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의 갈팡질팡

#1
총탄이 지나가고 수류탄이 작열한 전방 GP 참사의 후폭풍은 아직도 계속된다. 어차피 책임을 져야할 사람이 필요한 법. 그가 진짜 책임을 져야할 사람이던 아니면 재수없게 걸린 희생양이던 살아남은 자의 충격을 달래긴 위한 제물이 있어야 한다. 카니발은 피를 필요로 한다는 원칙은 21세기의 문명사회에서도 어쩔 수 없는 공식이다.

GP 참사와 관련하여 이번에는 당시 근무일지를 허위 기재했던 부소초장이 구속되었다. 부소초장이었던 '최하사'는 근무를 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근무를 선 것처럼 근무기록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게 이유다. 전우로 믿고 있었던 부하사병의 무차별 난사에서 동료를 잃고 겨우 목숨을 건진 최하사는 그렇게 희생양이 된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었으면 명예라도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악몽같던 그날밤의 상흔이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 공포를 자아내고 있을텐데, 죽은이들에게 내려졌던 상훈은 커녕 이제 차가움 군 형무소로 들어가야 한다.

해당 사단의 사단장을 비롯하여 직속상관들은 모두 건재하다. 그들이 건재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총알받이 하사관이 아니라 뻔지르르한 계급장을 달고 있는 장교였기 때문이다. 하물며 국방부 장관의 해임까지도 무산되었다. 1년도 되지 않은 장관이 전방에서 벌어진 예측못할 사고까지 책임을 져야하는가라는 문제제기가 영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고 책임자조차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 나라에서 왜 힘없는 하사관 하나만 총대를 메고 제물이 되어야 하는가?

애초 이 사건의 발단은 강제적 징병제도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의 원인은 바로 있어서는 안 될 곳에 GP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닭장같은 내무반에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을 쑤셔 넣고 외부와 완전 고립된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암굴의 생활을 강요해왔다는 것이다. 강요된 병역생활이 아니었다면, '비무장지대' 안에 무장한 병사들을 집어넣고 완전 고립시키지 않았더라면, 과연 김일병이라는 희대의 '악마'가 나타나 이유 없이 전우들의 가슴에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을 난사했을까?

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에서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책임지는 자는 하나도 없다. 당연히 분노는 가슴에 남고 어떻게 해서든 이 분노를 해결해야할 근거는 마련해야한다. 그리하여 죽은 소초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인 살아남은 부소초장은 죄의 댓가를 받기 위해 구속된다.

#2
가진자들의 욕심이라는 것은 한이 없다. 그 욕심은 당대 제 자신의 몸만을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유전자를 대물림한 자손들의 안위까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선택한 것이 병역면탈을 위한 국적포기. 개중에는 평소 대한민국의 안보와 북한괴뢰도당의 남침야욕 분쇄를 목이 터져라 외쳤던 애국심의 화신들도 있다. 또한 그 중에는 이 땅에서 내로라 하는 상류층에 위치하면서 어린 백성에게 하해와 같은 가르침을 내리던 '지도층'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이들이 자기 자식들 또는 손자들의 안전한 미래를 위해 친히 욕먹을 것을 각오하고 자손들의 국적을 포기시킨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거창하게 이런 외국 말까지 들먹거릴 필요가 없다. 당장 열받은 국민들의 노도와 같은 함성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없는 집 자식들은 군대 끌려가 전방 GP에서 전우의 손에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있는 집 자식들은 국가의 단물만 쪽쪽 빨아먹고 의무는 이행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고 나서도 유산처럼 이어받은 기득권으로 군대에서 간신히 살아돌아온 없는 집 자식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을 것이다. 성질나고 열받지 않을 사람들 없을 거다. 아니 성질나지 않고 열 안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국민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는 이 시기. 절묘한 타이밍으로 국민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하나의 법안이 발의되었으니 그게 바로 홍준표의 재외동포법 개정안이다. 병역면탈을 위해 국적포기한 사람들을 원하는 대로 외국인 취급해 주겠다는 거다. 단 한 개의 조문으로 이루어진 이 개정안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리하여 700만 외국 동포의 복지를 위한다는 거창한 명목으로 제정 시행된 이 법은 1000여명의 괘씸죄인들을 제재하기 위한 법률로 전락했다. 게다가 이 1000여명의 괘씸죄인들 중 절반 이상이 아직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어린 아해들로 밝혀졌다. 죄진 자는 부모 또는 조부모인데 왜 이 어린애들이 지들 의사는 하나도 반영되지 않은 직계존속의 행위로 인해 불이익을 받아야 하는가?(이 개정안의 문제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문제점에 대해서는 당 정책소식 관련 글 참조)

