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질서
노사모 총회에서 노무현이 '헌정질서'를 이야기했단다. 재임기간 중 전 국민에게 한국에도 헌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노무현은 퇴임 이후에도 헌법에 관한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주변 사람들 역시 헌법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한다. 헌법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참 나 매번 헷갈린다.
노무현의 발언을 보면 아무래도 노무현이 현실정치의 전면에 다시 뛰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봉하'라는 이름의 재단법인도 만들겠다고 하고, 정치사이트를 개설해서 직접 소통을 하겠다는 의욕도 보인단다. 그리고 그 대망의 첫 장정이 아무래도 이번 노사모 총회가 된 듯 하다. 뭐 정치를 하던 말던 그거야 지 개인사정이므로 뭐라고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기왕 정치를 재개하려면 원로대접 받으면서 국정전반에 걸쳐 감놔라 배놔라 하지 말고 딱 봉하마을 이장이나 했으면 좋겠다.
노무현이 "헌정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은 좀 우습다. 그 스스로 이라크 파병을 단행했고,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는 한편 평택으로 미군의 전진기지를 옮기는데 몸빵까지 했더랬다.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국제평화의 원칙을 정면으로 깨버린 행위다. 뭐 이거 뿐만이 아니다. 한미 FTA추진으로 실질적 개헌의 상태를 만들어버렸던데다가 이에 반대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원천봉쇄라는 방법으로 막아버린 전력도 있다. 다분히 현존하는 경제분야의 헌정질서를 무력화시키고 시민들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행위를 했더랬다.
시민사회의 의견을 개무시하는데 탁월한 추진력을 보였던 노무현이 "시민주권"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왠지 어색하다. 노무현은 "시민주권"을 이렇게 표현한다.
"제가 말씀드린 시민주권시대라는 것은 시민이 주권자이고 그 주권을 현실 속에서 행사할 수 있는, 그래서 정치인들이 명실공히 주권자의 뜻을 받들면, 그것이 그가 처음 세웠던 뜻과 항상 함께 갈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바로 시민주권시대"
말은 그럴싸 하다. 그러나 저 "시민주권"을 아예 원천봉쇄했던 자가 바로 노무현이다. 과거에 그랬으나 앞으로는 잘 하겠다는 소린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 잘 할 싹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데에 문제가 있다. 노무현이 자기 입으로 이야기한 "헌정질서"가 자기 입으로 이야기하는 "시민주권"과는 맥락이 닿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촛불집회와 청와대 방면 행진 및 정권퇴진구호와 관련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청와대로 행진하는 그거요. 저도 청와대에 살아봤는데, 그거요 겁은 안 나고 기분은 되게 나쁘고 그리고 별 소득이 없어요. 저는 청와대로 행진하는 그건 안 했으면 좋겠어요.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쇠고기 협상, 아무리 잘못됐다 할지라도 그 일로 정권퇴진을 그 진짜로 그냥 말로 한 번 해보는 거는 괜찮은데 진심으로 믿고 밀어붙이는 것은 우리의 헌정질서의 원칙에서 맞지 않습니다. (중략) 그래서 말로 한 번 해보시는 것은 괜찮은데, 진짜 되는 줄 알고 올인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결코 민주주의 질서 속에서 바람직한 일도 아닙니다."
"시민주권" 이야기하는 사람이 지금 시민들이 왜 72시간 텐트농성까지 하면서 촛불을 들고 청와대로 행진하는지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한듯한 이야기를 하면 곤란해진다. 시민들이 지금 단지 "쇠고기 협상" 하나때문에 정권퇴진 구호까지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노무현이 몰라서 이러는 걸까? 둘 중의 하나다. 노무현이 진짜 무식해서 몰랐거나,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쌩까고 왜곡하는 것이거나.
전자라고 보긴 어렵다. 노무현, 그렇게 돌탱이는 아니다. 그럼 결론은 두 번째. 이런 왜곡을 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만일 이 부분에서 노무현이 현재 촛불집회의 양상에 대해 인정하고 정권퇴진 구호에 대해 긍정할 경우 자신이 재임할 당시 정권에 대하여 비판한 사람들의 행위를 그대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외면했던 "시민주권"을 이제 와서 자신의 향후 정치테마로 선언하는 노무현을 보면서 물론 무현교도들은 박수와 환호로 환대한다.
게다가 민주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정권에 대해 리콜을 요구하며 퇴진구호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헌정질서의 원칙에 부합하는 일이다. 민주주의 질서 속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노무현의 발상대로라면 "헌정질서"와 "민주주의 질서"를 위해서 국민소환제는 도입하면 안 된다는 희안한 논리가 성립한다. 이렇게 되면 "시민주권"은 걍 개뿔따구같은 소리가 되버리고...
사실 노무현이 "시민주권" 운운하면서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는 절대추종세력이자 정치자산인 자신의 신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무현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부정하는 이야기를 함에도 이에 대해 비판하긴 커녕 감격에 겨워 몸을 떤다. 링크를 건 글에 달린 덧글을 보면 가관도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다. 어떤 신도는 아예 노무현이 싸우지 말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보고 가야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라며 노무현의 혜안에 감복한다. 성령감화가 예배당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다.
정작 노무현이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점은 시민사회의 역동적인 정치참여를 왜곡하게 된다는 점이다. 노무현이 이따위 소리를 씨잘데기 없이 늘어논다고 해서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동력이 급속히 빠지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신도들 중 상당수는 "청와대진격은 하지 말자"고 뻗대면서 "헌정질서"를 구호로 내세울지도 모르겠다만.
어쨌든 노무현은 자신의 권위를 동원해서 시민사회의 정치적 의사표시를 "헌정질서"안에 가두려 한다. 더 정확하게는 그 "헌정질서"라는 미사여구로 치장된 현행 법질서를 해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민"의 존재를 위치지우려 한다. 그런데 노무현의 이런 발상은 어청수가 이야기하는 "법대로"와 결과적으로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정치에 미련이 남아 있으면 걍 봉하마을 이장선거에나 한 번 나가보는 것이 노무현에겐 딱 맞을 것 같다. 얼마나 좋은가? 수준에 맞는 일 하면서 신도들로부터는 새로운 정치의 표본을 보여주었다고 칭송도 받을 수 있고. 아직도 노란 옷에 노란 모자쓰고 노란 풍선 흔들면서 "노짱"을 연발하고 있는 무현교 신도들 틈바구니에 서서 세상이 자신의 것인냥 착각하는 것은 철딱서니가 없는 일이다. 걍 봉하마을 이장이나 한다면 박수 세 번 쳐줄 용의가 있다.
아 ㅆㅂ 할 일도 많은데, 노무현 덕분에 헌정질서까지 걱정해줘야 한단 말이냐...
<조금 길어요 17분22초>Rev. 1.2에 관하여이번 갱신1.2판은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있었던 주요 강의 3개를 혼합하여 완성하였습니다. 노무현 님의 공개된 동영상 파일 중에서 시민주권에 관한 이론적 체계가 담겨져 있는 이 3개 파일은, 각각을 놓고 보면 동일한 주제를 두고 말하고 있지만, 각기 중요한 부분에 중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