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넘의 술버릇
행인이 한참 술독에 빠져 살 때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술 좀 마시고 취했다 싶으면 괜히 높은 곳에 기어올라가는 버릇이 생겼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군대에서 배워나온 못된 버릇이라고 생각된다.
통신병이었던 행인, 부대 밖으로 '선'깔러 가면 우선 가는 곳이 막걸리 파는 집이었고, 일단 한 잔 거하게 들이부은 다음에야 작업을 시작했겠다. 도지나(전봇대 탈 때 허리에 매고 올라가는 안전장치)도 없이, 아시바도 없이(전봇대 구멍에 끼우는 발걸이) 그 때는 죽죽 잘도 전봇대를 탔고, 동료들끼리 누가 먼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지 내기를 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어이없는 짓거리를 하면서도 안전사고 한 번 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할까.
게다가 전역한 이후 복직을 했을 때, 건설현장에서 또 그런 버릇을 키우게 된 요인이 있었다. 공장건설현장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 삼시세끼는 물론이려니와 오전 오후 두 번에 걸친 새참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밥대신 술을 퍼먹었다. 그리고는 잠깐 눈을 붙이러 간 곳이 지상 50m 높이의 굴뚝 꼭대기. 거기 누워 있으면 온 인천항만이 다 눈에 들어온다. 기분도 좋을 뿐만 아니라 금방 술이 깬다. 현장에서 술만 마셨다 하면 낮이고 밤이고 그곳에서 쉬는 시간을 가졌더랬다.
이런 전차로 어린 백성의 술버릇이 묘하게 들었으니 술만 퍼마셨다 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 지가 원숭이 동족도 아닌 참에 이렇게 높은 곳을 올라다녔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을 터. 특히 이런 버릇을 전혀 알수 없었던 학교 동기들에게 경악스러운 경험을 몇 차례 시킨 바가 있다.
늦게 들어간 대학. 가보니 뭐 별 거 없더라. 다만, 좋은 것은 학점만 포기하면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거. 이건 거의 술꾼에겐 지상천국의 그것이 아닐 수 없었다. 대학들어가서 좋았던 거 3가지를 들라면, 우선 애국조회가 없다는 거, 다음으로 주말 대청소를 하지 않는다는 거, 마지막으로 원없이 술퍼마실 수 있었다는 거 아니었던가.
항상 조석으로 만취상태, 명정의 세월을 보내던 행인, 급기야 개 못 준 술버릇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결정적으로 사단이 난 날은 처음으로 맞았던 대동제 기간이었다. 대동제 첫날이었는데, 어찌나 술을 퍼마셨는지 아무튼 아침나절 대동제 천막치는 거 도와주는 순간부터 술을 퍼마시기 시작해서 온 동네 술은 내가 다 먹을 것처럼 넙죽넙죽 잘도 받아 먹었다.
대학의 낭만이고 나발이고 그런 거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거 같고 어찌되었건 나이어린 동기들과 나이먹은 예비역들 엉키고 설켜서 제법 술을 마셨다. 대동제 술판이란 것이 그렇듯이 온 캠퍼스 여기 저기 술자리가 벌어져 있었고, 좌중에 아는 얼굴만 비치면 바로 끼어들어가 한 순배씩 돌리고 나오기를 몇 차례. 그러고선 일순 기억을 상실...
저 먼 곳에서 불빛들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매우 평화로워보였고,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번뜻거리면서 출렁이는 한강도 보였다(지금은 아파트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온 캠퍼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도처에 벌어진 주점들에서 불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밤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술이 살포시 깨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순간이 계속되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뭐 이런 저런 생각도 많이 했던 거 같다. 공장생활하던 것이며, 산속에 들어앉아 있던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등등 뭐 이런 것들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암튼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자니 술도 어지간히 깼고, 아직 한창인 주점들에서 이넘 저넘 떠드는 소리 웃는 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해서, 한잔 더 마실 요량으로 주변을 둘러본 순간... 아뿔사, 지상에 있는 사람들의 머리통이 사과알맹이 정도로 보인다. 도대체 여기가 어딘가 하고 둘러보니 못해도 지상으로부터 15~20m는 솟구쳐 있는 나무 꼭대기였다. 게다가 행인이 앉아 있던 자리는 그다지 굵지도 않은 나뭇가지가 겨우 힘을 주고 간들간들하게 붙어 있었다. 천천히 깨던 술기운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올라와있나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내려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분당 천타의 키보드 두드리는 속도로 덜커덕 거리기 시작했다.
