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한 게 정당공천제?

기초의회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간간히 드러날 때마다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가 정당공천제 폐지라는 거다. 이 주장의 배경에는 한국 정치의 취약성이 고스란히 박혀 있다. 기성 정당의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진보정당의 깃털 같은 무게감.

며칠 전에도 이와 관련된 포스팅을 했더랬다.

지방의회에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지방정치는 아직도 미개척의 여지가 얼마든지 남아 있다. 의회의 구성이나 기초 자치단체의 구성 등을 다양하게 시도해 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다양성이 보장될 때 더 심오해진다.

그런 차원에서 지방정치에 대한 많은 의견이 제시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더 많은 민주주의, 더 깊은 민주주의를 위한 대안의 제시가 아니라 한국 정치의 가장 취약한 일면을 그대로 전제한 채 이야기하는 지방정치는 민주주의의 후퇴를 유발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겨레의 이 기사는 검토를 요한다.

관련기사: 한겨레 - "예천군의원 추태 사태 막으려면 '정당 공천제' 없애야죠"

한국자치학회 전상직 회장의 인터뷰다. 그는 "군의원 후보를 정당이 공천하는 제도가 이번 사태를 초래한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많이 보던 주장이다. 경실련을 비롯한 많은 시민단체가 이와 같은 주장을 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당시 경실련 등이 주장한 기초의회 정당공천제 폐지론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그 주장 자체가 맹랑한 것임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경실련 Q&A의 진실 제대로 읽기 Q&A

이번 한겨레 전 회장의 인터뷰도 당시 경실련 주장의 반복이다. 그런데 기사만 놓고 보면 이 분의 주장은 앞뒤가 없다.

전 회장은 "주민들의 자치력이 없으니 정치적 이유로 공천된 군의원들이 수준 이하의 행위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곧 이어 전 회장은 "지금의 읍면동장제처럼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지 않고 임명되는 관료"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읍면동장도 주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군의원을 뽑을 때는 발현하지 못한 "주민들의 자치력"이 읍면동장을 뽑을 때는 발현한다는 것인가? "주민들의 자치력"은 누굴 뽑느냐에 따라 달라지나?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전 회장의 말은 군의회에 "주민들의 자치력"이 발휘되지 않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보더라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군의회를 움질일 수 있을 정도로 발휘되지 못하는 "주민들의 자치력"이 읍면동장이 행정을 할 때는 발휘될 수 있나? "주민들의 자치력"은 임무수행이 누구에 의해 이루어지느냐에 다라 달라지나?

이분이 바라보는 지역은 다분히 과거회귀적이다. 이분은 전통적인 한국의 지역촌락이 수평적인 관계로 활성화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전통의 한민족 촌락에서는 수평적인 관계가 활성화돼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웃이 사촌이었죠. ... 향약, 두레 같은 마을의 자치 조직은 매우 민주적이면서 공공성이 높았습니다."

글쎄올시다. 근래까지도 시골마을은 단일성씨 집성촌 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너 개의 주요 성씨들이 집성하여 군락을 이룬 곳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이웃 사촌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 진짜 혈연관계의 사촌들이 한 이웃에 사는 일이 많았다. 성씨가 다를지라도 혼인관계 등으로 얽힌 사이도 많았고. 그리고 전통적으로 위아래 따지고 촌수 따지는 게 당연한 동네에서 수평적 관계라는 게 어떤 수준일지 모르겠고, 대립적인 정치사안을 다룰 일이 없는 향약 두레니 민주적인 의사진행이 굳이 어려울 것은 없었겠다.

게다가 전 회장은 이러한 촌락공동체를 "일제가 면(面)이라는 행정단위를 만들어 면장을 임명하고... 항일 독립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만든 겁니다"라고 하면서 그렇게 한국의 주민자치가 말살되었다고 진단한다. 군사정권이 이걸 그냥 뒀고 민주화정부도 뒷전으로 미루면서 주민자치가 개판이 되었다는 거다. 지방자치가 골방 어딘가 처박아두고 까먹은 골동품 신세가 된 건 사실이지만, 이런 류의 구조화는 식상하다 못해 이젠 뭐 와닿지도 않는다.

아무튼 전제가 잘못되니 대안이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 기초의회 정당공천폐지라는 결론이 이분의 논리구조에서 어떻게 도출될 수 있는 건지조차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게다가 주목할만한 대안인 읍면동장 직선제마저 이분의 논리에 따르면 그 적실성이 확보되지 않는다. 결국 이런 논리구조는 대안에 대한 동의를 조성하기보다는 정치냉소를 심화시키는데 일조할 뿐이다.

해방 정국에서 나온 구호 중에 하나가 "이장 면장도 내 손으로!" 였다. 대도시는 잘 모르겠지만 시골에서는 이장을 주민들이 추천하고 호선하는 경우도 아직 있다. 그런 측면에서 전 회장이 주장하는 읍면동장 직선제 같은 건 좋은 제안이다. 평소에 내가 생각하는 것도 그런 거니까. 이런 제도를 도입하자고 할 때 발생할 여러 반발은 대충 예상되는 범위에 있는데 나중에 생각나면 한 번 정리하기로 하고.

하지만, 기초의회 정당공천제 폐지는 저 좋은 제안마저 궁색하게 만든다. 앞서 포스팅했듯이 기초의회는 오히려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정당공천제를 폐기하는 수준에서 정반대로 상상력을 위축시키는 한 지방자치는 요원해지고 지방분권은 그냥 물 건너 간다.

덧: 지난 개헌 정국에서 서울의 각 자치구에서는 공무원들이 동원되어 지방분권 개헌요구 서명운동이 벌어졌더랬다. 기본적 원칙이야 동의하지만, 기실 이 공무원들이 지방분권을 할 때 자신들이 적절히 그 책임을 수행할 준비나 자세가 되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게다가 지방분권이라고 할 정도로 지방자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그러한 주장들에 대해, 내가 만난 상당수 지역활동가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또한 대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주민들은 오히려 지방자치 강화라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강도가 높아졌다. 해봐야 건설업자들이나 노나는 거지... 이게 그들의 반응이었다. 이거 해소하려면 주민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동네 생활에 반영되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 방향에서 지방자치를 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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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11:24 2019/01/1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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