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080819
장면 1 - 출판 기념회 겸 환송회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을 하던 때에 만난 목수정이 책을 냈다. 문화담당 정책연구원이었던 목수정과는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허구한 날 티격태격하던 그런 사이였다. 예컨대 게임을 자본주의가 생성해 낸 최악의 반문화산업이라고 비판하던 그녀와 그거야 뭐 하고 싶은 넘이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하던 행인은 이런 씨잘데기 없는 것을 가지고 설왕설래 옥신각신 하던 그런 사이였던 거다.
그녀가 낸 책은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라는, 원제목과 부제목을 합쳐 무려 33자(띄어쓰기 제외)나 되는 제목의 책이다. 레디앙에서 출판했다.
행인, 원래 이런 종류의 책은 돈 주고 사지 않는 버릇이 있다. 일종의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같은 그런 류의 책은 걍 시간 되고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주는 정도지 돈까지 들여가며 사 볼 요량은 별로 없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닌 법. 이렇게 돈 주고 사서 저자 사인까지 받아왔다는 거 아닌가.
글은 인터넷 언론인 레디앙에 연재되던 글들을 정리하고 내용을 추가해서 엮었다. 목수정은 매우 정선된 언어로 차분하게 자신의 과거와 그 과거에 엉켰던 의미들을 반추한다. 적어도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같이 자수성가의 은근한 자부심과 니들도 나처럼 하면 된다는 식의 앞뒤 안맞는 교훈을 주는 그런 류의 글은 아니다. 나름 삶을 통해 치열하게 느꼈던 감정들을 문화정책을 전공했던 사람답게 훌륭하게 풀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위화감. 물론 프랑스라는 유럽문화의 본산에서 넓고 깊게 문화를 공부하고 또한 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감수성을 풀어내던 목수정과 문화라고는 주말의 명화밖에 모르는 수준의 행인이 같은 수준의 문화감수성을 공유하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여기서 느껴지는 위화감은 목수정이나 목수정이 쓴 글 때문이 아니다.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의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한 레디앙에서 "뼛속까지 처연하고 치맛속까지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올 수 있을까?
목수정은 자신의 운명적 동반자인 "희완"과의 첫만남에 대해 이렇게 썼다.
"거리의 모든 아시아 여자를 잠재적 창녀로 취급하는 벨빌에서 내가 처음 보는 남자의 청에 흔쾌히 마주앉아 맥주잔을 기울일 확률은? 한 1% 정도나 될까."(책 29쪽)
비슷한 형태의 질문을 한 번 해보자. 불법체류자로 쫓기고 있는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와 한국의 중산층 여성 인텔리가 만나서 정신적 교감을 가지는 실화가 책으로 출판될 확률은? 혹은 한국 '농촌총각'과 결혼한 동남아시아 여성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판될 확률은?
아마 0.000001% 정도나 될까? 목수정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위화감은 목수정의 글 때문이 아니라 이런 류의 책이 만들어지는 기획이 먹혀들어 가는 현실때문이다. 어차피 목수정의 글은 책이 되었을 때 일정한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는 메리트가 있다. 그러나 잠깐 언급한 이주노동자와 한국의 여성 혹은 한국 '농촌총각'과 결혼한 동남아 여성의 이야기는 출판사가 기획할 만큼의 메리트가 주어질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행인에게는 기획 그 자체로 매우 정치적이다. 그리고 왠지 적응되지 않는 위화감이 계속 남는다.
목수정은 며칠 후 프랑스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녀는 또 다시 새로운 뭔가를 시작할 거다. 지금도 멋진 그녀가 앞으로 얼마나 더 멋진 모습이 되어 나타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장면 2 - 만남
어렵사리 '민노씨'와 만남이 이루어졌다. 행인을 보겠다고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 출판기념회 자리까지 찾아온 민노씨에게 어떻게 감사의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했다. 블로그에 대한 이야기, 촛불에 대한 이야기,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자신들의 이야기 등등. 물론 먼 길 가야하는 행인의 입장이 결정적으로 반영되는 통에 아쉽지만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했다.
처음 만남이라고는 하지만 처음 만남같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쩌면 행인만 느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블로그를 통해 계속 만나왔고 같이 말을 섞어왔던 터라서 그런지 처음만나 서먹하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거기엔 당연히 민노씨가 전혀 어색하지 않게 분위기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한 이유도 있다.
민노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것은 상당한 신뢰감이라는 거. 그 신뢰감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적어도 거창한 구호와 당위를 가지고 삶을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것들의 의미를 모른다거나 배제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것들을 전제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주가 된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오히려 민노씨는 이야기 내내 작은 것이라도 뭔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지라도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한걸음 한걸음 실천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뻥구라만 치고 앉아 있는 행인보다 백배는 낫지 않은가?
다음에 또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그건 뭐 그닥 부담이 들지 않는다. 어차피 또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마실가듯이 민노씨의 블로그를 들여다볼 거고, 이러저러하게 서로를 나눌 거고.
비가 살금살금 내려오는 덕수궁 돌담길 어름에 앉아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덕에 집으로 돌아오는 긴 시간이 그닥 피곤하지 않았던 듯 하다. 세상은 또 이렇게 새로운 인연을 슬며시 엮어놓으면서 돌아간다.
#. 예전에 썼던 글이고, 보존공간 이동 차원입니다. 관련글(#. 140. 141. 142. 이 글은 142)을 함께 옮길 필요(링크)때문에 마지막으로 함께 옮겨오는 겁니다. 이 글에 혹여라도 관심이 생긴 분이 계시다면 위 글들을 함께 읽어주시면 좋겠네요. 현시점에 맞게 보충하고, 추고합니다. 사려깊고, 약간은 괴팍한 블로그 친구 후딘과 2, 3시간 동안 새벽통화를 한 적 있었다. 그 대화를 정리한게 [대중 VS 시민, 블로그 민주주의]란 글이다....
행인님의 [일기, 080819] 에 관련된 글.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레디앙, 2008(13000원) 1. 글쓰기 목수정은 글을 참 예쁘게 쓴다. 그것도 재주다. 흥분한 듯 급하게 이어지는 나레이션에서조차 목수정은 단어 하나, 문장 한 구절을 곱게 정선해서 조립한다. 글을 참 예쁘게 쓰는 사람 하나를 더 알고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 김진숙 지도위원의 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