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감한 현상
1. 죽음, 그리고 분노
한 어린 여자아이가 죽었다. 그것도 참혹하게. 가해자는 구속되었다. 조만간 처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처벌인가? 그 처벌을 통해 죽은 아이가 살아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죽은 아이의 가족들이 평생 지고 살아야할 그 통한의 아픔을 씻을 수도 없다.
사회적인 분노의 공감대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아니, 개인적인 분노 역시 끝간데 없이 이어지고 있다. 머리털 나고 공부라는 것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인권'이라는 화두가 이렇게 거추장스러울 수가 없다. '짐승'에게 무슨 얼어죽을 인권이냐고 외치는 사람들 틈에 끼어들고 싶은 심정이다.
2. 죽음을 밑천삼는 장사치들
이 와중에 소위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 법원, 법무부를 비롯한 행정부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마구 쏟아낸다. 전자팔찌, 유전자은행, 화학적 거세, 성범죄자 집에 성범죄자임을 나타내는 표식 설치, 성범죄 전과자 야간통행금지...
때를 만났다. 할 수 있는 이야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지금 다 내뱉는다. 그 이면에 어떤 속셈들이 있는지 뻔히 보이지만 겉으로는 성범죄로부터 아동보호, 성폭력 범죄자들의 효과적인 격리, 이를 통한 사회안전을 떠들어댄다.
법안과 정책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검토할 수 있다. 사후약방문이라도 좋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도 좋다. 뭔가 이후 또다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어떤 방식이든지 용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대안들이 넘쳐 흐르는데도 열만 받는 걸까? 왜 저렇게 목청 돋구어가며 떠드는 사람들 중 일부가 장사꾼들처럼 보일까? 왜 그들이 누군가의 고통을 빌미로 자기 자신의 얼굴을 팔고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고 뭔가 하고 있는 듯이 생색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여겨지는 걸까?
3. 선후가 바뀐 논의들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들의 신고율이 매우 낮다고 한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낮에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들었더니 기소율도 다분히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형량도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다. 형법이나 기타 법률에 규정되어 있는 형량 자체는 낮지 않으나 재판과정에서 선고받는 형량이 그다지 높지 않다. 또한 형집행이 끝난 이후 성범죄자들에 대한 사회적 관리체계가 형성되어있지 않다. 여기까지는 성범죄에 있어 가해자들을 처벌하는 제도적 차원의 문제제기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각종 대안들은 주로 가해자들을 중심에 놓고, 특히 형집행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한 것이 있다. 도대체 피해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달래고 최대한 이를 구제해주기 위한 법적 제도적 방법들은 뭐가 있을까?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에 따르면 피해자들에 대한 보호조치로는 크게 상담소의 설치 운영(법 제23조, 24조)과 보호시설의 설치 운영(제25조, 26조)이 있다. 상담소가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1. 성폭력피해를 신고받거나 이에 관한 상담에 응하는 일
2. 성폭력피해로 인하여 정상적인 가정생활 및 사회생활이 어렵거나 기타 사정으로 긴급히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병원 또는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로 데려다 주는 일
3. 가해자에 대한 고소와 피해배상청구등 사법처리절차에 관하여 대한변호사협회·대한법률구조공단등 관계기관에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요청하는 일
4. 성폭력범죄의 예방 및 방지를 위한 홍보를 하는 일
5. 기타 성폭력범죄 및 성폭력피해에 관하여 조사·연구하는 일
보호시설에서 하는 일은 이렇다.
1. 상담소가 하는 일
2. 성폭력피해자를 일시보호하는 일
3. 성폭력피해자의 신체적·정신적 안정회복과 사회복귀를 도우는 일
4. 기타 성폭력피해자의 보호를 위하여 필요한 일
꽤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들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보호시설에 입소할 수 있는 기간은 6개월에 불과하다. 특별한 경우 3개월이 연장될 수는 있다. 그 6개월의 기간 동안 이들은 어느 정도의 안정회복과 사회복귀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을까?
제도적인 문제 이외에 선결해야할 과제들이 또 있다. 성범죄와 관련된 절차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의 성인지정도를 높이는 것이다. 가해자는 당연히 형 집행과정이나 형 집행 후에 이러한 조치가 필요하다. 보호관찰 대상으로 하여 주기적인 교육과 필요할 때는 교정치료를 병행해야 한다. 그것도 매우 장기간에 걸쳐서 말이다.
