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대학과 학생의 역할을
신문 기사
1964년 63항쟁 당시, 시위에 참가했다가 사망한 고 이윤식씨에게 모교가 명예학위를 수여한다고 하는 기사가 떴다. 학교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이씨의 희생이 우리나라의 민주 헌정질서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켜 00대의 명예를 높였기에 명예 졸업장을 수여한다"고 한다. 사회의 발전, 특히 군사정권의 광포한 폭력에 맞서 싸웠던 사람의 명예가 반세기만에 회복된다는 점에 대해서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매우 어색하다. 이 명예졸업장을 수여하는 학교가 다름 아니라 지난 430 메이데이 전야제 행사를 교직원, 세콤, 학생들을 동원해서 막았던 바로 그 학교이기 때문이다.
대학
"왜 우리 학굔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는 어떤 분의 덧글이 있었다.(위 트랙백 건 글의 덧글을 참조) 조금만이라도 생각이 있는 학생들이라면, 혹은 학교 구성원들이라면, "왜 하필 우리 학굔가?"라는 질문을 할 것이 아니라 "왜 여기까지 밀려왔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선 한국사회에서 대학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다시 반추해야 한다. 어쩌면 이 관점은 단지 "한국사회"라는 한정된 공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으며, 또는 바로 그 "한국사회"라는 특수한 공간이기 때문에 적실성을 갖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말해, 왜 대학이라는 공간이었는가라는 질문은 애초 대학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에서도 그렇고 "한국사회"라는 특수성에서도 대답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다는 거다.
첫째, 대학은 말 그대로 "진리와 정의"를 참구하는 공간이다. 이 "진리와 정의"라는 어구는 "지성"이라는 한 단어로 축약할 수도 있겠다. "지성"이라는 것이 단지 지식을 머리 속에 차곡차곡 쟁여놓는 행위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삶에 투영하고 환경을 바꾸어나가기 위한 연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오늘날의 대학은 "진리와 정의"를 찾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자본이 요구하는 생산기계를 제작하는 취업학원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이 공간에서는 계급이라던가 구조의 문제라던가 하는 부분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기보다는 시장지상주의 하에서 어떻게 경쟁을 뚫을 것인가 하는 부분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그러한 행위를 "교육"이라고 포장한다.
대학의 몰락이 이렇게 현실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여전히 사회의 구조를 개선하고 비판적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본연의 취지를 잃지 말 것을 요구받는다. 이번에 개최되어 진행중인 "세계시민포럼"에서 빈곤, 질병, 환경 등 국제적인 문제에 대한 대학의 참여와 기여가 강조되었다. 대학이 자신의 담장을 허물과 사회와 소통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기초적인 요청이 국제적 행사에서 다시금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어디서 뭘 하고 자빠져 있는지도 모르던 한승수가 난데없이 등장해 한국이 인권선진국이라는 배꼽빠질 이야기를 하는 통에 만방의 조소가 빗발치고 있지만, 어쨌든 대학은 이렇게 담장 안에 고립되어 취업예비생들을 양산하는 자격증 학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차원에서, 대학은 과거에 그랬듯이 소외되고 박해받는 사람들의 안식처이자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그 학교를 단지 월급받는 직장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구성원들, 즉 대학을 "진리와 정의"를 참구하는 곳, 다시 말해 "지성"을 쌓는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학이 노동자, 빈민을 비롯한 모든 힘 없는 자들의 소도가 되어야 함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한국사회"에서 첫 번째로 이야기한 내용들은 특히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적실성을 가진다. 적어도 대학이라는 곳은 공권력이 함부로 침탈할 수 없는 곳이었고, 대학의 구성원들은 음으로 양으로 이러한 대학의 기능을 인정했으며, 그런 배경으로 인해 군사정권의 살인적 폭력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대학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민주화의 성지로 "명동성당"을 꼽기도 한다. 적어도 일정부분 그런 역할을 종교시설이 했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만 하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한국사회의 오늘날과 같은, 비록 아직은 그 실체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화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대학이 수행한 역할 역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학의 역할이 2~30년 전에 끝날 수 없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특히, 시장지상주의가 본격적으로 판을 치기 시작한 이래, 지난 10여년 간 대학은 과거 수행했던 '소도'의 역할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지금 이명박 정권만을 보더라도 그렇다. 메이데이 집회 참가자에 대한 무차별 연행과 관련해 인권단체들이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중, 또다시 강제연행이 이루어졌다. 그 구차한 현행 집시법 하에서조차 알량하게 허용되던 노상 기자회견이 이 정부 들어와서는 아예 집회로 간주되어 원봉되는 것이다.
