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초"와 "1분"

#1. 2초

 

준결승전에서 마지막 몇 초를 남기고 문필희의 동점골이 들어가자 온 동네가 들썩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안드로메다에서 온 우주인들이란 말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노르웨이 골키퍼가 길게 송구한 공이 넘어왔고, 노르웨이 선수가 골을 넣었다. 불과 2초만에 이루어진 일.

 

노골이 선언될 줄 알았다. 문필희가 골을 넣고 난 후 한국 선수들은 하프라인을 채 다 넘어오지도 않았고(핸드볼은 골이 성공되면 상대팀 선수가 완전히 하프라인을 넘어선 후 하프라인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한다는 것은 기초 상식), 타임종료직후 골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종료휘슬이 불기 전에 들어갔느냐 아니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핸드볼은 비디오판독을 통해 판정을 하지 않는다. 다만, 경기 후 비디오 판독결과는 종료 직전 공이 골라인을 걸치지도 않았었지만), 공격재개가 경기규칙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골을 그대로 선언되었고 2초의 악몽은 그렇게 끝났다.

 

 

#2. 1분

 

오늘 끝난 3-4위전. 33대 28로 앞서고 있었던 후반 종료 1분 전. 임영철 감독은 작전타임을 불렀다. 그리곤 마지막 1분을 뛸 선수들을 호명했다. 이번 대회를 끝으로 다시는 올림픽 무대에서 뛸 수 없을지도 모를 노장선수들 6명을 지명했고, 이들을 마지막 1분 동안 코트에 올려보냈다.

 

임영철 감독 역시 이번 올림픽 무대가 마지막 국가대표 감독으로 치루는 경기가 될지 모르겠다. 그거야 어쨌든 그렇다치고, 그 1분을 뛰기 위해 나갔던 노장 선수들. 경기 결과야 어차피 정해진 거지만, 코트 위에서 공을 돌리는 선수들을 보면서 괜시리 코끝이 찡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mbc 중계방송을 보고 있었는데, 해설을 맡았던 임오경은 계속해서 목이 메는 목소리로 후배들 장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해설 수준이 영 아니라서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는데, 이번만큼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3. 기억

 

핸드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중학교때 였다. 행인이 다니던 중학교에 핸드볼부가 생겼고, 행인도 한 번 껴볼라다가 그만 손에 핸드볼 공이 잡히질 않아 초장에 쫓겨났더랬다. 그러다가 남자 핸드볼부는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아서 럭비부로 바뀌었지만서도...

 

핸드볼을 그렇게 알게 되었었는데, 결정적으로 기억에 남게 된 사건은 아무래도 88 올림픽이었다. 이 대회에서 남자핸드볼은 2위를 했고 여자핸드볼은 우승을 했는데, 그 때 여자핸드볼 대표팀의 골키퍼는 거의 환상적인 세이브 시리즈를 보여줬더랬다.

 

공중에 몸을 띄운 상태로 2번 3번 패스를 하며 골을 집어 넣는 선수들을 보면서, 축구만이 구기종목의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행인, 핸드볼이라는 경기가 예술의 경지까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니던 공장에 아마추어 핸드볼 팀이 있었는데, 행인도 거기 껴볼라고 했으나 역시나 몸싸움이 안 되서 퇴자맞았다. 이후 행인, 족구에 매진한 결과 한 때는 철벽수비수로 족구경기장을 꽤나 헤집고 다녔더랬다.

 

 

#4. 드라마

 

중계방송을 하는 캐스터와 해설자는 "금메달 보다 값진 동메달"을 운운한다. 하지만 좀 슬프다. 4년마다 한 번씩 관심을 받는 경기. 그게 뭐 핸드볼 뿐만은 아닐 거다. 이번 올림픽 경기 중에 TV 카메라에 한 번도 잡혀본 적이 없는 선수들도 여럿 있다. 핸드볼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할까?

 

이런 사람들은 어찌되었건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만 한다. 그래야 방송에라도 한 번 나오고 얼굴이라도 한 번 비추고 나중에 그런 경기에 나가는 선수들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고 시선이라도 한 번 줄 수 있을 테니까.

 

돈을 퍼부어가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축구 같은 경기야 뭐 그렇다고 쳐도, 그런 종목의 경기에 나가는 선수가 있는지조차 사람들이 모르는데도 굳굳하게 준비를 해서 나가는 선수들은 모두 드라마의 주인공들이다. 여자 핸드볼이 보여준 "2초"와 "1분"의 드라마만큼 감동적인 드라마의 주인공들이다.

 

올림픽이라는 종합체육경기가 돈과 정치에 의해 왜곡되고 더러워졌다고 하더라도 드라마를 쓰고 있는 선수들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이들은 누군가에겐 또다른 삶의 모범이 되 주고 그들 스스로도 자기 자신의 미래를 향해 한 발씩 나가는 여정에 또 하나의 지표가 될 테니까.

 

이봉주 마라톤이 남았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여자 핸드볼과 이봉주 마라톤이 있었다. 여자핸드볼 경기를 보는 내내 행인은 행복했다. 마라톤을 보면서도 행복할 거다. 이봉주가 꼭 1등을 하지 않더라도, 지난 번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에서 봤던 그 감동을 다시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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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3 16:39 2008/08/23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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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을 읽으니, 김대중의 노망급 칼럼이 대비되어 떠오르네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24/2008082400689.html
    (바람직하지 않은 링크주소로 댓글창을 더렵혀서 죄송.. ㅡ.ㅡ;)

    그래서 요즘 드는 생각은 이런 겁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상식'이라고 우리는 믿고, 또 그렇게 교육받았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들, 그 가치들이 점점더 농담이 되고 있는 것 같다는 거죠. 그런 사고는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사고처럼 취급되고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김대중의 노망한 칼럼이 그런 종류의 가장 천박한 수준이겠죠.

    아무튼 현실적으론 어떻게 받아들여지든 간에, 그래도 최소한으론, 대외적인 명분으로나마 지켜졌던 가치들이 급속하게 붕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건 미디어들을 통해서 가장 먼저 대외적으론 상징화되지만, 그 미디어 상징을 그 수용자들 역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이미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걸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수용자들이 그런 솔직한 '야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2. 민노씨/ 간만에 이너뉏을 하는데 덧글을 주셨네용 ^^ 김대중 칼럼 보고 혼자 웃다가 많이 씁쓸해지네요. 경쟁 제일주의라는 김대중의 글을 보다가 도대체 칼럼리스트 중에 김대중의 글은 어느 정도 순위나 될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경쟁만능주의 세계가 제대로 되었다면 이런 류의 칼럼은 진작에 퇴출 대상이겠죠. ㅎㅎ

    조선일보가 쓰레기같은 글을 줄곧 올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짓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결국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자신들의 입장에 적절한 소위 "사회 지도층"들이 조선일보를 옹호하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민노씨가 계속해서 조선일보에 글 쓰는 "지식인"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김대중칼럼과 동급으로 대접받는 것을 즐기는 "지식인"들이 왠지 좀 안타깝네요. ㅋㅋ

    보들리야르가 예리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저들은 기호를 만들어내고 그 기호를 소비시키면서도 그것이 스스로의 이해와 결정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죠. 커피맛도 모르면서 스타벅스를 이용하는 것은 스타벅스의 커피를 마시러 가는 것이 아니라 스타벅스라는 상품의 이용을 통해 계층적 만족감을 누리기 위한 것처럼 말이죠.

    '야만'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자신의 취향과 기호가 만들어진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 속에서 야만은 자기 그림자를 점점 더 넓혀 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