도 계속해서 서명하지 않았다보르디가가 석방될 무렵에는 다른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다이탈리아에서 러시아를 모방하여 당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이미 9월에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노동자 일간지를 발행하기로 한 코민테른의 결정을 이탈리아 당 집행위원회에 알렸다이는 1924년 2월에 정식으로 창간하여 1926년 제3차 당 대회를 앞두고 좌파에 대항하는 코민테른의 볼셰비키화 캠페인의 수단이 되었다그람시는 이탈리아로 돌아온 직후에 열린 1924년 5월의 특이한 코모(Como) 대회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리옹에서 열린 연정을 위한 일종의 사전에 진행된 리허설에서 좌파(투표권이 없는 유일한 좌파 대표 보르디가), 중도톨리아티), 우파(타스카)를 대표하는 세 가지 논제가 발표되었다.

 

총 65표 다음과 같이(중앙위원회 14연방 및 지역 간부청년 연맹당 언론 및 선전 기관 대표 49표 중 41표가 보르디가 후보, 10표가 우파 후보에게 그리고 중도 후보가 11표를 얻었다투표가 이루어졌다두 명은 기권하였고 한 명의 표는 분실된 것으로 간주 되었다대회에서 선출된 집행부의 일원이었던 보르디가포르티차리(Fortichiari), 레포시(Repossi), 그리에코(Grieco)는 사임했다 하여 투표권이 인정되지 않았고중앙위원회에 불참한 세 명의 위원(겐나리라베라레오네티)이 중앙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 개표에서 확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좌파 논리가 다수의 표를 얻었다이러한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결과는 45 대 8로 좌파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8)”

 

위 그람시에 친화적인 저술가조차 인정했듯이"당 전체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보르디가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분명했다이는 그람시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게 시작된 것이었다."

 

장어처럼 미끄러지는 법을 배운 사람에게는 할 일이 더 많았다인테사(Intesa) 위원회와 그람시에 대한 팸플릿을 참조하라.9) 여기서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대한 보르디가의 적극적인 정치적 저항은 1930년 무렵에 줄어들고 중단되었지만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의 투쟁은 그가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되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이는 많이 가려져 있지만 중요한 역사적 에피소드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다음번에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 최소한 혁명적 인터내셔널을 위한 강력한 틀을 이미 갖추고 있다면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이다둘 이상의 국가에 기반을 두고개별적인 유대를 기반으로 성원 자격이 부여되므로 어느 한 부문의 통제를 받기 쉽지 않은 구조의 조직이다.

 

E. 레이너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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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 소개에서 노트 NO. 1,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들의 재판, 1923, 5:

움베르토 테라치니(Umberto Terracini)는 1923년 2월 13일에 제인터내셔널 집행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일주일 만에 경찰은 5,000명이 넘는 동지들을 체포했다. ... 당원의 1/4이 체포되고지부가 해산되었으며지도자 보르디가 동지를 빼앗겼고당원들이 죽음과 고문의 위협을 받고 있지만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은 이미 당의 작업과 활동을 재개했다.“

아마데오 보르디가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집행위원이 체포되었고(테라치니 외에 브루노 포르티차리안토니오 그람시는 수배된 상태였다), 반란 선동탈영국가 권력 전복 음모 및 계급 증오 선동 등의 범죄 혐의로 로마 형사재판소에 기소되었다재판은 1923년 10월 18일부터 26일까지 열렸으며 증거 불충분으로 피고인들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2)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PCd'I및 코민테른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1925년 인테사 위원회의 강령, 1925년 팸플릿 소개를 참조하라.

3) 세라티는 추방된 후 수천 명의 성원과 함께 단일한 코뮤니스트 분파를 결성했고, 1924년에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에 합류했다그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그는 1926년 코뮤니스트당 비밀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5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 1921년 7월 31일 신질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코뮤니스트들은 인민군(Arditi del Popolo) 운동에 반대하는가그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시켜 부르주아지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가 창출한 새로운 생산력의 조직과 발전을 감독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군대를 창설하기를 열망합니다.” (우리의 번역)

의심할 여지 없는 반()파시스트 동기를 가지고 있고(조직적으로는 원래의 파시스트 아르디티를 모방했지만아나키즘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이 공동 당원은커녕 공식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반면에 파르마의 올트레토렌테(Oltretorrente)와 같은 노동계급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다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및 아르디티 성원들은 종종 무솔리니의 갱단에 대항하여 함께 투쟁했다.

5) 그리에코의 답장에는 부하린이 "... 세컨다리가 이런 반()맑스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동안 코뮤니스트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라고 반문했던 무솔리니의 로마 진격 직후 파시스트들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아나키스트이자 인민군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아르고 세컨다리(Argo Secondari)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었다.

6) 1923년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Il Processo,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로마 1924) 79~82쪽에서 번역.

7) 이는 1921년 6월 22일부터 7월 1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3차 대회에서 결정된 사항이었다더욱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정당 규모에 따라 확대집행위원회(ECCI) 대의원 수를 결정하도록 하여 러시아가 과반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한 부분이다어쨌든 다른 모든 정당은 위원회에서 수적인 열세로 자문하는 상황이 되었지만러시아 당만이 다수였기 때문에 결정하는 투표를 할 수 있었다.

(8) Luciano Beolchi, Dal Partito di Bordiga al Partito di Gramsci, 248

(9) 1925년 인테사 위원회와 오노라토 데이먼의 강령맑스주의와 관념론 사이의 그람시에 대해서는 모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소와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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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옥중 선언문 (1923)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당의 모든 동지에게

 

확실한 신념과 오랜 숙고 끝에 우리는 동지들에게 현재의 성명을 발표하여 코뮤니스트로서의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당은 전체 당원의 참여가 있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위기를 겪고 있다우리는 이탈리아에서 반()프롤레타리아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효율성과 조직의 위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위기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또 다른 위기가 없었다면 당의 주요 기구가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쟁점은 불행하게도 첫 번째 위기의 결과를 더 악화하는 또 다른 위기즉 당의 전반적인 방향에 대한 내부 위기가 개별 전술적 문제에서 이제는 원칙과 당의 정치적 틀 전체 위기로 확대되었다.

 

이 위기는 내부의 불일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당과 현재의 다수파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및 집행 기관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정확히 지금의 위기는 절대적으로 비정상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동지들에게 충분히 정보를 제공하고 기본적인 문제를 토론하고우리 당의 사상과 행동 강령이 무엇인지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 (전체당 앞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당 활동이 마비되고 무력화될 수 있다공개적으로 당 회의를 개최할 수 없고 자유로운 언론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 문서에서 그러한 작업의 시작을 제안하고자 한다.

 

리보르노 대회에서 우리 당이 설립되면서 만들어진 강령은 동지들이 이미 알고 있다그들은 이는 특히 전후 몇 년 동안 사회당의 본질적인 잘못에 대한 당 내부의 비판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다.

 

리보르노 직후 당의 지도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당의 상황과 과제를 어떻게 보았을까당의 이론은 러시아 혁명과 제인터내셔널의 창립으로 부각된 혁명적이고 맑스주의적인 기초 위에서 분명하게 확립되었다국제적 연계의 힘으로 구별되는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투쟁 조직은 구()당에 치명적이었던 전통적으로 피상적무질서개인 분파를 피하는 방식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해야만 했다진지함을 기반으로 냉철하게 성찰하는 새로운 기준이 공동의 대의를 위한 모든 개별 성원의 무한한 헌신과 결합하였다따라서 우리 활동의 가장 큰 문제는 코뮤니스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탈리아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할 전술이다.

 

1921년 초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사회당의 결함으로 인해 우리와 같은 소수 정당이 혁명적 공세를 펼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타협적인 상황이었다그러나 당의 활동은 부르주아지의 공세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가 최대한의 저항을 끌어내고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투쟁력을 당의 기치즉 재건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가진 당을 중심으로 최상의 상태로 집중한다는 측면에서 구상할 수 있었고또 그래야만 했다.

 

코뮤니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즉 어떻게 하면 산업주의자들의 공세에 맞서 프롤레타리아를 방어하는 단결을 최대한 보장하고동시에 이미 이탈리아 대중의 슬픈 경험이었던 모순된 지침으로 인한 안타까운 융합을 통해 대중이 겉으로 보이는 단결의 망상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우리는 반동과 파시즘에 대항하여 코뮤니스트가 노동자 조직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역사를 여기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프롤레타리아트의 추종자를 가진 다른 정당의 행동 때문에 시도는 실패했지만적어도 사실에 근거하여 이러한 실패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전투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코뮤니스트당에 모이는 경향이 증가함으로써 우리가 이득을 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선전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분명하게 코뮤니스트의 지도를 받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한 적이 없으며이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코뮤니스트가 다른 정당의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할 것을 제안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에 이루어진 이러한 실험의 결과는 당과 인터내셔널이 논의하여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고 대차대조표를 정확하게 작성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위험은 "당의 전술이 잘못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를 초래했다"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질문이 사라진다여기서 핵심은 다른 정당의 누구도 선의와 다른 자질을 부인하지 않는 한 개인의 활동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즉 전체 경험의 중요한 부분맑스주의 정당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이탈리아 역사의 현 단계에서 국제적 의미에 의해서만 더 중요해진 부분에 관한 판단이다이는 또한이러한 실험의 결과가 나온 후 당이 그 구성 기반을 검토하고 수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그리고 지난 1년 간 이탈리아 정치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즉 코뮤니스트당이 되돌리기에는 너무 깊고 오랜 원인에서 비롯된 사건의 진행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언급한 후우리가 리보르노에서 수립한 노선은 잠시만 따를 수 있었다는 점을 즉시 지적해야 한다여기서는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함을 동지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질문의 개요를 제시하고자 한다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 ‘인터내셔널’ 코뮤니스트 전술에 대한 이탈리아 당의 입장은 인터내셔널의 입장과는 다르다.

· 이탈리아 상황에 대한 견해 차이는 전술의 한계를 넘어 당 조직의 토대를 훼손하기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이다.

· 인터내셔널은 전술에 관한 정책을 수정했고지금도 수정하는 과정에 있을 뿐만 아니라이제는 강령과 기본적인 조직 규범도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요점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이는 로마에서 열린 당 대회(1922년 3토론을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당 대회에서 승인된 전술에 관한 논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두 번째 요점은 당원들이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프롤레타리아 운동 내에서 이탈리아에 적용될 전술 문제의 차이점은 최근에 그리고 매우 느리게 나타났다제 3차 대회에 참가한 이탈리아 대표단은 인터내셔널의 전술에 이미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당시와 그 이후까지 당의 구체적인 활동은 여전히 인정되고 찬사를 받았다.

 

나중에 '통일전선'과 '노동자 정부'라는 슬로건에 직면 한 우리 당의 노선은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두 가지 근본적인 초석의 사실에 근거하여 전술적 방법과 선전의 본질 사이의 충돌을 피하는 기준을 근거로 수립했다즉 "프롤레타리아트는 코뮤니스트당과 그 지도부의 정책을 지지함으로써만 부르주아지를 이길 수 있다"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혁명적 독재에 의해서만 건설될 수 있다는 것그래서 우리는 인터내셔널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했을지는 결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노동조합 통일전선선'에 참여하고 기회주의의 그늘에 맞서 공개적으로 캠페인을 벌였다.

 

인터내셔널은 때때로 구체적인 비판을 하기도 했고심지어 1922년 6월에는 당이 '노동자 정부'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이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가명'으로 규정할 정도로 비판했지만이후에 실제로 그것은 장관과 의회 참여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노동조합과 파시즘에 대한 문제에 대해 인터내셔널이 우리에게 대신 무엇을 하라고 요구했을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대 강령주의 정당과의 융합 문제로 인해 이견은 더욱 깊어졌고상당히 중요한 분야로 확대되었다우리는 당의 '계보'가 리보르노에서 당이 설립되었을 때 역사적으로 확립되었다고 보았고당의 주요 목표인 다른 프롤레타리아 요소의 유입은 다른 운동에서 그들을 끌어내어 우리의 정치적 틀에 편입해야 한다고 항상 주장했지만다른 정당과 대중적으로 융합하려는 어떤 생각에도 반대했다또는 우리 대열에 합류하게 하는 대신 그 안에서 지지자들을 일부 만들려는 시도(우리는 '침투'나 세포 건설에 반대했다), 오늘날 인터내셔널은 리보르노를 일시적인 해결책으로 간주하고 사회당의 다른 '일부 조직'을 대중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그것에 따르면최대 강령주의자들은 개량주의자들과 분리되기를 주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와 분리되었다우리가 보기에 최대 강령주의는 개량주의만큼이나 위험한 기회주의의 한 형태이며그 전통과 주도 세력에 비춰볼 때 결코 혁명적이지 않고 무능과 관성 상태를 가장한 기만적인 말로 대중을 계속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다인터내셔널은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입지를 잃고 당원 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최대 강령주의를 인정함으로써 상황을 바꾸고 국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우리는 이를 (측근들의 비열한 지도자들에 의한패배주의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불가피한 후퇴에도 불구하고 다른 정당의 청산으로 강화된 코뮤니스트당의 우위를 유지하고 싶었다.

