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 폭발
나의 화분 2010/05/16 02:38오늘은 여러 가지 일정이 많이 있었지만 5.15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기념 수다회 "남성의 평화, 여성의 평화"에 갔다.
반가운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그동안 멀리 떨어져 있다가 친정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한 친구가 날 보더니 "이쪽 행사에서 본 것은 오랜만이네?" 한다.
내게 친근하게 말을 걸고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던지는 일종의 농담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난 10년간 안테나를 길게 빼고 예민한 상태로 살아오려고 했는데, 그러다보니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가벼이 들을 수 없게 됐다.
이쪽 행사에 내가 참석한 것은 오랜만이다는 의미...
바꿔 말하자면 나는 항상 저쪽 일로 바빠 보였다는 의미가 된다.
난 시간이 겹치지 않으면 병역거부 운동 관련 행사에 참여하려고 했었다.
요즘 '그쪽' 행사에는 항상 시간이 겹쳐서 못갔던 것 뿐인데, 어느새 평화운동이 이쪽, 저쪽으로 나뉘게 되었다는 말인가?
이쪽에 있는 사람은 이쪽 행사만 가고, 저쪽에 있는 사람은 저쪽 행사만 가는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래디컬한 대안을 꿈꾸고, 그 대안을 일상에서 이루며 사는 진보운동에 경계는 없다.
자신이 주로 에너지를 쏟고, 에너지를 얻는 영역이 있긴 하겠지만, 그 영역들을 이쪽, 저쪽으로 나눌 수는 없다.
또 일전에는 한 친구가 나보고 "아나키스트가 어쩌다 좌파가 되었니?" 하고 물은 적도 있다.
이 말도 역시 가볍게 듣고 넘기면 될 말이다.
굳이 진지하게 해석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하자면 피곤해질 뿐이지만, 나는 이런 말들 한 마디에 모종의 진실, 또는 생각의 중요한 단편 같은 것이 들어있을 것이라 여기는 편이기에, 그냥 넘기지 않았다.
저 사람은 좌파들이 헌신한 용산참사 현장에 있었는데, 아나키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왜 좌파와 어울리는 것일까, 뭐 이런 의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도 '편가르기'와 '이름붙이기'가 작용한다.
사람들은 편을 가르고, 서로 다른 것들이라고 하면서 (다른) 이름들을 붙인다.
빈곤한 상상력으로 사람들은 이것을 좌파라고 부르고, 다른 것을 아나키즘이라고 부른다.
누군가에게 이런 구분이 중요하겠지만,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게 더 중요한 것은 크로포트킨이 시베리아의 동물세계에서 발견한 "상호부조의 원리"가 용산참사 현장에서든 두리반 농성장에서든 보편적인 질서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투쟁의 현장에서 자본중심의 질서에 맞서 싸우면서 실제로 전혀 새로운 질서에 기반한 관계들을 확장시켜나가고 있다.
내가 현장에 몰입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실제로 체제의 모순에 맞서 투쟁하는 현장들에서는 지금 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원리, 즉 경쟁과 도태, 위계질서, 지배와 종속 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덜 작동하도록 만들고, 나아가 이런 원리들을 폐기처분하려는 노력들이 생겨난다.
나는 혁명의 가능성을 그런 노력들에서 찾는다.
병역거부 운동에서도 역시 남성 병역거부자들이 주체로 등장하면서 여성활동가들이 보이지 않게 된 점, 젠더에 따른 위계화 등이 문제가 되었고, 실제로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다.
기존 권력관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일상에서, 그리고 투쟁의 현장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야말로 내가 운동을 하는 의미이자 활력을 얻는 지점인 것이다.
나는 오늘도 녹음기를 챙겼다.
무겁기도 하고, 망원동 사무실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갔다 해야 하는 등 불편한 점도 많지만, 병역거부자의 날 기념 수다회를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이건 중요한 흐름이고, 행동하는 라디오를 통해 꼭 전체 내용을 전달하고 싶었다.
기록의 의미도 컸고, 또 지리적, 시간적 이유로 수다회에 오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중요한 내용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수다회라는 공간의 제약을 가능하면 넘어서고도 싶었다.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금 현재 우리에게 평화는 무엇인가 함께 고민해보는 자리가 되려면, 오늘의 수다회는 더 널리 퍼져야 한다.
자전거를 타고 환경재단 레이첼 카슨 홀에 도착해 녹음기를 켰다.
몇 년 전만 해도 자전거 유행이 불어 함께 자전거를 타곤 했던 친구들인데, 이제 그들은 자전거를 타지 않는 것일까?
봄날이고, 그리 멀지 않는 곳에서 열리는데 주변에 다른 자전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자전거가, 유행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4년 후에도 나는 계속 자전거를 타고 다니게 될까?
10년 후에도?
나는 아마 그럴 것이다.
두리반에서 만난 한 친구가 나보고 "마라토너" 같다고 했다(그는 날 존경한다고도 했다).
안다, 난 질기다.
세상엔 100미터 단거리 선수도 있고, 다양한 법인데, 그래 난 아마 철인 3종 경기를 뛰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다회 사회자가 내 녹음기를 가리키면서 "진보넷 라디오에서 녹음을 하고 있는데, 듣는 사람은 얼마 없(으니 그리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면서 수다회를 시작한다.
내가 얼른 '행동하는 라디오'라고 정정을 했다.
그러다 문득, 그냥 넘어가도 괜찮은 농담 비슷한 말이지만, 다시 두 마디 말들이 내 뇌리에 박힌다.
듣는 사람은 얼마 없다...
진보넷 라디오...
그래, 진보넷 블로그에서 들을 수 있으니 행동하는 라디오를 잘 모르는 사람은 진보넷 라디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그래, 별로 유명한 라디오도 아니니 듣는 사람이 얼마 없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
행동하는 라디오는 "용산참사 현장에서 시작했고, 기존 언론에 나오지 않는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지금도 줄기차게 투쟁의 현장에 달려가 연대하는 대안 미디어 운동"이라는 설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나는 왜 지금도 이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듣는 사람도 얼마 없다는데...
이런 자괴감이 몰아치다가, 열폭을 자제하기로 했다.
대신 (5월 27일부터 시작되는) 2010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는 '행동하는 라디오'를 사람들이 많이 보길 바란다.
매일매일 지겹도록 반복되는 이 일상의 혁명이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난 후 얼마나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나중에 사람들이 환호하며 깨닫게 될 것을 나는 잘 안다.
나도 그렇게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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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에너지.운동.우선순위.com
돕님의 [열등감 폭발] 에 관련된 글. 난 다양한 운동이 있고 각자 집중하는 분야가 다 다르고, 그래서 말하자면 운동에 이쪽저쪽이 있다고 생각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하고 싶은 운동이 많아. 결합하고 싶은 곳이 엄청 많아. 내가 잘 모르는 이슈들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많아. 하지만 내가 하는 것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고 어차피 몸이 하난데 다 할 수는 없는 거고. 사생활도 즐겨야 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얼마전에 만난 팔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