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벽 속의 요정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일까? 도처에서 삶의 무게에 짓눌리다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날에, 한 편 연극을 보면서 드는 의문이 내내 가슴을 누른다.

 

2월 14일부터 24일까지 혜화동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김성녀의 뮤지컬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이 공연된다. 2005년 초연 이래 수많은 찬사와 호평을 받아온 연극을 보러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울 앤님의 덕분이다. 앤님에게 찬양과 영광 있으라~!(^^;;;)

 

스페인 내전 이후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극이라고는 하지만, 스페인의 역사를 전혀 모르더라도 이 연극을 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오히려 배삼식의 극본은 이 일이 한국사회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아무런 의문이 없을 정도로 차근차근히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역사 자체가 스페인 내전의 역사만큼이나 드라마틱한 것이다보니 "벽 속의 요정"의 이야기는 온전히 우리 윗세대 또는 그 윗세대의 이야기로 가슴을 파고 든다.

 

남북전쟁 이후 40년 간 벽 속에 숨어 사는 남편을 지켜주는 아내,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보던 딸. 그들의 아프고 힘든 생활은 이데올로기 대립이 가져다 준 고통이기도 했고, 전쟁의 광기가 가져다 준 핏속을 흐르는 저주의 주술이기도 했다. 전쟁의 뒤끝에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곧잘 적이라 규정된 자들에 대한 살육으로 나타난다. 그 사회적 광기와 집단살육의 틈바구니 속에서 인간이기를 원했던 한 혁명가의 좌절, 그 혁명가의 가족이 겪어야 하는 고난.

 

분단이 된 후 전쟁을 겪고 서로가 총부리를 들이민 채 충혈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지낸 세월이 벌써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핏속을 돌며 대를 이어 유전되는 분노와 저주는 잊을만 할 때마다 곳곳에서 튀어 나온다. 아직도 평화와 화해는 벽 속에 갇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벽속에 갇힌 채 요정으로 딸을 만나야 했던 그 사람의 아픔은 연극의 말미에 햇볕을 쬐지만(스페인의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사회는 자기의 아픔을 아직도 치유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벽 속으로 구겨넣고 있다.

 

이 연극은 어쩌면 햇볕을 쬐지 못한 채 반 세기가 넘도록 벽 속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이 사회의 살풀이일지도 모르겠다. 이젠 다 깨고 나오자. 햇볕을 보고 벽 속에 가두었던 우리 자신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자. 이 연극을 보면서 느낀 감정 중 첫 번째는 그것이었다.

 

김성녀는 그 이름의 무게감만큼이나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연극에서 뿜어낸다. 혼자서 거의 30명의 역할을 해내는 그녀는 환갑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5살짜리 어린애에서부터 하다못해 산속에 사는 신령의 모습까지 세대와 연령과 성을 넘어서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의 연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희망과 사랑을 버리지 않는 긍정적인 삶의 모습을 추구한다. 그리고 노래한다. "살아 있는 건 아름다운 것"이라고.

 

단지 생명이 붙어 있는 것만을 이야기했다면 그것을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게다. 벽 속에 숨어 40년을 살아가야하는 운명을 "살아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그 벽 바깥쪽에는 언제든 자신을 잡아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자들이 돌아다닌다. 언제 벽이 뚫리고 자신의 도피생활이 끝날지 모른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스스로 그 벽을 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을 것이다. 자신에겐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벽 안에 유폐시킨 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스스로도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벽 안쪽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40년을 자신을 위해 같이 아파하고 같이 웃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람이 있었다. 벽 속에 있던 자만이 일방적으로 취하는 사랑이 아니었다. 벽 안을 바라보며 눈물을 지으면서도 그러한 삶 자체를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으로 전환시키면서 그 행복을 모두 다 간직하려는 여인. 그 여인은 "스텐카 라친"을 발음하지 못해 "스테카치"라고 혀 짧은 말로 부르던 어린 딸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이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의지하고 그 안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한다. 그들은 끝내 살아남았고, 그리고 노래한다. "살아 있는 건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것은 단지 삶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신들에 대한 헌사였다. 그 고통을, 그 좌절을, 그 공포를 이겨내고 끝내 살아남은 자신들에 대한 자축이었고 서로에 대한 격려였다. 그리고 그들은 충분히 그러한 축하를 받을 자격이 있다.

 

김성녀는 혼자서 이 모든 역사를 보여준다. 물론 극본을 쓴 배삼식이나 연출을 한 김성녀의 남편 손진책, 그리고 음악을 맡은 김철환 등의 뛰어난 앙상블이 이 연극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지만 이 연극이 훌륭한 연극으로 남게 된 것은 역시 김성녀라는 뛰어난 배우의 힘이다. 침잠해질 수 있는 부분에서 적절하게 감정을 조율해내면서 그 감정을 정확하게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문화에 대해선 거의 백치에 가까운 행인도 알 수 있다. 그런 행인의 얄팍한 수준에 비추어볼 때 김성녀는 행인으로서는 섣부른 평가를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임이 분명하다.

 

극 말미에 김성녀는 다시 한 번 "살아 있는 건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한다. 행인이 느낀 감정 중 세 번째는 이 노래는 김성녀 자신에게 바치는 노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녀의 인생 전반을 거치는 동안 그녀가 이루었던 많은 성과들, 그것들에 대한 자부심이었고, 그것들을 이루어낸 자신이 대견하다는 것이었고, 그리고 이 연극이 바로 그 모든 것들을 모두 묶어서 다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헌사를 할 자격을 얻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건 아름다운 것"이리라. 내 생애의 마지막에 나는 나 자신에게 "살아 있는 건 아름다운 것"이라고 자족하면서 노래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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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7 12:13 2008/02/17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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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성녀의 아우라. 제대로 보여주는 공연이었죠.

  2. "문화에 대해선 거의 백치에 가까운 행인"께서 "앤님 덕분"에 문화비평에까지 뻥구라를... 우와~ 행인의 "앤님에게 찬양과 영광 있으라~!"

  3. 오늘 '벽속의 유령'이라고 한 게 이거군요.ㅋㅋ

  4. 박노인/ 오오... 보셨군요. 전 기회가 되면 또 볼려구용. ㅎㅎ

    말걸기/ 앤님교(敎)라도 하나 만들어야겠구만. ㅋ

    은희/ ㅠㅠ 그건 실수라니깐요...

  5. 행인님의 이 글을 보면서 살아 있음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절절하게 느낍니다. 제가 (지금 제 블로그에 올라 와 있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하나-비]에 관한 글을 쓰면서, 나중에 이야기하려고 따로 덜어 놓은 것이 있었는데, 행인님의 글을 보면서 무언인가 찌릿한 느낌을 받는 부분이 생겼습니다. 조금 더 생각을 해보고 나중에 덜어 낸 것을 확장해서 글을 하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제나 그렇듯이 잘 읽고 갑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