나무가 있던 자리는 학교에서 제일 높은 언덕(?)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사방이 잘 보이는 것도 있었다. 문제는 첫째, 이넘의 나무가 너무 높았는데, 행인이 겁도 없이 꼭대기 근처까지 올라와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 나무 중간부터는 가지를 완전히 잘라내서 어디 발 걸 위치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셋째, 무슨 나문지 암튼 미끄럽기가 한량이 없어서 손발이 제대로 붙어있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방의 조명이 전부 아래서 올라오는 통에 위에서 내려다 볼 때 발 걸 자리를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올라올 수 있었다면 내려갈 수 있어야 하는데, 완전 필름이 끊겨 비몽사몽 간에 올라온 터라 어떻게 올라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 최대의 난관이었다. 이를 어찌해야할꼬... 나무가지가 삐죽빼죽 나 있는 중간까지는 어찌어찌 내려왔는데, 가지가 완전히 도려져 있는 중간부터 내려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중간이라고 해도 거진 3층 높인데, 바닥도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섣부르게 뛰어내렸다가는 다리고 발목이고 어디 하나 부러지기 십상일 듯 하고,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붙잡고 내려가자니 어디 잘 못 걸리면 얼굴을 다 갈아버릴 판국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가지에 걸터 앉아 있었다.
마침 주점판이 벌어진 천막하고 거리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서 같이 술먹던 동기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몇 차례 사람을 부르자, 한 녀석이 이쪽을 돌아보더니, "아니, 형, 거긴 왜 올라가 있는 거유?"하더니 쫓아온다. 몇 넘이 우르르 다가왔는데, 쪽팔리기가 이루 말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 빨리 내려와요."
"아, 그게..."
"화장실 간 줄 알았더니 거긴 왜 올라가 있어요?"
"글쎄 그게 나도 잘..."
"빨리 내려와요, 위험해요."
"그러게 나도 내려가고 싶은데, 어떻게 올라왔는지 기억이 안나..."
높이가 높이인지라 그냥 뛰어내리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지들도 뭐 어찌해야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 언넘이 119를 부르네 어쩌네 하는 소리가 설핏 났는데, 그렇게 되면 출생이래 대망신인지라 화급히 소리를 질렀다.
"야, 과 건물 뒤에 가면 사다리 있어. 그거 좀 가져와라."
한넘이 냉큼 뛰어가더니 곧 사다리를 가져왔다. 나무로 된 사다린데, 꽤 길이가 되서 저거면 혹시 발이 닿지 않겠는가 했다. 그런데, 왠 넘의 나무가 그리 높은지, 사다리를 거의 나무 몸뚱이에 붙이다시피 했는데도 행인이 서 있는 나뭇가지와 사다리 꼭대기 사이가 사람 키하나만큼 거리가 모자라다.
아 쒸, 이거 진짜 119를 불러야 하나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누가 소리를 꽥 지른다. "거 대충 붙잡고 내려오다 사다리에 발 걸어." 오호... 학교에서 총장 다음으로 끝발있는 사람, 다름 아닌 수위아저씨. 아아, 이제 교직원에게도 들키고, 망신살이 하늘까지 뻗치는구나... 울며 겨자먹기로 가지를 붙들고 턱걸이 하듯 매달린 후 나무 둥치를 발로 껴안았는데, 이게 워낙 행인의 다리가 짧다보니 그마저도 발이 제대로 걸리질 않는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죽을 힘을 다해 사지로 나무를 껴안았다. 반세기만에 만난 이산가족이 얼싸하고 부둥켜 안듯이 나무를 껴안고 주르르 내려오다가 겨우 겨우 발을 뻗어 사다리에 한 쪽 발이 올라갔다. 그거 만으로도 안심이 된 행인, 부들부들 떨리는 발을 사다리에 얹어놓고 한참을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다가 겨우 겨우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아니, 형. 언제 또 거기까지 올라갔어요?"
"글쎄다..."
"어떻게 올라간 거에요?"
"그걸 알았으면 벌써 내려왔게."
"아니, 근데 이게 무슨 냄새야??"
한넘이 갑자기 썩은 생선 냄새를 맡은 듯이 행인을 쳐다봤다. 그랬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는데 온 몸에서 쉰 냄새가 잔뜩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찌나 오금이 저렸던지 진땀을 몇 바가지는 흘린 것 같았고, 그게 시큼시큼하니 묘한 냄새를 피워올리고 있었던 거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이후로도 술 마시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희안한 버릇이 몇 년간 몇 차례 있었는데, 이 때 당한 개망신의 기억때문이었을까, 몇 년 안 가서 높은데 올라가는 버릇은 없어졌다. 얼마전 학교에 갔다가 갑자기 그 때 생각이 나서 나무 있던 자리를 가봤는데, 행인에게 그 쪽팔림을 선사했던 그 나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쉽다... 몇 십년 후 행인 기념관에 옮겨다 놓을려고 했는데... 쩝...
행인님의 [그넘의 술버릇] 에 관련된 글. 행인님의 높은 곳 올라가기 술버릇에 대해 읽고 나니 갑자기 나도 아련한 기억이... 2001년 늦여름, 아마도 8월 말이었던 것 같다. 나의 동기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