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공영방송, 민주주의
marishin님의 [과정, 원인을 무시하는 결과론자들] 에 관련된 글.
애초 하고싶었던 말을 marishin님이 얼추 다 해주셨기에 걍 입닥치고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KBS 문제를 거론하기에는 감정적인 부분이 좀 있었고, 거기 더해서 몇 년 전에 있었던 대형사건의 트라우마가 입을 열지 못하게 하는 점도 있었다.
몇 년 전 사건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노무현 탄핵사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손을 잡고 취임 1년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무현을 탄핵하겠다고 나섰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더랬다.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탄핵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탄핵=반민주, 탄핵반대=민주" 혹은 "친노=민주, 반노=반민주"라는 희안한 논리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이 당시, 행인은 이 논리자체가 부당전제의 오류인데다가 노무현은 사실상 탄핵대상이므로 탄핵반대투쟁을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주제로 노무현 탄핵을 주장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가 왕따당했다.
탄핵사태와 이어진 2004년 총선에서는 헌재의 기각결정을 유도하기 위해 열우당 의원들을 많이 당선시켜야 한다는 괴이한 논리를 가진 어떤 분에게 뒤통수를 쎄게 얻어맞은 일까지 있다. 당시 행인은 헌재가 아무리 기를 쓰더라도 노무현을 탄핵시키지 못한다고 주장했으나 행인의 뒤통수를 허벌나게 갈겨주신 그분께서는 탄핵이 무산되는 것만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계셨더랬다. 세월이 지나 올해 초에 이분이 메일을 주셔서 그 때 자신이 상당히 미안했다고 하시던데 그게 사과의 표현인지 뭐 어쩌자는 이야긴지 감이 잡히질 않아 그냥 쌩깠다.
암튼 이번 KBS 사태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이 묘한 위화감은 아무래도 2003~2004시즌을 뜨겁게 달구었던 그 탄핵의 추억때문인 듯 싶다. 정연주 퇴임을 반대하는 것이 공영방송을 지키는 길인가? 시위대를 비롯하여 이 사태에 관계를 가지고 있는 공영방송사수투쟁 대오의 사람들이 이런 논리를 들고 나오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물론 일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노무현을 지키는 일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중엔 여전히 정연주를 지키는 일이 민주주의와 공영방송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싶음 그러라고 하고 일단 패스. 재미있는 것은 여러 곳에서 튀어나오는 "공영방송"에 대한 논란을 보면 제각각 "공영방송"이라는 것의 의미를 달리 해석하고 있다는 거다.
이명박 부류의 경우, 이들은 "공영방송"을 "국정홍보처"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공영방송은 가물가물하던 먼 옛날, 영화관에서 상영 시작 전, "대한~ 뉘우스"하고 튀어나오는 그런 류의 홍보물을 내보내는 것일 뿐이다.
얼마나 좋았던가? "대한~뉘우스"라는 멘트 뒤에는 언제나 한 손에 망치들고 건설하면서 한 손에 총칼들고 나가 싸우는 전국민의 향토예비군화의 집단주의적이고 집산주의적 체제미화가 알흠답게 펼쳐진다. 거기엔 번쩍거리는 용접불꽃의 화려함이 건설한국의 발전상을 자랑하고 새마을 운동으로 잘 살게 된 농촌의 성장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랑 스러운 "대~한민국"의 "뉘우스"는 언제나 경애하는 지도자 박정희 각하의 명민한 영도와 밤잠 안 자는 헌신의 뒷바라지 덕에 가능하다는 것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때때로 논바닥에 앉아 바짓단을 걷어올린 채 밀짚모자 옆에 두고 막걸리를 빨고 계신 각하의 소탈한 모습도 보여준다. 물론 안가에 들어앉아 '도우미' 옆에 두고 시바스 리갈 빨고 계신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가끔 긴장된 배경음악과 함께 북한괴뢰도당의 남침야욕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역시, 잠시후 상영될 영화보다 더 스릴있고 흥분되는 경험이기도 하다. 영화관에서 본 땅굴은 왜 그리도 실감나던가? 야한 거 다 자르고, 쬐끔이라도 북한에 대해 온정적인 장면이 나오면 다 자르고, 이거 자르고 저거 잘라 귀 빼고 X 뺀 당나귀 같은 꼬라지를 만들어버린 검열로 누더기가 된 본프로그램 영화보다 적들의 호전적인 모습이 그대로 비춰지는 "대한~뉘우스!"가 더욱 박진감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이명박 부류가 원하는 것은 이런 거 아닐까? 맨날 잘나가는 대한민국과 이를 위해 노력하는 이명박의 얼굴만 비춰지는 방송, 이게 얘네들에겐 둘도 없는 "공영방송" 되겠다. 이러니 얘들보고 개념없다고 하는 거다. 세월이 지나 남들 다 먹는 나이 지들도 같이 먹었으면서도 개념은 70년대에 그냥 두고 온 칠칠맞은 인간들...
