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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6/07/31
    [코뮤니스트 23호] 협조
    자유로운 영혼
  2. 2026/07/31
    평의회 운동 평가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조직화
    자유로운 영혼

[코뮤니스트 23호] 협조

협조

어느 위원장에게

 

 

 

왼손이 아는 걸 오른손이 모를 리 없다

고통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서로 방패가 될 때

슬픔의 전이를 막을 수 있다

말을 건네고 들어줄 곁이 있어야

고립의 깜깜한 골짜기에서 넘어지지 않는다

혼자 살 수 없는 단순명쾌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수고로움과 가난에 말을 걸고 손을 내민다

협조란 그런 것

함께 주먹 쥐던 손을 뿌리치고

주먹을 쥐게 만든 손과 악수를 하는 건

배신이다
 

 

신경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약력

 

신경현 197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시집 그 노래를 들어라, 따뜻한 밥, 당부가 있다. 전국현장노동자글쓰기모임, ‘해방글터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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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의회 운동 평가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조직화

평의회 운동 평가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조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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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의 혁명적 조직화 문제는 노동자 자기해방 원칙의 핵심이다. 맑스와 엥겔스 이래, 1 인터내셔널의 구호가 된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자기 과업이어야 한다”(국제노동자협회규약) 라는 원칙은 모든 일관된 코뮤니스트 실천의 토대를 이룬다. 이러한 자기해방은 계급의 집단적 조직화 없이는 달성될 수 없으며,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 또는 소비에트라는 노동계급 자기 조직화의 단일 기관으로 구현되었다. 그러나 혁명 투쟁의 역사는 이러한 평의회들이 필수적이지만, 퇴보하기도 하고 국제 노동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바로 여기서 노동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투쟁적인 분파에서 비롯된 혁명당(코뮤니스트)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이 글은 2,000년대 초반 (현재의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동지들이 참여했던) 한국의 평의회 운동을 평가하고, 혁명당과 평의회의 관계, 오늘날 노동자평의회의 의미와 전망을 살펴보고자 한다.

 

1. 2,000년대 한국 평의회 운동에 대한 간략한 평가

 

아래는 2002노동자민중회의에서 제출한 평의회 운동 제안서 일부이다.

 

평의회에 대한 악선동들

 

평의회는 꼬뮨, 소비에트 등과 같이 노동계급의 (몰계급적 공동체가 아닌)자치체를 일컫는 말이다. 또한, 평의회는 자율운동체(정신)이며 조직이다.

 

우리가 한국 사회에 평의회라는 조직운동전망을 대중적으로 제출하자마자 적잖은 이들이 무정부주의라는 딱지를 붙여댔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과거 소비에트의 맹아였던 러시아 노동자평의회에 일군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침소봉대해 악의적으로 평의회의 가치를 폄하하는 몰계급적 악선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별반 설득력을 얻지 못하자 이제 평의회란 혁명 시기에나 가서 생겨나는 조직이라는 딴지를 널어놓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 역시 근거가 없는 것으로 소비에트 이전 공장위원회 등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미성숙의 학습 상태에서 당운동에 경도된 지도부의 분별없는 발설을 그져 따라 읖조리는 앵무새 복창일 뿐이다. 이들은 파리 꼬뮨조차도 본래 존재하던 자치체가 아니라 파리 혁명 때 갑자기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이없는가. 그러나 꼬뮨은 12세기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성립된 자치체로서 사회혼란이나 영주권(領主權) 남용에 대해 사회질서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주민이 상호부조를 맹세하고 단결하여 왕 또는 영주로부터 사회단체로 인정을 강제했던 것이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왕권의 간섭이 강화되자 도시는 가두정치화하여 100년 전쟁의 혼란 속에 쇠퇴해 갔으나 자치체의 개념만은 유지돼 1871년 파리 꾜뮨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처럼 평의회 역시 혁명시기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것이 결코 아니며 투쟁기의 평의회가 혁명시기에는 노동조합까지 흡수해 계급대중 전체를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사회권력이며 정치권력을 해소시키는 자치체로 질적 전환을 꾀하는 것이다. 또한, 평의회는 투쟁을 통한 생산수단의 장악을 일차적 목표로 삼는다. 이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투쟁의 핵심과제로 놓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국유화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공장자주관리는 평의회의 전략적 목표 중 하나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공기업의 사유화를 저지하는 최선의 지름길은 국공기업의 노동자 자주관리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결코 이상이 아니다.”