 

이러한 사실은 최대 강령주의자가 조직을 혁명적 기반 위에 올려놓고 인터내셔널과의 유착을 충직하게 받아들인 것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보여준다예전에는 이것이 세라티 (일반적인 코뮤니스트 경향의 출현을 막음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우리는 세라티 자신이 당에 의해 또는 오히려 최대 강령주의라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는 수십 명의 지도자에 의해 제거되는 것을 보았지만후자는 그들이 잡혀 있는 그물을 찢어야만 이길 수 있다그리고 그들은 ... 코뮤니스트들이 융합을 막았다고 말한다 !!!

 

인터내셔널의 이러한 입장이 이탈리아에서 어떤 결과를 불러왔을까통일전선으로 인하여 당의 전술적 작업이 방해받게 되어 그들이 우리 전술에 얽매여 있던 상황에서 벗어날 기회를 다른 당에 제공했다그들은 코뮤니스트들의 제안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감추기 위해 '정치적연합을 제안했다노동총동맹과 노동동맹 내부에서 최대 강령주의자들은 모스크바가 이들에게 그러한 정책의 고수를 권유한 덕분에 오랫동안 지속해 온 치명적인 실수를 이어가면서 개량주의 게임을 하고 마지막까지 노동자들을 속일 수 있었다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1922년 8월의 운동을 매우 다른 지반 위에서 재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1922년 7월 제노바에서 열린 (노동연맹 회의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그곳에서 개량주의자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다수파들은 의회 협력에 반대하는 선언을 하는 대가로 그들의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는데이는 프롤레타리아 행동도 협동도 안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공식만큼이나 해로운 것이었다분명히 세라티와 다른 사람들은 투쟁에 대한 오래된 혐오감 외에도 인터내셔널에 다시 가입하는 대가로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조금씩 교환하면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우리에게 합류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 남아있도록 초대받은 제국제주의 분파의 형성은 기본적으로 모호성을 영속화하는 데 기여했다결론적으로개량주의로부터 분열 이후 사라졌어야 할 최대 강령주의 정당은 인터내셔널과 반복되는 제안을 조롱하면서도 아무런 약속도 이행하지 않고 안일한 기회주의로 상황을 악용하고 있다안타깝게도 이 어려운 시기에 노동자들의 관성적 경향을 악용하여 몇 가지 혁명적 문구를 통해 수동적이며 가식적인 충실함의 기치를 내걸고 어느 정도 노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것은 상황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최악의 무력감 속에서 스스로 소진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세력이다.

 

그리고 비록 통합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더 심각한 이유로 당원 수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이기는 하지만노동자들이 코뮤니스트당에 호감을 갖는 경향을 보이는 특정 상황에서도 인터내셔널의 정책으로 인해 코뮤니스트당이 이점을 얻지 못하게 했다따라서 8월 파업 이후 인터내셔널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여전히 사회주의 분열의 가능성이었고어떤 의미에서는 파시즘의 출현과 우리 당에 반대하는 반동적 행동이 일어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그 대신 우리 당은 심각한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고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모든 가능성과 모순되는 위화감이 커지고 있으며 활동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의회 체제에 종속되어 있다더욱이 인터내셔널과의 차이로 인해 이른바 '소수파'라는 흐름이 형성되었는데이들은 정통 코뮤니스트로 위장했지만실제로는 리보르노 이후 낡은 사회주의 방식에 다소 집착하고 (새로운서투른 작업과 책임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 고상하고 근거 있는 주장이 아니라 난폭하고 때로는 조용한 험담으로 인터내셔널의 테제를 지지해 왔다.

 

이 모든 결과로 당은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러한 부분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이러한 융합주의접근 방식의 결과는 리보르노에서 발생하여 명예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2년 넘게 투쟁해 온 당을 청산의 위협에 빠뜨리고 있다이는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장 사악한 최대강령주의적 '중도주의'의 늪으로 다시 빠뜨릴 것이며이탈리아 노동계급은 이러한 시련의 과정에서 미래에 필요한 경험조차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좀 더 일찍 경고음이 울렸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전술적 문제에 대해 앞에서 말했듯이 실제로는 이견을 좁히기 어려웠다인터내셔널의 방식은 어떠한 구호를 한 번에 하나씩 제시하는 것이었지만우리는 더 넓은 범위에서 정의하는 표어를 사용하고자 했다융합과 연속적으로 이어진 사회주의 대회에서 제시된 다양한 대안과 관련하여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보기를 들어, 1921년 이후에는 더는 융합을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인터내셔널 분파와의 관계조차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공식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1922년 말에 이르러서야 이 분열이 심각하게 드러났고이후 사건들을 통해 당이 거의 인식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그리고 최근에는 길고 고통스러운 협상과 개인적 성격에 지나지 않는 편법을 통해 도출된 미봉책이 아닌인터내셔널 내에서 폭넓고 진정한 토론을 통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졌다.

 

최소한 우리가 검토하기 위해 제안한 일반적인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3차 대회 이후 등장한 인터내셔널의 새로운 전술적 구호(제 4차 대회에서는 전술적 테제를 논의할 시간이 없었다)의 의미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이는 강령과 원칙에 대한 변화의 위험, 1924년 강령과 규약의 문제가 반복적으로 연기된 것에서 분명한 위험성을 수반한다동시에조직 규율의 심각한 문제는 많은 정당과 중앙과의 관계에서 불쾌한 내부 위기를 초래하는 무미건조하고 때때로 불연속적인 절차가 되었다.

 

이는 매우 심각해질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우리는 아마도 인터내셔널 진영에서 위기의 전야를 맞이하고 있으며우리 이탈리아 당은 위기에 깊이 빠져있다이러한 비정상적인 조건은 중앙 기관이 수행하는 규율을 잠시도 중단하지 않고 모든 성원 앞에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진지한 사항을 고려하여 가능한 한 더 자세히 밝힐 것을 약속하며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정 사항에 대한 동지들의 지지를 모으려고 한다.

 

현재 상황에 보이는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당을 위한 투쟁 경험의 가치와 당의 강령적 및 전술적 초점에 대해 당 내에서 광범위한 토론과 협의를 끌어내기 위해.

인터내셔널의 강령조직 및 전술적 행동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고우파의 수정에 맞서 싸우며무엇보다도 지침을 결정할 때 최대한의 분명함을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토론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공동의 평가를 수행하여 당의 활동을 안내할 완전하고 분명한 계획이 작성되도록 한다이를 바탕으로 모든 성원이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역량을 가장 합리적으로 투입하여 이전의 심각하게 불안정한 상태가 된 이유와 원인을 극복함으로써 당의 업무와 효율성을 강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시작될 것이다.

 

이 토론이 공동의 원칙에 기초한 일련의 결정에 대한 실질적인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다면인터내셔널 대다수의 의지에 따라 코뮤니스트 성원으로서 우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우리는 당의 주요 조직이 그들이 적용하도록 요구되는 지침(이러한 지침은 일관된 방식으로 그리고 적용해야 할 지침에 대해 완벽하게 확신하는 동지들에 의해 작성되어야 한다)에 따라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의 주요 조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사항

 

이 문서를 받은 동지들이 복사하여 당원들에게 배포하고 이 글도 복사해 주었으면 한다.

 

동지들은 이 문서에 대한 동의 또는 반대 의견그리고 이 문서와 관련된 모든 통신을 이 사본을 준 동지를 통해 보내주시오답장은 같은 방식으로 전해질 것이다.

 

이 문서는 당 중앙위원회와 인터내셔널에 발송되었다.

 

해외에 전파하게 된다면 이는 또한 큰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다번역을 해주시는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발기인들

1923년 여름감옥에서 작성

 

혁명적 전망」 22

2023년 8월 14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8-14/amadeo-bordiga-s-prison-manife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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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6강>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전복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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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6강>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전복의 전망"
 
 
강사 ㅣ 윤태상
 
일시 ㅣ 2024년 9월 28일(토요일) 오후 2시
 
신청 ㅣ https://forms.gle/Yk1fp4297LCd1z7U8 (줌 병행) 
 
 
(이메일 문의 및 신청 : communistleft@gmail.com)
 
 
자본주의 체제 전복 없이 기후정의, 체제전환 없다!
기후정의를 위한 체제전환은 혁명을 통한 코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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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창간호] 의식의 문제 : 당 계급 토론을 위한 기초

의식의 문제 당 계급 토론을 위한 기초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랑스 코뮤니스트 사이 일련의 토론 부분을 담은 글이다특별히 이 글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내부 분파로 부르는 동지들이 제출한 문서에 대한 답변이다그 분파가 ICC에서 탈퇴한 지 몇 년이 지났다글 끝에 실린 인용문은 그 내부 분파의 문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의식의 문제는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 문서는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만을 다루고 있다그것은 1차 세계대전 후의 혁명들의 실패특히 러시아혁명의 실패라는 불행한 유산 중의 하나다다시 말해 자본주의에 맞서는 강령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끈 당에 대한 모든 생각이 신뢰를 잃었다는 점에서 그렇다볼셰비키(나중에 코뮤니스트)당이 자본주의 반(反)혁명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은 1917년 지주자본가그리고 사회민주주의 협력자들의 임시정부를 전복하기 전과 전복 과정에서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명료한 표현으로서 수행한 역할을 흐려버렸기 때문에 사실이다당이 점차 계급의 기반을 대체한 러시아 내전(1918-21)에서 벌어진 일들은 당이 사회주의를 위한 선전을 확산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맞서는 반란으로 이끄는데 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선진적이며명료한 부분이라는 전반적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게 만들었다당이 봉기를 이끌고 당의 임무를 시작하기 위해강령으로 계급에 되돌아간 인간의 대대적인 변혁만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이는 말 그대로 노동계급의 절대 다수의 작업일 수 있고 또한 말 그대로 사상의 생산의 주인(자본가계급)이 극복되는 시작일 수 있다이러한 생각의 확장은 혁명적 전망(21-30)에 게재된 계급의식에 대한 연재물에 실려 있다이는 수정되어 소책자로 재출간될 것이며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에서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 중에 있다.

 

의식의 문제는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 분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그 관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방법론적 정식화의 실질적 차이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에 그 차이가 존재한다면 몇 가지 기본적인 개념을 여기서 다시 서술하는데 논의를 한정하려고 한다.

 

 

첫째혁명혹은 코뮤니스트 의식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이 개념은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서 즉자적’ 계급의 의미만을 뜻하지 않는다그것은 착취당하고 있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깨달음과 그 착취를 끝장내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코뮤니스트  의식은 자본주의 생산과 분배의 관계가 부과한 예속의 조건을 실질적으로 극복하는데 필요한 시간의 길이수단투쟁의 형식전술전략과 정치 강령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인식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또한 코뮤니스트 의식은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고 있는 정치적 형식을 극복하는 것을 뜻한다맑스의 말을 빌리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계급투쟁의 역사는 객관적 조건에 의해 떠밀린 프롤레타리아트가 당면한 이해를 방어하는 기반 위에서 싸울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싸워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그 역사는 또한 투쟁의 도구를 줄 수 있고 계급투쟁의 궁극적 결과인 봉기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그러나 총체로서 완전한 계급의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다른 말로 그것은 전술적이고 전략적인 문제를 풀 수 없고 혁명당이 그 안에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정치 강령에 도달하기도 어렵다.

