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다

떠남과 돌아옴 2010/02/23 14:58

여행이 거의 끝나간다.

3주 정도의 짧은 여행.

처음엔 엄청 길줄 알았다.

그 긴 시간 동안 뭘 하면서 지내게 될까 망설임도 많았다.

 

지금은?

더 길었으면 좋겠다.

이젠 적응도 된다.

인도의 음식도, 기후도, 분위기도, 사람들도 모두 말이다.

20루피를 내고 아침에 즐겨 먹는 남인도의 대표 음식 마살라 도사도, 30루피를 내고 먹는 찬단 레스토랑의 베지 버거나 채소 거리 입구에 있는 인심 좋은 식당(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음식을 나눠줌)에서 먹는 탈리 세트도 좋고, 가끔 배부르게 먹고 싶을 때 찾는 께샤리 레스토랑의 100루피가 넘는 정통 카레도 모두 좋다.

 

아직까지는 심심할 틈이 없다.

약간 지겨워지기 시작하면 여행을 끝낼 때가 되었다는 뜻일 수 있는데, 아직까지 한 번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서울이 그립다거나 돌아가고 싶다거나 하지 않았다.

하긴 겨우 3주 있었는데 뭘.

우쥬와 두유가 그립긴 하다.

같이 올 수 있었더라면.

 

투쟁과 결의와 목숨을 건 생활,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한숨 같은 것들이 지금 이곳의 내게는 없다.

'지겹다', '이제 그만 하고 싶다'는 말을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자주 했었다.

무엇이 그만 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이 그렇게 지겨웠던 것일까.

 

은영이 알려준 방법이 효과가 있었나보다.

좀더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됐다.

아침을 먹으러 가격도 저렴하고 음식맛도 괜찮은 찬단 레스토랑에 들렀다가 어떤 사람이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있길레 3번을 망설이다 앞에 앉아서 같이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흔쾌히 오케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보고 무슨 일을 하냐고, 자기는 가수라고 한다.

나는 너무나 반가워서 '나도 가수에욧' 라고 해버렸다.

저팬 팝을 한다는 그 친구는 일본에서 음반을 낸 친구인데, mp3로 자신의 노래를 들려준다.

목소리도 좋고, 직접 작곡했다는 노래도 훌륭하다.

자기는 록이나 R&B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난 내 음악이 어떤 음악인지 설명을 해야 할 때마다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대충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다.

음악에 관해서 아직 나는 내 언어를 찾지 못했다.

 

또 알렉스라는 러시아 친구도 만났다.

가트에 앉아 하루종일 e-book을 읽고 있길레 가서 말을 걸었더니 의외로 대화가 잘 통했다.

그 친구 역시 인도에서 현지인들에게 당한 것이 많아서인지 러시아가 그립다고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모스크바를 가게 되면 아마 연락을 하게 될 친구다.

모스크바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알렉스와는 다음날 아침에 같이 배를 타러 가기로 했다.

 

리투아니아에서 온 인드라와도 말을 텄다.

유럽에서는 언어적으로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던 리투아니아 어는 인도유럽어족의 고어인 산스크리트 어와 유사성이 많이 남아 있다고 설명을 해준다.

귀가 번쩍 틔였다.

어쩐지 완전히 백인 유럽인인 그 친구의 이름은 인드라라고 한다.

리투아니아 어의 많은 단어들이 산스크리트 어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니 정말 놀랄 따름이다.

신기하다.

바라나시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여행의 재미다.

 

인도, 네팔에서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노동을 한다.   

물건을 팔거나 바위를 깨거나 호객행위를 하거나 하루의 대부분을 그렇게 보낸다. 

가끔 구걸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돈을 달라고 조르고,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두 번 세 번 묻는다.

어떤 물건을 팔다가 다시 다른 품목을 가져와 판매를 하는 아이들도 있다.

 

모니카라는 아이에게서 엽서 한 장을 5루피에 샀다.