 

2000년대 평의회 운동의 한계

 

하나, 노동조합(현장조직)을 넘어서는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노동자 독립 조직(파업위원회, 대중총회 등)을 통한 평의회 건설이 아닌 활동가 평의회를 건설해 노동자 조직으로 확산하려 했다.

 

, 당과 평의회의 명확한 관계 정립 속에서 당 건설-평의회 운동을 연계하지 못했다.

 

, 일국적인(전국) 조직화가 아닌 국제주의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국제적인 계급투쟁) 국제연대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 노동자 자주 관리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자본주의 아래 노동자 자주관리, 자치 경영, 협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자기착취"로 귀결된다.

- 노동자들이 기업을 살리기 위해(이윤추구를 위해) 자본주의 방식으로 경쟁함으로써 공장, 지역, 산업부문 사이에 서로 분리되고 고립되어 노동계급을 분산시킨다.

- 자본주의 쇠퇴기에는 노동계급의 과제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철폐에 있는데도, 노동계급을 투쟁 대신 자본주의 경제 문제에 속박시킨다.

- 노동계급이 진정 생산의 경영을 인수(생산수단의 사회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인 수준의 권력에서 가능할 뿐이며, 이것은 자본주의 법칙의 틀 안에서가 아니라 그 법칙의 파괴를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

 

2. 노동자평의회의 역사와 의미

 

19세기 초 노동계급의 운동이 역사적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필연적으로 이전 세대의 많은 용어를 대체하게 되었다. 모든 종류의 노동자와 혁명가들은 다양한 "클럽", "조합", "위원회", "협회", "정당", "노동조합", 그리고 "코뮌""평의회"를 조직하려고 했다. 그 용어는 상당히 모호했지만, 이미 어떤 종류의 독립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1) 파리 코뮌

 

파리코뮌은 노동자 스스로 사회조직을 건설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도시구역에 따라 구성된 무장한 노동자들이 지키는 위원회가 지도자를 선출했으며 노동자 민병대를 창설했다. 이것이 최초의 평의회형태이다.

 

18713, 프랑코-프로이센 전쟁의 여파로 파리의 노동자들은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일어섰고, 그 과정에서 단명한 혁명 정부, 즉 파리 코뮌, 더 정확하게는 공동체 평의회, 프랑스어로 콩 세유 코뮌((conseil communal) 정부를 수립했다. 혁명 대대의 대표들로 구성된 방위군 중앙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한 후, 공동체 평의회 선거를 발표했다. 투표권을 가진 파리의 485,000명 중 275,000명이 이 선거에 참여했다. 베르사유에 있는 권력자들은 대대적인 기권 운동을 조직했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필연적으로 봉기를 지지하는 노동계급 지역 출신이었다. 평의회에 선출된 사람 중 소수만이 노동계급 출신이었지만, 통과된 법령 대부분은 파리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 소환할 수 있는 대의원들로 구성되어 행정권과 입법권을 모두 행사하는 파리 코뮌은 우리가 원시 노동자평의회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당시 맑스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마침내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형태가 발견되었다. 계급의 존재와 그에 따른 계급 지배의 기반이 되는 경제적 토대를 뿌리 뽑기 위한 지렛대이다.” (맑스 1871프랑스 내전)

 

궁극적으로, 노동계급 민주주의에 대한 이 짧은 실험은 몇 주 만에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실험은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이 실제로 어떻게 구현될지에 대한 많은 교훈을 남겼다.