 

올바른 유물론적변증법적 해석으로부터 관념적기계적평의회적경제주의적 입장을 구별해 내는 것이야말로 의식의 문제이고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 문제이다본질적인 문제는 특정한 수준에서 정치적이 될 수 있고스스로 피할 수 없는 의식의 성숙으로 이끄는경제적 요구 투쟁의 발전을 통하여의식이 계급의 내부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다또는 계급 외부로부터 의식이 들어온다면그것은 계급의 바깥에서 당이 만들어지고 혁명적 정치의식의 위로부터 주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가 이러한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이 계급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당면한 경제적인 계급의 모든 요구를 종합하고 역사적 과업에 속하는 요구를 종합하는 것은 더 진전된 논의의 부분이다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만이 그 의식은 외부에” 존재한다사회학적 구성으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든소부르주아든부르주아지에서 나온 지식인이든 간에당은 계급 안에서 태어난다당은 조그만 경제적 요구로부터 완전한 정치 강령에 이르게 하는 보다 보편적인 전략적 요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투쟁의 요구를 스스로 만든다당의 정치 지식은 다양한 계급 경험의 역사적 종합의 결과이다그것은 승리의 원인을 맨 앞에 내세우듯이 패배의 원인으로부터도 배운다그것은 매일 계급투쟁의 뒤틀림과 반전으로부터 때로는 숨겨져 있거나 본능적이고 부문적인 계급투쟁으로부터 나오는 충동 뒤에서 이끌어낸다당은 전 계급에게 정치적 전술과 전략을 통해 이 계급투쟁의 경험을 되돌려준다이처럼 그 관계는 계급과 그로부터 분리되고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와 더 앞서는 사려 깊은 부분 속에서계급 스스로 내부에서 형성되는 관계다이러한 앞선 부분은 아래로부터노동자로부터 충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치적 전략으로 만들어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부분으로서의 당이다.

 

이는 투쟁하는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이 일정 정도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그러나 특히 오늘날 같이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지배 아래에서 경제적 요구의 부분적 측면과 계급투쟁의 최종목표에 대한 세계적 전망의 결여가 당의 존재를 요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당은 세계적 계급의식을 제공하고 있으며전위로서 당 내부부터 그 의식을 만들 수 없다면 계급의 적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의식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의식은 하늘로부터 떨어지듯이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왜냐하면 당은 계급 밖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의식은 변증법적으로 연관된 두 가지의 분리할 수 없는 계기의 산물이다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계급의 정치적 도구로서의 당이 항상 존재해야 하고계급투쟁의 매 순간에 정치적 준거가 되도록 추구해야 한다우리는 혁명을 향한 계급투쟁의 정치적 진화가 당 없이 일어날 수 있다거나 당이 단순히 조직자이며 전 계급이 독립적으로 정치 강령과 그를 실행할 수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투쟁을 일반화할 뿐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우리는 또한 당을 기껏 대부분의 반혁명 시기에 연구센터로 여기면서 오직 혁명 시기에만 그 필요성을 설파하는 논지를 위험하다고 본다이는 객관적 조건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프롤레타리아트를 투쟁으로 강제한 후 주요 경제위기가 당을 만드는 시점과 두 실체 사이의 모든 연결고리를 기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이 경우에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그 투쟁의 과정에서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또는 너무 늦게 만들어진 당 때문에 정치적으로 유린되었고유혈적으로 억압되었는지를그리고 하루에 날조될 수 없는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심각하게 지체함으로써 계급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객관적 조건은 계급투쟁을 작동하게 할 수 있다그 조건들은 계급과 당 사이의 관계를 편하게 하고 강화할 수 있다그러나 그 조건들은 무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만약 그럴 수 있다면 어쨌든 너무 늦은 것이다아주 한참당은 봉기 단계 전에 역사적 시기에 이미 존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당은 계급 자체와의 관계를 작고사소하지만 효과적으로 세우는 데 성공해야 한다그렇지 않을 경우 사건들위기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 의지는 이른바 당에 의해 쥐어질 수 없다그래서 그 모든 결과로 또 다른 정치적 패배로의 길을 닦을 것이다이는 계급투쟁의 앞으로의 소생을 어렵게 만든다왜냐하면 당이 계급의 부분즉 계급투쟁의 일시적 도구가 아닌 영속적 도구이기 때문이다당이 계급과 함께 성장하고 정치적 지도력을 줌으로써 계급과 함께 진화하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패배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당이 오로지 계급투쟁이 시작된 후에만 만들어지고 그 투쟁과 함께한다는 이론을 지닌다면 패배는 더욱 확실해 질 것이다계급투쟁이 사라지거나 낮은 수준의 투쟁만이 있는 시기에 그늘과 같은 후퇴가 있더라도.

 

이는 당이 당 주위의 사회적 맥락과 독립적인 자율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엄청난 반혁명 시기에 당과 계급을 통일하는 박약한 관계는 깨어지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의 적에 의해 패퇴되어 당은 말 그대로 지워져버린다그러나 이는 그 상황에 따른 최소한의 정치적조직적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수행하는데 더욱 진전된 요소들을 막아낼 수 없다당은 개입되거나생성하고 사라지는 조건들을 선택할 수 없다반대로 경제적사회적 조건들은 계급투쟁의 리듬과 당의 개입 가능성의 정도를 규정한다그 수위가 어떠하든 계급투쟁을 위한 준거가 되려는 시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투쟁의 요구를 궁극적 요구로 만드는 것 외에 경제투쟁에서 당의 주요 임무는 투쟁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다른 말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 투쟁이나 방어적인 경제 투쟁은 경제적노동조합주의적 투쟁을 정치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피할 수 없는 필요조건이다경제 투쟁은 요구수준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을 일으키고 정치적 적을 떠나지 않으면서 쇠퇴한다계급의식의 더 높은 수준에서 다음 투쟁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정치적 지식으로 어떠한 경제투쟁도승리하든 패배하든 간에변혁시키는 임무가 있는 혁명당의 개입이 없는 한 그렇다는 뜻이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면당의 우선성은 당면 요구라는 자연스러운 영역으로부터 계급투쟁을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투쟁이 착취의 의식과 계급의 적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으로 볼 때조직적 측면이나 정치적 수준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그 투쟁을 유발시킨 경제적 상황을 넘어서 나아가지 않고계속해서 요구투쟁의 틀 안에 머무르게 된다이러한 의미에서 당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며그와 더불어 혁명적 습격으로 이끌고  코뮤니스트 강령을 정교화하는 전략적 준거의 틀로서 당의 역할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정식화가 가능하다.

 

노동계급이 당면한 경제적 이해를 방어하는 투쟁을 하게 될 때그것은 객관적으로 계급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의식의 문제를 결정한다.”는 정식화는 의식의 문제에 관한 당과 계급 사이의 이 관계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만일 그렇다면 계급의 경제적 요구는 스스로 전술전략그리고 코뮤니스트  강령으로 구성되는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의식을 기계적으로 결정할 만큼 충분하다그렇다면 당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모든 것이 계급의 운동과 그 역사적 역할의 독립적 성숙에 위임되기 때문이다현실적으로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경제적 수준으로부터 정치적 수준으로 투쟁을 연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질적인 도약을 수행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부분인 계급 전위곧 당이기 때문이다.

 

위와 똑같이 다음의 정식화도 허약한 주장이다.

 

경제적 요구투쟁은 계급과 그 투쟁의 역사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표현다시 말해 일정한 발전의 수준에서 계급정당이 되는 정치적 표현으로 나타나는계급의 경험을 종합하고 이론화하기 위한그리고 일정한 수의 노동자를 지배이데올로기의 혼돈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의식을 위한 객관적 조건이다.”

 

이 경우 당의 역할은 우선적으로 계급에 맡겨지고 그래서 당은 계급 스스로의 정치의식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미 결정된 역사적 단계에서만 만들어진다당은 계급 투쟁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그리고 전술과 전략이 된 것도 그것이 갇혀 있는 경제적 우리를 부수면서 계급을 혁명적 길로 되돌리는 일련의 경제투쟁그리고 그것의 종합과 정교화의 역사적 성과가 된다그러나 당은 전체로서 계급이 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독립적으로 끝내고 난 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또한 당은 계급투쟁이 매번 반복되는 동안 이미 결정된 진화적 과정을 논리적으로 끝내고 나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계급관계는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다반대로 코뮤니즘 이론과 실천의 기본에 대한 근본적 동의와 명료성은 우리가 열정적으로 바라는 어떤 것모든 일관된 혁명적인 힘이 함께 오는 과정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Bilan & Perspectives No. 6 (2005년 12월)

번역 ㅣ 오세철

 

<원문 출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23호,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 2005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05-06-01/the-question-of-consciousness-a-basis-for-discu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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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5강>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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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5강>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Ⅱ“


강사 ㅣ 윤태상

일시 ㅣ 2024년 8월 10일(토요일) 오후 2시

신청 ㅣ https://forms.gle/Yk1fp4297LCd1z7U8 (줌 병행) 


(이메일 문의 및 신청 : communistleft@gmail.com)


쇠퇴기 자본주의 위기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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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3부-하)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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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와 저개발

 

케인즈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떤 경제 체제도 원하기만 한다면 완전 고용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했는데그는 종전이 1930년대 규모의 실업을 다시 불러올 뿐이라 예측하고 공포에 질렸다그러나직후의 사건을 고려하면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2차 세계대전 중의 대규모 생산력의 파괴는 경제적 회복의 새로운 기반을 제공했다.

 

유럽 철도 노선 전체 곳곳의 철도 조차장그리고 항만 시설들이 폐허로 남겨졌다기계는 끊임없이 사용하고 수리하면서 낡아 소모되었다광산은 무자비하게 착취되어 전쟁 이전 효율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초인적 노력이 필요했다농업은 토지 착취로 수확은 형편없었다대부분 나라의 노동력은 상당한 손실을 겪었다.”(16)

 

독일일본그리고 이탈리아가 전쟁으로 황폐해지는 동안대부분 승리한” 열강들의 경제적 기반 또한 그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소련은 12백만 명의 군인과 8백만 명 이상의 시민을영국은 1,180만 톤의 선박 운송품프랑스는 전체 국부의 45%를 잃었다예외는 미국이었는데전쟁은 생산을 엄청나게 부양했으면서도 산업 기반은 훼손하지 않았다비록 전쟁이 그동안 축적할 수 없었던 미국의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을 대규모로 평가절하했으나생산 수단이 물리적으로 파괴되지는 않았다이것이 미국에 전후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경제적 형태를 멋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주었다그것은 상당히 불균등한 두 제국주의 블록으로 나누어진 세계가 되었다 소련과 동유럽 위성 국가들이 한 편에 있고미국과 그 유럽 동맹국들이결국은 당연하게도그들의 식민지들을 빼앗아 다른 한 편에 있었다심지어 루스벨트 이전에도처칠과 스탈린은 1945년 2세계를 나누기 위해 얄타(Yalta)에서 만났고미국은 (뉴 햄프셔브레튼우즈에서 다른 서유럽 국가들을 중무장시키고달러를 국제 무역의 새로운 기준으로 받아들이게끔 했다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구성원 국가들은 자신들의 통화를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고정했고양 세계대전 사이 동안 근린궁핍화정책(“beggar-my-neighbour”)의 통화 평가절하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확신시키기 위해미국은 1온스당 35달러 가격으로 달러를 금에 고정했다조약의 요점은 세계은행(World Bank)이 설정했고세계은행은 IMF의 채권자로서 필연적으로 달러로 거래했다.

 

소련은 1947년 최종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고, UN 총회에서 러시아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Gromyko)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월 스트리트 분점이며세계은행을 하나의 거대한 강대국의 도구가 되는 정치적 목표에 종속되었다라고 비난했다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이 이제 대부분의 유럽과 아시아 커다란 부분을 포함한 영토를 통제했지만그것은 전쟁으로 부상한 약한 제국주의였다미국 달러의 헤게모니로부터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차지한 영토의 통화를 교환 불가능한 것으로 남도록 보장했다.

 

소련이 해체되어 그들이 동독으로부터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불변 자본을 러시아로 수송하는 동안미국은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생산 기반이 온전한 유일한 강대국으로 미국 문제는동맹들이 자신들의 경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더는 미국의 상품을 구매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경기 후퇴 위협과 그 모든 결과도 나타났다. 1945년 11월부터, 1946년을 거쳐빠른 인플레이션과 대부분이 노동조합이 속하지 않은 5백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연료가 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파업의 물결이 일어났다미국 지역 경제와 동맹국 경제를 모두 부활시킴으로써 노동계급의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는 힘겨운 과제가 미국 자본에 주어졌다따라서 미국은 1947년 유럽의 동맹들을 위한 마샬 계획(Marchall Plan)을 시행했다이것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같이 소련에 충성하는 코뮤니스트당의 숫자가 증가하는 국가들에 대한 재정적 원조를 의미했는데심지어 그렇지 않은 지역인 영국은 큰 코뮤니스트당은 없었음에도(1945년 영국 코뮤니스트당(CPGB)에는 국회의원이 1명 밖에 없었다), 영국 제국의 전쟁 빚 일부를 상환하기 위해 노동당 정부가 마샬 원조를 수락했다이제 뉴욕은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서 런던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했다달러 지배로부터 탈출하고자 한 소련은전적으로 사심이 없진 않았던 원조를 거부했고그 위성 국가들의 마샬 지원 수락을 허락하지 않았다대신동유럽 국가들이 마샬 플랜에 참여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미국영국그리고 그 외 서유럽 국가들이 부과한 무역 거부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1949년 경제상호원조회의(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Comecon)을 설립했다.

