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투표할 거냐고.
그런건 안한다고, 나는 다른 계획이 있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그건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없고 무책임한 행동'이라면서 핀잔을 주었다.
그 친구는 찍을 사람이 없더라도 투표는 하라고 조언해주었다.
나는 투표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지배자들을 싹 쓸어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지배자의 이름만 바꾸는 행동에는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국가기관의 하수인들에게 내 신분증을 까보이고 싶지도 않지만 그따위 거짓 민주주의 권리 행사를 통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 호출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내가 국민이 된다는 것은 이 사회의 수 많은 비국민(非國民) 구성원들을 배제시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수자들에게, 비국민 구성원들에게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한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십수년을 일하고도 여전히 시퍼런 강제추방의 폭력적 단속에 떨어야 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단 한 명이라도 이 땅에 남아 있는 한 나는 이 땅의 국민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손가락이 잘리고, 팔이 잘리는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미등록이라는 신분적 제한 때문에, 윽박지르며 임금체불을 일삼는 자본가 돼지들에게 조리있게 항의하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남아있는 한, 현대판 노예제도인 산업연수생 제도와 고용허가제가 완전히 철폐되고, 원하는 모든 이주노동자들이 합법화되어 노동비자가 발급될 때까지, 그리고 사람을 불법체류자로 만들어 무제한 노동착취를 하고 본국으로 강제추방해버리는 이 악랄하고도 차별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그대로 존재하는 한 내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주민등록증을 불태우고 자치를 선언한 팽성의 주민들이 황새울 논밭에서 단 한 명의 군인과 경찰들도 보지 않으며 그저 파릇파릇 성큼성큼 돋아나는 푸른 식물들과 함께 평화롭게 농사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이 땅에서 국민이라는 치욕스런 이름을 얻지 않을 것이다.
그날 나는 투표를 하느니 친구들과 6월 4일 대추리 평화집회 준비에 몰두할 것이며, 팽성의 주민들과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강제추방을 당하지 않도록 민중의 힘을 모으기 위한 실천행동을 펼칠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촛불을 들 것이고, 노래를 부를 것이며, 목이 아프도록 외칠 것이다.
그날 내가 원하는 세상과 비슷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표장으로 발걸음을 옮길 친구들에게도 한 마디 하고 싶다.
투표 용지가 6장이라고 하니까 원하는 후보와 정당에게 표를 던지고, 남은 용지에는 미리 필기구를 가져가 다음과 같은 구호들을 크게 적어주었으면 한다.
"모든 군대와 경찰은 평택을 떠나라!"
"새만금 방조제 당장 걷어내라!"
"비정규직을 철폐하라!"
"노동비자 쟁취하자!"
"중증 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인 제도 당장 도입하라!"
"한미 FTA 즉각 중단하라!"
"이건희와 최연희를 구속하라!"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
"또는 당신이 외치고 싶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