 

2) 소비에트

 

노동자평의회, 즉 러시아어로 소비에트로 알려진 조직은 1905년 혁명 과정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1905년 러시아에서 홍수처럼 터져 나온 대대적 파업의 물결은 전대미문의 폭발이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상상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깨고 나온 것이었다. 서로 다른 직업군들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즉각적인 요구들과 혁명투쟁 사이의 구분도 낡은 것이었다. 이에 (창조적) 자극을 받은 노동자 대중들은 파리코뮨에 이어 스스로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를 탄생시킨다.

 

대대적 파업의 비밀은 프롤레타리아가 다시 전인적인 인간으로 되려는 노력이다. 대대적 파업에서는 직업, 산업 부분, 국가 등의 구분들이 없어진다. 경쟁을 부추기는 -또 사고와 감정 사이에서의- 이러한 분리들이 의문시될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에서 투쟁하는 이들이 어떻게 웃고 노래했는지를 묘사하며 기쁨을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았고, 밤이 되어도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개별화될 필요가 없도록 거리에 남아있었다.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깊은 집단적인 이상주의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혁명 시기의 폭풍 속에서 바로 노동자는 (노동조합의) 도움을 청하는 신중한 가장에서, 혁명의 낭만주의자'로 변하고,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최고의 재산 즉, 자신의 목숨마저도 투쟁의 이상에 비해서는 하찮게 보인다."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 133)

 

최초의 소비에트는 19055, 볼셰비키의 거점인-보즈네센스크(Ivanovo-Voznesensk)에서 4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이던 중에 등장했다. 역설적으로, 노동자들이 협상을 더 원활히 하기 위해 작업장에서 대의원을 선출해야 한다고 제안한 것은 공장 감독관이었다. 다음날 110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소비에트는 본질적으로 개별 공장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위한 파업위원회였다. 그것은 19057월까지 존재했으며 군사적 탄압, 폭동, 극심한 피로에도 불구하고 파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바노보-보즈넨스크 소비에트가 해체된 같은 달에, 이웃 도시 코스트로마(Kostroma)에서 또 다른 소비에트가 결성되었지만, 몇 주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파업 운동을 통합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0510월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소비에트가 출현한 것이다. 세 번째 회의에서는 96개 사업장에서 온 226명의 대표, 새로 결성된 노동조합의 대표들, 그리고 자문의 역할로 사회주의 정당들(멘셰비키, 볼셰비키, 사회혁명당)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곧 자체 신문을 발행했고 러시아 제국 다른 지역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소비에트를 만들 수 있는 등대가 되었다. 1905년 혁명은 일부 지역에서는 고갈로, 다른 지역에서는 탄압으로 패배했지만, 노동자들에게 다음 투쟁에 필요한 많은 경험을 제공했다.

 

소비에트는 1905년에 자발적으로 출현한다. 소비에트의 본질은 노동계급의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다양한 계획들, 토론들,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온 제안들, 모든 사건의 발전, 그리고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개입이 소비에트를 탄생시켰다. 이 과정을 세밀히 관찰하면, "대규모 토론과 투쟁의 급격한 급진화"라는 두 가지 결정적 요인을 확인할 수 있다.

 

19059월부터 대중 내부에 생겨난 주목할 만한 '의식의 성숙'은 토론에 대한 엄청난 욕구의 발전이었다. 공장, 대학, 지방으로 퍼진 격론은 9월 한 달 동안 발전했던 새로운현상이었다.

 

"트레포프의 무한한 테러가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대학 담장에서 생겨나고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대중들의 모임은 1905년 가을의 가장 놀라운 정치적 역설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들은 복도, 강당 그리고 홀을 가득 채웠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곧장 대학으로 갔다. 블라디미르대학 강당에 모인 청중을 보고 깜짝 놀란 공식 전신기관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대학생들 외에도 군중은 다수의 관련 없는 모든 남녀, 고등학교 학생들, 도시 사립학교 학생들, 노동자들, 그리고 잡다한 무리로 구성되었다." (트로츠키, 1905"10월 파업)

 

하지만 이 모임은 잡다한 무리가 아니라 '엄격한 규율과 성숙함을 유지하면서 질서 있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토론하고 심사숙고하는 집단적 그룹이었다.