 

이는 양극단에 있는 세계의 제국주의 분파를 위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긴 세속적 호황으로 이어졌다이러한 호황의 조건을 만들어 낸 것은 단기적인 마샬 계획의 지원이 아니라전쟁 그 자체가 가져온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였다전체 세계는특히 미국소련그리고 서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별나게 높고 지속된 성장을 경험했고이 모든 것과 함께이전에는 성취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 사실상 완전 고용(no unemployment)을 맞이했다이것은 1930년대와 극적인 대조를 이뤘으며그 계속되는 호황에 직면하여그들이 경험한 아우성치는 20세기”(Roaring Twenties)의 문제그 역사를 특징짓는 호황과 불황의 순환으로부터 자본주의가 탈출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했다.

 

그러나 재건은 그 한계가 있었다. 1970년대 무렵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다시 위기를 가져왔는데그 위기가 19세기의 사업 불경기의 형태는 아니었다.

 

축적 수단으로서 경기 순환은 명백히 끝났다아니 경기 순환은 세계 전쟁의 순환이 되었다자본주의에서 전쟁은 독특한 것이 아니다다만 자본주의 전쟁이 싸워 쟁취하고자 하는 목표들이 그러하다다른 모든 가설적인 이유를 제쳐 두고주요한 목표는승전 열강들의 전매특허인 정책들로경쟁국이나 경쟁 블록을 파괴하는 것이었다그 결과로전쟁은 이제 국제적인 경쟁 형태를 띠게 되었다이것은 경제 외적’ 수단에 의한 경쟁의 문제라기보다 사람들 사이 유혈 낭자하고 원시적인 투쟁을 위한 가식을 벗은 경제적 경쟁일 것이다.”(17)

 

이것이 쇠퇴기 자본주의에서 축적을 재건하는 수단이 왜 파괴 도구 생산의 증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설명한다아래의 표는 영국과 미국에서 군비 증가를 보여주는데 1962년에 이르게 되면 430억 파운드가 군 예산과 무기 비용으로 매년 지출되고이는 전 세계 총자본 형성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몫이다.”(18) 무기 생산은 폐기물 생산으로총 사회적 자본에 어떤 새로운 가치도 더하지 않는 생산이다진실로한 국가의 자본은 무기를 다른 나라에 판매함으로써 경제적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그러나 거래에 사용된 돈은 그 나라 노동자들 노동으로 생산된 결정화된 가치 형태를 나타낸다그리고 그 무기를 갖게 되면 그것으로 대체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영국과 미국의 공공 지출, 1913-1969

 

연도

GNP 대비 국방비 비율(%)

GNP 대비 전체 국가 지출 비율(%)

 

UK

USA

UK

USA

1913

3.0

/

13.5

10.5

1923

4.7

/

27.5

11.0

1933

3.8

/

30.0

16.5

1938

4.9

1.5

31.2

19.5

1948

7.4

8.0

37.0

24.0

1953

8.9

13.2

35.0

27.5

1958

6.4

10.1

31.5

29.0

1960

6.2

9.0

32.5

28.0

1965

5.8

7.5

34.0

28.5

1969

5.3

9.0

39.0

32.0

출처: M. Barratt Brown, “The Economics of Imperialism”, 216.

 

정교한 핵무기 구매는 단순히 사냥을 위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그 목적은 파괴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그 말은무기 생산은 가치의 창출에 연결되기보다 가치를 파괴한다는 것이다따라서 이윤율 하락에 대한 가상의 (경향은 세계 자본을 위한 해결책이 아니며종국에는 오직 더 심각한 위기쇠퇴기 자본주의 아래에서 궁극적으로 전쟁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주요 특징들을 개괄했다자본주의 경쟁은 이제 개별 기업 간 경쟁이라기보다 제국주의 블록에 속한 국가 간 경쟁이 되었다그러나 자본주의 성장기 개별 기업들이 순수한 경제적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가능했다면제국주의 시기 국가 수준에서의 경제적 집중은 그 과정을 자본주의 아래 궁극적 한계까지 밀어붙였다제국주의는 지구의 가능한 상당 부분을 원자재투자시장의 원천으로써또는 그 이득을 더 잘 지키기 위한 전략적 기반으로써분할 하려는 각 자본주의 국가 내부 투쟁이었다제국주의 군비 경쟁은 모든 외교 전술무역 전쟁제재와 호의적 국가 협정을 포함하고 있었으나이 모든 것들은 결국 순수한 군사력이 뒷받침될 때 의미가 있었다쇠퇴기 자본주의의 위기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왜 자본주의가 버터보다 총을!”(guns not butter) 선호하는지교육주택과 같은 사회적 편익보다 일종의 폐기물 생산으로서 군비 지출을 선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19)

 

1914년 이래제국주의 전쟁은 거의 중단되지 않은 사슬처럼 확장되었다물론 가장 충격적인 예시는 명백히 제2차 세계대전이었는데이 전쟁은 30년대 초반의 위기가 연장되는 것을 막기 위한 대규모 군비 지출에 뒤이은 것이었다영국프랑스와 소련을 각각 보면군비 지출은 1937년과 1939년 사이 각각 144%, 142%, 그리고 103% 상승했다.(20) 1차 세계대전이 가장 지배적인 세계 제국주의로서 영국 자본주의의 파괴를 완성했다면2차 세계대전은 명백히 미국을 세계에서 선도하는 자본주의 국가로 확립시켰다비록 전후 복구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유럽 산업과 영토 대부분을 장악한 소련이라는 점점 더 위험해지는 라이벌과 직면했지만 말이다.

 

전후 세계의 역사는 주요 제국주의 국가 둘이 모두 해외로부터 대량의 이윤을 유입함으로써 이윤율 하락 경향을 상쇄시키는 시도 속에서세계에 대한 더 큰 통제력을 확보하려 시도하는 역사였다따라서 냉전 속에서 제국주의적 갈등은 한국 전쟁부터 베트남 전쟁아프리카에서의 전쟁들그리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따른 다양한 중동 위기와 같은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불편한 평화를 산산조각 내는 대리전쟁의 형태를 취했다제국주의는 소수의 높은 유기적 구성을 한 선진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의 산물이다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이것이 영토의 물리적인 지배 식민주의 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그 당시 지배적인 강대국들은 그들이 그 무엇이 되었든 영토에서 뽑아낼 수 있는 가치를 추출하기 위해 직접적인 통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레닌은 정확하게도자본의 수출이 제국주의의 주요한 추동력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식민지에서 초-이윤(super-profit)을 얻지 못하도록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이 제국주의 열강을 막고따라서 자본주의에 상당한 한 방을 날릴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그는 두 가지 점에서 틀렸다첫째()맑스주의 역사가들(21)이 분명히 보여주었던 것처럼인도라는 명시적인 예외를 포함하여일반적으로 식민지들은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그리 수익성이 크지 않았다그 당시 그들이 주목하지 못한 것은아프리카를 비롯한 땅을 점령하는 다른 동기들은 종종 부정적인 것 라이벌로 하여금 특정 영토를 이용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 이었던 반면식민지가 곧 수익이 날 것이라는 기대했다는 점이다둘째식민지의 개발 및 군비 때문이었는데2차 세계대전 이후독립한 나라들을 지배한다는더욱 교묘하고 훨씬 더 수익성이 큰 방법(곧 -식민주의로 불리게 된다)을 개발하였다비록 정치적 의미에서 명목상 독립했지만, ‘새로운’ “개발도상국” “세계” 국가인 구 식민지들은 세계 시장을 유의미하게 무너뜨리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2차 세계대전 이후선두의 제국주의 열강과 개발도상국” 나라들의 격차는 확대되었다. 1952-1954미국의 1인당 생산량은 1,870달러는 인도의 60달러이집트의 120달러였다. 1969이 수치는 미국이 4,240달러였는데인도는 110달러그리고 이집트는 160달러가 되었다.(22) 2022이 수치는 미국 70,246.6달러인도 2,256.6달러그리고 이집트 3,698.8달러였다.(23)

 

앞선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개발도상국 세계의 실패는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자기 노동력만으로는 충분한 잉여가치를 추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은 잉여가치를 저개발 지역으로부터 추출하려고 시도해야만 했다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은저개발 국가들의 자본 축적을 통한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를 막았고따라서 이 지역에서 자본 재생산 기반을 파괴했다따라서제국주의자들은 아래와 같은 딜레마에 직면한다.

 

낙후된 지역을 계속 착취하는 것은 서서히 개발 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이다그러나 착취하지 않는 것은 자본의 이미 불충분한 이윤을 더 감소시킨다는 의미이다.”(24)

 

이러한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로서의 선진 국가의 지원가치 법칙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무조건적인 원조는 없는 것이 당연했고그것은 자본이므로따라서 자본으로 작동하므로, (원조는이윤과 이자라는 이름의 기대 수익을 대가로 빌리는 것이 되었다이전 원조에 대한 이자와 빚을 지불하면, 1965년에는 (쿠바를 제외한모든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8억 83백만 달러의 순손해가 발생한다는 계산이 나왔다.(25) 이 당시 쿠바는 제국주의에 의존하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상황이 좋았는데소련으로부터의 30억 달러 원조의 수혜자가 되었다비록 더 나은 조건이었음에도 쿠바의 경제는 계속 침체했다소련은 주요 제국주의 열강들 가운데 약자였기 때문에, “원조에서 경쟁자를 약화하기 위해 낮은 이윤율과 장기의 대출을 제안했다이는 결코 관대한 것이 아니었다쿠바와 다른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는 이미 알고 있는 그들 나랏빚과 이자를 갚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전후 제국주의 게임에서 소련의 다른 약점은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할 수는 있었지만베트남 전쟁의 운명이 명백히 보여주었던 것처럼독립을 쟁취한 이후 경제적 지원은 거의 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저개발 경제가 견고한 산업 기반을 확립하기 어려운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고도의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기 때문이다우리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각 자본은 경쟁으로 인해 대략 유사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밖에 없으므로낮은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으로부터 고도의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으로 지속적인 가치의 유출이 발생한다더욱이이윤율은 균등화(equalisation) 경향이 있으므로낮은 유기적 구성을 한 국가들은 새로운 축적을 위한 충분한 규모의 이윤이 없음을 알게 된다로자 룩셈부르크가 그의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Social Reform or Revolution)에서 상당히 명확하게 본 것처럼.

 

생산성과 교환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노동 생산성 그 자체의 성장에서 비롯된이윤율의 지속적인 하락 위협이다그것은 어떤 새로운 중소 규모 자본의 기업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도로 위험한 경향이다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자본형성그러므로 자본 배치의 확장도 제한한다.”(26)

 

그러므로저개발 국가가 그들이 생산할 수 없는 자본을 대출하여 무거운 빚더미 위에 앉게 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따라서

 

“1960년대 개발도상국의 공공 대외 재무는 매년 14%씩 상승했다. 1968년 6빚은 475억 달러에 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27)

 

어떤 이들은 저개발 국가의 계획 경제 정권이 해당 지역 잉여가치 생산 부족의 만성적 영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적 국가 자본주의 해결책으로 소련을 모델로 삼은 것을 지적했다.(28) 그러나쿠바와 극찬받던 중국 사례가 대표하듯이그런 지역에서 계획 경제의 적용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 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국외 자본이 실패하자지역 부르주아지는 축적을 위한 충분한 잉여가치를 집중시키기 위해 집중화된 국가 권력에 고삐를 채우고자 했다따라서 그들은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민족해방을 달성하길 희망했다쿠바는 우리가 이미 언급했다그러나 중국은 많은 인구와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1960년대 핵폭탄을 개발하고 위성을 쏘아 올렸다그러나 중국에 호의적인 이들조차도 아래와 같은 것은 인정했다.

