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과 류석춘

이거 이러다가 이 블로그에 올라온 인물들 가지고 만인보를 써도 되겠다. 이젠 벼라별 인간들 이야기를 다 하게 되네... 쩝...

연대 류석춘이 월간조선에다가 10.26 40주년 특집으로 박정희가 농촌 유휴인력을 마이카 가진 중산층으로 키워냈다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전태일은 착취당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올렸다. 그랬더니 전태일재단을 비롯한 노동계에서는 격분했다. 

아름다운청년 전태일: [입장] 류석춘 교수의 곡학아세를 규탄한다.

류석춘이 이따위 글을 올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류석춘은 이제는 운영하지 않고 있는 조선일보의 어떤 온라인매체에 2016년 연말 같은 주제와 같은 내용의 글을 올린 바가 있다. '전태일 평전'의 3가지 함정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류석춘은 이번 월간조선에 올린 것과 같이 당시 전태일이 받은 월급이 적지 않음을 거론하면서, 동시에 당시 운동권과 전태일의 교류가 있었고 따라서 전태일의 노동운동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외부 네트워크와 연관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태일재단의 반박은 그래서 좀 아쉽다. 류석춘의 글이 가지고 있는 여러 모순이 있는데, 이를 짚어내기보다는 류석춘이 짜 놓은 임금프레임에 치우쳐 정작 할 말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태일재단은 첫째, 받은 월급에 비해 실질구매력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둘째, 노동조건이 비인간적이었고, 셋째, 노동구조 즉 미싱사가 시다와 미싱보조의 월급을 주는 등의 도급제 형태로 당시 직급구조가 이루어져 있었던 점 등을 류석춘이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류석춘은 전태일의 진급과 임금인상이 다른 노동자 평균에 비해 현격히 빨랐음을 주목하고 있다. 또한 당시 임금상승수준이 노동생산성에 비례해 오르고 있었으므로 일방적 착취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류석춘의 논리에서 보이는 빈틈이 바로 여기 있다.

우선 경제발전과 생산력향상의 결과물이 수치상으로 비례하는 것은 당연한 건데, 여기서 추제 간의 상대적 차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즉 수치만을 놓고 비교하면 노동자 임금도 오르고 사회경제적 발전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이지만, 정작 자본이 획득해가는 이윤율과 노동자의 임금인상율의 격차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류석춘의 두 글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다음으로, 경제규모가 급속하게 확장되면서 노동인력의 수요가 증대하고, 그 결과 노동인력의 유인을 위하여 직급과 임금의 조건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었고, 여기에 전태일이라는 개인이 좀 더 많이 벌고자 하는 의욕에 따른 노력이 가미된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전문성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류석춘은 그저 통계수치만을 대입해 통계수치가 보여주는 '객관적' 현실만을 근거로 논지를 이어가는데, 이러다보니 전태일이 다른 노동자의 평균적인 기간과 달리 훨씬 빨리 재단사가 된 '주관적' 현실에 대해선 간과하게 된다.

이처럼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현실의 간과는 전태일이 왜 바보회를 만들고 이상적인 고용형태를 가진 봉제공장을 설계하는지에 대한 몰이해로 이어진다. 류석춘은 전태일이 구상한 '모범업체'를 '기업'보다는 '복지단체'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평가하는데,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당시 노동자들이 처한 구체적 상황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류석춘이 비아냥대는 것처럼, 전태일이 말한 "대학생 친구 하나 있었으면"이라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할 이유는 없다. 류석춘은 전태일이 노동운동의 네트워크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는데 대학생 친구  하나 없다고 운운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한다. 당시 도시빈민 및 노동자에 대한 가톨릭 및 개신교의 의식화활동이 활발했음을 비추어볼 때 류석춘의 가정처럼 전태일도 그러한 네트워크의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 하나를 아쉬워 한 것은, 이미 알 거 다 알면서 엄살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다보니 (사회의 착취구조와 근로기준법이라는 법의 존재와 기타 등등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는데 그것들이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타까움 저편에 존재하고 있고, 이러한 안타까움을 해소하기 위한 조력자가 아쉬운 상황에서,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적실할 것이다.

류석춘의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례들이 전태일의 투쟁을 더 빛나게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달리 말하면 류석춘은 스스로 지 무덤을 파는 것이고. 자기 논리 안에서 자신이 부정되는 내용이 나오게 되는데 이러한 부분은 학술적인 차원에서 세밀하게 더 깊이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내가 여기 중언부언 해봐야 인상비평밖에는 안 되고.

다만, 류석춘은 쪽팔린 줄 알아야 하는데, 전태일 월급 올라간 거 보니 착취 따위 없었다고 강변하기 전에, 이런 헛소리를 해도 교수랍시고 노동자 평균임금보다 훨씬 많이 받아가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은지 모르겠다. 하긴 부끄럽지 않으니 이런 소리를 하겠지.

그러고보니 부끄러움일이라는 게 없어지는 세상인 듯 하다. 좌고 우고, 진보고 보수고 간에 겸손이라는 말은 개나 줘버릴 말이 되었고, 쪽팔림은 남의 것이 되어버렸다. 슬프다.

덧) 아, 류석춘의 두 글 모두 링크는 생략한다. 조선일보 열독률 올려줄 생각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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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6 09:12 2019/10/1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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