앞으로 예정되어 있는 모든 집회는 모두 불법집회고 따라서 불허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정치적 내막은 모두 차치하고라도, 현행법의 체계만을 가지고 따질 때 경찰의 이러한 집회불허는 모두 위법이다. 집회는 그것이 진행되고 난 후에야 불법인지의 여부가 판단되는 것이지 시작도 하기 전에 불법이라고 규정될 사안이 아니다. 헌법이 그렇게 보장하고 있고, 최소한 현행 집시법조차도 이를 인정한다. 그런데 경찰이 법체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정권차원에서 벌어지는 탄압의 강도는 과거 군사정권 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이 수준이며, 한국의 시민사회에 대한 정권의 시각은 겨우 1789혁명 전 앙샹 레짐 당시의 유럽 수준이다. 논의외 얘기지만, 이 차원에서 "민주주의는 과정일 뿐 목적이 아니다"라고 하는 담론은 아직까지는 배부른 소리다. 우리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목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거리에 나서 자신의 목소리를 얘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대학은 자신의 공간을 내주어야 한다. 그것이 세계시민포럼에서 요청되고 있는 대학과 사회의 소통이다.
주인
그런데 이 대목에서 묘한 질문이 제기된다. 왜 학교에 "남"들이 들어오는가? 학교의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데 왜 "남"들이 학교를 제것인냥 사용하려 하는가? 집회시위로 인하여 침해되는 학생들의 학습권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예전의 일을 잠깐 돌이켜보자. 한 때, 행인이 학부생이었을 당시, "학교를 주민에게 돌려주자"라는 취지의 일을 벌인적이 있었다. 그 일환 중 하나가 '생활도서관'이었고, 비록 행인이 '생활도서관'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취지에 동의하고 함께 움직였고, 지금도 그 애착이 깊다.
그런데 '생활도서관' 수준의 학생자치운동의 일환으로는 그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 요구했던 것이 바로 중앙도서관 개가서고 24시간 전면 개방이었다. 당연히 학생은 물론 지역주민에게도 서고를 개방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자는 얘기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씨도 먹히지 않았다.
학교측의 난색은 예상했던 것이다. 시스템상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측은 관리의 문제를 들어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더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앙도서관은 마치 지하철 개찰구처럼 학생증을 인식해야만 출입할 수 있는 자동출입시스템을 도입했다.
당황스러운 것은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왜 내가 등록금 내고 다니는 학교의 도서관에 "남"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가라는 반발. 도서관에 자리도 없어서 힘든데, 왜 학교와 상관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야 하는가라는 매우 도식적인 질문.
결정적으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는 자신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그 학교의 운영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에 대해 인식하지 않고 있다.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내고 있는 등록금이 중요한 것이지 미래에 자신들이 제공할 세금은 현실에서 중요도가 떨어진다. 더불어, 언제나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대학 도서관을 이용할 권리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다. 물론 대학 졸업하면 도서관 다닐 일이 있겠느냐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허구한날 야근에 철야에, 윗사람 눈치보면서 먹고 살 일이 바쁠 텐데 배부르게 무슨 도서관씩이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들을 학교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이 철저한 주인정신의 뒷면에, 이 사회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생각은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책볼 시간조차 주지 않고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이, 바로 그 사회의 구조를 전복하는데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 사회,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해 그 사회의 기득권세력이 가지고 있는 요구에 철저하게 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주인"으로 자신을 자각하는 주체성은 이렇게 극도로 결핍된 형태로 발현한다. 새삼스레 노예와 주인을 구분하는 철학적 담론을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이 현상은 매우 도착적이다. 바로 이 전도된 주인의식이, 대학을 찾아온 노동자들에게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하고, 마치 자신들이 학교의 재단이사장이나 총장이 된 것처럼 행동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자기합리화의 일환으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절차적 민주주의다.
자각
절차가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당연히 지켜야할 절차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런 절차가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절차가 존재하는 것처럼 상황을 호도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예컨대 중운위의 의결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430 행사를 학내에 유치할 수 없다는 논리. 중운위 운영규칙에 그런 절차규정이 있던가? 학교 운영규칙에 있던가? 아니면 법에 있던가?