 

이례적인 진보에도 중국은 여전히 결정적인 경제적 도약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통계적 계산이 보여주는바, 1인당 곡물 공급이 여전히 국민당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 때 달성한 것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29)

 

가치 법칙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똑같이 작동했다계획 경제의 집중화도 독립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에 충분한 잉여가치를 불어넣지 못했다전후 호황이 1970년대 초반 자유세계의 종말에 도달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지표들은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도 하락세에 직면했음을 보여주었다물론 우리도 당시 이 경제들의 이윤율을 계산할 수 없었다그러나 우리는 성장률을 보아 모든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었다. 1951-5년 시기코메콘(동구 경제상호원조회의)의 전반에서 성장률은 1960년대 성장률에 비해 2배였고, 5개년 계획(1971-5)의 주요 목표 달성은 모조리 실패했다.(30) 냉전의 양측 모두에게 멈춤쇠(détente)”는 평화를 향한 진정한 단계를 밟는 데서 온 것이 아니라 군비 경쟁을 완화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베트남 전쟁의 비용이 1973년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에 이바지했다면코메콘의 무기 생산은 GDP 성장 둔화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점차 지속 불가능한 것이 되고 있었다이것이 부패낮은 노동 생산성알콜 중독자 비율의 증가그리고 소비재의 부족이 만연했던 브레즈네프(Brezhnev) 시절이었다방향을 바꾸려는 시도는 1982년 그가 죽은 이후에서야 있었고이 시기에 소련은 1979년 필사적인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자신만의 베트남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그동안중국과 미국 모두 경제적 문제로 인해, 1971년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그들의 화해를 향한 첫 단계를 밟았다새로운 접근은 1958년 대약진 정책과 같은 중국의 주체적인 발전 시도의 실패그리고 1960년대 중반 소련과의 관계가 무너진 이후 뒤이은 스태그네이션 결과였다그러나, 1970년대 말(마오쩌둥은 1976년 사망), 그리고 1980년대 초반중국 코뮤니스트당서유럽의 지도자들과 기업인들은 모두 그들 각자의 문제를 다루는데 상호 이득이 되는 방법을 우연케도 발견했다서유럽 자본에 있어서는 스스로 해결책은 만들지 못한 채, 1970년대 위기 비용을 노동자에게 지불하도록 하려는 시도에 완고하게 저항하는 노동자를 패배시키는 방법을 제공했다서유럽의 산업 구조조정(즉각적인 자본의 단순한 형태를 취하곤 했다.)은 일본한국그리고 중국 내 서유럽 금융 자본(그리고 멕시코와 같은 보다 작은 장소들)의 대규모 투자를 동반했다이곳은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매우 낮은 임금으로 일하게 할 수 있는 곳이었다이것은 규제가 사라진 통화금융화세계화의 경제적 결과이며이에 더해우리가 다음 장에서 다룰 소련 붕괴의 결과이기도 하다.

 

-ER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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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앞의 책. 851

(17) 매틱(Mattick), 앞의 책. 135

(18) M. Kidron, Western Capitalism Since the War, 

(19) 적어도 세계부르주아지의 부분적 실현에도 불구하고노동자들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는 명백한 정치적 강점.

(20) 수치는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앞의 책. 818.

(21) 고전적인 예시는 D.K. Fieldhouse, The Theory of Capitalist Imperialism (Longman 1967)

(22) Key Issues in Applied Economics, 1947-1997 Economist Intelligence Unit

(23) data.worldbank.org

(24) 매틱(Mattick), 앞의 책. 262

(25) T. Hayter, Aid as Imperialism, 174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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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3부-상)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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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혁명적 전망(Revolutionary Perspectives) 정기 독자들은 소소한 사항을 추가하여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를 재발간해 오고 있음을 알 것이다. 1974년 처음 발간된 이 글은 1975년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의 일부가 된 혁명적 전망 그룹의 기반이 되는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반세기 전 작성된 이 글의 핵심 전제는 세월의 시험을 견뎠고처음 두 부분에 대해 우리는 원본에 가벼운 수정만 가했다.

 

그러나, 3부에서 우리는 온갖 혼란과 변화의 지난 반세기에 진입했고여전히 살아가고 있다이러한 혼란 속에서 우리는 원래 글에서 제기된 것보다 더 장기적인 관점을 자연스럽게 발전시켰다사실이미 1976년 당시에도 도래하는 위기와 그 결과에 대한 전 세계적 노동계급 저항의 부활이 전쟁인가 혁명인가라는 물음이 의제였음에도 불구하고그것은 즉각적인 의미에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의미였음을 우리는 이미 결정했었다. 1970년대의 경제적 투쟁(우리들 사이에서는 재정적 전투성으로 칭한다)은 체제를 없애야 할 필요를 인식하는 계급의식을 자동으로 출현시키지 못했다심지어 그 체제가 더한 모순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해도 그랬다우리는 위기의 원인에 관해 설명했고여전히 남아있지만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만약 그 이후의 사건들을 포함하지 않거나 우리가 다룬 사건들에 대한 분석을 심화하지 않는다면그 설명은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다따라서, 3부와 이 연작의 이후 부분은 처음 두 부분에 비해 더 많은 편집이 가해질 것이다이 3부는 원본이 작성된 시기전후 호황()의 마지막에 끝난다이 시기는 노동계급이엄청난 규모의 인플레이션으로 시작된 자신의 생활 수준에 대한 공격에 직면하여전 세계적 파업과 폭동으로 반응한 시점이다이는 CWO와 같은 코뮤니스트좌파 조직의 탄생과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코뮤니스트투사(Battaglia Comunista)와 같은 기존 조직의 재활성화로 이어졌다우리의 새로운 세대는우리를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적 현실(유물론적 실재)을 설명하는 맑스의 분석으로 이끌었다그러나우리가 1970년대 초반에 볼 수 없었던 것은축적 순환의 마지막그리고 그 위기에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시도한 노동계급의 저항에 대한 체제의 반응이었다이 연작의 다음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작성한 모든 글을 요약할 것이고그 글은 이 축적 순환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이 축적 순환의 핵심 문제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의 필요성 등 의 끝에 대한이어지는 자본주의자들의 뒤틀림과 전환에 대한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해야만 했던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쇠퇴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것인데이 쇠퇴가 자본주의의 빠르게 붕괴할 것이라는 의미로 잘못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생산양식의 등장과 몰락에는 수 세기가 걸린다생산양식의 모순은 그것이 마침내 붕괴하기 전까지 새로운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고때때로 명백하게 확장하기도 한다심지어 그 이후에도 경제적 모순은 그 자체로 계급 규칙을 끝내지 않는다우리가 국제주의 코뮤니스트(Internationalist Communist) 23권에 썼듯이:

 

우리는 자본주의 쇠퇴기 동안 극적으로 살아가고 있다우리는 우리에게 보이는 특정한 현상을 밝힐 수 있지만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끝나는 시점이 언제인지는 결코 내다보지 못한다대안의 부재 속에서 자본주의는 여전히 그 광기의 과정을 수행해 갈 수 있다자본주의가 쇠퇴한다고 기계적으로 사회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종말과 사회주의의 도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행동 없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은 방법론적 오류이다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쇠퇴의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국제주의적그리고 국제주의자 당의 지도를 받은 프롤레타리아트 승리의 투쟁 과실이다.”1)

 

따라서 쇠퇴는 자본주의가 독점제국주의그리고 국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의 시대그러나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이비록 모습은 다를 라도 기본적인 채찍으로 남아 축적 순환의 물질적인 추동력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모든 특성을 묘사하는 유용한 약칭에 불과하다그러나 이 쇠퇴는 전에 없는 거대한 위협을 제기한다지배계급의 언론들이 이야기하는 복합위기’(polycrisis), 경제적 스태그네이션팬데믹제국주의 전쟁환경 오염과 세계적 온난화 등의 모든 위협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미래가 아닌 인류 자체의 잠재적 미래를 이야기한다여기에는 어떤 보장된 미래도 없다우리는 맑스가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묘사한, ‘투쟁’(contending)의 승리다시 말해 노동계급의 승리 또는 우리 모두의 몰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직면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은 첫걸음일 뿐이다혁명적 소수도광범위한 노동계급도 무엇이 벌어질지 팔짱을 끼고 기다릴 수 없다집단적정치적 양쪽으로 모두 조직화를 시작할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이 연작은 그 노력에 공헌하고자 한다.

 

 

제국주의와 국가 자본주의의 시대

 

자본주의 쇠퇴의 시대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은 자본주의가 쇠퇴하는 생산양식임을 결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그러나 우리가 이윤율 하락이그것이 자본주의 상승기든 쇠퇴기든 그 모두에서 자본 축적의 기본적인 추동력임을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우리가 어떻게 단정적으로 세계 자본주의가심지어 축적을 어떻게든 해나가고 있었고생산력이 확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이제 쇠퇴하는 사회적 체제이고 그것은 1914년쯤부터라는 주장을 할 수 있었겠는가먼저우리가 자본주의의 쇠퇴의 시작 시기를 ‘1914년쯤이라고 했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겠다생산양식은 어느 날 하룻밤 만에 갑자기 쇠퇴기에 접어드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를 만들어 내고코뮤니즘의 물질적 토대를 건설하는 그 역사적 책무를 모두 수행한 것이 1914년 이전쯤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독점 자본과 세계 경제의 발전과 함께축적 순환상의 경제적 위기만으로는 축적 과정을 다시 활성화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자본의 중앙집중화는 이미 선행되었고이제는 몰락할 것이라고는 주변부의너무 소규모생산성이 낮은 자본밖에 남지 않았다전 세계적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한 파괴의 결과로써 자본의 평가절하만이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 연구의 이전 부분에서일단 자본이 세계의 지배적인 생산양식으로 확립되어 버리면이윤율 하락의 역(경향이 헛된 것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국주의종국에는 세계전쟁으로 나아갈 뿐인지를 보았다세계 자본의 등장은 자유방임주의 또는 고전학파 자유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본 축적은 오직 각 지역 경제(national economy)에서의 지속적이고 증가하는 자본의 개입과 국가의 시민 사회의 점진적 흡수 – 전 세계적인 국가 자본주의로의 경향의 존재 라는 기반 위에서만 가능했다국가 소유(자산)의 증가와 생산수단 통제의 증가경제를 통제하려는 재정 정책을 제외하고서도이는 불모 생산(waste production. 세계 자본의 관점에서 자본 축적에 기여할 수 없는 생산)의 자극을 포함하는데무기 생산이 불모 생산의 가장 명시적인 표현이다고전적인 경쟁이 이제 제국주의 강국 사이의 영속적인 경쟁 상황에 포함되면서경기의 호황과 불황은 그 자신이 세계 경제 위기를 표현하는 것이 되었다세계 경제 위기는 종종 무기 생산의 증가와 새로운 자본 축적의 순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를 동반했는데이 위기는 오직 전쟁으로만 해소될 수 있는데전쟁은 그 자체로 새로운 재건(reconstrucion)기의 전주가 된다. 20세기의 시작에서부터 자본주의의 역사는 위기-전쟁-재건 순환의 역사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은 자본의 평가절하의 수단으로 작동했고제국주의 강대국들2)의 재편성을 가능하게 했지만이후 선진국가의 제국주의 사이 경쟁의 책략 속에서 단순히 졸병 역할을 했던 중진국(less advanced states)의 상대적인 지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왜냐하면이른바 개발도상은 제국주의 강대국들과 독립적으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 국제적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존재는 세계혁명과 더 높은 수준의 생산양식으로서의 코뮤니스트 제도의 물질적 가능성의 존재를 의미했다. 1917-21년 세계혁명의 물결은 그 패배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즘이 더는 유토피아적 이상이 아니라 실질적 가능성임을 증명했다그러나 이보다 더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지속적 존재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임을그리고 사회가 야만으로 침몰하지 않으려면프롤레타리아트의 코뮤니스트 제도가 필연적임을 증명했다.

 

1차 세계대전 직전도중그리고 이후의 국가 주도 경제화

 

우리는 제국주의에 대한 논쟁 가운데, 1870년쯤부터 계속선진국에서 총 국민 소득에 비례하여 국가 지출이 증가한 것을 보았다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국가 지출의 가장 거대한 단일 항목은 국방비지만교육 및 공공사업(높은 기술적 구성이 요구되는 가스상수도 등의 서비스또한 중요한 항목이었다. 1909영국 정부는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국가에 의해 유지되기 위해 얼마나 필요한지를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을 결성하고정부의 통제 지분을 확보함으로써 보여주었다.