 

소비에트 회의는 부르주아 의회 또는 탁상공론적인 학자들 내의 논쟁과는 정반대였다.

 

"소비에트 회의에는 대의제의 궤양인 어떠한 과장과 허풍도 존재하지 않았다! 논의 중인 문제( 파업의 확산 및 두마 앞으로 보낼 요구)는 전적으로 현실적이었고 토론은 간결하고, 활기차며, 효율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누군가는 쥐꼬리만 한 매시간이 설명된다고 생각했다. 전체 회의에 엄격한 승인을 가진 의장은 미사여구로 흐르는 최소한의 흐름도 꼼꼼히 살폈다." (같은 책)

 

활기 넘치고 현실적이며 동시에 심오하고 구체적인 토론은 노동자들의 의식과 사회 심리에 변화를 나타냈고, 이 두 가지의 발전에 있어서 강력한 요인이었다. 의식은 사회 정세와 그 전망에 대한, 대중 행동에서 생겨나는 진정한 힘에 대한, 그리고 동지와 적을 구분하고, 미래 세계의 목표를 정교히 하는 경로 설정의 필요성에 대한 집단적인 이해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 심리는 의식과 다르지만, 그것과 함께 실재하는 요인이다. 그리고 이 심리는 노동자들의 도덕과 생활태도를, 그들의 확산하는 연대를, 그들의 다른 노동자들과의 공감을, 그들의 열린 마음 및 학습을 그리고 공동의 목적에 대한 그들의 이타적인 헌신을 나타내는 요인이다.

 

3) 러시아혁명

 

그리고 1905년의 경험은 1917년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가지면서 러시아에서 재탄생한다. 러시아혁명의 자극과 1920년대 혁명적 물결은 독일과 헝가리에서 노동계급에 생동하는 힘과 넘치는 생각들을 강하게 분출하게 했다. 투쟁이 발전함과 동시에, 모든 장소에서 노동자평의회노동자총회가 나타났다.

 

1차 세계대전은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처음에는 애국심의 열정에 부딪혔지만, 제국주의 갈등의 가혹한 현실은 곧 각 나라를 강타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노동계급은 마침내 시위, 파업, 봉기로 대응했다. 소비에트를 결성하려는 의지가 다시 한번 생겨났고, 노동자들은 파업위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처음부터 혁명의 범위를 제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172, 노동자들의 등 뒤에서 두마의 정치인들은 타우리데 궁전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임시 집행위원회를 결성했다. 차르의 붕괴에 직면하여, 그들은 러시아를 민주적 공화국으로 변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1917년 혁명의 이야기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그들 자기 대표로 채우고 러시아 제국 전역에 걸쳐 노동자, 병사, 농민들의 더 많은 소비에트를 창조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권력 행사를 위한 조직으로 변화시켰는가 하는 것이다.

 

1905년의 교훈을 배운 것은 부르주아지만이 아니었다. 소비에트가 처음 등장했을 때, 레닌과 같은 혁명가들은 이미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성찰했다.

 

노동자 대표인가? 아니면 당의 소비에트인가? 나는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그 결정은 확실히 노동자 대표의 소비에트와 당 둘 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나는 소비에트가 어느 한 당을 전적으로 고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는 총파업을 통해, 파업과 관련하여,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 누가 파업을 주도하고 승리로 마무리했는가? ()사회민주당원을 포함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였다. 다행히도 소수이다. ()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내가 가진 불완전하고 유일한 "서류상" 정보만을 근거로) 정치적으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임시 혁명 정부의 태동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레닌, 우리의 임무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1905)

 

