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한 수준의 말장난

솔직히 말해서 강정구교수의 지난번 칼럼은 학술적으로도 별무 가치가 없는 글이라고 판단한다. 민교협 등 제 단체에서 학술적인 의견을 사법적 잣대로 처벌한다는(그것도 국가보안법이라는 시대의 악법으로!) 것이 부당하다는 의견을 냈을 때도, 사상표현의 문제를 긴절한 위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법처리한다는 데는 반대했지만 강정구 교수의 글이 학술적 의견이라는데는 동의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이 학술적 분야가 아니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할 '꺼리'가 없고...

 

강정구 교수를 본격적으로 사법심판할 모양이다. 구속수사방침을 결정했다는 수사기관의 발표가 있었고, 구체적인 혐의가 국가보안법상 고무찬양죄라는 것도 알려졌다. 그넘의 국가보안법, 참으로 질경이같은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아, 이건 질경이에 대한 모독이다. 참으로 좀비 내지는 강시같은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진작에 죽었어야할 것이 살아 있는 척 활보를 하고 있으니...

 

강정구 교수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이나 이를 통한 처벌에는 결연히 반대하는 바이다. 그건 조갑제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서는 안 되는 이유와 같다. 강정구 교수가 쓴 글이 매우 다채로운 함의를 가지고 있고, 그 함의 중에는 경애하는 지도자 수령동지에 대한 애끓는 향수가 절절이 묻어난다고 할지라도 그 이유가 사법처리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강정구 교수의 칼럼이 괘씸하면 왜 괘씸한지 그걸 밝힐 일이다. 그러면서 부시를 찬양하건 김정일을 찢어죽일 놈이라고 욕을 하건 그건 강정구 교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 맘이다.

 

진짜 재밌는 것은 열린우리당 오영식 공보부대표의 발언이다. 한 언론사와의 통화에서 이 국내 제1당이자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공보부대표라는 사람이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경찰나름의 판단이 있겠지만, 사법적 잣대로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것인지는 사회적 여론수렴을 한 뒤에 당의 방침을 정하겠다"

 

제대로 웃기는 사람이다.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당 공보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법률의 적용, 특히 형법이나 형사특별법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법률 없으면 죄 없다(nulla poena sine lege)"라는 것이다(이걸 罪型法定主義라고 한다). 사람을 죽였더라도 법전에 살인에 대한 처벌이 규정되어있지 않으면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민법의 경우 법률문제가 발생했을 때 법전의 규정이 없더라도 관습이나 조리에 의해 법률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한 것(민법 제1조)에 비교되는 부분이다. 국가공권력의 작용이 권력집단의 자의나 부당한 외부의 이해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형법상의 원칙이 바로 이 "법률 없으면 죄 없다"는 원칙이다.

 

그런데 한 국가의 제1당이자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공보담당자가 이 원칙을 깨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이다. 즉, "여론"에 따라 형사특별법을 적용하겠다는, 기존의 사고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참신한 발상을 제시한 것이다. 세상에 어느 나라가 범죄자의 처벌기준으로 "여론"을 전제하는가? 이건 이제 법학개론서 하나 뗀 법대 1학년 학생에게 물어봐도 비웃음이 나올 일이다. 여당의 책임있는 당직자가 이런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대담하게 언론에 할 수 있는 나라, 그게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반면에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은 같은 날짜 같은 언론사의 기사에서 여론과 민심은 다른 것이고 특히 여론이라는 것은 믿을 바가 못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조수석은 "여론조사에 나타난 여론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조수석은 예의 그 명민함을 동원해서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까지 만들어놓았는데, "민심과 여론을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 차후 역사가들이 판단할 일"이라고 한 것이다.