 

그러나 연구의 이전 부분3)에서 지적한 도금의 시대’(Gilded Age) 독점 경향이 독점 가격을 통해 새로운 자본의 발전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정치적 과정을 왜곡할 것이라 위협하는 일은 미국에서 발생했다조직된 노동의 저항에 대한 반응으로, ‘농민 운동’(Granger Movement)의 농민들은 반()-독점당을 설립하고, 1890년 첫 번째 독과점 금지법셔먼 조례(Sherman Act)를 통과시켰다맥킨레이(McKinlay) 대통령 정권의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그리고 사회적 다윈주의아래그 법은 대개 이용되지 않았다그가 암살된 이후후임자인 아메리카 제국(American Empire)의 열정적인 지지자테오도르 루스벨트 시기가 되어서야 JP 모건과 록펠러가 의지할 만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 그 법을 적용했다. ‘경쟁을 보호하기 위해’ 정보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 자본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경쟁은 시스템에 의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심지어 오늘날의 시장마저도 규제되고 나아가 국가에 의해 시장이 만들어지는’4) 과정의 출발점이었을 뿐이다루스벨트는 실제 산업을 국유화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지만정부 계약이 국가 계획과 자본의 주요 원천이 되는 지점에서 산업들과 관계를 구축했다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산복합체’(military – industrial – Congressional – complex)의 씨앗은 뿌려졌고그 무렵전후 붐 시기산업의 지도자들은 정부 서비스에 막힘없이 드나들었다.5)

 

1914전쟁의 발발은 전쟁 목적 생산에 대한 다소간의 직접적 통제권을 중앙 정부가 갖고 있던 선두 자본주의 강국들 모두의 내부에서 국가 주도 경제화의 진행이 가속했다. 1916년 이후독일 제국에서는 라테나우(Rathenau)의 경제 통제가 너무 강력하여, “국가 사회주의로 회자하였으며그를 도와 군수품 부서(Ministry of Munitions)를 운영하던 로이드 조지(Lloyd George)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 ‘모든 생산분배그리고 교환의 모든 수단이 총체적으로 그들의 마음대로였다”6)

 

이 국가 개입의 특정 측면들은 다수 전후에 폐지되었으나 나머지는 유지되었고국가 자본주의는 모든 자본의 경향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경제의 국가 주도화 경향은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군사적 요구에 맞추기 위해 조정한민족 국가 내부에서의 생산 필요성의 결과 – 비록 그 필요가 경향을 가속하고 강화했지만, - 가 아니다더 중요한 이유는 기형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초래한 만성적 잉여가치의 부족으로 추적할 수 있다산업의 침체기(불변자본을 더 증가시키기에는 너무 낮은 잉여가치)를 맞아경제 붕괴를 피하고자 국가는 지금까지는 시장의 기능이었던 정책을 채택해야만 했는데그것은 전체 경제에서 잉여가치를 재분배함으로써 평균 이윤율 형성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자본의 집중 과정에서 더 큰 잉여가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대기업들 사이에서 나눠지고이는 시장이 그 자신의 몇몇 기능을 잃어가는 과정이다시장 메커니즘이 자본의 확장 과정에서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를 멈춰버리면이윤율의 평균을 형성하는 문제는 복잡해진다개별 산업의 개별적 이윤율에도 불구하고모든 필수적인 산업의 동시적인 이윤율의 존재를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이윤율의 평균은, ... 잉여가치를 통합(pooling)’함으로써스스로 사회적 수요의 수단이라 주장하는 사회적 생산의 물리적 필요를 만족시키려는 것을 암시한다자본의 지체(stagnation)는 그것이 문제가 있는 수요로 표현되는데잉여가치의 사회적 통합에 참여하는 자본 주체(entities)를 증가시키는 데 걸림돌이 된다잉여가치의 통제는 자본주의의 안전에 필수적인 것이 되고이윤의 분배는 정부의 관심사가 된다.”7)

 

이런 이유로은행금융 등에 대한 국가 통제가 뚜렷하게 증가하고2차 세계대전 이후특히 1929년 위기의 시작과 더불어정보 보조금많은 기간 산업의 노골적인 국유화가 이뤄졌다따라서보기를 들면프랑스 정부는 그들의 거의 모든 해운 회사민간 항공 회사부채를 지불할 수 없는 은행과 국유화된 철도회사에 자금을 빌려주었다영국 정부는:

 

“... 철도의 통합을 달성(1921), 전력 공급의 부분적 국유화(1926), 정부가 지원하는 철강(1932) 독점그리고 국가적 석탄 카르텔(1936)을 만들어 집중화를 이루었다...”8)

 

나치의 독일에서는히틀러가 볼셰비즘에 반대해 불평했음에도 불구하고국가의 경제 통제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자본주의자들은 통산·산업의 영지”(Estate of Trade and Industry)노동자들은 노동 전선(Labour Front)으로 조직화하였는데그러는 동안 1938년 2괴링(Goering)은 ‘4년 계획’(Four Year Plan)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적 독재를 실시했다.

 

이 소개된 방법들은 ... 경제에 대한 특정 나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아니다그것들은 일종의마지못해 채택된 계획이며, 1930년대 현재 많은 국가에서 케인즈주의라는 용어로 요약되는 것이다그것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도입된 전쟁 사회주의에 일부 기반을 두고 있다.”9)

 

이탈리아에서는 1933파시스트 정부가 산업재건기관(the Institute for Industrial Reconstruction, IRI)을 세웠다:

 

“... 정부의 경제 자립 정책과 재무장 정책을 돕기 위한 영속적인 산업 지주 회사로서민간 기업이 충분한 자금을 투자할 의지가 있는 산업과 서비스에서만 활동하도록 계속해서 그 활동에 한계를 두었다.”10)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모두경제적 회복은 무기 생산과 노동계급에 대한 야만적인 착취에 기반을 두었다그런데도 1929년에서 1938년 사이두 나라의 총 사회적 생산은 감소했다.11) 우리는 아래에서 쇠퇴하는 자본주의 아래 이 메커니즘에 어떻게 축적을 돕는지’ 알아볼 것이다그러나국가 주도 경제화(산업의 국가 소유라는 의미에서)한 편에서 잉여가치의 재분배를 지원하고경제 지원을 돕지만다른 한 편에서는 사적 영역의 이윤율 하락을 심화시킨다왜냐하면주로 사적 영역의 잉여가치를 지휘함으로써국가가 이 기업들의 자금을 댈 수 있기 때문이다완전히 국가자본주의화 된 경제(이른바 코뮤니스트’ 국가)에서 작동하는높은 잉여가치율의 산업(영역에 속하게 될 것)과 낮은 잉여가치율의 산업(1영역에 속하게 될 것사이에서 이윤율을 국가가 평등화하려는 시도에서똑같은 과정이 발생하는데한 산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자금을 이전시키는 것이 여기서는 더 쉽다왜냐하면국가가 하나의 거대 기업가로 행동하면서총 국가 자본을 직접 통제하기 때문이다모든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수익이 나지 않는 부문을 국가가 관리하는데이는 전체 경제의 관점에서 생산 비용의 증가에 해당하고따라서 이윤율의 하락을 심화시킨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적 관리법’, ‘노동절약’ 기구성과급 시스템의 도입 등의 수단을 통해 생산을 합리화하려는 노력에 속도가 붙었는데이러한 노력은 여전히 이윤을 내는 산업에서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떨어지는 이윤율을 상쇄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였다영국과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 하락은 실질임금이 세기 초 수준 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명백했다그동안 독일에서는 국가 경제에서 임금의 비율이 1932년 64%(이것마저도 1928년 수준에서 심각하게 떨어진 것)에서 1938년 57%로 떨어졌다.’12)

 

그런데도상대적절대적 잉여가치를 증가시키려는 시도들은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확대되던 실업 증가에 기여했고중앙 정부는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개입하여 국유화사회 보장 제도그리고 공공사업을 심화했다미국 F.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이러한 정부 개입 가운데 가장 거창한 것이었다뉴딜 정책의 수단들은 그 정치선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축적의 실제 마중물이 된 적이 없고그저 대공황을 거치는 동안 사회적으로 체제를 단결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1937년쯤에 이르러서는 국가 지출 단독으로는 이를 끝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이미 명백했다그 대신경제위기 시기 고조된 제국주의 긴장이 관세 장벽 강화에 따라 근린궁핍화정책(“beggar my neighbour”)과 경제자립 정책을 불러오거나또는 특혜 관세’(imperial preference)가 국가적 필요에 의한 것으로 주장되었다이러한 긴장 아래의 재무장은 군수 산업의 이윤율은 높였을는지도 모르나, 1939년과 1941년 제국주의 전쟁의 전면전에 추동을 더했을 뿐이었다. (이 제국주의 전쟁은궁극적으로 엄청난 양의 자본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축적의 새로운 출발그리고 1945년 이후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긴 세속적 호황기의 신호가 될 것이었다.

 

소련에서는 단일 국가에서 고립되어 발생한 1917년 혁명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의 다른 종을 낳았다세계혁명의 전망이 미래로 멀어지자, 1921년 신경제정책(NEP)이 채택되었다레닌은 너무도 솔직하게 이것이 국가 자본주의로의 후퇴라 했으나그는 항상 국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가는 중간 단계의 무언가를 제공할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심지어 러시아의 좌익 코뮤니스트들은 러시아에서의 서유럽 방식 국가자본주의(이후 혼합경제로 불림)를 구축하려는 어떤 시도들도 맹비난해 왔는데이들조차 생산력의 완전한 국가 소유가 사회주의와 같은 것이 아님(엥겔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을 알 수 없었다. 1920년대 계속된 소련 내 논쟁은 자본 축적을 받아들이는 방향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NEP를 지속하는 옹호자로서 부하린이 등장하는 동안(그리고 농민에 대한 양보로 농업을 성장시키면서), 그의 이전 좌익 코뮤니스트 동료였던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는 산업화를 더욱 가속할 것을 요구했다(트로츠키가 이 정책을 지지했다). 좌익 반대파 가운데 이 -산업화 지지자들’(super-industrialisers)은 스탈린이 당 조직을 장악하면서 패배했는데, 1928년 스탈린이 그들의 정책을 훔치는 것도 막지 않았다스탈린주의자들이나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자는 그 이후 이것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추동의 시작이라고 주장해 왔는데사실은 이는 그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 자본주의 모델의 시작이었다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식민주의의 굴레 아래 있으면서그들의 이전 제국주의 주인들의 자본 투자에 의존하지 않고 축적할 방법을 찾던 국가에 이 초-산업화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다스탈린은 5개년 계획(Five Year Plan)의 동기는 러시아 노동자의 더 나은 삶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들을 착취하는 것이 이 계획에 잉여가치를 제공할 것이었다), 서유럽 열강들의 공격 – 스탈린은, 1928년에도 그들이 소련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에 저항할 수 있는 군수 기계를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나치가 조금 이후에 말할 것처럼그것은 버터가 아니라 총’(guns not butter)이었다그러나 1930년대 동안월가의 충격 이후 대규모 실업이 서유럽 경제를 황폐화했을 때, 5개년 계획은 완전히 계획된 명령 경제(소련에서는 사회주의그리고 서유럽에서는 코뮤니즘으로 잘못 불렸다)가 전통적인 자본주의 경제보다 우월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에 이르는 기간 두 주요한 열강 사이의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경쟁이 고조됨에 따라이것은 전쟁 직후의 파업 물결주택 점유와 나란히 이른바 자유 세계에서 복지와 사회 보장 제도의 도입에 일정 역할을 했다.

 

전후 호황(The Post-War Boom)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1차 세계대전 이후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대한 전시 통제가 완화되는 일은 없었다사실 국가 자본주의 경향은 갈수록 확실해졌다. GNP 대비 국가 지출 비율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아래의 국가 지출 및 공공 부채 표를 보라). 소련에서는 1946년 제4차 5개년 계획 개시가 선언되었다프랑스에서는 모네’(Monnet) 계획을 채택하고르노석탄가스전기프랑스 은행대규모 시중 은행에어 프랑스그리고 최대 규모의 보험 회사들을 국유화했다영국이 국유화한 대상들도 그에 못지않았다우리가 이전에 지적한 것처럼미국의 국가 자본주의가 정부의 국방 관련 계약의 형태를 취하는 동안전후 재건기 독일이탈리아그리고 일본의 회복은 미국의 마샬 원조(Marshall Aid)에 의해 시작되었고전쟁 이전 국가 통제를 이용해 유지되었다이탈리아에서는 IRI(위의 내용을 보라)가 거대한 규모로 성장국가 철강의 60%를 생산했으며알파 로메오(Alfa Romeo)사를 소유, 20만 명의 공학 노동자를 고용했으며그 외에도 대부분의 공공시설과 사업을 통제했다그동안 독일에서는

 

이 시기 부르주아지는 자본 축적을 강제하도록 국가 기관과 통화재정 체계를 다른 어떤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보다 더 많이 이용했다.”13)

 

이러한 국가 자본주의의 성장은 아마도 서유럽의 민간 산업에서조차공공 영역이 이제 보편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고용주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래의 공공 영역 종업원 표를 보라). 정부의 직접 통제는 주로 기간 산업들에서 이뤄졌는데이 산업은 자본의 갱신과 축적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이윤이 필요하다는 점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국가가 그들을 장악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이윤율의 동등화 경향이 무너지는역사적 위기의 지표이다이것은 1970년대 초전후 호황이 끝났을 때 국유화를 향하는 경향들이 처음에 더욱 강화되었는지를 설명한다국가가 통제하는 UCS와 롤스 로이스(Rolls Royce), 그리고 국민 기업 위원회(National Enterprise Board) 형태의 국가 주도 경제화의 심화그리고 브리티시 레일랜드(British Leyland), 당장의 선박제조 산업들의 국유화와 함께영국은 이러한 방식의 보편적 발전을 이끌었다.