나중에 레닌은 스위스에 있는 동안 쓴 국가와 혁명에 대한 준비 노트에서, 맑스의 의견을 반영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낡은 ("기성") 국가 기구와 의회를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그들의 수탁자들로 대체하는 것!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 (레닌, 국가에 관한 맑스주의, 1917)

 

레닌은 볼셰비키들 사이에서 이 강령을 위해 싸웠고, 곧이어 볼셰비키들도 소비에트 내에서 이 강령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소비에트 조직에 참여했고, 소환권이 도입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거리에서 외쳤다. 191710월까지, 그 강령은 혁명적 노동자 다수파의 승인을 얻었고, 지금까지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았던 임시정부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자체의 군사혁명위원회에 의해 무너졌다.

 

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비준된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은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했다. 10월 이후 첫 6개월 동안 소비에트 원칙이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었지만, 내전 과정에서 이전 지배계급이 외부 군사 개입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하면서 소비에트는 점차 쇠퇴했다. 고립, 전쟁, 기근, 질병과 같은 객관적인 요인이 이러한 사태의 배후에 있었지만, 주관적인 요인은 상황을 개선하지 못했다.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VTsIK) 위에 인민위원회(Sovnarkom)가 창설된 것, 좌파 사회혁명당(SR)이 일당 정부를 남기고 인민위원회를 떠난 것, 코뮤니스트당에 의한 선거구 조작 등이 그 보기이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이러한 과정에 대해 광범위하게 글을 작성한 바가 있다. ()혁명 과정에서 소련이 된 소비에트 러시아는 1991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이었지만, 소비에트는 1921년에 이미 빈 껍데기였다. 코뮤니스트당 안팎에서 방향을 바꾸려는 사람들의 용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7년 혁명은 스탈린이 결정타를 날리면서 점진적인 퇴보로 패배했다.

 

4) 노동자평의회의 의미 : 프롤레타리아 자기 조직화의 표현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혁명, 또는 1918년부터 1923년까지의 독일 노동자 봉기와 같은 격렬한 투쟁 시기에 등장한 이 평의회는 정치적 소속이나 노동조합 가입 여부와 관계없이 노동자들이 투쟁을 이끌고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마련하는 단일 조직 형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평의회는 단순히 임시 통치 기구가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 전체에 도전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초기 형태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체적인 표현, 즉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고 생산관계를 변혁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는 조직 형태이다.

 

위에서 간략히 살펴본 것과 같이, 노동자평의회는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를 구현한다.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물론 이러한 정의만으로는 현실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코뮌이나 소비에트도 항상 이 기준을 완벽히 충족시킨 것은 아니다.

 

특정 공장이나 부문을 넘어 넓게 노동자를 포괄

위임과 소환의 원칙에 따라 조직화

공동 목표를 향한 운동의 통합을 지향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분리를 타파

노동계급 전체가 권력을 행사하는 데 적합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와 유사한 기구들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독일, 헝가리, 폴란드, 우크라이나, 핀란드, 노르웨이 등의 노동자평의회

(1918~9)

이탈리아의 공장평의회 (1919~20)

중국의 코뮌과 파업위원회 (1925~7)

쿠바의 설탕 공장 소비에트 (1933)

스페인의 도시 및 농촌 협동조합 (1936~7)

베트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의 노동자평의회 (1944~7)

헝가리와 폴란드의 노동자평의회 (1956)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의 파업위원회 및 공장위원회 (1968~9)

칠레의 코르돈 (1972~3)

포르투갈과 아르헨티나의 파업위원회 (1974~6)

이란의 슈라스 (1978~9)

폴란드의 공장 연대 파업위원회 (1980~1)

아르헨티나 총회 (2001)

이란의 조직위원회 (2021)

 

이러한 사례는 완전하지 않으며, 그들이 그 이름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한국의 평의회 전국모임도 마찬가지) 우리가 실제 노동자평의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계급투쟁의 절정기에 노동자들이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그들만의 계급적 기관을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혁명가들은 이 과정을 돕고 촉진할 수 있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계급적 기관에 혁명가들이 개입하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다른 정치 세력이 그 공백을 메우고 지배하며, 방해하고 무력화할 것이다. 보기를 들어, 독일의 사회민주당(1918), 베트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1944-7)의 스탈린주의, 이란(1978-9)과 폴란드(1980-1)의 종교 우파가 그랬다.

