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나온 김에, 진보가 뭔가?
앞의 포스팅을 하다보니 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김누리 교수의 칼럼을 보면 자한당과 더민당이 실은 별로 차이가 없는 정당이라는 걸 강조하고 있다. 마땅히 그렇다. 그래서 내가 예전부터 두 당이 합당하는 게 정상이라고 이야기했던 거고.
하지만 더민당과 자한당의 구성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김누리 교수는 서로 차이가 없으니 극적으로 대립을 과장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두 정당의 지지자들과 이야기해보라. 김누리 교수가 기함을 할지 모르지만 두 당의 지지자들은 서로를 진보와 보수로 확연히 가른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더민당과 자한당을 "보수양당"이라고 지칭할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내가 민주당 지지자들 전원을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나마 내 주변의 장삼이사들보다는 더 많이 민주당 관계자들과 지지자들을 알고 있는 선에서 장담하자면, 그들 민주당 관계자와 지지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을 '진보'라고 자임한다.
거기에 대고 나 같은 자들이 "니들이 무슨 진보옄ㅋㅋ 자한당하고 똑같은 것들이" 이래봐야 그건 저 '극좌'들이 정줄 놓고 하는 이야기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 나는 그냥 '진보'도 아니라 극좌일 뿐이다. 좋게 말해 극좌지 실상은 빨갱이인 거고.
자한당은 어떤가? 재밌는 게 자기 스스로 자한당 지지자라고 자임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가 볼 때 자한당 지지자이지만 스스로를 그렇다고 하는 사람은 한 절반 정도 되는 듯하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 자한당 지지자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의 정치적 관점과 행태는 거의 똑같은데, 그들은 거의 정확하게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어떤 신념을 공유한다. 어디서 들어봤던 거 같지 않나? 맞다. 2004년 총선 이후 박근혜가 저쪽의 보스로 등극하면서 내놓은 "나라를 살리겠습니다"라는 구호. 그게 이들의 멘탈리티다.
그러니 그들이 볼 때, "한국"을 망치려는 저 민주당계는 국가의 적이자 공공의 적인데, 묘하게도 바로 그 민주당계가 하필 '진보'네? ㅎㅎ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진보'로 분류하는데 극도의 반발을 보이면서 스스로를 보수라고 자임한다.
김누리교수가 이야기하는 건 그냥 통상의 어떤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에 비추어보니 민주당이 보수더라는 이야기다. 그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나도 뭐 무시로 그런 기준 들이미는데. 하지만, 실제 사람들의 입장과 생각은 이렇게 다르다. 내가 하는 이야기 역시 이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어떤 공통된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모든 건 내가 중심이다.
나를 중심으로 봤을 때 진보와 보수가 나뉘는 건 정책이나 이념같은 고차원적 기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주관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 주관적 기준에 어떻게 객관적 기준을 대입할 것인가? 기실 정치는 바로 이 부분에서 역할해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정치는 이러한 주관적 기준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접목시키는데 주력한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이자 이론과 실제의 차이이다.
김누리 교수의 글은 그냥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하다보니 결론이 참으로 어색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시대적 사명은 좋은 보수를 자임함으로써 가짜 보수를 퇴장시키고, 자신의 왼쪽에 진짜 진보의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라는 이 결론은 문장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얼마나 공상적인가?
민주당이 집단적으로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을 지들의 시대적 사명으로 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앞서 봤듯이 이미 그 관계자와 지지자들은 스스로를 진짜 '진보'라고 생각하는데 무슨 또 더 왼쪽의 진짜 진보가 있으며 하물려 그네들에게 공간까지 열어주는 걸 "시대적 사명"이라고 받아들이겠나? 왜 민주당이 그걸 자신들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김누리 교수의 칼럼 본문이야 뭐 훈장질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씨잘데기 없는 이야기도 아니고, 양당을 비교할 내용은 잘 정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관념이 흐르다가 결국 결론마저 관념으로 정리하면 곤란하다. 차라리 임미리 교수처럼 "민주당만 빼고"라고 하면 공상을 넘어 과학이 될 뻔했다.
언제나 정리하지만, 관념과 공상은 방구석에선 참으로 아름답지만, 밖에 나가면 써먹을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