 

               공공 영역 종업원의 숫자 – 노동력 대비 비율(%)

국가

총 일반

정부 부문

공기업

총 공공 영역

영국

11.9

10.1

22.0

캐나다

9.9

2.0

12.0

미국

16.7

0.04

16.7

베네수엘라

12.4

1.2

13.6

칠레

10.1

N.A.

10.2

아르헨티나

11.5

3.5

14.9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영속적 특징인 인플레이션

 

경제 부문에서 국가 주도 경제화를 동반하는 국가 지출의 많은 부분은 사실 비()생산적 부문이다 – 그것은자본 축적을 심화시키지 않는 지출이라는 것이다무기 생산뿐만 아니라 전체 제3의 영역(사회적 서비스 등)은 비생산적 지출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포함될 수 있다그런데도비생산적 지출의 증가는 그 자체로 인플레이션(다시 말해가격의 상승)을 발생시키지 않는다전체 경제 수준에서 보았을 때 총가격은 총가치에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총 사회적 자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러한 비용이 잉여가치의 ’(pool)에 있는 배수관을 상징하고따라서 이윤율 하락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임은 명확하다그러나 인플레이션은연관된 가치 생산의 양적 증가 없는 화폐 공급 확장의 결과이다.

 

다른 말로가격의 상승은대량의 통화는 반드시 특정한 어떤 상품으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화폐 공급의 확장으로 인한 자신의 실제 가치를 재정립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통화의 가치 하락을 반영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연관된 가치 생산의 증가 없는 화폐 공급 증가의 결과는 부르주아 고전 경제학 이론의 용어로, MV = PT로 표현할 수 있다이때 M은 화폐의 양, V는 순환 속도, P는 가격, T는 산출물이다명백히, M의 증가는 그에 동등한 T의 증가 없이는 P(다시 말해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진다비생산적 지출은 그렇게 방정식에 삽입된다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중요한 요인은새로운 가치(또는 고전 경제학 용어로 산출물’)의 생산 증가보다 빠른 화폐 공급의 확장이다따라서비생산적 자본이 어떻든 관계없이화폐 공급의 확장 없이는 인플레이션도 없다그러나실업이라는 매우 큰 위기가 있을 것이다.

 

전후 시기 국가는 화폐 공급의 확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더욱 몰리고 있었는데이는 부분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임금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회피하고실질 구매력을 약화하는 간접적인 공격을 하기 위해서였다직접적인 공격이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정부 수입의 중요한 원천임에도 불구하고그들은 국가 책임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수입 전체를 공급할 수는 없다적자 재정(다시 말해 국가가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하는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특히 1930년대 초 금본위제가 폐기된 이후 모든 혼합’ 경제 국가들의 공통 특징이었다.

 

국가가 화폐 공급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각 국가 경제가 금속(주화교환 기준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수적이다. 19세기 전체에 걸쳐 국가 경제에서의 화폐 공급은 국가 경계 내에서 보유하고 있는 실제 금(또는 은()의 양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발행된 지폐는 법적으로 주화로 교환될 수 있었고지폐 발행의 양은 은행이 보유한 주화로일정 법적 고정 비율로 교환해 줘야 하는 의무에 의해 제한되었다따라서 화폐의 공급은 각 국가 내의 은행이 보유한 금은괴 보유량에 의해 제한되었다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적대국이 화폐를 찍어냄으로써 엄청난 재정 비용을 감당하면서 국제 금본위제의 포기를 맞이했다따라서 1918년에 이르렀을 때독일의 지폐 발행 증가는 1914년 수치의 5배였고영국은 전 이전 수치의 4.5프랑스는 1914년 합계의 거의 4배였다이러한 화폐의 증가는 전쟁으로 인한 폐기물 생산에 돈을 대는 것이었고이는 새로운 자본의 생산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가격은 독일에서 245%, 영국에서 230%,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353% 급증했다.14) 여러 국가에서의 금본위제 폐지를 동반한 화폐의 평가절하는 세계 시장에서 판매되는 평가절하된 국가의 상품들의 단기적 경쟁력을 향상했으나다른 국가들로부터의 상품과 비교했을 때 가격은 낮아졌다그러한 효과는 오직 일시적인 것이 될 수 있었는데경쟁하는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그들의 화폐를 평가절하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1936년쯤에는 이전에는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이 황금 연합’(gold bloc)의 국가들은 이제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자신의 화폐를 평가절하했다.

 

1930년대에는1차 세계대전 중과 꼭 마찬가지로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중앙 정부는 금본위제를 포기함으로써 화폐 공급을 증가시키고경제에 대한 그들의 개입을 확대할 수 있었다아래에서 볼 것처럼정부 지출의 최대규모 증가는 무기 생산의 대규모 증가 때문이었는데대규모 실업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에 대한 공포는 국가가 기존의 복지 서비스를 확대하고 공공사업의 건설에 개입하도록 했다.

 

                         국가별 총 국가 지출 및 공공 부채

국가

총 국가 지출

(각 국가 통화 기준현재가치 000,000은 생략)

공공 부채

(국가 수입에 대한 비율)

1928 or 1929

1937 or 1938

1929

1937 or 1938

프랑스

44,248

68,971

114

171

이탈리아

20,519

34,100

N.A.

N.A.

영국

782

1,134

174

163

독일

8,187

N.A.

12

25*

벨기에

12,299

13,546

77

85

미공개 기명 어음의 양에 대한 정보 원천클라우 (Clough and Cole), “유럽의 경제 역사”(Economic History of Europe), 819

대개 적자 재정으로 자금을 확보했던 폐기물 생산의 큰 증가는 오직 인플레이션을 확대하고 공공 부채를 증가시킬 수 있었을 뿐이었고이는 위의 표로 증명된다.

 

2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엄청난 비용은 다시 국채나 재무부 단기 채권을 담보로 한 은행으로부터의 중앙 정부 대출로 충당되었고결국 화폐 공급을 확대했다아래의 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폐 순환의 증가를 명백히 보여준다전쟁 자금을 위한 화폐 공급의 엄청난 증가는 가격을 고정하는 수단들이 무용해지면서 전쟁이 끝날 무렵과 그 직후모든 적대국에서의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자 도입된 정책들은 다시 한번 문제에 대한 일시적인 해결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폐 순환의 증가

                     (1939년 7월 ~ 1944년 12)

국가

시기

증가 비율(%)

독일

1944년 12

435

벨기에

1944년 8

339

프랑스

1944년 12

369

이탈리아

1944년 12

1,034

미국

1944년 12

259

영국

1944년 12

160

캐나다

1944년 12

318

 

출처클라우 콜 유럽의 경제 역사”, 847

 

서유럽에서의 케인즈주의 조치의 도입은 다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들이 강제적으로 도입한 정책들의 다소 의식적인 확장으로 보였다케인즈는 자본주의의 주기적 위기를 투자를 촉진하는 이윤율을 조작함으로써그리고 불황기 고용을 유지하기 위한 적자 재정과 공공사업으로 피할 수 있고결과적인 국가 부채의 증가는 호황기에 상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사실 실제 일어난 일은 모든 선진국가에서의 국가 부채의 영속적인 증가였고인플레이션은 쇠퇴기 자본주의의 영속적 특징임이 증명되었다보기를 들어,

 

서유럽의 물가는 1947년에서 1957년 사이 66% 증가했다이것은 매년 5% 증가한 결과인데이 비율은 국채 수익(세전)과 거의 같은 정도이다.”15)

 

케인즈주의 이론에 따르면점진적인 인플레이션은 국가 경제의 건전하지 못한 특징보다 오히려 건전한 것이며왜냐하면 이것은 사업가들이 투자하도록 하고세계 시장에서 수출물의 경쟁력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그런데도애초에 인플레이션의 존재 이유를 기억한다면(생산으로 인한 새로운 가치의 증가보다 화폐 공급의 확대가 빠른 것), 인플레이션은만약 화폐 공급의 팽창 비율이 계속 가치 생산의 비율을 계속해서 앞지른다면, ‘점진적’ 과정을 넘어선 무언가임이 명백하다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이것은 프랑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칭한 “30년간의 영광스러운 세월이라는 장기 호황의 끝을 가져온 세계적 규모의 경기 후퇴의 진행과 함께 1970년대 일어났던 일이다. (계속)

 

 

ER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3년 9월 8

 

 

<>

 

1) 쇠퇴의 개념 구체화 참고

 

 

 

2) 보기를 들어미국 경제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 대한 표는 다음과 같다.

 

photo_2019-01-09_13-27-57.jpg

 

3)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2참조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4018

 

4) 이러한 미국 정부의 조치 변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팀 우(Tim Wu)의 '거대함의 저주 새로운 황금시대의 반독점'을 참조

 

5) 가장 유명한 인물은 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입성한 제너럴 모터스의 사장 찰스 윌슨이다그는 상원 청문회에서 제너럴 모터스의 막대한 지분과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 사이에 이해 상충이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언론인들은 이를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라는 유명한 문구로 축약했다결국윌슨은 자신의 주식을 팔아 이를 확인받았다.

 

6) 로이드 조지(Lloyd George)의 전쟁 기억 1, 147

 

7) 폴 매틱(Mattick), 맑스와 케인즈, 115-6

 

8) E. 홉스봄(Hobsbawm), 산업과 제국, 242

 

9) D. 차일즈(Childs), 1918년 이후 독일, 59

 

10) E. 탄넨바움(Tannenbaum), 이탈리아의 파시즘, 112

 

11)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유럽 경제사, 764

 

12) ‘제국주의 본국의 분석에 관하여서독의 사례’, 사회주의 경제학자 회의 회보, 1974년 봄, 6동유럽과 소련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독일의 '경제 기적'에 대한 유용한 설명이다.

 

13) 위의 책, 19

 

14)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op.cit. 734쪽에서 발췌한 수치이다.

 

15) 매틱 op.cit. 147쪽에서 인용. J. O. 코포크(Coppock), 유럽의 필요와 자원에서 인용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9-08/capitalism-s-economic-foundations-part-iii

 

<이전 글>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1부)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3645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2부)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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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열정적인 활동가 로렌 골드너(Loren Goldner)를 추모하며

열정적인 활동가 로렌 골드너(Loren Goldner)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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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골드너가 지난 4월 12일 세상을 떠났다그는 한국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코뮤니스트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많은 활동가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했다그는 2006년 한국에서 개최된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에 참여했고코뮤니스트좌파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는 공개강연회(자본주의좌익공산주의와 계급투쟁)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미국 뉴욕의 한국 영사관 앞에서 한국 노동투사 (사노련탄압 중단과 국가보안법 철폐” 피켓 시위를 벌이는 등 국제연대에도 적극적이었다. 2012년 이후에는 한국의 코뮤니스트좌파와 의미 있는 교류를 하지는 못했지만(그의 관심사와 소통 범위는 너무 넓어서 이른바 자본의 좌파나 맑스주의에서 이탈한 이들과도 자주 교류했다), 우리는 그의 활동과 저술을 계속 주시하고 참고해 왔다.

 

우리는 로렌 골드너를 추모하며국제주의자 전망의 추모글과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가 작성한 글을 다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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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골드너를 추모하며

 

로렌 골드너 동지가 4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위대한 투쟁가의 상실이며 그의 죽음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로렌의 정치 인생은 60년대 버클리 대학 재학 중 연좌 농성과 반전 폭동으로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이러한 맥락에서 로렌은 급진주의에 빠져 마오주의스탈린주의신좌파에 대한 비판을 찾아 맑스주의를 받아들였다한동안 그는 독립 사회주의자 클럽에 가입했는데이 클럽은 나중에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국제사회주의자(IS)가 되었다하지만 그 전에 로렌은 버클리와 ISC를 떠나 초좌파의 전통에 매료되어 정기적으로 유럽을 여행하기 시작했다유럽에서 그는 야만인가 사회주의인가?(Socialisme o Barbarie), 상황주의 인터내셔널(Situationist Iinternational), 불변성(Invariance) , 장 바로(Jean Barrot), 프롤레타리아(Le Prolétaire) 및 망명 중인 이탈리아 좌파의 다른 요소들과 친숙해졌다로렌의 정치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소련이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생각과 결정적으로 단절하고그가 받아들여야 할 국제주의적 지향과 역사적 연결고리를 제공한 앙리 시몽(Henri Simon)과 만남이었다.