근본적인 문제는 '절차'에 대한 맹목이 가치에 대한 판단력을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현상을 우리는 매일매일 목도한다. 바로 이명박 정권이 그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입만 열면 나오는 "법치주의"라는 것이 바로 '절차'에 대한 맹목이다. 이명박 정권이 이야기하고 있는 "법치"는 과거 군사정권이 목청높혀 외치던 "악법도 법이다"라는 구호와 한치도 다르지 않다. 군사정권과는 다르게, 애꿎은 소크라테스를 갖다 붙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참고로, 절차적 민주주의 혹은 절차적 법치를 매우 잘 수행했던 집단으로 '나치'를 들 수 있다. 무척 재밌지 않은가?
나치의 악몽을 겪은 법철학자 라드부르흐는, 이전까지도 '법적 안정성'과 '정의'의 문제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입장을 철회하고, 법이 그 진정성을 잃어버렸을 때는 '정의'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바로 여기서, 확립된 '절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절차'가 부당한 원리원칙에 근거하고 있다면, '정의'의 이름으로 '절차'를 뒤집어야 한다는 행동원리가 도출된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명제는 이렇게 또다시 우리 앞에 제 면면을 보여주게 되는 거다.
대학의 구성원들이, "주인"이라는 주체적 사고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상기해야할 것은 바로 자신이 어떤 것의 "주인"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담장 안에서, 등록금을 낸 주체로서 다만 대학에 대한 주인의식으로 안주한다면, 그것은 "주인"된 자각의 극히 일부분만을 이룬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특히 그렇지만, 대학을 다니는 학생의 대부분은 그 등록금이며 생활비며 교재비용 등을 자신들의 부모에 의지하고 있다. 말 그대로 우골탑을 넘어 부모의 뼈와 살을 발라가며 학교를 다니고 있는 실정인 거다. 그렇다면, "등록금"의 제공에 의해 "주인"됨을 자각하는 수준에서 볼 때도 대학의 주인은 학생이 아니라 바로 학생들의 부모들이다.
이 부모들은 등록금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명목의 세금을 국가에 납부함으로써 그 중 일부를 교육기관에 투여하도록 기여하고 있다. 어떤 특정 대학에 다니는 학생의 학부모로서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학생들을 위하여 이들은 일정한 형태로 부담을 지고 있는 거다. 그렇다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세금을 내는 사람들은 이 땅 모든 학교의 "주인"이다.
이런 단순논리뿐만이 아니라, 다시금 제기하는 자각의 요청은 학생 스스로가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주인"임과 동시에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감지하라는 것이다. 왜 "주인"이 같은 주체의 일부일 뿐인 기득권 세력의 요구에 그토록 굴종적인 복종을 감내하는가? 왜 "주인"으로서, 자신들을 인턴세대로 몰아가고 있는 이 사회구조에 대해 짱돌을 드는 대신, 저들이 요구하는 스펙을 짜맞추려고 밤새 토익책을 긁어대며 살아야 하는가?
어떤 이가 덧글로, 학생들이 그렇게 되도록 니들은 뭐했냐는 힐난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을 확 바꾸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20대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청년들을 마냥 비난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기성세대가 할 수 있었던 일과 그 성과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 현실을 살아나가는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과 그 성과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역할이 뭔지를 깨닫는 것은 앞선 세대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선 세대를 극복하는 것은 여전히 현재 청년세대의 본분이자 특권이다.
발리바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역사는 장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뒤집어 이야기하면, 역사는 그 시대를 사는 청년들이 만드는 것이고, 바로 청년들이 그 시대의 "주인"이다. 이 각성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는 순간이 하루 속히 오기를 기대한다. 바로 이 기대가 위 트랙백 건 글에 덧글을 달아주신 "연부네 집"님이 말씀하신 "낙관"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애써 외면하려 했는데, 연구실 선배 블러그에서 노동절 건국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포스팅을 읽었다. 마음도 답답하고, 외면하는게 능사는 아니다 싶어 몇 글자 적어본다. 돌아오는게 아니었다. 다시금, 대학과 학생의 역할을 몇명 오지 않는 조용한 블러그지만, 이 포스팅을 보는 분들은 위의 두 글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정리가 잘 되어있고, 기본적으로 이 글은 선배의 말에 대한 나의 긴 리플이기 때문이다. 학부생활 4년, 휴학생활까지 포함하여 5년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