#3
윤광웅 국방장관의 해임에 관한 건은 전적으로 정치적 판단의 문제이다. 해임을 찬성하건 반대하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고, 한나라당의 냉전주의적 사고방식에 따르지 않더라도 해임에 대한 이유가 충분한 것이었다. 비록 이념적이고 정책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판단의 문제였다고 하더라도 민주노동당이 윤광웅 국방장관의 해임을 전격 반대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하던 민주노동당이 갑자기 왜 반대입장으로 돌아섰나? 청기와집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이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여기에 대해서 해명해야할 일이 또 생겼다. 최하사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최하사에 대해서는 침묵할 것인가? 국방부장관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일개 하사에게 GP 사건의 책임을 묻는가? 민주노동당은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윤광웅 국방장관의 해임건이 전적으로 정치적 판단의 문제였다면 홍준표의 재외동포법 개정안에 대한 찬반의 문제는 다분히 이념적이고 정책적이었어야 한다. 국민의 의무를 저버리는 괘씸한 일부 기득권층에 대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취지에는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그 제재가 이렇게 단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동시에 많은 부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에 대해서도 면밀한 분석이 있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처음부터 이 개정안에 찬성을 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왜? 네티즌들의 폭발하는 분노때문에? 그게 다음 선거 때 지장을 줄까봐서? 그렇다면 재외동포법이 가지고 있는 각종 모순에 대해서 어떤 입장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뭘 가지고 있었는가?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었는가? 입이 닳도록 민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700만 해외거주 우리 민족의 권리의무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보다 당장 1000여명의 괘씸죄를 저지른, 아니 그 괘씸죄를 저지른 자들의 자손을 제재하는 것이 더 필요했나? 세계평화를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국가주의의 확대재생산이 뻔한 이같은 법률에 덜컥 찬성을 했어야 하나? 뭐지? 뭘까?

#4
평화군축과 한반도 평화, 세계평화를 주장하는 우리의 민주노동당. 요즘 그러한 주장을 하는 당인지 의심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독도문제 발생 당시, 주한일본대사 추방, 주일한국대사 소환, 독도 군대파병 등 준 전시상황을 만들자고 주장했던 일부 넋나간 사람들의 행동을 다시 떠올린다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당장 전쟁도 불사할 듯 움직이는 이 사람들을 보면서 도대체 민주노동당이 왜 이라크파병반대를 그토록 주장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한 헷갈리는 멘탈리티가 이번 두 사안에서도 똑같이 재현되었다. 홍준표 해외동포법 개정안에 대한 찬성입장, 그리고 윤광웅 국방부장관 해임안에 대한 반대. 그 이유는? 그 내막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속 시원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시는 의원님들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욱 난감한 것은 이 두 사안이 전혀 별개의 사안이라고 인식되는 현실이다. 이 두 사안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동일한 원인의 결과이다. '병역'이라는 신성한 대한민국 남자들의 의무. 군대라는 초월적 지위를 가진 이 땅의 괴물.

여기서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뭔가가 중요하다. 우리의 강령을 보자.
병력감축계획은 우선 30만까지 현재 병력을 줄이고 최종 10만까지로 병력을 축소하는 것이 목표다. 다음으로 직업군인제와 모병제로 병력충원방식을 바꿀 것을 천명하고 있다. 우리의 강령은 이렇게 전체적인 대안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이 실현된다면 김일병 사건이나 재외동포법 개정안 사건은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바로 이 시기가 우리의 강령을 가장 효과적으로 알려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수도 있다. 물론 아직까지 구체적인 로드맵이 나온 것도 아니고 정책적으로 민중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왜 이 시기에 우리의 강령은 책장 속에 파묻힌 인쇄물로만 썩고 있어야 하는가? 노무현 정권의 국방개혁? 뭐가 개혁되었고 어떤 개혁을 하고 있나? 취임한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임되서는 곤란하다고 하는 윤광웅은 그 시기동안 어떤 국방개혁의 밑그림을 제시했는가? 재외동포법 개정안에 대한 찬반을 논하기 전에 우리의 강령이 왜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소리높여 외칠 수는 없었는가?

제 아무리 좋은 강령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민중들에게 알려지고 설득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일본이 독도 건드리면 독도에 군대파견하자는 소리나 하고, 병역면탈을 위한 국적포기라는 괘씸죄 제재를 위해 재외동포들의 권익과 직결되는 법률개정안에 찬성하고, 정치적인 판단만을 앞세워 일개 부소초장이 처벌을 받을 때 최종 책임자인 국방부장관의 해임은 결사적으로 막고 있는 동안 우리의 강령은 썩은 냄새를 풀풀 풍기며 잠자고 있다.

네티즌이 두려운가? 민중의 감수성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무작정 다수의 목소리로 터져나오는 분노와 비난에 휩쓸려서도 안 된다. 정작 두려워할 것은 네티즌이 아니라 우리가 정녕 원칙을 지키고 있는지, 먼 장래에까지 우리의 민중들의 행복을 위해 복무하고 있는지 바로 우리 자신의 자세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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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7 02:10 2005/07/07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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