암튼 이런 개념발달장애를 겪고 있는 것들이 권력까지 쥐고 있는 덕분에 혼란은 가중되고, 이 혼란의 와중에 그래도 이 사면발이 같은 것들로부터 공영방송을 지키겠다고 여의도로 향하는 사람들의 심정에는 일단 동의한다. 그런데 그 담이 문제다.
공영방송이 어째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 중 뜬금없는 이야기에 대해선 트랙백을 건 marishin님의 글로 대체한다. 오히려 지금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의 와중에 행인이 자꾸만 발언을 미적거리는 것은 과연 "모든 연대는 아름답다"는 구호가 지금 이 상황에서 적실한 것인지를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삭발까지 한 KBS 노조에 대해, 이제 당신들이 선봉에 서서 이명박 정권의 방송장악음모를 분쇄해달라, 우리가 연대하겠다,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안에 있는 구성원들에게서 "공영방송"의 의미 중 "방송"보다 "공영"에 대한 가치를 쬐끔이라도 더 찾을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입장을 분명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좀 다른 이야기긴 한데, 여의도에 가면 최근들어 가끔 보이는 1인 시위가 있다. 바로 주공과 토공의 통합반대를 위한 1인 시위다. 그런데 그 1인시위를 볼 때마다 그들과 연대해야겠다는 생각은 커녕 좀 더 오지게 당했으면 하는 생각이 불뚝불뚝 든다.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가장 큰 이익집단으로 공공연하게 자리잡은 것은 다름 아닌 건설족이다. 부동산 값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정권마다 소리치지만, 경제위기상황이 닥치면 제일 먼저 하는 짓이 건설경기 부양이고 투기세력 조장이다. 그 덕에 언제나 당하는 건 서민이고 돈 버는 건 있는 넘들이었다.
그 와중에 토공과 주공은 과연 공기업으로서 "공공성" 혹은 "공영"에 대해 얼마나 책임감 있는 역할을 했나? 그 안에 속해있던 직원들, 땅장사 집장사로 떨어지는 떡고물에 만족하면서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입닥치고 가만 앉아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공공성"을 운운하면서 통합반대한다고?
똑같은 심정이 KBS를 바라볼 때도 드는 거다. 참세상 기사에도 간단히 언급된 바가 있는데, 거대 기업 KBS에 의해 벌어진 외주노동자 착취에 대해서 내부 구성원들은 얼마나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공영"의 취지에 맞게 떠들어 왔던가? 혹시 감사원이 지적한 것처럼 정규직 직원들에게 부여되는 각종 혜택과 임금인상에 안주하면서 "이대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KBS 올림픽 방송단의 분노에 찬 성명서를 읽으면서도 사실 감동이 되질 않는 이유도 여기 있다. 당장 돌아오고 싶지만, "국가기간방송이라는 공영방송의 임무 또한 그 무게가 적지 않음에 눈물을 머금고 취재, 제작에 매진"하겠다는 그들의 심정이 진실임을 믿고 싶다. 하지만 지금 진행되는 KBS의 올림픽 중계방송을 보면 그게 무슨 "국가기간방송이라는 공영방송"의 올림픽 중계인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방송을 보면서 성명서가 언급했던 "전두환 폭압정권의 국민우민화 정책, 3S 정책(sports, screen, sex)의 부활을 예감"하는 건 행인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방송국 앞에 몰려온 촛불들을 쓸어내야 한다고 했던 노조위원장에게 신임을 보내기도 어렵지만, 그걸 떠나서 도대체 "공영"이라는 주제와는 상반되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 구성원들을 보면서 "공영"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답답하다.
KBS사태는 발화점일 뿐이다. 이명박의 진짜 공격은 이제부터 시작될 거다. 그런 차원에서 KBS에 대한 관심과 개입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당위성이 위에 언급한 모든 찝찝함을 뒤로 접어두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도 인정한다. 다만 KBS가, 그리고 그 구성원들이 "공영"방송의 제 역할을 새롭게 정립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거다.
뒷문으로 들어온 정연주가 당당하게 정문으로 걸어나가는 것은 단지 정권이 바뀐 것때문이지 그가 "공영"방송의 "공공성"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다. (정연주가 검찰수사를 받을 짓을 했느냐, 정연주를 짤라내는 과정이 합법적이었느냐에 대한 논의는 패스한다. 지금 문제는 순전히 "공영방송"의 근간이 무엇이냐는 논의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