 

1970년대에 로렌은 뉴욕에 정착했다뉴욕에서 그는 아르바이트하며 좌파 서점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맑스를 읽으며스스로 정치적 고립을 선언하며 살았다이곳에서 그는 첫 번째 중요한 저서인 미국 노동계급의 재구성을 출간했다.

 

80년대에 로렌은 케임브리지로 이주하여 하버드에서 사서로 일하게 된다그는 코뮤니스트좌파에 동조하는 다른 사람들과 계속 교류하며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로렌은 많은 정치 서클에서 활동했지만어떤 조직과도 연계하지 않았으며그 대신 "시류에 반하는 글쓰기"를 선호했다그는 종파를 초월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그는 서로 다른 정치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 만나거나 나중에 온라인에서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했다건강이 악화할 때까지 수년간 운영한 '멜트다운(Meltdown)' 목록과 같은 여러 온라인 토론 목록을 만들었다.

 

로렌의 가장 큰 관심사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주기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90년대에는 아시아에 관심을 보였다그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장 투쟁을 따라 인도중국일본한국을 여행하며 경제 위기와 의제 자본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살았고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노동계급에 관한 중요한 저술을 집필하기도 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로렌은 반란자 노트(Insurgent Notes) 창립에 참여했고노동계급 운동을 추적하고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키며 맑스 읽기 그룹을 이끌고 중국어를 배웠다. 2017년 로렌은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로렌은 많은 자질을 갖고 있었다뛰어난 언어학자였고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지성과 겸손함을 겸비했으며모든 것에 대해 열정이 있었고 호기심이 많았으며누구에게나 항상 질문이 많았다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과 노동계급 투쟁에 대한 헌신으로 그는 전투적으로 되었고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그는 터키로 여행했고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이집트에서 살았으며스페인 남부에서 로마 공동체와 함께 살았다이탈리아에서는 보르디가를 영어권 세계에 소개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로렌은 가는 곳마다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친절한 친구이자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며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계혁명코뮤니즘을 위한 투쟁오만한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열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국제주의자 전망의 친구이자 동지였다그가 그리울 것이다.

 

국제주의자 전망(IP)

2024년 4월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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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중동 전쟁 이해하기의 함정

중동 전쟁 이해하기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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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양쪽의 끔찍한 이미지는 시청자가 입장을 정하게 해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전쟁을 하는 양쪽 진영의 전쟁 선전은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ㆍ축제 참석자가자지구 로켓포의 희생자납치된 사람들이 키부침(kibbutzim)에서 학살당한 사진.

ㆍ가자지구 폭격으로 인한 병원구급차학교주택가에 있는 희생자 사진

 

이러한 사진을 보고서 인간이 느끼는 첫 번째 반응은 피해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반응은 공격자나 방어자에 의한 역습으로 대체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반격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 부여는 가족 및 부족 관계로 조직된 농경 사회에서 행해졌던 복수의 도덕성에서 시작되었다노동자와 자본가의 이익 공동체로서의 '국'이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전쟁의 명분으로 이러한 복수의 도덕성에 성공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현재 전쟁에서 양쪽 진영이 모두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나?"라는 질문과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누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침략자와 피해자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나?"라는 질문에 대해 양쪽 모두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팔레스타인이 침략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반복해서 추방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땅에서 추방되어 약 2,000년 동안 '홀로코스트'무법자로 살아왔다." 전쟁의 명분은 민족주의의 독설로 쓰인 한 민족의 역사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이제 '식민주의'와 '민족 해방 투쟁', 한 민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학살이 다른 민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학살보다 더 나쁘다고 얘기하는 '집단 학살이야기도 등장한다학살의 규모를 측정하여 이후의 학살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아니며 슬픔은 저마다 고유하다파편으로 인한 상처의 고통은 폭격으로 온 가족이 사망한 사람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다두 경우 모두 전쟁 선전으로 복수심에 호소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이는 ‘국과 조국을 내세워 전쟁 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해 복수에 의존하는자신이 더 높은 도덕적 지위에 있다고 믿는 사람의 실체가 아니라 전쟁의 실제 모습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분명히 도덕의 영역즉 오래전에 사라졌지만민족주의 세뇌 덕분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사회 형태에 기반을 둔 도덕의 영역에 속해 있다우리는 100년 넘게 전 지구를 지배하며 인류에게 진보 없이 노동과 자본의 생산 관계를 강요해 온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살고 있다반대로 식민주의 정책에 의해 세계 시장이 형성되면서 전쟁은 제국주의 열강과 크고 작은 국가들이 동맹을 맺어 제국주의 블록으로 뭉쳐 직간접적으로(대리인을 통해서로 싸우는 전쟁으로 바뀌었다이러한 전쟁에서 민족주의는 국가를 중심으로 전체 국민을 단결시키고전쟁을 위해 노동계급을 더욱 압박하고 억압하며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으로 계급 이익을 방어하는 것을 방해하는 수단이다노동계급의 도덕성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간 전쟁이라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계급의 이해관계에 기초한다현재 중동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분석에 대한 글은 "노동계급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참조하라. (https://leftdis.wordpress.com/2023/10/26/the-working-class-and-the-war-israel-palestine/)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함정은 본질적으로 양측의 민족주의 복수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제국주의 사이 전쟁이 지속할수록 무의미하고 파괴적인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열망은 사람들의 일부에서 더 많이 일어나게 된다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이러한 열망은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국가에서 가장 쉽게 나타나는데이는 시민의 자유와도 비슷하다.

 

아랍어권 또는 이슬람권 국가에서 왔다는 이유로(때로는 몇 세대 전에차별을 통해 민족 정서를 갖게 된 이주민들은 팔레스타인 민족과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덧붙이자면이는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노동자들을 시오니스트가 되게 한 바로 그 기제이다그 결과 여러 유럽연합 국가와 미국캐나다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또한일부의 사람들이 침략자로 낙인찍힌 승리한 당사자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여부와 관계없이 패배 당사자인 팔레스타인을 주요 피해자로 여기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뉴욕 중앙역 복도에서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된 전쟁은 "나의 전쟁이 아니다"라는 독특한 구호를 내걸고 연좌 농성을 벌였다많은 시위대가 체포되었고이는 미국 시민 자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이 사건에 이어 서구의 여러 도시에서 농성이 이어졌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는데현지 언론은 이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지난 주말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전국적인 기후에 대한 시위에서 친팔레스타인 발언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내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이제 남은 것은 프랑스유럽연합미국카타르등의 국가가 어떻게든 폭력을 멈출 것이라는 희망뿐이다. '평화'는 여전히 너무 먼 곳에 있다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인도주의적 휴전', '전투 휴전', '정전등 누군가의 승리와 누군가의 패배를 향한 전쟁의 단계에 불과한 일련의 계급 질서에 불과하다정부 지도자들과 의회 정당은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을 군사적경제적이념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위선적인 그들은 '피해자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공교롭게도 미국이 제국주의 이익을 확보하는 하나 또는 다른 '단계적 완화'와 '중재'를 찬성한다고 말한다노동계급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미국과 네타냐후 진영이 부분적으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이러한 점은 EU 내 충성도를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TV 대담 테이블의 모든 가짜 토론과 소셜미디어의 모든 선동은 대중에게 두 전쟁 정당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고 망치질한다이는 미래의 전쟁나아가 중국과 미국 사이의 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의도된 행동도 어느 한쪽의 선택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된다항만노조의 전쟁 물자 적재 거부는 서방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이 아닌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한다는 이유만으로 전쟁 중인 이스라엘 측을 겨냥한 행동이다우크라이나 탈영병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탈영병 등도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다중요한 것은 무기 수송 방해와 탈영병에 대한 지원은 이스라엘에 반대하여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당사자 모두를 대상으로 명확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안타깝게도 항만노조의 활동은 종종 후자에 해당한다이러한 '행동'에 반영되는 '의식'의 의미는 '식민지배자이스라엘과 '제국주의'(미국)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이란중국러시아)에 대한 지지라는 게 분명해 보인다따라서 혁명적 소수의 반전 선전과 행동은 모든 교전 국가와 그들을 지원하는 초강대국의 제국주의 목표를 폭로하는 데 명백히 기반을 두어야 한다따라서 혁명적 소수는 전선 양쪽의 프롤레타리아트로 향해 연대해야 하며세계 자본의 모든 분파의 공격에 맞서 국제 노동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혁명적 투쟁 발전의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물론 국제주의 입장은 노동계급이 친팔레스타인과 친이스라엘로 나뉘는 잘못된 분열에 대한 훌륭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혁명적 소수가 주장하는 혁명적 패전주의는 전쟁 지역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프롤레타리아뿐만 아니라무엇보다도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지만간접적으로(대리인전쟁을 지원하고 이를 위해 노동자에 대한 억압이데올로기적 지배더 많은 착취를 강요하는 국가의 프롤레타리아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유럽과 미국에서 전쟁의 한쪽을 지지하는 위의 '전쟁 반대 투쟁'은 전쟁 양측이 모두 부르주아와 제국주의적 목표에 봉사하고 있으며둘 다 반()프롤레타리아적 이며 노동계급의 유일한 대응은 자본의 모든 분파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라는 프롤레타리아의 원칙을 침해하는 행동이다.

 

노동계급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은 역사적 경험과 현재의 계급 관계를 바탕으로 노동계급 투쟁이 전쟁을 종식할 수 있는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와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계급투쟁에서 출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할 수 있지만현실에 기초해 보면 다양한 부르주아적 '해결책'도 마찬가지다물론 가장 '급진적해결책은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 또는 모든 유대인을 멸망시키는 것이지만이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이다. '두 국가해법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중 하나이다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하나의 국가'라는 해법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된 상호 증오뿐만 아니라 억압과 착취 세력을 보존하는 각 국가의 분할 및 정복 정책으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다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세계를 계속 지배하는 한지금의 전쟁에 이어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우크라이나중동 등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주요 쟁점은 계급투쟁이다편의상 여기 있는 사람은 누구도 모든 국가와 전선 양쪽에서 자본과 국가가 의료 및 기타 서비스를 삭감하고 사람들을 억압하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지배를 강화하면서 착취를 강화하는 등 노동계급을 상대로 계급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계급투쟁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한쪽에서는 가자지구헤즈볼라이란중국과 러시아에서 장악한 지역다른 한쪽에서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주변 서방 국가들에서 노동계급에 투쟁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노동계급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라는 기사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 그럴 수 없다'이다노동자들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을 계속해야 할 뿐만 아니라그것이 자신의 부르주아지와 국가의 패배로 이어질지라도즉 혁명적 패전주의로 이어질지라도 투쟁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프롤레타리아가 계급투쟁을 포기하면 사형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그렇게 되면 가자지구의 지하 공장과 이스라엘의 지상 공장에서 무기를 생산하느라 육체적정신적으로 지친 채 상호 폭격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가리 찢기게 될 것이다.

 

ㆍ그렇게 되면 가자지구의 여성이스라엘의 예비군뉴욕의 유대인(센트럴역 농성)의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시위를 진압하고모든 생산 방해 행위를 처벌하며탈영병을 군대로 압송해야 한다.

ㆍ그리고 이란의 철강 노동자들은 '그들정권이 미사일 부품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팔레스타인을 지원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1)

ㆍ그리고 전쟁 경제에 점점 더 많이 관여하는 서방 무기 산업과 제조업 부문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프레도 코르보(FC)

2023년 11월 17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작성된 기사를 기반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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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은 이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아야톨라 정권과 러시아는 중국 주변에서 형성되고 있는 블록 일부다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고, 하마스에 미사일 부품을 공급하고 있으며, 레바논(헤즈볼라), 시리아이라크 등지에서 다양한 민병대를 지원하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이란의 좌파 부르주아의 지하 저항 단체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지하고 그들이 싸우고 있는 정권과 같은...중동 분쟁에서 '팔레스타인 인민'을 지지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항상 미국 편에 서는 우파 부르주아 계열의 지지자들은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을 지지한다.

아야톨라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부르주아들이 정권 전복의 전주곡으로 여겼던 차도르 시위(중산층이 주도당시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중산층 시위의 구호를 따르지 않자 이기적이고 비겁하다거나 경제주의자라는 조롱과 비난을 받았다.

이제 이란의 노동자들이 다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의 정권이나 우파 또는 좌파 부르주아 저항 세력과 달리노동자들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진행될 수도 있는 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는 전쟁에서 선택할 수 있는 편이 없다노동자들은 계급 이익을 옹호하고 이란의 모든 부르주아 분파에 대항하는 투쟁을 이란 국가에 대한 공세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을 종식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출처>

https://leftdis.wordpress.com/2023/11/17/traps-in-understanding-the-war-in-the-middle-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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