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뜻

잊혀질만 하면, 방금 막 줄잡은 듯한 군복을 입고, 간혹 옆구리에 가스총 비스무리한 거 차고, 때에 따라선 손에 성조기까지 들고 어디선가 불시에 나타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재향군인회.

 

신의 자식이 아닌 이상, 대~한민국이 남성들 거의 대부분이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다 오는 곳이 바로 군대고, 군복무 마치고 나면 자동빵으로 예비군의 삶을 살게 되며, 이 예비군 시기부터 소위 "재향군인"이라는, 별로 실감도 나지 않는 지위로 살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군복무마친 거의 대부분의 남성, 혹은 일부 여군출신들이 자의와는 전혀 상관 없이 "재향군인"이 된다. 그런데 이 "재향군인"을 통괄하는 집단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재향군인회"다.

 

전역하고 나서 지금까지 "재향군인회"라는 곳으로부터 어떠한 혜택도 받은 바 없고 하다못해 명절에 카드 한 장 받아본 바 없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회원이 되어 있는 그 집단은 역시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재향군인회"라는 이름으로 성명을 내고 거리에서 이름을 알린다. 당연히, 그들은 어떤 정치적 행사를 하던 집회를 하던 간에 나에게 이언반구 한 마디 상의한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통지도 해준 적이 없다.

 

어차피 "재향군인회"라는 조직은, 한국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알짜 문어발 "기업"이다. 60만 정예군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밥줄은 떨어질 일이 없을 것이고, 그 빽을 통해 지방자치단체의 시시껍절한 사업까지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니까.

 

새삼스레 "재향군인회"를 거론하는 것은, 그 집단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재향군인"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군대 갔다 온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짚고자 함이다. 그 집단을 "경영"하고 있는 일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는 "재향군인"은 오로지 이익을 향유하고 있는 자기자신들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전체 "재향군인"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허세를 떨어댄다.

 

이와 비슷한 말의 사용이 정치권에서는 흔하게 일어난다. 먼저 "국민".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국민"이라는 단어는 그 대상이 사전에 구획되어 있음을 사람들은 가끔 까먹는다. 국적을 가진 모든 사람을 "국민"이라고 칭하는 것처럼 오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들먹이는 "국민"이라는 말은 전체 국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야기하는 "국민". 미디어법 직권상정의 주인공 김형오, 날치기 파동의 선봉장 이윤성, 오락가락 행보로 전형적 박쥐스타일 정치의 표본을 보여준 박근혜 모두, 공히 이 "국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국민"은 그 범위가 정해져 있다.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지조를 가지고 사는 30%대의 골수 보수 지지층, 대구 등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강고하게 뭉쳐져 있는 지역정치의 지지층, 바로 이들만이 그들이 이야기하는 "국민"이다.

 

"국민에게 죄송합니다"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에서, 바로 자신들의 권력유지기반으로 임무를 다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언설일 뿐이다. 왜 이런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그건 설명 필요 없이 그들이 매일 얼굴을 부딪치거나 혹은 같이 일을 하거나 시시때때로 떡고물을 나누어 먹는 자들이 바로 그 일부 "국민"들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들은 조중동을 보며 시국을 걱정하고, 노동자들의 집회를 보며 빨갱이 쉑덜이라는 분노를 공유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철저한 유대감은 그들 집단 안에서 정치할 사람들을 뽑아놓고, 자신들을 뽑아준 사람들을 "국민"으로 한정하도록 유도한다. 한나라당만 그런 것은 아니다. 어차피 민주당 역시 마찬가지. 다른 야당이라고 해서 뭐 다를 바가 있겠는가. 그걸 제대로 못해서 문제지.

 

결국 "내편"이라고 인식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다른 말이 "국민"일 뿐이다.

 

이명박이 이야기하는 "서민"은 뭘까? 평생의 목표가 서민을 위한 삶이라고 떠벌리면서, "서민"들에게 야자타임 한 번 주지 않는 싸장님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서민"은 결코 재래시장에서 채소장사하며 대형마트가 들어올까봐 전전긍긍하는 보통사람들이 아니다. 이명박에게 있어 "서민"은, 최소한 담배값과 소주값이 올랐을 때 가계예산에 치명적인 적자가 발생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따라서 이명박이 "서민"이라고 할 때는 매우 조심해서 그의 발언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떡볶이와 뻥튀기를 먹으며 이야기하는 그의 "서민"은 시장바닥에서 떡볶이와 뻥튀기를 사먹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 아니다. 입에 들어가는 떡볶이와 뻥튀기는 청와대 정화조로 들어가면 그뿐, 떡볶이와 뻥튀기로 조제된 혈액이 공급되는 그의 뇌에 들어찬 "서민"은 대~한민국 상위 10%의 부유층일 뿐이다.

 

그리하여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이야기하는 "민생"은 이명박이 생각하는 "서민"의 삶이지 결코 장바닥에 굴러다니는 장삼이사의 삶이 아니다. 이명박이 "삶의 가치"로 삼고자 하는 "서민"의 "민생"을 위해 "내편"이 아닌 "국민"의 주머니는 비워져야 하고, "내편"인 "국민"이자 그런 고로 "서민"일 수밖에 없는 어떤 이들의 주머니는 채워져야 한다.

 

이 대목에서 그와 반대편에 서있는 입장은 어떤 범주를 정해 "국민" 혹은 "서민" 내지 "민생"을 이야기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 어차피 같은 표현을 하더라도 그 범주는 정해져 있는 것. "모든 인민"을 포괄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 환상에서나 가능한 정치다.

 

실재하지 않을 인간성을 찬양하고, 마치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 철학자들의 구태였음을 통렬히 비꼬았던 스피노자의 언설을 응용하자면, 정치란 것 역시 마찬가지로, 하지도 못할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챙길 수 있는 "내편"을 전체처럼 포장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언설은 "국민"일지언정 그 범주가 명확할 때, 기득권을 가진 정권에 대항하는 대척점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한나라당과 이명박이 이야기하는 "국민"이나 "서민" 이외의 다른 "국민"이나 "서민"들은 도대체 누가 "내편"인지를 잘 모르겠다는 거다. 민주당? 자선당? 창조당? 민노당? 진보신당?

 

언설로 표현되는 단어 하나 하나를 꼭꼭 씹어서 소화시킬만큼 사람들은 시간이 많지 않다. 그 시간 줄여서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야 당장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들에게 표 한장씩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의 정치인들이라면, 그들이 쉽게 자신들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이익이 될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게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한, 정치하는 놈들은 다 똑같은 놈이라는 정치혐오의 감정을 극복할 수 없고, 소위 "대중"과 함께하는 정치는 발생할 수 없다. 먼저 구분해야 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국민"이 누군지, 내가 이야기하는 "서민"이 누군지, 내가 이야기하는 "민생"이 뭔지. 이게 명확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난 도대체 누구를 향해 이따위 뻘글을 긁적거렸을까? 이젠 내가 미쳐가는 것이 아닐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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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5 15:43 2009/07/25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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