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주의의 극복은 요원하고
나도 아직 답이 없다. 답이 없다는 건 방향성조차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방향은 설정되어 있는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책적인 대안의 구성과 실천경로의 제출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여전히 과연 무엇을 해야 가능할지 숙제로 남아 있다.
정립된 방향성은 단순하다. 지속적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것. 현상의 유지차원이 아니라 보다 고전적인 삶의 형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어찌보면 삶의 형질에 있어서 원시반본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물론 지구차원에서 재앙을 면치 못할 터이니.
하지만 과연 이러한 제안이 사람들에게 먹힐 것인가? 예를 들어 친환경 자동차의 문제. 통상 친환경 자동차라고 하면 전기차나 수소차를 들게 된다.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에서 그렇다. 그런데 이 친환경 자동차는 지구온난화 방지라든가 뭐 이런 거시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면 아무런 대안이 되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건 자동차를 줄이는 거다. 소비패턴 자체가 신체활용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배달업의 문제. 그냥 업소 가서 사 먹든지 시장에서 제가 먹을 만큼만 들고 와보자. 배달을 시킬 이유가 없다. 그래야 거리에 오토바이도 줄고 포장도 줄고 연료소비도 줄고 죄다 준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다. 이런 이야기하면 욕이나 먹기 딱 좋다.
성장이라는 것이 전제된 상태에서 우리는 소비한다. 내 주머니에 돈이 들어온다는 전제가 있기에 오늘 카드를 긁을 수 있다. 그 돈은 내가 일해서 어떤 부가가치를 생산했을 때 들어온다. 그 부가가치 중 일부는 자본가의 이윤으로 자본가의 주머니에 들어간다. 그래야 그들에게 세금을 걷을 수 있다. 세금을 걷어야 복지도 하고, 저 기본소득론자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기본소득도 줄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악순환이다. 결국 결론은 닥치고 성장인데, 그 성장이라는 건 유한한 자원을 착취하는 동시에 못사는 이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낼 때 지속가능하다. 김우중이 그랬던가, 자전거는 달리고 있지 않으면 쓰러진다고. 지금 우리 경제는 딱 그 상황이다. 이 상황에 대하여 이제 그만 멈추자고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지구온난화며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건 그냥 양심에 찔려서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김형탁의 매일노동뉴스 칼럼 역시 이 성장우선주의의 틀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형탁은 노동의 관점에서 현재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그 방향은 자본가들과 다를 바가 없는 성장론이다.
"학습되고 성실하고 뛰어난 노동력을 바탕으로 성장해왔던 한국경제가 기술혁명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국가의 경쟁력이 상실될 수 있는 위기에 처해 있다. 노동자들의 학습능력을 무시하고 과도하게 기계에 의존하는 성장모형은 이미 위기에 처했다. 소득주도 성장의 근간이 돼야 할 노동자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그냥 성장구조 속에서 배제되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일 뿐이다. 성장을 멈추자는 이야기가 아닌 거다. 글쎄다. 이런 논리 속에서 과연 새로운 시대를 인류의 이름으로 맞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한국경제가 기술혁명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뭘 기준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누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가? 어떤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까? 그 이유가 뭘까?
"노동자들의 학습능력을 무시하고 과도하게 기계에 의존하는 성장모형"이라는 건 뭘까? 그럼 기계사용을 줄이자는 건가? 21세기형 러다이트를 하자는 걸까? 기계사용이 증가하면 정말 노동자의 실업률이 증가할까? 노동자들이 실업을 막는 것과 소득주도성장은 필요충분조건의 관계에 있나?
이러한 연결고리를 끊어내자는 것이 좌파정치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오늘날의 좌파는 우리 이제 모두 가난해지자는 이야기를 해야 할 상황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답답하긴 한데, 나도 뭐 뾰족한 대안이 없으니 그저 입맛만 다시고 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