그의 언니 왈사도 엽서를 판다.

처음엔 한 장에 10루피를 부른다.

깎을라치면 5루피를 달라 한다.

가격이 그 아래로 내려가는 법은 없다.

아, 다른 아이에게서 황금사원과 화장터 등이 나온 엽서를 두 장에 네팔루피로 10루피를 주고 샀다. 

인도 루피로 따지면 엽서 한 장에 3루피 정도 준 셈이다.

내게 엽서 두 장을 판 그 아이는 네팔 루피가 인도 루피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네팔이나 인도나 같은 화폐단위로 루피를 사용하니까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흔쾌히 10 네팔루피를 받았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내가 그 아이를 속인 것인가?

 

인도와 네팔의 종속적 관계가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바로 화폐의 사용이다.

인도 루피는 네팔 전역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다.

환율은 1.6 : 1 로 항상 고정되어 있다.

반면 네팔 루피는 인도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마치 멕시코에서 미국 달러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반면에 멕시코 페소화를 미국에서 사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잠시 후 모니카가 오더니 도장가루를 사라 한다.

엽서는 장사가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새로운 품목을 가져온 것이다.

내 손에 모니카가 정성껏 도장을 찍어 예쁜 샘플 그림을 그려준다.

그림이 예쁜데, 마음이 아프다.

모니카는 4-5살 정도 되어 보인다.

짐짓 살 것처럼, 가격을 묻는다.

100루피란다.

흠칫, 그만한 돈이 없다.

 

모니카의 언니 왈사는 얼굴 표정이 항상 굳어 있다.

삶에 지친 듯, 고통이 묻어나는 얼굴이다.

그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다.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느낌일까?

그들 자매는 몇 년동아이나 길거리에서 장사를 해야 했을까?

항상 신경질적인 왈사가 내 앞을 떠난다.

6살 정도 돼보이는 왈사는 아마 3살 정도부터는 일을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누가 그들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시키는 것일까?

누구말대로 정말 그들을 조종하는 조폭이 뒤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가난이 그들을 내몬 것일까.

신문을 보지 않아도,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아도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비정규직 철폐, 기본권 보장, 용산참사 해결 등의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나를 보고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다.

인권활동가라고 대답을 했더니, 당신이 보기에 인도의 인권 현실은 어떤 것 같냐고 은근스레 나를 떠보는 것 같은 질문을 한다.

모니카와 왈사를 보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 비참한 현실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울창하던 밀림이 나무가 베이면서, 숲이 파괴되고 맨살이 드러나게 되면서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나면서 황폐해진 모습을 안나푸르나의 산중에서 보았었다.

주민들은 땔감으로 쓸 연료가 나무밖에 없다면서 지금도 연신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고 있다.

폐차 직전의 자동차와 버스가 뿜어내는 대기오염도 심각하다.

한국 같은 나라에서 이미 수명이 거의 다해버린 자동차 같은 기계를 폐기하는 대신 싼값에 인도와 네팔 같은 나라들에 파는 것이다.

폐차 비용도 절감하고, 돈도 버느 일석이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수명이 다한 지하철을 베트남에 팔았다면서 자랑스러워하던 지하철공사가 생각나 씁쓸했다.

네팔에서, 베트남에서 수명이 다한 기계가 뿜어내는 공해로 망가지게 될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일까?

폐기물을 팔았다며 좋아하는 자본주의가 역겹다.

 

여행이 끝나가긴 하나보다.

네팔과 인도에서 항상 웃던 내 모습은 서울에 돌아가게 되면 왈사처럼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미소를 짓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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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3 14:58 2010/02/23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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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니나 2010/03/19 03:02 Modify/Delete Reply

    그래도 그렇게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한껏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아. 배낭하나 짊어지고 세상을 살 수도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할 것인가... 그런 느낌이랄까.

  2. 2010/03/20 03:13 Modify/Delete Reply

    아, 여행을 또 가고 싶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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