 

이렇게 역사는 평의회가 퇴보하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계급의 자기 조직화 기구들 내에서 진정한 코뮤니스트 강령 노선을 일관되게 옹호할 수 있는 혁명 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3. 혁명당과 평의회의 관계

 

1) 혁명당: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중요한 도구

 

맑스, 엥겔스, 그리고 코뮤니스트좌파의 특정 흐름이 생각했던 혁명당은 노동계급 외부에 있거나 노동계급으로부터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떤 시점에도, 어떤 이유로도, 자신의 투쟁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는데 다른 이에게 위임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기 정당에도 권력을 그저 넘겨주지 않는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정치강령, 1952)

 

노동계급에 이행기(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어떤 별개의 단계가 아니라, 노동자평의회 통치의 수립과 동시에 시작되어 계급의 최종적인 소멸로 끝나는 자본주의 사회 관계를 해체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의 성공은 궁극적으로 노동자평의회(그리고 평의회가 운영할 수많은 다른 형태의 협회)의 창조적 활동을 통해 표현되는 수백만 노동자들의 자기 주도성과 자기 조직화의 존재에 달려 있다. 동시에 혁명당은 평의회 안에서 자신을 해체할 수 없다. 계급이 최종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혁명의 전 세계적 확산을 돕고 코뮤니스트 강령의 채택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 역할이다. 계급 전체를 아우르는 기관의 설립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사상과 관행을 근절하기 위한 투쟁의 시작일 뿐이다. 국제주의자들의 혁명적 소수는 새로운 사회 건설 시도를 방해하려는 모든 개량주의적이고 순응주의적인 경향에 반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국제적 정당으로 나아가야 할 혁명당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 가장 의식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분파의 결정체로서, 일관된 혁명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명확한 코뮤니스트 강령이 있어야 한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조직화에 뿌리를 두고, 역사적으로 혁명 시기에도 종종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위협해 온 해로운 기회주의적 일탈에 맞서 싸워야 한다.

 

노동자 운동의 역사는 대리주의조직숭배라는 두 가지 함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대리주의는 종종 블랑키주의 시각과 연관되어 당의 자율화를 초래하는데, 이는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조직화에 의존하지 않고 그 '이름'으로 행동하거나, 어떠한 정당성도 없이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대리주의 관점과는 달리, 혁명당은 평의회를 대체하거나 관료적으로 운영하지 않는다. 평의회 내에서 당원들은 아래로부터 민주적이고 소환 가능한 방식으로 선출되어 코뮤니스트 노선을 관철해야 한다.

 

한편, 평의회 조직의 숭배는 평의회 형태를 보편적인 해결책으로 이상화하는 데서 비롯되며, 평의회가 "시장 사회주의"에 기반을 둔 개혁주의 이념, (가장 진보적일 경우에도) 분권화된 물물교환, 또는 단순히 부르주아적 사상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내적 모순과 지역적·부문적 분열(더 나아가 혁명 시기에도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 질서로부터 강력하고 지속적인 압력을 받는다는 점) 때문에, 명확한 혁명 의식이 이끌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적 규범을 그대로 재생산할 수 있다. 1918~1920년 독일의 경험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평의회주의는 당의 역할을 부정함으로써 평의회를 이러한 악용에 더욱 취약하게 만들고, 이는 분명히 퇴보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더욱이 당 역시 모든 위험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므로, 러시아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계급의 기초로부터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역사적 교훈과 현재의 전망

 

러시아혁명과 독일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역사적 경험들은 당과 평의회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보여준다. 러시아에서 1917년 소비에트는 권력 장악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내전, 고립, 프롤레타리아트의 고갈이라는 극적인 물질적 여건으로 인해 약화했다.

