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바왐바와 아나키즘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4/11/02 03:02

오랜만에 첨바왐바 이야기를 읽으니 반갑군요.

 

* 이 글은 NeoScrum님의 [우리는 음악 밴드가 아니고 계급 전사들이다]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첨바왐바에 대해 그리고 음악운동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은 아나키즘에 대해서 몇 가지 짧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첨바왐바가 독립레이블에 소속되어 있다가 EMI라는 초국적 자본으로 옮아간 것은 '권력에의 욕망'이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첨바왐바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자신의 음악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그 욕망, 더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함께 음악을 느끼면서 더욱 널리 아나키즘의 이상을 전달하려는 그 욕망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죠.

촘스키의 저작들이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통해 팔리며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첨바왐바의 음악도 EMI를 통해 전 세계의 음악팬들에게 다가갔으니까요.

 

문제는 그 '더 널리 다가가고 싶은 욕망'에 있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아나키즘은 정확히 말하자면 '더 널리 다가가고 싶은 욕망'의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어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는 것은 더 유명해진다는 것이고, 더 많은 권력을 얻는다는 것이고, 더 많은 자본을 집중시킨다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한 번 권력에 다가가게 되면 그곳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정말이지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에요.

권위의 힘을 맛본 사람은 그 달콤함 때문에 그것을 놓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어떤 자리에 있는가가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하죠.

맑스도 그랬고, 사티쉬 쿠마르도 부처님의 예를 들어 그렇게 말하더군요.

 

첨바왐바는 그런 면에서 이미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린 것입니다.

그 선을 넘으려면 버려야 할 것이 있고, 새롭게 갖고 가야 할 것들이 있을 텐데, 아쉽게도 내가 보기에 아나키즘은 이들에게는 버려야할 대상이었던 것 같아요.

 

아나키즘은 작은 것을 추구하죠.

첨바왐바는 EMI를 선택한 순간부터 그것을 포기한 것 같아요.

 

그냥 작은 코뮨에서 친구들과 상호부조하면서 조용히 살면 될텐데 굳이 전 세계를 비행기타고 돌면서 공연도 하고 그러고 싶었을까요?

 

뭐, 음악은 여전히 흥겹고 신나며 가사에서도 여전히 민중성이 묻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해요.

힘있는 자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살면서 그런 음악을 접하는 기쁨도 소중한 것이죠.

그래서 저는 첨바왐바를 그냥 음악으로만 듣게 되었답니다.

그 이상 떠드는 것은 이들과는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요, 첨바왐바도 어차피 이젠 음악으로만 승부해도 될 정도가 되었으니까 아나키 어쩌구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해요.

 

동양에서 아나키즘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던 이유는 '상호부조'에 있었어요. 이것은 사회진화론의 '경쟁'과 대비되는 개념이죠.

상호부조의 정신은 아나키즘에서 핵심적인 개념이기도 한데요, 그것은 요즘의 '평화주의 아나키즘'과도 본질적으로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약육강식이 아니라 서로 평화롭게 돕는 것이죠.

다수와 소수, 강자와 약자를 선험적으로 전제한 개념이 '경쟁'이라면 상호부조는 아예 처음부터 차별이 없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염두에 둔 개념인 것 같아요.

폭력이나 전쟁이나 군대 등이 상호부조의 세상에서는 아예 들어갈 틈조차 없는 것이죠.

 

아나키즘에는 교조주의가 없는데, 어찌보면 그것은 당연한 것 같아요.

맑스 같은 위대한 별은 아나키즘 사상사에는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나름대로 아나키즘의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그 길 위에는 소위 아나키즘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궤적이 이미 나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조그만 강들은 그냥 흐르다보면 언젠가는 만나서 큰 강이 되어 흘러가게 되잖아요.

그러니 처음부터 큰 강물을 바라볼 필요가 없는 것이죠.

 

난 예를 들어 폭력이 지긋지긋하게 싫어서 비폭력을 내 가치로 두고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평화의 길이기도 하고, 상호부조의 길이기도 해요.

내가 걸어가는 그 길이 바로 톨스토이가 갔던 길이고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는 길이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신기했어요.

진정한 평화주의자는 모두 아나키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참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 같아요.

그저 방랑의 길, 순례의 길을 터벅터벅 걷는 것인데, 모든 사람들과 만나게 되거든요.

 

아나키즘은 나를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길이에요.

 

법률이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나키즘인데, 자신이 법 없이도 살아가니까 사회에서도 법률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법률은 욕심 많은 자들이 힘 없는 자들을 옭아맬려고 만들어낸 것에 불과해요.

감옥이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나키즘이죠.

군대가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나키즘이에요.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감옥이나 군대는 그저 무용지물이에요.

 

나의 삶이 자주적이고 창조적이면 감옥도 군대도 법률도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그 자리에 평화의 꽃이 피어날 거에요.

그렇게 되면 첨바왐바의 음악을 들으며 신나게 춤도 출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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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02 03:02 2004/11/0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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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eoscrum 2004/11/02 07:57 Modify/Delete Reply

    권력의 욕망.. 정말 아나키스트 다운 해석이시네요. ^^ 첨바왐바가 '아나키즘' 자체의 근본적인 원칙을 훼손한 거라고 보신거죠? 음.. 그런데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외에도 상당히 많은 종류의 아나키즘이 있잖아요. 바쿠닌처럼 전투적인 아나키즘도 있고... 아직 저는 첨바왐바 그들의 '진정성'은 믿고 있습니다. 다만, 저 선전방식에는 '전술적'으로 오류가 있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이 있는 거구요. '나와 길이 다르다'고 버릴 것이 아니라 비판과 토론을 통해 전술적인 오류를 집어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2. 아샬 2004/11/06 06:20 Modify/Delete Reply

    비판하는 게 바로 그 '권력의 욕망' 아닌가요? 그 부분에 대한 토론은 당연히 그 부분에 대해 누군가가 다시 언급을 할 때 이뤄지겠죠.
    약골씨가 저와는 전혀 다른 입장이긴 하지만, 뭐 권력의 욕망이란 비판이 전혀 틀린 거라고 보기는 어려운 거 같은데.. 왜 이런 비판이 단순히 '다르다고 버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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