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감각해짐
평화가 무엇이냐 2004/11/13 03:48지난 번 자전거 사고가 났을 때 나는 크게 비명을 질러댔다.
자동차와 부딪힌 뒤 공중을 날아 땅에 떨어지며 나는 인간의 몸이 자동차 같은 기계덩어리에 비하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생생히 깨닫게 되었다.
후~ 하고 불면 날려 흩어져버리는 꽃잎들처럼 따뜻한 피가 흐르는 나의 몸은 그렇게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 아파서 나는 소리를 질렀다.
커다란 목소리로 나의 고통을 토로할 수 있었다.
오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롱초롱한 별빛들이 곧 쏟아질 듯 흘러내린다.
나는 문득
'저 자연도 자신의 아픔을, 고통을 큰 소리로 토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자연의 절규를 우리들이 그대로 들을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은 체제는 아예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목소리가 큰 자가 찍소리도 못내는 자를 마음대로 파괴하고, 이용해먹고, 착취하고는 오히려 더욱 으스대는 것이 지금의 체제이니까.
사실 자연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절규해왔고, 자신의 고통을 토로해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고통에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눈물을 흘려왔다.
특별히 감각이 뛰어나거나 예민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완전히 파괴되어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느끼고 있다.
그런데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가진자들, 권력자들, 자본가들, 유명인사들, 소위 인물들만은 이런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무제한적 이윤추구와 권력추구를 지상목표로 하는 이런 자들은 사회적 약자인 자연의 절규 따위에는 완전히 무감각해진 것이다.
그래서 투기 자본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부를 싹쓸이해가고,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범벅이 된 유전자 조작 쓰레기 농산물은 다국적 기업의 지휘 아래 지구 구석구석까지 점령하고 있는데, 시장 개방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농민들과 민중들에게는 국가의 휘두르는 공권력의 몽둥이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공공시설은 모두 이윤추구를 노리는 기업들에 의해 민영화되고 있고, 노동자들은 비정규직화되면서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조차 부정당하고 있다.
에너지 자원을 독점하려는 제국주의의 노골적 야욕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타나 수많은 무고한 민중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데, 이 빌어먹을 체제에 빌붙어 이윤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강자에게 아첨하는 꼬락서니는 한국만이 아니다.
이렇게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체제를 만들어 강요하고 퍼뜨리는 권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약자의 고통에 눈과 귀를 닫아버려야 하는 것인가?
무감각해지는 방법을 '지도자 수업'에서 가르쳐주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원래 권력자로 자라날 될성부른 아이들은 약자를 짓밟고 올라서는 적자생존의 체제에 아무런 저항감도 느끼지 못하고 자라나는가?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큰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감각하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는 나 나름대로의 방법을 잠깐 소개하면 이렇다.
평소 자신이 차를 타고 지나다니는 길을, 천천히 걸어다녀보라.
또는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곳이든 소나무 숲이 전해주는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이든 자연과 가까운 곳에 가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