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졌다
나의 화분 2006/02/03 11:06넘어졌다.
드넓은 팽성의 들녘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살갗을 찢어버릴 듯 달려드는 매서운 바람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자전거를 몰고 대추리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서 따뜻한 곳으로 가야한다는 본능만이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새 숲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칼바람은 잦아들고, 고요한 숲에서는 생전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쉬이익 쉭, 치키칙쿡...
나무들이 떠는 소리인지 전선이 부딪히는 소리인지 어떤 동물의 신음소리인지 그도 아니면 귀신의 울음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서울, 안양, 수원 등의 대도시를 자전거로 빠져나오면서 나는 이미 여러번 자동차와 충돌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터였다.
정신을 집중해 주위를 살피며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또다시 언제 자전거 사고가 날지 몰랐다.
특히 추운 날에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몇 시간을 타다 보니 몸이 뻐근하고, 다리가 아팠다.
평소 같으면 2시간이면 족한 거리를 쉬엄쉬엄 오다보니 3시간 반이 걸렸다.
평택에서 대추리로 향하는 한적한 길에 들어오니 비로소 맘이 조금씩 풀렸다.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세상은 검은색 망토를 뒤집어 쓴 듯 했지만 이 길은 자전거를 타고 자주 오가는 길이기에 내 손바닥 만큼 익숙했다.
자동차와 콘크리트 빌딩과 가로등에 시달리던 내 귀와 눈과 몸뚱이가 차츰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피로해진다는 것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콘크리트 빌딩에서 생활하며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육체에 귀신처럼 붙어다니는 천형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제쳐두었던 상념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유란 무엇인가.
평등이란 무엇인가.
왜 둘은 사이 좋게 공존할 수 없는 것인가.
난 자유와 평등 어느 한 쪽을 희생하지 않고도 둘 모두를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평화는 자유와 평등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자유를 위해서는 평등을, 평등을 위해서는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고 설교해왔지만, 민중들이 자유와 평등을 고루 누리는 평화로운 세상은 가능하다.
그런 세상을 나는 몇 곳 알고 있다.
자유는 가난할 때 생겨나고, 평등은 서러움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가난하고 서러운 민중은 가장 자유로울 수 있고, 가장 평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자전거를 오래 탔지만 그냥 아무도 없는 길에서 저혼자 넘어지긴 처음이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추위에 너무 떨어서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길에서 새벽 3시가 가까운 시각에 자전거를 타면서 내가 자유니, 평등이니 귀신 씨나락 까먹는 상상에 정신을 빼앗겨버렸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넘어지며 체인이 빠진 자전거는 내동댕이쳐져 있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대추리는 아직 멀었는데, 멀리 보이는 미군기지와 그 옆 초라한 마을의 불빛은 희미한데, 나는 너무나 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곁에 누군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따스함이 그리웠다.