 

독일에서는 평의회에 뿌리를 둔 강력한 혁명 정당의 부재(게다가 부르주아지와 개량주의 노동조합의 막대한 영향력)로 인해 사회민주주의가 혁명적 잠재력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경험들은 혁명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당은 명확한 코뮤니스트 강령을 방어하며, 노동자평의회 내에서 활동하면서도 계급을 대체하지 않아야 한다.

 

현재 자본주의 위기-제국주의 전쟁 속에서 코뮤니스트와 혁명적 노동자들은 과거의 교훈을 바탕으로 노동계급 자기 조직화 기관 안에서 투쟁할 수 있는 국제적인 혁명당을 건설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금은 비록 소수지만, 국제주의-코뮤니스트 원칙을 방어하며 국제적으로 연대하고 투쟁하는 동지들의 입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전망을 대신한다.

 

노동계급이 다시 투쟁에 나선다면, 그리고 살아갈 지구가 남아 있으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면, 그 결과로 계급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이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처음에는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또는 지역 협회에서 생겨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사회적, 정치적 주춧돌이 될 것이다. 미래의 노동자평의회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혁명가들이 계급투쟁의 필요성에 의해 결정될 것들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생겨나는 모든 기구의 계급적 성격을 규명할 수 있어야 하며, 자본주의 통치의 전복, 노동자평의회 통치, 계급 없는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코뮤니스트 강령을 제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요컨대, 노동자평의회와 혁명조직은 모두 필수적이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20229)

 

우리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우리는 지난 수년간 자본의 순종적인 동맹자임을 충분히 입증해 온 노동조합과 제도권 정당에 의존할 수 없다. 우리는 산발적인 파업, 행동의 날, 산책하는 시위를 끝내고, 평화주의와 법치주의를 끝내야 한다. 우리는 계급적 방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대중집회나 파업위원회 형태로 독립적으로 조직하고, 투쟁을 확대하고 전면화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야만으로의 회귀를 막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나 지름길은 없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 20259)

 

노동자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선거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우리의 삶과 투쟁에 직접 도움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다. 노동자민주주의는 선출자를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어 선출한 사람이 통제할 수 있고, 모든 대표자의 특권을 폐지하여 위임받지 않은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아래로부터의 직접 민주주의다. 노동계급은 위대한 투쟁의 역사에서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독립적인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노동자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다.

 

노동계급은 특히,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수백만, 수천만 명이 자기 삶의 수준과 일상을 스스로 결정하고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노동자들이 투쟁의 물결 속에서 자주적으로 투쟁을 조절-통합하고 자기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냈다.

 

미래에 노동자 투쟁이 대대적으로 확산하고 계급의식이 발전하여 세계적인 계급투쟁이 벌어진다면, 세계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계급투쟁이 혁명적 절정에 이르고, 마침내 지배계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노동계급은 자신의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를 통하여 생산과 사회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이다. 이때 비로소 노동계급은 처음으로 자기 권력을 갖게 되며, 사회는 계급 철폐와 인간해방을 위한 자유로운 인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민주주의로 대체될 것이다.

 

노동자민주주의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민중이 대중총회와 파업위원회에서 발전시킬 수 있다. <대중총회>는 모든 노동자와 연대하는 동지들에게 열려있는 투쟁의 공간으로, 대중총회 참여자들이 토론을 통해 모든 것을 직접 결정하고 공동으로 책임지는 방식이다. 대중총회에서는 흩어져 있던 노동자의 개별적인 요구를 모으고 집중하여 공동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작업장/업종/부문을 넘어 진정한 계급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 <파업위원회>는 파업 투쟁에서 조합원과 비조합원, 정규직과 비정규직 구분 없이 모든 노동자가 참여할 수 있고,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는 대표단을 선출해, 파업 노동자 스스로 투쟁을 결정하고 통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파업만이 관료주의, 조합주의를 넘어 계급투쟁을 확산할 수 있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2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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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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