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짜리 차별 금지법
당 성소수자 위원회 위원장께서 전화를 했다. 법무부가 차별금지법 시안에서 애초 20개 항목으로 정했던 차별의 종류 중 7개 항목을 삭제한 채 국무회의로 넘기려 한단다. 뭘 삭제하나 싶어서 살펴봤더니 이렇다.
<원안>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전력, 성적지향, 학력, 사회적 신분
<삭제항목>
병력, 범죄전력, 학력, 출신국가, 언어, 가족환경, 성적지향
차별금지법이 입법예고된 후 가장 적극적으로 이 법안에 문제를 제기했던 집단은 기독교 단체들이었다. '성적지향'과 관련된 차별행위를 금지하겠다는 원래 방침에 대해 기독교 단체들이 교리를 들며 강력히 반발했던 것이다. 하긴 서울시를 통째로 야훼께 봉헌했던 전직 시장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되어 설치고 있는 마당에 기독교 단체들이 큰 소리 못 낼 상황도 아니긴 하다.
그런데 도대체 성적지향이라는 것을 이유로 왜 차별을 받아야 되나? 기업에서 일을 하는 데에 동성애라는 것이 일을 망치는 원인이라도 되는 건가? 포털들을 잠깐 검색하니 이걸 뭐 선천적이라는 둥 후천적이라는 둥 찬반논리들이 대거 동원되어 말이 많은데, 선천적이고 후천적이고 그걸 왜 따지나? 사람이 사람 좋아한다는데.
'성적지향'에 대해서는 성소수자운동단체들이 강력 반발할 모양이다. 그런데 다른 항목에 대해서는 강력히 문제를 제기할 단위가 마땅히 보이질 않는다. 예를 들어 '학력'을 원인으로 하는 차별 금지에 대해서 누가 한 마디 할지 주목하고 있다. 개개인들이 목소리를 내는 일은 있겠으나 그동안 교육문제에 대해서 큰소리 쳐왔던 단위들 중 어느 단위가 학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지 상당히 관심이 간다.
'학벌철폐'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일단 큰 움직임이 없다. 그건 '학벌'에 대한 관심 자체가 '학력'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학벌철폐'는 그 기준이 '대학'이다. 즉 어느 대학을 나왔던 출신대학의 간판때문에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과, 어느 누구던 대학을 쉽게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대학 갈 때 돈 쳐 들이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 '학벌철폐' 운동의 주요 테마였다.
여기에 묘한 함정이 숨어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대학"이라는 곳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자꾸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물론 고교 졸업생의 80%가 훨씬 넘는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는 이 묘한 상황에서(스위스는 27%) '학력'이라는 말보다 '학벌'이라는 말이 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되, 말 그대로 능력과는 관계 없이 배운 거 없어 차별받는 사람들의 아픔은 자꾸만 부수적인 이야기가 되어 간다.
한국의 학부모들이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정도가 세계에 유래없이 높을 정도라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한다. 교육에 대한 관심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나 그 교육이 단지 '대학', 그것도 세칭 "1류 대학"에 대한 관심으로 집결되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교육여건으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밥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팽창할 대로 팽창한 사교육시장은 수많은 청년실업자들을 흡수하는 고용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수많은 교원들은 바로 이런 교육열풍 덕분에 철밥통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컨대 로스쿨과 같은 전문대학원제라는 학제를 늘려서라도 밥그릇을 확보하려는 대학교수들이 과연 얼마나 열성적으로 '학력'차별을 없애자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법무부가 7개 항목의 차별을 뺀 이유는 차별금지법을 연내에 통과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로 이 7개 항목이 한국에 존재하는 차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병을 앓았거나 앓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마치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생각하며 산다. 주변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많은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무상의료체계가 부실해서 당한 고통을 자신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죄의식에 빠진다.
범죄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건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짓을 한 사람들이라는 한계로 인해 자신들이 차별을 받더라도 그걸 인과응보라 감내하면서 분을 삭일 수 있을 뿐이다. 더러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들의 행동은 순전히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고 오히려 그 분노에 따른 행동이 또다른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출신국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국수주의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괜히 자기 이야기를 큰 소리로 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가정환경으로 인한 차별을 받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받는 차별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의 가정환경을 폭로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어찌 자신이 가진 컴플렉스를 쉽게 노출시킬 수 있겠는가?
살펴본 것처럼 7개 항목에 속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이 사회에서 큰 소리 내기 어려운 여건에 처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결국 본 법안을 준비한 법무부가 스스로 이런 사람들을 법의 보호에서 소외시키는 차별행위를 한 것이다. 이들을 소외시켜도 사회적으로 자신들에게 큰 소리를 칠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판단을 법무부는 했던 거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결과가 나올 수가 없다.
인권지킴이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채 펀치의 강도가 그닥 강해보이지 않는 집단을 차별금지법의 보호대상에서 제외시켜버린 법무부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법무부가 인권지킴이의 역할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 7개항목을 차별금지법에서 제외시키는 짓은 하지 않아야 한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므로 일단 좀 더 지켜볼 일이지만, 일단 이런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법무부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어보인다.
반쪽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차별금지법을 왜 만들까?
말걸기/ 저렇게 되면 국가인권위원회법보다 후퇴하는 건데, 이넘의 나라는 어떻게 죄다 퇴행적인 짓들만 하고 있는지 몰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