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페-좌파포퓰리즘, 용어에 대한 과도한 집착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샹탈 무페 문학세계사, 2019 |
무페는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이승원 옮김)라는 책을 자신이 비판받을 수 있는 지점을 미리 회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먼저 나는 이미 과도하게 부풀려진 '포퓰리즘 연구' 분야를 또다시 부풀리려는 것이 아니며, 포퓰리즘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아무 소득 없는 학문적 논쟁에 끼어들 의지도 전혀 없다는 것을 밝힌다."
그가 쓴 이 작은 책자는, 그러나 포퓰리즘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 '참된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거세한 채 그가 제시하는 포퓰리즘의 계기를 따라가기에는 벅차다.
라클라우가 전제한 포퓰리즘의 정의, 즉 "사회를 두 진영으로 분리하는 정치적 경계를 구성하고, '권력자들'에 맞선 '패배자들'의 동원을 위한 담론전략"(On Populist Reason)에 대한 분석-이것이야말로 '참된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과정일 텐데, 이 과정은 이전의 저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포퓰리즘에 대한 라클라우의 정의는 내가 볼 때는 칼 슈미트의 우적론의 변용에 불과하다. 더 나가 라클라우-무페가 이야기하는 포퓰리즘은 기존에 해석되어왔던 포퓰리즘의 정의와는 달리, 오히려 민주주의 본연의 작동방식, 즉 더 많은 지지자를 확보함으로서 자기 존립의 보편성을 확보하는 방식에 다름 없다.
민주주의 본연의 작동방식을 구태여 포퓰리즘으로 정의함으로써 무페의 주장은 우파 이데올로기의 거울쌍 정도로 인식된다. 괴물을 닮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포퓰리즘의 작동양식을 좌파의 것으로 전유하고자 노력할 이유가 무엇일까? 게다가 그 의미조차도 '참된 본질'과는 거리가 먼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의미가 어디 있나?
난 이런 형태들이, 좌파 이데올로거들의 조급증에서 기인한다고 보는데, 대체적으로 얼마 전부터 한국사회에서 논의되는 이상한 용어 사용, 예컨대 '급진민주주의' 따위가 그것이다. 한국에 '급진민주주의'의 조류를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들이 라클라우와 무페인데, 이 책에서 무페는 자신들이 주장했던 민주주의의 급진화가 좌파 일각에서 오해된 채 사용되어왔다고 이야기한다. 무슨 그런 말씀을... 처음부터 다분히 오해하기 딱 좋게 만들어놓고선...
이게 과거 힐러리 웨인라이트가 정치정당에 대한 제고를 주장하는 글을 냈을 때, 난 그 글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영국)노동당이 애초 가지고 있었던 목적의식을 다시 살려내고 그에 걸맞은 정치운동을 하라는 것일 뿐인데, 무슨 마치 새로운 이야기를 하듯 정치정당을 이야기하는 건지 의아했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의 글이 아예 책으로 엮여져서 번역서까지 나왔더랬다.("국가를 되찾자", 김현우 옮김)
주요 좌파 학자들이 어떤 용어를 자신의 맥락으로 변주하고 강변할 때, 주변에 흔히 보이는 '지식수입상'들이 이를 추종하고 막 내지르는 경향이 가끔 보이는데, 그럴 때마다 아, 이거 내가 공부가 많이 부족하구먼... 이런 자괴감에 빠졌다가 조금 정신차리고 다시 보면 아니, 뭐 이런 이야기를 할려고 생난리를 치고... 이런 뿔따구가 난다는 거다. 힐러리 웨인라이트가 그랬고, 무페가 그렇고, 그걸 또 냉큼 받아다가 급진민주주의니 뭐니 하던 사람들이 그렇고...
거듭, 이런 행태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결국 조급증이 아닌가 싶다. 그놈의 자본주의가 위기라는 말은 내나 뱉어놨는데, 위기라던 자본주의는 망할 기색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위기를 주장했던 자신들의 위기 내지는 정체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보니 조급증이 생기고, 그러다보니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조어를 내놓으며 마치 그것이 새로운 활로를 만드는 시발점이 되는 듯 이야기를 하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 한 마디로 충분한 걸 자꾸 무슨 급진이니 좌파포퓰리즘이니 하는 말로 거추장스럽게 만들지 않았으면 싶다. 그래서 난 다시 민주주의의 원래 '참된 본질'이 무엇인지를 참구하는 시간을 좀 더 가지려 한다. 암튼 이거 너무 식상한 이야기를 맨날 새로운 것처럼 하니 그것도 이젠 많이 식상해진다. 아이고... 시간도 없는데 이게 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