 

같은 날짜 같은 화면에 동시에 뜬 두 기사에서 같은 입장에 서 있어야할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기숙 수석의 말을 인정한다면 오영식 공보부대표의 발언은 말 그대로 뻘소리가 된다. 죄형법정주의의 원칙까지 깨면서 여론의 향배에 따라 처벌에 관한 의견을 제시할 것이라는 오영식 공보부대표의 발언은 진정 고려해야할 민심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무철학적 발언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상황논리에 따라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기에 여론의 향배를 봐야한다는 오영식 공보부대표의 발언을 중심에 놓고 보자면 조기숙 수석은 택도 아닌 이상한 구분을 통해 물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역사학자들이나 판단할 수 있는 일을 언론이 함부로 떠들면서 나대지 말라고 하는 조기숙 수석의 발언은 결국 니들 주제에 지금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으니 니들은 국으로 주는 밥이나 받아먹고 우리 하는 일에 왈가왈부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된다. 오영식 공보부대표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한 제1당의 정책을 결정할 권위를 가지고 있는 "여론"이라는 놈을 개무시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게 된다.

 

사실 공보부대표가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이 전혀 맥락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론이 끓는 사안에 대해서 우리의 정치권과 사법부는 항상 법률적용우선의 원칙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욕들어먹지 않을 수 있는 판단 내지는 권력우위의 위치에 있는 측의 손을 들어주는 판단을 해왔던 관행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 꼴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입장에서라면 얼마든지 오영식 공보부대표는 위와 같은 발언을 할 수 있다.

 

삼성 이건희를 국감증인으로 채택하는 것만 봐도 정치권이 얼마나 여론의 향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건 입법부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입법부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더라면 이건희는 벌써 수십번을 청문회 증인으로 나왔어야 한다. 사법부 역시 별다르지 않다. 남한사회에 아직까지도 반공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 보수세력이 진보세력보다 강력한 위력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는 판단이 극복되지 않는 한 국가보안법이 합헌이라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법 자체가 얼마나 잘못되고 잘되었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 법을 적용하는 집단이 힘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법부의 잣대는 바뀌는 것이다. 이걸 사법부라고...

 

강정구 교수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자. 오영식 공보부대표의 입장에서라면 강정구 교수에 대한 사법처리 내지는 국가보안법 문제는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그놈의 여론은 어떻게 조사할 것인가? 국민투표 할까? 리서치 회사 동원할 건가? 신문사의 각계약진에 의존할 것인가? 여론조사의 결과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지난 연말처럼 또 단체들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철야농성 단식농성 삭발농성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조기숙 수석의 입장에서라면 그 민심이라는 놈의 실체를 알기 전까지, 즉 역사학자들께서 멋진 평가를 해주시기 전까지 이번 사건에 대해 말할 자 아무도 없게 된다. 더구나 그 민심이라는 거, 역사학자라고 해서 일치된 견해를 창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보라. 극단의 대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느 주장이 정말 "민심"을 반영하는 건데?

 

오영식 공보부대표, 상당히 수준높은 말장난을 했다. 그런데 수준이 높고 낮고를 떠나서 말장난은 말장난일 뿐이다. 여론을 봐서 국가보안법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겠다는 이 질떨어지는 공보부대표께서는 대학교 법학과 1학년 학생들과 함께 진지하게 법학개론 수업을 한 번 들어보기 바란다. 아, 물론 시험도 보고 학점도 받아 봐야 한다. 한가지 충고할 것은 법학에서 말장난은 통하지 않는다. 재판석에 앉은 판사들은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이번처럼 택도 아닌 말장난은 학점받는데 상당한 곤란을 줄거다. 내가 교수면 당연히 "F"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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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6 22:30 2005/10/06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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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5/10/09 20:29

    상당한 수준의 말장난에서: "경찰 나름의 판단이 있겠지만, 사법적 잣대로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것인지는 사회적 여론 수렴을 한 뒤에 당의 방침을 정하겠다." 누구였더라, 허경영이었

  1. 제가 봐도 F네요.^^ 왜 이렇게 쥐들이 들끓는지... 쥐가 들끓으면 집안이 망한다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