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커피
백수는 직업이 아니다. 놀고 먹는 걸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자는 간달바거나 건달이거나 둘 중의 하난데, 난 그 어느쪽도 아니니. 노동으로 먹고 자고 입는 걸 해결하는 건 그 자체로 고단함이나 삶이 이어지고 있음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장치이기에 마냥 놀고 먹는 것에 대한 환상은 애초 가지고 있지 않다.
뭐 물론, 지표면과 수평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가장 적성에 맞음을 알기에 많이 놀고 빈둥거리는 게 좋긴 하다만, 백수는 그다지 삶의 치열함을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 거기엔 아쉬움과 권태로움은 가득하지만 긴장과 좌절과 분노와 결기 같은 건 기실 별로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백수에게 삶이 연속되고 있음을 실감케 해주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가사, 즉 집안일이다. 독립채산제를 근근히 유지해왔으나 수입이 완전히 끊긴 이번달부터 불가능해졌다.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어깨가 움츠려든다. 이 위축감을 극복하기 위해선 뭔가 일을 해야 한다. 가장 좋은 게 바로 집안일이다. 당연하게도 이 집안일은 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한 백수의 몸부림이기도 하고. ^^;;;
하지만 이 일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그 이유는 독립채산제를 유지하면서 각자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도 가사분업구조는 잘 지켜져왔고, 백수의 처지에서는 다만 그 분량이 조금 늘어난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평소에 잘 하고 살아야 한다. 그나마 애가 없다는 게 알량하나마 여유를 부리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 아침 기상과 함께 커피를 내리는 몫은 내 몫이다. 백수일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마찬가지. 원두를 밀에 갈아낼 때, 커피물을 끓일 때, 필터에 분쇄된 커피가루를 올리고 뜸을 들일 때, 서버에 커피가 흘러내리는 걸 보면서 드리퍼에 물을 부을 때, 그 커피를 내리는 10분 안쪽의 시간은 거의 도를 닦는 기분이랄까, 아침을 정리하는 느낌이랄까 그런 분위기가 풍겨 좋다.
막 내린 커피의 향이 좁은 집안에 번지면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나 그 커피를 기다리는 사람이나 기분이 좋아진다. 아, 물론 남이 내려준 커피가 가장 맛있는 커피이기에, 나보다는 그이가 더 맛있는 커피를 먹게 되는 것도 좋다. 운 좋게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좋고, 식탁에 앉아 신문을 보며 마셔도 좋고, 시간이 급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부랴부랴 옷 매무새를 다듬는 틈틈이 마셔도 괜찮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일 뿐이지만, 어쩌다 그 커피 한 잔을 못내려서 먹여주지 못한 채 출근을 시키면 뭔가 빠진 듯 허전하다. 그렇게 사람이 빠져나가면 따로 혼자 커피를 내려 먹는 것도 조금은 어색하다. 시간이 지나 몸 구석구석에서 미친듯이 카페인을 요구하면 부득불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커피를 내린다. 하지만 그 커피를 내리는 느낌이나 맛은 아침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누군가와 함께 마시는 커피의 맛이란, 그것도 언제나 같이 마실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마시는 커피의 맛이란 색다른 것이다. 늘 그러하면서도 언제나 신선한 그런 맛.
몸이 좋지 않게 된 후에 아침 커피는 부정맥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될 수 있으면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약간 실망했었다. 술도 담배도 떠나보냈는데 커피까지 떠나보내야 하다니... 그러다가 다른 의사로부터 큰 문제가 없으면 커피 정도 마시는 건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고 용기백배 마시던 커피 그냥 마시게 되었다. 아침 커피도 계속.
살아 있다는 건 마냥 지옥만 경험하게 하는 건 아니다. 고단하고 빈한한 삶일지라도, 살짝 살짝 웃음을 머금을 수 있는 순간이 있기에 지나갈 수 있다. 그 순간 중 하나가 아침 커피 시간이다.
오늘은 새로 산 두 종류의 커피를 섞어서 내려봤다. 로스팅이 강하게 된 종류에서는 둔탁하고 거친 맛을, 약간은 약하게 로스팅 된 커피에서는 은근한 향을 접할 수 있으므로, 둘을 섞으면 더 좋은 맛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반반을 섞었는데, 아뿔사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나는구나. 배합률을 따져봐야겠다.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어떤 광고 문구가 있었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노동자들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시간이 주어지기를.
출근시간이 끝난 무렵, 남은 커피를 마시며 블로깅을 한다. 오늘 하루도 좀 더 많은 글을 보고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좀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커피가 다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