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카라에 왔다
떠남과 돌아옴 2010/02/12 18:21버스를 8시간 타고 포카라에 왔다.
네팔에 오기 열흘 전까지만 해도 나는 포카라라는 도시에 대해 몰랐었다.
언젠가는 가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그 지역에 대한 관심은 아예 없었던 것이다.
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인도나 네팔에 대해 사람들이 말할 때 류시화나 박범신 같은 자들의 명상이니 관념론이니 하는 담론이 떠도는 것이 싫어서 그냥 귀를 닫아버렸었다.
그런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는 내 할 일이나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이 세상에는 인도와 네팔 말고도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2009년을 나는 그렇게 보냈던 것이다.
매일 철인3종 경기를 뛰는 것처럼 일을 했고, 새벽에 집에 들어가면 바로 쓰러져 정신 없이 잠을 자다 다음날 일정을 위해 또 달려나가는 식이었다.
몇 번이나 내 한계의 바닥까지 싹 다 비워낸 것처럼 느끼며 활동을 했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행복하다 믿으며, 외로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지내면서 매일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최소한 음식의 맛마저 느낄 여유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지내다 2010년 1월 20일이 지나고 나니 이제는 목숨을 그만 걸어도 될 것 같았다.
자신에게 너무나 잔인했다, 싶었다.
잔인하게 살아온 내게 포카라 같은 여행과 휴양의 도시가 머리 속에 각인될리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여행은 내 삶에 있어서 극적인 반전과도 같은 것이리라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저멀리 7천미터급 설산이 주르르 펼쳐져 보이는 멋진 호수의 도시 포카라에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고 당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곧 있으면 저 산에 온전히 날 맡기게 되겠구나!
어쩌면 눈 속에 파묻힐지도 모른다.
약간 늦게 도착하는 친구를 기다리며 나는 카트만두에서 그랬던 것처럼 포카라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한다.
이번에 보지 못하면 내 생애 다시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르는 길들과 사람들과 구석과 나무와 새들을 하나라도 더 또렷하게 기억으로, 그리고 사진으로 남겨놓고 싶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케줄을 짜고, 동선을 점검하고, 지도를 살피고, 가장 저렴하면서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교통수단을 물색한다.
지도는 최대한 각기 다른 축적으로 여러 개를 모아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오류에 대비하고 -- 물론 모두 무료로 얻어야 한다 -- 실제 도시의 모습과 수시로 비교해보며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한다.
날씨가 흐리고 간간이 가랑비가 뿌리는데, 나는 사랑코트에 오르기로 한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시작하기에 앞서 1,500미터쯤 되는 사랑코트는 미리 트레킹 연습을 하기에 최적인 장소다.
더불어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그리고 다울라기리 등의 설산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장소 아닌가.
그런데 구름이 이렇게 많이 끼니 좀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한다.
안개마저 온 도시를 휘감는다.
산 속에서 만난 아이들이 저마다 사탕과 초컬릿을 달라고 조른다.
줄 것이 없다.
그냥 마음만 받아주었으면 한다.
비가 내리는 근처 힌두 사원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꼬마 아이들 둘을 만났다.
영어를 아주 잘 하는 아이 하나와 시무룩한 아이 또 하나.
영어를 잘 하는 아이가 내게 볼펜이 있느냐고 묻는다.
잘 나오지 않는 모나미 볼펜 하나가 전부인데, 그것을 줄 수가 없다.
자기들은 근처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너무나 가난하여 학용품을 살 수조차 없다고 한다.
마음이 흔들린다.
주머니를 뒤져 잔돈을 그들 손에 쥐어 주었다.
15루피쯤 될까.
그들은 이 돈으로는 두 명의 볼펜과 공책을 살 수가 없으니 더 달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나는 잔돈이 없으니 더 줄 수 없다고 완강히 맞서보는데, 예배를 드리러 간다던 아이들이 나를 따라 산길을 정처없이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희들이 다니는 힌두교 사원이 어디냐고 물어보았지만, 손가락으로 저멀리를 가리킬 뿐 산 속에 도대체 사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배가 고프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마침 내 베낭엔 아침에 산에 오르기 전에 사둔 빵이 몇 개 남아 있었다.
커다란 비닐 봉지에 아무런 맛이 나지 않는 빵덩어리가 다섯 개 들어있는데, 놀랍게도 가격은 30루피였다.
역시 현지인들이 바글거리는 시장통에서 산 것이라 여행자들이 우글거리는 레이크 사이드와는 가격이 완전 달랐다.
레이크 사이드에서 샀더라면 최소한 100루피 정도는 주었어야 할 듯.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면서, 오늘도 하나도 먹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나 역시 빵덩어리 하나를 물에 씹어 먹은 것이 전부였던지 얼른 빵봉지를 꺼내 아이들과 같이 요기를 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내가 꺼낸 빵봉지를 본 아이들 표정이 굳어진다.
영어를 잘 하는 아이는, 그 빵은 싫다면서 먹지 않겠다고 하고, 말이 없던 아이는 역시 말없이 빵덩어리 하나를 건네 받더니 무심히 뜯고 있다.
헨델과 그레텔의 이야기에 나오는, 길거리에 조금씩 뜯어서 버리며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나 사용할 만한 저질 빵을 지금 나는 한 네팔 아이와 산 속에 앉아 먹고 있다.
그 빵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기는 하지만, 아마 그 아이 역시 다른 먹을 것이 있었더라면 먹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한 네팔 아이들조차 먹지 않으려 하는 싸구려 빵으로 안개가 자욱한 해발 1,200 미터 정도의 산 속에 앉아 배를 채우고 있다니, 나도 참 못말릴 인간이다.
결국 어떤 마을에 이르러 아이들은 사라졌다.
나는 우비를 쓰고 내리를 비를 맞으며 신발과 양말이 흥건히 젖도록 5시간 동안 열심히 산행을 했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사랑코트-카스키코트로 이어지는 7-8시간 가량의 종주 구간을 갈려고 했지만, 굵은 빗줄기 때문에 도저히 더이상 갈 수가 없다.
음력 설인 춘절 연휴가 중국은 9일이라고 한다.
한국은 올해 3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더니, 무척 놀라는 눈치.
비가 내리는 사랑코트에서 만난 사람은 산악 부족인 현지인들이거나 대부분이 중국인들이다.
게다가 서양인들은 차를 타고 정상 근처까지 오르는 사랑코트를, 중국인들은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폼나는 DSLR을 저마다 하나씩 목에 걸고 굳이 걸어 오른다.
같이 여행을 간 디디가 중국인 졸부들의 습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
새삼 이 세상의 빈부격차가 얼마나 대단한지 절감한다.
모든 것을 잊고 떠나왔어도, 도저히 눈 감을 수 없는 불평등한 현실이, 지금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끔찍한 빈곤과 아동노동과 환경파괴들.
아름다운 설산과 호수 이면에 가려진 포카라의 모습들이다.
곧 설날이다.
같이 여행온 친구들과 설 연휴는 트레킹을 하며 보내게 될 것 같다.
아무래도 근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