가해자뿐만이 아니다. 경찰, 검사, 판사들에게 정기적이고 의무적인 성인지교육이 시행되어야 한다. 매우 강도높게 말이다. 수사와 사법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이들의 성인지수준이 높아지지 않는다면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공염불에 불과하다.
가해자들에 대한 강력한 제재조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형집행과정이나 형집행 후의 주기적이고 장기적인 교정교육은 앞서 언급했다. 또한 가해자들은 사면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복권도 일부 제한하는 방법을 검토할 수 있다. 특히 복권의 경우 직업선택 등에 있어 상당한 제한이 가능하다. 아동성범죄자의 경우 아동들과 직접 대면이 가능한 직업, 예를 들어 학교나 보육시설의 교사 등은 할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제한가능권리의 범위를 면밀히 검토해볼만 하다.
논란이 되고 있는 전자팔찌, 유전자은행, 화학적 거세, 성범죄자 집에 성범죄자임을 나타내는 표식 설치, 성범죄 전과자 야간통행금지 등의 방법은 좀 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에서 한다고 다 우리가 따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거 원칙적으로 반대한다고 하니까 범죄자의 인권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느냐고 항의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이건 단지 범죄자의 인권을 위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들 기술적 방법들은 편리한 만큼 맹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방법들은 한 번 헛점이 노출될 경우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줘버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자팔찌. 절도전문가(?)들에게 내려오는 고전적 격언이 있다. "사람이 잠근 것은 사람이 열 수 있다"
전자팔찌를 감시자가 인식할 수 없는 방법으로 능숙하게 해체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자는 전자팔찌는 집에 두고 밖에 나가 사고를 친다. 별도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이 사람의 알리바이는 확실하다. 전자팔찌는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화학적 거세라고? 일종의 호르몬제(주로 Medroxyprogesterone acetate)를 투여하는 방식으로 쉽게 말해 약물에 의한 피임을 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거 얼마나 성기중심의 사고방식인가? 약물치료 받고 있는 넘이 성기삽입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성폭력을 행사할 경우 어떻게 할 건데?
밤중에 외출금지시키겠다고? 아동성폭력의 상당한 사례가 대낮에 벌어진다. 뭐 어쩌자는 건가? 검찰에서 밤마다 그 집앞을 지키겠다는 건가? 낮엔 어쩌구? 유전자은행? 이건 사실 범죄예방차원에서 취하는 방법이 아니다. 지들 발바닥에 먼지 묻히지 않고 수사하겠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유전자 은행 만들려면 해당부처에 과가 하나 신설되고 예산과 인력이 지원된다. 한마디로 지들 부처의 덩치키울려고 하는 것이 유전자 은행이다.
4. 선행과제
전자팔찌, 유전자은행, 화학적 거세, 성범죄자 집에 성범죄자임을 나타내는 표식 설치, 성범죄 전과자 야간통행금지... 이러한 방식들이 정히 필요하다면 논의하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논의가 지금처럼 경쟁적으로 생색내기를 위해 논의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굳이 성범죄자의 재범율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인권위원회의 주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여론으로 만사 해결하려는 것보다는 국가차원의 관리능력이 먼저 검토되는 것이 맞다.
다음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성인지적 감수성을 높이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룸싸롱, 단란주점의 종업원들, 노래방 도우미들을 일종의 매춘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인식이 정상적인가? 아동성폭행 사건에 분노하면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성추행을 성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그 수준이 정상적인가? '성희롱'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범죄라기 보다는 잘못된 행동 정도로 인식하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온갖 방법들에 대해 비판을 한다고 해서 '범죄자의 인권'만 강조하고 피해자의 인권은 등한시 한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격리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면 성범죄와 같은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하면 될 것이다. 굳이 전자팔찌 같은 거 동원하지 않고도 말이다. 평생 감옥에서 썩도록 만들거나 아예 어디 집단 수용소 같은 거 만들어서 그리로 보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격리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보다 근원적인 차원의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행인의 [난감한 현상] 에 관련된 글. 제1야당의 사무총장이 성추행으로 물의를 빚고 모든 당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술자리에서 동아일보 여기자를 성추행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