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단위 변혁의 계기설(?)
며칠 전에 어떤 모임에서 누군가의 질문. 한국은 매10년 주기로 변혁의 계기들이 있어왔는데 왜 체계적 변혁(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뭔 소린지 궁금했는데, 대충 정리하면 이런 거다. 올해, 즉 2020년은 한국현대사의 주요한 사건들의 매 10년 주기다. 한국전쟁 70주년,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열사 분사 50주년, 광주민주항쟁 40주년, 전노협 출범 30주년, 민주노동당 출범 20주년(!)이 되는 해다. 각 10년 주기별 사건들은 이 땅 민중운동의 계기가 되었던 사건들이었더라, 뭐 이런 이야기.
주로 이제 조만간 노년기에 접어들(거나 이미 접어들었다고 봐야 할) 선배들이 이 이야기들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뿌듯한 듯한 목소리로,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운듯한 목소리로 소회를 풀어놓았다. 얼핏 한 밤중 추운 바람끝의 가로등 아래라서 잘못 봤을 수도 있겠으나 눈가들도 촉촉했던 거 같고. 이들 사건들은 어느 정도까지 민중운동의 계기였으며 변혁의 계기였을까? 그 계기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것은 주체역량의 한계 때문이었겠지. 그러고보면 저 사건들은 죄다 내게도 중요한 계기들이었는데.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다가...
그런데 말입니다, 뭔가 좀 찜찜한 것이 목을 콱 메워버리는군. 일단 올해가 조일 강제병탄 110주년이라는 말씀들은 왜 안하시는지. 2000년은 나같은 사람에겐 민주노동당 창당의 해겠지만, 조국통일에 한 목숨 바친(지금도 바치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겐 역사적 남북 정상회담의 해인데, 아마도 그날 이야기하던 분들이 NL쪽 분들이 아니라서 그건 빼놓으신 건지 뭐 이런 의문들이 들었다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니 넘어가기로 하고. 암튼 찜찜했던 건 이런 게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운동의 한 내용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어떤 과거의 사건에 의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나름의 분석과 통찰이 필요하다. 그냥 중요한 사건들을 나열하면서 그게 중요하니 거기에 어떤 의미를 끼워넣는 것이 아니라. 예컨대 1950년 남북전쟁은 과연 어떤 의미에서 민중운동의 계기였나? 민주노동당 출범은 민중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후 진보정당운동은 와해되었는가?
난 전적으로 내 혼자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87년 6월 항쟁이나 96년 노동법 날치기 철폐투쟁이 언급된 사건들만큼이나 중요한 민중운동의 계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민중운동의 주요 계기가 되는 사건들은 해년마다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계기들은 개별적 사건의 전개와 종국으로 정리된 것이 아니라 얼키고 설키면서 오늘의 시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런 차원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고 거기서 각 사건들의 중요성을 강하게 설파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변혁(?)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한탄하던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그런 관점이 상당히 고루하다고 본다.
민중들이 각 사건을 계기로 혁명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던 것이 안타까울 수는 있는데, 아니 원래 민중이 그러하니 운동이 필요했던 거 아닌가? 또한 민중의 주체적 투쟁을 통한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는 하나 민중이 아니면 또 오늘의 이 상태는 누가 만들었다는 것일까? 좋은 측면도 있고, 나쁜 측면도 있고, 겉으로는 발전했지만 본질은 변화가 없다는 비판도 가능하지만, 그러나 최소한 이념을 달리하는 세력이 일정하게 서로를 견제하고 추동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어느 한 세력이 패권을 휘두르면서 다른 한 세력의 절멸을 강제할 수 없게 된 건 발전이라고 봐도 좋지 않은가? 내가 너무 낭만적인 것일까?
아쉬워 할 수도 있는 것에 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난 저 이야기를 했던 선배들의 말이 영 마뜩치가 않다. 게다가 과거 민주노동당에 대해 별로 호응하지 않았거나 오히려 딴지걸이에 몰두했던 분도 있었는데 민주노동당을 끼워넣어주시다니. 고마워할 일이지만, 좀 낯설기도 하네. ㅎ
결론은 이런 게 아니고, 다만 그 나이 먹은 분들이 앞으로도 종종 만나서 10년 주기설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는 거다. 코로나도 창궐하는 판인데 몸조심들 하셔서 향후 한 50년 후쯤 또 2020년을 이야기하면서 10년 주기 민중운동 주요 사건들을 나열해줬으면 하는 거다. 아, 근데 이거 그렇게 오래 살라고 하는 게 욕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